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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최근 글</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link>
<description>A Korean Anglican Theology & Liturgy Forum</description>
<language>en</language>
<pubDate>Fri, 30 Jul 2010 15:57:03 +0000</pubDate>

<item>
<title>viamedia on ""치유 예식이 있는 성찬례"에 대하여"</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7#post-1070</link>
<pubDate>금, 30 7월 2010 11:16:09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70@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ochlos / 신부님의 '치유 예배' 보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덕택에 저도 이리저리 더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이 논의를 촉발하신 것입니다. 대단히 깊이 고민하셔서 예식문까지 제공해 주시니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60;/p&#62;
&#60;p&#62;번호를 매겨 쓰신 신부님의 고민에 대해서 그 번호에 따라 몇 마디 거들겠습니다. 좀 더 깊이 이 아름다운 성사를 나누기 위한 고민의 확장으로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60;/p&#62;
&#60;p&#62;RE: 1.&#60;br /&#62;
성찬례 자체가 곧 '치유의 성사'인 점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무엇보다도 성찬례의 중요성이 훼손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주객전도라 하겠습니다. &#60;/p&#62;
&#60;p&#62;성찬례 2형식(성찬기도 5양식)은 특수한 상황에서 성찬례 전반을 매우 짧게 만든 형식인데, 그 신학적인 의미가 풍요롭지 않고 너무나 단순한 감이 있습니다. 신부님의 시도가 문제가 아니라, 성찬례 2형식 자체의 문제입니다. 길어질까 염려하셔서 2형식을 선택하시기보다는, '연도문'을 생략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60;/p&#62;
&#60;p&#62;RE: 6.&#60;br /&#62;
대체로, 그리고 전통적으로 안수 다음에 도유를 하는데, 그 순서를 달리 한 까닭은 무엇인가요? 별 이유가 없다면, 한 사람씩 안수 후 도유를 하는 것이, 하느님께 대한 청원(하느님의 치유하시는 어루만짐)과 그에 대한 확인과 징표(기름 부음-메시아/그리스도로 세우는 일, 하느님의 자녀로 확증하는 일, 하느님께서 치유하시어 바르는 약)로서 더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봅니다. (세례/견진의 경우. 물론 정교회 전통에서는 도유-세례-도유의 형식이 보편적입니다만.)&#60;/p&#62;
&#60;p&#62;'당신에게 안수합니다'(혹은 '너에게 안수하노라')는 형태의 예식문(cf.세례)은 서방 교회의 전형적인 '사제 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칫 성사 행위의 주체를 '사제'로 오해하도록 합니다(그 연원이 어디에 있든지). 흥미롭게도 정교회의 세례 예식문을 보면 '사제'를 그 행위의 주체로 내세우지 않습니다(&#34;하느님의 종 아무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34;). 제가 번역하여 올린 뉴질랜드 기도서의 경우는 이런 부분이 없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60;/p&#62;
&#60;p&#62;게다가 &#34;당신에게 안수합니다&#34;라는 경어체를 &#34;내가 안수하노라&#34;는 말로 대치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떤 점에서 그 예식이 갖는 중요성을 어떤 사목적인 권위로 드러내려는 의도로 보이고, 신자들은 이러한 외적인 '권위적 표현'을 통해서 더 큰 힘을 느끼는 경우가 많으니, 하나의 사목적인 배려로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위의 '사제 중심적'인 형태로 비치거나 그것을 강고히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합니다. 우리말 성경이나, 기도서에서 권위를 드러낼 때 대체로 '반말'을 쓰고 있는데, 매우 잘못된 문화적 관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는 '반말'에 대한 제 사적인 편견일 수도 있습니다.&#60;/p&#62;
&#60;p&#62;RE: 8.&#60;br /&#62;
제 경험으로는, 대체로 모든 사람이 함께 안수하는 것에 참여하는 '전례적 행동'이 안수와 도유의 순간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의도하시는 바는 아니었겠으나, '눈에 띄는 육체적 치유'에 대해 불필요한 기대를 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치유 사건의 주체는 하느님이시요. 그 사건의 신비는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60;/p&#62;
&#60;p&#62;다시 한번, 신부님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viamedia on "번역:  [지면 논쟁 연재] 성경은 동성애에 반대하는가?"</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6#post-1069</link>
<pubDate>금, 30 7월 2010 10:20:50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69@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Eolyot / 수고로운 번역에 기대어, 많은 이들이 논쟁적인 사안에 대한 이해를 넓혔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수고에 고마운 인사를 드립니다.&#60;/p&#62;
&#60;p&#62;이런 논의를 통해서 무지에 따른 편견에서 벗어나 &#34;혼돈&#34;으로 들어서는 일은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편견이 '명쾌'와 동의어로 남아 있는 한, 좀 더 깊은 차원의 '명쾌'한 이해는 요원한 일이니까요.&#60;/p&#62;
&#60;p&#62;한편, 이 짧은 지상 논쟁으로 문제되는 현안인 '동성애와 성서'를 다 풀이할 수 없지만, 논의의 흐름은 드러난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지면 논쟁'이니 어떻게 논의가 진행되는지, 제대로 비판하거나 반박하고 있는지, 그 근거들이 분명한 지를 살피면, 논쟁을 통해서 배울 점이 많을 것입니다. &#60;/p&#62;
&#60;p&#62;어쨌든 흥미로운 점 하나는 이 네 편의 글로만 제한해서 본다면, 성서를 통해서 '현재의' 동성애를 반박할 수 있는 근거는 별로 없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존 리차드슨의 글은 어이 없게도 스스로 '문제를 회피하는 글'이 되었고, 근거나 논리에서 가장 위약한 글이 되었습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Elyot on "번역:  [지면 논쟁 연재] 성경은 동성애에 반대하는가?"</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6#post-1068</link>
<pubDate>목, 29 7월 2010 23:36:42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68@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감사합니다. 저도 요즘 이것저것 읽고 알아 가면서, 명쾌해지기보다는 갈수록 혼돈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ochlos on ""치유 예식이 있는 성찬례"에 대하여"</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7#post-1067</link>
<pubDate>목, 29 7월 2010 14:24:19 +0000</pubDate>
<dc:creator>ochlos</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67@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지난 수요일 치유성찬예식문을 올려봅니다.&#60;/p&#62;
&#60;p&#62;1. 성찬례 예식문은 2형식(5양식)을 기본으로 하였습니다. 죄의고백을 1965년 예비기도로 사용하려 하였으나 더 숙고한 후에 시도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양식 성찬기도를 선호하는 편이나 시간에 쫓기지 않을까하는 인간적인 염려가 있었습니다.&#60;/p&#62;
&#60;p&#62;2. 특정문은 성공회기도서의 '치유를 위한 기원'을 사용하였습니다.&#60;/p&#62;
&#60;p&#62;3. 본기도는 성공회기도서의 '치유' 부분을 사용하였습니다. &#60;/p&#62;
&#60;p&#62;4. 제의색깔은 교회력에 맞추어 녹색을 선택하였습니다. 기도서의 본기도 부분을 보면 '자색'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60;/p&#62;
&#60;p&#62;5. 치유축복문은 &#34;축복기도서(1999, 성공회출판부)&#34; 92쪽 '공기도 때의 병자치유 축복'을 사용하였습니다. 연도문이 다소 길게 나열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60;/p&#62;
&#60;p&#62;6. 안수와 도유는 도유 후 바로 이어서 안수기도를 하였습니다. 예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은 제대 앞으로 나와서 둥글게 서고, 한명씩 안수기도를 하였고, 참석자들은 기도받는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원래 축복문에는 '당신에게 안수합니다'로 된 것을 '너에게 안수하노라'로 바꾸었습니다. 안수기도문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날 예식에 참석한 남녀노소 모두 안수를 받았습니다. 몸의 치유를 필요로 하는 몇명을 위한 미사라기 보다는 회복과 생명력을 얻기 위한 미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안수가 진행되는 동안 잔잔한 음악을 사용하였습니다.&#60;/p&#62;
&#60;p&#62;7. 주 신부님께서 올려주신 뉴질랜드 치유 사목예식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특히, 성령임재기원을 포함한 부분이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60;/p&#62;
&#60;p&#62;8.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엄숙하고 따듯하였고, 서로를 위해 안수기도 하면서는 눈시울을 붉히는 교우님도 계셨습니다. 다리가 많이 불편하는 어르신도 참석하였는데, 눈에 띠는 육체적 치유가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기도를 받고 나서 진심으로 감사하셨습니다. &#60;/p&#62;
&#60;p&#62;9. '치유예식이 있는 성찬례'는 예식문에 구애 받지 않는 즉흥적인 기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구체적인 신체적 질병의 문제를 갖고 온 신자를 위해서는 그에 맞는 기도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60;/p&#62;
&#60;p&#62;10. 치유예식과 성찬례에 함께 하신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60;/p&#62;
&#60;p&#62;-----------&#60;/p&#62;
&#60;p&#62;치유성찬례&#60;/p&#62;
&#60;p&#62;1. 입당성가 /       성가 498장&#60;/p&#62;
&#60;p&#62;2. 죄의 고백&#60;br /&#62;
✝ 주께서 말씀하시길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인 됨을 인정하고 고백하여 주님의 용서를 받읍시다.&#60;/p&#62;
&#60;p&#62;    (잠시 묵상한 후 아래 기도를 한다.)&#60;/p&#62;
&#60;p&#62;✝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는 이들을 용서하시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60;br /&#62;
◉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60;br /&#62;
✝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60;br /&#62;
◉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60;br /&#62;
✝ 우리의 중보자로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시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60;br /&#62;
◉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60;br /&#62;
✝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시어, 모든 죄를 ✠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 아멘&#60;/p&#62;
&#60;p&#62;3.  오늘의 본기도&#60;br /&#62;
✝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60;br /&#62;
◉ 또한 사제와 함께 하소서.&#60;/p&#62;
&#60;p&#62; ✝기도합시다.&#60;br /&#62;
생명과 건강을 주시는 하느님, 고통 중에 있는 주님의 종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시고 치유의 은총을 베푸시나이다. 구하오니, 몸과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낫기를 원하는 신자들을 돌아보시어 그의 연약한 육신과 영혼을 강건케 하시고, 주님의 보살핌에 대한 굳은 확신을 갖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으로서 이제와 영원히 살아 계시고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하나이다.&#60;br /&#62;
◉ 아멘&#60;/p&#62;
&#60;p&#62;4. 1독서     (이사야 53, 3-5)&#60;/p&#62;
&#60;p&#62;5. 복음서     (마태오 26, 26-30 36-69)&#60;/p&#62;
&#60;p&#62;6. 설교  / Sermon  &#60;/p&#62;
&#60;p&#62;7. 신앙고백 / 사도신경 Apostles' Creed&#60;/p&#62;
&#60;p&#62;8. 치유연도문&#60;br /&#62;
✝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성부 하느님,&#60;br /&#62;
◉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60;br /&#62;
✝ 우리로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성자 하느님,&#60;br /&#62;
◉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60;br /&#62;
✝ 우리의 몸을 주님의 성전으로 삼으시는 성령 하느님,&#60;br /&#62;
◉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60;br /&#62;
✝ 우리로 주님 안에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게 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60;br /&#62;
◉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60;/p&#62;
&#60;p&#62;✝ 믿음으로 주님께 나오는 이들을 치료하시며, 제자들을 보내시어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병든 자를 치료하게 하시는 성자 그리스도여,&#60;br /&#62;
◉ 주님의 백성을 온전케 하소서.&#60;br /&#62;
✝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불구를 고치시고,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이여,&#60;br /&#62;
◉ 주님의 백성을 온전케 하소서.&#60;br /&#62;
✝ 우리를 치료하시는 양약이시며, 영생의 보증이 되시는 거룩하신 이름 주 예수 그리스도여,&#60;br /&#62;
◉ 주님의 백성을 온전케 하소서.&#60;/p&#62;
&#60;p&#62;✝ 주여, 비오니,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의 은총을 내리사, 병든 이를 건강케 하시고, 상처와 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인내와 용기와 믿음을 더하소서.&#60;br /&#62;
◉ 주님의 백성을 치료하소서.&#60;br /&#62;
✝ 병든 어린이에게 신속한 치료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두려움 없는 확신을 허락하시고, 수술에 임하는 이들에게 주님의 강한 손이 함께 하심을 깨닫게 하소서.&#60;br /&#62;
◉ 주님의 백성을 치료하소서.&#60;br /&#62;
✝ 오랜 질병으로 지친 이들에게 힘을 더하시고, 독수리 날개 타고 올라가듯이 소망으로 인도하시며, 지속적인 아픔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이들을 위로하시고 성령이 주시는 상쾌함을 허락하소서.&#60;br /&#62;
◉ 주님의 백성을 치료하소서.&#60;br /&#62;
✝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단잠을 허락하시어 원기가 넘치게 하시고, 간호할 사람도 없이 외로움과 낙심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주님이 함께 하소서.&#60;br /&#62;
◉ 주님의 백성을 치료하소서.&#60;br /&#62;
✝ 정신적인 고통 속에 방황하는 이들에게 정신의 건강과 마음의 안정을 허락하시며, 질병의 고통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용기와 소망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60;br /&#62;
◉ 주님의 백성을 치료하소서.&#60;br /&#62;
✝ 모든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바른 지식과 능숙함과 인내심을 풍성히 내리사, 병든 이를 치료하고 보살피는데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질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을 당신의 선하신 영으로 인도하소서.&#60;br /&#62;
◉ 주님의 백성을 치료하소서.&#60;/p&#62;
&#60;p&#62;✝ 기도합시다. (침묵)&#60;br /&#62;
    모든 생명과 건강을 주시는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이 병든 세상에 내려오시어 주님의 자녀된 우리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모든 병든 자와 그들을 치료하는 이들에게 강복하사, 그들이 육신과 마음의 건강을 회복한 후에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당신께 감사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60;br /&#62;
◉ 아멘&#60;/p&#62;
&#60;p&#62;&#38;lt;자리에서 모두 일어선다.&#38;gt;&#60;/p&#62;
&#60;p&#62;9. 도유와 안수&#60;br /&#62;
✝ 세상의 구원자이시여, 십자가와 보배로운 피로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나이다.&#60;br /&#62;
◉ 주님, 겸손이 비오니, 우리를 구원하시고 도와주소서.&#60;br /&#62;
✝ 전능하신 주님, 하늘과 땅 위와 그 아래에 허리굽혀 경배하고 순종하는 모든 만물을 이끄시는 하느님, 이제와 영원토록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하늘 아래서 건강과 구원을 주는 이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신자로 하여금 깨닫게 하소서.&#60;br /&#62;
◉ 아멘&#60;/p&#62;
&#60;p&#62;&#38;lt;안수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한명씩 제대 앞으로 나온다.&#38;gt;&#60;/p&#62;
&#60;p&#62;✝ (아무), 나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너를 지켜 주시고 너의 삶을 은총으로 채워주시며, 주님의 사랑의 치유능력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며,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에게 안수하노라.&#60;br /&#62;
◉ 아멘&#60;/p&#62;
&#60;p&#62;10. 평화의 인사&#60;br /&#62;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고치시는 의사가 되시니,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면 우리에게 참된 평안과 건강을 주십니다. 주님 안에서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를 누립시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60;br /&#62;
◉ 또한 사제와 함께 하소서.&#60;br /&#62;
✝ 서로 평화의 축복을 나눕시다.&#60;/p&#62;
&#60;p&#62;11. 봉헌  /     성가 570장&#60;br /&#62;
✝ 우리의 연약함을 고치고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주여, 병든 몸과 마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소서. 또한 주님을 의지하며 드리는 이 예물을 인자로이 받으소서.  ◉ 아멘&#60;/p&#62;
&#60;p&#62;12. 성찬기도 &#60;/p&#62;
&#60;p&#62;13. 주의 기도&#60;br /&#62;
✝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기도합시다.&#60;br /&#62;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니다. 아멘&#60;/p&#62;
&#60;p&#62;14. 성체 나눔과 영성체&#60;br /&#62;
✝ 우리는 이 빵을 떼어 주님의 성체를 나눕니다.&#60;br /&#62;
◉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룹니다.&#60;br /&#62;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여기 계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60;br /&#62;
◉ 주여, 주님을 내 안에 모시기를 감당치 못하오니,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60;/p&#62;
&#60;p&#62;15. 성체성가(앉는다) / 성가368장&#60;/p&#62;
&#60;p&#62;16. 영성체 후 기도&#60;br /&#62;
✝ 자비로우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을 치료하는 약으로 성체성사를 주셨나이다. 비오니, 이 성사의 은총으로 우리 영혼의 모든 병을 고치사 강건케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 아멘&#60;/p&#62;
&#60;p&#62;17. 축복기도&#60;br /&#62;
✝ 우리 몸과 영혼의 의사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은총으로 우리를 강건하게 하시며, 전능하신 하느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여러분에게 강복하소서.&#60;br /&#62;
◉ 아멘&#60;/p&#62;
&#60;p&#62;18. 파송 성가       성가 567장&#60;/p&#62;
&#60;p&#62;19. 파견 선언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nagio99 on ""치유 예식이 있는 성찬례"에 대하여"</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7#post-1066</link>
<pubDate>수, 28 7월 2010 20:19:47 +0000</pubDate>
<dc:creator>nagio99</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66@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34;치유 예배의 성사적 특징 가운데 중요한 한 차원은 '손이 닿아 어루만지는 일'입니다.&#34;는 의미심장합니다. 비교적 소공동체 모임에서 그 친밀감과 신뢰감 속에 집전되는 치유 예식은 분명히 영성 상담의 Verbal한 접근과는 또 다르게 깊은 울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ochlos on ""치유 예식이 있는 성찬례"에 대하여"</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7#post-1065</link>
<pubDate>수, 28 7월 2010 17:56:44 +0000</pubDate>
<dc:creator>ochlos</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65@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신부님과의 대화와 나눔을 통해서 행복함과 더불어 근원을 알수없는(?) 치유와 회복의 기운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viamedia on ""치유 예식이 있는 성찬례"에 대하여"</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7#post-1062</link>
<pubDate>수, 28 7월 2010 09:55:52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62@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작년부터 트위터를 이용하는데, 우리 성공회 신부님들을 가끔 뵙니다. 그분들 가운데, 원주 교회(대전교구)에 계신 국충국 신부님께서 &#34;Healing Eucharist&#34;에 대한 궁금증과 고민을 던져 주셨습니다. 그 이후 오간 대화를 잠시 여기에 옮겨 놓고, 이에 대한 대화의 장을 마련하려고 몇 마디 보탭니다. 참여와 대화 부탁합니다.&#60;/p&#62;
&#60;p&#62;&#60;strong&#62;차례&#60;/strong&#62;&#60;br /&#62;
트위터 대화의 내용&#60;br /&#62;
요약&#60;br /&#62;
의미의 확장&#60;br /&#62;
전례 색깔&#60;br /&#62;
성찬례에서 위치&#60;br /&#62;
안수하는 방법&#60;br /&#62;
도유하는 방법&#60;br /&#62;
안수와 도유 이후&#60;br /&#62;
성찬의 전례와 영성체&#60;/p&#62;
&#60;p&#62;&#60;strong&#62;트위터 대화의 내용&#60;/strong&#62; (주: 트위터의 성격 상 대화가 곧바로 대응하지 않으니, 맥락을 따라 읽으셨으면 합니다.)&#60;/p&#62;
&#60;p&#62;cookcg (국충국 신부)&#60;/p&#62;
&#60;p&#62;Healing Eucharist 가 뭔가요? 치유 은사집회 같은 것인가요? 다른 나라 교회를 보니, 일 주일에 한 번은 Healing Eucharist 가 있던데, 궁금합니다. 치유기도를 포함한 미사? 도유? 혹은 안수?&#60;/p&#62;
&#60;p&#62;주중에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모든 미사 참여자에게 안수기도를 통한 치유와 회복의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는 service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품식때만 할 것이 아니라...&#60;br /&#62;
(8:42 AM Jun 8th)&#60;/p&#62;
&#60;p&#62;viamedia (주낙현 신부)&#60;/p&#62;
&#60;p&#62;@cookcg 교단/공동체 맥락에 따라 그 이해가 달라질 겁니다. '치유'에 대한 이해가 다르니까요. 성공회(미국)의 경우 주중에 치유 기도 예배나 미사를 드립니다. 한국에서 언뜻 떠오르는 '치유예배'와는 전혀 다릅니다.&#60;/p&#62;
&#60;p&#62;@cookcg 좋은 시도라 생각합니다. 설교(신경-생략 가능, 신자들의 기도) 후, 평화의 인사 전에 초대하여 이마에 기름을 바르며 안수하고 기도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함께 한 신자들도 모여 어깨에 손을 얹으며 참여하면 좋을 것입니다.&#60;br /&#62;
(3:43 PM Jun 8th)&#60;/p&#62;
&#60;p&#62;cookcg (국충국 신부)&#60;/p&#62;
&#60;p&#62;@viamedia 일전에 말씀드렸던 치유성찬례가 수요일 저녁에 있을 예정입니다. 특정문은 예식문에 있고, 병자치유 축복문은 '축복기도서'(윤바우로주교님)를 이용할 계획입니다. 제의 색깔은 어떤 것이 좋을까요?  &#60;/p&#62;
&#60;p&#62;@viamedia 치유성찬례는 그것에 맞게 죄의 고백 부분이 좀 더 강조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 공도문의 예비기도 부분에 있는 사제와 신자가 서로 주고받는 사죄기도가 적당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60;br /&#62;
(5:22 AM Jul 26th)&#60;/p&#62;
&#60;p&#62;viamedia (주낙현 신부)&#60;/p&#62;
&#60;p&#62;@cookcg 1. 성찬례 맥락에 두신다면 &#34;치유 예식과 성찬례&#34; 혹은 그와 비슷한 표기가 더 나을듯 하고요. '병자 치유'라고 부가 해석된 번역 제목을 피하고 '치유'라는 말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cf. BOS 1994.&#60;/p&#62;
&#60;p&#62;@cookcg 2. 한편, 전례 색깔은 통상 해당 절기에 따릅니다. 치유를 '조병성사'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의 맥락에 종속시키지 않고 '일상'에서 좀 더 넓게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에 따라 참회를 부각시킨다면, 자색을 쓸 수도 있겠습니다.&#60;/p&#62;
&#60;p&#62;@cookcg 3. 참회 예절은 필요에 따라서(사목자의 결정), 혹은 신자들의 요구에 따라서 사용할 수도 있겠으니, '예비기도'(1965)의 사용도 그 맥락에서 쓰기에 좋다고 생각합니다(현대 어투로 고치는 일 필요).&#60;/p&#62;
&#60;p&#62;@cookcg 4. 한편, 좀 더 배려할 부분은 '안수하며 기름을 바르는 일'입니다(위치는 설교와 평화의 인사 사이). 사제뿐만 아니라 참여자 모두를 초대하여 어깨에 손을 얹고 안수 기도에 참여토록 하고, 향이 좋은 기름을 쓰길 바랍니다.&#60;/p&#62;
&#60;p&#62;@cookcg 이후, 이 치유 예식에 대해 신부님의 생각과 준비 과정, 그 첫 시도와 실제를 [전례 포럼]에서 나누어 주셨으면 합니다. 많은 분들이 큰 배움을 얻을 것입니다. 저도 거기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덧붙이겠습니다.&#60;br /&#62;
(Mon Jul 26 2010 12:33:54 (PDT) )&#60;/p&#62;
&#60;p&#62;&#60;strong&#62;요약&#60;/strong&#62;&#60;br /&#62;
위 내용을 다시 정리하고, 대화를 위한 논의 점을 제공하기 위하여 몇 마디 덧붙입니다.&#60;/p&#62;
&#60;p&#62;치유 예식과 함께 하는 성찬례: 외국의 여러 성공회에는 이른바 &#34;치유 예배&#34;가 널리 퍼져 있습니다. 대체로 주중의 미사(성찬례)를 이 '치유'의 주제로 정례화한 것입니다.&#60;/p&#62;
&#60;p&#62;성공회의 '치유 예식'은 대체로 성찬례 맥락 안에 자리 잡고, 안수(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하는 행동)와 도유(기름을 붓거나 바르며 축복하는 행동)를 합니다. 도유가 성직 서품 성사나 조병 성사에만 제한되어버린 역사적 경험이 있으나, 다시금 다른 성사(세례/견진)와 더불어 치유 예배의 맥락에서도 쓰이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좋은 전통의 바른 회복이라 할 만합니다.&#60;/p&#62;
&#60;p&#62;한국 성공회 기도서(2004)의 '조병 예식'은 전통적인 '조병 성사'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치유 예배로 곧바로 적용하기에 불편한 점이 있지만, 부분적으로 생략하고 상황의 필요에 따라 부가하여 치유 예배를 구성하는 내용으로 쓸 수 있습니다.&#60;/p&#62;
&#60;p&#62;국충국 신부님께서는 대전교구에서 성공회 출판부를 통해 출판한 [축복 기도서](1999)의 '공기도 때의 병자 치유 축복'(92-99쪽)을 바탕으로 하고, 공도문(1965년) 미사 예비기도의 내용을 '참회 예절'로 부가하여, 치유 예식이 있는 성찬례를 구성하셔서 신자들과 함께 하겠다는 생각을 나눠 주셨습니다. 좋은 기획이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축복 기도서]는 대체로 미국 성공회 [사목 예식서](BOS, 1994)의 번역판입니다.&#60;/p&#62;
&#60;p&#62;&#60;strong&#62;의미의 확장&#60;/strong&#62;&#60;br /&#62;
기존의 '조병 성사'라는 전통적인 이해에서 구체적인 질병을 위해서만 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봅니다(이런 제한은 전형적인 서방 교회의 영향입니다. 동방 교회는 이런 제한을 거의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치유'는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고뇌, 생각의 혼란 등과 같은 심적인 무게를 함께 나누고, 하느님의 어루만지시며 고치시는 손길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치유 예식을 일상화하고 정례화하는 일은 의미가 큽니다. 안수와 도유도 이렇게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확대되면 좋을 것입니다. &#60;/p&#62;
&#60;p&#62;&#60;strong&#62;전례 색깔&#60;/strong&#62;&#60;br /&#62;
통상 해당 절기를 따릅니다. 치유는 일상적인 삶에서 지속되는 문제이니, 일상적 전례력(교회력)의 색깔을 바꿔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참회 예절을 통해서, 참회의 의미를 좀 더 부각하는 것이라면, 자색을 써도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cf. 공도문, 1965). &#60;/p&#62;
&#60;p&#62;&#60;strong&#62;성찬례에서 위치&#60;/strong&#62;&#60;br /&#62;
치유 예식을 독립적인 예배로 사용할 수 있으나, 성찬례의 맥락에서 사용한다면(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설교 뒤(신경과 신자들의 기도 생략 가능)에 두고, 끝나면 곧바로 평화의 인사로 넘어가면 좋을 것입니다. &#60;/p&#62;
&#60;p&#62;&#60;strong&#62;안수하는 방법&#60;/strong&#62;&#60;br /&#62;
집전(집례) 사제는 안수를 받고자 하는 이를 초대하여, 그의 이름을 부르며(친밀감)을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합니다. 이때, 사제만 여기에 참여할 것이 아니라, 해당 전례 혹은 예배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제대 앞으로 초대하여, 안수받는 이의 어깨에 손을 얹어 그를 위한 기도와 축복에 참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성직 서품식의 안수와 같은 형태). 치유 예배의 성사적 특징 가운데 중요한 한 차원은 '손이 닿아 어루만지는 일'입니다. 공동체의 손길을 통해서, 하느님의 치유의 힘이 전해지니, 우리는 그 안에서 모두 '성사'를 이룹니다.&#60;/p&#62;
&#60;p&#62;&#60;strong&#62;도유하는 방법&#60;/strong&#62;&#60;br /&#62;
안수가 끝나면, 바로 이마에 기름을 바르거나, 머리에 부어서(기름이 귀하니 쉽지 않지요) 도유를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좋은 향기가 나는 기름을 썼으면 합니다. 성유는 원래 구별이 없었으나 그 사용례에서 세 가지로 분리되었습니다(특히 서방 교회 전통에서). 게다가 조병성사에서 쓰는 성유는 향을 넣지 않는 관습이 퍼졌는데, 아마도 병자를 위한 배려였으리라 생각하나, 지금은 따를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성유의 좋은 향이 도유받은 이에게 남아 넘쳐서 '그리스도의 향기'로 남는 성사가 되었으면 합니다. 특히, 치유 예식을 위한 성유는 사제가 축복하여 쓰는 오랜 전통이 있었으니, 참조할 만합니다.&#60;/p&#62;
&#60;p&#62;&#60;strong&#62;안수와 도유 이후&#60;/strong&#62;&#60;br /&#62;
치유 예식이 끝나고 성찬례로 이어진다면, 그 모인 자리에서 곧바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면 좋을 것입니다. &#60;/p&#62;
&#60;p&#62;&#60;strong&#62;성찬의 전례와 영성체&#60;/strong&#62;&#60;br /&#62;
성찬의 전례에서는 성찬기도 4양식(기도서 2004)을 쓰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영성체를 할 때는, 안수와 도유를 받은 이를 먼저 초대하여 영성체를 하도록 배려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영성체 후 기도는 그 '치유'의 맥락에서 마련된 기도를 함께 하고, 축복 기도도 그 맥락에서 선택하면 좋을 것입니다.&#60;/p&#62;
&#60;p&#62;여기저기서 경험하고 고민하던 바를, 국 신부님의 시도에 자극을 받아 적어 보았습니다. 좀 더 다양한 대화와 경험을 통해서,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더욱 깊이 경험하고, 신자들을 도울 수 있었으면 합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Cranmerian on "번역:  [지면 논쟁 연재] 성경은 동성애에 반대하는가?"</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6#post-1061</link>
<pubDate>화, 27 7월 2010 15:00:58 +0000</pubDate>
<dc:creator>Cranmerian</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61@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잘 읽었습니다. 제게는 이 주제가 혼돈스럽지만, 도움은 되었습니다.&#60;br /&#62;
번역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Elyot on "번역:  [지면 논쟁 연재] 성경은 동성애에 반대하는가?"</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6#post-1060</link>
<pubDate>일, 25 7월 2010 14:32:45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60@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60;a href=&#34;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belief/2009/dec/18/bible-christianity-religion-gay?intcmp=239&#34; rel=&#34;nofollow&#34;&#62;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belief/2009/dec/18/bible-christianity-religion-gay?intcmp=239&#60;/a&#62;&#60;/p&#62;
&#60;p&#62;성경과는 별 상관이 없다&#60;/p&#62;
&#60;p&#62;성경은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읽힐 수 있다. 성에 대한 교회의 혼동은 다른 곳에 그 뿌리가 있다.&#60;/p&#62;
&#60;p&#62;쥬디스 몰트비&#60;br /&#62;
2009년 12월 18일 금요일&#60;/p&#62;
&#60;p&#62;성경은 동성애에 반대하는가? 그렇다, 성경은 동성애에 반대하기도 하지만, 어린이 체벌, 사형, 노예제도에 찬성하기도 한다. 이 질문은 그 자체로서보다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34;우리는 어떻게 성경을 읽는가&#34; 라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가지 요점을 들어 얘기해 보자.&#60;/p&#62;
&#60;p&#62;첫번째는, 불편한 진실인데, 우리는 모두 성경을 선택적으로 읽는다는 점이다. 모두가 그렇게 한다, 가장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로부터 가장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들까지. 우리는 모두 선택을 하고 (항상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에서 어떤 구절, 어떤 단락, 어떤 서 (書) 를 다른 부분들보다 더 권위있다고 여긴다. 이러한 선택들은 개인적이기도 하고 공동체적이기도 하다. 내게, 예수의 비유들은 신약에서 가장 도전적이고 관심가는 부분이며, 내가 가장 자주 그리로 돌아오게 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는 내 경우일 뿐이다 - 나는 모두가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내 희망으로는, &#34;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34; 는 예수의 가르침을, 남자가 머리를 기르는 것은 &#34;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는&#34; 일이라는 바울의 고집보다 우선적으로 여길 것이다. 성경을 &#34;균형있게&#34; 읽는다는 것은, 읽되 성경에 합당한 존중감을 가지고 읽는 것이다.&#60;/p&#62;
&#60;p&#62;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읽는가에 대한 두번째 요점은, 우리는 그것을 언제나 맥락을 고려하며 읽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적인 상황, 우리가 처한 시간과 장소, 우리 자신이 인간이라는 조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이는 1-2세기의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도인들이 노예제도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자연적 질서의 일부로 보였던 것이 - 성경을 읽음으로써 보증되었던 시각 - 내가 옳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데, 지금은 보편적으로 비난받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18세기와 19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노예제도의 도덕성에 대한 격한 논쟁을 벌였으며, 성경은 노예주와 노예폐지론자에게 똑같이 영감을 제공해 주었다.&#60;/p&#62;
&#60;p&#62;어떤 이들은 노예제도가 너무 극단적인 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좀더 온건한 예를 들어 보자. 어떤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됨과 동시에 군대에 복무할 수 있는가, 즉 평화주의의 지점에 서라는 복음의 권고에 복종할 수 있는가? &#34;다른 뺨을 돌려 대라&#34; 는 예수의 가르침은, 권력자들이 &#34;헛되이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34; 라는 바울의 시각을 극복하는가? 명백히, 대부분의 교회 역사 가운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바울 쪽의 입장에 있었다. 영국 성공회의 39개 조항은 평화주의에 반대하며 사형을 지지한다. 나는 성공회 사제로서 내 교회 안에 있는 평화주의적 전통을 높게 평가하며, 동시에 힘의 사용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도 믿는다. 나는 사형을 분명히 반대하지만, 동시에 나의 입장은 내 교회가 그 역사의 대부분 시간동안 견지해온 전통적 가르침과 반대된다는 점을 인정하며, 성경은 양쪽 중 어느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도 쓰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60;/p&#62;
&#60;p&#62;내가 사랑하는 교회는, 정당한 전쟁의 도덕성을 믿는 사람들도 평화주의자들의 도덕적 일관성도 함께 안을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사랑과 헌신의 관계에 있는 게이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함께 안을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 사실 이것은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문제와 관련된 불일치보다 더 중요한 분열이다. 나는 성 문제와 관련하여 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성공회의 사이코드라마가, 성경과 과연 얼마나 상관이 있는지 의문이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Cranmerian on "번역: 코프 주교 서신 - "한국의 잉글랜드 교회 평신도들에게""</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0#post-1059</link>
<pubDate>일, 18 7월 2010 11:55:26 +0000</pubDate>
<dc:creator>Cranmerian</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59@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Elyot님의 말씀처럼 이 글은 100여년전의 글로 좀 어렵습니다. 그리고 교회용어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조금 헤매는 인상입니다. 특히 Elyot님이 번역하여 올린 다른 글들과 비교할 때. 교회용어에 대한 이해-당시와 현재-를 넓힌다면 더 좋은 번역이 될 수 있으며, 당시 선교사들의 이해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60;/p&#62;
&#60;p&#62;본문중에서 “ ” 는 성서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찾을 수 없지만. 다른 회원분들의 도움을 바랍니다. 제가 교정한 부분은 [ ]로 표시하였습니다.  &#60;/p&#62;
&#60;p&#62;번역은 하는 사람마다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동일한 사람이라도 할 때마다 달라집니다. 혹시 용어에 어려움이 있으시면 제게 개인적으로 연락주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60;a href=&#34;mailto:cranmerian@hotmail.com입니다.&#34;&#62;cranmerian@hotmail.com입니다.&#60;/a&#62;   &#60;/p&#62;
&#60;p&#62;한국의 성공회 평신도들에게.&#60;br /&#62;
1899년, 6월 25일, 서울.&#60;/p&#62;
&#60;p&#62;사랑하는 형제 여러분,&#60;/p&#62;
&#60;p&#62;최근에 강화와 서울에서 신자들이 세례를 받았고, 더불어 신자 가족 전체가 그리스도의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되어,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헌신하는[신실한, 깊은] 감사함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계 곳곳에서 특히[뿐만아니라] 한국에서 여러분들이 근 십년동안 계속해 온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60;/p&#62;
&#60;p&#62;그러나 이러한 헌신적인[신실한, 깊은] 감사의 느낌[마음]과 함께, 한층 무거워진 책임의 느낌[책임감-이 말은 코프주교가 강조하려는 말로 보입니다] 역시 뒤따라야 하겠습니다. 이 책임은 무엇보다도 저와 사제단이 잘 의식[인식]하고 있어야 하겠지만, 교회의 모든 지체[신자]들이 또한 나누어 가져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국 내의 성공회가 소수 유럽인들만의 것이었던 동안에는, 왜 우리는 교회와 경당[chapels기도소, 정식 전도구교회가 아닌 예배장소]에서 거르지 않고 예배를 드리는가, 우리의 다른 이들에 대한 책임은 &#34;함께 있지 않은 이들을 향해 부지런히 나아가는 것&#34;[성서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정확한 위치를 모르겠습니다]으로 국한되었습니다. 삶 속에서의 지속적인 실천을 통하여, 우리 종교의 드높은 진리와 힘[supreme truth로 기독교신앙의 참진리 또는 최고의 가치와 권능]을 우리가 접하는[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보여주는[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두 달 동안에 우리의 의무는 즉시 더욱 분명하고 더욱 진지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인하여, 한국인들 - 남자, 여자, 어린이들 - 은 &#34;믿음의 가정&#34; 안에 받아들여졌고, 우리와 함께 &#34;신적 본성의 담지자&#34;[하느님의 자녀? 이 부분도 성서구절에서 온것이 아닌가?] 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눈에 우리가 어떻게 보일까를 생각해 보면[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서로 다른 직분들을 본다면], 이제 우리[선교사들과 외국인 평신도들]와 그들[새로운 한국인 세례신자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우리와 그들, 그리고 우리를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차게 해주시는 하느님 사이의 관계만이 확인될 뿐입니다[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들에게 감사함으로 가득 채워주시는 하느님, 그리고 우리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달리 보면[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우리와 그들 간에는 큰 차이점이 있기도 합니다[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가장 어린 형제들이며, 마치 사도 바울이 말한 &#34;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34; 과 닮아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기독교 세계에서 형성되었으며, 그들의 경험은 이교도 세계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이제 막 그들은 미신의 어둠으로부터 나와 그리스도 복음의 밝은 빛 속에 섰으며, 오랫동안 형성되어온 기독교적 인간성[특성들, 인물들]의 사례들에서 모범을 구하고자 할 것입니다. 처음에 우리에게 던져졌던 의혹의 시선들은 곧 열성적인 호기심의 그것으로[깊은 호기심을 가지면서도 우리들을 바라보았던 그들의 의심스러운 눈길들은] 지금은[이제] 공감과 격려를 갈망하는[뿐만아니라], 또한 수많은 세부적인 가르침들을 갈망하는 것으로 바뀌어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손위 형제일 우리들이 그들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뿐만아니라, 신앙의 선배들인 우리들로부터 보다 자세한 교육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60;/p&#62;
&#60;p&#62;바로 이 부분에, 제가 말씀드린 우리들 모두의 한층 무거워진 책임이 있습니다 - 그 책임은 나의 형제인 여러분 모두가 지고 있으며, 사제들에게는 더욱 중요하게 지워져 있습니다[사제들의 책임보다 더욱 무거운 책임감입니다]. 우리의 한국인 기독교인들은 평신도들입니다. 여러분들처럼 그들도 우리의 입로부터 구원의 길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새롭게 설정된 기독교적 의무들이지만, 이를 준수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보다 그들 자신에게 더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영문에서 전체가 한 문장인 것 같습니다-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들의 새로운 의무들이 여러분들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즉,  여러분이 주장할 수 있는 어떠한 특권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그들을 형제로서 환영하고자 한다면, 만약 우리가 그들이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그들에게 주려고 한다면, [즉]인격의 형성[edification은 신앙교육 또는 신앙의 증진을 위한 여러가지 훈련이나 교육]이 바로 그것인데,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할 때입니다[지금이 바로 이러한 때입니다] -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 각각의 기독교적 헌신과 실천의 삶은, 그들이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길, 교회의 충실한 지체들이 해야 할 헌신과 실천의 삶과 얼마나 멀리 있는가.[즉, 지금이 바로 우리들 각자의 신심생활과 예배생활을 그들(한국인 신자들)이 처음으로 배우는 그리스도교회 정식신자들의 신심생활과 예배생활(devotion and practice로 사적인 신앙생활과 공적인 신앙생활?)과 일치하는 생활로 만들어가도록 요청받고 있는 시점입니다] 한결같이 변치않는 조건으로서, 보편적 교회의 특권을 누린다는 개념은 그들에게 낯선 것입니다[보편적 교회의 특권들을 향유하는 불변의 조건인 이러한 규칙들[신심생활과 예배생활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은 그들에게 낯선 것입니다]. 그들이 자라나온 나라는, 우리가 기독교적 전통의 공기를 호흡한다고 느꼈던 나라인 것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하지만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교 전통의 나라에서 성장한 우리들은 이러한 규칙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실천[신앙생활]이 우리의 지식에 따른 것입니까? 우리는 지금 우리들 사이에서만 봉사자로, 선생님으로, 친구로, 지인으로 살고 있으며, 같은 규칙으로 묶여지고 같은 특권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우리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하인들과 교사들, 친구들 그리고 지인들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규칙들을 지켜야하며 똑같은 특권들을 향유할 권리를 갖습니다. 그러나 곧, 그들의 경험 안에서[하지만 그들의 무경험을 고려할 때], 그들은 여러분에게서 길잡이를 찾으려 하고 여러분이 놓는 예를 따르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공기[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 여러분이 선택한 이 나라에서[,] 하나이며 나뉘어지지 않은 하느님의 교회라는[보편적인 교회의] 전통을 영속해 가는[영속시키는,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정착시키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대단한 특권입니다. &#60;/p&#62;
&#60;p&#62;이제 말씀드릴 사항들은, 우리의 실천이 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들의 실천 또한, 새로운 열정으로 태어나, 우리에게 전반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몇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것들이 우리의 신앙생활(practice)이 한국인 신자들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주는 문제들이며, 또한 새로운 열정으로 시작하는 그들의 신앙생활이 우리들에게 유익한 영향을 주여야 하는 분야들입니다] . &#60;/p&#62;
&#60;p&#62;교리학습자들을 위한 교리문답 제5권[이 책이 무엇인자 궁금합니다]은, 여러분들이 보았듯이[알고 있듯이], 잉글랜드교회[영국성공회]의 지체[신자]들인 우리들이 삶에 질서를 놓도록[우리들의 생활을 규정짓도록] 배운 규칙들과 실천들[신앙생활들]의 대강을 담고 있습니다[개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배운 바는[이것들에 대하여 우리 한국인 신자들이 배우는 것은], 여러분들이 배운대로[배웠던 것과 똑같은 것으로], 잉글랜드교회가 그 공인된 규범에 따라 모든 곳에서 가르쳐온대로 성경, 기도서, 그리고 나뉘지지 않은 교회의 의심할 바 없는 전통에 기반한 것입니다[영국성공회가 성서와 기도서, 초기교회의 보편적 전통들에 근거한 것으로 성공회의 공식적인 신앙선언문들(공식문서들formularies)에서 가르쳐온 것들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우리로부터 받은 가르침 가운데, 여러분 자신이 받은 것과 다른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여러분들은 그들이 이러한 분야들(문제들)에 대하여 여러분들이 배웠던 것들과 다르게 배운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코프 주교는 왜 이 말을 하는가? 선교사들 내부에 한국인 신자들에 대한 교육내용으로 논란이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본국이나 미국에서 한국 또는 아시아 선교사들의 교육활동에 대하여 논란이 있는 것은 아닌지? 코프 주교는 이 점[교육의 내용]을 확실하게 말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60;/p&#62;
&#60;p&#62;그러므로 우리의 교리교육에 있어서, 절제와 자선은 하느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명하신 의무이고, 따라서 잉글랜드교회[영국성공회] 또한 그 지체[신자]들에게 명하는 바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죄의 고백과 용서는 모두에게 필요하며, 죄짐진 영혼이 성사적 고백에의 필요와 개인적 용서에의 보증을 더 갈구할 때, 이러한 축성은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원할 때 가 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모시는 성찬식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똑같은 의무인데, 이는 신성의 권능 그리고 가시적인 합일의 궁극적이고도 연속적인 현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이 단락은 좀 어렵군요. 교리에 대한 자세한 이해가 요구됩니다. 제가 다시 번역하였습니다.  &#60;/p&#62;
&#60;p&#62;[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신자들[교리학습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교육시키고 있다; 즉, 금식생활과 자선활동은 하느님이 모든 인간들에게 명령하신 의무로, 영국성공회도 신자들에게 지키도록 요구하는 의무들이다. 죄의 고백과 사면은 모든 신자들이 지켜야 하는 의무이다. 죄많은 영혼이 성사적인 죄의 고백[고해성사]과 개인적인 죄의 용서의 확신이 더욱 많이 필요할  때에, 이들에 대한 축복은 필요에 따라 교회의 모든 신자들에게 해당한다[***보다 자세한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과된 의무와 동일하다. 왜냐하면 이는 하느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며, 또한 가시적인 일치[통일성]에 대한 최고의 증언이자 연속적인 증언이기 때문이다.]&#60;/p&#62;
&#60;p&#62;***일단 제 나름대로 이해한 내용을 바탕으로 교정해 보았습니다. 저도 헷갈리는군요.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Elyot on "번역: 코프 주교 서신 - "한국의 잉글랜드 교회 평신도들에게""</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0#post-1058</link>
<pubDate>일, 11 7월 2010 16:15:29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58@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Cranmmerian 님, 자세히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영하여 수정하였습니다.&#60;/p&#62;
&#60;p&#62;추가 부분을 기왕의 글에 덧붙인 까닭은, 원문에서 하나의 아티클 또는 하나의 챕터는, 여기서도 하나의 글 속에 다 담기도록 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포럼에 올라와 있는 다른 번역문들도 그런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구요. 그러면 번역이 다 끝난 후 올리면 되었겠지만, 그렇게 하면 마냥 늑장을 부리게 될 것 같아서, 일단 번역이 이루어진 곳까지 올려 놓았습니다. &#60;/p&#62;
&#60;p&#62;그래서 원문도 함께 올려 놓아 그때그때 필요한 지적을 받을 생각이었는데, 그동안 포럼이 운영되어 온 방식이 그와 같지 않았고, 갈수록 분량이 많아져서 읽기에 번거로우실 듯 하므로, 원문은 지우고 그 웹 주소만 맨 위에 표기해 두도록 하겠습니다.&#60;/p&#62;
&#60;p&#62;여러가지로 익숙지 않고 미숙하므로, 많이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Elyot on "번역:  [지면 논쟁 연재] 성경은 동성애에 반대하는가?"</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6#post-1057</link>
<pubDate>일, 11 7월 2010 13:28:09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57@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원문: &#60;a href=&#34;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belief/2009/dec/17/bible-homosexuality-jesus&#34; rel=&#34;nofollow&#34;&#62;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belief/2009/dec/17/bible-homosexuality-jesus&#60;/a&#62;&#60;/p&#62;
&#60;p&#62;회피하는 대답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60;/p&#62;
&#60;p&#62;짧게 말해, 성경은 동성애에 반대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60;/p&#62;
&#60;p&#62;존 리차드슨&#60;br /&#62;
2009년 12월 17일&#60;/p&#62;
&#60;p&#62;질문: 성경은 동성애에 반대하는가?&#60;/p&#62;
&#60;p&#62;성경은 동성애에 반대하는가? 짧게 대답하면 &#34;그렇다.&#34; 테오 홉슨은 그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훌륭하게 논했지만, 데이비스 맥키알라는 예수의 메시지를 구약의 한 구절 (레위기 19:18) 로 요약하고자 했지만, 이러한 대단히 현대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성경은 동성애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이러한 대답들이 분명히 무언가를 회피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60;/p&#62;
&#60;p&#62;성경이 동성애를 반대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말하려는 것 그 자체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마치, 한 율사가 예수에게 &#34;구원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34; 라고 묻고, 가장 큰 계명을 지키라고 대답을 들었다는 이야기와 같다. 그 대답은 옳은 말이지만, 더 큰 진실은 이러한 질문의 형식 밖에 놓여 있다. 뒤에 이어지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역시, 남을 도와야 한다는 지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질문한 사람의 세계관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60;/p&#62;
&#60;p&#62;그렇다면, 성에 대한 성경의 관점은 무엇인가. 창세기 1장 27절에는 하느님이 &#34;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빚으시고 ... 남성과 여성으로 그들을 창조하셨다.&#34; 고 나와 있다. 하느님와 인간의 성은 한 문장에서 결합된다. 이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성경을 일관성 있는 전체로 볼 것인가, 또는 그다지 긴밀히 관련되어 있지 않은 신성에 대한 &#34;사색&#34; 의 나열로 볼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후자라면, 이 이야기는 외따로 떨어진 수수께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든 &#34;성경의 관점&#34; 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여기서 하나의 주제가 시작되는 것을 볼 것이다. 이후 이 주제는 더욱 발전되고 명확해져, 이윽고 성경이 하나의 계시로서 열어보이게 될 것이다.&#60;/p&#62;
&#60;p&#62;성경에서는 너무 자주, 인간의 결혼과 성이 그 최악의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 그런 예는 무수히 많다. 반면, 전체적으로 보면, 하느님이 인간과 맺는 관계는 결혼의 언어를 빌어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혼을 이야기하면서 끝을 맺는다: &#34;나는 성스러운 도시, 새로운 예루살렘이 하느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신부로 단장하여 남편을 위해 아름답게 차려 입고서.&#34; (요한 계시록 21:2) 여기서 하느님은 위대한 신랑이시다.&#60;/p&#62;
&#60;p&#62;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점에서 신랑의 그것과 같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결혼이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로부터 유출된다. 그것은 단지 &#34;이미지&#34; 이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이미지인 것처럼. 그러므로, 진정한 영성에 대한 위협이 되기는 커녕, 성은 구원에 대한 하나의 통찰을 제시하며, 이것이 인간의 경험에 있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가서는 뛰어난 성경적 묘사를 통해 잘 보여준다.&#60;/p&#62;
&#60;p&#62;그러나, 데이비스 맥키알라가 옳게 본대로, 예수는 성경 전체에 있어서 해석적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는 또한 가장 강한 어조로, 결혼의 신성한 &#34;모델&#34; 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을 함께 하는 계약을 맺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혀 두었다.&#60;/p&#62;
&#60;p&#62;이 테두리를 벗어난 성의 모든 방식들은, 많거나 적거나 간에, 하느님의 품성을 반영하고자 하는 이상에서는 벗어난 것일 수 밖에 없다. 어떤 경우들은, 예수가 말한대로, 단지 그들의 믿음이 부족한 탓이므로 용인되었다. 또 어떤 경우들은 단호하게 금지되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성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성경이 반대하고 있는 행동들의 목록을 통해 정의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과 그분이 피조물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위에서, 그것을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Cranmerian on "번역: 코프 주교 서신 - "한국의 잉글랜드 교회 평신도들에게""</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0#post-1055</link>
<pubDate>토, 10 7월 2010 13:17:30 +0000</pubDate>
<dc:creator>Cranmerian</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55@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the undoubted traditions of the undivided Church는 동방과 서방교회로 분리되기 이전의 교회 즉, 초기교회(early church) 또는 고대교회(ancient church)의 전통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즉, 5-7세기 이전의 교회들의 전통으로 catholic 또는 universal 전통으로도 표현합니다.&#60;/p&#62;
&#60;p&#62;Divine command는 하느님의 명령, 즉 하느님이 신자들에게 꼭 지키도록 요구하는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0;/p&#62;
&#60;p&#62;몇가지 보충하자면, necessary는 필수적이라는 뜻으로 전제조건에 해당하는 의미입니다. 즉, faith is necessary for salvation이라고 할 때, 신앙[믿음]은 구원의 전제조건이 됩니다. 그리고 practice라는 단어는 우리말로 표현하기가 아주 애매하게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실제'라고 하지만-이럴경우 '이론과 실제'처럼, 교회의 경우 여러가지 신앙생활들 또는 신앙을 실행하는 활동들로 각종 예식들과 의례들, 그리고 신앙을 표현하는 여러가지 행동들(?) 모두를 포함하는 뜻입니다. &#60;/p&#62;
&#60;p&#62;번역을 하다보면 이해는 되지만 우리말로 표현하기가 아주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를 말씀드린다면, 최근판의 영한사전, 영어로 된 기독교 백과사전(저는 Oxford Dictionary of Christian Church를 사용합니다)을 짜증날 정도로 뒤적입니다. 힌트를 얻기 위하여 wikipedia도 들락거립니다. 때로는 번역하는 내용에 해당하는 개론서를 읽어보기도 합니다. 물론 한국어로 된 신학서적도 뒤적이고요.&#60;/p&#62;
&#60;p&#62;Elyot님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서두르지 마시고 천천히 번역하세요. 그리고 혼동이 되지않게 추가부분은 새로이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요.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Elyot on "번역:  [지면 논쟁 연재] 성경은 동성애에 반대하는가?"</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6#post-1053</link>
<pubDate>금, 09 7월 2010 15:26:46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53@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원문: &#60;a href=&#34;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belief/2009/dec/16/gay-christian-bible&#34; rel=&#34;nofollow&#34;&#62;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belief/2009/dec/16/gay-christian-bible&#60;/a&#62;&#60;/p&#62;
&#60;p&#62;좋은 책의 끔찍한 사용&#60;/p&#62;
&#60;p&#62;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의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은 문화적 태도일 뿐 예수의 가르침을 반영한 것은 아니다&#60;/p&#62;
&#60;p&#62;데이비스 맥키알라&#60;br /&#62;
2009년 12월 16일 수요일&#60;/p&#62;
&#60;p&#62;질문: 성경은 동성애에 반대하는가?&#60;/p&#62;
&#60;p&#62;아니다, 성경은 동성애에 반대하지 않는다. 예수는 어느 누구도 그들의 성적 정향 때문에 외면하지 않았고, 나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예수가 말한대로: &#34;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34;&#60;/p&#62;
&#60;p&#62;다양한 전통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수많은 세기에 걸쳐 성경을 해석해 왔다. 아프리카인들은 그들만의 성경 이해 방식이 있고, 이는 영국에서의 대다수의 것과는 같지 않다. 이 점 때문에 나는 아프리카인들은 이해 능력이 떨어지는 것 아닌가라는 의문을 갖기도 하는데, 나는 감히 말하겠다.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들 (LGBT) 에 대한 혐오는, 문화적 차이에 따른 것이다.&#60;/p&#62;
&#60;p&#62;왜 엘지비티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아프리카의 어느 사회에서든 잘 용인되지 못하는가? 이성애자들은 용인되기를 바랄 필요가 없다. 게이인 우리는 그들 옆에서 그리고 신 앞에서 잘 살아가는데, 왜 그들은 똑같이 내 옆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는지 나는 의문이다. 만약, 우리가 엘지비티 사람들이 기준이고 이성애자는 두려움이나 혐오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성애자들은, 박해, 학대, 살해의 위협 때문에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을 감추어야 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상상할 수 있을까?&#60;/p&#62;
&#60;p&#62;그것이 서구로부터 들어온 것이라는 반복된 주장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는 노예선과 그리스도교 선교사의 도래 이전부터 아프리카에 존재해 왔다. 그리스도교가 들어오고, 나의 조상들에게 그리스도교와 더불어 문화의 변화가 강요되고, 서구식의 도덕과 윤리적 가치가 부과되고, 동성애 관계는 금기라는 생각이 소개되기 전에도, 하느님과 믿음 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60;/p&#62;
&#60;p&#62;성경에는 노예제도를 뒷받침하는 데 쓰일 수 있는 구절들이 있다. 다른 구절들은 우리가 더 이상 금기나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행위들에 대하여 오래된 방식의 처벌을 주장한다. 몇몇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모순되는 구절들을 일치시켜서, 성경을 문자대로 읽는 일에 열중해 있다. 그들은 창세기, 레위기, 그리고 성 바울을 읽고 나서, 어떠한 형태의 동성애적 행위도 하느님은 심판하시고 야단치실 것이라는 근거로 특정한 구절들을 제시한다. 이러한 독해의 바탕 위에서, 우간다같은 나라에서는 동성애자들에 대해 종신형이나 사형을 도입하려 하고 있다. 성경같은 좋은 책을 그러한 끔찍한 무기로 사용하는 사람 앞에서, 분열이나 이단은 비교 거리도 되지 않는다. 그것은 신에 대한 가장 큰 모독일 것이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Elyot on "번역:  [지면 논쟁 연재] 성경은 동성애에 반대하는가?"</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6#post-1052</link>
<pubDate>금, 09 7월 2010 15:26:11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52@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원문: &#60;a href=&#34;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belief/2009/dec/14/bible-homosexuality-gay-rights-morality&#34; rel=&#34;nofollow&#34;&#62;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belief/2009/dec/14/bible-homosexuality-gay-rights-morality&#60;/a&#62;&#60;/p&#62;
&#60;p&#62;우리가 말하는 동성애는 성경에 나오는 동성애가 아니다&#60;/p&#62;
&#60;p&#62;고대 이스라엘 문화가 반-게이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시대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도덕적 사고를 열어 놓아야 한다&#60;/p&#62;
&#60;p&#62;테오 홉슨&#60;br /&#62;
2009년 12월 14일 월요일&#60;/p&#62;
&#60;p&#62;질문: 성경은 동성애에 반대하는가?&#60;/p&#62;
&#60;p&#62;동성애는 미스테리하다: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 사실 잘 모른다. 피부색처럼 그것을 유전자에 내재한 것으로 보는 견해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만, 논리적으로는 성립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성애자도 동성애적 욕망을 경험하거나, 적극적으로 동성애적인 시기를 거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적 정향의 형성에 있어 후천적 요인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도 충분히 명백하며, 동성애라는 우리의 개념 자체가 문화적으로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60;/p&#62;
&#60;p&#62;동성애라는 개념은 상당히 최근에 발명된 것이다. 우리들의 상식에서, 한 젊은이는 그 또는 그녀가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점을 깨닫게 되고, 그 또는 그녀가 이 남다른 정체성에 속한다는 것을 천명하게 된다. 커밍 아웃이란 하나의 선언과 같다: 이것은 단지 거쳐가는 시기가 아니며, 나는 누구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 정체성에 소속된다.&#60;/p&#62;
&#60;p&#62;동성애를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으로서 강변하는 것, 한 사람이 자신의 영혼 안에서 발견하여 거기에 고착되는 것, 우리보다 앞선 모든 문화들에서는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동성애는, 마치 축구에 열중하거나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는 일처럼, 단지 잠시 거쳐가는 것에 불과했다. 성적 정향에 대한 생각은 더 자유로웠다. 우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문화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동성애에 대한 상식은 다른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우리는 동성애가, 이것 아니면 저것 을 선택해야 하는 정체성의 범주에 가두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34;정체성으로서의 동성애&#34; 를 관용하려고 노력해왔다. 대신, 일시적인 동성애 또는 양성애도 있는 것인데, 이는 아마 현재의 주된 성 질서에 더욱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60;/p&#62;
&#60;p&#62;이러한 변화는 상당히 근래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고대의 이스라엘 문화가 &#34;반-게이적&#34; 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별로 말이 되지 않는다. 동시에, 고대의 그리스 문화가 친-게이적이었다고 말하는 것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 양쪽 문화 모두, 동성애가 무엇이라는 데 대한 우리의 관념을 공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 두 문화는, 둘 중 하나가 오늘날의 우리 자신과 더 닮았다기보다는, 둘 서로 사이에 훨씬 더 많이 닮아있다. 둘 다 동성애를 하나의 행동 형태로 보고 있지, 내재적인 정체성으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대 유태인에게, 그것은 역겨운 자기 탐닉의 행동이었고, 이교도의 난잡과 불가분의 것이었으며, 신성한 혼인 관계를 더럽히는 짓이었다. 그리스 시민에게 있어서, 그것은 별 대단찮은 것이었으며; 단지 (남성) 인간 욕망의 한 측면에 불과했다.&#60;/p&#62;
&#60;p&#62;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성경이 동성애적 행위를 비난하고 있는 데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비난을 단순히 반복하며, 그것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한가? 그렇지 않다, 두 가지 이유에서. 첫째, 동성애의 의미는 변화했다. 동성애에 대한 오늘날의 상식에서, 한 게이 인격은 스트레잇 인격과 마찬가지로 안정적인 일대일 관계를 추구한다. 게이의 성이 결혼과 무관한 탐닉의 한 형태라는 성경의 생각은,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60;/p&#62;
&#60;p&#62;둘째,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성경에 나오는 규율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나 음식 규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 바울은, 우리는 하느님의 의지와 종교적 규칙 사이의 관계를 부수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것에 맞추어 도덕을 형성해야 하며, 사랑과 자유를 첫째로 놓아야 한다. 그런데, 성 바울이 명백히 게이의 성을 비난하지 않았냐고? 맞다, 그러나 그것은, 게이의 성이 쾌락주의와 불가분의 것이라는 성경의 일반적인 입장을 그 또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비난하기 위해 바울을 인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가장 중요한 메세지를 잡는 데는 실패해 왔다: 신성한 율법은 이제 죽었다는 것.&#60;/p&#62;
&#60;p&#62;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맞다, 성경은 동성애적 행위를 비난하며, 도덕적 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신약은 또한 다른 것 역시 비난한다: 신성한 도덕주의. 신약은 반-율법적 혁명을 선언한다. 신약은 우리가 도덕적 사고를 바뀔 수 것으로, 막히지 않은 것으로 열어 놓도록 주문한다. 성경은 그 자신의 성적 도덕주의에 대한 해체의 씨앗을 또한 뿌리고 있는 것이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Elyot on "번역:  [지면 논쟁 연재] 성경은 동성애에 반대하는가?"</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6#post-1051</link>
<pubDate>금, 09 7월 2010 15:25:32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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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60;p&#62;Is the Bible anti-gay?&#60;/p&#62;
&#60;p&#62;Is there justification in scripture for the row that is splitting the Anglican Communion apart?&#60;/p&#62;
&#60;p&#62;guardian.co.uk, Monday 14 December 2009 09.00 GMT &#60;/p&#62;
&#60;p&#62;As the Anglican Communion lurches deeper into schism, with one part electing partnered gay people as bishops, while another urges that they be hanged, both sides claim the Bible is on their side. So what does it say, and can it reasonably be read as urging tolerance? These questions have, admittedly, been ground almost to death in the last 20 years. But there are still people for whom they come as a surprise: what should they be told?&#60;/p&#62;
&#60;p&#62;Monday's response&#60;/p&#62;
&#60;p&#62;Theo Hobson: It's anachronistic to call ancient Israelite culture anti-gay. In any case, Christians must keep their moral thinking mobile&#60;/p&#62;
&#60;p&#62;Wednesday's response&#60;/p&#62;
&#60;p&#62;Davis Mac-Iyalla: The prejudice against gay people among conservative Christians is a cultural attitude not reflected in Jesus' teachings&#60;/p&#62;
&#60;p&#62;Thursday's response&#60;/p&#62;
&#60;p&#62;John Richardson: The short answer is that the Bible is anti-gay. But this doesn't necessarily mean what we take it to&#60;/p&#62;
&#60;p&#62;Friday's response&#60;/p&#62;
&#60;p&#62;Judith Maltby: The Bible can be read in many different ways. The church's confusion about sexuality has its roots elsewhere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Elyot on "번역: "변증론자 이글턴" &#60;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62; 서평"</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3#post-1048</link>
<pubDate>금, 09 7월 2010 13:03:14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48@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원문: &#60;a href=&#34;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belief/2010/jan/08/religion-eagleton-atheism-progress&#34; rel=&#34;nofollow&#34;&#62;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belief/2010/jan/08/religion-eagleton-atheism-progress&#60;/a&#62;&#60;/p&#62;
&#60;p&#62;변증론자 이글턴&#60;/p&#62;
&#60;p&#62;테오 홉슨1)&#60;br /&#62;
가디언&#60;br /&#62;
2010년 1월 9일&#60;/p&#62;
&#60;p&#62;나온지 거의 일년 정도나 지난 책에 대해 뒤늦게 언급하게 되어 안됐지만, 나는 테리 이글턴2) 의 &#38;lt;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38;gt; 을 최근에 읽어보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이 근래에 나온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교 변증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 그 저자가 &#34;그리스도인&#34; 이라는 호칭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60;/p&#62;
&#60;p&#62;이 책은 도킨스와 히친스3) 를 논박하고 있다; 그 안에는 합리성에 대한 편협한 부르주아적 해석, 그리고 신앙은 진보의 과정에서 계몽을 통해 무화되어 버렸다는 견해에 대한, 많은 논쟁적인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다 좋은 내용들이지만,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혁명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글턴의 생각이었다.&#60;/p&#62;
&#60;p&#62;그는 물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 즉 가난한 자에게 정의가 있다는 생각에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일반적인 마르크스주의적 견해에는 반대한다: 죽은 예수를 물신화하는 대신, 우리는 예수가 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던 바로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대신,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화가 결코 현실도피적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수의 &#34;죽음과 저승에 내려감은 광란, 폭력, 몽매, 자아 포기로의 여행이다, 그토록 깊은 단절을 가져온 그 혁명이 우리의 우울한 삶의 조건에 해답을 줄 수만 있다면.&#34; 이러한 종류의 혁명은 일반적인 마르크스주의자라면 화를 내며 환영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해 버릴텐데, &#34;우리의 우울한 삶의 조건&#34; 은 정치적인 방식으로 개선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글턴에게 있어서, 원죄로 인한 타락이라는 관념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이 점은 뒤이어 그가 도킨스와 히친스를 다음과 같이 논박할 때 확인되는데, 그들은 &#34;타락과 구원 같은 매우 유서깊은 관념들을 너무도 간단히 무시해 버린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아우슈비츠 이후에조차 구원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34; 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60;/p&#62;
&#60;p&#62;이글턴에 의하면, 그들은 역사에 대한 이차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합리성의 증대를 통해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 그들은 다음과 같은 거대하고 심오한 역설을 오만하게 윤색하고 있다: 진보는 근대성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안정하며, 가장 나쁜 종류의 잘못으로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역사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견해는 기적의 개입에 근거하고 있지만, 어떤 점에서 그것은 합당한 이야기가 된다: &#34;그리스도교 신학은, 진보라는 오만한 관념 없이도 역사가 변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34;&#60;/p&#62;
&#60;p&#62;그는, 도킨스와 히친스의 주요한 맹점은, 진정한 인간주의4) 는 &#34;비극적인&#34; 면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거부한다는 데에 있다고 한다: &#34;사회주의, 그리스도교,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종류가 있을 수 있지만, 비극적 인간주의는 자아 포기와 극단적 갱신의 과정을 통해서만 인간성은 그 본연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고수한다.&#34; 이는 다음과 같은 커다란 질문을 낳는다: 어떠한 종류의 &#34;과정&#34; 이 적절한가? 이따금 극장에서 비극을 감상하는 것으로 충분한가?5)  아니면 정신 상담을 받으면 되는가?6) 아니면 노동당에 투표하기?7) 아니면 타락과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화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종교의 개입이라는 권위적인 부작용 없이, 어떻게 그 그리스도교적 관념에 접근하거나 그것을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게 할 수 있겠는가?&#60;/p&#62;
&#60;p&#62;이 책의 귀중한 덕목은 이글턴이 어떤 안정적인 포지션을 고수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대신, 비록 그 자신이 정확히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교 신화는 사회주의적인 철저함의 가장 훌륭한 형태를 밑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그는 인정하고 있다. 유명한 지식인으로서, 그는 놀라울 정도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 자신 아직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을 겸손히 받아 들이고 있다, 마치 아직 학생이기라도 한 것처럼.&#60;/p&#62;
&#60;p&#62;나는 이 책이 매우 신중하게 &#34;속내를 드러내는&#34; 것으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자신이 마르크스주의보다는 그리스도교에 가깝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죄로 인한 타락이라는 관념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그러하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인간의 행위는 삶을 바르게 사는 것을 통해 신뢰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만이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34;구원&#34; 이다. 이글턴은 분명히 이 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교에 공감하고 있다는 데 대해 왜 그토록 신중할까? 앞서 나는 그가 학생같다고 말했다, 좋은 의미에서, 아직 일종의 모색자처럼 보인다는 뜻으로. 그러나 아마 그는 학생을 닮았으되, 그리스도인이라는 라벨이 붙는 것이 너무도 쿨하지 못해서 견딜수 없어 하는 학생을 닮은 것 같다.&#60;/p&#62;
&#60;p&#62;역주&#60;/p&#62;
&#60;p&#62;1) 영국의 신학자. &#60;a href=&#34;http://www.guardian.co.uk/global/2007/jun/03/theohobson&#34; rel=&#34;nofollow&#34;&#62;http://www.guardian.co.uk/global/2007/jun/03/theohobson&#60;/a&#62;&#60;br /&#62;
2)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 &#60;a href=&#34;http://en.wikipedia.org/wiki/Terry_Eagleton&#34; rel=&#34;nofollow&#34;&#62;http://en.wikipedia.org/wiki/Terry_Eagleton&#60;/a&#62;&#60;br /&#62;
3) 리처드 도킨스는 &#38;lt;만들어진 신&#38;gt; 등을 통해,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38;lt;신은 위대하지 않다&#38;gt; 등을 통해, 최근 몇년간 무신론 논쟁을 주도해 왔다.&#60;br /&#62;
4) 여기서의  &#34;humanism&#34; 은 도킨스와 히친스가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들의 무신론적 입장을 반영하여 &#34;인본주의&#34; 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34;humanism&#34; 은 뒤에 보듯이 그리스도교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므로,  &#34;신본주의&#34; 의 대립어로 설정되어 있는 &#34;인본주의&#34; 에 대한 관습적 이해 때문에 적절하지 않은 선택이 된다. &#34;인도주의&#34; 는 인본에 근거하여 박애로까지 나아갔을 때에 쓰기에 적합한 말, 즉  &#34;humanitarianism&#34; 에 가까운 말인 것 같다. &#34;인문주의&#34; 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고전학자들을 언급할 때에 가장 적합한 말이며, 다른 경우에는 반드시 인문 &#34;학&#34; 과의 관련을 전제하는 듯 보이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34;인간주의&#34; 라고 하면, 인간의 무엇에 대한 주의를 말하는 것인지 얼른 감이 잡히지 않지만, 다른 단어들이 갖는 오해의 가능성들 때문에, 가장 중립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34;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성숙 또는 완성을 지향하는 모든 종류의 생각 내지는 활동&#34; 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냥 &#34;휴머니즘&#34; 이라고 한국어로 쓰는 것이 더 나은지도 모르겠다.&#60;br /&#62;
5)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극장에서 비극을 감상하여 카타르시스를 통해 감정을 순화하면, 이것이 종교와 같은 효과를 갖겠는가?&#60;br /&#62;
6) 종교라는 중세적인 방식이 아니라, 정신 상담이라는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대안을 선택하면 되겠는가?&#60;br /&#62;
7) 그냥, 정치적으로 보다 평등을 지향하고 인도주의적인 선택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Elyot on "번역: 개종자들은 천주교의 생경함에 목이 막힐지도 모른다"</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2#post-1047</link>
<pubDate>금, 09 7월 2010 12:59:38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47@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원문: &#60;a href=&#34;http://www.timesonline.co.uk/tol/comment/columnists/libby_purves/article6884592.ece&#34; rel=&#34;nofollow&#34;&#62;http://www.timesonline.co.uk/tol/comment/columnists/libby_purves/article6884592.ece&#60;/a&#62;&#60;/p&#62;
&#60;p&#62;더타임즈&#60;br /&#62;
2009년 10월 22일&#60;/p&#62;
&#60;p&#62;개종자들은 천주교의 생경함에 목이 막힐지도 모른다&#60;/p&#62;
&#60;p&#62;리비 퍼브즈&#60;/p&#62;
&#60;p&#62;성공회 사제들을 환영하는 천주교 측의 조치는, 두 교회 사이의 차이점을, 그리고 &#34;공격은 최선의 방어&#34; 라는 식의 접근이 갖는 어려움을 부각시킨다. 아일랜드의 천주교계 교육 시설에서의 아동 학대 은폐에 대한 또다른 발표가 있던 날 저녁에 나온 이 조치는, 마치 베네딕트 교황의 전략인 것처럼 보인다. 그의 성공회측 이탈자들에 대한 갑작스러운 환영은, 천주교 위계질서의 남성적이고 억압적인 권위적 구조에 의해 비롯된, 수십년간 이어진 아동 학대의 스캔들로부터 확실히 스포트라이트를 거두어 갈 것이다. &#34;빼가기&#34; 같은 표현은 지나쳐 보이겠지만, 여기에는 단순한 힘의 정치 이상의 것이 있다. &#34;로마로의 쇄도&#34; 는 천주교의 사제 부족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고, 종교개혁과 결부되어 넘어간 오래된 교회 건물들을 되찾게 해줄 것이며, 성공회를 불안에 휩싸이고 자유주의적인 잔여분파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결과! 이윽고 천주교에서 매주 기도하는대로 &#34;영국의 개종&#34; 이 될 것이다.&#60;/p&#62;
&#60;p&#62;그러나 망설이고 있는 사제들은 조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그들을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성격의 잘못으로 비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에 대해 관대하고 유연하지 못함 - 주로 여자와 동성애자들 - 그러면서도 믿음에 대해서는 통탄할만큼 유연한 태도. 개신교 나라인 영국에서 천주교인으로 자라 나면서, 우리는 둘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우리는 교황의 오류 없음을 믿지만, 그들은 믿지 않고, 대신 여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성변화 聖變化 의 기묘한 교리 -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기적 - 를 배웠다. 그들은 성찬식을 단지 상징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이 원하면 성변화를 믿을 수 있으며, 마리아의 무염시태와 몽소승천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여학생의 초롱초롱한 눈에, 코르셋처럼 옥죄는 천주교의 교리에 비해 성공회는 훨씬 자유롭고 쉬워 보였다; 그들은 고교회와 저교회 사이에서도 선택할 수 있으며, 복음주의적 완고함과 딸랑거리는 교회종 소리 사이에서도 선택할 수 있었다. 천주교는 다만 한 가지 맛일 뿐이었다. 성공회 사제들은 가족을 가질 수 있지만, 천주교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성공회 교인들은 피임도 할 수 있었다.&#60;/p&#62;
&#60;p&#62;우리는 다른 북소리에 행진했다. 종교회의가 여성 사제들을 인정하고, 많은 성공회 교인들이 이에 반대 입장을 표했을 때, 우리 원조 천주교인들은 (배교자들이긴 하지만) 당황하였다: 교황의 권위, 성변화, 이혼에 대한 완고한 훈계, 피임 금지가 그들에겐 전혀 상관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쪽 사제들은 분파들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고, 아내와 아이들을 온전하게 갖추었다 - 이러한 용인은 어렵게 독신을 지키는, 그리고 그 점이 변치 않을 것이라고 들어 온 천주교 사제들에겐 모욕이 될 것이다. 이번의 새로운 조치에서, 유일한 단서조항은 결혼한 사제가 주교로 승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승진하려면, 아마도 아내가 사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60;/p&#62;
&#60;p&#62;그러나 개종한 사제들은, 아마 그들이 희망했던만큼 행복하게 되지는 못할 것이다. 여자 사제들과 마주쳐야 하는 공포, 그리고 동성애 커플에 대해서 그들을 바티칸식으로 &#34;근본적으로 잘못&#34; 되었다고 여겨 피부를 벗겨내는 형벌에 처하는 대신, 그들의 시민 결합을 축복해야만 하는 공포로부터는 해방되겠지만 말이다. 수정된 기도서가 있기는 하겠지만, 개종한 신자들은 그들의 방식이, 그리고 종래의 목가적인 조언들조차도 엄격하게 제한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캔터베리의 나직한 목소리 대신, 바티칸의 타협없는 목소리 앞에서 움찔하게 될 것이다.&#60;/p&#62;
&#60;p&#62;성공회는 쉽지않은 타협 위에 기초되었고, 이 점은 수세기를 지나오는동안, 스스로를 상냥하게, 나아가 너무 겸손하게까지 만들었다: 믿음의 혼합 샐러드가 된 것이다. 천주교는 더 오래되었고, 더 어두우며, 질긴 날고기와 같다. 개종자들은 목이 막힐지도 모른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Elyot on "번역: 믿음에 빚진 예술"</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1#post-1046</link>
<pubDate>금, 09 7월 2010 12:57:07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46@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원문: &#60;a href=&#34;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belief/2009/dec/07/religious-art-catholicism&#34; rel=&#34;nofollow&#34;&#62;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belief/2009/dec/07/religious-art-catholicism&#60;/a&#62;&#60;/p&#62;
&#60;p&#62;믿음에 빚진 예술&#60;/p&#62;
&#60;p&#62;메리 케니&#60;br /&#62;
가디언&#60;br /&#62;
2009년 12월 9일&#60;/p&#62;
&#60;p&#62;질문: 훌륭한 예술은 신 덕분에 가능했는가 ? &#60;/p&#62;
&#60;p&#62;저메인 그리어 (역주: 1939년생 호주 출신의 영문학자로, 저명한 여성이론가입니다. 좋은 도판 자료들이 많이 들어있는 2003년 예술사 책인 &#38;lt;The Beuatiful Boy&#38;gt; 는 &#38;lt;아름다운 소년 보이&#38;gt; 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도 출간되었는데, 반응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네요, 교보문고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만) 는, 자신이 회화에 대한 안목을 갖게 된 것은, 호주에서 천주교계 학교에 다니던 시절, 아일랜드 출신 수녀가 보여주었던 성화들을 통해서라고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60;/p&#62;
&#60;p&#62;나 역시 더블린에서 천주교계 학교를 다녔는데, 비슷한 성화들을 많이 보았었다. 거기엔 라파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무리요, 그리고 베르니니 조각의 사진들이 있었다. 우리는 프라 안젤리코와 원근법에 대한 그의 작품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고, 수태고지는 유럽 예술의 역사에서 가장 자주 그려진 주제라고 배웠다. 우리가 본 성화들은, 위대한 걸작들의 값싸고 자그마한 이탈리아산 복제품들이었지만, 내 기억에, 그것들은 아주 예쁘고 색깔이 선명했었다. 나중에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나는 익숙한 이미지들을, 성모와 아기 그리고 모성의 부드러움이 중심에 표현된 작품들을 많이 알아볼 수 있었다.&#60;/p&#62;
&#60;p&#62;실제로, 내가 아일랜드, 영국, 그리고 유럽 대륙의 많은 미술관들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나는 유럽 예술의 자기 증명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볼 수 있었는데: 바로 성화들이었다. 학창시절의 수녀님들은 성모자상에 관심이 많았고, 그것을 구주 강생의 주제와 연결시켰지만 - 천주교는 대체로 구약에 약하다 - 그 밖에도 성경에는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상상을 불어넣어 준 이야기들이 아주 많이 있다. 나의 경우에는 성화들에서 시작해서 - 종종 그것들은 교훈적이고, 때로는, 특히 십자가 장면에서는 다소 처연하다 - 나중에는 가정 생활을 표현한 네덜란드 회화들이 내게 가장 잘 맞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19세기 서사 예술의 감상적인 허위를 좋아한다 (역주: 아마 19세기의 소설이나 극장 예술 작품들에 나오는 감상적 장면들을 얘기하는 듯 합니다. &#38;lt;라트라비아타&#38;gt; 의 비올레타나 &#38;lt;백조의 호수&#38;gt; 의 오데트 같은 경우들이 아닐까요)) .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이 성화들에 대한 애호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60;/p&#62;
&#60;p&#62;천주교 - 그리고 확실히 라틴계 - 문화는 그림 중심인 데 반해, 개신교 - 그리고 북유럽 - 문화는 글 중심이라는 점은 자주 지적된다. 우리들의 시대에도, 라틴계 문화는 잡지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고 - &#38;lt;Hello!&#38;gt; 지가 스페인에서 발행된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역주: 연예인의 가십 등이 많이 나오는 화보 중심의 잡지라네요) -  북유럽 사람들은 신문의 글을 더 선호한다; 개신교인들이 천주교의 성화보다는 성경 본문의 글을 더 좋아했듯이 (그리고, 우리는 정교회를 잊어서는 안된다: 러시아의 성당들은 그들의 소중한 아이콘들과 함께, 성경 주제들에 대한 강력한 그림들로 가득 차 있다) .&#60;/p&#62;
&#60;p&#62;현대의 매체들이 그림, 브랜드의 로고들과 함께, 그리고 공항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신호와 표시들이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나 이해되는 데서 보이듯이, 더욱 이미지 중심이 되어감에 따라, 남북 유럽 문화에 대한 종래의 분석은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이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이야기가 된다. 많은 개신교 국가들에서도, 이를테면 네덜란드에서는 훌륭한 종교 회화 작품들이 나왔다.&#60;/p&#62;
&#60;p&#62;성화는 우리의 예술적 유산의 원천이자 묘판이다. 당신은 그리스도교적인 (그리고 유대적인) 전통에 지식이 없이 유럽 예술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의 주제들은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계속, 많은 훌륭한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쳐, 그들의 상상력을 작동시키고, 그들에게 풀어나갈 이야기 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 물론, 메디치 가의 교황들과 같은 훌륭한 후원자들도 제공해 주었다 (교황이 부패하면 부패할수록, 일설에 의하면, 더욱 예술을 후원하였다) .&#60;/p&#62;
&#60;p&#62;기독교 세계, 유럽이 한 때 스스로를 그렇게 칭했던 대로, 에서 유럽 예술의 위대한 개화에 대하여, 한 가지 언급되어야 할 점이 있다. 예술가들 자신이 반드시 아주 경건한 기독교인인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들 자신보다 더 높은 존재가 있다는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에 동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아니다. 인간은 자신보다 더 좋은, 더 높은, 더 비범하고 기적적인 존재를 열망해야만 한다. 그러한 생각이  유럽의 위대한 성당들을 짓도록 하였고, 또 그에 어울리는 음악을 발전하게 하였다. 종교 예술이 모든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은 유럽 예술의 현란한 성취의 출발점이 되었다.&#60;/p&#62;
&#60;p&#62;나는 현대 예술을 경멸하지 않는다: 누군가 로트코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는다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이가 벽돌더미에서 영감을 받는다고 해도, 역시 괜찮다 (그 느낌이 진실한 것인 한에서, 즉 단지 유행에 영합하는 것이 아닌 경우에) . 트레이시 에민의 흐트러진 침대 (역주: 여기를 참고하세요. &#60;a href=&#34;http://en.wikipedia.org/wiki/My_Bed&#34; rel=&#34;nofollow&#34;&#62;http://en.wikipedia.org/wiki/My_Bed&#60;/a&#62;) 는 기발한 발상이라고 생각하며, 그 자신의 방식으로, 하나의 도덕적 우화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눈을 사로잡았던 성화들은, 다음 세 가지를 나에게 남겨 주었다. (1) 나는 예술의 아름다움이 주는 즐거움에 가장 잘 반응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를 전율하게 한다. (2) 나는 이야기적인 요소에 기뻐한다,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3) 현재의 자기 자신보다 더 높은 상태로 고양되는 느낌 역시 나를 전율하게 한다. 저메인 그리어가 옳았다: 우리 모두는 성화들에게 얼마간 예술적인 빚을 지고 있다.
&#60;/p&#62;</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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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Elyot on "번역: 코프 주교 서신 - "한국의 잉글랜드 교회 평신도들에게""</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0#post-1045</link>
<pubDate>금, 09 7월 2010 12:45:35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45@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이렇게 반겨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성원에 감사드리고, 보완을 계속해 나가겠습니다.&#60;/p&#62;
&#60;p&#62;영어 자체도 제게 어렵지만, 교회 언어는 특히, 한국어로 어떻게 옮기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오늘 새로 보완한 부분에서만 고르면,&#60;/p&#62;
&#60;p&#62;and the undoubted traditions of the undivided Church&#60;/p&#62;
&#60;p&#62;같은 문맥에서, &#34;undivided Church&#34; 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실제로는 교파들이 나뉘어져 있지만, 그런 것을 넘어서있는 어떤 관념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몸 그 자체인 교회를 말하는 것인지요? 그리스도가 한 분이니까 교회도 하나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한국어로는 어떻게 말하는 것이 좋을지요. 그리고,&#60;/p&#62;
&#60;p&#62;that the communion by the faithful of the Body and Blood of Christ is equally obligatory on all Christians because of the Divine command and as being the supreme and continuous witness to visible unity&#60;/p&#62;
&#60;p&#62;에서, &#34;Divine command&#34; 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60;/p&#62;</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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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spiritus on "번역: 코프 주교 서신 - "한국의 잉글랜드 교회 평신도들에게""</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0#post-1044</link>
<pubDate>수, 07 7월 2010 11:32:30 +0000</pubDate>
<dc:creator>spiritus</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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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60;p&#62;신대원에서 말만 있었고 실행되지 못하던 작업이 시작되는 것 같아 환영합니다~! 또한, 감사~
&#60;/p&#62;</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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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viamedia on "번역: 코프 주교 서신 - "한국의 잉글랜드 교회 평신도들에게""</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0#post-1043</link>
<pubDate>수, 07 7월 2010 00:35:31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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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60;p&#62;Elyot / Cranmerian 님과 함께 이런 소중한 노력을 시작해 주신 Elyot 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관구 게시판에 올리신 몇몇 번역물도 이곳에 올려 놓으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이 공간이 좀 더 널리 이용될 수 있도록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60;/p&#62;</description>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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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ranmerian on "번역: 코프 주교 서신 - "한국의 잉글랜드 교회 평신도들에게""</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0#post-1042</link>
<pubDate>화, 06 7월 2010 13:10:51 +0000</pubDate>
<dc:creator>Cranmerian</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42@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중요한 시도를 환영합니다. 세계성공회 전반과 대한성공회에 관련된 문서들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정리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고 시급합니다. 이미 개인적으로 공부하며 번역하신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번역자료들을 한데 모아 공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교단이나 신학교 차원에서 커다란 프로젝트로 실행하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엘리어트님 처럼 가능한 부분에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나 오역이 생긴다 하더라도 이러한 포럼에서 관심갖는 사람들을 통해서 교정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조차 없다면, 이해와 교정을 위한 논의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60;/p&#62;
&#60;p&#62;중요한 시도에 감사드리며, 이러한 번역작업이 지속되기를 기도드립니다.
&#60;/p&#62;</description>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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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Elyot on "번역: 코프 주교 서신 - "한국의 잉글랜드 교회 평신도들에게""</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0#post-1041</link>
<pubDate>금, 02 7월 2010 17:16:40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41@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번역 프로젝트의 자료들은 제가 섣불리 다룰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되어서, 프로젝트 캔터베리 웹사이트 (http://anglicanhistory.org) 의 글들 가운데 대한성공회와 관련 깊은 것을 골라 시도해 보았습니다. 시간이 나는대로 계속 보완하겠습니다. &#60;/p&#62;
&#60;p&#62;어색하거나 잘못된 부분들을 알려주시면 곧 바로 잡겠습니다.&#60;/p&#62;
&#60;p&#62;---------------------------------------------------------------------------------------&#60;/p&#62;
&#60;p&#62;원문: &#60;a href=&#34;http://anglicanhistory.org/asia/kr/corfe.html&#34; rel=&#34;nofollow&#34;&#62;http://anglicanhistory.org/asia/kr/corfe.html&#60;/a&#62;&#60;/p&#62;
&#60;p&#62;한국의 성공회&#60;/p&#62;
&#60;p&#62;주교 C. J. 코프&#60;/p&#62;
&#60;p&#62;서울, 1905.&#60;/p&#62;
&#60;p&#62;소개&#60;/p&#62;
&#60;p&#62;한국의 잉글랜드 교회 평신도들에게&#60;/p&#62;
&#60;p&#62;한국 관구 잉글랜드 교회의 사제단과 평신도들에게&#60;/p&#62;
&#60;p&#62;선교직에 있는 이들에게&#60;/p&#62;
&#60;p&#62;관구의 사제단에게&#60;/p&#62;
&#60;p&#62;성찬식 거행의 관구적 용례&#60;/p&#62;
&#60;p&#62;선교의 두폭화&#60;/p&#62;
&#60;p&#62;성경과 교리 교육&#60;/p&#62;
&#60;p&#62;공동 기도서와 전례 번역&#60;/p&#62;
&#60;p&#62;성찬&#60;/p&#62;
&#60;p&#62;교리학습자들의 인가&#60;/p&#62;
&#60;p&#62;교회 훈련&#60;/p&#62;
&#60;p&#62;---------------------------------------------------------------------------------------&#60;/p&#62;
&#60;p&#62;원문: &#60;a href=&#34;http://anglicanhistory.org/asia/kr/corfe1.html&#34; rel=&#34;nofollow&#34;&#62;http://anglicanhistory.org/asia/kr/corfe1.html&#60;/a&#62;&#60;/p&#62;
&#60;p&#62;한국의 잉글랜드 교회 평신도들에게.&#60;/p&#62;
&#60;p&#62;1899년,6월 25일,서울.&#60;/p&#62;
&#60;p&#62;사랑하는 형제 여러분,&#60;/p&#62;
&#60;p&#62;최근에 강화와 서울에서 신자들이 세례를 받았고, 더불어 신자 가족 전체가 그리스도의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되어,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헌신하는 감사함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계 곳곳에서 특히 한국에서 여러분들이 근 십년동안 계속해 온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60;/p&#62;
&#60;p&#62;그러나 이러한 헌신적인 감사의 느낌과 함께, 한층 무거워진 책임감도 뒤따라야 하겠습니다. 이 책임은 무엇보다도 저와 사제단이 잘 의식하고 있어야 하겠지만,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또한 나누어 가져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국 내의 잉글랜드 교회가 소수 유럽인들만의 것이었던 동안에는, 왜 우리는 교회와 경당에서 거르지 않고 예배를 드리는가, 우리의 다른 이들에 대한 책임은 &#34;함께 있지 않은 이들을 향해 부지런히 나아가는 것&#34; 으로 국한되었습니다. 삶 속에서의 지속적인 실천을 통하여, 우리 종교의 드높은 진리와 힘을, 우리가 접하는 모든 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두 달 동안에 우리의 의무는 즉시 더욱 분명하고 더욱 진지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인하여, 한국인들 - 남자, 여자, 어린이들 - 은 &#34;믿음의 가정&#34; 안에 받아들여졌고, 우리와 함께 &#34;신적 본성의 담지자&#34; 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눈에 우리가 어떻게 보일까를 생각해 보면, 이제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우리와 그들, 그리고  우리를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차게 해주시는 하느님 사이의 관계만이 확인될 뿐입니다. 또한, 달리 보면, 우리와 그들 간에는 큰 차이점이 있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가장 어린 형제들이며, 마치 사도 바울이 말한 &#34;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34; 과 닮아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형성되었으며, 그들의 경험은 이교도 세계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이제 막 그들은 미신의 어둠으로부터 나와 그리스도 복음의 밝은 빛 속에 섰으며, 오랫동안 형성되어온 그리스도교적 인간성의 사례들에게서 모범을 구하고자 할 것입니다. 처음에 우리에게 던져졌던 의혹의 시선은, 곧 열성적인 호기심의 그것으로, 지금은 공감과 격려를 갈망하는, 또한 수많은 세부적인 가르침들을 갈망하는 것으로 바뀌어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손위 형제일 우리들이 그들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60;/p&#62;
&#60;p&#62;바로 이 부분에, 제가 말씀드린 우리들 모두의 한층 무거워진 책임이 있습니다 - 그 책임은 나의 형제인 여러분 모두가 지고 있으며, 사제들에게는 더욱 중요하게 지워져 있습니다. 우리의 한국인 그리스도인들은 평신도들입니다. 여러분들처럼 그들도 우리의 입으로부터 구원의 길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새롭게 설정된 그리스도교적 의무들이지만, 이를 준수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보다 그들 자신에게 더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 여러분이 주장할 수 있는 어떠한 특권도 그들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형제로서 환영하고자 한다면, 만약 우리가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그들에게 주려고 한다면, 인격의 형성이 바로 그것인데,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할 때입니다 - 그렇지 않습니까? - 우리들 각각의 그리스도교적 헌신과 실천의 삶은, 그들이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길, 교회의 충실한 지체들이 해야 할 헌신과 실천의 삶과 얼마나 멀리 있는가. 변치않는 조건으로서, 보편 교회의 특권을 누린다는 개념은 그들에게 낯선 것입니다. 그들이 자라나온 나라는, 우리가 그리스도교적 전통의 공기를 호흡한다고 느꼈던 나라인 것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의 실천이 우리의 지식에 따른 것입니까? 우리는 지금 우리들 사이에서만 봉사자로, 선생님으로, 친구로, 지인으로 살고 있으며, 같은 규칙으로 묶여지고 같은 특권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곧, 그들의 경험 안에서, 그들은 여러분에게서 길잡이를 찾으려 하고 여러분이 놓는 예를 따르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인 공기를 만들어 내는 것, 여러분이 선택한 이 나라에서, 하나인 그리고 초기 교회로부터 내려오는 하느님 교회의 전통을 영속해 가는 것은 여러분의 대단한 특권입니다.&#60;/p&#62;
&#60;p&#62;이제 말씀드릴 사항들은, 우리의 행동이 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들의 행동 또한, 새로운 열정으로 태어나, 우리에게 전반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60;/p&#62;
&#60;p&#62;교리 학습자들을 위한 교리 문답 제5권은, 여러분들이 보았들이, 잉글랜드 교회의 지체들인 우리들이 삶에 질서를 놓도록 배운 규칙들과 실천들의 대강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그리스도교인들이 배운 바는, 여러분들이 배운대로, 잉글랜드 교회가 그 공인된 규범에 따라 모든 곳에서 가르쳐온대로, 성경, 기도서, 그리고 초기 교회의 의심할바 없는 전통에 기반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우리로부터 받은 가르침 가운데, 여러분 자신이 받은 것과 다른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60;/p&#62;
&#60;p&#62;그러므로 우리의 교리 교육에 있어서, 절제와 자선은 하느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명하신 의무이고, 따라서 잉글랜드 교회 또한 그 지체들에게 명하는 바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죄의 고백과 용서는 모두에게 필수적이며, 죄짐진 영혼이 성사적 고백에의 필요와 개인적 용서에의 보증을 더 갈구할 때, 이러한 축성은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원할 때 가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모시는 성찬식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똑같은 의무인데, 이는 주님이 명하신 바이기 때문이며, 가시적인 합일에 대한 최상의 그리고 연속적인 목격이 되기 때문입니다.&#60;/p&#62;
&#60;p&#62;이와 같은 근본적인 사안들에 대하여, 우리의 사제들이 교리학습자들에게, 우리 본국의 형제들을 특징짓고 자주 동요시키기도 하는, 의견과 실천의 다양성을 이곳에서 또한 조장하고 반복하리라고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의 세례 성사를 9년동안 준비하면서, 우리의 가장 행복한 봉헌적 실천은 형식과 정신의 통일을 이루었으며, 저는 이것이 교회의 역사 전체에서도 정말 유례가 없는 일이리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잘 고려되고, 잘 시행되었으며, 잘 증명된 통일성에서, 우리의 한국인 형제들은 그 풍부한 혜택을 누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인하여, 9년동안 우리가 “가르침과 친교” 의 오순절적 합일을 유지하였다면, 이제는 그 어느때보다도 더, 우리 모두에게 허락된 “위대한 은사” 를 부지런히 사용함으로써, 날마다 “주 예수의 부활을 목격” 하는 가운데 오순절적인 “힘” 을 보일 것입니다.
&#60;/p&#62;</description>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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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Elyot on "사도 바르나바 축일의 매일기도 본문에 대하여"</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79#post-1040</link>
<pubDate>월, 14 6월 2010 23:24:36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40@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귀한 지식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의문이 풀렸으니, 기도 속으로 훨씬 더 잘 빠져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제 자신이 깊이 감화되고, 그래서 이 신앙을 잘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60;/p&#62;
&#60;p&#62;고맙습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viamedia on "사도 바르나바 축일의 매일기도 본문에 대하여"</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79#post-1039</link>
<pubDate>월, 14 6월 2010 07:26:54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39@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Elyot 님 /&#60;/p&#62;
&#60;p&#62;앞선 답변이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60;/p&#62;
&#60;p&#62;질문하신 내용은 모두 인터넷을 통해서 제공하는 영국 성공회(the Church of England)의 성무일도(Daily Prayer) 피드(feed)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이 글을 보고 궁금해 할 분들을 위해서 확인합니다. &#60;/p&#62;
&#60;p&#62;웹사이트 주소: &#60;a href=&#34;http://www.cofe.anglican.org/worship/dailyprayer/feed/&#34; rel=&#34;nofollow&#34;&#62;http://www.cofe.anglican.org/worship/dailyprayer/feed/&#60;/a&#62;&#60;br /&#62;
크롬 웹브라우스 확장 기능: &#60;a href=&#34;http://goo.gl/PAkO&#34; rel=&#34;nofollow&#34;&#62;http://goo.gl/PAkO&#60;/a&#62;&#60;/p&#62;
&#60;p&#62;질문 내용에 대해서 간단히 답변하겠습니다. &#60;/p&#62;
&#60;p&#62;1. 인용하신 부분은 영국 성공회의 1662년 기도서에 나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영국 성공회의 공식 기도서는 1662년 공동 기도서입니다. 2000년에 나온 [공동 예배]는 이 기도서에 대한 대안 기도서로 채택된 것입니다. 아무리 [공동 예배]를 널리 쓴다 해도 여전히 1662년 기도서가 공식 기도서로 남아 있습니다. 위의 기도서 사이트는 그래서 1662년 기도서(BCP)와 2000년 [공동 예배](CW)의 성무일도를 함께 제공하고 있습니다.) &#60;/p&#62;
&#60;p&#62;역사적 기원을 보자면, 인용한 내용은 1549년 최초의 기도서에는 없다가, 두번째 기도서인 1552년 기도서부터 등장합니다. 그리고 1662년 기도서에도 이어졌습니다. 매일 기도를 드리기 전에 '참회 예식'의 성격을 지닌 것입니다. 그 부분은 중세 말기에 널리 쓰이던 참회 예식, 혹은 기도문에서 나왔고, 종교개혁기 다른 개신교에서도 널리 사용되던 것입니다. &#60;/p&#62;
&#60;p&#62;한국의 1965년 기도서에는 이 부분이 없습니다. 제 손 앞에는 1965년 한국 기도서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전 우리말 기도서에는 어떻게 나와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도서관을 통해서 접근이 가능한 분은 확인하시고 이곳에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60;/p&#62;
&#60;p&#62;2. 이 참회 예식을 사용하는 것은 좋은가? 사람마다 호불호가 있을 것입니다. 1662년 기도서 전례 지침(루브릭)에도 이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여유를 두었습니다. 현대 기도서 연구, 특히 성무일도(매일기도) 연구와 그 사목적 적용을 고민하는 처지에서는, [공동예배]와 우리말 기도서(2004년)에 있는 대로, &#34;주님, 우리 입을 열어 주소서&#34;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우리의 입을 여는' 시점에 그 말 뜻에나 그 행동에 맞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말 기도서에서 '개회 성가'를 할 수 있다는 부분도, 선택사항이긴 하지만, 그리 적절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다만, 잠시 침묵하다가 &#34;우리 입을 열어 주소서'로 시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 것입니다. &#60;/p&#62;
&#60;p&#62;그러나, 위에 말씀드린 대로, 이는 사람마다 호불호가 있는 것이고, 특히 성무일도를 개인 기도를 드리는 터에, 이 참회 예식을 사용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개인의 선택 사항입니다. 또, 이것을 다른 경우에도 개인 혹은 공동체의 '참회'를 위한 기도와 순서로 사용해도 좋을 것입니다. &#60;/p&#62;
&#60;p&#62;3. 한편, 영국 성공회 [공동 예배](CW)의 성무일도(매일기도)는 그 전에 나온 성공회 프란시스 수도회 유럽 관구의 Celebrating Common Prayer (1992)라는 수도회 성무일도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이 성무일도서는 우리 말로 번역되었고, 이미 한국의 성공회 프란시스 수도회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수도회에 연락하시면,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무일도를 우리 말로 제대로 드리기를 원하시면, 그 성무일도서를 권합니다.&#60;/p&#62;
&#60;p&#62;4. &#34;Jesus&#34; 와 &#34;Jesu&#34; 의 차이 - 단순히 라틴어와 혼용된 중세 영어 표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는 &#34;Jesu Christe&#34; 식의 라틴어 표기가 그대로 쓰이는 일이 많았습니다.   &#60;/p&#62;
&#60;p&#62;좋은 질문으로, 배움과 나눔의 기회를 열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Elyot on "사도 바르나바 축일의 매일기도 본문에 대하여"</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79#post-1038</link>
<pubDate>금, 11 6월 2010 23:55:04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38@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신부님, 너무 감사드립니다. 궁금한 것이 다 풀렸어요 ^^.&#60;/p&#62;
&#60;p&#62;사실, 영국 성공회 매일 기도를 종종 찾곤 했던 이유는, 그곳 홈페이지 매일 기도에 &#34;Introduction&#34; 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 즉 맨 처음에 &#34;Dearly beloved brethren, the Scripture moveth us in sundry places&#34; 로 시작해서 &#34;so that at the last we may come to his eternal joy; through Jesus Christ our Lord&#34; 까지 이어지고 뒤에 주기도문이 덧붙은, 그러니까 &#34;주여 우리의 입술을 열어 주소서&#34; 전 까지 계속되는 부분이 너무 좋았기 때문입니다. &#60;/p&#62;
&#60;p&#62;저도 매일 그리고 하루 종일 듣고 말하는 언어가 한국어이니까, 한국어로 기도드릴 때가 가장 좋습니다 ^^.&#60;/p&#62;
&#60;p&#62;그 부분이 혹시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면,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요 ? 그 부분도 혹시, 일테면 &#34;은혜로운 빛이여 (Phos Hilaron)&#34; 이나 &#34;당신은 하느님 (Te Deum)&#34; 처럼 확실한 전거가 있는 기도문인가요 ? &#60;/p&#62;
&#60;p&#62;그리고, 앞서 언급한 부분 중에도 그렇지만, 1662년 기도서에 종종, 아마도 매주의 본기도 부분이었던 것 같은데, &#34;Jesus&#34; 가 아니라 &#34;Jesu&#34; 라고만 표기되어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영어에서도 그렇게 쓰는 용례가 있는지 궁금합니다...&#60;/p&#62;
&#60;p&#62;신부님, 갑자기 질문을 쏟아놓아서 죄송합니다. 궁금한 게 많은데 달리 여쭈어 볼 데가 없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바쁘시겠지만, 가르쳐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viamedia on "사도 바르나바 축일의 매일기도 본문에 대하여"</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79#post-1037</link>
<pubDate>금, 11 6월 2010 12:20:22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37@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Elyot / &#60;/p&#62;
&#60;p&#62;안녕하세요? 좋은 질문을 주셨습니다. 기도서에 따라 성서 독서를 하고 성무일도를 드리는 일은 성공회 신앙생활을 깊어지게 하는 좋은 일입니다. 성공회 전통을 깊이 체험하고, 그 신앙을 깊게 하리라 생각합니다. 간단히 답변드리겠습니다. &#60;/p&#62;
&#60;p&#62;1. 성서정과(Lectionary)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성공회 기도서들은 주일 성찬례를 위한 성서정과, 성무일도를 위한 성서정과를 제공합니다. 즉, 같은 축일이라 하더라도, 성찬례 성서정과와 성무일도 성서정과는 다릅니다. 게다가 한국 성공회 기도서(2004년)는 이에 덧붙여 주간(매일) 성찬례를 위한 성서정과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한편, 성공회는 각 관구 교회마다 독립적인 전례서(기도서)를 마련하여 사용할 수 있기에, 같은 축일이라 하더라도 성서정과도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 성공회 기도서의 경우 대부분의 성서정과를 영국 성공회의 [공동 예배](Common Worship, 2000)에서 차용했습니다.&#60;/p&#62;
&#60;p&#62;2. 질문하신 &#34;사도 성 바르나바&#34; 축일에 대한 한국 성공회 기도서의 성서정과는 축일 성찬례를 위한 성서 본문입니다. 그리고 지적하신 영국 성공회 홈페이지([공동예배 성무일도] 기반)와 오레무스 사이트(미국 성공회 1979년 기도서 기반)에서 보이는 것은 성무일도에 기반한 축일 본문입니다. 그러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또, 영국 성공회와 미국 성공회는 각자 다른 축일 성서정과를 사용하고 있으니 다른 것이고요. 한편, 이상하게 한국 성공회 기도서는 축일을 위한 성무일도 성서정과를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저 자신은 이 기도서 작업에 참여한 바 없으므로, 실수인지, 어떤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습니다.&#60;/p&#62;
&#60;p&#62;3. 성무일도를 위한 독서는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사정에 따라 편하게 나눠 사용할 수 있습니다(꼭 아침, 저녁기도를 바치지 못하는 경우에는 특히). 그러나 관습상, 아침기도에는 아침 기도 시편과 첫 번째 독서(대체로 구약성서), 그리고 저녁기도에는 두 번째 독서(대체로 서신서)와 복음서를 읽습니다. 축일의 경우, 한국 성공회 기도서는 축일 용 성무일도 성서정과를 마련하지 않았으니, 개인이 사용할 때에는 당일 성서정과(성찬례)를 비슷하게 나눠서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60;/p&#62;
&#60;p&#62;4. 한국에서 한국 성공회에 출석하시는 것이니, 되도록 한국 기도서를 따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주일 성찬례 본문은 세계 성공회가 전반적으로 개정 공동 성서 정과(Revised Common Lectionary)를 사용하고 있으니, 거의 차이가 없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성무일도 성서정과는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입니다. &#60;/p&#62;
&#60;p&#62;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Elyot on "사도 바르나바 축일의 매일기도 본문에 대하여"</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79#post-1036</link>
<pubDate>금, 11 6월 2010 09:34:59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36@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안녕하세요 ^^. 요즘 기도서를 이용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한 신자입니다...&#60;/p&#62;
&#60;p&#62;마침 오늘이 사도 바르나바 축일이어서, 여기에 맞는 독서를 해보려고 하는데요, 한국 성공회 기도서, 그리고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다른 기도서들마다 각기 다른 본문을 제시해 주고 있어서 혼란스럽습니다.&#60;/p&#62;
&#60;p&#62;한국 성공회 기도서는, 욥기 29.11, 시편 112, 사도 11.19-30, 요한 15.12-17 를 읽으라고 제시해 주고 있는데요,&#60;/p&#62;
&#60;p&#62;영국 성공회 홈페이지에 매일 업데이트 되는 기도서에는, 아침 기도: 시편 100,101,117, 예레미아 9.23,24, 사도 4.32-37, 저녁 기도: 시편 147, 전도서 12.9-14, 사도 9.26-31 로 되어 있어요,&#60;/p&#62;
&#60;p&#62;그리고 오레무스 홈페이지에 나오는 기도서에는, 시편 59-61, 전도서 31.3-11, 사도 4.32-끝 으로 되어 있습니다.&#60;/p&#62;
&#60;p&#62;왜 이렇게 다 다른지요 ? 그리고 한국 성공회 기도서의 성무일과 성서정과표에는 왜 시편 외 본문은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가 구분되어 있지 않은지요 ?&#60;/p&#62;
&#60;p&#62;아 참, 그리고, 한국 성공회 기도서 성무일과 성서정과표에는, 구약 한 부분, 서간 한 부분, 복음 한 부분, 이렇게 제시되고 있는데요, 그럼 아침 또는 저녁 기도 중에 1 독서와 2 독서를 나눌 때, 이 셋을 어떻게 할당시켜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구약과 서간을 합쳐서 1 독서로 하고 복음만 2 독서로 읽을지; 아니면 서간도 복음도 신약이니까, 구약만 1 독서에서 읽고 서간과 복음을 합쳐서 2 독서에서 읽을지... &#60;/p&#62;
&#60;p&#62;어떻게 드리는 기도든 다 좋은 것이겠지만, 기왕 성공회에 와서 성공회 방식을 따르기로 했으니까, 가장 적합한 형식을 찾아서 익숙해 지고 싶은데, 쉽지가 않네요 ^^.&#60;/p&#62;
&#60;p&#62;가르침 부탁드립니다 ^^.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viamedia on "타교파 신자 영접 및 타교파 성직자 전입 - 절차와 예식"</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78#post-1035</link>
<pubDate>수, 09 6월 2010 11:13:42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35@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60;strong&#62;타교파 신자 영접 및 타교파 성직자 전입&#60;/strong&#62;&#60;/p&#62;
&#60;p&#62;성공회와 같은 전례적 전통의 교회에서는 성사(sacrament)의 여부는 신자 생활과 그 자격에 중요한 문제이다. 그 중요성을 여기서 따지지는 않겠고, 사목 현장과 교회의 질서 안에서 경험하는 두 가지 문제를 예를 들어서 살펴본다. 교회 안에서 많은 이들이 혼란스러워 하나는, 견진성사의 문제, 타교파 신자 영접식, 그리고 타교파 성직자 전입의 문제이다. 이는 모두 독립적인 문제인데, '하나'로 본 것은, 그 해결의 원칙이 같기 때문이다. 그 원칙을 되새겨서 그 혼란의 원인을 찾아보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좋겠다. 또, 여기서는 그 문제의 맥락인 '예식'에 한정하도록 한다.&#60;/p&#62;
&#60;p&#62;다시 말해, 여기서는 견진성사 자체를 둘러싼 신학적 논쟁, 또 성직에 대한 이해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다루지 않고, 사목 현장에서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문제들만 다루겠다. 필요하면, 다른 기회에 그 신학적 질문들은 발전시켜 볼 수도 있다. &#60;/p&#62;
&#60;p&#62;다시 문제의 사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60;/p&#62;
&#60;p&#62;1) 성공회 아닌 다른 그리스도교파에서 세례받은 이는 어떻게 성공회 신자가 되는가?&#60;br /&#62;
2) 다른 교파에서 견진성사를 받은 신자의 경우, 성공회는 그 견진성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60;br /&#62;
3) 다른 교파의 성직자가 성공회 성직자가 되고자 할 때, 그에 합당한 성직자 전입의 예식은 어떤 것인가?&#60;/p&#62;
&#60;p&#62;&#60;strong&#62;사례 1: 성공회가 아닌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의 교파에서 세례받은 이들은 어떻게 성공회 신자가 되는가?&#60;/strong&#62; &#60;/p&#62;
&#60;p&#62;한국 성공회는 2004년 기도서를 통해서 성공회가 아닌 다른 그리스도교파에서 받은 세례를 인정하고, 이들을 성공회 신자로 맞아들이는 '타교파 신자 영접식'이라는 예식을 기도서 '부록'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그 목표는 '영성체' 참여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하지 않던 냉담신자를 위해서도 이 예식을 변형하여 사용하도록 했다. 무엇보다도 성공회 신앙 전통을 교육하고 준비시켜 되도록 빨리 영성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사목적인 배려라고 생각한다. 또 냉담신자도 이런 예식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되새길 수 있으니 새로운 다짐과 시작에 좋은 일이다. 그러나 냉담신자의 경우 그가 세례만 받았는지, 견진성사까지 받았는지에 따라서 이 예식을 다르게 적용해야 할 것이다.&#60;/p&#62;
&#60;p&#62;&#60;strong&#62;사례 2: 다른 교파에서 견진성사를 받은 그리스도교 신자의 경우, 성공회는 그 견진성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다시 견진성사를 베풀어야 하는가? 아닌가?&#60;/strong&#62;&#60;/p&#62;
&#60;p&#62;1) 견진성사가 없는 한국 개신교 출신의 신자 대부분이 해당된다. 견진성사를 받은 적이 없으니, 일정한 교육을 받은 후, 견진성사를 받는다.&#60;/p&#62;
&#60;p&#62;2) 천주교나 정교회(정교회는 독립적인 견진성사가 없이, 입교례 Christian Initiation [세례-도유-성찬례] 에 포함되어 있다.)에서 견진성사를 받은 신자가 성공회에 왔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60;/p&#62;
&#60;p&#62;견진성사는 그 자체로 논란이 많으나, 현재 상황에서 성령의 표지를 나눔으로써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나고 신앙을 굳건히 하려는 의미의 성사로 일단 이해한다. 게다가 이 성사는 교회 일치의 상징인 주교가 이 성사를 집전하고 기름 바르며 안수함으로써, 교회 공동체와의 연합을 더욱 더 극명하게 드러낸다(이 말은 견진을 받아야만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세례와 위의 타교파 신자 영접식으로 이미 이뤄진 것이다.) &#60;/p&#62;
&#60;p&#62;이렇게 보면, 타교파에서 견진성사를 받았다 하더라도, 교회 공동체와의 연합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는 이 견진성사의 맥락에서, 타교파에서 견진을 받은 신자를 받아들이는 순서가 자리 잡으면 될 것이다. 그런데 한국 성공회 2004년 기도서에는 이에 대한 배려가 없다. 견진성사의 예식대로 다 받으라는 말인가? 분명 위의 타교파 신자 영접식은 견진성사에 준하지 않고, 견진성사를 준비하는 단계로 설정되어 있다. &#60;/p&#62;
&#60;p&#62;대안은 해당자들을 견진성사 안에 초대하되, 기름 바르는 예식은 하지 않고, 그 순서 부분에서 환영의 말과 축복의 기도를 하는 것이라고 본다. 현 기도서에 이 내용이 없다하더라도 교회는 교구 의회와 관구 의회를 통하여, 혹은 주교의 지침에 따라 해당 기도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성공회 안에서 이미 견진을 받았으나 냉담했던 신자를 위한 예식도 이 맥락에서 해야 할 것이다.&#60;/p&#62;
&#60;p&#62;&#60;strong&#62;사례 3: 다른 교파의 성직자가 성공회 성직자가 되고자 할 때, 그에 합당한 성직자 전입의 예식은 어떤 것인가?&#60;/strong&#62;&#60;/p&#62;
&#60;p&#62;1) 성공회는 현재 대부분의 개신교 전통의 교회 직제를 성직(Holy Order)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개신교 출신의 안수 받은 목회자는 성공회 성직서품성사에 따라 서품받아야 한다.&#60;/p&#62;
&#60;p&#62;2) 성공회는 이른바 사도적 계승의 전통에 있는 그리스도교파의 성직 유효성을 인정한다. 한국 성공회는 그 교파의 목록을 제시하지 않았으나, 천주교, 정교회의 대부분 교회가 이에 포함된다. &#60;/p&#62;
&#60;p&#62;3) 그렇다면, 2)에 해당한 전직 성직자가 성공회로 전입하고자 할 때 어떤 예식의 맥락에서 성공회 성직자로 인정되는가? 후보자가 성공회로 전입하는 여러 과정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복잡한 과정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성공회 신자가 되기 위한 절차, 교회의 (성공회) 성소 식별 기간, 주교의 검토와 허락, 특정한 교육 기간, 그 밖의 조사(심리조사, 과거행적 조사)를 거칠 것이다. &#60;/p&#62;
&#60;p&#62;이 과정에서 예식과 관련된 부분은, '성공회 신자가 되는 절차 예식' 그리고 '성공회 성직자로 인정되는 예식'이다. &#60;/p&#62;
&#60;p&#62;한국 성공회에는 몇 번 성직자 전입 사례가 있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처리가 매우 불투명한 것 같다. 그러니 예식에만 한정하여 다음과 같이 해야 마땅하다고 본다. &#60;/p&#62;
&#60;p&#62;- 개신교에서 안수받은 목회자는 그 교파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확인하고, 타교파 신자 영접식을 하고 영성체에 참여하며, 교육을 거쳐 견진 성사를 받아야 한다. 그런 뒤 성공회 서품 과정에 따라, 부제 서품과 사제 서품을 받아야 한다.&#60;/p&#62;
&#60;p&#62;- 위에서 말한 사도 계승 전통의 교회, 즉 천주교와 정교회의 전직 성직자는, 그 교파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확인하고, 타교파 신자 영접식을 하고, 영성체에 참여하며, 교육을 거쳐 견진 성사에 참여하고, 주교의 영접 기도를 받는다. &#60;/p&#62;
&#60;p&#62;- 위에서 말한 사도 계승 전통 교회의 전직 성직자는 위의 과정을 다한 뒤에, 성공회 성직자(부제/사제)로 전입된다. 이때 이 전입의 맥락은 위의 세례/견진의 맥락과 같이, 서품성사의 맥락에서 이뤄져야 한다. 서품 성사의 모든 순서에 참여하되, 서품 서약과는 다른 성공회 공동체 안에서 성공회 성직자로서 서약하는 예문에 따라 서약한 뒤, 안수 과정을 생략하고 성공회 성직자로 축복의 기도를 받으면 될 것이다.&#60;/p&#62;
&#60;p&#62;- 몇 가지 문제: 실제로 두 가지 문제에서 혼란스럽다고 들린다. &#60;/p&#62;
&#60;p&#62;첫째, 전입 대상 성직자가 이미 성직 서품까지 받은 마당에 견진성사에 준하는 영접식에 참여할 필요가 있느냐, 성직 전입식 과정 속에서 모두 겸하여 해소될 문제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 방법은 신자와 성직자를 차별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다른 교단에서 견진성사를 받은 신자는 견진에 준하는 영접을 받는데, 전직 성직자는 이 과정을 생략한다는 말은 세례받은 모든 신자의 평등성이라는 점에 위배되는 일이다. 모든 성직자는 동등한 세례를 나눈 모든 신자에게서 나온다.&#60;/p&#62;
&#60;p&#62;둘째, 성직서품에서 특별히 안수받지 않을 바에야 굳이 서품식에 해당자를 참여토록 할 필요가 있는가, 혹은 복종서약이나 성직서약을 공개적으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매우 특수한 사정에서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성직 서품 성사의 맥락 안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한 교단 전통의 성직자는 같은 '맥락' 안에서 교회로 서품을 받는 것이다. 이 점을 충분히 드러내야 한다고 본다. 게다가 성직자의 전입이 주교 개인 앞에서 하는 복종 서약이나 성직 서약으로 축소되어 버릴 가능성이 있다. 어떤 사안의 ’맥락'을 상실하면 그 의미가 축소되고 왜곡을 낳는다. &#60;/p&#62;
&#60;p&#62;&#60;strong&#62;요약&#60;/strong&#62;&#60;/p&#62;
&#60;p&#62;- 누구든지 성사의 전체 맥락을 따라 신자 생활과 그 성장을 향유하도록 이끄는 것이 좋다. 그것이 전례적 전통의 교회가 신앙을 이끄는 주된 방법이다.&#60;br /&#62;
- 그런 점에서 어떤 신자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세례와 견진이라는 '맥락' 안에서, 필요하면 그에 준하는 의례를 통하여 교회의 신앙 생활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60;br /&#62;
- 그러므로 타교파에서 견진을 받은 신자는 견진성사의 맥락 안에서, 견진성사에 준하는 영접 예식이 필요하고 이를 실행해야 한다. (전입하는 타교파 신자와 성직자 모두)&#60;br /&#62;
- 그러므로 타교파에서 서품을 받은 성직자는 서품성사의 맥락 안에서, 서품성사에 준하는 전입 예식이 필요하고 이를 실행해야 한다.&#60;br /&#62;
- 혼란을 없애기 위해서, 사목자들은 이 원칙과 과정을 숙지하여 신자들에게 안내해야 한다.&#60;/p&#62;
&#60;p&#62;논평 요청: 부족하거나 문제가 있는 부분이 있으면 살펴서 고치겠습니다.&#60;/p&#62;
&#60;p&#62;원문 작성: 주낙현 신부 2010년 5월 30일 오전 9:00 (한국시각)
&#60;/p&#62;</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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