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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최근 글</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link>
<description>A Korean Anglican Theology & Liturgy Forum</description>
<language>en</language>
<pubDate>Tue, 06 Jan 2009 18:48:09 +0000</pubDate>

<item>
<title>viamedia on "선교와 복음화 - 선교의 다섯가지 지표"</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47#post-383</link>
<pubDate>화, 06 1월 2009 06:52:22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383@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우리가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는 선교의 개념은 무엇일까요? 최소한 성공회는 선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성공회 안에서 선교에 대한 어떤 공동의 이해를 갖고서 선교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 속에서, 이미 십수년 전에 번역해서 소개한 바 있거니와, 최근 세계성공회 선교와 복음화 회의에서 재확인하고 있는 선교에 대한 이해를 다시 나누고, 우리가 갖고 있는 선교 개념과 행동을 되돌아 보았으면 해서 올립니다.&#60;/p&#62;
&#60;p&#62;아래는 1999년 세계성공회 선교와 복음화 위원회(MISSIO)가 재천명한 선교의 다섯 가지 지표를 요약 번역한 것입니다. &#60;/p&#62;
&#60;p&#62;원문 전문: &#60;a href=&#34;http://www.anglicancommunion.org/ministry/mission/fivemarks.cfm&#34; rel=&#34;nofollow&#34;&#62;http://www.anglicancommunion.org/ministry/mission/fivemarks.cfm&#60;/a&#62;&#60;/p&#62;
&#60;p&#62;선교와 복음화 - 선교의 다섯가지 지표&#60;/p&#62;
&#60;p&#62;교회의 선교는 그리스도의 선교이다. 그러므로, 선교는,&#60;/p&#62;
&#60;p&#62;-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된 소식을 선포하는 일이다.&#60;br /&#62;
- 새로운 신자들을 가르치고, 세례 주고, 키워 내는 일이다.&#60;br /&#62;
- 사랑의 봉사를 통하여 인간의 필요에 응답하는 일이다.&#60;br /&#62;
- 사회의 불의한 구조를 변화시키도록 노력하는 일이다.&#60;br /&#62;
- 창조 질서를 온전히 보존하고, 지구 생명을 지탱하고 새롭게 하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60;/p&#62;
&#60;p&#62;선교: 복된 소식을 선포하는 일&#60;/p&#62;
&#60;p&#62;선교의 이 첫번째 지표는 모든 선교를 요약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선교 사명 자체를 요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4:17, 마르 1:14-15, 루가 7:22, 요한 3:14-17).  이것은 다섯 지표 가운데 하나 혹은 첫째가 아니라, 모든 우리의 모든 선교 활동 전체를 담은 핵심 선언이다.&#60;/p&#62;
&#60;p&#62;맥락 속에 있는 선교&#60;/p&#62;
&#60;p&#62;모든 선교는 그 특수한 상황, 즉 맥락 안에서 전개된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한 근본적인 일치가 있다 하더라도, 선교의 형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와 시간, 문화의 다양성에 따라 형성되어, 그 안에서 구체화하여 선포한다. &#60;/p&#62;
&#60;p&#62;선교 - 전례의 거행과 감사&#60;/p&#62;
&#60;p&#62;성공회 전통 가운데 중요한 특징은 예배가 우리의 공동 생활에 중심적이라는 우리의 믿음이다. 그러나 예배는 우리가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서 부수적으로 하는 어떤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예배 그 자체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증언이다. 우리의 생명과 생활 전체가 거룩하다는 표징이요, 우리 삶의 희망과 의미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할 때라야 찾을 수 있다는 표지이다 (로마 12:1). 우리가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그분의 죽음을 선포한다(1고린 11:26). 우리의 전례 생활은 우리가 받은 선교 소명에 생명을 주는 필수적인 것이다. 전례 생활은 선교의 다섯가지 지표에 나타난 공적인 증언 형태를 떠받치는 근본이다.&#60;/p&#62;
&#60;p&#62;교회는 선교이다&#60;/p&#62;
&#60;p&#62;이 다섯 가지 지표는 선교의 실천을 강조한다. 신실한 실천이야말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응답에 대한 잣대이다 (마태 25:31-46, 야고 2:14-26). 그러나 우리를 도전하고 있는 문제는, 단지 선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교의 백성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교회 생활 전반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통치의 표지가 되고, 그것을 미리 맛보는 곳이 되고,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60;/p&#62;
&#60;p&#62;선교의 하느님의 행동이다.&#60;/p&#62;
&#60;p&#62;&#34;선교는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 선교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우리의 발명품이거나 선택 사항이 될 수 없다&#34; (1998년 람베스 회의). 선교의 주도권은 하느님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복음을 살고, 이를 선포함으로써 하느님의 선교를 위해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을 뿐이다. 선교의 다섯 가지 지표는 이 점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60;/p&#62;
&#60;p&#62;선교와 삼위일체 &#60;/p&#62;
&#60;p&#62;선교는 창조하고, 화해를 만들며, 변화를 일으키는 하느님의 행동이다. 이는 삼위일체 안에서 발견되는 사랑의 공동체를 그대로 따르는 일이다. 이 행동은 예수라는 인격 안에서 모든 인간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하느님 통치의 표지요, 미리 맛봄이요, 도구가 된 하느님의 백성이 성령의 힘 안에서 신실하게 실천하고 증언할 때 드러난다. &#60;/p&#62;
&#60;p&#62;우리는 하느님의 변화시키는 선교에 우리 자신을 동참시킬 때 일치를 이룬다. 선교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말하는 지를 밝히는 초석이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viamedia on "전례에 대한 투정, 그 투정에 대한 투정"</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42#post-378</link>
<pubDate>수, 17 12월 2008 13:01:59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378@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주: 여러가지 답답한 마음에, 성직자 카페에 미숙한 글을 하나 올렸습니다. 요즘 인터넷에서는 이런 걸 &#34;떡밥&#34;이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일부러 얼기설기 거칠게 엮었서, 성직자들에게 관심을 환기시키고, 이 포럼에 대한 참여도 진작시켜보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그럴만도 합니다. 많은 분들의 조언과 참여가 필요합니다. 투정은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다 핑계거든요.^^ 하여튼 아래와 같이 적어놓고 고기 물기를 기다려 봅니다. 뭐라들 하시는지. 여러분은 뭐라 하실 건가요?&#60;/p&#62;
&#60;p&#62;---&#60;/p&#62;
&#60;p&#62;성공회에 온 이래로, 우리 성공회의 전례에 대한 갖가지 투정, 비판과 불평을 들었습니다. 아마 이 때문에 전례를 공부를 하기로 늦게야 마음 먹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투정과 불평은 있고, 이를 한단계 넘어서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고만 있는 것을 오래도록 보던 참이었습니다. 마침내 이런 투정이 정말 진정성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투정에 대한 투정을 늘어 놓아 보려고 합니다.&#60;/p&#62;
&#60;p&#62;좀 도발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런 투정은 성공회에서 일상화되어버린 어떤 자기 비하의 표현인가요? 아니면 어떤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비판의 대상을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돌리려는 면피용 언동들인가요?&#60;/p&#62;
&#60;p&#62;다른 식으로 말해보겠습니다. 우리는 내내 성공회 정체성이 문제네, 교회론이 없네, 신학적인 뒷받침이 명확하지 않네 불평해 왔습니다. 또 전례의 다양성이 없고, 교회의 성장에 오히려 방해가 되네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성공회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고 하면, 교회론에 대해서, 신학에 대해서, 전례에 대해서 말을 하고, 공부를 하고, 논의하고, 교회 현장에 대해서 터놓고 이야기하자고 하면,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멍석을 펴 놓으면 오히려 놀라고 슬금슬금 피합니다. 그리고 그러지 못하는 또다른 이유를 갖다 댑니다.&#60;/p&#62;
&#60;p&#62;제가 경험하기로는, 실제로 서울교구는 위와 같은 문제들을 위해서 다양한 논의와 워크숍, 세미나 등을 전개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들리는 말은 지난 20년 동안 늘 같은 투정입니다. 시간이 변해도 이 투정은 변하는 법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궁금합니다. 말씀 좀 해주세요.&#60;/p&#62;
&#60;p&#62;개인적으로 3년 전부터 부족하나마 전례 포럼 혹은 세미나를 통해서 신부님들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또 그 와중에 신학생도 만나고, 수도자들도 만나고, 교회에 찾아가 신자들도 만나서 전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제 이야기를 가장 열심히 듣고 받아들이고 대화에 참여하는 정도를 순서로 나열하면, 신학생 &#38;gt; 신자 &#38;gt; 수도자 &#38;gt; 성직자 순이었다는 겁니다. 신학생들이야 성공회에 첫발을 내디딘 친구들이 많았고, 전례 신학이 새로운 탓도 있었지만, 신자들의 관심은 대단히 놀랄 만한 것이었습니다.&#60;/p&#62;
&#60;p&#62;개인적인 이야기로 더 들어가보면 이렇습니다. 전례 문제에 대해서 투정이나 비판이 많은 분들치고, 오히려 제가 진행했던 전례 세미나나 포럼에 열심히 참석한 분이 별로 없었다는 겁니다. 어떤 것이 문제여서 그 내용을 다루고자 하는데, 이를 다루는 공간과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내내 자기 만의 경험과 논리로 고집하고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 곤란은 어떤 사안에 대한 동의 여부때문에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이야기를 풀어나갈 공유된 자료들과 고민들이 함께 나눠지지 못했던 것에서 비롯됩니다. 전례 세미나나 전례 포럼은 최소한 어떤 공통의 기반을 같이하고, 이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자는, 다소 실용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같은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공동의 신학적 문법과 용어를 갖지 않으면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60;/p&#62;
&#60;p&#62;신학 문제도 그렇습니다. 대단히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성공회 신학자가 없네, 교회론을 논의할 만한 이가 없네 하고 내내 운운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불평을 위한 소재거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신부님들 가운데 실은 성공회 신학에 관심있는 분들이 별로 많지 않은 듯 합니다. 그런 처지에서 어떤 분이 신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하자고 하면, 너무 현학적이네, 원칙적이네, 현실성이 떨어지네 하고 종종 무시하고 지나갑니다. 이런 태도라면  신학의 문제를 가지고 불평한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정치 과잉이 된데는 이런 신학적 논의와 성찰에 대한 무시 탓이 크다고 봅니다.&#60;/p&#62;
&#60;p&#62;마지막 투정 하나 하겠습니다. 제 잘못도 지적해 주십시오. 전례와 신학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 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이라는 온라인 인터넷 공간도 만들고, 오프라인으로 직접 만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잘 안됩니다. 깔린 멍석에 손님이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제가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서라고 말합니다.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런 반론도 있습니다. 현장에서 어느 누구도 물어보지 않고, 이야기를 제기하지 않는데, 책을 파고 보는 사람이 내 놓을 수 있는게 뭐냐고? 게다가 현실에 밀접한 이야기를 주제로 던져놓아도 별 반응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니, 인터넷 포럼의 활성화를 위해서 조언을 주십사 하는 겁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viamedia on "서울 주교좌 성당 성찬례 동영상 토론"</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34#post-377</link>
<pubDate>월, 15 12월 2008 10:52:14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377@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testmankr / 첫 문장은 정확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좀더 설명을 해 주시겠어요?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testmankr on "서울 주교좌 성당 성찬례 동영상 토론"</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34#post-376</link>
<pubDate>목, 11 12월 2008 21:50:26 +0000</pubDate>
<dc:creator>testmankr</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376@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갑자기 상갓집 개는 빨간 넥타이로 묶는다는 현사가 생각나는 이유가 뭘까요? 전례를 중시합니다만, 그 &#34;예전&#34; 양식과 내가 있는 교회의 현실을 조화롭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큰 뜻을 어기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viamedia on "예배 - 윌리암 템플의 "영성 신학적" 정의"</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35#post-368</link>
<pubDate>토, 08 11월 2008 16:35:00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368@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예배는…&#60;/p&#62;
&#60;p&#62;예배는 우리의 본성 전체를 하느님께 따르도록 내어 놓는 것이다.&#60;br /&#62;
예배는 하느님의 거룩함으로 우리의 양심을 회복하며,&#60;br /&#62;
하느님의 진리로 우리의 생각을 자라나게 하고,&#60;br /&#62;
하느님의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정화하고,&#60;br /&#62;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60;br /&#62;
하느님의 뜻에 우리의 의지가 따르도록 내어 놓는 것이다.&#60;br /&#62;
예배 안에서 이 모든 것이 모아질 때,&#60;br /&#62;
이기심이 물러나고 우리 본성의 가능성인 무아가 드러날 것이다.&#60;/p&#62;
&#60;p&#62;William Temple, Readings in St. John’s Gospel, 1939, p. 68.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cras on "감사 성찬례의 공동 집전에 대한 질문"</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06#post-367</link>
<pubDate>수, 05 11월 2008 00:00:06 +0000</pubDate>
<dc:creator>cras</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367@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대단할 것 없는 제 글을 읽어주시고 생각을 정리하도록 도와주시는 신부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60;/p&#62;
&#60;p&#62;신부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저 역시 혼자 드리는 감사 성찬례는 전례 정신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행위가 사제 개인의 영성에 도움이 된다고도 여겨지지 않습니다. 자칫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직무(charisma-오히려 직무라는 말보다 은사라고 표현 해야 될것 같아 병기했습니다)를 부여 받은 사제 본연의 존재 의미가 개인의 기복적인 신앙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성사 집전자로서 사제와 다른 어떤 사람이 함께 할때에(최소한 신앙적 연대를 가진 복수의 사람들이 함께 할때에) 합당한 감사 성찬례 봉헌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성무일도와 같은 시간전례는 그 성격상 홀로 기도하는 경우에도 공적인 전례로 간주 될 수 있겠으나 교회의 공식적인 예배인 전례는 언제나 신자 공동체와 함께 할때에야 그 본연의 의미가 있기 때문임은 신부님께서 설명해주신 부분을 통해서 더욱 명확해 진 것 같습니다.&#60;/p&#62;
&#60;p&#62;앞서 신부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성사의 집행자이면서도 수혜자인 성직자의 전례적 위치는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 될 주제인 듯 합니다. 최초의 단순한 질문이 여기까지 발전되어 오면서 공동집전(concelebration)이란 전례 행위 속에서 많은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다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60;/p&#62;
&#60;p&#62;어떠한 규정이나 틀을 만든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겠지만 하나의 모델로서 제시될 수 있다면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전례의 독점을 피하고 사제 개인 영성을 위한 감사 성찬례의 사적 소유화도 배척하면서 적절한 방식의 일치와 공동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60;/p&#62;
&#60;p&#62;이미 앞서 cranmerian님께서 미국의 성공회 1979년 공도문을 통해 좋은 모델을 주셨기에 이에 대한 검토를 한다면 감사 성찬례가 보다 풍요로워 질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결국 이러한 작업이 성직자의 전례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잣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성직자의 전례적 위치에 대해 참고가 될 만한 책이나 신학자에 대해 정보를 주시면 부족한 실력과 시간이지만 조금 공부해 보고 싶습니다.&#60;/p&#62;
&#60;p&#62;감사합니다.&#60;/p&#62;
&#60;p&#62;주님 안에서 로렌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viamedia on "감사 성찬례의 공동 집전에 대한 질문"</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06#post-366</link>
<pubDate>화, 04 11월 2008 16:23:48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366@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cras 님, 매우 세심하고 깊은 통찰을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신 말씀에 전반적으로 동의합니다. 오해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염려하여, 몇마디 그저 덧붙입니다.&#60;/p&#62;
&#60;p&#62;우선, 제 글에서 마지막에 덧붙인 이야기는 cras 님이 이상하게 물으신 탓이 아니라, 좀더 확대된 논의를 위해서 제가 보탠 것입니다. 질문하신 의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 &#60;/p&#62;
&#60;p&#62;전례의 독점과 사제직에 대해 하신 말씀에서 제가 별로 이견을 내야 할 내용을 찾을 수 없습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입니다. 다만 오해의 여지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면 이렇습니다. &#60;/p&#62;
&#60;p&#62;공동집전과 관련해서 성직자들이 공동체 전체의 전례라는 상을 훼손시키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겠습니다만, 저 역시 성직자는 하나의 도구(means) 혹은 매개체 (media)로서 성사적(sacramental)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 일원인 것을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다만 특정한 소명(모든 백성은 저마다의 소명이 있습니다)을 통해 이를 그 소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이고, 군림할 직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의 지도자로서 가진 권위를 무시해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직자는 안수 혹은 서품을 통해서 공동체에서 지도자로,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성사 집행자(수여자는 아니라고 봅니다. 은총을 주시는 주체는 늘 하느님이시니까요)입니다. &#60;/p&#62;
&#60;p&#62;사제 혼자 드리는 미사의 문제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사제 개인의 영성 생활을 위해서 그 공동체성이 훼손되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사제들 여럿이 함께 성찬례를 거행한다면 그 역시 공동체의 전례입니다. 다만, 여기서 참여자들이 사제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집전자이거나, 공동집전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60;/p&#62;
&#60;p&#62;사제가 개인의 영성 생활을 위해서 혼자서 성찬례를 드리는 것은 물론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겠으나, 제가 보기에 영성적인 훈련으로도 썩 좋지 않다고 봅니다. 공동체 전체의 행사가 본질은 그 의미가 현격하게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사제 개인의 영성 생활을 위해서라면 성찬례를 영적 독서의 내용으로 삼아 깊이 묵상하며 독서하면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굳이 사제 혼자서 드리는 성찬례를 통해서라야 어떤 영적 훈련과 성장을 이야기한다면, 그(녀)는 사제직의 참 뜻을 다시 돌이켜 봐야 하리라 봅니다. &#60;/p&#62;
&#60;p&#62;마지막으로, 공동 집전의 유익에 대해서 말씀하시 부분에 대해서 저도 공감합니다. 저도 그것을 반대하거나 금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맥락을 살피고 그 뜻을 깊이 새겨서 어떤 오용과 오해가 생겨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60;/p&#62;
&#60;p&#62;깊은 고민으로 발전시켜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cras on "소그룹 감사성찬례"</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82#post-365</link>
<pubDate>화, 04 11월 2008 06:50:01 +0000</pubDate>
<dc:creator>cras</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365@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감히 몇자 적어봅니다.&#60;/p&#62;
&#60;p&#62;아주 오래전 피정때, 있었던 감사 성찬례가 기억이 납니다. 20명 남짓한 소공동체 감사 성찬례였습니다. 그때의 전례가 위에서 보았던 방식과 유사했었습니다. 그 당시 상당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 왔었습니다. 사제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성찬식의 경문을 저희가 함께 읽었기에 말입니다.&#60;/p&#62;
&#60;p&#62;그 때의 감사 성찬례는 마치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과 나눈 첫 번째 감사 성찬례를 떠오르게 했습니다. 전례의 변화와 시도는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믿는 이들이 보다 더 주님을 가까이 체험 할 수 있도록 도와줄 때에 그 가치가 더욱 커지는 것 같습니다.&#60;/p&#62;
&#60;p&#62;저의 개인적인 의견 몇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60;/p&#62;
&#60;p&#62;죄의 고백 나누기 &#60;/p&#62;
&#60;p&#62;사실상 공동체 앞에 자신의 죄를 드러낸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초대교회에서는 죄의 고백이 늘 공동고백으로 진행되었다고는 하나 단한번에 실천되어지는 것이 어려운 현실인듯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전례의 소요시간을 고려했을때 무조건적인 침묵의 시간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에 대한 대안으로 성찰을 위한 지시문- 가장 쉽게는 십계명에 대한 각 계명에 대한 성찰을 유도하는 인도문도 괜찮을 것 같고, 또 다른 방법으로는 사회자나 집전 사제가 성찰로 초대하는 질문들의 나열도 가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성찰의 틀을 구체화하여 실질적인 성찰을 하도록 하는데에 촛점을 둔다는 것입니다. 각 질문과 지시 사이에는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부담스러운 공동 고백(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 생각합니다)을 보다 깊이 있는 성찰로 이끌어 내고 마지막에는 자연스러운 공동고백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60;/p&#62;
&#60;p&#62;성체의 나눔&#60;/p&#62;
&#60;p&#62;성체성사를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이라 이해했을때,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구현한다면 더 효과적인 것 같아 말씀드려 봅니다. 실제로 감사 성찬례에서 성체를 영할때, 사제가 그리스도의 성체라고 성체를 들어 보이며 신자에게 성체를 나누어 줍니다. 위의 그림과 같은 구도 속에서 감사 성찬례를 봉헌한다고 했을때, 소공동체 성찬례에서도 일반 감사 성찬례와 유사하게 제일 먼저 집전사제가 성체를 영하고, 첫번째 신자에게 성체와 성혈을 건네 주면서 &#34;그리스도의 성체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혈입니다.&#34;라고 이야기를 해주고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신 뒤 영성체를 한 사람이 다음 사람에게 전하면서 동일한 방식으로 행한다면 성체 성사의 나눔의 의미를 조금 더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60;/p&#62;
&#60;p&#62;전례 공간의 문제&#60;/p&#62;
&#60;p&#62;저의 의견은 주 신부님께서 그려주신 전례 공간의 모습을 기준으로 평화의 인사 이후에 시작되는 성찬전례에 앞서 제대 주변으로 모두 더 가까이 모여서 성찬식을 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0;/p&#62;
&#60;p&#62;성찬 식탁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서 성찬례를 한다면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먹고 마신다는 의미를 더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입니다. 물론 공간에 따른 제약이나 기타 여건들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리라 여겨집니다.  &#60;/p&#62;
&#60;p&#62;음악의 문제&#60;/p&#62;
&#60;p&#62;이른 아침에 성가를 부른다는 것이 사실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 잘 부르던 사람들도 이른 아침에 부르는 성가는 평소와는 달리 어려울 것입니다. 위의 전례 공간과 같이 집전자를 포함하여 4-5명으로 감사 성찬례를 거행할 경우, 저는 개인적으로 시작 성가, 글로리아, 알렐루야, 성삼경, 파송 성가를 부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시작 성가나 파송 성가 대신 그날 성경 말씀에 부합하는 짧은 시편을 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 방법을 더 제시 하자면, 성가곡의 선곡에 있어서 보다 더 자유롭게 할 수 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감사 성찬례에 함께하는 신자들의 연령과 성향과 취향등도 고려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제 생각은 어떠한 도구라도 그것이 예배의 정신을 살리고 참여하는 이들이 그것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하고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악이 아닌 한 취할 수 있다고 생각 됩니다. 또는 부르기 쉬운 곡조(유행가도 될 수 있을 겁니다)에 적절한 가사를 바꾸어 부르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60;/p&#62;
&#60;p&#62;전례에 대한 시도에 있어 늘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 내용을 담는 그릇이 전례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자칫 변화된 그릇으로 인해 그 내용이 오해를 사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때문인 것 같습니다. 결국 이러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은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신앙인들의 공통된 신앙 감각에 대해 예민할 때 전례의 발전과 이를 통한 신앙의 성장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하고 어쩌면 당치도 않을 수 있는 저의 의견입니다. 잘못된 것은 고쳐주시고 알려주십시요.&#60;/p&#62;
&#60;p&#62;주님 안에서 로렌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cras on "감사 성찬례의 공동 집전에 대한 질문"</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06#post-364</link>
<pubDate>화, 04 11월 2008 05:41:09 +0000</pubDate>
<dc:creator>cras</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364@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주신부님의 보충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60;/p&#62;
&#60;p&#62;예수 그리스도 이후로 수많은 시간이 지났고 이를 통해 각기 다양한 시대와 문화 속에서 지역 교회의 전통이 형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 시킬 수 있었습니다. 서방 교회 그것도 한 지역교회의 구성원으로 보고 배운 저의 지식이 너무도 단편적이고 편협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어진 환경의 한계이라는 핑계로 스스로 우물 안 개구리임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궁금한 부분에 대한 깨우침의 기쁨 보다 제 자신의 모습을 성찰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신부님과 cranmerian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60;/p&#62;
&#60;p&#62;&#34;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앞에 솔직할 때 그 무지는 빛으로 채워질 것이다&#34;&#60;br /&#62;
스스로 이렇게 되뇌어 봅니다. &#60;/p&#62;
&#60;p&#62;제가 처음에 제기한 공동집전에 대한 부분은 신부님께서 말씀해 주신 감사 성찬례 전체에 대한 부분이라기 보다 성찬식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부정확한 질문으로 인해 답변에 어려움이 있으셨을 것 같이 죄송한 마음 전합니다. &#60;/p&#62;
&#60;p&#62;신부님의 답글을 읽으며 제 생각을 다시 정리해 보았습니다. &#60;/p&#62;
&#60;p&#62;1. 전례의 독점과 직무적 사제직&#60;/p&#62;
&#60;p&#62;전례의 독점에 대한 문제는 사실상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전례의 독점을 피하기 위해서는 성직제도 곧 주교, 사제, 부제의 성직자들이 존재해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제가 없는 감사 성찬례의 집전이 불가능한 것이 바로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전례 독점의 문제는 주교제 교회들이 보다 깊은 신학적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다시말해 전례의 의미인 공동체의 공식적인 예배행위라는 부분에 촛점을 맞추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 신부님께서 전례의 독점을 피하기 위한 노력으로 공동집전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다시말해 감사 성찬례가 사제들만의 잔치가 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제 짧은 제 소견으로도 이는 전적으로 전례정신에 부합하는 말씀이라 여겨집니다. &#60;/p&#62;
&#60;p&#62;그러나 사제들 역시 교회의 구성원(하느님의 백성)이며 엄밀히 말하면 사제 이전에 신자라고 생각합니다. 은총의 모든 원천은 성사를 집행하는 성직자가 아니라 하느님이신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감사 성찬례에 참례하는 믿는 신자들에 대한 정의는 참여의 방식(성직자로서 혹은 평신도로서, 또는 성사 집전자로서 혹은 성사 수여자로서-적절한 표현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의미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과는 상관이 없는 하느님의 백성이라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사제들만으로 감사 성찬례를 거행하는 것이 겟토화된 특권층의 전유물로 전락할 수 있겠지만 제 개인적으로 성직의 수락과 서품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닌 교회를 위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사제들 스스로 자신을 특화 시키는 위험이 과연 얼마나 존재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가 과대평가 한것은 아닐것이라 생각합니다. ^^;) 오히려 성직자들만의 감사 성찬례를 금하고 감사 성찬례를 성직자와 평신도가 있을 때에만 봉헌 할 수 있다고 한정 짓게 된다면(신학적으로는 이것이 온전한 의미의 감사 성찬례가 되겠지만-지역교회의 주교와 함께 전도구 주임 신부와 신자들)또다른 신자의 형태인 사제들의 영성적 측면을 너무 소홀히 하는 또다른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어떠한 것도 금지되거나 제한 되지 않았다는 것은 알지만 역할의 구별은 있으되 은총은 구분되어 차등 지급 되지 않는다는 전제 속에서 조금 더 넓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라 여겨졌습니다. &#60;/p&#62;
&#60;p&#62;이렇게 쓰다 보니 결국 사제의 영성이라는 부분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 같습니다. 결국 사제의 정체성과 연결된 것 같다고 여겨집니다. 사제가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인 교회(건물이 아닌 믿는 이들의 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고 할 때, 사제는 빵과 포도주를 살과 피로 변화 시키는 마술사도 특권을 가진 특별한 사람도 아닌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어떠한 것으로 드러나게 해주는 수단적이고 도구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과 동료 사제들을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고 살아야하는 신앙인이어야 한다는 점은 이미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사제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며 사제 역시 구원을 필요로한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어떤 신학자의 말이 떠오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공동집전(그 형태가 다양하고 여러가지일 수 있다고 봅니다. 또한 현재처럼 집전 사제 이외의 사제가 부제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 역시 한 형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성찬식에는 함께 적어도 축성부분을 행하는 것이 보다 더 공동체적인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의 위험성보다 유익함이 더 많지 않나 하는 제 짧은 소견입니다. &#60;/p&#62;
&#60;p&#62;제가 잘못 이해하거나 생각한 것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고 깨우쳐 주십시요.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franciskj on "서울 주교좌 성당 성찬례 동영상 토론"</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34#post-363</link>
<pubDate>일, 02 11월 2008 00:54:47 +0000</pubDate>
<dc:creator>franciskj</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363@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1년간 대성당 복사단을 했었던 기억을 되살리자면..&#60;/p&#62;
&#60;p&#62;어떤 나이든 영국인 관광객이 대성당 전례를 보고서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60;br /&#62;
자기가 어렸을 때 동네 성당에서 하던 그 방식 그대로 하고 있다고 놀라워했다더군요.&#60;/p&#62;
&#60;p&#62;어떤 분은 대성당 전례 매니아(?)이기도 하고&#60;br /&#62;
심지어 향 복사가 향합을 잘 못 흔들면 베테랑 신자분들의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고(?)&#60;br /&#62;
또 어떤 분은 너무 고루하고 복잡, 장황하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60;/p&#62;
&#60;p&#62;혹시 대성당 복사단이 하는 방식이 어떤 것을 모델로 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60;br /&#62;
궁금합니다..&#60;/p&#62;
&#60;p&#62;이제는 청년신자의 급감으로 9시 예전은 한때 복사단이 포기하다시피했었고&#60;br /&#62;
11시도 그나마 몇몇 청년들이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60;br /&#62;
(그 안에서도 정작 행위만 교육되었지, 전례의 전체적 의미나 세부 행동의 의미는&#60;br /&#62;
교육되지 못했습니다.)&#60;/p&#62;
&#60;p&#62;사실 천주교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개혁으로 상당히 간소화되었는데&#60;br /&#62;
유독 대성당 전례는 정말 복잡하다고 생각되긴 합니다.&#60;/p&#62;
&#60;p&#62;새 전례지침에도 예수 성명에 고개를 숙이는 것을 지양하거나 최소한 통일되게 한다고 해서&#60;br /&#62;
그래도 예전에 비해 많이 없어졌고,&#60;br /&#62;
성찬기도 때 장궤를 하는 것도 없어졌긴 합니다.&#60;/p&#62;
&#60;p&#62;하지만 사견을 전제로, 대체로 분향이 지나칠 정도로 복잡하게 규정되어 있는 듯 합니다.&#60;br /&#62;
향로를 사용하는 분향이 언제부터 교회로 유입되었는지도 마침 궁금합니다.&#60;/p&#62;
&#60;p&#62;1. 입당순행시 말 그대로 '순행'에 걸맞게 두 측랑을 모두 돌고 제대 분향은 안 해도 좋지 않은가 싶습니다.&#60;/p&#62;
&#60;p&#62;2. 성공회 감사성찬례는 사제 혼자 이룰 수 없고 신자와 함께 드린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맞다면, 개회때와 봉헌례시 집전자에게만 두 번 분향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60;/p&#62;
&#60;p&#62;3. 준비된 성작과 성합을 두고 집전자가 정좌우 세번, 돌리면서 우 두번, 좌 한번, 제대분향이 모두 이루어지는데 상당히 복잡하고 분주합니다. 솔직히 돌릴 때는 성작이 넘어질까 조마조마하기도 합니다.&#60;/p&#62;
&#60;p&#62;4. 봉헌례 때, 성찬예물을 든 신자단을 맞이하러 십자가와 촛대가 나갔다 돌아오는데 이것도 꼭 필요한지 궁금합니다.&#60;/p&#62;
&#60;p&#62;5. 게다가, 향 복사는 집전자에게 직접 향로를 건넬 수 없습니다. 반드시 차부제나 시측을 통해 전해드리게 되어 있습니다.&#60;/p&#62;
&#60;p&#62;6. 신자들의 기도가 끝나고 봉헌례 시간에 제대가 얼마나 분주한가 하면, 제기를 배열하고 예물을 받아 면병과 포도주를 넣어야하고, 수세를 해야하고, 향을 넣어 예물분향, 제대분향, 집전자분향, 성가대분향, 수랑들과 신랑 분향을 봉헌성가 부르는 동안 다 해내야 합니다.&#60;/p&#62;
&#60;p&#62;7. 신자들은 제대 주변이 아니고서는 잘 보이지도 않고(특히 측랑), 무언가 소외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향복사가 마지막으로 신자들에게 분향하는데 이것도 어찌나 급히 해야하는지 꾸벅 인사하고 신랑과 수랑의 앞부분만 급히 분향하고 맙니다.&#60;/p&#62;
&#60;p&#62;차라리, 제대 위에서의 복잡한 분향을 줄이고, 신자들의 참여와 봉헌을 의미하는 것으로 향 복사가 수랑과 측랑을 순행하며 분향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봤습니다.&#60;/p&#62;
&#60;p&#62;8. 총론적으로, 복잡하고 사용도 어려운 분향로를 쓰는 것보다(때로 숯이 뜨거워서 대단히 위험하기도 합니다) &#60;/p&#62;
&#60;p&#62;적당한 크기의 그릇형/접시형 분향대를 제대 공간에 두고 필요한 순간에 간략히 분향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신자들의 기도때 기도자가 분향해도 좋을 듯 하구요.(잊었는데, 복음서 분향도 지나치게 신자들을 기다리게 합니다)&#60;/p&#62;
&#60;p&#62;아울러, 분향의 본래 의미는 아마도 구약의 분향단과 묵시록의 성도들의 기도 등 대체로 '기도'를 표현하는 것 같은데 정작 분향로는 '무언가를 성별하는 의미, 정화시키는 의미'로 사용되는 거 같아 보입니다. 그게 정확한 사용인지도 궁금하고요.&#60;/p&#62;
&#60;p&#62;9. 축성경 이후, 성체거양이 성체와 보혈 두 차례에 걸쳐 각각 절-거양-절로 종을 치고 절하고 있습니다. &#60;/p&#62;
&#60;p&#62;하지만 신자들은 앉아있게 되는데 차라리 천주교처럼 신자들이 서서 성사를 바라보고 같이 한 번씩만 절하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해봅니다.&#60;/p&#62;
&#60;p&#62;복잡한 것이 무언가 더 거룩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은 듯 한데 사실은 전례에서 침묵과 집중을 누리기가 더 힘들다고 생각됩니다.&#60;/p&#62;
&#60;p&#62;게다가 문제는 그 '복잡함'이 대체로 통일된 루브릭 없이 집전자마다 다르게, 지시된다는 점입니다.(그래서 복사단이 우왕좌왕하다가 한소리씩 듣곤 했습니다) &#60;/p&#62;
&#60;p&#62;더구나 만약, 작은 규모의 지역교회들에서 대성당 전례를 모범삼는다면 정말 복잡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합니다.&#60;/p&#62;
&#60;p&#62;별 의미가 없는 복잡함은 어쩌면 궁중예절처럼 외부인을 타자화하는 관문처럼 악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60;/p&#62;
&#60;p&#62;신기한 볼거리를 떠나, 신자들이 좀더 전례 자체의 본의미에 집중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도 필요하리라고 생각됩니다.&#60;/p&#62;
&#60;p&#62;이만 활발한 논의를 위한 낚시글을 마칩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ssyu1 on "소그룹 감사성찬례"</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82#post-362</link>
<pubDate>목, 30 10월 2008 16:04:33 +0000</pubDate>
<dc:creator>ssyu1</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362@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다시 이 주제를 꺼내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60;br /&#62;
사실, 저에게 있어 ‘소공동체 감사성찬례’는 현재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전례에 관한 가장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나중에 '현재의 입장'이라는 것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60;/p&#62;
&#60;p&#62;새로운 시도인 만큼 반응도 각각 달랐습니다. 새 방식에 낯설어 하면서도 예배에 집중하고, 무엇보다도 주일예배를 위해 각자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생겼기 때문에 의미있었다 라며, 좋아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분은 검증되지 않는 예배를 통해 혼란을 야기한 것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그 이유 때문인지 그는 단 한번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60;/p&#62;
&#60;p&#62;아무튼, 저 개인적으로나 함께 참여했던 몇 분들에게는 참으로 좋은 경험이 되었던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여러 사정으로 이 방식의 예배가 현재로써는 잠시 중단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직도 많은 생각을 갖게 됩니다. &#60;/p&#62;
&#60;p&#62;인간 내부에는 자신에게 익숙한 것만을 진실로 받아들이려는 오류가 존재하나 봅니다. 물론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보다는 훨씬 더 깊은 의미도 그 안에는 담겨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편안해 하는 그 익숙함에 갇혀버린다면 우리의 삶은 점점 화석화가 될 것입니다. ‘역동’ ‘창조’ ‘진보’ ‘도전’ ‘모험’ 등의 용어가 사라져가는 세상을 상상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60;/p&#62;
&#60;p&#62;대략 올 3월부터 7월까지 소공동체 성찬례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 몇 차례는 평신도 설교의 나눔도 하였습니다. 설교를 맡은 분들께서는 나름대로 정성껏 고민하고 준비해 오셨더군요. 예배시간이 다소 길어지긴 하였지만 ‘죄의 고백’과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시간을 통해서도 우리들의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60;/p&#62;
&#60;p&#62; 소공동체성찬례를 진행하던 중에 갖게 되는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분별’에 관한 문제입니다. 즉 새로운 것에 집착한 나머지 우리의 예배가 지나치게 즉흥적이거나 감성적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았는가에 대한 의문도 들었습니다. 예배 안에서(특히 설교 중에...) 하느님이 아닌 우리 자신이 주체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었습니다. 결국 분별에 관한 문제제기는 언제나 우리가 귀 기울여야할 가장 큰 주제가 되었습니다. &#60;/p&#62;
&#60;p&#62;그렇지만 분별의 대상이 새로운 방식의 예배 자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근본적인 분별의 대상이 된다면 우리의 순수한 의도와 진정성은 크게 상처 입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우리의 의도와 진정성이 주님께 온전하게 바쳐지게 되는 방식들에 관한 것입니다. 새로운 예배 속에서 꾸준히 분별과정을 지속해 나간다면 새 예배를 통해서 얻어지는 기쁨과 감사는 더욱 커질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면 예배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우리가 받은 은총을 창조적으로 예배에 적용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ssyu1 on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 알렉산더 슈메만"</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32#post-361</link>
<pubDate>목, 30 10월 2008 11:24:57 +0000</pubDate>
<dc:creator>ssyu1</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361@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아직도 그 책을 책꽂이에 꽂아 두지 못하고 있습니다.&#60;br /&#62;
다시 읽으리라... 다시 읽으리라...&#60;br /&#62;
빽빽하게 줄을 그어가며 읽었던 것이 어느덧 4-5개월이 지났습니다. 내동교회에서 전례학 포럼이 있던 날 주신부님이 소개해 준 후 그 다음날로 주문을 해서 읽어본 책입니다.&#60;/p&#62;
&#60;p&#62;그저...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라는 말이 그처럼 뇌리에 박히게 된 책은 처음이었습니다. 평소 아무런 느낌없이 되뇌이던 그 말을 그처럼 깊게 깊게 뿌리박히게 했던 책.&#60;/p&#62;
&#60;p&#62;전례는 세상의 생명을 위한 것이다.&#60;br /&#62;
주님께서는 세상의 생명을 위한 존재로 오셨다.&#60;br /&#62;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해야 하는 모든 일은 세상에 생명을 위한 것이다.&#60;/p&#62;
&#60;p&#62;이렇게 기억합니다....&#60;br /&#62;
갓난쟁이 아기 키우느라 독서에 열중하지 못했지만, 이제 다시 그 책이 읽고 싶어집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viamedia on "서울 주교좌 성당 성찬례 동영상 토론"</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34#post-360</link>
<pubDate>수, 29 10월 2008 06:23:38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360@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서울 주교좌 성당은 매 주일 성찬례 동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편집없이 올리고 있습니다. 대단한 노력입니다. &#60;/p&#62;
&#60;p&#62;동영상 모음: &#60;a href=&#34;http://cathedral.or.kr/sungchan.htm&#34; rel=&#34;nofollow&#34;&#62;http://cathedral.or.kr/sungchan.htm&#60;/a&#62;&#60;/p&#62;
&#60;p&#62;주교좌 성당의 전례가 한 교회 혹은 교단의 전례 전체를 드러내지는 못하거니와, 그것이 다른 지역교회에 표준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주교좌 성당이라는 특수성때문에 모든 신자들(어느 교회의 신자들이라도)이 와서 이질감 없이 드릴 수 있는 예배의 틀을 유지하고, 전체 교회의 어떤 일치감을 형성하면 족하다고 봅니다. &#60;/p&#62;
&#60;p&#62;주일 미사 동영상을 보면서 느끼는 점들을 허물없이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규모와 조건때문에 일반 지역 교회(이 말은 주교좌성당은 특수 교회라는 말이기도 합니다만)가 모두 갖출 수 없는 것을 주교좌 성당은 대체로 잘 갖추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전례 전체의 흐름과 구체적인 행동에 대해서 논의하기에 좋은 대상입니다. &#60;/p&#62;
&#60;p&#62;훌륭한 것이든, 이상한 것이든, 아니면 그 어떤 것이든 동영상을 보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전례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viamedia on "소그룹 감사성찬례"</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82#post-359</link>
<pubDate>수, 29 10월 2008 06:02:18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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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60;p&#62;오래된 토론 주제를 다시 되살려 봅니다. &#60;/p&#62;
&#60;p&#62;ssyu1님께서 제기하고 실제로 교회에서 적용한 바 있는 소공동체 성찬례에 대한 이야기가 좀더 깊어졌으면 합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작년 여름과 이번 여름에 몇몇 신부님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나눔의 집 신부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우선 작은 공동체의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와 경험을 진척시켰으면 합니다. &#60;/p&#62;
&#60;p&#62;그냥 어떻게 하고 있는지, 어떤 방법이 바람직할 것 같은지, 아니면 여기서 나온 이야기들에 대한 생각 등을 나눠보면 어떨까요?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viamedia on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 알렉산더 슈메만"</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32#post-357</link>
<pubDate>토, 25 10월 2008 16:08:19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357@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어느 글에 전례 이해를 위한 필독서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말로 번역된 것들이었습니다. &#60;/p&#62;
&#60;p&#62;최근에 번역되어 출판된 것 중에, 필독서라 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미국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요, 전례학자인 알렉산더 슈메만(Alexander Schmemann, 1921-1983)의 저작,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For the Life of the World)입니다. 우리 말로는 &#60;a href=&#34;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353807&#34;&#62;[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60;/a&#62;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60;/p&#62;
&#60;p&#62;이미 이번 여름 방문 동안에 몇몇 신부님들께 추천한 바 있습니다만, 이곳에는 정작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전례에 관심있는 분들에게는 그야말로 필독서입니다. 무엇보다도 전례를 통해 보는 성사적 세계관을 간파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훌륭한 저작 가운데 하나입니다. &#60;/p&#62;
&#60;p&#62;개신교 목사님(개인적으로 아는 분입니다)께서 개신교 독자들을 대상으로 번역한 터라,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 많습니다만, 번역이 잘 된 책이어서, 조금만 참고 읽으시면 문제가 안됩니다. &#60;/p&#62;
&#60;p&#62;저자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분은 원래 러시아 피난민 태생으로, 프랑스 파리 러시아 정교회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와 뉴욕에 있는 세인트 블라디미르 신학교의 학장을 평생 지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 계통의 각 정교회들의 통합된 [미국 정교회](the Orthodox Church of America)의 산파이기도 했으며, 영어권 근대 전례 운동에 정교회 전례 신학의 영향을 가장 크게 미친 사람 가운데 한 분입니다. 뉴욕에 있는 성공회 신학교(the General Theological Seminary)에서 가르치시기도 했습니다. 제 선생님인 루이스 와일(Louis Weil) 신부님은 이 분의 영향으로 전례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60;/p&#62;
&#60;p&#62;말이 길어지는군요. 겸사로 사진 몇장 첨부합니다. &#60;/p&#62;
&#60;p&#62;독후감을 좀 나눠볼까요? 그리고 사진을 통해서 흥미로운 점들도 한번 이야기해 보죠.&#60;/p&#62;
&#60;p&#62; <a class='bb_attachments_link' href='?bb_attachments=357&bbat=6&PHPSESSID=2e69bead4cb18c16f44a1bca5f89005c'><img  src='?bb_attachments=357&bbat=6&inline' /></a> <a class='bb_attachments_link' href='?bb_attachments=357&bbat=7&PHPSESSID=2e69bead4cb18c16f44a1bca5f89005c'><img  src='?bb_attachments=357&bbat=7&inline' /></a> <a class='bb_attachments_link' href='?bb_attachments=357&bbat=8&PHPSESSID=2e69bead4cb18c16f44a1bca5f89005c'><img  src='?bb_attachments=357&bbat=8&inline' /></a> <a class='bb_attachments_link' href='?bb_attachments=357&bbat=9&PHPSESSID=2e69bead4cb18c16f44a1bca5f89005c'><img  src='?bb_attachments=357&bbat=9&inline' /></a> <a class='bb_attachments_link' href='?bb_attachments=357&bbat=10&PHPSESSID=2e69bead4cb18c16f44a1bca5f89005c'><img  src='?bb_attachments=357&bbat=10&inline' /></a>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viamedia on "포럼 디자인 변경 외 기타..."</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31#post-356</link>
<pubDate>토, 25 10월 2008 15:08:52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356@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한동안 소홀했습니다. 지난 여름 이후로 밀려드는 일들때문에 조금 정신이 없습니다. 그 와중에 마음까지 흐트러지는 일들이 있어서 포럼 관리와, 진행하고 있는 번역 프로젝트가 조금씩 밀립니다. &#60;/p&#62;
&#60;p&#62;잠시 머리를 식힐 겸해서, 포럼 디자인을 손 봤습니다. 머리 식히려고 손을 댔다가 머리 깨지는 줄 알았습니다. ;-) 아마추어의 한계를 절감하고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60;/p&#62;
&#60;p&#62;1. 그래도 좀 허접한 티를 벗어나, 미적인 면을 살리려 했습니다. 디자인이 '구리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별로 나아질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머리쪽 배너만 하나 집어 넣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34;천지창조&#34; 부분입니다. 이 그림을 선택한 이유는 전례 포럼에 참여하신 분은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모르시겠다면 &#34;태그&#34;를 살펴 보십시오. :-)&#60;/p&#62;
&#60;p&#62;2. 조회수는 없앴습니다. 조회수가 글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닌데, 그런 선입견의 유혹을 줍니다. 사람은 늘 숫자에 약합니다. 성장이니 뭐니 하면서 좋은 말해도, 실은 &#34;숫자&#34;에 매달리는게 사람 습성입니다. 교회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은 것 같습니다.&#60;/p&#62;
&#60;p&#62;3. 글이 올라 온 날짜가 글 끝에 드러나도록 조치했습니다. &#60;/p&#62;
&#60;p&#62;4. 파일을 첨부할 수 있습니다. 대신 500kb 이내입니다. 문서 첨부 정도는 문제 없습니다. 더 큰 파일은 관리자에게 문의하시면 따로 올려 링크하도록 하겠습니다. &#60;/p&#62;
&#60;p&#62;5. 글을 편집할 수 있는 코드를 심었습니다. 이미 있는 코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만, &#60;a href=&#34;http://openoffice.or.kr/forums/faq.php?mode=bbcode&#38;#38;sid=059e69e8d051737c8559280a0c680fd6&#34;&#62;BBcode&#60;/a&#62;를 이용하시면 좀더 쉽게 글 모양새를 편집할 수 있습니다(인용이나, 정돈 등).&#60;/p&#62;
&#60;p&#62;6. 그동안 너무나 무겁고 큰 프로젝트들이 올라와서, 방문하는 분들을 겁주었나 봅니다. :-)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아무 질문이나, 아무 의견이나, 어떤 경험이든지 성공회의 신학, 그리고 전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시면 됩니다. &#60;/p&#62;
&#60;p&#62;7. 참, 개인 정보 등을 살피셔서, 썰렁한 빈 칸을 채워 주십시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viamedia on "가입인사가 늦었습니다"</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07#post-355</link>
<pubDate>토, 25 10월 2008 14:54:33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355@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cras  님, 환영합니다. &#60;/p&#62;
&#60;p&#62;가입인사에 댓글을 이제야 답니다. 다른 글로는 늦게나마 인사를 했으니, 그걸로 헤아려 달라고 할 수 있을까요?&#60;/p&#62;
&#60;p&#62;바쁜 탓에 지나쳤는데, 특별히 2008년 여름 전례 포럼에 관심을 갖고 계셨군요. 예정대로 잘 마쳤습니다. 장소 관계로 그리 많은 분들이 모이지는 못했지만, 계획했던 내용들(이후 수정된 내용으로)을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60;/p&#62;
&#60;p&#62;그 내용과 관련해서 짧게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아직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 이후로 너무나 많은 일들이 밀려들고 있기때문입니다. 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손이 가지 않습니다. &#60;/p&#62;
&#60;p&#62;이곳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고, 서로 다른 전통에서 함께 배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viamedia on "감사 성찬례의 공동 집전에 대한 질문"</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06#post-350</link>
<pubDate>금, 24 10월 2008 10:19:09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350@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늦은 감이 있지만, 한번 끼어들까 합니다. 올라오는 이야기들이 늘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다른 분들이 감히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 고민은 너무 시시한게 하는 생각을 하는 모양입니다.  ;-) 그런데 시시한 고민이 어디 있겠습니까. &#60;/p&#62;
&#60;p&#62;공동집전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이미 Cranmerian 님이 상세히, 특히 (미국) 성공회의 태도를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Hatchett 의 설명을 옮겨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60;/p&#62;
&#60;p&#62;간단한 설명과 개인적인 다음 순서에 따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60;/p&#62;
&#60;p&#62;1. 공동집전 -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경우&#60;/p&#62;
&#60;p&#62;위에 Hatchett 의 설명처럼, 동방 교회와는 달리 서방 교회에서는 이른바 공동 집전이 일찍부터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그럴 만한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 (어떤 점에서 그 결과) 가운데 하나는 전례(특히 성찬례) 자체의 어떤 공동체성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성찬례 집전이 사제의 중요한 직무 가운데 하나인 것과 연결되어 있고, 또 전례에 대한 서방 교회의 성찬례 신학이 희생과 축성된 재료들에게 집중된 탓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신학은 사제의 영성을 이러한 희생제의적인 성찬례 이해에 귀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 실행 방식은 사제가 신자들 없이도 개인 미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최소한 공동체적이어야 할 미사가 사제 개인의 미사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60;/p&#62;
&#60;p&#62;2. 천주교에서 공동 집전이 다시 고개를 든 이유&#60;/p&#62;
&#60;p&#62;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검토한 계기는 역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입니다. 여기서 성찬례가 하느님의 백성들이 함께 드리는 전례적 행동인 것을 회복하려 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제의 사적인 미사가 그 주된 개혁 대상이었습니다. &#60;/p&#62;
&#60;p&#62;사적인 미사를 넘어서기 위해 두 가지 일이 연관되어 진행되었습니다. &#60;/p&#62;
&#60;p&#62;하나는 공동집전이 분열되기 이전의 고대 교회의 관습이었음을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의 전례는 동방 교회들이 많이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모델로 삼아 다시 회복시키자는 생각이었습니다. &#60;/p&#62;
&#60;p&#62;또다른 하나는 사적인 미사가 아닌 공동집전을 통해서, 미사가 원래 공동체적인 것이라는 것을 했다는 것입니다. 미사의 본연은 사제 개인이 드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행사인 것을, 성찬례 집전의 핵심인 사제들이 공동집전 하는 것을 통해서 분명히 보여주자는 것이었습니다. &#60;/p&#62;
&#60;p&#62;3. 공동집전의 원래 의미는 무엇일까?&#60;/p&#62;
&#60;p&#62;이 밖에도 다른 의견과 의미들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일치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예들은 동방 교회들 여러 곳에서 확인됩니다. &#60;/p&#62;
&#60;p&#62;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공동집전의 방식에도 여러가지가 있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즉 공동집전을 하되, 공동축성은 하지 않는다든지, 아니면 그것도 같이 한다든지, 또 성찬기도를 나눠서 한다거나, 아니면 제대에만 함께 모이거나, 동작만을 같이 한다는지, 또 참석한 성직자(주교 혹은 지역 고위 성직자)에 따라서 공동집전의 형태도 다양하게 변화되었습니다. 현재 천주교처럼 명백한 지침을 주어서 특정한 형태를 요구하는 것과는 달랐다는 말입니다.&#60;/p&#62;
&#60;p&#62;여러 연구들의 생각을 종합해 보면, 공동집전의 본래 뜻도 여러가지이겠으나, 무엇보다도 공동체 행사인 전례를 통해서, 그 전례 행사가 일어나는 곳에 방문한 사람들에게 보이는 환대의 표시였던게 더 중요했다고도 합니다. 물론 주교 방문시는 교회의 일치와 연대감을 드러내는 뜻도 있었던 것이죠.&#60;/p&#62;
&#60;p&#62;4. 성공회의 경우는?&#60;/p&#62;
&#60;p&#62;서방 교회의 전통 가운데 있는 성공회도 천주교의 생각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아예 성공회에는 사적 미사가 일반적이지 않았으니, 공동집전 자체를 강력하게 회복시키려는 노력도 그리 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교회의 사목적인 필요나 경우에 따라서 (주교의 방문이랄지, 다른 지역 사제의 방문, 혹은 다른 교회에 함께 드리는 예배나, 특별한 형태의 연합 행사) 등에서 공동 집전을 도입하기도 하고, 그러지 않기도 했습니다. 동방 교회들이 가졌던 다양성이 성공회 안에도 있는 것이지요. &#60;/p&#62;
&#60;p&#62;위에 예시한대로, 미국 성공회에서는 공동집전의 의미와 행동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고, 필요한 경우 권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천주교와 같은 형태는 아닌 것 같다는 것이 제 견해이고 제 경험이기도 합니다.&#60;/p&#62;
&#60;p&#62;한국 성공회의 경우는 주교 방문, 혹은 연합 미사 등과 같은 일이 아니면 공동집전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있다해도 성직자의 개인적인 견해에 따라서 그 적용 방식이 천차만별입니다. 영국쪽 성공회-가톨릭 계열 선교사들 영향 탓일까요? &#60;/p&#62;
&#60;p&#62;그렇다고 꼭 나무랄 일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60;/p&#62;
&#60;p&#62;5. 우리 사목 현실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60;/p&#62;
&#60;p&#62;그럼 공동집전은 늘 바람직한가?&#60;/p&#62;
&#60;p&#62;꼭 그렇지 않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공동집전의 회복이 기본적으로 사제들의 영성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고, 이것을 다시 전례 행사의 공동체적인 의미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연결시키는 점에서 여전히 문제가 있다는 평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찬례 자체가 이를 집전하는 사제들에게만 집중되어서, 공동집전을 한다하더라도 사제 중심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천주교에서 편만한 공동집전은 오용되어서, 사제들끼리만 미사를 드리고, 신자들은 자리에서 구경하는 꼴이 되어, 또다시 사제와 신자들의 구분을 낳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비판입니다. 저 역시 이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했고, 이런 점에서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성직 서품식과 같은 특별한 경우라 하더라도 말입니다.&#60;/p&#62;
&#60;p&#62;6. 다시 의미로... 전례는 공동체의 행사&#60;/p&#62;
&#60;p&#62;cras 님의 두번째 글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이른바 제도적 성직과 직무 수행으로서, 즉 공동체를 대표하고, 이를 비추는 사람으로서 집전자인 사제의 전례 거행이 있다면, 역시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백성에게 주신 사제직을 수행하는 모든 신자들의 전례 거행이 있기때문입니다. 말씀하신 '현실적 구분'이 있습니다.  &#60;/p&#62;
&#60;p&#62;그러나 기본적으로 모든 전례의 주체는 하느님이시고, 그 전례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 공동체의 모든 신자들입니다. 이 점에서, 위에서 지적한 대로, 공동집전이 자칫 사제들만의 잔치로 느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60;/p&#62;
&#60;p&#62;제 선생님 가운데 한분은 현행 미국 기도서의 '집전자'에 대한 표기인 celebrant 가 적절하지 않다고 합니다. 모두가 celebrant (전례 거행자, 축하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집전자는 그 전례를 이끄는 Presider 인 것이 바른 표현이겠다는 것입니다.  &#60;/p&#62;
&#60;p&#62;7. 꼬리를 무는 문제 - 전례의 독점&#60;/p&#62;
&#60;p&#62;우리에게는 변화시켜야 할 것이 공동집전의 문제보다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의 유기적인 결합이라고 봅니다. 이미 이에 관해서는 제가 쓴 글([말씀과 성사])이 있으니 참조하실 수 있으라 생각합니다. &#60;/p&#62;
&#60;p&#62;우리 교회 전례의 현실 속에서 한가지 변화를 주었으면 하는 것은, 설교자와 집전자의 관계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한 예배에서 설교자와 집전자가 같은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제가 있더라도 그는 그냥 성찬의 전례시에만 공동집전자로 참여하거나, 대체로는 영성체를 도와주는 일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60;/p&#62;
&#60;p&#62;그러지 말고, 사제가 둘이 있어서, 한 전례를 같이 거행하게 된다면, 한 분은 설교자로, 다른 한 분은 집전자로 일을 나누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례가 여러 사람에 의해서 함께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될 것입니다(당연히 독서자나, 기도를 이끄는 사람들고 교인 전체를 대표하는 전례 봉사자들입니다.) 허락이 된다면 이를 잘 이용해서, 설교와 집전을 독점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60;/p&#62;
&#60;p&#62;좀더 많은 이야기를 들으려고, 얼기설기 적었습니다. 의견을 더 교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viamedia on "Korean Martyrs (한국인 순교자들) ?"</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1#post-349</link>
<pubDate>금, 24 10월 2008 03:09:44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349@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일러두기: 뒤이어 올라온 글들을 다시 옮겨 놓습니다 - 관리자&#60;/p&#62;
&#60;p&#62;&#60;strong&#62;더하기 (2008.10.01 - 16:51) &#60;/strong&#62;&#60;/p&#62;
&#60;p&#62;은자님의 위의 글에서 &#60;/p&#62;
&#60;p&#62;&#34;성공회의 1966년 기도문을 보면 9월26일을 ‘한인치명’으로 대첨례일로 명기하고 있다. 이는 천주교에서 1925년에 제정된 ‘한국순교복자대축일’의 영향일 가능성이 높다. &#34;&#60;/p&#62;
&#60;p&#62;라는 부분에 첨가하여 대한성공회 기도서(공도문)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34;吾主聖體寶血禮儀(오주성체보혈예의)&#34; (昭和(소화) 14년(1939년) 9월 22일 발행) 241쪽에 9월 26일을 或朝鮮人致命日(혹조선인치명일) 죠션인치명일로 기록하고 있다.&#60;/p&#62;
&#60;p&#62;祝文(축문)으로 &#34;샹쥬여 죠션인들이 쥬를 위하야 치명함으로 영광의 면류관일 엇어 우리를 깃브게 하시나이다 구하노니 뎌희의 모본으로 인하야 우리를 더욱 굿세게하샤 쥬를 더욱 진실히 밋게 하쇼셔 이는 셩부와 셩신과 일테 텬쥬로 영생하시고 무궁셰에 쥬관하시는 셩자 오쥬 예수그리스도를 인하야 하옵나이다 아멘&#34; 이렇게 기도하고 있으며&#60;/p&#62;
&#60;p&#62;書信(서신)으로는 히브리인셔 11장 33-39과 福音(복음)으로는 셩누가복음 12장1-9을 사용토록하고 있다.&#60;/p&#62;
&#60;p&#62;&#60;strong&#62;혜이안  ( 2008-10-01  20:14 ) &#60;/strong&#62;&#60;/p&#62;
&#60;p&#62;공도문에서 한국 천주교의 치명자들을 기념하느니 차라리 서상륜 선생이나 전태일 열사나 안병무 선생이나 문익환 목사를 사적으로 조도나 만도 중에 기념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60;/p&#62;
&#60;p&#62;&#60;strong&#62;은자  ( 2008-10-01  21:21 ) &#60;/strong&#62;&#60;/p&#62;
&#60;p&#62;오해가 있는 듯 하네요. 천주교 치명자를 기념한다는 것이 아니라, 교파를 초월하여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날짜를 정하는데 있어서 당시까지 가장많은 순교자를 내었던 천주교의 치명일을 참고했던 것입니다. 참고로, 개신교의 순교자는 190명 이상이 되며 성공회는 7명 이상, 천주교는 103명 이상이 됩니다. 이 외에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와 이름도 빛도 없이 복음을 위해 순교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를 기념하고 순교자의 신심을 마음에 세기는 날인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천주교의 순교지, 개신교의 순교지를 다녀보았고, 성공회 선교사들과 순교자를 기념하는 곳도 방문하였습니다. 어느 곳을 가던 교파를 막론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순교자의 삶은 고귀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전태일 열사와 문익환 목사님이 잠들어 계신 모란공원도 다녀왔습니다. 부디 교파적인 문제로 순교자들의 삶을 평가하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60;/p&#62;
&#60;p&#62;&#60;strong&#62;혜이안  ( 2008-10-01  22:45 ) &#60;/strong&#62;&#60;/p&#62;
&#60;p&#62;사실 한국 천주교회 치명자들은 신앙적인 이유보다 정치적인 이유로 프랑스 선교사한테 이용당하다시피해서 희생당했다고 합니다.&#60;br /&#62;
특히 치명의 정치성이 두드러지는 박해가 병인박해이지요.&#60;/p&#62;
&#60;p&#62;&#60;strong&#62;궁금이  ( 2008-10-02  10:08 ) &#60;/strong&#62;&#60;/p&#62;
&#60;p&#62;순교의 의미는 사실 그렇듯 복잡합니다.&#60;br /&#62;
그 정치적 악용의 사례와 종교적 맹목의 사례를 무시할 수 없겠지요.&#60;br /&#62;
피의 순교(적색 순교)와 땀의 순교(백색 순교)처럼, 꼭 죽어야 순교냐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60;/p&#62;
&#60;p&#62;실제로 니그함마디 문서는 땀의 순교가 피의 순교보다 어렵다고 말하고 있으며, 기독교도들이 순교를 악용하고 조장하고 찬미하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일레인 페이절스의 책 &#34;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34;의 4장 &#34;그리스도의 수난 및 기독교도 박해&#34;에 순교에 대한 영지주의자들과 교부님들의 논쟁이 잘 나와있으며, 페이절스는 순교가 기독교회의 조직화에 추진력을 제공했다는 정치적 해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 엔도 슈샤쿠의 &#34;침묵&#34;만 보아도 순교를 단순화하고 마냥 찬미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60;/p&#62;
&#60;p&#62;그러므로 오늘날 순교를 기념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가지 많은 문제들과 함정들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마치 용서와 화해를 주장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 피해자의 입장에서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용서와 화해를 말하려면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겸손하게 말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60;/p&#62;
&#60;p&#62;오늘날, 순교의 정치적 악용과 종교적 맹목을 통해 저질려졌던 기독교의 온갖 역사적 죄악들과 무지들이 드러나는 오늘날, 순교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어떻게 기념해야 할까요? 사제들과 신자들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무엇보다 윤달용 신부님의 순교비 제막식을 집전하신 주교님이 이에 대해 어떤 신학적 해석을 주셨는지 궁금합니다. 오늘날, 정말 교회의 아버지인 주교는 겸손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신학자여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60;/p&#62;</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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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viamedia on "Korean Martyrs (한국인 순교자들) ?"</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1#post-348</link>
<pubDate>금, 24 10월 2008 03:06:43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348@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일러두기: 관구 홈페이지 게시판에 우리가 이미 짤막하게 다룬 적이 있는 &#34;순교자 축일&#34;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군요. 여기에 나온 글도 언급되는 걸로나, 또 그 이후에 진행된 내용들을 이곳에 올려 놓는 곳도 괜찮다 싶어서, &#34;부분적으로&#34; 옮겨 놓습니다. 이미 이 포럼에서 활동하시는 분들도 이 논의에 참여한 것 같으니, 이렇게 옮겨 놓는 것도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훌륭한 논의를 전개해 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관리자&#60;/p&#62;
&#60;p&#62;&#60;strong&#62;궁금이 (2008.9.29 - 14:33)&#60;/strong&#62;&#60;/p&#62;
&#60;p&#62;궁금합니다.&#60;br /&#62;
한국천주교에서는 순교한 103인 중 33인이 9월에 순교했기 때문에&#60;br /&#62;
9월을 순교자 성월로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60;br /&#62;
대한성공회는 어떤 이유로 9월 26일을 모든 한국인 순교자 축일로 하는지요?&#60;/p&#62;
&#60;p&#62;&#60;strong&#62;은자  ( 2008-10-01  12:54 )&#60;/strong&#62; &#60;/p&#62;
&#60;p&#62;제 짧은 의견을 올립니다. &#60;/p&#62;
&#60;p&#62;모든 한국인 순교자들 대축일(한인치명일)의 유래에 대하여 &#60;/p&#62;
&#60;p&#62;성공회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형제교회로 여기고 있다. 비록 천주교에서는 성공회의 사도계승을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여성성직의 문제를 이유 삼아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 독선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회는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으니, 외부의 사람들이 보기에 성공회는 천주교를 떠받드는 것 아닌가하는 오해를 살만도 하다. 이러저러한 오해에도 불구하고 성공회는 천주교, 개신교를 막론하고 교단을 따지지 않고 교회일치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모든 한국인 순교자들 대축일’에 대해서도 이러한 성공회적인 교회일치의 정신이 담겨있다. &#60;/p&#62;
&#60;p&#62;성공회에서 정하고 지키고 있는 ‘모든 한국인 순교자들 대축일’은 9월26일인데 이에 대한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자. 안타깝게도 언제 ‘모든 한국인 순교자들 대축일’이 정하여졌는지에 대해서는 필자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이의 유래에 대해서 정확이 알고 있는 분이 있다면 이 글을 바로잡아 주기를 바란다. 필자가 생각할 때는 천주교의 ‘한국순교복자대축일’이 그 유래가 아닌가 싶다. &#60;/p&#62;
&#60;p&#62;천주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네 번의 박해를 통해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그리고 1925년에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때의 순교자 79명을 시복(복자로 칭함)하였다. 그러면서 기해박해 때 많은 순교자를 낸 1839년 9월 29일을 기념하여 ‘한국순교복자대축일’로 삼고 9월을 ‘한국순교복자성월’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68년에는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 24명을 시복하였다. 그리고 1984년에 복자 103인을 시성(성인으로 칭함)하였는데, 이 때 복자대축일을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로 명칭을 변경하고 날짜도 9월20일로 변경하였다. 9월의 복자성월도 순교성월로 부르게 되었다. &#60;/p&#62;
&#60;p&#62;성공회의 1966년 기도문을 보면 9월26일을 ‘한인치명’으로 대첨례일로 명기하고 있다. 이는 천주교에서 1925년에 제정된 ‘한국순교복자대축일’의 영향일 가능성이 높다. 성공회는 교단을 나누어 따지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많은 순교자를 낸 천주교가 기념하고 있는 9월26일을 모든 한국인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축일로 정하게 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하겠다. 성공회에서는 이날에 성공회의 순교자 뿐 아니라, 천주교의 순교자들과 개신교의 순교자들을 모두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성공회에서는 ‘성인’에 대한 호칭을 ‘종교개혁’ 이후의 인물에게는 부치지 않고 있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교파를 초월하여 기독교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나 대한성공회사에 중요한 사건과 연관된 인물에 대해서 ‘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마틴루터킹 목사, 본회퍼 신학자, 토마스 모어 순교자 등 교파를 초월하여 그들의 순교일 등 중요한 날짜를 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요컨대, 성인 기념일 등을 정할 때에 성공회는 교파를 초월하여 에큐메니컬한 입장에서 그 가치와 공헌을 따져서 하고 있다고 하겠다. &#60;/p&#62;
&#60;p&#62;최근 대한성공회 내에서는 ‘모든 한국인 순교자의 날’은 교파를 초월한 모든 한국인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이니만큼 ‘대한성공회 순교자의 날’을 따로 정할 필요성에 대하여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60;/p&#62;
&#60;p&#62;&#60;strong&#62;궁금이  ( 2008-10-02  09:56 )&#60;/strong&#62;&#60;/p&#62;
&#60;p&#62;은자님의 귀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60;br /&#62;
주낙현 신부님의 글도 아주 감사하게 읽었습니다.&#60;br /&#62;
아울러 궁금한 점이 있어 나누고자 합니다. &#60;/p&#62;
&#60;p&#62;1. 우선 &#34;치명&#34;과 &#34;첨례&#34;의 한자표기와 설명이 필요하리라 봅니다. 더 이상 어느 곳에서도 쓰이지 않는 말이니 만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60;/p&#62;
&#60;p&#62;2.&#60;br /&#62;
(1) 모든 한국인 순교자 축일의 경우, &#34;대축일&#34;입니다. 성공회기도서(2004)의 지침에 따르면, 붉고 굵은 글씨에 밑줄이 있는 날이 대축일입니다.  그러므로 대축일은 성탄, 공현, 부활, 승천, 성령강림, 삼위일체, 모든 성인의 날, 그리고 &#34;모든 한국인 순교자의 날&#34;입니다. &#60;/p&#62;
&#60;p&#62;하지만 기도서 28페이지의 &#34;대축일&#34;란에는 &#34;모든 한국인 순교자 대축일&#34;이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60;/p&#62;
&#60;p&#62;(2) 성공회는 &#34;종교개혁 이전에 성공회가 지켜왔던 축일&#34;(기도서 30페이지)만을 지킵니다. 더 이상 시복이나 시성을 하지 않는 것이겠지요.&#60;br /&#62;
은자님이 말씀하신대로,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나 본회퍼 등도 기념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허나, &#34;모든 한국인 순교자&#34;의 날은 &#34;대축일&#34;입니다.&#60;br /&#62;
그리스도의 성탄, 공현,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의 강림 그리고 삼위일체 그리고 모든 성인의 날 등과 그 중요도를 같이 하는 대축일입니다.&#60;br /&#62;
그렇다면 이는 종교개혁 이후에 시복이나 시성을 하지 않는 성공회의 지침과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요? &#60;/p&#62;
&#60;p&#62;일관성을 유지하자면, &#34;모든 한국인 순교자&#34;의 날도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순교일과 본회퍼의 순교일 등과 같은 기념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60;/p&#62;
&#60;p&#62;(그러므로 (1)의 지적은 사실 하나마나한 것입니다. 저의 주장은 모든 한국인 순교자의 날을 대축일로 지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니까요.)&#60;/p&#62;
&#60;p&#62;&#60;strong&#62;은자  ( 2008-10-02  14:36 ) &#60;/strong&#62;&#60;/p&#62;
&#60;p&#62;1. 치명致命, 첨례瞻禮 &#60;/p&#62;
&#60;p&#62;2. (1)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모든 한국인 순교자&#34; 축일은 대축일이 아니라 '주요축일'에 속해있네요. 죄송합니다. 위에 쓴 본문은 이미 글이 여러개 올라와 있는 관계로 글의 순서상 수정하지 않고 그냥 두겠습니다.&#60;br /&#62;
(2) '모든 한국인 순교자'의 날은 종교개혁 이후의 일이긴 합니다만 그 무게로 본다면 주요축일로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그 날은 한사람만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복음을 위해 순교한 순교자 일반을 기리는 날이니 만큼 종교개혁 이후의 순교자에게 성인을 칭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여기에 엄격하게 적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둘째로 성공회는 국가교회스러운(혹은 지역교회스러운)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한국인 순교자는 한국교회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위와 같은 이유로 '대한성공회 수호성인 성 니콜라' 축일이 주요축일로 지켜지는 점, '성당축성일'이 주요축일로 지켜지는 점, 고유명절(설/추석)이 축일로 지켜지고 있는 점 등 기도서가 축일을 배치할때 다양한 방면에서 경중을 따져서 배치시키고 있는 전통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60;/p&#62;
&#60;p&#62;요컨데, '모든 한국인 순교자' 축일은 대축일이 아니라 '주요축일'이며, 한국성공회의 전통으로 볼 때 '주요축일' 배치는 적절하다는 의견입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성공회에서 정한 전통이니만큼 논의는 얼마든지 열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대한성공회 설립기념일'이 기념일인지 대축일인지 불분명합니다. 이를 분명히 하여 그 무게에 맞게 기릴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60;/p&#62;
&#60;p&#62;ps.&#60;br /&#62;
아, 그리고 모든 한국인 순교자 축일에 기념되는 천주교, 개신교, 성공회의 모든 순교자들 개개인이 성인으로 기념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주교의 경우 9월 20일에 기념하는 분들은 모두 천주교내에서 성인으로 칭함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회에서는 그분들은 성인이 아니라 개신교, 성공회 순교자와 같은 의미의 순교자입니다.&#60;/p&#62;
&#60;p&#62;&#60;strong&#62;궁금이  ( 2008-10-04  14:40 ) &#60;/strong&#62;&#60;/p&#62;
&#60;p&#62;주요축일은 &#34;주의 축일&#34;과 &#34;기타 주요축일&#34;과 &#34;관구가 설정한 주요축일&#34;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성서정과] 4~5페이지만 정확이 기록되어 있고, [기도서] 29~30페이지에는 정확히 나와있지 않습니다. [기도서]에는 &#34;기타 주요축일&#34;에 '한인순교자의 날'과 '대한성공회 수호성인 성 니콜라의 날'과 '성당축성일'이라고 나와 있네요.&#60;/p&#62;
&#60;p&#62;(1) [기도서] 30페이지의 설명이 미흡하고, 도리어 [성서정과]의 설명이 정확하네요. &#34;관구가 설정한 주요축일&#34;에 대한 설명이 없고, 설과 추석에 대한 언급도 간접적이고, 교구설립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개정 기도서에 포함되어야 하리라 생각됩니다. &#60;/p&#62;
&#60;p&#62;(2) 한인 순교자와 모든 한국인 순교자 중에서 표현을 택일하여 통일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60;/p&#62;
&#60;p&#62;(3) 관구가 축일을 정할 수는 없어도, 주요 축일은 정할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네요.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60;/p&#62;
&#60;p&#62;&#60;strong&#62;궁금이  ( 2008-10-04  14:41 ) &#60;/strong&#62;&#60;/p&#62;
&#60;p&#62;치명과 첨례의 뜻을 설명해 주시고, 지금의 용어와는 어떻게 치환될 수 있는지 설명해 주십시요.&#60;br /&#62;
치명은 성인, 첨례는 축일인가요?&#60;/p&#62;
&#60;p&#62;&#60;strong&#62;궁금이  ( 2008-10-04  14:52 ) &#60;/strong&#62;   &#60;/p&#62;
&#60;p&#62;궁금한 것이 또 생겼는데요^^, &#60;/p&#62;
&#60;p&#62;[기도서] 30페이지 '5. 기념일'에 보면, &#34;대한성공회사에 중요한 사건과 연관된 인물의 기념일&#34;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34;대한성공회 순교자&#34;는 오히려 이 범위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대한성공회 순교자의 날이 없습니다만, 만약 만들어 진다면 기념일로 들어가야 하고, 그렇다면 모든 한국인 순교자의 날도 결국 기념일로 들어가야 급이 맞지 않나요? &#34;관구가 설정&#34;할 수 있는 것이 결국 이런 것 아닌가요? (주요축일에서 &#34;관구가 설정한&#34;이라는 표현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관구가 무슨 근거로 설정할 수 있는지 언급해야 하고, 그것은 결국 대한성공회라는 관구의 독특성과 개별성에 관련된 것이니, 대한성공회와 한인순교자들이 여기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요? &#60;/p&#62;
&#60;p&#62;또 &#34;마틴 루터와 종교개혁 순교자들&#34;을 기념일로 지키는 반면, 한인순교자들을 주요축일로 지칸다면 조금 어색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해요. 그리고 종교개혁을 통해 본격화된 성공회가 종교개혁 이전 축일을 축일러 지키면서, 종교개혁 순교자들을 기념일로 지키고 교회에선 별로 신경쓰지도 않는다는 것도. &#60;/p&#62;
&#60;p&#62;종교개혁 순교자의 날과 모든 한국인 순교자의 날과 (필요하다면, 성공회 순교자의 날과 대한성공회 순교자의 날)도 주요축일로 하던지요. 기준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60;/p&#62;
&#60;p&#62;&#60;strong&#62;혜이안  ( 2008-10-04  19:27 ) &#60;/strong&#62;&#60;/p&#62;
&#60;p&#62;치명은 순교의 옛 말이고 첨례는 축일의 옛 말입니다. &#60;/p&#62;
&#60;p&#62;예를 들면, 성 악네스: 시칠리의 치명 동신 -&#38;gt; 성 아그네스: 시실리의 동정 순교 성녀.&#60;br /&#62;
대첨례 -&#38;gt; 대축일 상품 첨례 -&#38;gt; 주요 축일 하품 첨례 -&#38;gt; 축일이나 기념일. &#60;/p&#62;
&#60;p&#62;구:대한성공회의 호수 성 니콜라 주교의 첨례는 12월 6일이다.&#60;br /&#62;
현:대한성공회의 주보 성 니콜라 주교의 축일은 12월 6일이다.
&#60;/p&#62;</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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