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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포럼: 신학 및 역사 이야기 - 최근 글 http://liturgy.skhcafe.org/ A Korean Anglican Theology & Liturgy Forum en Mon, 22 Jan 2018 16:08:43 +0000 Cranmerian on "1917년 한국선교보고서 번역출판 "한국인의 신앙과 풍속""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707#post-1310 화, 27 12월 2011 09:33:23 +0000 Cranmerian 1310@http://liturgy.skhcafe.org/ <p>저도 이 포럼을 통해서 anglicanhistory.org에 있는 한국관련 글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곳의 글들을 읽어보면서 관련도서를 찾던중 &lt;대한성공회 백년사&gt;가 출판된 것을 알았고, 아마존에서 조마가 주교님이 쓰신 &lt;The Church in Corea&gt;의 복사본을 구입하여 읽어보면서, 초기 선교활동에 대해서 잘 정리되었다고 생각되 번역을 시도하였습니다. 번역을 하면서 앞으로 출판을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저는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직접 제기하거나 추진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 그런 날이 올 때를 대비해서라도 초역 정도를 하고, 이를 이 귀중한 포럼의 공간에 올려서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을 찾고 있었습니다.</p> <p>앞에 소개하신 책이 출판된 것도 ‘한국번역문학원’의 재정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우리 성공회의 상황에서도 재정적인 지원이 없다면 출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교구나 관구에서 이런 일을 추진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한이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제 생각입니다.</p> <p>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면서, 바램이 있다면, 이곳 포럼에 자주 들르시는 분들이 중심이 되어 이러한 작업을 추진하는 모임을 만들면 어떨까요? 저도 부족한 번역이지만 그런 부분에 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p> <p>사명감과 열정을 가진 분들의 응답을 기다리겠습니다. </p> ochlos on "1917년 한국선교보고서 번역출판 "한국인의 신앙과 풍속""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707#post-1308 화, 20 12월 2011 14:40:50 +0000 ochlos 1308@http://liturgy.skhcafe.org/ <p>아.... 크랜머리안님께서 번역하셔서 포럼에 게재했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우연히 인터넷서점에서 검색을 하다가 '성공회 초기선교'에 대한 사진이 있는 책인 줄 알고 구입했었습니다. 막상 책이 와서 보니 한국선교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더군요. 크랜머리안님께서 어렵게 번역작업을 하셨을텐데, 누군가 소리소문 없이 책을 출판해버린 것이 되었네요. 서운하실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p> <p>책 제목이 "영국성공회 선교사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신앙과 풍속"이라고 된 것은 아마도 '한국문학번역원'이 16세기-20세기 중엽까지의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이라는 주제로 총서를 번역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성공회선교사의 책을 번역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발간사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p> <p>"이 총서를 통해 소개되는 도서는 명지대-LG연암문고가 수집한 만여 점의 고서 및 문서, 사진 등에서 엄선되었습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2005년 전문가들로 도서선정위원회를 구성하고 많은 논의를 거쳐 상호 이해에 기여할 서양 고서들을 선별하였으며..."</p> <p>'외부의 시선을 포용함으로써 상호 이해와 소통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도록'하겠다는 방향이 이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성공회 쪽에서 번역자를 찾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공회 쪽에서 번역을 하면 아무래도 서구인의 시각을 좀 부드럽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도 모르죠. 사견입니다. 옮긴이는 주석들과 '옮긴이의 말'을 통해 성공회 신자와 교회에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p> <p>크랜머리안님, 한국성공회에서 자신들의 초기선교사역사 연구를 위해 번역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동감합니다. 부디 재능 있는 분들께서 그 작업을 해 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한국성공회 초기교회사 참고자료가 이재정 신부님의 "대한성공회 백년사"가 한글자료로서는 거의 유일하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저는 번역작업에 직접 참여하기에는 불가능하지만, 책을 번역하고 출판하려 한다면, 필요한 후원인을 모집하는데 미약하게나마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p> Cranmerian on "1917년 한국선교보고서 번역출판 "한국인의 신앙과 풍속""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707#post-1307 화, 20 12월 2011 08:41:41 +0000 Cranmerian 1307@http://liturgy.skhcafe.org/ <p>이 책에 대한 번역은 지난 5월부터 9월까지 포럼에 게재하였는데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출판할 줄은 몰랐네요. 저는 anglicanhistory.org/asia/kr의 문서를 읽었기 때문에 각 장의 저자를 확인할 수 없었고, 다만 각 분야를 직접 담당하였던 선교사들이 집필하였을 것이라고만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p> <p>이 책과 자매책이라고 말씀하신 트폴로프 주교의 &lt;The Church in Corea&gt;은 이보다 앞서 지난해(2010년) 9월말부터 올해 4월까지 나누에 포럼에 게재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Corea에 대한 저자의 소개를 담은 제1장은 선교의 역사와는 직접 관련이 없어서 번역은 했습니다만 여기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영인본(팩스밀리 복사본?)으로 판매되는 책을 번역하였습니다. 오히려 이 책의 1장이 ‘선교사가 본 1900년대초의 한국’이라는 표현에 잘 맞을 것 같습니다. </p> <p>출판된 이 책은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이야기’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것 같고, 한국성공회의 초기 선교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책과 트롤로프 주교의 책 이외에, 코프주교의 전기-이 책의 서문은 번역하여 포럼에 게재되어 있습니다-와 트롤로프 주교의 전기(주교의 누이가 쓴 책)가 있습니다. 코프주교의 전기는 앞의 웹사이트에 있지만, 트롤로프 주교의 전기는 없습니다. 저도 지금 찾아보고 있습니다. 책은 Constance Trollope, &lt;Mark Napier Trollope&gt;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p> <p>저는 한국성공회의 초기교회사 분야에 관심있는 회원들과 함께 공부하는 공동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p> ochlos on "1917년 한국선교보고서 번역출판 "한국인의 신앙과 풍속""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707#post-1306 금, 16 12월 2011 14:12:22 +0000 ochlos 1306@http://liturgy.skhcafe.org/ <p><a><img src="http://bimage.interpark.com/goods_image/2/4/6/9/208272469s.jpg" /></a></p> <p>살림출판사에서 "그들이 본 우리"라는 주제로 서양인이 그들의 나라에 소개한 한국관련 서적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19번째 책이 "영국성공회 선교사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신앙과 풍속, 2011, 세실 허지스 외, 안교성 옮김, The English Mission in Corea : Its Faith and Practice, 1917, Bishop Corfe" 입니다.</p> <p>선교초기 순회선교를 하던 때의 모습과 미가엘신학교의 일상, 여성선교, 일본인선교, 의료선교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세실 허지스 선교사가 1,2장을 기록하였는데 다소 서구우월주의적 입장에서 관망하고 있다는 점이 조금 아쉽지만 당시 이런 시각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인선교에 대해서 기록한 부분을 보면 선교사들이 한국인의 대일감정이나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대해서 별 고려가 없다는 점 역시 아쉽습니다. 그러나 여성선교와 의료선교에 관해 기술한 부분에서는 그들의 열정과 관심을 엿볼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p> <p>옮긴 분이 장신대 교수님인데, 아마도 선교초기 기록들 중에서 비교적 소개되지 않은 책들이 성공회 관련한 것이라는 점을 알고 발굴 번역 출판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성공회로서는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될텐데 이런 책이 번역되었다는 것도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서 글을 적었습니다.</p> <p>책을 읽어보면, 코프 주교님이 머리글을 쓰셨는데, 머리글에 보면 트롤로프 주교님이 저술한 "한국의 교회"라는 논문이 이 책과 자매편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연구 논문이 번역되었는지 궁금합니다.</p> <p>책 내용 중 재미있는 부분을 소개합니다.</p> <p>'언젠가 무당이 자기 뜻과는 달리 교회에 호의를 베푼 적도 있다. 어떤 가족이 세례명이 요한인 부친이 죽자 배교를 하고 말았다. 그런데 가족 중에 한 명이 병들자 멀리서 용한 무당을 불렀다. 무당이 황홀 상태에 빠져 말하길 "나는 요한의 영인데, 너희들이 신앙을 버리고 나를 위하여 기도를 도무지 하지 않기 때문에 편히 쉴 수가 없구나. 즉시 회개하라"고 했다. 그래서 지체 없이 귀신을 섬기는 제구들과 위패를 내던지고 묻거나 태웠고, 아내는 참회자로 교회에 돌아오고 아들들은 다시 세례준비자(망세자)가 되었다.(p.37-38)</p> <p><a><img src="http://bimage.interpark.com/goods_image/2/4/6/9/208272469s.jpg" /></a> </p> andersen on "번역 : 토머스 크랜머의 신학"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77#post-1034 화, 25 5월 2010 22:37:15 +0000 andersen 1034@http://liturgy.skhcafe.org/ <p>좋은 글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야말로 공부 많이 했습니다. </p> <p>요약 정리 같은 글이라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p> <p>"영성체를 위한 겸손의 기도"라는 번역이 가장 맞갖다고 생각됩니다.</p> <p>사실 '겸공근주문'이 Prayer of Humble Access의 번역어라는 것은 제 추측이기 때문입니다.</p> <p>그 추측의 출처가 1960년 공도문이었는지 1965년 공도문이었는지는 아직 제대로 기억나지 않습니다.</p> <p>하지만 적어도 구두인(Charles C. Goodwin) 신부님이 작성한 "시험미사를 위한 비평"에서는 확실히 </p> <p>기도문(겸공근주문)이 실려 있습니다.</p> <p>PS: 제 아이디는 Anderson이 아니라 Andersen입니다. 하하. </p> Cranmerian on "번역 : 토머스 크랜머의 신학"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77#post-1033 화, 25 5월 2010 15:27:23 +0000 Cranmerian 1033@http://liturgy.skhcafe.org/ <p>이 글의 번역을 먼저 via media님과 Anderson님께서 읽고 교정해주셨습니다.<br /> 두분의 자세한 지적과 제안에 감사드리며, 솔직히 제게는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p> <p>용어의 번역에서 저는 16세기 중심으로 번역하였습니다.<br /> 예를들면 Catholicism은 당시의 인식처럼 서방교회의 전통적인 신학 또는 전통주의 신학(신앙)으로,<br /> Order of communion은 영성체 예식서, Holy Communion은 거룩한 영성체 예식으로<br /> 번역하면서,()안에 현대적인 번역을 추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의 강조점을 그대로<br /> 드러내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물론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때 다소 혼돈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br />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용어로 번역할 경우에도 당시의 강조점을 파악할 수 없는 단점도 있습니다.</p> <p>그리고 Prayer of Humble Access는 Via Media님의 제안대로 '영성체를 위한 겸손의 기도'라고<br /> 번역하였지만, 저는 다른 번역에서 '가치있는 영성체를 위한 기도'라고도 번역하였습니다.<br /> 그리고 Anderson님은 우리교회의 공도문에서 '겸공근주문'으로 사용하였다고 했습니다.<br /> 저의 무지로 정확하게 몇년도 공도문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세히 검토할 수 있는 기회가<br /> 있기를 바랍니다. </p> Cranmerian on "번역 : 토머스 크랜머의 신학"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77#post-1032 화, 25 5월 2010 15:08:07 +0000 Cranmerian 1032@http://liturgy.skhcafe.org/ <p>이 글은 David Gagchi and David C. Steinmetz eds., The Cambridge Companion To Reformation Theolog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에 수록된 브룩스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 ]는 역자가 추가한 것입니다. </p> <p>토머스 크랜머의 신학<br /> Peter Newman Brooks</p> <p>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은 토머스 크랜머를 16세기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교직자들 중에서 가장 복합적인 인물이라고 인정하였지만, 그의 신학적 유산, 특히 가장 성숙하였을 때의 신학을 규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마치 베토벤의 명작인 &lt;에로이카&gt;(Eroica) 교황곡의 그 무엇처럼, 헨리8세가 켄터베리 대주교로 선택했던 성실한 학자의 삶과 업적에는 영웅적인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학자들은 이러한 판단을 의심의 여지없이 ‘진부하다’거나 ‘순진하다’거나, 심지어는 당파적이며 분파적이라고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튜더시대의 순교자 대주교에게는 특별한 차원이 남아있다. </p> <p>필자는 그의 생애를 &lt;에로이카&gt; 교황곡의 4개 악장에 비유하며 설명하고 싶다. 베토벤이 교황곡의 새로운 무대를 시작하였던 것처럼, 크랜머는 ‘이혼문제’로 잉글랜드의 교회를 로마교회로부터 단절시키려는 헨리와 크롬월의 시도에 동참하였다. 그럼으로써 케임브리지의 학자였던 그는 튜더왕정에서 새로운 경력을 극적으로 시작하였다(알레그로 콘 브리오, 빠르고 활기차게). 미사는 여전히 사제의 직분의 초점이자 목적이었으며, 더구나 국왕이 전통주의신앙(Catholicism로마 가톨릭신앙)-교황수장권을 제외하고-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교회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는 두번째 단계는 느리고 심지어 신중하게(라르게토!) 숙고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에[헨리의 사망후에] 편찬된 &lt;공동기도서&gt;의 업적을 스케르초의 부드럽고 활기찬 악장에 비유하는 것이 부적절할지라도, 어리지만 신실한 에드워드6세의 확고한 프로테스탄트신앙은 적어도 크랜머에게 새로운 실험을 시도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하였다. 마지막 악장으로 왕정의 당파싸움, 로마 가톨릭 신자인 메리의 왕위계승, 로마교회로의 복귀,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확립이라는 사목적 비전의 미완성이라는 매우 빠른 변화(알레그로 몰토)보다 더 실망적인 것이 있겠는가? </p> <p>튜더왕조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헨리의 ‘중대사”(privy matter)는 오랫동안 학자들의 논쟁거리였다. 엘튼(Elton)에서 스카리스브릭(Scarisbrick)에 이르는 많은 학자들의 다양한 연구들을 통해서 밝혀졌듯이, 소위 “이혼사건”은 국왕수장권을 시행하는 필수적인 배경이 되었으며, 이러한 헌정상의 변화는 중세기 서방교회인 잉글랜드의 두 대교구들[켄터베리와 요크]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환경에서 크랜머의 역할은 다른 대신들의 눈총을 받는 것이었다. 비록 헨리에 의해서 잉글랜드교회의 최고위 대주교로 선택되고 교황의 교서에 의해서 승인받았다 하더라도, 크랜머는 권한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크랜머는 ‘전하에 관한 중대한 소송을...심의하고, 최종적으로 판단하며 판결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켄터베리 대주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p> <p>요약한다면, 새로운 대주교는 국왕의 주장을 지지함으로써 결국 형의 부인이었던 케서린과의 혼인을 허용한 교황의 특면장을 무효화시키면서, 이러한 결정이 성서적 전거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스스로도 확신할 수 있어야 했다. 어느 사제에게나 이 문제는 양심상의 심각한 갈등을 제기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크랜머를 괴롭혔던 당혹스런 고립감에 관심을 가진 학자는 거의 없었다. 울지는 교회법학자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여 국왕의 소송을 처리하는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크롬웰과 헨리는 빈틈없는 통찰을 통해서 새로운 방침을 정하였다. 즉, 교회법을 포기하고, 대신에 의회에서 법률들을 제정하여 교회에 대한 국왕의 수장권의 확립하는 것이었다. 한편 대주교는 그의 주권자인 국왕과 새로이 설립된 수장대리직(이제 토머스 크롬웰은 소위 G. S. 길버트의 ‘고위집행관’이 되었다)에 충성함으로써,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헌정의 혁명적인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였다. 엘튼은 이러한 혁명적인 변화가 ‘의회법 전권주의’ (omnicompetence of statute)에 의해서 성취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주교는 갈등하는 권위들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그리스도교 최고의 권위로부터 정당성을 찾아야 했기 때문에, 그는 성서에서 이에 대한 확신을 찾았다. 이러한 확신은 단순히 국왕의 첫번째 혼인의 정당성을 부인하는데 사용되었던 레위기 18장과 20장 그리고 신명기 25장에 나타나는 서로 다른 본문들을 조화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왕권과 성권[성직자의 권한]의 대결구도(regnum versus sacerdotium)라는 전통적인 주장과 중세적인 갈등에 전적으로 일치하는 교황권과는 구별되는[다른] 국왕수장권에 대한 확고한 지지였다. </p> <p>여러가지 정치적인 사건들과 헌정의 변화 속에서 크랜머는 세속권력을 옹호하였던 루터의 ‘세속권력에 관하여’(Von weltlicher Oberkeit, 1523)에서 표현된 바울로의 교리에서 확신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전통적인 스콜라 신학적인 훈련과 이제 도입되기 시작한 ‘새로운’ 인문주의 방식의 ‘신학’을 공부하였던 학자인 그에게 이러한 상황[신학적인 이해]은 일종의 중년의 위기의식을 겪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루터가 주장하는 메시지의 핵심인 ‘율법과 복음’(law versus gospel)을 수용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1530년대초 뉘른베르크의 오시안더가 헨리의 혼인무효소송을 찬성하였던 방식-비텐베르크 개혁가[루터]는 이를 거부하였다-에 이끌렸다. 결국 대사로서 크랜머의 임무는 교황 클레멘트7세의 주장을 반박하며 헨리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신실한 군주(godly prince)에 대한 복종을 지지하는데 유용한 사도적 전거들(로마서 12장)을 지적함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지지할 수 있었다. 점차적으로 성서는 그의 사상을 확립시키는데 중심이 되었으며, [신실한 군주에의] 복종에 대한 바울로의 인식들은 크랜머가 튜더왕정의 당파정치 속에서도 자신의 사목직[직책]을 개혁가의 직책으로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확신을 제공하였다. 그는 헨리의 이혼을 위하여 동조자들을 규합하는 임무에 몰두하였을 때, 이미 신의 경륜[섭리]에서 군주의 역할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는 사목적 과제의 변화를 추구하기 이전에 먼저 교황의 권위를 거부해야 했을 때, 교회법을 거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다. 이러한 행동을 왕권에 대한 굴복이자 가톨릭신앙에 대한 배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패트릭 콜린슨의 평가에 주목하여야 한다. 즉, 크랜머는 국왕에 굴복하였다기 보다는 헨리의 변덕을 잘 다룸으로써 잉글랜드교회의 개혁을 촉진시켰다. </p> <p>따라서 1530년대 중반에 대주교는 국왕수장권의 수용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전보다 단호한 확신으로 국왕의 이러한 주권이 신의 질서를 반영하였으며 성서에서 사도의 권고에 의해서 확언되었다고 주장하였다. 1535년 2월에 보낸 한 편지는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즉, 교황정부의 법률들은 ‘그리스도를 억압하였을’ 뿐만아니라, [로마의] 주교를 이 세상의 신으로 만들었다’고 적시하였다. 성바울로 십자가교회에서 거행되었던 연속적인 설교들에서 누구보다도 크랜머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대주교는 이러한 결론을 ‘성서... [그리고] 거룩한 성인들과 박사[교부]들의 여러 주석들’로부터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였다고 거리낌없이 말하였다. 다음해에 크랜머는 국왕에게 자신의 활동을 보고할 때, 자신이 직접 이제 교황이 아니라 ‘로마주교’의 ‘잘못된 교리들을 지적하고’ 그가 탈취하였던 권위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는 설교의 주요 논점들을 지적하였다. 즉, 만약에 고대시대 제국의 교구가 로마성지(sancta sedes Romana)로 존경을 받았다면, 이는 이름의 거룩함(holiness) 때문이었으며, 그렇다고 결코 교황의 ‘영광과 화려함...탐욕...부정한 생활, 그리고 모든 악덕들의 보존’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이제 거리낌 없이 대주교는 자신이 ‘로마주교와 그의 법률들을 반대하며’ 이 법률들중 상당수가 ‘하느님의 법률들에 위배되며’, 따라서 교황이 이것들을 존중하는 것’ 만큼 ‘높이 존중할 수 없다’고 자신의 군주에게 말한다.</p> <p>크랜머는 이제 '공적으로는' 성서적으로 이해된 국왕수정권에 대한 복종을 강조함으로써 서방교회에 대한 교회법과 교황권의 문제를 제거하고, '사적으로는' 루터와 비텐베르그파가 해설한 그리스도인의 책무(Christian commitment)의 본질에 대하여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스콜라신학의 족쇄-하지만 이러한 훈련은 나중에 성찬에 대한 치열한 논쟁 때에 체계적인 서술들에 사용되었다-에서 벗어난 크랜머는 새로운 신학적인 진리를 탐구할 때에 두가지에 크게 의존하였다. 첫째로 무엇보다도 구원방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복음에 대한 루터의 ‘재발견’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둘째로 성서이해에 대한 그의 접근방법은 당시 최신의 학문이었던 에라스무스적인 문헌학[언어학]의 영향을 받았다.</p> <p>크랜머는 성찬에 관한 교리를 개정하고 재정의하였다는 점 그리고 이를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일상어]로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설명하였다는 점으로 가장 잘 알려졌지만, 전통적인 로마의 가르침에 도전하는 ‘새로운 신학’은 미사의 문제를 다루기 이전에 고해성사(penance)[당시에 이 용어는 회개와 참회행위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즉, 구원론의 문제-역자]를 우선적으로 숙고하였다. 크랜머의 비망록(commonplace books 인용구 모음집)에 대한 필자의 선구적인 연구를 발판으로 애쉴리 눌(Ashley Null)은 크랜머가 초기시대 교부들 뿐만아니라, 베다(Bede),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er Lombard), 성 빅토르의 휴고(Hugh of St Victor), 토마스 아퀴나스(Aquinas)와 끌레르보의 베르나두스(Bernard)와 같은 중세기 신학자들에게도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분석하였다. 그에 의하면, 1530년대에 크랜머는 초기의 루터처럼 사도 바울로의 메세지를 깨닫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크랜머는 더이상 스콜라신학의 영역에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신칭의(justification sola fide)[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에 대한 루터의 ‘재발견’을 촉진시켰던 똑같은 요소들(요인들 parameters)과 같은 영역에 있었다. 르네상스 예술가들과 저술가들이 옛 고대세계에서 완전성을 보았듯이, 16세기 개혁가들은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조차도 넘어서서 바울로의 교리에서 신약성서의 강조점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로]의 주장으로, 인간은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되어 있으며, 유일하게 용납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로움](imputed righteousness)를 확보하기 위하여 개개인은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활동(saving work)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음으로’(in faith) 선언할 때까지 죄인으로 남아있다. 만약에 학자인 크랜머 박사가 학구적이라서 ‘다마스커스 도상의 체험’과 같은 경험에 적합한 대상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1532년 대륙을 순회하며 황제의 궁정주재 대사로서 뉘른베르크에 체류함으써, 그는 새로운 ‘마르틴주의’(Martinism, 당시에는 루터주의보다는 이렇게 불렀다-역자해설)를 직접 목격하는 것 뿐만아니라 이를 심각하게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크랜머가 새로운 신학에 감명받았다는 점은 결혼으로 오시안더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확고한 루터파 사목자가 결코 믿음의 가족이 될 수 없는 자를 자기 부인의 조카의 신랑으로 환영하며 혼인예식을 주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p> <p>이 사건은 그가 새로운 신학으로 개심하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분명한 증거가 될 수도 있다. 만약에 그렇다면, 마틴 루터를 사로잡았던 복음의 진리-구원에 관한 한 단순한 신앙[믿음]이 선행보다 우선한다-를 확신하며 개혁가의 대열에 공개적으로 합류하려던 크랜머의 의지는 곧바로 좌절되었다. 헨리8세는 연로한 대주교인 워햄의 사망이후 톤턴 총사제[당시 크랜머의 교직-역자]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며 소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크랜머는 자신의 새로운 신학적인 통찰력을 모호하게 표현할 수 밖에 없었으며, 보다 큰 목적을 위하여 용감한 진리의 투사가 되기 보다는 때때로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처사였다. 한편 그리스도교 국가권(Christendom)의 가톨릭[전통적] 신조에 대한 국왕의 단호한 보수적 입장-교황권에 대한 주장을 제외하고-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대주교는 &lt;그리스도인의 규범&gt;(Institution of Christian Man, 1537)[주교신앙서]-새로이 설립된 왕국교회의 교리를 규정한 핵심적인 신앙선언문-을 비평한 헨리의 주석들에 대하여 곧바로 반박하였다. 크랜머가 제기한 것들중 세가지 문장은 루터의 신학과의 유사성을 나타내며, 특히 언어의 간결함에서 잘 나타난다. </p> <p>"우리의 의인화(justification, 구원) 이후에 나타나는 선행들만이 하느님을 기쁘게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선행들은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과 사랑을 부여받은 마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인화 이전에 우리가 실천하는 선행들은 인간의 눈으로 너무나 훌륭하고 영광스럽다 하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허락되지도 수용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의인화 이후에만 하느님의 법이 요구하는대로 선행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p> <p>그러나 이것은 곧 헨리시대의 정점들과 저점들에서도 크랜머와 소수의 개혁파들이 순탄한 길을 걸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에 그들이 성취한 최고의 업적이 ‘공인성서’(Great Bible, 1539년 4월)의 출판-다음해에 크랜머는 열정적인 서문을 추가하였다-이었다면, 그들의 최저점은 확실히 &lt;6개 신앙조항법&gt;이었다. 이 법률은 고해성사와 미사에 관한 “옛 신앙”을 확고하게 지지하였으며, 곧이어 1540년에 크롬웰이 실각당하고 처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인 후퇴는 결코 대주교의 사적인 연구를 가로막지 못하였으며, 헨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크랜머는 궁정의 당파정치를 겪으면서도 성서와 특히 초기교부들에 대한 연구에 헌신하였다. 설교를 확산시키려는 계획들은 1542년의 캔터베리 대교구 성직자회의에서 커다란 저항을 받았다. 성직자회의가 ‘공인성서’를 커다란 개정없이 유지시키는 문제에 대해서 양분되었다는 것은 매우 놀랄 일이었다! 그러나 크랜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대륙의 신학[종교개혁 신학자들의 신학]을 추구하였다. 그는 제대의 성사[성체성사]에 대한 루터의 성서적 이해들-즉, 그리스도의 제정사(라틴어로 Hoc est corpus meum이것은 나의 몸이다)에 대한 비텐베르그 개혁가[루터]의 확고하고도 비타협적인 입장에 대하여-에 매료되었으며, 스위스 개혁가들의 방식을 따라 이러한 성서적인 범주들을 희석시키려는 시도를 강력히 거부하였다. </p> <p>고해성사에 집중되었던 인용문 모음집(florilegia)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다. 그러나 영국 국립도서관의 종교개혁시대 소장품들중에서 크랜머와 그의 전속사제들이 성찬례에 관하여 수집하였던 인용문 모음집 부분은 2절지로 거의 50여장에 해당한다. 이 인용문들중 상당수는 이 성사에 대한 ‘실재적 현존’(real presence)[육체적 현존]의 이해를 강화시키기 위하여 수집되었다. 초기교부들의 자료들 외에도, 마르부르크 대화(1529)에서 루터와 스위스 개혁가 사이에 벌어진 논쟁의 쟁점이 되었던 인용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인용문들은 신약성서의 기록을 순수하고 말 그대로 이해하려는 루터의 입장을 크랜머가 잘 이해하고 이를 지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lt;Dialogus&gt;(1530)[오이콜람파디우스의 저서로 루터와는 다른 성찬이해를 나타낸다-역자]에서 수집한 성찬에 관한 인용문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유명한 사건이었던 이 논쟁의 다른 면에 대해서 깊이 고려함으로써 개혁주의[스위스-역자] 진영의 연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매우 존경하였음을 나타낸다. 무엇보다도 인용문 모음집의 증거에 의하면, 크랜머는 아테네파들(Athenians)[잉글랜드의 인문주의자들]이 과거를 이해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확고한 근거없이 신학적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양심적인 차원을 보여준다. 그러나 비서들의 비망록들, 대주교의 난외방주들(marginalia) 그리고 유사한 주제들에 대한 대주교의 글 모음집-이 모두는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새로운 신학’의 근본적인 주제들에 집중되어 있다-은 하나의 신학으로 존경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칼빈의 결정판인 &lt;기독교강요&gt;의 분석들 그리고 루터의 여러가지 저술들과 비교할 때에 토마스 크랜머의 기고문들은 매우 빈약하다. </p> <p>크랜머의 강점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개혁에 대한 그의 기여는 근본적으로 사목적 신학을 강조하였던 전례에 대한 기교들(skills)로 널리 기억되고 있다. 황제에게 파견된 대사로서 대륙을 여행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예배를 직접 목격하였을 때, 그는 이러한 개인적인 체험과 전례자료들의 수집으로 전례연구에 관심을 가졌다. 레티클리프(Raticliff)는 상당수의 사적인 전례자료들이 현존하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이들 대부분이 1540년대 전반에 작성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데이비드 셀윈(David Selwyn)은 대주교의 소장도서들중 전례부분이 ‘주로 중세기 자료들’이라고 하였지만, 마찬가지로 상당수의 소장서적들이 ‘크랜머 소유의 프로테스탄트 서적들의 운명’[몰수된 후 파기되었다-역자]을 겪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대관식(1547년2월)에서 어린 에드워드6세를 그의 영토 내에서 ‘하느님의 대리자이며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 옹호하는 연설을 하였을 때, 그는 이미 ‘하느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며, 우상을 파괴하였다’고 확신할 정도로 이미 상당한 개혁을 실행하였다. </p> <p>7월에 이르러, 호국경 서머셋은 추밀원을 이용하여 국왕의 전권으로 &lt;공식설교문집&gt;(공식강론집Book of Homilies)을 발행하였다. 크랜머는 이 설교문들중 ‘구원’, ‘신앙’ 그리고 ‘선행’에 관한 설교문에서 전통적인 신앙(1543년 국왕신앙서에서 승인된 교리)을 거부하며 루터파와 같은 용어로 집필함으로써, 누구보다도 스티븐 가디너의 분노를 자아내었다. 윈체스터 주교[가디너]는 중요한 논점을 지적하며, ‘이신칭의’의 수용은 곧 서방교회의 성사교리에 치명적인 영향들을 끼칠 것으로 정확하게 평가하였다. 그는 “믿음만으로’는 ‘궤변’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이러한 이해는 올바른 가톨릭 전통의 신경에서 차지할 자리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대주교에게 루터의 이설을 포기할 것을 경고하였다. 가디너는 ‘성찬례는...그러한 교리와 조화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였을 뿐만아니라, 이러한 문제들은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고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의인론에서 ‘믿음만으로’의 교리를 인정하는 자는 누구나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성찬의 성사를 거부할 수 밖에 없다고 확신하였다. 그해[1547년] 가을 의회가 소집되었을 때, 의회는 성사를 비난하거나 비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다음해 봄에는 ‘두종류의 성찬 즉, 빵과 포도주’의 배령을 허용하는 국왕포고문을 ‘영성체 예식서’(성찬예식서The Order of Communion) 앞에 첨부하였으며, 이 예식서는 라틴어 미사-미사의 의식이나 예식을 전혀 변경시키지 않고-에서 사제가 신자들에게 축성된 성찬들을 배찬하기 이전에 영어로 된 죄의 고백과 사면 그리고 성서에서 인용한 일련의 ‘위안의 말씀들”을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다. </p> <p>만약에 이 작은 ‘예식서’(Order)가 1544년의 영문 연도처럼 매우 조심스럽게 집필되었다면, 그 이면들도 표면상의 문제 만큼이나 중요하였다. 1548년 부활주일(4월1일)을 시작으로 전례개혁은 이제 희생[제의]을 바치는 사제중심의 예식을 신자들의 영성체로 전환시켰으며, 또한 이를 정중하지만 일상적인 언어로 거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것들은 서서히 실행되야만 했다. 왜냐하면 통합된 전례서는 매우 조심스럽게 편집될 필요가 있으며, 또한 튜더왕국의 각 교구들과 전도구 교회들에 소개되기 이전에 먼저 폭넓은 지지를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크랜머는 이 임시적인 예식서를 만들 때, 마틴 부처가 스트라스부르그와 쾰른의 교회들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작성하였던 예식서에 크게 의존하였다. 이 예식서의 출판소식은 급속도로 확산되었으며, 프랑크푸르트 도서판매전 조차도 첫 출판된 바로 그 달에 이 ‘예식서’의 인쇄본들을 확보할 정도였다. 종교개혁중인 유럽은 잉글랜드를 주시하였으며, 크랜머의 혁명은 시작되었다.</p> <p>그의 앞길에는 좌절과 성취가 놓여 있었다. 비록 크랜머는 자신의 개혁적인 비젼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종종 자신의 주장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1549년 &lt;공동기도서&gt;의 출판으로 혁명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직전에 열린 윈저성의 위원회[기도서 집필위원회-역자]를 주재하면서 각종 예식들의 초안들과 이에 첨부할 각종 지시문들을 수집하고 토론할 때, 대주교는 이 최대의 프로젝트에 대한 반대가 엄청나다는 점을 깨달았다. 어떠한 것도 직설적으로 보이지 않아야 하며, 이 첫번째 기도서를 수용하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는 교회와 국가의 핵심적인 조직들은 하나로 결속시켜야 했다. 예를들면, 전통적인 신앙을 주장하는 중진 성직자들이 다수 포함된 성직자회의를 공식적으로 소집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를 야기시켜 호국경 서머셋 정권이 중대하게 추구하는 신앙정책을 지연시킬 우려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평민원에서 새로운 전례를 규정하는 법안은 평민원에서 무지한 지방과 소도시 출신의 의원들로부터 조롱을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은밀한 작전들을 준비하였으며, 이에따라 특별히 소집된 회의들을 통해서 먼저 주교들에게, 그 다음으로 대학의 일부 신학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귀족원의 의원들에게 이를 공개하였다. </p> <p>이 글에서 1549년 전례통일법에 규정된 전례서를 시행하였던 구체적인 경위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lt;공동기도서&gt;의 공식적인 출판으로 왕국은 이제 법적으로 예배의 변화를 따라야 했다. 이러한 변화들은 아직도 ‘옛신앙’의 전례들로부터 전통적인 [예식]구조들을 상당부분 보존하였지만, 크랜머의 영성적인 기교[전례에 대한 기술]로 새로운 종교개혁 교리들에 공감하는 일련의 기도문들로 보완되었다. 무엇보다도 대주교의 위원회는 기존의 여러가지 예식서들-적어도 다섯가지 이상으로 구분된 중세기 예식서들-을 적어도 하나의 전례서-성직서품예식서 제외-로 통합하였다. 지금까지 사용하였던 미사경본(missal), 성무일도서(breviary), 주교예식서(pontifical), 예식지침서(manual) 그리고 순행예식서(processional)는 이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에게 &lt;공동기도서&gt;(Common Prayer)로 통합되었다. 이제 전통적으로 복잡하게 구분되었던 예식서들은 단 한권의 책으로 제대용과 휴대용 크기로 교체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출판사들이 큰 돈을 벌 수도 있었겠지만, 사목적 배려로 기도문의 가격을 통제하여 위처치와 그래프톤의 출판사들에서 인쇄된 기도서들은 저렴한 ‘2실링’에서 ‘3실링2페니를 넘지 않는’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p> <p>성찬에 대한 크랜머의 ‘정통적이며 납득하기 쉬운 교리’(sound and comfortable)는 마찬가지로 그의 개혁의제에 중요한 부분이었다. 성서와 교부들에 대한 수년간에 걸친 연구의 성과는 1549년 기도서의 ‘거룩한 영성체’(감사성찬례holy communion)였다. 비록 루터의 1523년 예식서[Formula Missae et Communionis로 미사의 희생적 의미를 제거하도록 제시된 안내서로 미사라는 용어를 여전히 사용하였다-역자]처럼 크랜머는 이 예식의 명칭에 ‘일반적으로 미사라고 불렀던’(기존의 미사commonly called the mass)이라는 문구를 포함시켰지만, 그는 기존의 유효한 희생제의라는 인식을 완전히 삭제하고 그리스도 자신의 희생, ‘찬양과 감사의 희생’, 그리고 예배참여자들이 ‘마땅하고 거룩하며 살아있는 희생으로 바치는 그들의 영혼과 육신들’의 봉헌을 강조하였다. </p> <p>크랜머는 이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그는 이 기도서를 ‘모든 선량한 백성들에게 적합한 매우 신실한 예식(godly order)을 규정한 책’이라고 주장하였다-하였지만,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반발은 소위 ‘기도서반란’으로 나타났다. 콘월과 데번 지방의 반란군들은 추밀원에 보낸 요구서에서 일상적인[빈번한] 영성체라는 취지를 취소하고, ‘성체과 성수’와 같은 성사물[준성사]들의 보존, 산자와 죽은자들을 위한 성찬봉헌들(oblations), 그리고 별세자들을 위한 기도들을 허용하도록 요구하였다. 대주교는 즉각적으로 대응하면서 요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그들의 무지를 질타하며, 신자들을 오류에 빠지도록 지도하는 성직자들의 잘못된 신학을 ‘사악하고 거짓된 원리들’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교회의 복리를 위한 사목적 원칙들을 기도서의 서문에 첨부하지 않았던가? 의식들(ceremonies)을 설명하는 지침들을 기도서에 부록으로 첨부하였으며, 이 글에서 ‘일부 의식들을 삭제하고 또다른 일부 의식들을 보존하였던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였다. 크랜머가 직접 집필하였던 이 글은 논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 </p> <p>"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으며, 그리고 인간에 의해서 제정된 의식들 중에서, 일부는 처음에 신실한 의도와 목적으로 제정되었으나, 결국에는 허영과 미신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또다른 일부는 무분별한 신심활동과 지각없는 열성으로 ... 도입되었다... 이러한 의식들은 백성들의 눈을 멀게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에, 이것들은 삭제되고 완전하게 제거되어야 한다. 이와 다른 의식들은 인간에 의해서 제작되었지만, 교회에서의 올바른 질서에 유익하고 그리고 신앙의 교화(edification)에 적합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계속 보존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인정된다."</p> <p>대주교는 타협적인 표현을 결코 패배라고 인식하지 않았다. 그는 중도적인 입장으로 온건함을 지키는 것을 선호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서문[기도서 서문]은 이미 비아 메디아-많은 사람들에게 이 용어는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신학적인 특징으로 인식되었다-를 표명하였다. </p> <p>그가 옛 예식들을 개정하면서 활력없는 가톨릭[전통적인] 통일성을 촉진시킨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은 개정된 공적 전례들이 종교개혁 신학을 분명하게 표현하도록 처리한 방식에 의해서 입증된다. 즉, ‘왜냐하면 우리들은 모든 국가들이 하느님의 영예와 영광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의식들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Of Ceremonies, 역자] 교황들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들과 그들의 의식들은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것들이며, 그리고... 당연히 적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다.’이러한 정죄는 단순히 논쟁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주교는 사목적 판단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p> <p>"그리스도는 우리가 그 분에 의해서만 가질 수 있는 것들을 지시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그의 빵, 그의 포도주와 그의 물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신성함(holiness)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미신들을 세웠다. 악마는 우리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떼어내기 위하여 모든 수단들을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도 우리가 그리스도 대신에 그를 따르며,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것들을 그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믿게할 목적으로 그의 신성한 미신들을 지키도록 요구한다." </p> <p>보수적인 가디너와 급진적인 존 후퍼(잉글랜드 츠빙글리!)의 교묘한 공격을 받은 직후에 더들리의 새로운 정부는 급진적인 신앙정책을 명령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크랜머에게 확실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에따라 크랜머는 1552년에 그의 ‘신실한 기도서’를 개정하면서, 본래의 &lt;공동기도서&gt;를 ‘개선’하거나 ‘변경’시키지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모호한 표현들을 제거한 전례서로 만들었다. 이 개정작업을 할 때에, 대주교는 스트라스부르그의 훌륭한 개혁가인 마틴 부처의 &lt;기도서 비평&gt;[Censura]을 참고하였다. 부처는 1548년 아우그스부르그 화의(Augsburg Interim)로 인하여 잉글랜드로 망명온 이후 람베스궁[대주교의 관저]에서 체류한 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최초의 신학부 흠정교수로 임명되었다. 그가 쓴 &lt;비평서&gt;(Censura, 교회의 징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거룩한 영성체에 관한 것이었다. 종교개혁 원리들이 미사와 이와 관련된 미신들을 ‘결코 충분하게 정죄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정하면서도, 부처는 축성기도가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환시키는 사악하고 신성모독적인 화체론을 유지시키고 확언하는 수단으로’ 왜곡되어 사용될 수 있는 상황을 회피하도록 도와주었다. </p> <p>종교개혁시대에 제작된 최고의 전례서들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추구하는 모든 신앙인들을 위하여 제작되었다. 그리고 크랜머는 부처를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주교는 &lt;Defence of the True and Catholic Doctrine of the Supper of the Lord&gt;(1550,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에 대한 참되고 보편적인 교리에 대한 변론서)의 ‘독자들에 대한 서문’에서 자세히 설명할 때, 성서와 초기교회 교부들로부터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주님의 포도원을 질식시켰던 잡초들을 완전히 제거하였음을 주장하며, ‘완전히 제거하지 않을 경우’ 그것들은 또다시 기름진 땅을 광야로 변질시킬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부처가 여러가지 경험으로부터 그의 요점을 제시하였을 때, 이에 대한 응답으로 크랜머는 오해를 야기시켰던 많은 모호한 표현들을 1552년 기도서에서 완전히 제거하였다. ‘미사’라는 용어 자체를 삭제하고 예식의 명칭을 ‘주의 만찬을 거행하는 예식’(Order for the Administration of the Lord’s supper)으로 변경하였다. ‘사제’(priest)는 이제 더이상 ‘석재[돌]제대(Altar)의 중앙이 아니라, 겸손하게 성찬식탁(Table)의 북쪽면에’ 위치하도록 규정하였다.[모든 교회는 동-서 방향으로 건축되었다-역자]. 새로운 예식은 1549년의 그것과는 달리 영광송을 낭독하지 않으며, 대신에 십계명을 그날의 성서독서-서신과 당일의 복음-에 이전에 낭독하도록 규정하였다. 니케아신경과 설교 후에(설교를 예배의 이 시점에 규정한 지시문은 기도서에서 설교에 대한 유일한 지시문으로 말씀과 성사가 하나로 거행된다는 종교개혁 신학을 강조하는 것을 나타낸다), 교회를 위한 기도, 죄의 고백과 사면[사죄문]을 수르숨 꼬르다(축성경의 시작송으로 가장 오래된 초기교회의 시작송이다) 이전에 위치시켰다. 그 다음으로 소위 ‘영성체를 위한 겸손의 기도’(Prayer of Humble Access)를 1549년 예식에서 교회를 위한 기도의 위치로 변경하였다. 따라서 부처가 매우 염려하였던 빵과 포도주의 유효한 희생이나 숭배(adoration)라는 인식들을 분명하게 제거하였다. </p> <p>요약한다면, 옛 축성경(canon)의 여러가지 구성요소들을 서로 다른 자리에 배치함으로써, 크랜머는 중세기 미사에서 뿌리깊게 강조되었던 희생(희생제의 sacrifice)에 대한 인식을 능숙하게 제거하였으며, 또한 ‘축성’이란 용어 자체도 완전하게 제거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다음 기도문은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을 제정하였던 성서의 기록을 단순히 낭독하도록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lt;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의 연대기&gt;(Greyfriars’ Chronicle)에 나타나는 새로운 예배에 대한 분명한 언급은 이러한 인식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즉, ‘...모든 성인의 날에 빵과 포도주에 대한 새로운 예배서가 바울로 교회에서 시작되었다.’</p> <p>에드워드왕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잉글랜드에서 활기차게 진행되었던 종교개혁은 갑자기 중단되었다. 더구나 더들리 가문에 혜택이 돌아가도록 만든 왕위계승을 변경하는 문서인 ‘수정문’(왕위계승 수정문Device)에 서명함으써, 크랜머는 사실상 자신에 대한 사형집행 영장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런던탑과 옥스퍼드시의 감옥인 보카도(Borcardo)에서의 시련은 크랜머에게 회개[고해 penance]와 성찬례에 관한 그의 사목적 신학에 대하여 더욱 몰두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얻어진 성서적 이해를 통해서 크랜머는 영혼을 치유하는 하느님의 예배를 위한 말씀을 강조하였다.</p> <p>때때로 크랜머의 모호함이 그의 개혁의지를 가리웠다 하더라도, 모든 전향서들을 뒤집는 피날레에서 보여준 불굴의 용기는 그의 업적에 대한 감사와 경의를 요구한다. 그는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의 케임브리지 학자이자 복음적인 (종교개혁적인 evangelical) 신학자로서 교리적 변화를 성취하기 위하여 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노력하였다. 특정한 시대의 인물이면서도, 잉글랜드교회의 진정한 개혁을 위한 그의 노력에 대하여 그의 대학교는 옛 셀윈 신학교(Selwyn Divinity School)의 정문 바로 위에 그의 동상을 설치하는 것으로 그의 업적을 인정하였다. ‘16세기의 잉글랜드 양식으로 붉은 벽돌과 석재’(1875년 대학평의회에서 승인한 &lt;설치령&gt;에서)로 만들어진 이 건물은 1511년 존 피셔가 헨리8세로부터 특허장을 받아 설립하였던 성요한 칼리지(College of St John the Evagelist) 바로 앞에 위치하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p> <p>참고문헌</p> <p>자료들<br /> Cox, John E., ed. Miscellaneous Writings and Letters of Thomas Cranmer. Parker Society edn, Ⅱ.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846.</p> <p>---------, ed. Writings and Disputations of Thomas Cranmer Relative to the Sacrament of the Lord’s Supper. Parker Society edn, I.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844.</p> <p>Ketley, Josheph (ed.), Liturgies of Edward Ⅵ.Parker Society ed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844.</p> <p>연구서들</p> <p>Brooks, Peter Newman. Cranmer in Context. Cambridge: Lutterworth Press, 1989.</p> <p>Brooks, Peter Newman. Thomas Cranmer’s Doctrine of the Eucharist. London: Macmillan, 1992.</p> <p>Collinson, Patrick ‘Thomas Cranmer’, in The English Religious Tradition and the Genius of Anglicanism. Geoffrey Rowell, ed. Oxford: Ikon, 1992.</p> <p>MacCulloch, Diarmaid. Thomas Cranmer: A Life. New Haven, CT,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96.</p> <p>Null, Ashley. Thomas Cranmer’s Doctrine of Repentanc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p> <p>Selwyn, David G. The Library of Thomas Cranmer. Oxford: Oxford Bibliographical Society, 1996.</p> <p>Selwyn, David G, and Paul Ayris (eds.). Thomas Cranmer: Churchman and Scholar. Woodbridge: Boydell &#38; Brewer, 1993. </p> Cranmerian on "번역: 토머스 크랜머의 생애와 잉글랜드 종교개혁 - 2"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75#post-1023 월, 22 3월 2010 12:46:35 +0000 Cranmerian 1023@http://liturgy.skhcafe.org/ <p>12. 그 이후와 유산</p> <p>크랜머의 사망 직후에 메리 정부는 6개의 전향서들과 마지막 연설 본문을 하나의 소책자로 출판하였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전향서들을 부인하였다는 언급은 없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 이 사건의 내용은 더이상 효과적인 선전물(propaganda)이 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도 그의 전향서들 때문에 이 사건을 유익하게 사용하기 어려웠다. 해외 망명가들의 선전활동은 그가 쓴 글들중 일부분에 집중되었다. 마침내 그에 대한 이야기는 1559년 존 폭스의 책 &lt;순교자들의 행적과 유적&gt;(Acts and Monuments)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p> <p>크랜머의 가족들은 1539년에 대륙으로 피신한 후에, 정확한 년도는 알 수 없지만 그 후에 잉글랜드로 귀환하였다. 1547년 에드워드가 왕권을 계승한 후에야 크랜머는 공개적으로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자녀들의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마가렛은 1530년대에 출생하였으며, 아들 토머스는 아마도 에드워드 치하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 메리의 왕권계승 직후 크랜머의 부인은 독일로 피신하였으며, 그의 아들은 동생인 에드먼드 크랜머와 함께 대륙으로 피신하였다. 딸 마가렛은 크랜머가 총애하였던 출판업자인 에드워드 위처치와 결혼하였으며, 이들은 메리의 사망후에 잉글랜드로 귀환하여 서리지방에 정착하였다. 위처치는 또한 미망인인 마가렛과 토머스 노톤과의 혼인을 중재하였다. 위처치는 1562년에 사망하였으며 마가렛은 바르톨로뫼 스콧트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1570년대에 자녀없이 사망하였다. 크랜머의 두자녀들은 모두 자녀없이 사망함으로써 그의 가계는 절멸하였다. </p> <p>엘리자베스1세가 왕권을 계승하였을 때, 그녀는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신앙정책으로 잉글랜드 왕국교회를 또다시 로마로부터 독립시켰다. 그녀가 재확립시킨 교회는 사실상 1552년9월 이후 에드워드 치하의 왕국교회의 복사판(snapshot)이었다. 따라서 엘리자베스의 기도서는 크랜머의 1552년판 기도서에서 “검정색 지시문”을 삭제한 기도서였다. 1563년에 개최된 성직자회의는 에드워드 치하의 42개 신앙조항에서 성찬론에 대한 내용을 일부 수정하여 39개 신앙조항을 발표하였다. 대다수의 해외망명가들이 잉글랜드로 귀환하여 왕국교회에 복위하였다. 에드먼드 그린달-엘리자베스 치하에서 켄터베리 대주교가 됨-과 같은 자들에게 크랜머는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p> <p>크랜머의 가장 커다란 관심사들은 국왕수장권의 유지 그리고 종교개혁 신학과 신앙활동[생활방식]의 확산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언어와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기여로 널리 기억되고 있다. 그의 산문(prose문체)은 잉글랜드어[영어]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그가 편찬한 공동기도서는 영어권의 세계의 백성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잉글랜드 문학서였다. 크랜머에 대해서는 지지자들과 비방자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의 생애와 시대의 복잡성을 온전하게 평가할 수 없다. 로마 가톨릭 전기작가들은 때때로 크랜머를 원칙없는 기회주의자, 니고데모, 그리고 전제군주의 도구로 묘사하면서도, 16세기의 많은 성직자들과 정치가들이 현대적인 기준에 맞지 않게 살았다는 점을 간과한다. 반면에 성인전을 연구하는 프로테스탄트 전기작가들은 때때로 크랜머가 자신의 원칙들을 배신하였던 경우들을 무시한다. 그러나 양 진영은 크랜머가 헌신적인 학자였으며, 그의 생애가 인간 본연의 약점들과 강점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과소평가를 받고 있는 개혁가라는 점에 동의한다. 세계성공회는 교회력에서 3월21일 그의 순교일에 그를 기념한다. </p> <p>참고문헌 </p> <p>Ayris, Paul, and David Selwyn, eds. Thomas Cranmer: Churchman and Scholar. Woodbridge, England, and Rochester, N.Y., 1993.</p> <p>Ayris, Paul, "The Revision of the Ordinal in the Church of England 1550-2005", Ecclesiology, Vol. 1, No. 2, 95-110, London, 2005.</p> <p>Ayris, Paul, The Correspondence of Thomas Cranmer, Archbishop of Canterbury, and his English Audience 1533-–54, "Reformation and Renaissance Review, 3 (2000) 9-33", Reformation and Renaissance Review (London: Equinox Publishing), 2000 </p> <p>Ayris, Paul, The Public Career of Thomas Cranmer, "Reformation and Renaissance Review, 4 (2000) 75-125", Reformation and Renaissance Review (London: Equinox Publishing), 2000.</p> <p>Bagchi, David V. N.; Steinmetz, David Curtis, eds., The Cambridge Companion to Reformation Theolog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p> <p>Bernard, G. W., The King's Reformation: Henry VIII and the Remaking of the English Church,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5.</p> <p>Coleman-Norton, P. R., The Correspondence of S. John Chrysostom (With Special Reference to His Epistles to Pope S. Innocent I), "Classical Philology, Vol. 24, No. 3", Classical Philology (Chicago: Univversity of Chicago Press), 1929.</p> <p>Bond, Ronald B., ed. “Certain Sermons or Homilies”(1547) and “A Homily against Disobedience and Wilful Rebellion”(1570): A Critical Edition. Toronto, 1987.</p> <p>Bromiley, Geoffrey W. Thomas Cranmer, Theologian. London, 1956.</p> <p>Brooks, Peter Newman, ed. Cranmer in Context: Documents from the<br /> English Reformation. London, 1989.</p> <p>------. Thomas Cranmer’s Doctrine of the Eucharist. 2nd ed. Basingstoke, England, 1992.</p> <p>Buchanan, C. “What Did Cranmer Think He Was Doing?” Grove Liturgical Studies, no. 7. Brmcote, England, 1976.</p> <p>David M. Loades, “Thomas Cranmer: A Biographical Introduction” in Margot Johnson ed<br /> Thomas Cranmer: Essays in Commemoration of the 500th Anniversary of his Birth, 1990</p> <p>------. The Oxford Martyrs. London, 1970.</p> <p>------. Cranmer and the English Reformation. Bangor, Wales, 1991.</p> <p>Howell, Thomas Bayly, ed., A Complete Collection of State Trials and Proceedings for High Treason and Other Crimes and Misdemeanors from the Earliest Period to the Year 1783, London: T. C. Hansard,1816. </p> <p>MacCulloch, Diarmaid. Thomas Cranmer. New Haven, 1996.</p> <p>Loades, David M., Intrigue and Treason: The Tudor Court, 1547-1558, Harlow, England: Pearson Longman, 2004. </p> <p>Matthew, H. C. G.; Harrison, Brian Howard, eds. (2004),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4.</p> <p>Null, Ashley, Thomas Cranmer's Doctrine of Repentance: Renewing the Power to Lov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p> <p>Overell, Anne, Italian reform and English Reformations, c.1535-c.1585, Farnham, Surrey, UK: Ashgate Publishing, 2008. </p> <p>Schofield, John, The Rise &#38; Fall of Thomas Cromwell, Stroud, England: The History Press, 2008. </p> <p>Ridley, Jasper, Thomas Cranmer, Oxford: Clarendon Press, 1962. </p> <p>Robinson, Ian, The Establishment of Modern English Prose in the Reformation and the Enlightenme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p> Cranmerian on "번역: 토머스 크랜머의 생애와 잉글랜드 종교개혁 - 1"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74#post-1022 월, 22 3월 2010 12:36:56 +0000 Cranmerian 1022@http://liturgy.skhcafe.org/ <p>다음의 글은 크랜머의 생애로 <a href="http://en.wikipedia.org/wiki/Thomas_Cranmer" rel="nofollow">http://en.wikipedia.org/wiki/Thomas_Cranmer</a> 개재된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위키피디아의 특성상 한 사람이 일관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여러사람들이 첨삭하였기 때문에, 일관성과 구체성이라는 두가지 문제가 혼돈되고 있지만 크랜머에 대한 간단한 글이라고 생각되 일단 번역하였습니다. 원본의 각주는 생략하였지만, 참고문헌에 모두 소개하였습니다. 원문과 대조하면서, 그리고 용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참고하면서 읽으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봅니다. Good luck!</p> <p>차례에서 나타나듯이 크랜머의 생애는 초기 잉글랜드 종교개혁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물론 크랜머 이전에 이미 개혁을 주장하고 실천하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정보는 이 포럼에 번역된 수잔 도란의 책[잉글랜드 종교개혁]을 참고하십시요. </p> <p>엄밀한 의미에서 잉글랜드 종교개혁이란 에드워드왕 치하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전반기 [1520년대부터 1558년까지]에 크랜머의 역할은 핵심적이었습니다. 후반기는 엘리자베스왕 치하[1558-1603]로 이때에 종교개혁 신학과 이에따른 신앙생활방식[신앙활동]이 안정적으로 정착되었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헨리치하에서의 혼인무효소송과 부분적인 개혁지향은 소위 개혁성향의 성직자들과 정치가들이 정치권과 교회지도부에서 영향력있는 자리를 확보하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p> <p>크랜머의 생애와 신학에 관한 연구는 최근 20여년 동안에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특히 그동안 소위 교파적인 관심[confessional perspectives]에서 연구하고 평가하던 방식을 비판하며, 소위 당시적인 관점-16세기의 상황과 대륙의 종교개혁과의 관계와 비교-에서 연구하고 평가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연구서들은 참고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멕클럭의 저서 &lt;크랜머&gt;는 이제 거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말로 번역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과 내용[신학 포함]을 담은 책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티클 별로 하나씩 번역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p> <p>크랜머의 생애와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논의할 때, 우리들은 많은 의문과 질문들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이 때마다 문제를 깊이있게 논의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p> <p>토머스 크랜머와 잉글랜드 종교개혁</p> <p>차 례</p> <p>1. 대학까지 (1489-1527)<br /> 2. 혼인무효소송에의 참여 (1527-32)<br /> 3. 켄터베리 대주교에 임명되다 (1532-34)<br /> 4. 수장대리의 휘하에서 (1535-42)<br /> 5. 개혁의 후퇴 (1539-42)<br /> 6. 국왕의 지지를 받으며 (1543-47)<br /> 7. 외국의 개혁가들과 종교개혁 교리들 (1547-49)<br /> 8. 공동기도서 (1548-49)<br /> 9. 개혁의 확대 (1549-51)<br /> 10. 최종적인 개혁 프로그램 (1551-53)<br /> 11. 재판들, 전향서들 그리고 순교 (1553-56)<br /> 12. 그 이후와 유산</p> <p>토머스 크랜머(1489년7월2일-1556년3월21일)는 헨리8세와 에드워드6세의 치하 동안에 켄터베리 대주교로서,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이끈 지도자였다. 그는 헨리가 그의 부인인 케서린(아라곤 출신)과의 이혼[혼인무효]을 요구한 소송을 지지하였으며, 그 결과로 잉글랜드의 교회는 교황청과 단절되었다. 그는 토머스 크롬웰과 함께 국왕수장권(Royal Supremacy)의 원칙을 지지하였으며, 이에따라 국왕은 그의 영토내에 있는 교회에 대한 주권자로 인정되었다.<br /> 크랜머는 켄터베리 대주교로 재임하는 동안에, 개혁된 잉글랜드교회의 교리적 전례적인 구조들을 정착시켰다. 헨리의 치하에서 크랜머는 교회내의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의 권력투쟁 때문에 급진적인 변화들을 추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최초로 공식적으로 승인받은 모국어[지방어] 예식인 연도와 권고문(Exortation and Litany)을 발행하는데 성공하였다. </p> <p>에드워드가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에 크랜머는 중요한 개혁들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두편의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를 집필하고 편찬하였다. 이는 잉글랜드교회에서 사용될 완전한 전례서였다. 또한 그는 잉글랜드로 망명온 대륙의 개혁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성찬례, 성직자의 독신생활, 예배장소에서 성상들의 역할, 그리고 성인숭배와 같은 분야들에 대한 새로운 교리적인 표준들을 발전시켰다. 크랜머는 기도서, 공식설교문집(Homilies) 그리고 기타 출판물들을 통해서 새로운 교리들을 공표하였다. </p> <p>로마 가톨릭신자인 메리1세가 왕권을 계승하였을 때, 크랜머는 반역죄와 이단죄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거의 2년여 동안에 구금당하면서 교회당국자들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아 전향서(recantation)를 몇차례 작성하였으며, 최종적으로는 로마 가톨릭신앙에 완전히 전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처형 당일에 그는 극적으로 자신의 전향서들을 철회하며 순교자로 사망하였다. 그의 유산은 &lt;공동기도서&gt;와 그의 작품으로부터 유래된 성공회 신앙선언문인 &lt;39개 신앙조항&gt;을 통해서 잉글랜드교회와 세계성공회 내에 오늘도 살아있다. </p> <p>1. 대학까지 (1489-1527) </p> <p>크랜머는 1489년에 노팅햄셔의 아슬락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토머스와 아그네스-는 소규모 부농이었지만, 귀족출신은 아니었다. 그들의 큰아들 존은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았으며, 토머스와 그의 동생 에드먼드는 성직자의 길을 준비하였다. 크랜머의 어린시절 교육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아마도 그는 마을의 문법학교[초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14살이 되었을 때(아버지는 2년전에 돌아가셨다), 그는 최근에 설립된 케임브리지의 예수 칼리지(Jesus College)에 진학하였다. 놀랍게도 그는 논리학과 고전문학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는 문학사 과정을 마치는데 8년이나 걸렸다. 이 시기 동안에 그는 중세기 스콜라철학의 저서들을 수집하였으며, 이를 평생 보관하였다. 한편 문학석사 과정을 공부하는 동안에, 그는 이전과는 매우 다르게 인문주의자들, Jacques Lefèvre d’Etaples과 에라스무스를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이 시기에는 특별한 지연없이 3년만에 과정을 마쳤다. 1515년 문학석사 학위를 받은 직후에, 그는 예수칼리지의 평의원(Fellowship)으로 선발되었다. </p> <p>크랜머는 MA를 취득한지 얼마되지 않아 조앤(Joan)이라는 여인과 결혼하였다. 그는 아직 사제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의 평의원 직을 상실하였으며, 따라서 거주할 곳을 잃고 말았다. 그는 자신과 아내를 부양하기 위하여 다른 칼리지에서 강사직(reader)로 일하였다. 조앤은 첫 아이를 출산하는 동안에 사망하였으며, 예수칼리지는 크랜머를 평의원으로 복직시킴으로써 그에 대한 관심을 표시하였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1520년에는 이미 사제이자 대학교가 수여하는 설교자들에 포함되었다. 1526년에 그는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p> <p>케임브리지에 체류하였던 30년 동안 크랜머의 사상과 경험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전통적으로, 그는 성서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인문주의자로 1520년대에 확산되었던 루터의 사상들을 쉽게 수용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방주[난외주석]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크랜머는 초기에 마틴 루터에 대해서는 반감을, 그리고 에라스무스에 대해서는 찬사를 표시하였다. 국왕의 대법관인 울지 추기경은 유럽 각지에 파견하는 외교사절로 에드워드 리, 스티븐 가디너 그리고 리처드 샘슨과 같은 케임브리지의 학자들을 선발하였다. 크랜머도 스페인에 파견하는 외교사절의 수행원으로 선발되었다. 최근에 발견된 두편의 크랜머 편지에는 잉글랜드의 국왕인 헨리8세와 크랜머의 만남을 묘사되어 있었다. 1527년6월 스페인으로부터 귀환한 크랜머는 국왕과 반시간 동안 면담하였다. 그는 국왕을 “가장 친절한 군주”라고 표현하였다. </p> <p>2. 혼인무효소송에의 참여 (1527-32) </p> <p>헨리8세의 첫번째 결혼은 1502년 그의 형인 아서(Arthur)의 사망에서 시작하였다. 당시에 헨리7세는 아서의 미망인이 된 케서린(아라곤 출신)을 왕위 계승자[헨리8세]와 약혼시켰다. 이 약혼은 곧바로 사망한 형제의 아내와의 결혼을 금지한 성서본문(레위기 18장과 20장)과 관련된 의문들을 제기하였다. 두사람은 1509년에 결혼하였으며, 계속되는 유산과 사산끝에 1516년 딸 메리를 얻었다. 1520년대까지 헨리는 아직도 왕위를 계승할 왕자를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를 하느님의 분노를 나타내는 확실한 표징으로 인식하고 바티칸에 혼인무효를 신청하였다. 그는 울지 추기경에게 이 소송을 집행하는 책임을 맡겼으며, 울지는 대학교의 전문가들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527년부터 크랜머는 케임브리지의 교수직 이외에도 혼인무효 변론을 지원하였다. </p> <p>1529 년 여름에 크랜머는 케임브리지에서 발생한 전염병을 피해서 훨탐 홀리 크로스에 있는 지인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바로 이때에 국왕의 지방순행을 동행하던 케임브리지 동료들인 스티븐 가디너와 에드워드 폭스를 만났다. 이 세사람은 혼인무효 소송에 대하여 논의하였으며, 크랜머는 지금까지 추진되었던 로마에서의 법적인 해결을 포기하고 유럽 전역에 있는 대학교 신학자들의 입장을 의뢰할 것을 제의하였다. 가디너와 폭스가 이러한 논의를 국왕에게 보고하였을 때, 헨리는 이러한 제의에 깊은 관심을 표시하였다. 이 때에 국왕이나 대법관인 토머스 모어가 이러한 계획을 분명하게 승인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계획은 집행되었으며, 크랜머는 대학교들로부터 의견들을 수집하기 위하여 로마에 파견된 팀에 합류하도록 요청받았다. 에드워드 폭스는 이에 대한 조사결과를 종합하였으며, 팀은 &lt;대자료모음집&gt;(Collectanea Satis Copiosa)과 &lt;대학교들의 판결집&gt;(The Determination)을 편찬하였다. 이 책들은 국왕이 자신의 영토 내에서 최고의 관할권을 집행한다는 논점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지지하였다. </p> <p>크랜머가 최초로 접촉한 대륙의 개혁가는 시몬 그리나에우스(Simon Grynaeus)였다. 그는 스위스의 바젤에 사는 인문주의자로 스위스 개혁가인 훌드리히 츠빙글리와 요하네스 오에콜람파디우스(Johannes Oecolampdius)의 추종자였다. 1531년 여름 그리나에우스는 잉글랜드를 방문하여 그가 국왕과 대륙의 개혁가들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제의하였다. 그는 크랜머와 친분을 쌓기 시작하였으며, 바젤로 귀국한 후에 스트라스부르그의 마틴 부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크랜머를 소개하였다. 그리아에우스의 초기 접촉들은 궁극적으로 크랜머를 스트라스부르그와 스위스 개혁가들과 친분을 갖도록 만들었다. </p> <p>1532년1월, 크랜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찰스[카를] 5세의 궁정에 주재하는 잉글랜드 대사직에 임명되었다. 황제가 제국를 순회하였을 때, 크랜머도 그를 따라 라티손(Ratison, 레젠베르크)에 체류하였으며, 루터파 도시인 뉘른베르크를 지날 때에는 종교개혁의 영향들을 처음으로 목격하였다. 그해 여름 제국의회(Imperial Diet)가 뉘른베르크로 이전하였을 때, 크랜머는 이 도시의 교회개혁의 지도자인 안드레아스 오시안더(Anderas Osiander)를 만났다. 이들은 서로 친분을 쌓았으며, 7월 동안에 크랜머는 놀랍게도 오시안더의 부인의 조카인 마가레트와 결혼하였다. 성직자로서의 독신서약을 무시하고 결혼을 하였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행동이었다. 당시에 엄격한 독신생활을 지키지 못하는 일부 성직자들은 배우자를 정부로 맞이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학자들은 이때에 크랜머가 온건한 정도라 하더라도 특정한 루터파 교리들을 수용하였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사적인 생활에서의 이러한 진전[변화 혁신]은 정치적인 생활과 일치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숙모인 케서린의 혼인무효를 지지하도록 황제인 찰스-케서린의 조카-를 설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p> <p>3. 켄터베리 대주교에 임명되다 (1532-34) </p> <p>크랜머가 황제를 따라 이탈리아로 이동하는 동안에, 그는 자신이 사망한 윌리엄 워햄 켄터베리 대주교를 계승할 후임자로 지명되었을 알리는 1532년 10월1일자 국왕의 편지[칙허]를 받았다. 또한 잉글랜드로 귀국하도록 명령받았다. 대주교에 대한 임명은 헨리의 구애를 받고있는 앤 불린의 가문에서 확보하였다. 크랜머의 승진이 런던에 알려졌을 때, 사람들은 크랜머가 교회에서 중요하지 않은 직책을 보유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놀라워했다. 크랜머는 11월19일 만투아를 떠나 1월초에야 런던에 도착하였다. 헨리는 크랜머의 대주교직에 필요한 교황의 교서를 확보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직접 지불하였다. 교서는 쉽게 확보되었다. 왜냐하면 잉글랜드주재 교황대사는 최종적인 결별을 피하기 위하여 잉글랜드의 요구를 수용하라는 로마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교황의 교서는 1533년3월26일경에 도착하였으며, 크랜머는 3월30일 성 스티븐 채플(St Stephen’s Chapel)에서 대주교로 축성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교서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크랜머는 혼인무효 소송절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에 앤의 임신이 알려졌기 때문에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헨리와 앤은 1533년1월24 또는 25일에 몇사람만을 증인으로 삼아 비밀리에 결혼하였으며, 크랜머는 2주후에야 알게 되었다.</p> <p>이후의 몇개월 동안에, 대주교와 국왕은 국왕의 혼인문제를 국내의 최고 성직자에 의해서 재판하는 방식에 관한 법적인 절차를 확립하는데 전력하였다. 법적인 절차들에 관한 초안들은 국왕과 대주교 사이에 교환된 편지들에 보존되어 있다. 일단 절차에 대하여 합의를 본 이후부터 크랜머는 곧바로 5월10일에 대주교 법원을 개회하며 헨리와 케서린에게 출석을 요청하였다. 가디너는 국왕 대리인으로 출석하였으나, 케서린은 직접 출석하지도 대리인을 보내지도 않았다. 5월23일 크랜머는 헨리와 케서린의 혼인은 하느님의 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하였다. 심지어 그는 헨리가 즉각적으로 케서린과 별거하지 않는다면 파문을 당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이제 헨리는 자유로이 결혼할 수 있는 신분이 되었으며, 크랜머는 5월28일에 헨리와 앤의 결혼을 유효하다고 확인하였다. 6월1일 크랜머는 직접 앤의 대관식을 주재하고 도유의식을 수행하였으며, 여왕에게 홀과 권장을 전달하였다. 교황 클레멘트7세는 이러한 반항에 몹시 분노하였지만, 잉글랜드와의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을 피하라는 다른 국왕들의 압력 때문에 결정적인 행동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7월9일 교황은 헨리가 9월말까지 앤과의 관계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그와 그의 자문관들(크랜머 포함)을 파문한다고 발표하였다. 헨리는 앤을 그의 부인으로 유지하였으며, 9월7일 앤은 엘리자베스를 출산하였다. 크랜머는 출산 직후에 영아를 세례하였으며, 대부모들중 하나가 되었다. </p> <p>케임브리지 시절 이후로 크랜머의 신학적인 입장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평가하기란 어렵다. 그가 계속해서 인문주의를 지지하였다는 증거는 있다. 즉, 그는 전임 대주교가 부여한 에라스무스의 연금을 연장시켰다. 1533년6월 크랜머는 개혁가를 권징(처벌)하며 화형에 처하는 어려운 임무에 직면하였다. 존 프리트(John Frith)는 성찬에 관한 그의 입장 때문에 사형판결을 받았다. 크랜머는 직접 그를 설득하였지만 그의 입장을 바꾸지 못하였다. 크랜머는 프리트의 급진적인 입장들을 거부하였지만, 1534년에 이르러 그는 로마와 결별하였으며 그리고 새로운 신학을 정립하였음을 분명하게 표시하였다. 그는 자신의 교구에 있는 보수적인 인물들을 휴 라티머와 같은 새로운 사상을 추구하는 인물들로 교체하였다. 또한 그는 신앙적인 논쟁들에 개입하여 개혁가들을 지지함으로써, 로마와의 연결을 유지하려는 신앙적 보수파들을 실망시켰다. </p> <p>4. 수장대리의 휘하에서 (1535-38) </p> <p>크랜머는 자신의 대교구에서 주교들로부터 즉각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는 교회법에 따른 방문조사(visitation)를 실행하였을 때, 보수파 주교들은 그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1535년 크랜머는 일부 주교들-존 스토키슬리, 존 롱랜드와 스티븐 가디너 등등-과 대립하였다. 이들은 국왕수장권법에서 대주교의 역할을 규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크랜머의 권한관 직함[칭호]을 거부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국왕의 최고대신인 토머스 크롬웰은 수장대리직(vice-gerent)-왕국교회의 수장 대리인-을 신설하며 자신이 취임하였다. 따라서 크랜머는 국왕의 교회관할권에 행사하는 수장대리인 크롬웰에 압도되었다. 그러나 크랜머가 자신의 하급적인 지위에 불만을 표현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뛰어난 학자였지만, 같은 성직자인 반대파들을 압도할 수 있는 정치적인 능력을 갖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제들은 크롬웰에게 의존하였다. </p> <p>1536년1월29일 앤 여왕이 아들을 유산하였을 때, 국왕은 케서린과의 결혼생활 동안에 자신을 괴롭혔던 성서의 금지명령을 또다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유산후 얼마되지 않아 국왕은 제인 시모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4월24일에 이르로 그는 크롬웰에게 이혼을 준비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알지도 못하고 크랜머는 4월22일까지 사소한 문제들에 관하여 크롬웰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5월2일 앤은 런던탑에 수감되엇으며, 크랜머는 크롬웰의 긴급소환을 받았다. 바로 다음날 크랜머는 여왕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을 강조하며 여왕의 유죄에 대한 자신의 의구심들을 표현하는 장문의 편지를 국왕에게 보냈다. 편지가 전달된 이후에 크랜머는 앤과의 혼인을 종결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5월16일 그는 런던탑에서 앤을 면담하고, 그의 고해성사를 집례하였으며, 다음날 앤과의 혼인이 무효였다고 발표하였다. 이틀뒤 앤은 처형되었다. </p> <p>수장대리직은 국왕의 통제하에 개혁을 추진하였다.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에 균형이 형성되었으며, 이는 헨리 치하의 왕국교회의 교리들을 규정하는 첫번째 시도인 &lt;10개 신앙조항&gt;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첫 다섯개 조항들은 개혁가들의 영향을 수용하여 성사를 기존의 7가지에서 3가지-세례, 성찬 그리고 고해-로 축소하였다. 후반 다섯개 조항은 성상들, 성인들, 예식들과 의식들, 그리고 연옥의 역할들을 설명하였으며, 이는 전통주의자들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이 문서를 초안하였던 두가지 문서들을 보면, 서로 다른 신학자 팀이 작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의 경쟁이 서로 다른 교정문서-하나는 크랜머, 다른 하나는 더럼주교인 커트버트 터스톨 주도로-에서 표현되었다. 최종적인 문서는 양진영을 만족시키면서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7월11일까지 크랜머, 크롬웰, 그리고 성직자회의(Convocation)는 &lt;10개 신앙조항&gt;에 동의하였다. </p> <p>1536년 가을 잉글랜드의 북부지방에서는 일련의 폭동들이 발발하였다. 이를 전체적으로 &lt;은총의 순례&gt; 반란이라고 불렀으며, 헨리의 정책에 대한 가장 심각한 도전이었다. 크롬웰과 크랜머는 반란자들의 분노의 표적이었다. 크롬웰과 국왕은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하였으며, 크랜머는 조용히 지냈다. 헨리의 왕정이 안전하다고 확신하였을 때에, 정부는 &lt;10개 신앙조항&gt;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몇개월의 논쟁끝에 나온 결실은 &lt;그리스도인의 규범&gt;-비공식적으로는 처음부터 주교신앙서(Bishop’s Book)라고 알려졌다-이었다. 이 책은 1537년2월 수장대리직이 최초로 소집한 왕국교회 교회회의[켄터베리와 요크의 통합 성직자회의]에서 처음으로 제안되었다. 그러나 교회회의가 진전됨에 따라, 크랜머와 폭스가 의장직과 조정직을 맡았다. 폭스는 최종적인 편집을 거의 모두 맡았으며, 이 책은 9월말에 출판되었다. </p> <p>출판된 후에도 이 책의 지위는 여전히 모호하였다. 왜냐하면 국왕은 당시에 이 책을 완전히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초안에 대한 편지에서 헨리는 책을 독서하지 못하였지만 출판을 지지한다고 말하였다. 그의 관심은 온통 제인 시모어의 임신과, 곧이어 출생할 왕세자에 집중되었다. 제인은 11월2일에 왕세자를 출산하고 며칠후에 사망하였다. 그녀의 장례식은 11월12일에 거행되었다. 바로 이달에 헨리는 주교신앙서를 읽기 시작하였다. 그는 수정안을 크랜머, 샘슨 그리고 다른 주교들에게 보냈다. 국왕에 대한 크랜머의 응답은 다른 주교들 보다 훨씬 대결적으로, 국왕에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이 응답들은 이신칭의[신앙의인화] 또는 믿음으로만(sola fide)과 예정론과 같은 종교개혁 신학을 지지하는 분명한 진술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응답은 국왕을 설득시키지 못하였다. 새로운 신앙진술문은 1543년에서야 국왕신앙서(King’s Book)로 출판되었다. </p> <p>1538년 국왕과 크롬웰은 루터파 제후들과 정치적 신앙적 동맹을 결성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할 준비를 하였다. 헨리는 1537년 여름부터 쉬마칼트동맹으로부터 새로운 외교사절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루터파들은 이러한 제안을 환영하며, 독일의 각 시에서 파견된 공동대표단-마틴 루터의 동지인 프리드리히 미코니우스(Friedrich Myconius) 포함-을 잉글랜드에 파견하였다. 대표단은 1538년5월27일에 잉글랜드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국왕과 크롬웰, 크랜머와의 첫 모임 이후에, 람베스궁으로 옮겨 크랜머의 주재하에 신학적인 차이점들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차이점들에 합의는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먼저 대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크롬웰이 너무 바빠 빠졌기 때문이며, 두번째로 잉글랜드 대표단이 보수파와 개혁파로 동등하게 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대화는 여름 내내 지리하게 지연되었으며, 독일대표단은 크랜머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협상은 국왕의 지명자에 의해서 치명적으로 무력화되었다. 크랜머의 동료이자 추밀원 위원이며 국왕의 측근이었던 에드워드 폭스가 사망한 자리에 국왕은 크랜머의 보수파 경쟁자인 커트버트 턴스톨을 지명하였기 때문이었다. 8월5일 독일대표단은 국왕에 특별히 세가지 문제-성직자의 의무적인 독신생활, 성찬례에서 포도주의 배찬금지, 별세자를 위한 사적인 미사-를 제기하였다. 턴스톨은 이 문제에 개입하여 국왕의 결정에 영향을 끼쳤다. 결과는 독일대표단의 최대 관심사들에 대한 철저한 거부였다. 크랜머는 독일대표단들에게 위기에 처한 “잉글랜드에 있는 수천의 영혼들을 고려하여” 협상을 계속하도록 간청하였지만, 그들은 구체적인 성과를 전혀 확보하지 못하고 10월1일 출국하였다. </p> <p>5. 개혁의 후퇴 (1539-42) </p> <p>대륙의 개혁가인 멜란히톤은 헨리왕이 자신을 만나기를 고대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1539년초 멜란히톤은 헨리에게 몇차례 편지를 보내며, 그의 신앙관-특히 성직자의 독신생활-을 비판하였다. 4월말 또하나의 독일대표단이 멜란히톤의 권고를 받아 잉글랜드를 방문하였다. 크롬웰은 국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새로운 루터파 대표단의 임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국왕은 입장을 바꾸기 시작하였으며, 루터파와의 협상 보다는 잉글랜드내의 보수적인 의견들을 결집하는데 집중하였다. 1539년4월28일 3년만에 의회가 개회되었다. 크랜머는 출석하였지만, 크롬웰은 병환으로 참석할 수 없었다. 5월5일 귀족원은 교리를 심의하고 결정한 위원회를 관례대로 보수파와 개혁파의 균형으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전면적인 개정에 필요한 구체적인 활동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였다. 5월16일 노퍽 공작은 위원회가 아무런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며, 귀족원이 직접 6가지의 교리적 논점들을 심의하자고 제의하였다. 이 논점들이 곧 6개 신앙조항법의 기본이 되었다. 그들은 실재적 현존(real presence), 성직자의 독신생활, 고해성사의 필수성, 사제에 대한 사적인 죄의 고백과 같은 교리들에 대한 보수적인 해석을 확언하였다. 6개 신앙조항법이 의회에서 통과될 무렵에 크랜머는 아내와 자녀들을 해외로 피신시켰다. 이 때까지 가족들은 아마도 켄트 지방에 있는 포드궁에 은밀하게 거주하고 있었다. 이 법은 6월말에 의회에서 제정되었으며, 이를 완강하게 반대하였던 라티머와 니콜라스 샥스톤은 각각 교구장직을 사임하였다. </p> <p>개혁가들의 패배는 단기적이었다. 9월에 이르러[1539] 헨리는 이 법률의 결과들과 그 제정자들에게 불만을 나타내었다. 항상 충실하였던 크랜머와 크롬웰이 다시 총애를 받기 시작하였다. 국왕은 대주교에게 공인성서(Great Bible)의 새로운 서문을 집필하도록 요청하였다. 이 성서는 1539년 4월에 크롬웰의 지휘로 처음으로 출판된 영문 번역성서였다. 서문은 독자들에게 말하는 설교의 형식이었다. 한편 크롬웰은 클리브공국 제후의 동생인 앤과 헨리와의 혼인계획을 국왕으로 승인받았기 때문에 매우 기뻐하였다. 크롬웰은 이 결혼으로 쉬마칼트 동맹과의 관계가 복원될 수 있다고 믿었다. 헨리는 1540년1월 앤을 처음 만났을 때 몹시 실망하였지만, 크랜머가 집례한 혼인예식으로 마지못해 결혼하였다. 그러나 헨리는 곧 이혼을 요청함으로써 혼인은 커다란 재난이 되었다. 이 때문에 헨리는 난처한 입장에 놓이고, 크롬웰은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그의 옛 정적들은 약화된 크롬웰의 입장을 이용하여 6월10일 그를 체포하였다. 크롬웰은 곧 그의 모든 친구들-크랜머 포함-의 지지를 상실하였다. 그러나 크랜머는 앤 불린을 위하여 국왕에게 편지를 썻던 것처럼, 이제 크롬웰의 과거 공적들을 옹호하는 편지를 국왕에게 보냈다. 7월9일에 소집된 수장대리직 주재의 교회회의-이제 크랜머와 가디너가 주재-는 앤과 헨리와의 혼인을 무효로 선언하였다. </p> <p>혼인무효 이후 7월28일에 크롬웰은 처형되었다. 이제 크랜머는 누구와도 짐을 나누어 질 수 없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헨리 치하의 나머지 기간 동안에 크랜머는 전적으로 국왕의 권위에 의존하였다. 1541년6월말 헨리는 새로운 부인 케서린 하워드와 함께 처음으로 북부지방을 순행하였다. 크랜머는 추밀원 위원으로서 런던에 남아 동료들인 대법관 토머스 오들리와 허트퍼드 백작인 에드워드 시모어와 함께 국정업무를 맡고 있었다. 크랜머는 이처럼 왕국교회 이외의 중책을 맡은 것은 처음이었다. 10월에 국왕과 여왕이 여전히 순행중일 때, 존 라셀이라는 한 개혁가가 크랜머에게 케서린의 혼외정사를 폭로하였다. 크랜머는 이 사실을 오들리와 시모어에게 알리며 헨리의 귀환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국왕의 분노를 두려워한 오들리와 시모어는 크랜머에게 이 사실을 국왕에게 알리도록 권유하였다. 크랜머는 모든 성인의 날을 기념하는 미사 때에 이 사실을 국왕에게 알렸다. 이에따른 조사에서 혼외정사의 진실이 드러났으며, 케서린은 1542년2월에 처형되었다. </p> <p>6. 국왕의 지지를 받으며 (1543-47)</p> <p>1543년 켄트 지방의 몇몇 보수파 성직자들은 개혁성향인 두 성직자 리터드 터너와 존 블랜드를 추밀원에 고발하며 비난하였다. 이들은 추밀원에 제출할 고발장을 준비하였지만, 마지막 순간에 스티븐 가디너의 조카인 저메인 가디너에 의해서 추가사항들을 보충하였다. 이 새로운 고발장은 크랜머를 공격하며 1541년부터 대주교의 범죄들을 적시하였다. 이 문서와 이후의 행동들은 소위 &lt;대성당 사제들의 음모&gt;(Prebendaries’ Plot)의 토대가 되었다. 고발장은 런던에 있는 추밀원에 전달되었으며, 아마도 1543년4월22일에 독회되었다. 확실히 국왕은 그날밤에 크랜머에 대한 고발장을 보았다. 그러나 대주교는 자신에 대한 고발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람베스궁에 있던 그의 조사관들은 터너의 사건을 자세히 조사한 후에 무죄로 방면하였다. 이는 보수파들을 격분시켰다. </p> <p>크랜머에 대한 음모가 진행되는 동안에. 개혁가들은 또다른 전선에서 공격을 받았다. 4월20일 성직자회의는 주교신앙서의 개정을 논의하기 위하여 다시 소집되었다. 크랜머는 소위원회들을 주재하였지만, 보수파들은 이신칭의[신앙의인화]를 포함한 개혁사상들을 삭제할 수 있었다. 5월5일 새로운 개정서인 &lt;그리스도인의 필수적인 교리와 신앙&gt;(A Necessary Doctrine and Erudition for any Christian Man)이 출판되었다. 교리적으로 이 책은 주교신앙서 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다. 5월10일 개혁가들은 또다른 타격을 받았다. 의회는 참신앙증진법을 제정하며, “불순한 서적들”을 파기시키고 영문번역 성서의 독서를 귀족 신분인 자들로 제한하였다. 5월부터 8월까지 개혁가들은 조사를 받고 전향하거나 구금되었다. </p> <p>5개월동안 헨리는 대주교에 대한 고발에 대하여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마침내 국왕은 직접 이 사실을 대주교에게 알렸다. 크랜머의 비서인 랄프 모리스에 의하면, 1543년9월 어느날 국왕은 크랜머에게 자신의 고발장을 요약한 문서를 보여주었다. 이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최고 조사관으로 크랜머를 임명하였다. 기습적인 수색으로 증거들을 수집하고 주모자들을 밝혀냈다. 전형적으로 크랜머는 음모에 가담한 성직자들을 즉각적으로 굴복시켰지만, 결국에는 용서하고 그들의 본직을 수행하도록 허용하였다. 헨리는 크랜머에 대한 신뢰의 표시로 자신의 반지를 주었다. 11월말 추밀원이 크랜머를 체포하려고 하였을 때에, 귀족들은 그에 대한 국왕의 신뢰를 알아차리고 기겁하였다. 크랜머의 승리는 저메인 가디너의 처형과 두명의 보조자들을 구속시키는 것으로 끝났다. </p> <p>크랜머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환경속에서 교회를 개혁하는 작업, 특히 전례의 개혁을 조용히 추진하였다. 1544년5월27일 최초의 공식적인 지방어 예식 즉, &lt;권고문과 연도&gt;로 알려진 중재기도의 순행예식을 출판하였다. 이 예식은 약간 수정되었지만 오늘날에도 공동기도서에 남아있다. 전통적인 연도는 성인에 대한 기원을 사용하였지만, 크랜머는 본문에서 이러한 기원을 삭제함으로써 이러한 특색을 철저하게 개혁하였다. 이제 더 많은 개혁가들이 평민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따라서 6개 신앙조항법과 참신앙 증진법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새로운 법률들을 도입하였다. </p> <p>1546년 가디너, 노퍽공작, 대법관인 릿슬리(Thoma Wriothesley) 그리고 런던주교인 에드먼드 보너를 포함한 보수파 진영은 개혁파들에 대한 최종적인 도전을 시도하였다. 크랜머와 연계된 몇몇 개혁가들을 목표하였다. 라셀과 같은 몇몇 개혁가들이 화형으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강력한 개혁성향의 귀족들인 에드워드 시모어와 존 더들리가 여름에 해외로부터 귀국하였으며, 이들은 보수파의 득세를 저지시킬 수 있었다. 가을에 발생한 두가지 사건은 이러한 균형을 파괴하였다. 가디너는 주교관할 사유지들[별장]을 국왕과 교환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실각하였으며, 노퍽공작의 아들은 반역죄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공작에 크랜머가 개입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또한 이제 국왕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됨에 따라 더이상의 음모는 없었다. 1547년1월28일 크랜머는 국왕에 대한 마지막 의무를 실행하였다. 그는 마지막 예식들[종도성사]을 실행하는 대신에 헨리의 손을 꼭 붙잡고 개혁된 신앙선언문을 낭독하였다. 크랜머는 헨리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였으며,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는 의미에서 수염을 길렀다는 얘기도 있었다. 수염은 또한 과거와의 단절을 나타내는 표징이었다. 대륙의 개혁가들은 옛 교회를 거부하는 의미로 수염을 길렀으며, 이제 이러한 의미의 수염은 잉글랜드에서도 널리 이해되었다. 1월31일 그는 국왕의 마지막 유언을 집행하는 인물중 하나로 시모어를 호국경(Lord Protector)으로 지명하고 소년왕인 에드워드6세를 맞이하였다.</p> <p>7. 외국의 개혁가들과 종교개혁 교리들 (1547-49)</p> <p>시모어의 섭정 동안에 개혁가들은 이제 권력을 장악한 정권의 일부가 되었다. 각 관구들[대교구들]에 대한 국왕의 방문조사는 1547년8월에 시행되었으며, 방문조사를 받는 각 전도구교회들은 &lt;공식설교집&gt;(Homilies)을 확보하도록 지시받았다. 이 책은 12편의 설교문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중에서 4편은 크랜머가 집필하였다. 신앙의 의인화[이신칭의]에 대한 크랜머의 주장에 대하여 가디너는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또한 “신앙의 결과로 나타나는 선행에 관한 설교”에서 크랜머는 수도원제도, 그리고 전례중의 암송들과 의식들에 수반되었던 여러가지 개인적인 행동들을 중요시하였던 관행들을 공격하였다. 따라서 그는 필수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선행의 범위를 크게 축소시키며 신앙의 최우선성을 강화시켰다. 방문조사를 받은 각 전도구교회들은 “의심스러운 신심을 조장하는 성상들을 모두 제거하라”는 국왕명령문(Injunctions)을 게시하였다. </p> <p>한편 크랜머의 성찬이해들-이미 공식적인 가톨릭교리에서 이탈하였다-은 대륙의 개혁가들로부터 또 한차례의 영향을 받았다. 크랜머는 쉬마칼트동맹과의 첫 접촉이후로 마틴 부처와 지속적으로 접촉하였다. 그러나 황제 찰스5세가 뮐베르크에서 승리함에 따라, 이제 잉글랜드만이 유일한 프로테스탄트 왕국으로 남아 핍박받는 대륙의 개혁가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함으로써, 크랜머와 부처와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다. 크랜머는 부처에게 성찬신학에 관한 질문들을 포함한 편지(지금은 유실되었다)를 보냈다. 1547년11월28일자 답신에서 부처는 실재적 현존을 거부하며, 화체론과 성찬숭배를 정죄하였다. 이 편지는 잉글랜드로 망명온 두명의 이탈리아인 신학자 피터 마터와 베르나디노 오키노에 의해서 크랜머에게 전달되었다. 마터는 또한 존 크리소스톰의 서신으로 추정되었던 &lt;Ad Caesarium Monachum&gt;을 갖고 왔었다. 이 서신은 실재적 현존을 반대하는 초기교회의 주장을 제공하였다. 이 문서들은 성찬에 관한 크랜머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p> <p>1549년3월 스트라스보르그 시당국은 마틴 부처와 파울 파기우스에게 시를 떠나도록 요청하였다. 크랜머는 즉시 이들에게 잉글랜드로 오도록 초청하며, 잉글랜드 대학교들의 교수직을 약속하였다. 이들은 4월25일에 잉글랜드에 도착하였으며, 크랜머는 특히 18년간의 서신교환후에 처음으로 부처를 직접 만나 매우 기뻤다. 그는 이들 신학자들이 전례와 교리의 개혁을 지원하며, 새로운 세대들을 훈련시키기를 기대하였다. 이 밖에도 크랜머의 초청을 받은 개혁가들에는 폴란드 개혁가인 라스키 등이 있었지만, 크랜머는 오시안더와 멜랑히톤을 설득하는데 실패하였다. </p> <p>8. 공동기도서 (1548-9) </p> <p>예배에서 영어의 사용이 확산됨에 따라, 왕국교회를 위한 완전한 통일적인 전례서의 필요성이 분명해졌다. 전례서를 만든 첫번째 모임은 1548년9월에 과거의 쳇시수도원과 윈저성에서 개최되었다. 참가자의 명단은 부분적으로만 알려졌지만, 그 구성원은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였다. 이 회의들 이후 12월14일과 19일 사이에 개최된 귀족원에서 성찬에 관한 토론이 있었다. 크랜머는 이 토론에서 자신이 실재적 현존의 교리를 이미 폐기하였으며, 그리고 성찬의 현존은 오직 신앙적[영적]일 뿐이라는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의회는 성탄절 직후에 전례통일법(1549)을 제정함으로써 기도서의 출판을 지지하였다. 이와함께 성직자의 결혼도 법적으로 허용하였다. </p> <p>크랜머가 기도서의 제작에서 어느정도로 직접 편집하였는가를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오늘날까지 많은 전례학자들은 그가 사용하였던 원자료들-솔즈베리전례, 헤르만 폰 비트, 그리고 오시안더와 유스투스 요나스를 포함한 여러 편의 루터파 자료들-을 밝혀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이 책을 편찬한 방식과 함께 작업한 동료들을 밝혀내는 일이다. 그러나 그를 도와주었던 인물들을 알 수 없다 하더라도, 크랜머가 이 책의 편집과 전체적인 구조를 결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p> <p>새로운 기도서는 1549년6월9일부터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규정되었다. 이는 곧바로 데븐과 콘웰 지방의 반란-기도서반란-을 촉발시켰다. 7월초에 이르러 폭동은 잉글랜드의 동부지방으로 확산되었다. 부처는 이제막 케임브리지에서 강좌직을 맡자마자 폭동으로 급히 피신하였다. 반란군들은 6개 신앙조항, 라틴어 미사와 빵만의 배찬, 그리고 연옥에 체류하는 영혼들을 위한 기도의 복원을 주장하였으며, 또한 수도원의 재건을 요구하였다. 크랜머는 국왕에게 보낸 편지에서이들의 요구를 강력히 반대하며 반란군들의 사악함을 비난하였다. 7월21일 크랜머는 성바울로 대성당에서 진압군을 징집하면서 공식적인 왕국교회을 수호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 설교의 초고-유일하게 잔존하는 그의 설교문이다-는 그가 반란군을 다루는 문제를 피터 마터와 논의하였음을 보여주었다.</p> <p>9. 개혁의 확대 (1549-51) </p> <p>기도서반란과 다른 사건들은 시모어 섭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추밀원은 양분되었으며, 반대파들은 존 더들리를 중심으로 시모어를 축출하려고 결집하였다. 크랜머와 다른 두 위원들-윌리엄 페지트와 토머스 스미스-은 처음에는 시모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양진영은 급박하게 서신을 여러차례 교환한 후, 무혈 쿠데타는 1549년10월13일 시모머의 호국경 직을 종결지었다. 신앙적으로 보수파 정치인들이 더들리의 쿠데타를 지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혁가들은 여전히 새로운 정부를 장악하였으며, 잉글랜드 종교개혁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서모어는 런던탑에 구금되었지만, 1550년2월6일에 석방되어 추밀원에 복귀하였다. 크랜머는 자신의 옛 전속사제였던 니콜라스 리들리 주교를 로체스터에서 런던교구로 승진시켰으며, 존 포네트를 로체스터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제 보수적인 성직자들은 퇴출되고 개혁가들로 대체되었다. </p> <p>크랜머와 부처가 서로 협력하고 협의한 첫번째 결실은 &lt;성직서품예식서&gt;(Ordinal)-사제를 서품하는 예식-이었다. 이 예식은 첫번째 기도서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1550년야 출판되었다. 크랜머는 부처의 초안을 채택하여 부제, 사제 그리고 주교를 위임하는 세가지 예식을 창작하였다. 같은 해에 크랜머는 기도서에 포함된 성찬신학을 반공식적으로 설명한 &lt;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에 관한 진실하고 보편적인 교리에 대한 변론&gt;(Defence of the True and Catholic Doctrine of the Sacrament of the Body and Blood of Christ)을 출판하였다. 이것은 속표지에 최초로 크랜머의 이름을[크랜머의 이름으로 집필된 최초의 완성본이었다] 담은 완전한 책이었다. 이 책의 서문에서 크랜머는 로마와 자신과의 싸움을 요약하면서, 잘 알려진 문구로 “묵주기도, 면죄부, 순례 그리고 교황식(popish) 신앙활동들”을 잡초에 비유하면서, 이 잡초들의 뿌리는 화체론, 실재적 현존 그리고 미사의 희생적 성격이라고 주장하였다. </p> <p>한편 부처는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진전을 지원하면서도, 그는 진행속도를 염려하였다. 부처와 파기우스는 1549년 기도서가 특별히 진전된 내용이 아니라고 인식하였지만, 크랜머는 이 첫번째 형태를 잠정적이며 오직 첫번째 단계라고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1550년 겨울[1-2월]에 이르러 부처는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크랜머는 그를 소외시키지 않고 지속적으로 접촉하였다. 이러한 관심은 전례복논쟁 동안에 보상받았다. 이 사건은 최근에 취리히에서 돌아온 존 후퍼-하인리히 불링거의 추종자-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크랜머의 기도서와 성직서품 예식서에 불만이었다. 특히 의식들과 전례복들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1550년5월15일 추밀원은 그를 글로스터교구의 주교로 선택하였을 때, 그는 예식서에 규정된 전례복들을 착용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는 대륙의 개혁가인 얀 라스키 등의 지지를 획득하였다. 라스키는 대륙의 프로테스탄트 피난민들을 위하여 특별히 지정된 예배장소인 런던의 외국인교회(stranger church)의 지도자였다. 그의 교회의 치리형태와 전례는 크랜머의 그것들 보다는 훨씬 더 개혁적이었다. 그러나 부처와 베리미글리(피터 마터)는 후퍼의 반대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속도조절(timing)과 권위를 주장하는 크랜머의 논점을 지지하였다. 크랜머와 리들리는 자신의 확고한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결국 후퍼는 구금당한 후에야 굴복하였다. 1551년3월8일 그는 공식적인 &lt;성직서품 예식서&gt;에 따라 주교직에 축성되었으며, 국왕 앞에서 주교의 전례복들에 대하여 설교하였다. 정부의 권위로 조심스런 단계들을 통해서 개혁을 추진한다는 크랜머의 입장은 유지되었다. </p> <p>10. 최종적인 개혁 프로그램 (1551-53) </p> <p>1551년10월16일 시모어가 반역죄로 체포된 이후, 정치권에서 크랜머의 역할은 점차 약화되었다. 12월에 시모어는 재판을 받았을 때에, 반역죄는 취소되었지만 중범죄에 대한 유죄를 판결받았으며, 성급하게 1552년1월22일에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크랜머와 더들리의 불화를 알리는 시작이었다. 이 해에 섭정은 교회의 재산을 점진적으로 침탈하였기 때문에 두사람 사이의 불화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나 이시기의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도 크랜머는 동시에 세가지 개혁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즉, 교회법의 개정, 기도서의 개정, 그리고 교리선언문의 작성.</p> <p>왕국교회의 치리를 규정하였던 본래의 로마 교회법은 로마와의 단교이후 개정이 분명하게 필요하였다. 헨리 치하에서 몇차례 개정을 시도하였지만, 이러한 계획들은 급격한 교회개혁으로 지연되었다. 종교개혁이 안정을 찾음에 따라, 크랜머는 이 작업을 추진할 위원회를 1551년12월에 구성하였다. 그는 피터 마터를 위원회에 포함시켰으며, 또한 라스키와 후퍼에게도 참여를 요청하였다. 크랜머와 마터는 잉글랜드교회의 개혁된 교회법의 성공적인 실행이 국제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크랜머는 트렌트 교회회의-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응-를 대항하기 위하여 잉글랜드의 주도하에 유럽의 모든 종교개혁 교회들을 결집시키려고 계획하였다. 1552년3월 크랜머는 대륙의 최고 개혁가들인 불링거, 존 칼빈, 그리고 멜랑히톤을 잉글랜드로 초청하며, 전세계적인 교회회의를 개최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한 응답들은 실망적이었다. 멜랑히톤은 응답하지 않았으며, 불링거는 멜랑히톤과 자신이 황제와 루터파 제후들 사이의 전쟁으로 독일을 떠날 수 없다고 응답하였다. 한편 칼빈은 이에 대하여 열성을 보이면서도 초청에 응하지 어렵다고 대답하였다. 크랜머는 칼빈의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 “우리는 잉글랜드교회를 최대한으로 개혁할 것이며, 성서의 모델을 따라 그 교리와 법률들을 개정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고 말하였다. 교회법 개정작업에 대한 일부 사본에는 크랜머와 마터의 교정과 논평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종적인 개정안이 의회에 제출되었을 때, 크랜머와 더들리의 불화는 돌이킬 수 없었으며, 더들리는 귀족원에서 교회법안을 사실상 폐기시켰다. </p> <p>첫 기도서와 마찬가지로, 개정된 기도서의 작업과정과 참여자들에 대해서도 모호하다. 그러나 크랜머가 개정과정을 주관하고 지도한 것은 분명하였다. 개정작업은 켄터베리 대교구 성직자회의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던 1549년말에 시작되었다. 1550년말에는 마터와 부처에게 기도서의 개정방향에 대하여 문의하였으며, 그들의 응답은 개정기도서에 상당히 반영되었다. 영적인 현존이라는 입장을 보다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배수자에게 성찬을 배찬하는 문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꾸었다. 새로운 지시문은 일상용 빵을 성찬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사용하고 남은 빵과 포도주를 사목자가 사용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성찬과 물질적인 현존과의 관계를 분리시켰다. 또한 새로운 기도서는 연옥론의 교리를 지지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별세자를 위한 기도들을 모두 삭제하였다. 이 기도서의 사용을 승인하는 1552년 전례통일법은 11월1일부터 이 기도서만을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거의 최종적인 순간에 더들리의 개입으로 확정판이 공식적으로 인쇄되지 못하였다. 그는 북부지방을 순행하는 도중에 뉴카슬에서 활동하는 존 녹스의 설교에 감명을 받아, 그를 국왕 전속사제로 선발하여 개혁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녹스는 국왕 앞에서의 설교에서 영성체 동안에 무릎꿇는 자세를 공격하였다. 1552년9월27일 추밀원은 새로운 기도서의 인쇄를 중단시키고, 크랜머에게 이를 개정하도록 요구하였다. 크랜머는 장문의 편지에서 전례서의 개정은 의회와 국왕의 승인으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0월22일 추밀원은 전례서를 그대로 유지하고, 대신에 무릎꿇는 자세가 어떠한 숭배를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소위 “검정색 지시문”(Black Rubric)을 추가하기로 결정하였다.</p> <p>마찬가지로 42개 신앙조항의 작업에 대해서도 모호하다. 1549년12월에 이미 대주교는 그의 주교들에게 특정한 교리적인 조항들에 서명하도록 요구하였다. 1551년에 크랜머는 주교들에게 한 신앙조항을 제시하였지만, 이 문서의 지위에 대해서는 모호하다. 크랜머는 교회법 개정작업에 진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조항을 작성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의 교회회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후에야 신앙조항에 관심을 가졌다. 1552년 9월에 이르러 크랜머와 존 체크(John Cheke)는 신앙조항의 초안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체크는 학자적인 동료로서 신앙조항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임무를 맡았다. 마침내 42개 신앙조항이 1553년5월에 출판되었을 때, 이 책의 표지는 신앙조항이 성직자회의의 합의와 국왕의 승인을 받았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사실상 그렇지 않았다. 이러한 실책은 대주교와 추밀원 사이의 잘못된 소통의 결과였을 것이다. 크랜머는 이를 추밀원에 불평하였지만, 당국의 응답은 신앙조항이 성직자회의의 시기 동안에 제작되었다고 지적함으로써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하였다. 추밀원은 크랜머에게 신앙조항에 대하여 주교들의 서명을 받으라는 불운한 과제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많은 주교들은 이를 반대하며 이 책의 표지의 비정상적인 성격을 지적하였다. 크랜머가 이러한 책무를 수행하는 동안에 이를 무효화시킬 수 있는 커다란 사건이 전개되고 있었다. </p> <p>11. 재판들, 전향서들 그리고 순교 (1553-56)</p> <p>에드워드6세는 폐결핵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추밀원 위원들은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들었다. 1553년5월 추밀원은 대륙의 개혁가들에게 에드워드의 건강이 나아지고 있다고 안심시키는 편지들을 보냈다. 그중 하나가 멜랑히톤에게 보내는 것으로 1551년 2월 부처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흠정교수직에 초대하는 편지였다. 이전에도 헨리와 크랜머는 멜랑히톤의 방문을 설득시키는데 실패하였다. 이번 초청에서는 추밀원이 그의 여행경비를 선불로 지불하는 열렬한 노력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멜랑히톤은 잉글랜드로 오지 않았다. 한편 추밀원은 메리-헨리와 케서린의 딸이자 로마 가톨릭신자-를 대신하여 제인 그레이 부인-에드워드의 사촌이자 프로테스탄트 신자-을 왕권계승자로 지명하기 위하여 몇몇 판사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1553년6월17일 국왕은 그의 유언장에서 제3차 계승법과는 다르게 제인을 계승자로 지명하였다. 크랜머는 에드워드와의 독대를 시도하였지만, 거부당하고 추밀원 위원들과 함께 국왕을 알련할 수 밖에 없었다. 에드워드는 그에게 자신의 유언장을 지지하라고 말하였다. 크랜머가 제인을 지지하기로 결정한 것은 6월19일 이전이었으며, 이 날에 새로운 왕위계승을 승인하기 위하여 성직자회의를 소비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받았다. </p> <p>7월 중순에 이르러 각 지방에서 메리의 왕위계승을 요구하는 심각한 반란들이 발생하였으며, 추밀원에서 제인에 대한 지지는 붕괴되었다. 곧이어 메리가 여왕으로 선포되었을 때, 더들리와 리들리, 체크 그리고 제인의 아버지인 서퍽공작은 구속되었다. 그러나 대주교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 8월8일 크랜머는 에드워드의 장례식을 기도서의 예식들을 따라 거행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피터 마터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에게 잉글랜드를 떠나도록 충고하였다. 개혁파 주교들은 직위를 상실하였고, 보수파 성직자들-보너 등등-은 이전의 직책으로 복원되었다. 크랜머는 논박없이 무너지지 않았다. 켄터베리 대성당에서 거행하는 미사를 그가 승인하였다는 소문이 나돌았을 때, 크랜머는 이러한 소문이 거짓이라고 선언하며, “우리의 전임 국왕인 에드워드6세 치하의 모든 교리들과 신앙은 잉글랜드에서 지난 수천년 동안 지켜온 것들 보다 훨씬 순수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었다”고 말하였다. 당연히 정부는 그랜머의 선언문을 선동죄에 해당한다고 간주하고, 9월14일 성실청에서 개최되는 추밀원에 출석할 것을 요구하였다. 바로 이날에 크랜머는 마터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크랜머는 곧바로 런던탑에 수감되었으며, 그곳에서 휴 라티머와 니콜라스 리들리와 재회하였다. </p> <p>1553년11월13일 크랜머와 다른 4사람은 재판에서 반역죄에 대한 유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1554년 2월내내 제인을 지지하였던 정치지도자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이제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을 처리할 시간이었다. 추밀원은 1554년3월8일 크랜머와 리들리, 라티머를 이단죄에 대한 두번째 재판을 위하여 옥스퍼드의 보카도 감옥으로 이전시키도록 명령하였다. 이시기 동안에 크랜머는 스트라스부르크로 피신한 마터에게 편지를 몰래 보낼 수 있었다. 이 편지가 그가 친필로 쓴 것들 중에서 잔존하는 마지막 문서였다. 그는 교회의 절망적인 상황이 곧 하느님의 구조를 받을 것이라는 증거라고 말하며, “우리가 끝까지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다’고 썼다. 크랜머는 1555년9월12일에 재판을 시작할 때까지 17개월 동안에 격리되어 있었다. 재판은 잉글랜드에서 개최되었지만, 이는 교황청 관할로 최종적인 판결은 로마로부터 전달되었다. 크랜머는 심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는 자신에게 부과된 모든 사실을 인정하였지만, 반역죄와 불복종 또는 이단죄를 부인하였다. 크랜머의 재판 직후에 시작된 라티머와 리들리의 재판은 곧바로 판결을 내리고 10월16일에 화형시켰다. 크랜머는 탑으로 끌려나가 그들의 화형을 지켜보았다. 12월4일 로마는 크랜머의 대주교직을 박탈하고 그들의 선고를 집행하도록 세속권위체에 인계하도록 결정하였다. </p> <p>마지막 날이 다가오면서 크랜머의 환경은 변화되었으며, 이 때문에 그는 몇 편의 전향서들(recantations)을 작성하였다. 12월11일 크랜머는 보카도 감옥에서 풀려나 Christ Church[칼리지]의 학장 집에 연금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환경은 지난 2년간의 감옥생활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제 그는 학문사회에서 손님 대우를 받았다. 한 도미니크 수도사인 우안 드 빌라란시아(Juan de Villagrancia)가 찾아와 교황의 수장권과 연옥론에 대하여 크랜머와 토론하였다. 1월말과 2월초에 씌여진 첫 4개의 전향서에서 크랜머는 왕과 여왕의 권위에 복종하고 교황을 교회의 머리라고 인정하였다. 1556년2월14일 그는 성직에서 강등된 후에 보카도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사실상 그가 인정한 것은 매우 적었기 때문에, 에드먼드 보너 주교는 이러한 인정서들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2월24일 옥스퍼드 시장에게 크랜머를 3월7일에 처형하라는 명령서가 전달되었다. 이틀후 다섯번째 진술서-사실상 첫번째 전향서이다-에서 크랜머는 모든 루터파와 츠빙글리파 신학을 부인하고 교황수장권과 화체론을 포함한 모든 로마 가톨릭신학을 수용하였으며, 가톨릭 교회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진술하였다. 그는 가톨릭 신앙으로 복귀하여 기쁘다고 발표하며, 성사적인 사면을 받고 미사에 참석하였다. 크랜머의 화형식은 연기되었으며, 교회법의 관례에 때라 그는 사면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메리는 더 이상의 집행연기는 불가능하다고 결정하였다. 그의 마지막 전향서는 3월18일에 발표되었다. 이는 자포자기한 사람의 표징이었으며 무차별적인[전반적인] 죄의 고백이었다.</p> <p>크랜머는 3일간의 여유가 있었다. 그는 마지막 전향서를 대학교회(University Church)의 예배에서 공개적으로 발표하라고 명령받았다. 그는 연설문을 먼저 작성하여 제출하였으며, 사망후에 출판되었다. 처형 당일의 예배에서 그는 설교대 앞에서 기도, 그리고 국왕에게 복종하라는 권고를 한 후에 자신의 설교를 제출한 문서와는 전혀 다르게 발표하였다. 그는 성직 강등의식 이후에 자신이 작성하였거나 서명한 모든 전향서들을 부인하며, 자신의 손이 커다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화형으로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교황에 대하여 말한다면, 본인은 그의 모든 거짓된 교리들과 함께 그를 그리스도의 적이자 적그리스도로 거부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곧 설교대에서 끌려나와 6개월전 라티머와 리들리가 화형당하였던 바로 그 자리에서, 불길이 자신의 주위를 감싸자 약속대로 자신의 오른 손을 불구덩에 먼저 집어넣었다. 그리고 죽어가는 목소리로 ‘주 예수여, 나의 영혼을 받아주소서... 나는 천국이 열리고 예수님이 하느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본다”고 말하였다. </p> spiritus on "성공회 저자 04 : 데니스 베넷 신부"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69#post-1009 토, 27 2월 2010 18:15:45 +0000 spiritus 1009@http://liturgy.skhcafe.org/ <p>이전 글 수정이나 html 태그는 어디까지 허용되는건가요??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