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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포럼: 자유 토론 - 최근 글 http://liturgy.skhcafe.org/ A Korean Anglican Theology & Liturgy Forum en Mon, 22 Jan 2018 16:10:07 +0000 spiritus on "성공회 저자 02: 마커스 보그"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67#post-1921 월, 09 12월 2013 13:46:45 +0000 spiritus 1921@http://liturgy.skhcafe.org/ <p>서지 추가: 김태현 옮김,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 비아(타임컨텐츠의 임프린트 출판사) 2013년 12월. 311쪽.<br /> Speaking Christian: Why Christian Words Have Lost Their Meaning and Power - And How They Can Be Restored, 2011. </p> spiritus on "성공회 저자 05 : 이블린 언더힐"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73#post-1920 금, 22 11월 2013 09:20:03 +0000 spiritus 1920@http://liturgy.skhcafe.org/ <p>번역서 추가.</p> <p>김영택 옮김, 『사도 바울의 영성과 신비주의』 누멘, 2010년 05월 20일.<br /> 원저: St. Paul and mystic way.<br /> <a href="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38;mallGb=KOR&#38;barcode=9788993800395&#38;orderClick=LAG&#38;Kc=" rel="nofollow">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38;mallGb=KOR&#38;barcode=9788993800395&#38;orderClick=LAG&#38;Kc=</a></p> <p>이 중에서, The Mystic Way in the Fourth Gospel by Evelyn Underhill, St. Paul and the Mystic Way by Evelyn Underhill은, Kessinger 출판사에서 The Mystic Way: A psychological study of Christian origins의 각 장(Chapter)을 나눠 출판한 것을 번역 출판한 것이라 한다.</p> <p>김병준, 민경찬 옮김, 『이블린 언더힐과 함께 하는 대림절 묵상』 Via, 2013년 11월 20일.<br /> 원저: Advent with Evelyn Underhill, by Christopher L. Webber. </p> Cranmerian on "새해인사"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019#post-1904 수, 02 1월 2013 03:53:44 +0000 Cranmerian 1904@http://liturgy.skhcafe.org/ <p>2013년이 시작되었습니다. </p> <p>지난 한해는 이제 역사가 되었네요.</p> <p>올해는 활기찬 한해가 되기를 기원하며, 이 포럼의 회원들께도 </p> <p>건강하고 활기찬 한해가 되기를 빕니다. </p> <p>어젯밤 아이들 교회 예배 설교의 본문과 제목이 마음에 꼭 와 닿더군요.</p> <p>'Be strong and courageous. for the Lord will be with you, </p> <p>whrerever you go'</p> <p>지난 한해가 힘들었듯이 올해도 쉽지는 않을 듯 합니다. </p> <p>그 힘든 마음을 이 포럼의 공간에서 나누며 용기로 승화시켰으면 합니다. </p> yellowfish on "성공회 저자 05 : 이블린 언더힐"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73#post-1336 목, 29 3월 2012 11:01:32 +0000 yellowfish 1336@http://liturgy.skhcafe.org/ <p>신비주의에 대한 관심때문에 이블린 언더힐 책을 찾아 읽었었는데, 책에서는 가톨릭으로 소개하고 있어서 성공회 신자인 줄 몰랐습니다. 책은 재미있었는데 여성사제직에 대해 보수적인 논평을 한 것이 기억나네요.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p> viamedia on "전례 여행 20 - 전례와 선교"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710#post-1312 일, 15 1월 2012 14:25:48 +0000 viamedia 1312@http://liturgy.skhcafe.org/ <p>20. 세상의 종말 - 전례와 선교</p> <p>“다 이루었다.”</p> <p>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의 막바지에 숨을 거두시며 남기신 말씀이다. 다 이루는 일. 이것이 교회가 말하는 종말의 원래 뜻이다.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이 채워지는 하느님의 시간이 종말이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께서 다 이루신 일의 행적을 되돌아 살피며 다시 기억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오늘과 내일, 하느님께서 만드신 창조세계를 부족함 없이 완성하시려는 일에 참여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전례 안에서 이 기억과 참여의 행동을 시작하고 몸으로 수련한 뒤 세계로 파송 받는 선교 공동체이다. 그러니 교회는 예수께서 이루신 종말을 전례와 선교 안에서 지금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 공동체이다.</p> <p>종말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가 있다. 그 극단적 사례가 바로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날짜를 계산하여 그날을 믿고 준비하는 이들이다. 사회에 희망을 둘 수 없고, 교회에서 신뢰를 발견하지 못할 때마다, 그 실망한 이들을 꼬드겨 사익을 챙기는 못된 거짓 혹설이다. 이들은 교회 역사에 되풀이해서 등장했다. 물론 정해진 날짜에 아무런 일이 없어서 웃음거리가 되기 일쑤였다.</p> <p>그러나 여러 교회와 지도자가 잘못 가르쳐서 이런 불씨가 생겼다. 심판에 대한 공포로 종말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땅을 세속이라 경멸하고 하늘만 거룩한 것이라고 분리해서 가르친 탓이다. 게다가 세상과 사회에 대한 건전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교회는 사람들의 절망감에 기름을 붓는다. 시한부 종말론자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이다. 그러니 그들만 나무랄 일이 아니다. 이런 잘못된 이해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반쯤은 그들과 다름없다.</p> <p>반면, 전례를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삼는 교회는 다르다. 우리는 성찬기도 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가로질러 하느님의 시간을 완성하는 구원의 역사를 기억한다. 우리가 한목소리로 외치는 “신앙의 신비” 선포는 이 종말의 뜻을 바르게 세운다.</p> <p>“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p> <p>하느님은 성육신하시어 우리와 살며 고통당하다 죽으셨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전례 공동체 안에 함께 하신다.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도록 우리를 초대하시고, 주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그분의 잔칫상에 먹고 마시도록 한다. 종내에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 모든 역사는 부족함 없이 거룩하게 완성될 것이다. 이 과정 모두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요, 하느님 시간의 완성이요, 종말이라는 선포이다.</p> <p>종말은 교리가 아니며, 선포에 머물지도 않는다. 종말은 교회의 경험이다. 예수 안에서 펼쳐진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품은 교회가 그 완성인 하느님 나라를 향해 끝까지 걸어가는 순례 경험이다. 이 순례의 핵심은 반복해서 거행하는 성찬례이다.</p> <p>성찬례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행동이요, 시간이요, 공간이다. 메시아가 베푸는 잔칫상이다. 잔칫상에 와서 우리는 차별 없이, 부족함 없이 와서 함께 부르게 먹으라고 초대를 받았다. 축성된 음식을 먹고 우리 자신이 축성되어 변화하라는 초대요, 경험이다.</p> <p>성찬례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고 희망한다. 이미 맛보고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긴장감이 신앙인의 겸손함을 이끌고, 아직 부족한 현실을 견디며 변화를 꿈꾸고 희망하도록 돕는다.</p> <p>성찬례는 미리 맛본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우리를 파송한다. 선교는 어떤 지적 교리나 도덕적 규율을 선전하거나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는 성찬례 안에서 우리가 경험한 삼위일체, 그 춤추는 친교의 삶을 우리 몸으로 이 세상에서 증언하는 일이다.</p> <p>그러니 전례와 걷는 신앙의 순례 여정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p> <p>‘종말의 시간이 전례를 통해서 우리 삶에 파고들어온다. 전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다시 하느님 나라는 전례, 특히 성찬례를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온다. 전례가 끝나고 우리는 이 종말의 하느님 나라를 가지고 세상 속에 나아간다. 성찬례는 하느님 나라의 성사이다.’</p> <p>(성공회 신문 2012년 1월 14일치 6면)</p> <p>사례: 지난 1년 동안 “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을 사랑하고 격려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여러가지 부족한 점이 많은데도, 많은 분의 관심과 격려로 힘을 얻어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좋은 지면을 허락해 주신 성공회 신문사와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p> viamedia on "전례 여행 19 - 전례와 사회"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708#post-1309 금, 23 12월 2011 07:00:22 +0000 viamedia 1309@http://liturgy.skhcafe.org/ <p>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p> <p>19. 성찬례의 인간 - 전례와 사회</p> <p>교회와 사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스도교의 여러 교파는 이 질문에 다양하게 답하고 행동했다. 교회는 세속 사회에 전혀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은가 하면, 예수님께서 정치와 종교 권력을 저항하고 비판하다 희생당하신 분이므로 사회에 대한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는 일은 당연히 교회의 사명이라는 주장도 그에 못지않다. 교회의 사회 참여를 둘러싼 논란은 그 줄다리기가 팽팽하다. 이 일로 교회 안에서는 분란이 일기도 한다.</p> <p>그렇다면 전례 전통에 충실한 성공회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성공회는 그 질문을 좀 다르게 던진다. 교회의 중심 행동인 전례는 사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다시 말해, 전례 안에서 선포되는 말씀, 그리고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룩하게 변하는 사건, 함께 모여서 그 축성된 몸을 먹고 나누는 우리는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성공회 신자는 전례의 사건 속에서 이런 질문에 답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책임 있는 행동을 살피려 한다.</p> <p>‘말씀’이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그리스도이시다. 성서는 ‘말씀이신 하느님-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신 사건을 우리에게 되새겨주는 그릇이다. 적어도 전례 전통의 교회에서는 ‘말씀의 전례’에서 읽는 성서 독서를 성직자나 신자 개인의 호불호나 멋대로 선택하지 않는다. 세계 여러 교회가 함께 연구하여 지정한 정과표를 따른다. 좋든 싫든 성서에 드러난 말씀을 그대로 듣겠다는 뜻이다. 나를 비판하고 호통치는 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그 말씀이 사회를 향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피하고서는 말씀을 듣는 신앙인이라 말하기 어렵다.</p> <p>모든 전례의 목적은 변화이다. 특히 성찬례는 그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낸다. 전례 참여의 중요한 행동 가운데 하나는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을 제대 앞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우리의 땀과 수고, 우리의 잘못과 상처, 우리의 기쁨과 슬픔, 결국 세계 전체를 제대 앞으로 가져온다.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을 변화시켜 주시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 거룩한 변화가 일어나는 사건 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래서 빵과 포도주는 세계 전체를 상징한다. 성찬례 안에서 하느님은 이 세계 전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룩하게 변화시키신다. 이것이 축성이다. 이 변화의 사건을 믿지 않고는 신앙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p> <p>영성체는 세계 전체가 제대 위에 바쳐져서 거룩하게 변화된 것을 나누어 먹는 행동이다. 우리는 그 변화의 결과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 안에 들어가 우리 몸과 영의 에너지와 피가 되어 우리 몸을 돌아다닌다. 새로운 몸과 피를 받았으니 우리 자신도 변한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우리 몸을 돌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 몸은 거부반응을 일으켜 몸이 굳고 더는 살아갈 수 없다. 게다가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을 여럿이 나누어 먹었으니, 교회를 떠나 우리가 들어가 살아가는 세계와 사회도 우리를 통해서 변화와 나눔의 은총이 일어나야만 한다. 이 변화된 그리스도의 몸에 비추어 우리 삶과 우리 사회에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고, 우리 자신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아간다면? 이는 우리가 진정으로 ‘영성체’하지 않았다는 말이다.</p> <p>적어도 성공회 전통은 우리가 전례 안에서 변화를 경험하는 만큼, 사회도 그렇게 변할 수 있으며, 변해야 한다는 희망을 고수했다. </p> <p>“그리스도인은 전례를 통해서 ‘경제적인 인간’(homo economicus)이나 ‘소비적인 인간’(homo consumericus)이기를 포기한다. 대신 ‘성찬례의 인간’ 즉 ‘나눔의 인간’(homo eucharisticus)으로 변화된다.” 지난 세기 최고의 전례학자 그레고리 딕스(Gregory Dix) 수사 신부의 말이다.</p> <p>이것이 전례를 통해서 경험하는 거룩한 변화의 진정한 뜻이며, 전례가 비추는 사회의 비전이다.</p> <p>“거룩한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예배하려 한다면, 우리는 이제 자신의 성막을 나와, 우리 안에 신비하게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세상의 거리로 걸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도시와 마을 사람들 안에서 같은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 빈민촌에 머무시는 예수님에 대한 측은지심이 없이는 우리는 성막에 있는 예수님을 예배하노라 할 수 없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바쳤던 선교사 프랭크 웨스턴 주교의 외침이다.</p> <p>이런 고민과 전통을 돌아보며, 우리는 우선 교회와 전례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세밀하고 신실하게 물어야 한다. 전례 안에서 읽고 듣는 예언자적인 말씀이 불편하더라도 귀와 마음을 열어 그 도전을 받아들이는가? 사적인 고민뿐만 아니라 사회와 세계의 갈등과 아픔을 제대 위에 봉헌하는가? 하느님께서 그 세속적인 것들을 축성하여 우리에게 거룩한 몸으로 나누어 주실 때, 거리낌 없이 우리 살과 피로 먹고 마시는가? 그리하여 우리 교회와 자신도 그 몸을 모시고 세상 밖에 나가 세계와 사회도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실천하는가? </p> <p>(성공회 신문, 2011년 12월 24일자) </p> viamedia on "성공회 저자 03 : 케네스 리치 신부"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68#post-1305 금, 09 12월 2011 05:48:18 +0000 viamedia 1305@http://liturgy.skhcafe.org/ <p>케네스 리치, [하느님 체험] 우리말 번역본에 '부록'이라고 적고 번역했지만, 실은 '후기'이자 이 책 전체를 장별로 요약한 '선언'을 아래와 같이 조금 수정 번역하여 올립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p> <p><strong>후기: 쇄신된 영성을 향한 선언</strong></p> <p>1. 쇄신된 그리스도교 영성은 하느님의 비전을 현대 세계에 회복하는 일에 관심한다. 이 영성은 현재의 상황에 의미있는 방법들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고, 영의 깊은 차원에 대해서 말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겸손하고 신중하게 마르크스주의와 심층 심리학, 풍요로운 자각을 향한 사회적 탐구에서 얻은 통찰을 고려하는 동시에,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p> <p>2. 이 영성은 유대 백성의 삶에 나타난 하느님 경험에 근거한다. 구약성서 연구를 통하여 이 영성은 광야에서 순례하는 백성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증언한다. 이 영성은 하느님의 거룩함과 정의에 대해서 말하며, 개인과 사회의 삶 속에서 그 거룩함과 정의를 추구한다.</p> <p>3. 이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중심을 두며, 그리스도 안에 육체로 거하시는 하느님의 충만함을 본다. 이 영성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예수 안에서, 성육신하신 하느님과, 동지인 인간, 즉 드러난 신성과 들어 올려진 인성을 함께 본다. </p> <p>4. 이 영성은 신약성서에 나타난 사도적 교회의 신앙을 바라본다. 그것은 인류에게 일치를 주시는 하느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과 화해를 이루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요, 빛과 사랑의 하느님, 자유를 주시는 성령의 하느님, 그리스도의 몸을 양육하고 세우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다.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 연구를 통하여 이 영성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에 대해 알려고 노력한다.</p> <p>5. 이 영성은 사막의 영성이다. 사막의 경험을 통하여 교회의 관상적 삶을 그리워하며 이를 굳건히 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영성 생활에 똑같이 중요한 홀로됨과 함께함을 같이 추구한다. </p> <p>6. 이 영성은 구름과 어둠의 영성이다. 하느님의 마음에 있는 신비와, 인간과 하느님의 만남 속에 있는 신비를 증언한다. 이 영성은 손쉬운 답변만 내놓는 종교에서 사람들을 이끌어 신앙의 어둔 밤으로 인도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관상적인 영성이다. </p> <p>7. 이 영성은 물과 불의 영성이다. 즉 씻어내는 영성, 정화하는 영성, 쇄신하는 영성, 영적인 따스함의 영성이다. 세례의 물과, 성령의 불이라는 상징 속에서, 이 영성은 지속적인 거듭남과 삼키는 불이신 하느님에게서 매일같이 도전받으라는 부르심을 본다. 이는 카리스마적인 영성이다.</p> <p>8. 이 영성은 육신이 된 말씀에 근거한 영성이다. 이 영성은 성육신하신 하느님의 진리를 붙잡고, 하느님 자녀의 살과 피 속에 있는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섬기려고 노력한다. 하느님의 선물인 물질과 인간의 성을 즐거워하고, 인간적인 것 안에서 하느님께 이르는 관문을 본다. 이는 유물론적 영성이다. </p> <p>9. 이 영성은 성찬례의 영성이다.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인 성찬례 거행이 있다. 이 영성은 성찬례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본질을 나누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본다. 이 영성은 세상 속에서 나눔과 평등의 성찬례적 삶을 선언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이는 공동 생활의 영성이요, 거룩한 나눔의 영성이다. </p> <p>10. 이 영성은 고통의 영성이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서 복음의 핵심을 찾기 때문이다. 이 영성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선포하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려 한다. </p> <p>11. 이 영성은 신비주의 저자들에게 배우면서 하느님이 모든 실재와 우리 존재의 근거임을 본다. 이 영성은 참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를 그리스도교 신학의 필수 요소로 회복하고 증진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영적 지도와 내적 생활을 심화하는 사목을 발견하여 증진하며, 신앙생활의 신비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을 함께 묶으려고 노력한다. </p> <p>12. 이 영성은 여성의 역사에 나타난 하느님 경험, 성서와 전통 속에서 하느님에게 여성의 이름을 붙였던 일, 그동안 잊혀지고 무시당했던 여성적 방식으로 하느님을 경험하고 묘사한 저자들의 통찰 등을 진지하게 다룬다. 이 영성은 현대 여성 운동이 그리스도교 비판하는 소리를 귀 기울이고, 배우려고 노력한다. </p> <p>13. 이 영성은 정의와 평화의 영성이다. 이 영성은 모든 사람을 위한 정의를 추구하며, 인종 차별을 비롯한 여러 지배에 반대하는 투쟁 속에서, 세계평화와 핵무장 해제 군축을 도모하는 운동 속에서, 가난과 불평등을 없애는 캠페인 속에서 하느님을 알고자 하고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 좀 더 인간적인 세상을 만드려는 투쟁 속에서, 이 쇄신된 영성은 하느님의 얼굴을 알아보며,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를 나눈다. </p> <p>Kenneth Leech, <em>Experiencing God</em>, 1985, 421f. </p> viamedia on "전례 여행 18 - 성무일도와 성찬례"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706#post-1304 금, 09 12월 2011 05:18:56 +0000 viamedia 1304@http://liturgy.skhcafe.org/ <p>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p> <p>18. 성전의 두 기둥 - 성무일도와 성찬례</p> <p>천하장사 삼손은 들릴라의 꼬임에 넘어가 머리칼을 잘리고 눈까지 빼앗긴다. 결국, 그는 불레셋 사람의 신전 잔치에 무기력하게 끌려가 조롱거리가 된다. 눈멀어 절망 속에 있는 삼손은 주위 사람에게 그 신전을 떠받치는 두 기둥 사이에 자신을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하느님께 마지막으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고는 두 기둥을 밀어 넘어뜨린다. 신전은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p> <p>이 비극적인 마지막 순간은 교회의 삶에 역설적인 질문을 던진다. 교회의 삶이라는 성전을 지탱하는 두 기둥은 무엇인가?</p> <p>전례 전통의 교회에서 교회 생활의 두 기둥은 단연 성무일도와 성찬례이다. 이 두 전례 행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 이래 교회 전통 속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의 가장 깊은 젖줄이었다. 현대 교회의 여러 예배 모양도 바로 이 두 젖줄에서 비롯한다. 건강한 전례 전통 교회를 가꾸려면, 성무일도와 성찬례의 뜻과 실천, 그리고 두 전례의 관계를 잘 살피며 실천해야 한다.</p> <p>성무일도는 조금 무거운 번역어이다. 성무일도라는 말은 매일 기도가 수도원의 발전에 따라 수도자들이 매일 정해진 시간에 따라 드리는 의무적 기도라는 뜻을 담은 용어이다. 매일 기도는 참여자와 열리는 곳에 따라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발전했다. 하나는 일반 교회의 매일 기도요, 다른 하나는 수도원의 매일 기도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 전통은 대부분 사라지고 수도원 전통만이 살아남았다. 다시 말해 일반 교회에서는 한동안 매일 기도가 사라졌다는 말이다.</p> <p>성무일도를 다시 교회의 예배 생활에 회복한 사람은 성공회 전례 개혁가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였다. 크랜머는 수도자의 전유물이 된 성무일도를 대폭 개정하여 공동기도서에 실어 모든 신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아침의 여러 기도를 종합해서 아침 기도(조도)를, 저녁과 밤의 여러 기도를 엮어서 저녁 기도(만도)를 마련했다. 1930년대 주일 성찬례 회복 운동이 있기 전까지, 아침 기도는 주일 예배를, 저녁기도는 성가대가 함께 하는 아름다운 노래 예배(이븐송)로 자리 잡아 성공회 영성을 키웠다.</p> <p>번역어와 역사가 어떻든, 성무일도는 세 가지 구성 요소가 뚜렷하다. 즉 말씀 읽기와 찬양, 그리고 세상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이다. 교회 전통이 찬양에 좀 더 강조점을 둔 반면, 수도원 전통은 말씀 읽기를 강조하곤 했다.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가 그것이다. 세상과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는 늘 성무일도의 핵심을 이뤘다. 그리스도인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늘 세상과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다.</p> <p>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예배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신비를 기뻐하며, 그 부활 사건을 통해서 이루신 구원에 감사하는 공동체 예배이기 때문이다. 성무일도는 성찬례를 준비하고, 성찬례를 다시 일상의 삶으로 확장한다. 성찬례를 둘러싼 준비와 확장이 바로 성무일도의 위치요, 역할이다. 성찬례가 성무일도의 중요한 세 요소 - 독서, 찬양, 기도 - 를 포함하면서(말씀의 전례) 성찬기도와 영성체로 구성된 것(성찬의 전례)은, 주일 성찬례를 통해서 매일의 기도 생활을 완성한다는 뜻이다. 성찬례 막바지에 세상 속으로 파송 받은 우리는 매일 기도 생활과 더불어 선교 사명을 실천한다.</p> <p>매일의 성무일도와 주일의 성찬례는 우리 삶을 새로운 시간으로 나눠 주기적으로 기도하게 한다. 그런 탓에 성무일도를 ‘시간 전례’라고도 부른다. 주간의 매일과 주일을 관통하는 주기적인 리듬감이 우리 기도 생활을 이룰 때, 우리는 몸에 밴 전례 생활을 할 수 있다. 일찍이 사제요 시인이었던 조오지 허버트는 이렇게 노래했다(1663년).</p> <p>“그저 하루만이 아니라, 칠일 동안 내내 / 내가 주님을 찬양하리니 / 내 비록 하늘에 있지 않더라도, 마음을 들어 / 주님께 올리리라.” </p> <p>허버트 신부는 성공회 영성이 매일의 찬양, 말씀 읽기와 기도, 그리고 주일의 성찬례에 뿌리 내리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와 더불어 교회력이 비추는 구원의 역사라는 새로운 시간에 우리 몸과 마음을 맡기는 일이 우리를 봉헌하는 삶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시간의 리듬에 맞춘 전례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빚어낸다. </p> <p>한편, 언젠가부터 우리 교회에서는 주중의 성무일도가 사라지고 매일 성찬례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매일 성찬례가 굳이 성공회의 오랜 전통이라고 할 수 없을지라도, 이미 널리 퍼져 신앙생활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면 좋은 일이다. 다만, 이로써 교회 전례 전통의 다른 한 기둥인 성무일도가 퇴색한다면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세계 곳곳에서 주일 성찬례의 회복과 더불어, 성무일도에 대한 관심과 실천이 새롭게 일어나는 흐름을 보노라니 더욱 그렇다.</p> <p>성공회 신앙 전통의 두 기둥이 튼튼하게 서서 우리 교회의 전례와 신앙을 올곧게 떠받치고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p> <p>(성공회 신문 2011년 12월 10일자 6면) </p> spiritus on "성공회 저자 03 : 케네스 리치 신부"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68#post-1303 목, 08 12월 2011 16:05:15 +0000 spiritus 1303@http://liturgy.skhcafe.org/ <p>(번역서 추가)</p> <p>홍병룡(장신대 영성학 교수) 옮김,『하나님 체험』 청림출판, 2011. (색인포함, 845쪽)<br /> Experiencing God: Theology as Spirituality. Wipf and Stock Publishers, 1981. </p> Elyot on "번역: 로완 윌리엄스 대주교, 기도란 무엇인가?"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705#post-1282 월, 28 11월 2011 02:10:59 +0000 Elyot 1282@http://liturgy.skhcafe.org/ <p><a href="http://www.archbishopofcanterbury.org/pages/prayer.html" rel="nofollow">http://www.archbishopofcanterbury.org/pages/prayer.html</a></p> <p>Q: 대주교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p> <p>A: 기본적으로 기도란, 하느님과 연결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이 다가오실 수 있는 곳에 자신을 두는 것이고, 하느님께 시간을 드리는 것이며, 자신을 하느님께, 하느님의 마음에 맞추는 것입니다. </p> <p>Q: 저는 하느님께서 저와, 하루 종일, 제가 하는 모든 일에 함께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기도를 할 필요가 있는 거죠?</p> <p>A: 당신이 휴일에 가족과 함께 있을 때... 그들은 하루 종일 당신과 함께 있죠? 당신은 그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과 함께 테이블을 마주 하고 앉아서, 여기 우리가 있어,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나쁜 가족 휴일이겠지요. 기도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테이블을 마주 하고 앉아서, 여기 있어요, 하며 시간을 함께 즐기는 거지요. </p> <p>Q: 우리가 기도할 때 취해야 할, 특별한 방법이 있나요? 우리는 앉아서, 두 손을 무릎 위에 두거나, 두 손을 모아야 하나요? </p> <p>A: 저는 사실, 기도할 때 몸이 어떤 자세를 취하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몸을 통해 우리 자신을 표현하지요. 저는 당신과 얘기할 때, 손도 움직이고, 얼굴 표정도 계속 변하고, 몸 자세도 달라집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스스로에게 이런 걸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난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가? 어떨 때, 저는 흠모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무릎을 꿇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이 하듯이 [...못들음]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떨 때, 당신은 단지 듣고 있다는 것,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앉아서, 자신을 가라앉히고, 자신에게 집중하겠지요. 그리고 당신은, 당신 귀가 자라나는 것처럼 느껴야 합니다. (웃음) 그리고 숨을 들이쉬며, 하느님이 거기에 계시도록 합니다.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