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ning: Creating default object from empty value in /home/skhcafe/liturgy/my-plugins/post-meta/post-meta.php on line 18

Warning: Creating default object from empty value in /home/skhcafe/liturgy/my-plugins/post-meta/post-meta.php on line 21

Warning: Creating default object from empty value in /home/skhcafe/liturgy/my-plugins/post-meta/post-meta.php on line 24

Warning: Creating default object from empty value in /home/skhcafe/liturgy/my-plugins/post-meta/post-meta.php on line 27

Warning: session_start(): Cannot send session cookie - headers already sent by (output started at /home/skhcafe/liturgy/my-plugins/post-meta/post-meta.php:18) in /home/skhcafe/liturgy/my-plugins/bb-topic-views.php on line 18

Warning: session_start(): Cannot send session cache limiter - headers already sent (output started at /home/skhcafe/liturgy/my-plugins/post-meta/post-meta.php:18) in /home/skhcafe/liturgy/my-plugins/bb-topic-views.php on line 18

Warning: Creating default object from empty value in /home/skhcafe/liturgy/bb-includes/functions.php on line 1513

Warning: Cannot modify header information - headers already sent by (output started at /home/skhcafe/liturgy/my-plugins/post-meta/post-meta.php:18) in /home/skhcafe/liturgy/my-templates/my_theme/rss2.php on line 1
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포럼: 번역 프로젝트 자료 - 최근 글 http://liturgy.skhcafe.org/ A Korean Anglican Theology & Liturgy Forum en Mon, 22 Jan 2018 16:10:26 +0000 Cranmerian on "<The Study of Anglicanism>의 번역을 마치며"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025#post-1917 수, 29 5월 2013 08:37:36 +0000 Cranmerian 1917@http://liturgy.skhcafe.org/ <p>글쎄요. 출간까지 간다면 좀 더 손봐야하고, 제게는 영광이지만.<br /> 외국에 사는 평신자인 저로서는 이곳에 올리고, 함께 읽고 토론하는 것으로도 영광입니다.<br /> 한국에 계신 분들이 필요해서 추진하신다면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겠습니다. </p> viamedia on "<The Study of Anglicanism>의 번역을 마치며"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025#post-1916 목, 16 5월 2013 03:25:34 +0000 viamedia 1916@http://liturgy.skhcafe.org/ <p>정말로 애 많이 쓰셨고요. 다음 단계는 고쳐서 출간하는 일이겠지요? 한번 해보지요. :-)<br /> 평화를 빕니다. </p> prayandwork on "<The Study of Anglicanism>의 번역을 마치며"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025#post-1915 토, 20 4월 2013 16:46:12 +0000 prayandwork 1915@http://liturgy.skhcafe.org/ <p>정말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p> id360 on "<The Study of Anglicanism>의 번역을 마치며"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025#post-1914 화, 26 3월 2013 09:44:37 +0000 id360 1914@http://liturgy.skhcafe.org/ <p>깊이 감사드립니다!!! </p> id360 on "<The Study of Anglicanism>의 번역을 마치며"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025#post-1913 화, 26 3월 2013 09:39:31 +0000 id360 1913@http://liturgy.skhcafe.org/ <p>깊이 감사드립니다!!! </p> Cranmerian on "<The Study of Anglicanism>의 번역을 마치며"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025#post-1912 수, 20 3월 2013 04:14:31 +0000 Cranmerian 1912@http://liturgy.skhcafe.org/ <p>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데 수년이 걸렸고, 번역하기로 큰 맘을 먹고 초역에 한 일년이 넘게 걸렸고. 이곳 포럼에 올린다고 다시 정리하며 올리는데 거의 일년이 걸린 것같군요. 제게는 정말로 '대장정'이었습니다. 이 글들을 읽는 우리 회원 여러분들께 유익한 번역이 되기를 바랍니다. </p> Cranmerian on "번역 : The Study of Anglicanism-lex orandi, lex credendi"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024#post-1911 수, 20 3월 2013 04:04:49 +0000 Cranmerian 1911@http://liturgy.skhcafe.org/ <p>6. 기도의 법-신앙의 법<br /> (Lex Orandi-Lex Credendi)</p> <p>W. Taylor Stevenson</p> <p>성공회신앙(Anglicanism)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의 예배는 탄원과 찬양뿐 아니라 신학적인 실험(experimentation)이자 공식화(formulation분명한 입장의 발표, 개념화)의 중심적인 무대로 매우 독특한 역할을 한다(pp. 55-81참조). 예배와 믿음과의 이러한 연관성은 종종 라틴어 인용구인 렉스 오란디 렉스 끄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i)-‘기도의 법이 믿음의 법이다’-라는 용어로 논의되고 있다.</p> <p>이러한 독특한 상황(situation)은 성공회신앙에서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리고 그 강점들과 한계들은 무엇인가? 예배를 신학적인 실험과 공식화의 중심적인 활동무대로 만드는 과정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러한 독특한 상황을 재조정하여 강점들을 강화하고 한계들[약점]을 축소시키는 방법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교회론과 성사론 그리고 사목직(ministry)과 관련하여[비교하여] 어떻게 다른가? 이 글의 목적은 이러한 질문들을 차례로 탐구하는 것이다. </p> <p>1. 성공회의 신학과 자기이해에서 예배가 차지하는 독특한 역할</p> <p>하나의 특정한[독특한] 성공회적인 신학은 과거에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며, 또한 현재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다른 교파교회들처럼] 토머스[아퀴나스]나 루터, 칼빈이나 츠빙글리와 같은 신학자가 없다. 또한 성공회신앙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도권(magisterium)이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서 신학연구의 표준을 제공하였던 신학적 주제들에 맞먹는 권위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성공회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로는 분명하게 리처드 후커를 꼽을 수 있지만, 16세기말 그의 저서인 &lt;잉글랜드교회의 치리제도의 원칙에 관하여&gt;는 체계적인 방식에서[신학적인 체계로] 결정적[표준적]이거나 영향력있는 것이 되지는 못하였다. 만약에 성공회의 사상에 지속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주는 신학이 있다면, 그것은 4차례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을 거치며 최종적으로 칼케돈 공의회(451)에서 완결된 논쟁적이고, 모호하며[이중적이고], 주로 그리스도론 중심적인 초기교회의 신학(초기교부들의 신학pastristic theology)이다. 그러나 이 신학은 현대의 역사의식에 맞지 않는 그리스문화적인 사상형식들(Hellenistic thought-forms)로 설명되었기 때문에, 성공회 신학의 여러 원자료들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p> <p>16세기초부터 현재까지 성공회신앙에 결정적인 것은[표준이 되었던 것은] 공동기도서-이후의 개정판들 포함-였다. 기도서는 아침기도와 저녁기도의 매일기도예식[성무일과], 성찬례[감사성찬례]와 세례와 다른 성사들을 집행하는 형식들, [대]연도, 성직서품예식서, 성시집 그리고 기타예식들과 기도문들을 포함하였다. 기도서는 그 이후에 몇차례만 개정되었으며 성격상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처음 두권의 공동기도서(1549년과 1552년)가 성공회적인 신학과 실제[신앙활동practice]를 확립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첫번째 기도서는 [기존의 예식을] 프로테스탄트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개정되었다. 그러나 두번째는 이 시기 동안 잉글랜드교회에서 신학과 신앙활동의 급격한 변화를 반영하여 그러한 변화들을 보다 철저하게 [프로테스탄트 방향으로] 개정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학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활동[실제 예배]을 그리스도인들의 ‘프락시스(praxis)’ (실천, 실생활) 안에서 서로 의존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당대의 관심은 적어도 중요한 전례적인 실험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곧 성공회의 탄생부터 성공회신앙의 특징이 되었다. </p> <p>1549년 기도서의 집필과정은 토마스 크랜머(1489-1553)가 관장하였으며, 따라서 기도서에는 그의 신학적 성향이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그는 최초의 기도서에 포함되었던 여러 본문들을 수년에 걸쳐 수집하고, 편집하고, 직접 집필하였다. 결과적으로 만약 누군가를 결정적인[표준적인] 성공회 신학자로 꼽는다면, 그는 바로 토머스 크랜머이다. 그러나 신학자를 신학적인 주제들에 대한 체계적인 고찰들을 저술한 자로 규정한다면, 그는 신학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사제이자 목회자였으며, 켄터베리 대주교로서 행정가이자 정치가였다. 그외에도, 그는 사실상 오늘날의 명칭으로 전례학자(liturgiologist)였다. 그의 신학은 (1)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기도하는 기도문들의 선택, 배열, 그리고 집필을 통해서 표현되었으며, 또한 (2) 기도문들과 이를 동반하는 의식행동(의례ceremony)의 변화를 허용하는 범위를 규정한 지시문으로 표현되었다. 더구나 기도서의 ‘성서독서표’(Lectionary)는 교회력에 따라 매주간 교회의 예배에서 독서할 성서본문을 융통성있게 규정하였다. 이러한 방법들에 의해서 ‘예배의 법은 믿음의 법’ 즉, 렉스 오란디, 렉스 끄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i)가 되었다. 즉, 공동기도서에 따라서 매일 낭독하고 기도하는 본문들은 성공회 신자들의 그리스도교 이해와 체계적인 신학적 고찰[숙고]을 깊이있게 표현[제공]한다. 이러한 상황(situation)은 16세기의 종교개혁 동안에 성공회신앙에 널리 유행하였으며, 또한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다. </p> <p>1549년 기도서의 집필[제작]과정의 두가지 측면은 이 글의 주제에 핵심적이기 때문에 특별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p> <p>첫째로, 크랜머의 기도서는 신학적인 공식화[작업]과 신학적인 실험을 위한 활동무대였다. 1549년 기도서를 집필[제작]할 때에 크랜머는 라틴교회, 그리스 정교회, 루터[파]교회 등의 원자료들에 의존하였다. 1549년 직전 10년 동안 그는 앞으로 사용될 기도서의 주요한 부분들을 준비하였으며, 일부는 잉글랜드의 전도구교회들에서 실험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실험적인 전례들에 대한 신학적 대중적 반응은 1549년 기도서의 제작과정에 반영되었다. 따라서 1549년 기도서는 사실상 그 자체로 실험적인 본문들이었으며, 따라서 1552년과 59년에 계속해서 개정되었으며, (잉글랜드 퓨리탄들의 정권장악으로 한동안 폐지되었다가) 1662년에 다시 개정되었다. 이러한 기도서의 공식화, 실험과 재공식화의 과정에서, 잉글랜드교회의 개혁은 효과적으로 수행되었으며, 따라서 [종교]개혁된(Reformed) 교회이자 보편적인(Catholic) 교회라는 독특한 형태의 그리스도교회를 확립하였다. 잉글랜드에서 1662년 기도서는 오늘날까지도 최근의 개정된 전례서들과 함께 정규(legal) 기도서로 사용되고 있다. </p> <p>이와 비슷하게 신학적인 공식화와 실험이라는 과정은 미국성공회의 기도서(1789)를 시작으로 세계성공회의 다른 교회들에서도 자신들의 기도서를 제작할 때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따라서 1662년 이후로 가장 포용적이며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개정기도서인 1979년의 미국성공회 기도서도 이와 똑같은 과정을 통해서 제작되었다. 즉, 연속적인 ‘시험용’(trial) 기도서들(또는 일부분만으로 시험예식들)을 제작하여 이를 미국성공회의 개별 교회들의 상황속에서 실험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시험적인’전례서들로 매주 기도하였던 신자들의 반응들은 1979년의 최종적인 기도서의 형태에 신중하게 반영되었다. 이 기도서가 허용하는 전례적인 이해의 범위는 이전 세기들에서 상상할 수 있었던 것들을 능가하였으며, 기도[문 예식]에 대한 이러한 융통성(유연성flexibility)은 20세기 후반의 다원화된 교회(pluralistic church)에서 발견되는 믿음의 융통성-즉, 렉스 오란디 렉스 끄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i)-을 반영하고 강화시킨다. </p> <p>2. 성공회신앙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잉글랜드 기풍(English ethos)</p> <p>종교개혁 시기에 잉글랜드에 있던 교회에 알려진 예배와 신학의 그리스도교 유산은 서구유럽의 다른 지방들에 알려진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앞에서 설명한 신학적인 공식화[과정]와 그리스도인의 자기이해에 대한 그러한 독특한 접근방식이 왜 잉글랜드에서만 발생하였는가? 이러한 종류의 역사적인 질문들은 관련된 쟁점들이 너무 복합적이기 때문에 결정적인 또는 완전한 대답들을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잉글랜드의 정치적 사회적 조건들은 레스 오란디 렉스 끄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a)의 과정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독특한 방식을 낳는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더구나 이러한 조건들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이러한 성공회적인 과정의 강점들과 약점[한계]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p> <p>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조건들을 필자는 간단으로 ‘잉글랜드적인’(English), 또는 보다 일반적으로 ‘성공회적인’(Anglican, 잉글랜드교회적인) 기풍(민족정신ethos)으로 명명하려고 한다. 기풍[정서]이란 한 인종[민족]집단의 지배적인 조건들[상태들]과 가설들[태도들](conditions and assumption)로 구성되며, 이 집단의 믿음들과 관습들을 알려주는 숨어있는[근본적인] 감정들이다. 기풍[정서]은 숨어있는 가설들과 감정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다루기[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가설들과 감정들]은 숨어있기 때문에 아무런 저항없이 수용되며, 따라서 그 집단을 지배한다. 기풍[정서]은 ‘정신적인 습관’(habit of mind)이지만, 보다 중요하게는 ‘마음의 습관들’(habits of heart)-즉,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로 구성된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잉글랜드적인 정서의 두가지 측면은 이 글의 목적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첫째는 공감(의견일치consensus), 포용성(포괄성comprehensiveness) 그리고 계약(계약문서화contract)이 사회의 질서를 확립시키고 유지시키는 규범적인 양식이라는 가설이다. 이러한 가설에 따른 생활(living-out)은 폭력적인 갈등을 만들지 않으며, 이러한 상태의 연속은 바람직하고 가능하다는 또 하나의 가설을 만든다. 둘째로 잉글랜드적인 기풍[정서]에는 인간의 문제들[인간사]에 접근할 때에는 추론적인 관심(speculative interest)을 결여한채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pragmatism)을 따른다. 잉글랜드적인 기풍[정서]의 이 두가지 근본적인 측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를 강화시킨다. 이 글과의 관련성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는 각각에 대하여 간단한 추가적인 논평이 필요하다. </p> <p>2.1 . 공감, 포용성 그리고 계약 </p> <p>적어도 대헌장(Magna Carta, 1215)의 시대 이후로 잉글랜드인들은 그들의 계서[계급]적인 중세사회를 변형시키기 위하여 간헐적이었지만 지속적인 투쟁에 참가하였다. 중세사회의 강점은 중세기의 다양한 경제적-정치적 구성원들에 어느정도의 질서를 부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의 약점은 부과한 질서가 제한적이며 취약하기 때문에, 거의 끊임없이 제한적인 전쟁상태를 야기시킨다는 점이다.</p> <p>신학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교회가 이러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하여 취한 화해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중세의 사회질서는 유럽뿐 아니라 잉글랜드에서도 인간사회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비젼과 긴장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긴장관계는 그리스도교회가 취하였던 일시적 휴전이라는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교회의 죄인 보호구역’(지성소sanctuary)의 관행으로 표현되었으며, 그리고 보다 일반적이며 모호하게는 교회와 국가와의 수세기에 걸친 갈등[투쟁]-잉글랜드에서는 1162-74년 동안에 토마스 베켓 대주교와 헨리2세와의 갈등-으로 표현되었다. 실질적으로, 이러한 중세적인 사회질서는 소위 개인적인 자유라는 의식(20세기가 아닌 13세기의 기준에서)이 싹트고 상업과 국제적인 교역에 의해서 자급자족의 농경절서가 점진적으로 변형되고 있던 사회에 통일성과 안정성을 제공할 수 없었다. </p> <p>2.2.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Pragmatism) </p> <p>이것이 바로 대헌장을 생각할 수 있게 만들고 결국 성공시킨 상황이었다. 대계약(Great Charter, 마그나 카르타의 영어명칭)은 잉글랜드 치리구조[헌법]의 발전과정에서 첫번째 주요문서일 뿐만 아니라, 이후의 발전과정의 정신을 확립시켰다. 대헌장은 실용적인 문서였다. 즉, 대헌장은 당대의 해악들에 대한 명확하고 실용적인 해결책을 정립시켰다. 이 문서에는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내용이 거의 없다. 대계약을 존 왕에게 요구한 대토지소유 계급들(남작들barons)은 혁명가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보통법(Common Law)과 대토지소유 계급의 의회, 그리고 다른 계급들과의 연대를 통해서 국왕을 제한하기 위하여’ 행동하였다. 남작들은 ‘자유민’(freemen)의 실질적인 지지를 받으며 행동하였다. 강경한 주장과 곧이은 타협의 과정에서 ‘중도적인 입장’(middle way)-via media-을 추구하였으며, 이러한 행동은 당시에 가능하였던 가장 포괄적인 공감[의견일치]을 목표로 하였다. 이러한 공감은 하나의 계약-즉 대계약[대헌장]-으로 확립되었으며, 대계약은 ‘그후에도 지속적으로 다시 문제화, 이에 따른 개정, 이에 대한 위반과 다시 문제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p> <p>3세기가 지난후[16세기에] 앞서 설명한 첫번째 공동기도서(1549)는 대헌장을 만들었던 과정과 매우 유사한 과정을 통해서 제작되었다. 크랜머와 다른 지도자들은 십여년 이상의 기간 동안에 잉글랜드 교회의 예배와 믿음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의 일치를 성취하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여론]를 형성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혁명이 아닌 개정과 수정이란 방식을 통해서 수행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중세말기의 교회에 의존하려는 자들과, 대륙의 종교개혁에 의존하려는 자들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middle way)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중도적인 입장’은 하나의 ‘계약문서’로, 즉 1549년의 공동기도서로 표현되었다. 이 계약은 실용적인 계약으로 교리적인 추론과 논쟁의 문제들 대부분을 회피하고, 잉글랜드 백성들이 매주 예배하는 방식에 대한 실용적인 문제만을 추구하였다. 처음부터 이러한 계약은 ‘따라서 지속적으로 다시 문제화, 이에 따른 개정, 이에 대한 위반과 다시 문제화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연속성은 지속적인 잉글랜드적인 또는 성공회적인 기풍[정서]의 표현이다. 이러한 기풍[정서]은 다른 역사적인 시기와 문화적 상황에서 다르게 표현된다 할지라도, 서로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의견일치[공감]과 포용성[포괄성] 그리고 계약문서화의 과정을 낳고있다.</p> <p>2.3.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추론적인 관심의 결여</p> <p>잉글랜드적인 또는 성공회적인 기풍[정서]의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다. 역사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겠지만, 전통적으로 영국섬 (브리튼섬Britain)과 관련된 이단은 영국인(브리타니아인 또는 아일랜드인) 수도사 펠라기우스(410-18에 주로 활동)가 유일하였다. 그는 신의 은총 이외에도 각 개인이 구원을 향한 첫번째이자 중요한 단계를 시작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실용주의적인 사상, 즉 ‘실질적인’(체감할 수 있는sensible) 사상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또한 잉글랜드적인 기풍[정서]과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잉글랜드인들의 신심(piety)과 신학은 17세기의 퓨리탄부터 18-9세기의 복음주의 운동들까지 펠라기우스적인 성향을 진지하게 나타내었다. 더구나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측면을 크게 강조하는 구세군(Salvation Army, 1885)은 잉글랜드적인 기풍[정서]에서 탄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길버트와 설리번의 오페라타의 유쾌한 가사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잉글랜드인이 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p> <p>이러한 실용주의적인 성향이 적어도 대헌장 시대부터 유독 잉글랜드에서만 발생하는 가는 정확하게 대답할 수 없고 다만 추론할 수 밖에 없다. </p> <p>그러나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발생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성향은 잉글랜드의 헌정과정에서[치리구조를 결정짓는 과정에서] ‘보통법’(common law)으로 구체화된 사법적체계에 깊이 베어있다. 또한 이러한 정서는 경험주의라는 영국의 철학적인 전통을 낳았으며, 또한 18-9세기의 자연과학의 발전과정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p> <p>3. 성공회 기풍내에서 lex orandi, lex credendi의 장점들과 한계들</p> <p>3.1. 장점들</p> <p>성공회적인 기풍[정서] 안에서 렉스 오란디 렉스 끄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a) 과정의 장점들은 앞의 설명에서 분명하게 입증되었다. </p> <p>첫째이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러한 과정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형성시켰던 전통들을 높이 평가하며 매우 중요시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이러한 전통들의 전례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전례는 한편으로 기본적으로 성서와 전통의 상징들(symbols)과 신화들(myths)과 은유들(metaphors)로 표현된다. 다른 한편으로, 성서와 전통들은 믿는자들에 의해서 전례의 상황에서 수용된다. 이는 마치 전례가 당대의 상황에서 기도되는 것과 같다.</p> <p>둘째로, 역사적인 과정속에서 그리스도교 전통들을 지속적으로 수용(appropriation)하거나 정리하는 작업(ordering)은 이러한 전통들이 살아있는 믿는자들의 집단 즉, 교회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세째로, 전통들의 정리작업은 교회 그리고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의 정리작업에 대한 포괄적인 공감을 목표로 하는 숙고와 협상의 과정을 통해서 진행된다. 네째로,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형성된 공감은 실용적으로 전례적인 계약, 즉 공동기도서로 공식화되며, 이 기도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적용되는 방식으로 교회 그리고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정리작업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다섯째, 기도서는 기본적으로 다양한 전례적인 본문들을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한 상징들과 신화들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기도서와 직접적으로 상반되지 않는한 개인적인 신심과 다양한 형태의 추론적인 신학체계들을 발전시키는데 공헌할 것이다.</p> <p>전반적으로 이러한 장점들은 아래에서 설명하는 성공회신앙의 일반적인 특징들을 낳았다. 첫째로, 전통과 연속성 그리고 질서(order)를 중요시한다. 둘째로, 질서(order)의 중심인 기도서를 확고하게 보존하는 것은 바로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론을 매우 강조한다. 세째로, 과거의 전통을 현재에 적합한 공감으로 다시 만드는 것은 바로 이성적인 인간의 숙고와 토의 그리고 협상을 통해서이기 때문에 인간론을 중요시한다. 네째로, 과거의 전통들은 반드시 현재의 공감을 형성할 필요성과 갈등하기 때문에, 성공회신앙을 과거의 전통이나 현재의 재공식화를 우상화하려는 것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자기비판적인 요소가 현존한다. 다섯째로, 공감에 대한 기대 그리고 인간론의 중시 때문에, 성공회신앙은 인간적인 문화-예를들면 비판적인 역사연구들, 자연과학과 예술 등-에 비판적이지만 적극적인 태도를 강력하게 나타낸다.</p> <p>3.2. 한계들[약점들] </p> <p>성공회신앙의 한계들은 앞의 장점들의 이면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전통의 전례적인 본문들에 대한 정성스런 존경을 통해서 질서(order)와 통일성을 찾는 분명한 장점은 이러한 본문들에 대한 역사적이자 기술적인[사소한] 토론들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소비함으로써, 교회생활에 매우 필수적인 전통들의 현재적인 재해석을 상대적으로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부분적으로 성공회신앙을 주변의 문화와의 상호작용으로 방향전환함으로써 보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렉스 오란디(lex orandi예배의 법)는 지니치게 렉스 끄레덴디(lex credendi 믿음의 법)를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리고 유명한 예외들도 있지만), 이는 문제의 양면들이 제기하는 합법적인 주장들을 통합함으로써 균형을 성취하려는 ‘중도적인 입장’을 추구하는 성공회적인 노력을 배신하는 것이다. </p> <p>또다른 문제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여러가지 한계[약점]들은 협상을 통해서 공감을 성취하고 그러한 공감을 계약으로 구체화하려는 성공회신앙의 실용적인 기대(desire)로부터 발생한다. 이러한 기대는 성공회신앙에 내재된 ‘달콤한 합리성’(sweet reasonableness 빚좋은 외형적인 타협)을 낳는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합법적인 차원이다. 교회와 사회에서 질서와 통일성 그리고 안정성을 증진시키는 성공회신앙의 가치는 쉽게 입증된다. 그러나 이와동시에 합리성과 질서에 대한 이러한 실용적인 기대는 한 사회의 지배적인 요소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희생시켜 평화를 얻으려 함’으로써 통일성에 대한 비젼을 잃어버리는 싸구려 타협으로 전락하기 쉽다. 역사적인 전통들은 되풀이되고, 많은 관점들은 다시 인정받지만, 어느 하나도 열정적으로 확언되지 않으며, 복음적인 입장은 계승되지 않는다. 이러한 풍조가 만연할 때, 예언자들의 나팔소리[목소리, 경고]를 외치는 것은 불가능해지며, 또한 이러한 경고를 외치는 자들은 성공회 공동체 내에서 서서히 밀려나게 된다(따라서 외형적인 ‘평화’만를 보존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의 가장 유명한 사례는 존 웨슬리의 감리파운동과 관련하여 1739년(성공회교회들이 그를 외면한 해)부터 1784년(감리파 평신도 설교자들의 연회annual conference에서 법적인 헌장을 채택한 해)까지 발생하였다.</p> <p>3.3. 성공회의 한계들, 성공회의 합법성, 그리고 미래의 방향</p> <p>전례와 예배의 중심성에 대한 정당한 강조뿐 아니라 공감에 대한 실용적인 관심을 갖는 성공회신앙의 한계들은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인 폴 리꾀르(Paul Ricoeur, 1913-2005)의 철학과 함축적인[내재된] 신학의 검토[심사]을 통해서 보다 넓은 시각에서 평가받을 수 있다[이해될 수 있다]. 리꾀르는 18세기부터 오늘날까지 넓게는 인간적 담론(discourse), 구체적으로는 신앙적인 담론에 대한 중요한 문제[의문]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였다. 전문용어로 서술한다면, 이 문제는 다음과 같다. 생각(Cogito)은 존재(being) 안에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보다 덜 전문적이며 그리고 분명하게 신학적인 용어로 이 문제를 서술한다면 다음과 같다. 나의 생명(life)은 하느님의 실재 안에서 발견되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실재가 나로부터 유래하는가? 이 중요한 문제는 널리 인지되었으며, 또한 버나드 로너건(Bernard Lonergan), 칼 라너(karl Rahner), 볼프하르트 판낸베르그(Wolfhart Pannenberg)와 여러 신학자들도 이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이 글의 관심사에 가장 적합한 내용은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한 리꾀르의 고찰들로, 그는 인간적 담론(discourse)에서 상징과 신화들의 기능을 매우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제 이에 대한 고찰들을 살펴보자. </p> <p>리꾀르가 우리들에게 유의하도록 요구한 것은 초월적인 질서(transcendent order)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부족이다. 이 초월적인 질서는 인간의 생활 그 자체- 즉 인간의 체험, 상상, 숙고 그리고 행동-를 절대적으로 결정짓는다. 이 초월적인 질서는 신성(the sacred), 성스러운 것(the holy), 근원적 존재(Being) 그리고 하느님(God)과 같이 여러가지로 언급된다. 명칭과 관계없이 신성은 우리에게 말을 걸며, 그리고 우리는 상징들 그리고 상징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설화들(이야기들narratives) 또는 신화들로 이에 응답한다. 바로 이 응답이 인간생활의 모든 차원들에서 인간생활을 구성하고 형성시킨다. </p> <p>리꾀르의 요점을 놓치기 쉽다. 신성이 우리 안에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해석물, 즉 인간의 신앙[종교] 의식[인식]의 산물로 나타난다는 것이 논점이 아니다. 신성은 먼저 우리 안에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과 함께 신성 안에 있다. 신성은 정말로 모든 사람들 안에 있지만, 신성은 그것[신성]의 초월적인 원천으로부터 그곳에서[각 사람] 반사[투영]되거나 상상되는 것처럼 파생적으로만 존재한다. 즉, 우리는 신을 닮았다(theomorphic)거나, 전통적으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p> <p>상징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기능하도록 허용하는 상징들의 특성은 무엇인가? 리꾀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p> <p>&lt;‘상징은 사상을 낳는다.’ 필자가 매우 매력적이라고 발견한 이 금언(maxim)은 두가지를 말한다. 상징은 준다[뭔가를 나타낸다]. 즉, 필자는 의미를 가정하지 않지만, 상징은 의미를 준다[나타낸다]. 그러나 상징이 주는 것은 사상을 위한 어떤 것으로, 즉 생각할 어떤 것이다. 주는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가정한다(positing). 그러므로 이 말[구절]은 모든 것은 이미 수수께끼[불가사의]로 말해졌다는 점을, 그리고 모든 것을 사상의 차원에서 다시 시작하고 또다시 시작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제시한다. 필자가 곱씹에 이해하고 싶은 것은 바로 상징들의 영역에 버려져있는 사상 그리고 가정하고 생각하여야 하는 사상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다.&gt; </p> <p>‘상징이 사상을 낳는다.’ 먼저 주고[나타내고] 그 다음에 가정한다는 것이 이 글의 관심사들에 매우 중요하다. 즉, 기도의 법(lex orandi)이 우선하며, 신앙의 법(lex credenda)는 본질적인 요소이지만 논리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파생적[이차적]이다. 이 두가지 반쪽들 사이의 변증법적인 관계성은 밀접하며 전반적이다. 즉,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할 때, 우리는 이미 상징들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서가 매우 중요하다. 즉, 먼저 주고[나타내고], 그 다음에 생각한다. 바로 이 순서는 우리들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하느님 안에 위치시킨다. 그리고 그 반대의 순서는 아니다. 바로 이 순서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래적인 안셀름적인 특징을 설명한다. 즉,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이해를 뒷받침하는 신앙에 대한 적합한 해석을 추구하는 이해, 이는 교대로 이미 물려받은 것[신앙 이해]을 변경시킨다. 바로 이러한 과정 안에서 그리스도교 설교는 본질적이고 불가분의 역할을 찾는다. 그리고 이 과정은 개인의 생활과 교회의 생활을 통해서 계속된다. </p> <p>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처럼, 성공회신자들에게도 신성이 이처럼 먼저 주어지는 것(givenness)은, 교회에서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 예수를 기억할 때,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표현하는 상징들과 신화적인 이야기들에서 최초로 그리고 가장 완전하게 증명되었다. 바로 이렇게 주어진 상징들과 이야기들이 의례[의식]로 상연되고 기도되고 낭송되며 노래로 불려진다. 이것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성상들(icons)이다. 의미는 그곳에서, 즉 상징들이 이야기들에 결합된 이러한 상징들에서 나타난다. 바로 이러한 상징들과 이야기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중심적이자 결정적이다. </p> <p>상징들의 매우 복합적인 세계 내에서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어느 지점에서 시작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신경에 요약된 것처럼 예수의 사목활동[공생애]과 죽음과 부활의 상징적인 생활에서 시작한다. 이 이야기가 우선권을 갖는다. 다른 이야기들과 신심활동들-예를들면 성인들의 삶과 관련된 것들-은 이 우선권을 가진 상징적-이야기적인 범위(궤도orbit) 안에 편입될 수도 있다. 그리고 정말로 다른 종교들의 상징들과 신화들도 이 범위 안에 편입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들에서 수용된 상징은 그것이 우선권을 갖는 그리스도의 이야기와 일치하는[조화하는] 경우에만 정당한 것으로 수용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조건(given)으로부터 가정하는 일(positing)이 진행되며, 신앙에 대한 사려깊은 해석이 시작된다. </p> <p>우선권을 가진 그리스도의 상징들과 이야기들은 그리스도교회의 전례적인 예배 안에서 기억되고 기도될 때, 가장 근본적으로 성서 안에 살아있다. 각 개인이 성서와 기도를 사용하는 방식은 그리스도교회의 보다 포괄적인 체험에 의존한다. 어떠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나 신학도 그리스도교체험의 이러한 차원의 기본전제(givenness)를 완전히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성공회신앙은 이 점에 대해서 크게 의식하며 매우 강조한다. 바로 이 점이 교회생활에서 렉스 오란디 렉스 끄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a)에 대한 특별한 이해와 함께 공동기도서와 전례를 최우선으로 강조하는 성공회신앙에 체험적 이론적 근거이며, 따라서 그 정당성을 제공한다.</p> <p>성공회신앙이 이러한 체험의 차원을 완전히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하더라도, 성공회신앙은 교회의 생활과 신학을 해석할 때에 상징과 신화 그리고 예배의 중요성이 비젼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것을 너무나 자주 허용하였다.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이는 앞에서 설명한 성공회신앙의 본래적인 특성을 위배하는 것이며, 타협과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질서(order)를 추구하려는 경향 때문에 빠지기 쉬운 위반이다. 그 결과는, 한 개인이나 전통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였을 때에 나타나는 것처럼, 스스로와 다른 것들에 충실하게 기여하지 못하는 창의력의 부족과 산만함이 나타난다. 따라서 20세기의 신학에, 특히 역사학의 분야들(성서, 초기교회, 그리고 전례)에 대한 성공회의 기여도는 매우 크지만, 성공회신학 전반은 정체성과 창의성의 상실로 특징지었다. 20세기초 지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y)에 대한 성공회신앙의 기여는 제한적이었으며, 20세기 중반의 신정통주의신학에 대한 참여는 거의 없었다. 보다 최근으로 지난 30여년 동안에 나타난 신학의 언어학적 그리고 해석학적인 관심사에 대한 성공회신학의 참여는 ‘하느님과의 대화’(God talk)의 타당성에 관심을 가진 이안 램지(Ian Ramsey)와 일부 학자들의 유익하지만 제한적인 연구들로 제한되었다. </p> <p>그러면,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라는 복음서의 명령에 충실하려면, 성공회신학의 나아갈 길(way forward)은 혁명적인 새로운 시작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교회의 생활과 사상에서 잃어버렸던 렉스 오란디 렉스 끄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a)의 중요성에 대한 비젼을 복원(재이해reappropriation)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p> <p>4. 상징은 사상을 낳는다: 성공회신학에서 lex orandi, lex credendi의 복원[재이해]</p> <p>성공회신앙 안팎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은 렉스 오란디 렉스 끄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a)의 과정에 대한 참여에 근거한 안셀름식 신앙운동의 필요성을 지지하는 여론이 나타났다. 이 과정을 요약한 경구-또는 ‘태그’-는 폴 리꾀르의 ‘상징은 사상을 낳는다’이다. 이 경구는 어떤 의미에서 라틴어 태그를 다시 진술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된 거대한 영성적인 모험을 (우회한 것이 아니라) 헤쳐나온 아래의 방식들을 명확하게 또는 암시적으로 설명하는 형식으로 이 경구를 다시 진술한 것이다.</p> <p>첫째로, ‘상징은 준다[나타낸다]’: 즉, 우리는 상징들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발견한다.’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들을 인간으로 의식할 때, 우리가 우리의 모국어 내에 깊이 스며있는 신화들의 이야기 구조에 서로 연결된 일련의 상징들(a matrix of symbols)로부터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상징들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정체성과 가치와 자존심(self-worth) 그리고 질서에 대한 인식을 우리들에게 준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상징들은 우리에게 우리의 인간성(humanity)을 준다. 따라서 상징들이 우리에게 우리의 자아를 줄때, 상징들은 선행적 은총(prevenient grace)의 현현들(표현들manifestations)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상징들을 발견하다. 이는 상징들이 우리를 먼저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증언(testimony)이다. 즉, 우리를 발견한 은총은 신성(the sacred), 즉 하느님이며; 상징들은 신의 현현들(theophanies)이며; 이 하느님의 특별한 상징들과 신화들은 성서의 그것들로 예배하는 교회에 의해서 수용되고 살아 숨쉰며; 바로 이러한 상황이 성공회가 믿음보다 기도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기도문을 둘러싼 상징들이 신의 현현들이기 때문이다. </p> <p>한편으로 ‘상징은 준다[나타낸다]’라는 구절에 의해서 지적된 이 첫번째 확언은 교회가 처음부터 말했던 것을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이제 이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형성하는데 인간적인 주제와 언어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정하는 방식으로 확언된다. 이러한 역할의 인정은 18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서구의 철학과 심리학이 인간적인 주제와 언어에 몰두[집중]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더구나 기도의 우선성[선행성]을 확언하는 이러한 새로운 방식은 지난 한세기 동안의 종교사(history of religions) 연구의 덕택이었다. 특히 종교사 연구에서 성공회 신자들은 포용성과 공감에 대한 그들의 기대 때문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종교사연구는 우리들에게 모든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을 형성하는데 상징들과 신화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깨닫게 하였다. 이러한 중심적인 역할에 대한 인식과 함께, 상징들과 신화들의 다원적 성격과 역사적으로 한정된 성격에 대하여 철저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특정한 신앙적인[종교적인] 전통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전통들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상징들과 신화들이 존재한다. 상징은 주며[나타내며], 그리고 상징은 우리의 통제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들 그 자체인 역사적인 과정에서 또다시 준다[나타낸다]. 그러므로, 어느 한 상징, 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상징처럼 하나의 상징체계가 다른 것들로부터 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어느 한 전통의 상징들이 다른 전통의 상징들에 대하여 확고한 지배권을 주장할 수도 없다. 오히려 한 전통 안에 있는 상징들과 다른 전통들의 그것들은 서로를 비판하고 보완하는 대화적인 관계에 있다. 이는 상징적인 생활 내에 자기비판적인 원리가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따라서 한 특정한 상징적인 전통에 대한 특권적인 지위를 요구하고 추구하는 것은 그러한 전통에 참여한 자들에게는 불가피하고 필수적이지만, 그러한 요구는 인간적 증언에 기초하며, 그리고 종말론적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증언들의 지속적인 갈등이 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한 완전한 인식에서만 가능하다. 스티븐 사익스(Stephen sykes)는 이 점을 그리스도교와 관련하여 현명하게 지적한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수반하는 것들은 본질적으로 논쟁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은 하나의 [만들어진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며, 더구나 그 과정은 비판에 의해서 촉발되는 끊임없는 상호대화(dialectic)를 수반한다’고 주장하였다. </p> <p>둘째로, ‘상징은 사상을 낳는다’: 즉, 사상이 있으려면, 반드시 생각할 대상[실재물, something]이 있어야 한다. 생각되어야 할 것[대상]은 상징들 즉, 신의 현현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에 의해서 새로운 우리 자신들을 발견한다. 상징들은 우리에게 말을 걸며, 우리의 반응을 요구한다. 우리의 반응은 상징들에 대한 생각이다. 이 생각은 처음에 상징들을 의례(의식ritual)와 신화의 이야기식의 구조에 위치시키는 형식을 취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인간활동의 모든 영역에 대한 이러한 양식들[예식들]과 상징들의 중요성에 관하여 신학적인 숙고를 진행한다. 바로 이 과정이 신앙적인[종교적인] 자각[인식, 의식]을 구성[형성]한다. 모든 인간적 생각은 이러한 자각[의식]에 뿌리를 두며, 이러한 뿌리성을[토대를] 유지할 때에만 그 생명력[활력]을 유지한다. 사익스는 보다 구체적으로 ‘공동체적인 예배(상징들과 예식들과 신화들이 계속적으로 반복된다)는 [...] 교리, 윤리, 신화, 사회적 표현, 의례[예식]적 처험 그리고 내적인 체험이 통합적으로 결합되는 현장[무대]이다’고 진술하였다. </p> <p>이 모든 것들은 렉스 오란디(lex orandi)와 관련하여 렉스 끄레덴디(lex credenda)의 위치를 다시 서술하는 한가지 방식이지만, 이는 다르게 다시 서술된다. 이제 기도와 믿음(사상) 둘다의 ‘법’은 보다 적합하게 ‘과정’ 또는 ‘생활’로 명명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라틴어 인용구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제야 분명하게 표현된다. 이 점은, 현대의 서구학자들이 인간적인 주제, 언어, 그리고 비판적인 역사의식의 태동에 몰두하며 서로 밀접한 관계속의 발전을 통해서 분명하게 표현되는 것은 당연하였다. (이러한 발전들 자체는 성서적, 그리고 특별히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의식의 종말론적이며 성육신적인 상징들에 근거한다. 하지만 이 주제는 여기서 논의할 수 없다.) 상징들이 사상을 낳는 것처럼, 여기서 모든 것은 과정이다. 이 과정은 상징에 내재된 의미의 실질적으로 무한한 측면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개조시키며, 거꾸로 상징들이 새로운 사상을 낳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 과정은 계속된다. 비록 이 사상은 이를 만들어낸 상징들에서 그 뿌리성[토대 근거]를 잃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과정은 새로운 것, 미래의 것에 종말론적으로 지향한다. 궁극성과 완성에 대한 모든 주장들은 의심의 법칙에 지배되며, 과정은 계속된다. </p> <p>5. 성공회신앙에서 교회, 성사들, 그리고 사목활동에 대한 영향</p> <p>앞의 탐구는 성공회신앙이 신학적인 진술과 탐구를 위한 원천이자 활동무대로 일반적으로는 예배에 대하여 그리고 특별하게는 성사들을 강조하는 것을 결정적으로 확언한다. 상징들이 낳는 사상은 무엇보다도 근본적으로 예배와 예식(rite)의 상황에서 발생한다. 한 공동체 안에 있는 개인들은 상징이 나타내는 거룩함의 현존에 응답하고 내면화하려고 시도한다. 렉스 오란디 렉스 끄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a)에 대한 이러한 평가들이 교회, 성사들 그리고 사목활동(ministry)에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지면의 제한으로 간단하게 살펴보자.</p> <p>5.1. 교회</p> <p>한편으로 개인보다는 교회와 교회의 예배규정을 우선시[강조]하는 것은 분명하게 확언되었다. 우리를 발견하고 우리에게 우리의 인간성을 부여하는 상징들의 수여자는 바로 의례로 형성된 교회이다. 이것은 급변하는 사회적 추세들과 무비판적인 개인주의 사이에서 갈팡지팡하는 사회에서 종종 인기없는 메세지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고 똑같은 이유들 때문에, 교회는 인간생활의 목적과 이러한 목적을 얻는 수단들에 대한 최종적이고 완전한(우상적인) 대답들을 제시한다는 주장을 잃어버렸다. 교회는 신의 현현들인 상징들의 과정을 통한 표현(processive unfolding)을 통제하지 못하며, 오히려 이것에 의해서 형성되고 이에 응답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과 신학적인 공동체는 교회의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상징들과 신화들은 변하지 않지만, 상징들과 신화들로부터 나오는 교리들과 의례들, 교회법 등은 계속적으로 변화하며 항상 잠정적이다. 따라서 상징들로부터 나와 상징들 자체로 나아가고 있는가, 이러한 충실성(fidelity)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신학의 끊임없는 과제이다. 성공회신앙은 이 과제에 대한 관심을 과거보다는 덜 제한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p> <p>5.2. 성사들</p> <p>상징들-하느님의 현현들-은 이것들이 위치한 신화적인 이야기들과 함께 구약과 신약의 성서들에서 가장 포괄적이며 권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성서들은 의례적으로 형성된 교회공동체에 의해서 전달되고, 독서되고, 그리고 지속적으로 다시 이해된다. 그러므로 성서보다 성사들에 우선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경향(전례에 대한 지나친 관심, 지나친 예식활동, 설교의 강조나 축소를 통해서 나타난다), 또는 성서를 성사들보다 우선적인 위치에 놓으려는 경향(전례 축소주의, 의례에 대한 무관심, 인간생활의 지성화를 통해서 나타난다)은 똑같이 렉스 오란디 렉스 끄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a)-또는 ‘상징이 사상을 낳는다’-가 주는 통찰력들에 충실한 것이 아니다. 성공회신앙은 가장 특징적으로 전자의 경향에 굴복하였다. 하지만 최근의 전례학 연구는 이러한 불균형을 교정하려고 매우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이 두가지 경향들-둘다 기형이다-은 현대적인 인식에 대하여 끊임없이 나타나는 유혹들이다. </p> <p>5.3. 사목활동 </p> <p>렉스 오란디 렉스 크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a)는 그리스도교 사목활동에 전반적인 영향을 주는 세가지 기본적인 통찰력들을 생산한다. 첫째로, 일반적으로 인간의 생활 그리고 특별히 그리스도교의 생활은 싱징적인 생활이다. 즉, 우리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상징들 안에서 그리고 상징들을 통해서 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상징들을 통해서만 생활의 완전성과 용기 그리고 기쁨을 얻기 때문이다. 둘째로, 상징들은 하느님의 현현들이며 하느님의 선행적 은총을 모든 사람들에게 부여한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살고 있다. 개인들은 상징들을 거부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지만, 누구도 상징들로부터 배제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상징적인 생활, 즉 은총의 생활은 전향적인 또는 종말론적인 생활이다. 결과적으로 ‘진리’를 구성하며 받드시 믿어야 하는 것, 또는 ‘유익한 생활’을 구성하며 받드시 복종하여야 하는 것에 대한 최종적, 배타적인 판결들은 단지 우상적이라고만 판단될 수 있다.</p> <p>참고문헌</p> <p>Clarke, W. K. L. (ed.), Liturgy and Worship: A Companion to the Prayer Books of the Anglican Communion. SPCK, London, 1932.</p> <p>Cross, F. L. (ed.),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UP 1958, 3rd edn, OUP 1997.</p> <p>Spinks, B., ‘Two Seventeenth Century Examples of “Lex credenda lex orandi”: The Baptismal and Eucharistic Theologies and Liturgies of Jeremy Taylor and Richard Hooker’. Studia Litugica 21.1 (1991) pp. 165-89.</p> <p>Stevenson, W. T., ‘Is There a Characteristic Anglican Theology?’ in The Future of Anglican Theology. Edwin Mellin Press, New York and Toronto, 1984.</p> <p>Sykes, Stephen W., The Identity of Christianity. SPCK, London/Fortress Press, Philadelphia, 1984.</p> <p>Trevelyan, G. M., History of England. Longman, Green and Co., London, 1945.</p> <p>Wainwright, G., Doxology: The Praise of God in Worship, Doctrine and Life. OUP, New York, 1980; Epworth Press, London, 1982. </p> Cranmerian on "번역: The Study of Anglicanism-Anglicans and Mission"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023#post-1910 금, 22 2월 2013 05:52:37 +0000 Cranmerian 1910@http://liturgy.skhcafe.org/ <p>성공회와 선교</p> <p>T. E. Yates</p> <p>성공회는 보편적 교회(세계 그리스도교회Church universal)의 선교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교회와는 달리 선교에 대한 성공회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공식적인 이론집은 없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경우, 제2차 바티칸회의 이후 발표된 &lt;교회에 관한 교의헌장&gt;(Dogmatic Constitution of the Church, Lumen Gentium), &lt;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gt;(Decree on the Missionary Activity of the Church, Ad Gentes), &lt;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gt;(Declaration on the relationship of the Church to the non-Christian Religions, Nostra Aetate)과 같은 문서들은 선교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공회의 입장은 개별 [관구]교회의 선교활동과 개인들의 저서들에 대한 연구 그리고 간헐적으로 발표된 공식문서들의 언급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추구될 수 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드러난 성공회 선교의 특징적인 강조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교회를 이식시키고 토착[현지]인 사목직을 양성했다는 면에서 토착화(현지화indigenization)를 강조하였다. 일찌기 1765년에 서품받은 아프리카인인 필립 콰쿠(Philip Quaque)는 아프리카의 서부 해안지방에서 50년동안 사목활동을 하였다. 그는 특별한 사례였지만, 그이후에 인도의 압둘 마시(1825년에 서품), 카나다 인디언인 헨리 버드(Henry Budd, 1850), 그리고 해방된 노예이자 최초의 아프리카인 주교가 된 새무얼 크로우더(Samuel Crowther, 1864년에 주교축성)를 꼽을 수 있다. 둘째로, 교육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물론 이는 개종자 또는 첫 현지인 사목직을 훈련시키려는 목적이었다. 바베이도스[서인도제도]의 코드링턴 칼리지는 1745년에 학교로 설립되었으며, 1830년에 신학대학으로 재설립되었다. 캘커타의 비샵스 칼리지(Bishop’s College)는 1820년에 설립되었으며, 시에라리언의 포라베이(Fourah Bay) 칼리지는 1827년에 설립되었으며 첫 학생들중 하나가 새무엘 크로우더였다. 오클랜드(Auckland, 뉴질랜드)의 성요한 칼리지는 1847년 SPG의 5천파운드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이들 교육기관들은 성공회 선교활동의 특징인 유명한 교육기관들중 일부이다. 이 두가지 강조점들 외에도, 성서와 성공회 기도서를 현지어로 번역하는 활동을 강조하였다. 1872년 순교한 멜라네시아의 존 패터슨(J. C. Patterson)처럼 순교한 주교들이나 1884년[1885년초] 우간다의 소년 순교자들과 같이 선교현장의 영웅들 이외에도, 선교활동에 대한 이론가들과 저술가들도 있었다. 이들은 이러한 분야에서 전체 그리스도교회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들중 일부를 언급한다면, 사상가이자 선교전략가들로는 헨리 벤(Henry Venn), 로랜드 앨런(Roland Allen)과 맥스 워렌(Max Warren)을, 학자로는 스티븐 닐(Stephen Neill) 주교와 케네스 크랙(Kenneth Cragg) 주교를 꼽을 수 있다.</p> <p>초기단계: 18세기</p> <p>1662년 공동기도서는 함께 살고있는 주위의 비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성공회신자들의 책임을 인식하였다. 즉, ‘성년후보자를 위한 세례’ 예식은 ‘신앙으로 개종하는 우리의 대농장지 원주민들과 다른 사람들을 세례하는데 항상 유용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에 잉글랜드교회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포교성성(Sacred Congregation for the Propagation of the Faith)(약칭으로 포교국Propaganda)(1622)의 설립과 로마 가톨릭 선교사 로버트 드노빌리(Robert de Nobili 1577-1656)-인도의 브라맨들(승려계급) 사이에서 활동-의 선교활동, 그리고 장로교회 선교사 존 엘리어트(John Eliot, 1604-90)-북아메리카의 이로쿼이족 인디언들 사이에서 선교활동-에 상당하는 인물들이 없었다. 17세기말에 워리크셔 셀던교회의 관할사제인 토마스 브레이(Thomas Bray, 1656-1730)-그의 활동은 이 책의 앞글에서 언급되었다(p. 40 참조)-는 성공회의 첫 선교단체인 SPCK(1698)를, 그리고 18세기초에 SPG를 설립하였다. 윌리엄3세의 국왕특허장(Royal Charter)으로 설립된 SPG는 ‘해외에 있는 대농장지들, 식민지들 그리고 공장들’에 ‘학식있고 정통신앙를 갖춘 성직자들의 부족’을 충당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바로 이러한 제한때문에 SPG가 아니라 SPCK가 인도의 트랭쿼바에서 활동하는 덴마크 선교활동을 지원하였으며, 잉글랜드의 국왕이 통치하지 않는 지방들에서 독일 선교사들-일부는 루터교 성직자들-을 고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PG는 처음부터 두가지 책임, 즉 ‘우리 왕국민들을 위하여 활동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가의 신앙을 정착시키는 것 [...] 그리고 그후에 원주민들의 개종을 최선의 방법으로 실행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들에 전속사제들(chaplains)을 공급하는 것 이외에도, SPG는 1704년에 뉴욕주의 북부에 있는 올버니에서 모호크족 인디언들 사이에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이들중 4명을 런던에서 앤 여왕을 알현하도록 주선하였다. 여왕은 이들에게 ‘모호크족의 인디언 예배소에서 사용하도록’ 은으로 만든 성찬용 접시[성반] 세트를 선물하였다. 또한 뉴욕의 흑인 인구들에 대한 선교활동도 시작되었다. 18세기 대농장지 주인이었던 크리스토퍼 코드링턴-바베이도스 총독-은 1710년 그가 소유하였던 흑인노예들과 토지를 SPG에 유증하였다. 이 기부로 1745년에 코드링턴학교를 설립하였으며, 후에는 대학으로 전환하여 많은 성공회 성직자들을 양성하였다. 마지막으로 노예들의 비참한 처지때문에 SPG의 선교사들중 하나인 토머스 탐슨은 아프리카의 서부해안을 다시 방문하였다. 그의 주도로 세명의 아프리카 소년을 잉글랜드로 유학보냈으며, 이들중 하나인 필립 콰쿠는 1765년에 최초로 비유럽인 성공회사제로 서품받았다. </p> <p>미국의 독립전쟁으로 SPG의 활동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1781년 영국군의 항복후에 SPG의 선교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선교회는 미국교회를 지원하는 거의 80년 동안에 300명의 성직자를 후원하였으며, 그중 100명은 미국교회에서 활동중 사망하였다. </p> <p>자원선교단체들의 시대: 19세기</p> <p>SPG는 토머스 브레이의 개인적인 주도로 그리고 국왕의 후원와 특허장으로 제한을 받는 선교단체였지만, CMS(Church Missionary Society, 국교회선교회)는 그러한 제한을 받지않는 자원단체(voluntary society)였다. 18세기말에는 다양한 선교단체들이 설립되었다. 그중에서 범교파적인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1795년에 설립)는 성공회 복음주의자들에게 모델을 제공하며 기폭제가 되었다.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토론그룹인 &lt;Eclectics Society&gt;는 LMS와 초교파적인 영국과 외국의 성서협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와 같은 단체에 참여함으로써 교회당파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쉽게 받았다. 찰스 시메온(Charles Simeon)은 이러한 비판과 ‘이교도’에 대한 순수한 관심으로 1796년의 한 집회에서 ‘이교도들에 대한 국교회의 선교는 어느 수준으로 그리고 어떠한 형태로 정립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였다. 이후 1799년에 ‘아프리카와 동양 선교회’(Society for Missions to Africa and East)가 설립된 후 CMS(오늘날에는 Church Mission Society)로 개칭하였다. 같은 계열로 LMS에 자극을 받아 ‘유대인 선교를 위한 런던선교회’(London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ity among the Jews)- 오늘날의 명칭은Church’s Ministry among Jewish people-가 1809년에 발족하였다. 또한 식민지와 대륙 선교회(Colonial and Continental Church Society)-오늘날의 명칭은 대륙간 선교회(Inter-continental Church Society)-도 처음부터 성공회 복음주의자들이 설립하였다. </p> <p>SPG가 국교회 선교회인 반면에, CMS는 복음의 전파를 위한 단체라는 논평은 어느정도까지는 사실이다. 즉, SPG는 선교회가 지원하는 자들이 교회[국교회]의 대리인들이라는 점을 열심히 강조하였지만(따라서 19세기에 모든 후보자들은 규정상 대주교 산하의 심사실에서 면접을 받아야 했다), CMS는 역사적으로 보다 커다란 독립성을 유지하였다. 또한 SPG는 교회이식(설립church planting)을 크게 강조하였지만, CMS는 무엇보다도 개개인의 개종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들은 매우 제한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SPCK와 SPG의 설립자들은 할레의 A. H. 프랑케(Francke)와 같은 자들의 경건주의 그리고 이들의 주장인 개심에 대한 경건주의적인 강조에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19세기중반 CMS의 의장인 헨리 벤은 누구보다도 교회설립(교회이식church planting)을 확고히 믿었다. 또한 CMS의 설립자들중 일부는 SPG의 회원이었다. CMS의 의장이었던 조시아 프래트는 1819년 익명의 소책자에서 대중들에게 기부대상으로 SPG를 추천하였다. 그러나 SPG와 LMS와 달리, CMS의 설립자인 존 벤의 응답은 ‘고교회파의 원칙이 아니라 국교회의 원칙’으로 전형적인 성공회 복음주의자였다. 새로이 설립되기 시작하는 해외 피선교지의 성공회 주교직과 CMS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일은 이 단체의 역사에서 주요한 주제들중 하나일 것이다. </p> <p>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노예무역의 폐지뿐만 아니라 인도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표시하였다. 이 두가지 관심사는 19세기초반 선교활동에 활력을 제공하였다. 인도의 경우, 동인도회사(EIC)의 운영권은 SPG처럼 국왕특허장에 의해서 규정되었다. 윌버포스는 인도에 선교사들을 파견하기를 희망하면서, 특허장에 교직의 서임을 포함시키려고 오랫동안 노력하였다. 덴마크의 트랑쿼바와 네델란드의 동인도지방의 정책들과 같은 식민지 모델들을 따라, 1793년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대한 특허장을 갱신할 때에 공식적인 선교사 서임조항을 추가시키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는 동인도회사의 전속사제 임명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동인도회사의 전속사제들은 주로 케임브리지에 있는 찰스 시메온의 사목활동에 영향을 받은 신실한 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중 헨리 마틴(Henry Martyn, 1781-1812)은 그의 학문적인 명석함, 신앙심과 헌신적인 활동으로 가장 뛰어났으나 너무 일찍 사망하였다. 1813년 동인도회사에 대한 새로운 특허장에 따라 캘커타주교-동인도회사 전영토를 관할-로 토머스 미들턴(Thomas Middleton)이 임명되었다. 윌버포스의 소위 ‘경건조항’(Pious Clause)-선교사의 활동을 촉진시키는 조항-은 지속적이고 격렬한 논쟁끝에 포함되었다.</p> <p>이는 19세기에 영향력있는 기관들-식민지 관리자[총독]들 또는 무역상들-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이 선교운동에 항상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나타내는 여러가지 현상들중 하나였다. 새로운 주교[미들턴]는 국왕의 특허장[임명장]이 토착 인도인과 관련하여 권한을 행사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한편으로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곤경에 빠졌다. 그의 계승자인 레지널드 허버(Reginald Heber)는 전임자보다 덜 제한적이었다. 그는 1825년 헨리 마틴이 개종시킨 압둘 마시의 사제서품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사목직을 토착화시키려는 초기 성공회의 선교입장중 한 사례였다면, 데니얼 윌슨(Daniel Wilson)의 주교직(1832-52)은 주교에 의한 국교회 치리구조와 임의단체인 선교회 사이의 지속된 긴장관계를 드러내었다. 이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선교활동을 주도하고 발전시킨 수도회들과 로마의 중앙 통치기구 사이의 긴장관계와 같은 것이었다. 결국 1839년에 CMS의 친구였지만 확고한 체제를 주장하는 주교와 선교회의 런던 위원회 사이의 협정으로 해결되었다. </p> <p>CMS와 SPG는 19세기 동안에 인도에서의 선교활동을 크게 확장시켰다. 이외에도 케임브리지 델리선교회(Cambridge Mission to Delhi)(1877)와 영국성공회 여성선교회(Church of England Zenana Missionary Society, 1880)가 설립되어 인도선교에 가담하였으며, 후에 각각 SPG와 CMS와 합병하였다.<br /> 노예무역은 직접적으로 CMS의 첫번째 아프리카 선교의 계기가 되었다. 재커리 머콜리(Zachary Macaulay)-역사학자인 토머스 머콜리의 아버지-는 1791년에 시에라리온회사를 설립하였다. 이곳은 해방된 노예들의 이주지[식민지]로, 대다수는 영국의 해군 소함대의 활동으로 노예무역선에서 구출된 아프리카인들이었다. 이곳에서의 CMS 선교활동은 T. F. 벅스턴(Buxton)과 같은 자들에게 아프리카를 그리스도교와 상업으로 교화시키고 변모시킬 수 있다는 꿈을 심어주었다. 벅스턴은 그의 책 &lt;아프리카 노예무역과 그 치유책&gt;(African Slave Trade and its Remedy, 1839)에서 ‘선교사들과 학교선생님들, 쟁기와 삽을 결합시켜 [...] 문명을 발전시키며 [...]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 이러한 행복한 변화의 동인이 되도록 하자’고 썼다. 초기에 노예선으로부터 구조된 자들중 한 사람은 새무얼 크로우더였다. 그는 포라베이 칼리지에서 공부한 후 1834년에 사제로 서품받았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또하나의 ‘즐거운 꿈’을 품었다. 즉, 시에라리온으로 이주한 여러 부족민들이 그들의 부족들에 대한 선교사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1843년 현대의 나이지리아인 요루바족(Yoruba)에 대한 CMS선교사가 되었다.</p> <p>미국식민지의 상실이후 영국정부는 범법자들의 추방지를 새로이 찾아야 했다. 정부는 보타니만(Botany Bay, 호주의 시드니 인근)으로 결정하였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보편적인 박애정신으로 이들에 대한 전속사제로 1786년 호주로 자원한 리처드 존슨을 찾았다. SPG와 SPCK는 그의 비용과 장비를 지원하였다. 이후에 새무얼 마즈던(Samuel Marsden)이 합류하였으며, 그는 선교현장으로 뉴질랜드를 목표로 하였다. 마즈던은 CMS를 설득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먼저 이들을 문명화시키고 그후에 선교하였다. 성공회의 선교활동 중에서 북극지방에 대한 선교는 에스키모족들중 약 80퍼센트가 성공회신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초기의 마오리족에 대한 선교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이곳에서 식인종이며 전투적인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메세지에 커다란 응답을 보였으며, 1830년대와 40년대에 그리스도교를 빠르고 즉각적으로 확산시켰다. 또다시 영웅적인 개척자 주교인 셀윈(Selwyn)과 CMS 사이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하였다. 그는 데니얼 윌슨처럼 주교로서의 그의 권한들을 유지하였으며, 그의 경우 이를 선교사들의 배치문제까지 확대시키려고 하였다. 국가의 법적인 기구와 관계없는 교회회의적인(synodical) 치리구조에 대한 그의 사상은 CMS의 본부인 솔즈베리 스퀘어에 있는 전통주의자들을 또다시 경계하게 만들었다.</p> <p>솔즈베리 스퀘어[선교본부들이 있던 런던의 한 구역이름]의 독보적인 인물인 헨리 벤은 19세기 성공회의 지도적인 선교전략가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는 CMS의 설립자들중 한사람의 아들로 1841년부터 72년까지 명예의장(honorary secretary)이었다. 그는 경쟁단체인 SPG의 에드워드 호킨스(Edward Hawkins, SPG의장, 1843-64)와 가깝게 접촉하면서 의견을 같이 하였다. 벤은 자원단체인 CMS를 국내와 국외의 주교직과 해외에 신설되는 주교직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해외의 주교직은 그의 활동시기에 9개에서 50개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벤의 위대함은 무엇보다도 토착[현지]교회에 대한 비젼과 실천에 있었다. 그는 그의 이상들을 CMS를 위해 쓴 일련의 논문들에서 발전시켰다. 첫째로, 토착교회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조직적인 명령에 의해서 설립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방식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토착민 그리스도인들’의 소집단들은 토착민 전도구교회들로 통합되어, ‘자립, 자치 그리고 자기확장[자전]’의 집단이 되어야 한다. 현지선교회의 역할은 [토착교회를 위한] 발판이 되는 것으로 적당한 시기에 해체되어야 하며, 따라서 선교활동의 종결(euthanasia)’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 때에 토착교회는 독립되는 것이며, 선교사들-종종 유럽의 외국인들-은 ‘토착교회 지역을 넘어서’ [새로운 지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토착민 전도구교회들이 발전함에 따라 그들은 하나의 교구를 형성할 것이다. 이러한 토착교회 사상의 ‘완성’(crown)은 곧 토착민 주교일 것이다. </p> <p>벤의 사상은 전도자(evangelist)-‘토착민 지역을 벗어나’ 복음을 설교하는 역할을 수행-와 목회자(‘정착된 교회’를 발전시키는 역할) 사이의 분명한 구별을 전제하였다. 그러나 벤이 1861년 시에라리온에서 그의 비젼을 실천하였을 때, 유럽인 주교는 유럽인들의 식민지잔류를 이유로 계속 남아있었다. 그가 새무엘 크로우더를 설득하여 주교직을 맡도록 하였을 때, 실제로 크로우더는 벤의 계획의 ‘완성’인 정착된 교회의 주교가 아니라 니제르강 지역의 주교로서 주교직을 가진 전도자였다. 안타깝게도 위대한 그리스도인 개척자요, 통역자이자 목회자가 (벤의 의도대로) 아프리카인들의 준비된 지도력의 상징이 아니라, 아프리카인 지도력의 예견된 실패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은 부분적으로 벤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CMS가 서부 아프리카에 들어간지 60년만인 1864년에 아프리카인 주교를 탄생시켰다는 것은 벤의 비젼의 한 증표였다. 이는 토착교회와 토착사목직에 대한 성공회의 바램을 나타내는 또하나의 사례였다. </p> <p>1849년 희년[50주년]을 맞이할 때까지 CMS는 인도, 동부와 서부 아프리카, 뉴질랜드, 카나다 그리고 중국에 350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SPG는 서인도제도(1712), 서부 아프리카(1752), 카나다(1759), 호주(1793), 인도(1818), 남아프리카(1820), 뉴질랜드(1841) 그리고 보르네오(1847)로 선교지역을 확대하였다. </p> <p>인도폭동에서 19세기말까지</p> <p>성공회의 선교역사에서 1857년은 전환점이었다. 이 해에 인도폭동[세포이 항쟁]이 발생하였으며, 그 이후에 정부는 동인도회사를 대체하는 지배권력이 되었다. 아프리카의 경우, 같은 해에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개최되었던 데이비드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의 연설은 특별한 변화를 야기시켰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교 평의원회관(Senate House 강당)의 연설에서 ‘나는 여러분이 아프리카에 관심을 갖기를 간청합니다. 이제야 개방된 그 나라는 이후 몇년안에 나와 인연이 단절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 나라가 다시 폐쇄되지 않도록 하십시요! 나는 무역과 그리스도교를 위한 길을 만들기 위하여 아프리카로 돌아갑니다. 여러분이 제가 시작한 활동을 수행하겠습니까. 나는 이 활동을 여러분에게 맡깁니다!’라고 말하였다. 리빙스톤의 호소에 대한 이상한 결과는 한때 런던선교회 소속이었으나 선교사의 생활을 탐험가의 생활로 대체한 한 스코틀랜드 장로교신자[리빙스톤]가 1858년 위대한 앵글로-가톨릭 선교단체을 설립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점이다. 본래 이 단체의 명칭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중앙아프리카 선교회’(Oxford and Cambridge Mission to Central Africa)였으나, 더럼과 더블린 대학교들의 참여로 영국대학교 중앙아프리카 선교회(Universities’ Mission to Central Africa)로 개칭되었다. UMCA는 운좋게 출발하였다. C. F. 메켄지(Meckenzie)는 1867년에 ‘니아사 호수와 쉬어강 인근에 거주하는 부족들에 대한 선교주교’로 축성받음으로써, 주교가 개척 전도자이자 선교지도자여야 한다는 일부 소책자운동가들의 꿈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메켄지는 곧 말라리아로 사망하였지만, 그의 계승자들인 윌리엄 토저와 어드워드 스티어 주교들은 UMCA의 사업을 강화시켰다. 토저는 선교거점을 잔지바르섬으로 이동시켰으며, 스티어는 아랍 노예시장의 장터에 직접 Christ Church 대성당을 건축하였다. 이후의 주교인 존 하인은 UMCA의 목적을 ‘현지에 거주하는 인종과 나라의 특별한 상황에 맞추어, 유럽의 영향에 관계없이, 이 땅의 백성들의 그리스도교회인 [...] 토착민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p> <p>남아메리카 선교회(South American Mission Society)는 마오리족 선교활동의 위대한 개척자인 헨리 윌리엄스처럼 은퇴한 해군장교출신인 앨런 가디너에 의해서 1844년에 설립되었다. 하지만 1851년 티에라 델 푸에고에서 비극적인 사망[아사] 이후에야 선교활동은 시작되었다. 19세기 동안에 선교활동은 파라과이(1888)와 칠레(1895)에서 시작되었으며, 1900년이후 아르헨티나(1911)와 페루(1974)에서도 시작되었다.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토착민 사목직을 발전시키는 것을 강조하였다. 1937년에 첫 마푸치 인디언이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1966년에 7명의 마타코부족 인디언들이 사제서품을 받았다. 오늘날 이 선교회는 세계성공회의 다른 관구교회들-미국성공회와 남아프리카관구 등-에 지부들을 설립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명칭은 SAMS International을 사용하고 있다. 세계성공회의 한가지 특징은 영국성공회 내에서 설립된 선교회들이 해외의 자매교회들에서도 독립적인 선교단체-예를들면, 호주와 뉴질랜드의 CMS-로 설립되었다는 점이다.</p> <p>지면이 허락하지 않아 19세기 후반부에 활기차게 진행된 성공회의 선교활동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극동지방[동아시아]의 선교활동 초기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여야 한다. 첫째로, 극동지방의 사례는 서구의 전함외교와 무역압력이 그리스도교 선교에 의심스런 이점들을 제공한 경우였다. 먼저 중국은 영국의 압력을 받아 1842년에 조약을 맺으며 무역을 허용하는 특정한 ‘조약항들’을 개방하였으며, 1858년에는 내륙으로의 확대를 허용하였다. 이 조약들의 한 결과로 아편의 무역이 영국의 대중국 정책의 일부가 되었다. 일본도 마찬가지로 고립정책을 사용하였지만,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1854년에 항구들을 개방하였다. 둘째로, 이 두 나라의 경우는 성공회의 선교활동이 이제 더이상 영국에 본부를 둔 선교회들의 독무대가 아니하는 점을 과시하였다. 미국과 카나다 성공회도 이제 고려해야 하는 주요단체가 되었다. 중국의 경우, 미국성공회의 선교사인 윌리엄 분(W. J. Boone)은 1840년 상하이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844년 중국에서 축성받는 주교였다. 이 때문에 CMS와 영국 성공회인들 사이에 교회의 관할권 문제가 제기되었다. 모든 성공회의 선교사들, 언어학자들과 통역자들중 가장 훌륭한 인물중 하나인 유대인 개종자 새무얼 쉬레쉬스키(S. I. J. Scherewschewsky)는 1859년에 중국에 합류하였으며, 1877년에 주교로 축성되었다. `1881년 전신마비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서와 기도서의 북경관화[표준중국어] 번역을 추가하였으며, 또다른 중국어 형식인 ‘easy Wenli’[쉬운 문어체]로도 번역하였다. </p> <p>일본은 미국성공회의 선교사들과 후에 카나다성공회의 선교사들이 SPG와 CMS의 선교사들과 함께 활동한 지역이었다. 각 단체들은 지리적으로 서로 다른 지역을 관할하였다. 채닝 무어 윌리엄스(Channing Moore Williams)-초기 미국선교사-는 1866년에 중국과 일본의 주교가 되었으며, 1869년부터 오사카와 교토에 거주하였다. 에드워드 비커스테트-앞서 언급한 케임브리지 델리선교회에서 활동-는 1886년에 주교로 축성되었으며, 토착화된 일본인 성공회에 대한 그의 비젼은 1887년에 니폰세이코콰이[한자인 일본성공회의 일본어발음]로 실현되었다. 이 교회에는 모든 종류의 성공회적 요소들이 포함되었다. 적어도 한 유명한 성공회 기관인 성바울로학교(교토소재, 1874년에 설립)-오늘날의 리쿄대학교-는 교육기관들을 통한 선교에 대한 성공회적인 접근을 보여주는 사례였으며, 현재도 그러하다. 윌리엄스 주교가 설립자였다. 마찬가지로 유명한 의료기관인 성루가병원(교토소재, 1900년에 설립)은 버지니아의 리치몬드 출신인 루돌프 튜슬러 박사가 설립하였다. 더구나 버지나아출신 선교사이자 주교인 헨리 터커(Henry St George Tucker)-교토주교-는 20세기초에 일본성공회의 자치를 권고하였다. 성공회교회는 일본의 전체인구중 극소수(오늘날 약5만)에 불과하지만, 문화적인 보급은 이들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을 통해서 성취되었다.</p> <p>20세기: 선교회들에서 선교회로</p> <p>세계적인 차원의 선교대회들이 리버풀(1860)과 런던(1888)과 뉴욕(1900)에서 개최되었지만, 1910년 에딘버러에서 개최된 세계선교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는 특별히 중요하였다. 성공회의 경우, 이러한 중요성은 켄터베리 대주교인 랜덜 데이비슨의 참석으로 상징되었다. 그는, SPG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성공회 내의] 모든 입장들을 완전히 대표하지 않을 수도 있는 대회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였다. 사실상 다양한 성공회의 입장들이 표현되었다. 찰스 고어주교, 거룩한 선교회(Society of the Sacred Misson)의 허버트 켈리(Herbert H. Kelly, 당시 한국에 파견하는 성공회선교사 후보자들을 훈련시키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SPG의장인 몽고메리주교, CMS 선교사이자 아랍을 연구하는 학자인 템플 가디너(이 대회에 관한 그의 책은 널리 독서되었다), 그리고 젊은 간사인 윌리엄 템플 등이 참여하였다. ‘신생[선교지] 교회들’의 지도자들 중에서 이후에 인도성공회의 노나칼교구 주교가 되는V. S. 아자리아(Azariah)도 참석하였다. 데이비슨 대주교는 대회의 연설에서 성공회의 대표자로서, ‘교회의 생활에서 선교회들의 자리는 반드시 중심적인 자리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아자리아는 국가적인 지도자들과 해외의 선교사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즉, ‘다가올 모든 시대를 통해서 인도의 교회는 성장하여 선교회의 영웅적인 활동과 희생적인 노력들을 감사하며 증언할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재산으로 가난한 자들을 보살펴 왔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육신을 불태웠다. 우리는 [여러분께] 사랑을 요청하며, 우리에게 친구가 되어 달라.’ </p> <p>기존의 선교방식을 비판하는 또하나의 목소리는 SPG의 선교사이자 저술가인 롤랜드 앨런(Roland Allen, 1868-1947)으로부터 제기되었다. 그는 1912년 &lt;Missionary Methods: St Paul’s or Ours?&gt;를 출판하였다. 그는 [선교의] 목적이 교회이식[설립]인가 선교활동의 영구화인가를 질문하였다. 서구교회의 선교사들은 성 바울로와는 대조적으로 지역교회에게 건강한 발전에 필요한 완전한 영성적 권위를 부여하는데 실패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앨런은 마찬가지로 선교회들과 거대한 ‘국가단위의’(national) 교회[국가교회]들을 의심하였다. 이 두가지 기관들은 지역교회에서 하느님의 선물들[은사들]이 발전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는 선교회들이나 국가교회들이 강요하는 정통교리들과 외적인 행정기구들에 반대하며, 성령에 대한 보다 커다란 신뢰를 요구하였다. 선교사들은 개종자들이 그들을 지나치게 의존하게 만들었다는 그의 비판은 위대한 선교사인 존슨(W. A. B. Johnson)의 죽음에 대한 시에라리온 개종자의 논평을 상기시킨다. 즉, ‘우리는 예수님보다 존슨님을 더욱 의지하였습니다.’ 앨런에게 이것은 결정적인 고발장으로, 성바울로는 지역의 원로들에게 지도력을 이양하고 새로운 지방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결점이 없었다. </p> <p>이 글에서 제1차 세계대전으로 비그리스도교인들에게 제기된 심각한 질문들을 지적하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계대전은 소위 그리스도교 국가들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1차와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잉글랜드에서 일부 CMS지지자들은 이 선교회의 지도자들이 자유주의적인 경향으로 변하고 있다고 경계하며 성서선교회(Bible Churchmen’s Missionary Society)를 창립하였다. 이러한 분할은 1922년에 발생하였다. BCMS(오늘날 명칭은 Crosslinks)는 버마, 중국, 이란, 인도, 북극지방, 카나다, 동부 아프리카 그리고 모로코에서 활동하였다. 한편 일부 지방에서는 개종이나 분열보다 초기[고대]시대 그리스도교회를 복원하려는 성공회의 노력을 나타내는 유명한 사례들이 있었다. CMS는 특히 1820년대와 30년대에 인도 남부의 말라바르 해안지방에 있는 옛 시리아정교회들(Syrian Malabar Church) 사이에서 활동하였다. 에디오피아에서 BCMS는 초기교회인 이집트정교회(Coptic Church)와 함께 활동하였다. BCMS의 알프레드 벅스톤은 1931년 에디오피아를 방문하여 ‘복음화의 활동에서 이 선교회에 부과된 몫을 [...] 수행하기 위하여 [...] 이 초기교회를 격려하고 돕는 것이 온당한 정책일 것이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계속적으로 추진되었다. 동부 아프리카의 경우, 영적 부흥운동은 교회생활의 쇄신을 촉진시킴으로써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발로콜레(balokole) 또는 ‘구원받은 백성들’ 운동은 1930년대 동안에 그 영향력을 동부 아프리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루완다 선교회-조 처치(J. E. Church) 박사가 유명한 회원이었다-는 CMS와 계속해서 제휴하였으나, 지지자들에게는 루완다 CMS로 알려졌다. </p> <p>윌리엄 템플 대주교가 1942년 켄터베리 대주교직에 취임하였을 때, 그는 전세계의 모든 주요 인종집단들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존재한다는 점을 ‘우리시대의 위대한 새로운 사실’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는 선교회 운동에 대한 적합한 찬사였으며, 또한 새로운 미래를 지적하였다. 즉, 1958년 람베스회의의 표현대로 ‘“국내”와 “국외”를 나누는 국경이 없는 전세계에 대한 선교’였다. 1963년 토론토에서 개최된 세계성공회회의(Anglican Congress)에서 마이클 램지 대주교는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의 선교를 함께 계획하고, 단일한 과제를 실천하기 위하여 우리의 자원들을 사용하여야 한다. “선교사”라는 용어는 이제 일종의 식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돕는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선교사들이 잉글랜드에 와서 우리나라에 있는 후기 그리스도교시대의 이교사상[무종교]을 개종시키는 활동을 지원하며, 우리 잉글랜드인들의 교회를 그리스도의 보다 충실한 추종자가 되도록 지원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p> <p>이러한 ‘하나의 세계’라는 측면은 다른 위대한 종교적 전통들에 대한 인식의 성장을 나타내며, 이슬람교와 힌두교와 불교에 대한 신뢰는 1950년이후 종종 민족주의적인 열망과 연계되었다. 이후에, 이것들 외에 ‘선교사 파견국가들’ 내에도 다른 인종들과 종교들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종교간의 관계들에 대한 선구자적인 연구는 성공회 학자이자 이슬람교에 대한 심오한 연구가인 케네스 크랙 주교의 &lt;Call of the Minaret&gt;(1956)에서 시작되었다. 이 책은 CMS의장인 맥스 워렌을 크게 감동시켰다. 그는 다른 위대한 종교적 전통들에 대한 성공회 학자들의 연구서들을 ‘Christian Presence’라는 시리즈로 직접 편집하였으며, 시리즈 전체 서문에서 다른 종교의 신앙들에 대한 적합한 접근방법으로 크랙의 대화방식을 지지하였다. 즉,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이슬람교도, 힌두교도와 불교도들의 체험에서 진정한 종교적 내용이 무엇인지 또는 그들의 신의 존재가 무엇이든 [...] 그들과 함께 “현존”하는지를 묻기 위하여, 우리의 신발을 벗는 것이다 [...]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의 꿈들을 짓밟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비그리스도교와의] 대화를 가톨릭신자들이 ‘이들 사이에서 발견한 영성적 도덕적 자산을 보존하고 증진시키는’ 수단으로 인식한 시기였다(Nostra Aetate). 잉글랜드에서는 1976년 세계 이슬람교축제(World Festival of Islm)의 개최장소인 영국에서 데이비드 브라운 주교-크랙처럼 이슬람교 학자이자 연구자-는 연구서인 <a>(1976) [새로운 출발점]를 출판하여 널리 인정받았다. 그는 이 책에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이슬람교의 집회로 당황한 사람들을 안내하려고 노력하였다. 선교단체들은 BCMS/CMS공동으로 Other Faiths Theological Project(타종교 신학프로젝트, 1979년, 스티븐 닐 주교를 첫 위원장으로)의 설립으로 응답하였다. 또한 연속적인 람베스 타종교 강좌(Lambeth Inter Faith lectures)는 이 문제의 중요성을 지적하였다. </p> <p>전체 세계성공회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협의기구인 세계성공회협의회(Anglican Consultative Council)가 1971년 케냐의 리무루에서 개최되었다. 이 협의회에는 모든 성공회 관구교회들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였고, 켄터베리 대주교가 의장이었다. 이 모임 또한 대화를 추천하며, ‘대화는 단순히 또다른 형태의 복음화가 아니라, 각자가 [...] 대화 당사자일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후 연속적으로 개최된 ACC 회의들-더블린(1973), 트리니다드(1976), 온타리오(1979), 뉴카슬(1981) 그리고 바데그리(1984)-은 ‘Partners-in-Mission’협의기구를 설립하여 그 결정사항들에 따라 선교를 수행하였지만, 20세기에 변화된 선교의 본질을 강조하였다. 즉, 더블린 보고서의 표현대로, ‘전세계에는 단 하나의 선교만이 있다 [...] 어느 한 장소에서 선교에 대한 책임은 기본적으로 그 장소에 있는 [지역]교회에 속해있다.’ 한편 스티븐 닐 주교는 1964년에 ‘선교회들의 시대는 종결되었으며, 이제 [지역교회가 주도하는] 선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썼다. </p> <p>미래를 위한 제언들</p> <p>이 글은 성공회의 주요한 선교단체들의 역사를 주로 다루었다. 이들 단체들의 설립이후부터 이들 단체들을 관구교회내의 선교국으로 통합하라는 요구들이 항상 있었다. 새무얼 윌버포스 주교는 19세기에 이러한 정책의 옹호자였으며, 20세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를 주장하였다. 1978년 런던에 본부를 둔 Partnership for World Mission[세계선교 협의회]의 설립은 자원단체들의 강점들을 결합시켜 하나의 대표부 만들어, 이들과 해외의 성공회 교회들과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였다. 왜냐하면 해외의 성공회 교회들은 개별적인 선교단체들보다는 이러한 대표적인 기구와 먼저 대화하기를 선호하였기 때문이었다. 1981년 잉글랜드에서 개최된 Partners-in Mission[선교협의회]의 표현대로, ‘선교 자원단체들은 그들의 정체성과 유연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교회의 구조들과 통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선교 자원단체들은 전도구교회 차원에서 신앙적 열정과 개인적인 참여를 촉진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잃지 말아야 한다.’ 앞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CMS와 CEZMS가 통합하였으며, 그리고 SPG와 CMD와 오늘날의 UMCA 도 통합되었다. 1965년 이후로 SPG와 UMCA는 합병하여 USPG로 개칭하였다. 1986년에 CMS, USPG와 PWM은 런던의 같은 건물에 입주하였다. </p> <p>선교 자원단체와 교회의 구조들 사이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며, 오늘날에는 앞에서 언급한 SAM international의 경우뿐 아니라 Church’s Ministry to Jewish people[영국성공회의 유대인 사목국]의 경우도 국제적인 차원을 포함한다. ACC가 Partners in Mission[선교협의회]를 설립함으로써, 미국성공회의 선교국 사무총장은 CMJ의 미국성공회내 설립을 요청하였으며, 이에따라 1982년에 설립된 CMJ/USA는 버지나아주 페어팩스에 본부를 두고 있다. 하지만 미국성공회나 스코틀랜드교회 (장로교)처럼 선교활동을 교회의 중앙기구들에서 실행하는 세계성공회의 관구교회들이 선교단체들의 새로운 사업들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질 것인가는 앞으로 지켜봐야할 문제이다. 한편으로 선교단체들은 인력과 재정과 사상을 세계성공회 공동체와 서로 교환함으로써 그리고 말과 행동으로 전체 교회와 선교회의 소명을 결합시킴으로써, 스스로 세계성공회 전체의 선교적 필요성들에 응답하는 기구로써 그 기능과 역할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델을 제공하는 사례는 호카이도교구가 추진하였던 쇄신프로그램으로, 선교사로 동부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이 참여하고 런던의 CMS가 재정지원을 담당하였다. 이때에 소통의 수단으로 영어를 공통적인 언어로 사용하는 것은 선교에 참여한 자들의 재량에 맡겨야 하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1989년 이후로 동유럽의 교회들은 성공회의 지원을 환영하였다. 성공회(CMS) 선교협력자들은 성 페테스부르그와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의 초청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으며, 의료와 사목과 청소년선교의 분야에서 루마니아 정교회를 지원하고 있다. </p> <p>이외에도 이 결론부분에서 두가지 사항을 더 고려하고 싶다. 첫째로, 선교활동은 제2차 바티칸회의의 문서인 Ad Gentes의 지적처럼 약20억의 인구가 비그리스도인인 세계에서 세계성공회의 주요 의제로 계속 남을 것이다. 여기서도 이 글의 시작에서 언급한 기도서의 본래적인 통찰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즉, 선교적인 책임은 비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살고있는 성공회 신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성공회 교회는 존재하는 지역에서 곧 선교회이다. 에밀 브루너의 표현처럼 ‘불이 활활 타오르면서 사는 것처럼 교회는 선교로써 살아간다’. 둘째로 성공회 교회는 전세계 그리스도교(Church Universal)과 함께 시각의 급격한 변화를 겪고있다. 세계성공회의 가장 활발한 교회들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에 있다. 이 교회들의 목소리는 세계성공회 협의체들에서 점차적으로 영향력을 증대시킬 것이며,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부유하지만 활기를 잃은 북반구 교회들-그들의 입장에서 볼때, 지나치게 지성화된 신학적 전통과 약화된 영성 때문에 활기를 잃은 교회들-의 성공회신앙에 건강한 개선책으로 작용할 것이다. 마이클 램지 대주교가 토론토에서 제안한 것처럼, 세계성공회의 신생교회들의 활력은 그들의 선교활동으로 기존의 교회들을 소생시킬 필요가 있다. 1990년 나이제리아 성공회의 10개의 ‘선교교구’설립, 1997년 나이제리아 성공회의 자체 선교회(Church of Nigeria Missionary Society) 설립, 이와 유사한 아시아 성공회교회들의 이웃 아시아 지역으로의 선교활동(사바와 싱가포르의 경우), 그리고 세계성공회를 위한 상설 선교위원회(MISSIO, 1994)의 설립은 대주교의 예견대로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여 선교활동에 대한 성공회내의 새로운 활력을 주는 증표들일 것이다.</p> <p>참고문헌 </p> <p>Dewey, M., The Messengers. London, 1975.</p> <p>Gibbs, M. E., The Anglican Church in India 1600-1700. Delhi, 1972.</p> <p>Hewitt, G. H. G., The Problems of Success. London, Vol. i 1972; Vol. ⅱ 1977.</p> <p>Jacob, W. M., The Making of the Anglican Church Worldwide. SPCK, London, 1997.</p> <p>McLeod Campbell, J., Christian History in the Making. London, 1946.</p> <p>Murray, J., Proclaim the Good News. London, 1985.</p> <p>Nazir-Ali, M., From Everywhere to Everywhere. Collins, London, 1990.</p> <p>Neill, S. C.,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London, 1964.</p> <p>Stock, E., The History of the Church Missionary Society. 3 Vols., London 1899; Vol. ⅳ, London 1916.</p> <p>Thompson, H. P., Into All Lands. London, 1951.</p> <p>Warren, M. A. C., The Missionary Movement from Britain in Modern History. SCM, London, 1965.</p> <p>Yates, T. E., Christian Mission in the Twentieth Century. London, 1994.</a> </p> Cranmerian on "The Study of Anglicanism-An Essay on Terminology"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021#post-1906 월, 28 1월 2013 04:14:25 +0000 Cranmerian 1906@http://liturgy.skhcafe.org/ <p>Anglicanism, Ecclesia Anglicana, Anglican:용어에 대한 단평 </p> <p>J. Robert Wright</p> <p>성공회신앙(Anglicanism)에 대한 연구는 역사적으로 어느 시점에서 시작할 수 있고, 시작해야 하는가? 논리적으로 대답한다면, ‘Anglicanism’이라는 말이 하나의 사상으로 기록되어 존재하기 시작한 최초의 시점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종종 씌여진 문자로 나타나기에 앞서 구술적으로 먼저 사용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그리고 보수적인 편집원칙들을 견지한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옥스포드 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 약어로 OED) 1933년판은 1846년 찰스 킹슬리(Charles Kingsley)에 의해서 ‘Anglicanism’이란 용어가 최초로 씌여졌다고 기록하였으며, 1972년 증보판에서는 이 시점을 1838년의 존 헨리 뉴먼으로 소급시켰다. 따라서 실질적인 의미, 즉 당대인들이 이 용어의 존재를 인식하였다는 의미에서 ‘Anglicanism’에 대한 연구는 겨우 19세기에서야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은 이 용어가 이보다는 더 넓고 깊은 의미를 나타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Anglican Communion’이란 용어가 대서양의 양편에서 1851년에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확실히 이 시점까지 형용사형인 ‘Anglican’이란 용어는 ‘잉글랜드의’ 또는 잉글랜드교회에 관련된’이라는 의미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교회론적으로 그리고 보다 넓은 의미로 ‘역사적으로 잉글랜드교회로부터 전해오는’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p> <p>과거의 Anglicanism이란 용어의 최초 사용은 뉴먼의 &lt;Apologia&gt;(1864)에 기록되었다. 즉, ‘성공회신앙은 잉글랜드교회가 옛날에 아타나시우스와 어거스틴이 신자들이었던 하나인 그리스도교회가 [...] 이 나라에서 계속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또한 현대의 성공회 저술가들은, 이 단어의 사실적인 사용에 대해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Anglicanism’이란 개념에 대한 연대기적인 시각을 소급시키고 있다. 현대 성공회 신학자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존 맥코리(John Macquarrie) 교수는 ‘Anglicanism은 16세기에 시작될 때 스스로를 종파 또는 교파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으며, 1300여년 이전에 [켄터베리의] 성 어거스틴이 설립한 Ecclesia Anglicana를 단절없이 계속 유지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이 교파는 잉글랜드의 경계를 넘어 널리 확산되고 있다’고 썼다(1970). 그리고 성공회의 신학방법론에 대한 주창자인 H. R. 맥아두(McAdoo) 주교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1965).</p> <p>‘성공회신앙(Anglicanism)은 신학적인 체계가 아니며, 그리고 어느 특정한 저자의 저술을 이 신앙[그것의] 근본적인 부분으로 또는 이 신앙[그것]의 자기표현의 형태나 내용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 성공회신앙(Anglicanism)에서 공식적인 신학의 부재는 이 신앙의 본질적인 성격에 속하는 의도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성공회신앙은 항상 첫 5세기 동안의 분열되지 않았던 그리스도교회의 가르침과 실제(신앙활동practice)을 표준으로 존중하기 때문이었다.’ </p> <p>먼저 이처럼 ‘공식적인 신학’의 거부는 OED가 내린 성공회신앙의 정의인 ‘보편적인 그리스도교회(Catholic Church)의 순수한 상속자인 개혁된 잉글랜드교회(그리고 이와 상통하는 다른 교회들)의 교리와 권징을 따른다’는 설명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OED의 정의는 오늘날 널리 주장되는 것과 일치한다. 예를들면, 맥코리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p> <p>‘성공회신앙은 그 자체로 특별한 교리들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단순히 그리스도교회의 보편적인 가르침을 따른다고 주장한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주장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찾아 볼 수 있다. 잉글랜드에서는 루터나 칼빈처럼 지역교회에 자신의 신학적인 특징들을 각인시킬 수 있는 유일한 주도인물이 없었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의식적인 목표는 첫 5세기 동안의 분열되지 않았던 그리스도교회로 가능한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p> <p>그리고 고 스테판 닐 주교는 그의 베스트셀러인 &lt;성공회신앙&gt;(Anglicanism, 1958)에서 더 나아가 ‘특별한 성공회적인 교리들은 없으며, 특별한 성공회적인 신학도 없다 [...].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성공회적인 신앙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보다 공식적인 수준으로 1930년 람베스회의의 ‘세계성공회’ (Anglican Communion)에 대한 보고서는 이 회의의 결의안(Resolution) 48에서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이 결의안은 언뜻보면 성공회적인 교리에 관하여 근본적으로 새롭고 독특한 것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신앙을 근본적으로 맥코리와 맥아두 그리고 닐과 같은 방식으로 정의하였다. </p> <p>‘우리는 ‘성공회적인’(Anglican)이란 용어가 더 이상 본래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싶다. 대헌장에 나오는 ‘Ecclesia Anglicana’ (잉글랜드의 교회)라는 구절은 순수하게 지역적인 의미를 내포하였다. 오늘날 이 용어는 교회론적이며 교리적인 의미를 말하며, 세계성공회(Anglican Communion)는 인종적으로 잉글랜드와 관계있는 자들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교회가 항상 표방하는 교리들과 이상들에 근거한 신앙을 가진 자들을 포함한다.<br /> 이러한 교리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보편적 신앙(Catholic faith)을 온전하게 그대로 보존한다. 즉, 성서에 포함되고,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에서 진술되고, 여러지방에서 지역적으로 채택한 공동기도서에서 발표된 것처럼 복음의 성사들과 초기교회(Primitive Church)의 예식들에서 표현되며, 그리고 역사적인 세가지 사목직에 의해서 보호되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말한다.’</p> <p>1948년 람베스회의의 ‘세계성공회’(Anglican Communion)에 대한 보고서는 똑같은 주제를 반복하였다. 즉, ‘잉글랜드의 개혁가들은 새로운 교회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 교회는 1215년 대헌장에서 표현하였던 것처럼 바로 그 Ecclesia Anglicana인 잉글랜드교회였다. 이러한 이유로 세계성공회는 종파가 아니며, 보편적 교회(Church Catholic)의 진정한 일부이다.’ </p> <p>따라서 우리는 임시로 성공회신앙에 대한 연구를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된 1838년 무렵보다 더 이른 시기에 시작하여야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질문은 이보다 얼마나 앞선 시기인가? 오늘날과는 상황이 다르지만, 리처드 후커의 질문으로 ‘우리의 교회[잉글랜드교회]는 어디에 숨어있었는가, 마틴 루터가 출생하기전 수백년 동안에 이 지상의 어느 동굴에서 잠자고 있었는가?’(Ecclesiastical Polity Ⅲ.i.10). 1930년과 1948년의 람베스회의들뿐 아니라 맥코리와 맥아두가 주장하였던 연속성은 성공회신앙의 요점들을 19세기 이전으로, 더 나아가 종교개혁 이전으로, 적어도 6세기에 켄터베리 교구를 설립한 시기까지, 더 나아가 역사적으로 교부시대[초기교회시대]까지그리고 교리적으로 신약성서 시대까지로 소급하여 이해하는 것으로 인식하여야 한다. 물론 최근 몇년동안에 초기교회 시대의 브리톤[영국섬]에서 고고학적인 증거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실체스터의 바실리카 건물(Silchester basilica), 힌톤-성마리아(Hinton-St Mary)의 모자이크, 셉톤 멜리트의 십자가, 워일즈비와 이크링햄의 납으로 만든 세례조, 워터와 밀든홀의 은으로 만든 귀중품들, ‘주기도문’을 새긴 사각 글자판 등은 2, 3, 4세기들에 영국섬의 그리스도교의 역사적인 기원들을 폭넓게 암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권위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성공회신앙이 이러한 초기시대의 교회들과도 근본적으로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동의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아마도 일부 변화가 있었으며, 대다수는 잉글랜드의 종교개혁때에 있었으며, 따라서 당시와 오늘날 성공회의 권위자들이 요점들이라고 인정하는 일부 새로운 교리들 또는 강조점이 있었기 때문에, 현대의 해설가들은 ‘성공회신앙’의 개념을 추적하는데 1838년을 넘어 16세기까지 되돌아 가지만 그 이상은 아니지 않은가? 일부의 주장처럼, 사실상 성공회신앙의 독특성은 오직 16세기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말로 사실인가? 보다 구체적으로 종교개혁의 시대에 ‘잉글랜드교회’(Church of England)는 잉글랜드에 있던 교회(Church in England)를 대체하였는가? </p> <p>한가지 중요한 견해는 훌륭한 역사가인 A. G. 디킨스(Dickens) 교수의 입장으로, 그는 1964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p> <p>‘중세기의 일반적인 용어인 Ecclesia Anglicana는 종교개혁이후 로마교회와의 동등성을 주장하는 독립적인 국가단위의 교회(national Church)를 의미하는 ‘잉글랜드교회’(Church of England)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중세기의 잉글랜드교회는 어떠한 실질적인 제한조건이 있었더라도 교황청의 신앙적인 지배권과 관할권을 인정하였으며, 이 교회의 법원들은 교황의 교령들과 세계적인 교회회의[공의회]들의 교회법들에 근거한 법률들을 집행하였다. 오직 주변적인 문제들, 예를들면 십일조세와 유언장의 검증과 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이 법은 잉글랜드의 국가적인 관습을 반영하여 수정되었다.’ </p> <p>디킨스 교수의 입장은 그대로 수용되지는 않았지만, 공식적인 잉글랜드/성공회적인 입장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대비는 영국성공회 전국총회(Church Assembly, 1957)를 위하여 편집된 핼즈베리의 &lt;잉글랜드의 법률들&gt;(Laws of England)중 &lt;교회법&gt;(Ecclesiastical Law)이란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p> <p>‘법적으로 잉글랜드교회(Church of England)는 [...] 잉글랜드인들이 597년에서 686년 사이에 점차적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잉글랜드에 설립된 거룩한 공교회이자 사도적인 교회의 지체(branch)이며 [...]. 일반적으로 인정된 법적인 교리는 잉글랜드교회가 색슨시대에 설립된 최초의 교회들부터 내려오는 연속성을 가진 교회이며 [...]. 헨리8세의 치하에서 교황의 관할권을 배제하는 법률들을 통과시켰을 때, 잉글랜드교회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상태의 교회로 인식되었으며,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회중들과 달리할 의도가 없었으며, 다만 잉글랜드에 대한 교황의 권위는 권리침해로 인식되었다.’ </p> <p>이러한 이해들과는 대조적으로, 19세기말에 발생한 중세말기 잉글랜드에서 교황의 교회법의 지위에 대한 스터브스-메이틀랜드 논쟁이 되풀이되는 것을 알고있다. 이 고전적인 논쟁을 이 짧은 글에서 다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와 관련된 현대의 연구들로부터 오늘날 성공회신앙의 연구를 얼마나 빠른 시점부터 할 수 있는가의 질문과 관련된 몇가지 사항을 관찰할 수 있다. 첫째로, 오늘날에 분명하게 확립된 사실로 중세기의 일반적인 표현이었던 ecclesia Anglicana(대헌장에 나오는 ‘quod Anglicana ecclesia libera sit’구절처럼 문자적으로 ‘잉글랜드인들의 교회’ [English church]라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중세말기의 잉글랜드인들에 의해서 ‘잉글랜드교회’(Church of England)로 번역되었다. 또한 라틴어로는 1290년부터 ‘ecclesia de regno Angliae’로, 프랑스어로는 1341년부터 ‘eglise Dengleterre’로, 그리고 영어로는 14세기말부터 ‘chirche of Engelond’로 사용되었다. 둘째로, ecclesia Anglicana라는 표현은 1173년 교황 알렉산더 3세에 의해서(‘잉글랜드에 설립된 대주교들, 주교, 그리고 다른 주교들과 모든 성직자들과 백성들’), 그리고 1195년에 허버트 월터 대주교에 의해서 (‘하느님께서 잉글랜드에 세우신 서방교회의 한 부분’) 똑같은 정의로 사용된 용어였다. 세째로 ecclesia Anglicana는 또한 바로 이 당시에[12세기] 잉글랜드뿐 아니라 웨일즈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네째로 ecclesia anglicana에 상응하는 다른 교회들이 있다는 점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1434년 헨리 치첼(Henry Chichele) 대주교에 의해서 인정되었다. 즉, 그는 잉글랜드교회를 옛날에 ‘다른 교회들보다 뛰어난’교회였다고 말하였다. 다섯째로, ecclesia anglicana라는 표현은 (때때로 잘못 알려진 것과는 달리, 즉 1215년 대헌장이 아니라) 12세기 중반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때에 이 표현은 기존의 표현들로 성 안셀름의 편지들에서 나타난 ecclesia Angliae(‘잉글랜드교회’), 그리고 12세기초 에드머(Eadmer)의 &lt;Historia Novorum&gt;에서 또는 이보다 앞서 비드(Venerable Bede)의 &lt;Ecclesiastical History&gt;에서 사용되었던 ecclesia Anglorum을 대체하였다. 여섯째로, 라틴어 형용사형인 Anglicanus는 9세기말에 처음 기록된 명사형인 ‘Angle-land’에서 유래한 것으로 중세기에 ‘잉글랜드의’ (English)를 분명하게 의미하였다. 교회에 관한 경우 이 용어는 지리적인 언급을 나타냈으며, 어떤 교리적인 제한 또는 특이성을 의미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옥스퍼드 영어사전으로 되돌아오면, 라틴어로 Anglicanus로 번역되는 ‘Anglican’이라는 형용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최초의] 의미는 정확히 같은 의미 즉, ‘교회론적으로 잉글랜드의, 또는 잉글랜드에 특유한’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두번째 의미는 단지 ‘개혁된 잉글랜드교회, 그리고 이 교회와 상통하는 다른 교회들에 관한’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표현에는 특별한 교리적인 정의를 포함하지 않지만, 이 용어의 지리적인 언급[의미]은 또한 오늘날 세계성공회를 구성하는 신자들의 다문화적이며 다인종적인 다양성과 모순되지 않는다.</p> <p>‘성공회신앙’이라는 용어는 19세기 이전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지만, 여러가지 번역들에서 나타나는 ‘Anglican’(잉글랜드의)와 ‘Church of England’(잉글랜드교회)라는 용어들은 중세기부터 근대까지 계속적으로 그리고 일관되게 비교리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공회신앙’에 대한 연구를 어느 시점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확실히 1838년은 아니다. 만약 이 용어가 좁은 의미나 규범적인 의미가 아니라 설명적으로 사용된다면, 성공회신앙은 궁극적으로는 개념적으로/교리적으로 신약성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며,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는 ‘잉글랜드의’(Anglican) 교회역사의 ‘초기시대’로 성 알반[알바누스]의 순교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녀와 백성들이 ‘어떤 새롭고 낮설은 신앙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원시교회와 공교회(Catholic Church)가 승인하고, 그리고 대다수 초기 교부들이 승인한 바로 그 신앙을 따른다’고 말하였다. </p> Cranmerian on "번역 : The Study of Anglicanism-What is 'Anglicanism'?"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020#post-1905 토, 12 1월 2013 04:54:54 +0000 Cranmerian 1905@http://liturgy.skhcafe.org/ <p>‘성공회신앙’이란 무엇인가?<br /> Paul Avis</p> <p>성공회신앙(Anglicanism)이란 무엇인가? 성공회신앙은 세계성공회 공동체(Anglican Communion) 교회들의 신앙과 신앙활동(실제practice)와 정신(spirit)(또는 교리, 직제order와 예배)으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현상학적인 방식의 정의로는 엄격하고 비판적인 교회론의 요구들에 적합하지 않다. 우리는 이 무미건조하고 서술적인 정의에 의심의 해석학[해석학적인 의심]을 적용시켜 다음과 같이 질문할 필요가 있다. 즉, 세계성공회의 신앙과 실제와 정신이 단순히 역사의 우연한 사건들의 산물인가, 즉 편의라는 이유들로 우연히 발생하여 결과적으로 나타난 것들의 정당화[합리화]인가? 그리고 이 때문에 성공회신앙의 신앙과 실제와 정신은 미래에도 이와 똑같이 우발적이고 비이성적인 역사적인 조건들(forces)에 의해서 그 구성요소들로 분해될 운명인가? 아니면, 성공회신앙이란 어떠한 순수한 교회론적인 진리나 원리를 어느정도 영속적인 타당성을, 그리고 전체 그리스도교회에 공헌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인가? 이 질문을 보다 분명하게 표현한다면, 성공회신앙은 단순히 부도덕한 앵글로-색슨 제국주의의 쇠퇴한 유산인가, 아니면 성공회신앙은 그리스도교의 본질, 즉 그리스도교의 복음에 근거하며 그 안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찾을 수 있는가?</p> <p>성공회 교회론의 딜레마를 이러한 방식으로 질문하는 모호한 표현은 윌리엄 템플의 논평-잉글랜드만큼 추상적인 원리들을 가장 적게 주장하면서 종교개혁을 성취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에서 가장 잘 지적되었다. 우리는 아마도 템플의 주장에 동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 진리의 발전론적인 이해(하지만 이는 물론 개혁가들이 이해한 방식은 아니다)와, 개인적인 양심의 주장들에 대한 존중(이는 확실히 개혁가들에 의해서 어느정도 인정되었다)을 주장하는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잉글랜드 종교개혁-적어도 헨리와 엘리자베스 치하에서-이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운동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운동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잉글랜드교회는 다른 교회들보다 교의적인 규정들에 덜 얽매이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감사해야할 일이다. 그러나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상황이 단순히 한 교회에 계기를 제공하고 그 외적인 형태의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이러한 설명은 한 교회의 정의나 존재이유를 제공할 수 없다. </p> <p>1. ‘Anglican’ ‘Anglicanism’이란 용어</p> <p>‘Catholic’과 ‘Protestant’라는 용어들처럼, ‘Anglican’과 ‘Anglicanism’ 이란 용어들도 과거의 신학적인 논쟁이 종종 ‘밀랍으로 만든 코’(nose of wax)-자신의 요구사항들에 맞게 임의로 만들 수 있는 것-라고 불렀던 것을 나타낸다. 확실히 성공회신앙의 개념은 서로 다른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들과 정의들로 커다란 논쟁을 만든다. 그러나 이 용어들이 어원적으로 라틴어인 Anglicanus(English 잉글랜드인들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Ecclesia Anglorum(‘잉글랜드인들의 교회’)라는 표현은 7세기초 켄터베리의 어거스틴에게 보내는 교황 그레고리1세(Gregory the Great)의 편지들에서 사용되었다. Ecclesia Angliae(‘잉글랜드의 교회’)라는 표현운 11세기말과 12세기의 첫번째 10년에 안젤름에게서 발견된다. Ecclesia Anglicana라는 표현은 12세기 중반부터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며(예를들면, 베킷의 편지와 솔즈베리의 존에서), ‘잉글랜드교회’(Church of England)라고 번역되었다. Anglicana ecclesia라는 표현은 대헌장(1215)에서 Quod Anglicana ecclesia libra sit(‘잉글랜드교회는 자유로울 것이다’[국왕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라는 진술문에서 나타난다. </p> <p>당시에 ‘잉글랜드의 교회’라는 표현은 민족주의적인 또는 심지어 애국주의적인 의미를 포함하지 않았다. 이 표현은 단순히 지리적인 의미(때때로 웨일즈 포함)로 잉글랜드에 위치한 서방교회의 관구들(참조; Anglicana provincial)을 언급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Ecclesia Gallicana(갈리아[프랑스] 지방교회)는 프랑스에 있는 교회에 대한 지역주의적인(Gallican) 의미를 포함하지 않았다. 더구나 ecclesia Anglicana[잉글랜드의 교회]는 국왕의 통제로부터 보호받기 위하여 교황권에 의지하였으며, 국왕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함으로써 교황에 복종하게 되었다. 대헌장은 후대의 잉글랜드교회 프로테스탄트들이 애용하였던 해석과는 정반대로, 교황의 통제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국왕의 간섭으로부터 잉글랜드교회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p> <p>종교개혁때에 대헌장의 선례는 다시 언급되고 해석되어(사실상 반대방향으로) 외국의(즉, 교황의) 관할권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개혁된 잉글랜드교회의 주장들을 강조하였다. 즉, 과거에는, ‘다양한 여러가지 옛 인증된[정본] 역사서들과 연대기들’이 증언하였듯이, 잉글랜드의 교회는 초기교회 시대와 같은 자유와 독립을 누렸으나, 최근에 로마주교의 찬탈로 이를 박탈당하였다. 따라서 국왕수장권을 확언하는 1534년의 법률[국왕수장권법-역자]은 국왕(헨리8세)을 ‘Anglicana Ecclesia로 불렸던 잉글랜드교회의 유일한 지상의 수장(supreme head)’이라고 말하였다. 존 주얼(솔즈베리 주교)은 잉글랜드 종교개혁에 대한 그의 변증서에 &lt;Apologia Ecclesia Anglicanae&gt;라는 제목을 붙였다. 처음부터 모국어로 자신의 주장을 서술한 리처드 후커의 경우, 이 용어는 ‘잉글랜드교회’(Church of England)였다. </p> <p>‘Anglican’이란 용어는 17세기 중반에 처음 사용되었지만, 18세기와 19세기에 이르러 이 용어는 국가적인 의미들을 포함하기 시작하였으며, 보다 구체적으로 독특한 신학적인 입장을 가르키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버크는 ‘Catholics, Anglicans or Calvinists’[천주교도나 잉글랜드교회 신자나 칼빈주의자들]라고, 머콜리는 Anglican[잉글랜드교회적인] 교리와 권징을, 그리고 글래드스톤은 Anglican[잉글랜드교회의] 성직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를 토대로 사목적으로나 교회법적으로 켄터베리에 의존하는 식민지의 교회들도 ‘Anglican’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용어는 이 교회들이 잉글랜드의 모교회로부터 법적으로 독립한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한 세계성공회 공동체(Anglican Communion)의 가족 교회들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p> <p>프랑스어 형태인 anglicanisme는 1817년 라므네(Lamennais)가 아마도 gallicanisme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였다. ‘Anglicanism’이란 용어는 1838년에 뉴먼에 의해서 사용되었으며, 당시에 그는 잉글랜드교회 신앙의 국가적인 측면들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소책자운동가들의 급진파들은 온건한 고교회파 성직자들을 ‘mere Anglicans’(순전한 국교회신자들)이라고 정죄[비난]하였다. 그들에게 ‘Anglican’이란 말은 경멸적인 용어였다. 최초의 람베스회의는 1867년에 ‘Anglican Communion’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이 용어는 1851년에 처음 사용되었다). </p> <p>그러나, 교회론적인 개념으로서의 Anglicanism은 이후 세대의 관심사가 되었다. 즉, 국가와의 결속관계들이 약화되고, 신앙적인 표현의 다원성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그리고 신앙적 믿음과 실제의 사회적, 정치적 측면들이 신학자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을 때에야 나타났다. 그 때에서야 세계성공회의 다양한 교회들의 공통적인 믿음과 생활을 가톨릭신앙(Catholicism), 자본주의(capitalism), 마르크스주의 (Marxism) 등등과 비슷하게 하나의 이데올로기(여기서 이 용어는 반드시 경멸적인 의미일 필요는 없다)로 평가할 수 있는 상황에 도달하였다. </p> <p>성공회의 정체성과 완전성(순수성integrity)에 관한 현재의 관심은 계몽주의와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개념적이자 사회적 구조들에 적용되었던 이념적인 비판의 방법론들에 의해서 알려진 신학적인 분석을 전반적으로는 그리스도교에, 그리고 특별하게는 Anglicanism(성공회신앙)에 적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비판[비평]의 피할수 없는 부정적인 영향들은 그리스도교회 전반을 통해서, 그리고 교회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학의 모든 분야들에서 감지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불쾌한 영향들을 피하기를 기대한다면, Anglicanism에 관한 연구는 엄격한 신학적인 검사가 오늘날의 시대풍조가 되고있는 교회론이라는 신학분야로부터 분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Anglicanism은 어떠한 객관적인 신학적 평가나 비판을 받지않고 완전히 자유로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개인들과 집단들은 그리스도교회의 존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person)과 운명에 근거시키려는 신학적 원리들에 제한받지 않고, 직접적인 정치적 조작에 의해서 그들만의 목적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사리사욕, 권력과 위신, 그리고 변하지 않은 심리적 환상들에 대한 뻔뻔스러운 만족을 적나라하게 추구하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경멸적인 의미에서 명백히 이념적일 것이며, 그러면 우리가 처음에 제기한 질문-성공회신앙이 단순히 특정한 집단들의 이익을 표현하고 보호하는 것인가, 아니면 성공회신앙은 순수한 신학적 원리의 구체적 표현인가-에 대한 대답은 매우 분명해질 것이다. 비판은 때때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더라도, 필자는 이런 경우에 대다수 성공회신자들은 그들의 교회가 비판적인 교회론의 엄격한 검사를 회피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p> <p>2. Anglican Apologetic(성공회 호교론)</p> <p>성공회신자들이 수세기동안 그들의 교회를 위하여 옹호하였던 주장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영원한 추상적 진리들의 분야에서 표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당시의 도전이나 위협-즉, 로마, 또는 퓨리탄들, 또는 근대의 과학, 또는 에큐메니즘, 또는 여성해방운동, 또는 현대사회의 만성적인 다원주의-에 대한 응답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도전들이나 위협들에 대응하며, 성공회신자들은 이에 적합한 것으로 보였던 성공회적인 종합(Anglican synthesis)의 다양한 측면들을 추출하였다. </p> <p>16과 17세기에 잉글랜드교회 신자들은 교회분열주의(schism)라는 비난을 반박하며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와의 연속성을 옹호하였으며, 그러면서도 교황권의 주장들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잉글랜드교회의 공교회성(catholicity)을, 즉 공교회적인(catholic) 신앙과 직제(성직제도order)의 핵심적인 부분에 결함이 없는 교회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개혁이 충분하게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잉글랜드교회는 진정한(true)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급진적인 프로테스탄트들과 논쟁하여야 했다. 이처럼 내부적인 도전에 대응하여 위트기프트와 후커와 같은 호교론자들(apologists)은 잉글랜드교회가 그리스도교계의 가장 잘 개혁된 교회들과 동등하게 완전히 개혁된 특징을 강조하였다. </p> <p>이러한 싸움들에서 논쟁의 무기들은 성서학과 역사학의 지식들이었다-후커의 경우는 [자연]법의 제1원리들에 대한 이해였다. (이것은 성공회의 학문적 연구가 편향적으로 이용되지 않았다거나 증거가 왜곡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잉글랜드교회는 르네상스의 새로운 인문주의적 학문과 17세기의 학문적 결실들에 의존하였다. 그러므로 건전한 학문에의 호소는 이미 성공회 호교론(Anglican apologetic)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더구나 이러한 호소는 특정한 철학적이자 윤리적인 정신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주장의 온건함, 제기하는 주장들에 대한 조심성, 실용주의와 가능한 것들에 대한 분명한 인식, 철학적 개연론, 그리고 인간적 숙고의 한계들에 대한 인식을 특징으로 하였다. 후커, 로크 그리고 버틀러에 의해서, 이러한 온건하지만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특질들을 특징으로 하는 주장들은 우리가 생각하고 싶어하듯 단순히 무력한 문서적인 의사표시가 아니라, 잉글랜드교회 안팎의 적들에 대항하여 성공회적인 입장을 성공적으로 옹호하였던 파괴력을 가진 종합적인 주장들이었다. </p> <p>19세기 후반기에 성공회의 사상은 근대적인 세계관의 결과들-성서비평학, 진화론과 내재론적인 철학-과 씨름하기(충격이 없지 않았지만) 시작하였다. 건전한 학문에의 호소는 1889년 찰스 고어가 편집한 심포지엄[평론집]인 &lt;Lux Mundi&gt;[룩스 문디]-세상의 빛]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하였다. 기고자들-옥스퍼드 대학교의 앵글로-가톨릭 성직자들-의 목표는 그리스도교 신경을 현대의 과학적, 역사적, 비판적 지식의 성장 그리고 현대의 정치학과 윤리학의 문제들과 올바른 관계를 갖도록 노력함으로써 ‘곤궁에 빠진[새로운 학문에 도전받고 있는] 신앙을 구조하려는 것’이었다. </p> <p>20세기에 성공회 호교론은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교회일치운동에 응답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리고 성공회신앙(Anglicanism)에서 공교회적(catholic), 개혁적(reformed) 그리고 학문적 요소들의 결합이 성공회를 그리스도교 통합[일치]의 한 전형[모형](paradigm)으로 기여할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주장들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앵글로-가톨릭파 문서인 &lt;Catholicity&gt;(1947)는, 다른 전통들[교파교회들]에서는 이미 파괴되어버린 살아있는 원리들을 하나로 결합시키는데 성공한 성공회신앙(Anglicanism)이 ‘잉글랜드교회가 [...] 그리스도교계의 어느 [교파]교회들보다도 더 넓은 활동영역에 대한 종합의 학교[터전]가 될 수 있는 길’을 제공한다고 제안하였다. 즉, 성공회신앙은 온전한 상태의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한 특별한 증언을 보존하였다고 주장되었다. ‘성공회신학의 역사는 분열보다는 종합을 지향하는 구성능력(power of construction)을 보여준다.’ </p> <p>성공회신앙이 그리스도교 전통들 사이에서 종합을 촉진시키는 독특한 선물[은사]을 보유하였다는 주장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는 일반적으로 성공회 교회들의 내부적인 체험으로 뒷받침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 내부에서 나타나는 성직자성향(churchmanship) 전통, 소위 교회내부의 당파들(ecclesiastical parties)-과거에는 고교회파와 저교회파와 광교회파로, 오늘날에는 가톨릭파와 복음주의파와 자유주의파로-은 각 당파의 교직후원조직과 신학대학들 그리고 신문과 잡지들을 통해서 그들의 편견[주장]들을 강화시킴으로써 대체로 각각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양극성은 약화되고 있다는 증표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최근까지 내부적인 일치운동(ecumenism)은 최소한에 그치고 있다. 타협은 나타날 수 있지만, 종합은 아니다.</p> <p>종합은 어떻게 성취되는가? 종합은 분명히 신학적인 작업-즉, 연구와 대화와 재구성-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 또는 종합은 분파들을 조화시키고 옛 갈등들을 치유하는데 도움이 되는 지도력과 예배와 영성과 선교의 분야에서 새로운 상징들이 나타남으로써 소리없이 성취될 수도 있다. 교회의 상징적인 생활에 관한 한, 우리는 대체로 전례서의 집필자들에 달려있다. 즉, 그들이 상징성(symbolism)의 역동적인 성격을 그 자체로[스스로] 양육되고 형성되고 쇄신될 수 있는 완전한 살아있는 전통으로 인식하는 정도에 달려있다. 신성시되는 상징들에 대한 보다 커다란 존경심, 그리고 진실한 독창성의 육성은 신앙공동체의 상징적인 생활의 묵시적인 차원에서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종합과 완성을 성취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가 신학적 탐구와 인식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실행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있다. 이념적으로 의심스럽고 비평적으로 일관성이 없는 신학들은 비판과 교육에 의해서 불신될 수 있다-물론 완전하게 추방시킬 수는 없지만. 이런 방식을 통해서 적어도 성공회의 소명(Anglican vocation)의 한 측면인 새로운 지식에의 개방성을 실현하는데 방해가 되는 신학적인 장애물들은 제거될 수 있을 것이다. </p> <p>마지막으로, 여성해방운동(feminist movement)-종교개혁이나 계몽주의 만큼이나 중대한 혁명이다-은 성공회적 완전성(순수성 integrity)에 대한 가장 최근의 도전을 제기한다. 또다시 우리들에게 신론과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을 포함하는 사실상 그리스도교 교리의 모든 측면들의 근저에 깔려있는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에 대한 우리의 가설들을 재평가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바로 세속적 지식-이 경우에는 심리학과 사회학과 인체생물학의 결과들-이다. 신학은, 관련된 비신학적인 학문들과 교류함으로써, 인간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일치될 수 있다. 그러나 또다시 우리는 성별 정체성의 분야에 대한 우리의 인식속에 널리 퍼져있는 잠재의식적인 전형적 심상들과 이미지들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여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인정받지 못하고 재구성되지 않은 심리학적 금기들(inhibitions)이 종종 당대의 지식과 통찰과 대화하면서 성공회의 사상을 진전시키는데 가장 완고한 장애물들로 나타난다. 부적절한 명시적 신학들은 종종 너무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심리적-사회적 요인들의 합리화와 정당화라는 그것들의 진정한 지위는 쉽게 판명되기 때문에, 다루기가 보다 쉽다. 여성해방운동에 의해서 제기된 질문들은 건전한 학문에 대한 성공회신앙의 호소-즉 성공회신앙이 진리의 모든 원천들에 의존하며 그 지적인 공교회성(catholicity)을 이해하는 성공회신앙의 방법론-에 대한 가장 최근의 도전이다.</p> <p>3. 성공회의 자기인식(self-definition)</p> <p>성공회신앙의 본질(핵심essence)에 대한 한가지 접근방법은 수세기를 통해서 규정된 여러가지 공식발표문들(formulations)을 조사하는 것이다. 물론 이 공식발표문들이 만들어진 특별한 상황들과 그 대상들을 당연히 고려하여야 한다. 성공회의 자기인식[자아규정] 주장들(exercises)은 넓은 의미에서 두가지 범주들로 구분된다. 즉, 성공회적인 종합의 중요한[필수적인] 구성요소들-성서, 전통, 이성 등등-에 중심을 두는 주장들, 그리고 성공회적인 방식에 대하여 독특한 방법론, 기풍[정서, ethos] 또는 적용방식(praxis)을 강조하는 주장들. 먼저 첫번째 범주에 속하는 발표들은 16과 17세기의 성공회신앙의 형성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잉글랜드 종교개혁과 옥스퍼드운동의 시기 사이에는 모든 개혁가들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성서의 최고권위, 이신칭의[신앙의인화], 교회의 치리형태(government)에서 평신도의 합법적인 역할(국왕과 의회에서 구체화된다), 그리고 특정한 국가단위와 지방단위의 정체성을 표방하는 개혁된 교회로서 성공회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공감대가 존재하였다. 성공회의 자아규정의 두번째 범주에 속하는 주장들-표현하기 어려운 기풍[정서]에 대한 호소-은 옥스퍼드운동 이후의 시기에 속한다. 왜냐하면 급진적인 소책자운동가들은 전통의 권위를 주장함으로써(‘교회는 가르치고, 성서는 입증한다’), 이신칭의의 법적인(외래적인forensic) 교리를 내재적인(infused) 성서적 은총에 의한 의인화와 절충시킴으로써, 교회의 치리형태(government)를 성직자 중심으로 변경시킴으로써(clericalizing), 그리고 교회와 이제 세속화된 국가 사이의 협력관계를 거부함으로써, 앞서 형성된 공감대에 성공적으로 도전하였다. 소책자운동가들에 따르면, 잉글랜드교회의 주장들과 권위와 온전성(순수성integrity)은 복음을 설교하는 역동적인 사건(루터)이나 국가의 인준(국가교회주의적 프로테스타트 입장)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주교직의 계승을 통한 잉글랜드교회의 사도적 토대로부터 유래하였다.</p> <p>개인에 따라 강조점과 단서조항들이 달랐다 하더라도 그들이 넓은 의미에서 잉글랜드교회의 프로테스탄트적인 성격을 지지하였고, 교회의 모든 당파적인 성직자들이 서명하였던 기존의 공감대는 효과적으로 해체되었다. 이제 성공회신앙에서 프로테스탄트적 요소들은 고교회파 전통의 교회론적인 강조로부터 그리고 광교회파 전통의 관용성으로부터 분리되어 복음주의자들의 특별한 전유물이 되었다. 따라서 성공회 자아규정에 관한 한, 모호한 공감대, 즉 분명하기 보다는 묵시적으로 단지 기풍[정서]과 접근방법의 문제로 친교공동체의 회원들 사이의 성문화되지 않은 이해에만 호소할 수 있을 것이다. </p> <p>성공회신앙의 독특성을 이러한 방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확실히 부득이한 방식이다. 공통적인 기풍[정서]에 존재하는 묵시적인 공감이라는 인식은 [국]교회내에서 교리적 일치의 몰락을 인정하는 결과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실천(praxis)의 영역에 존재하는 묵시적인 공감의 개념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성공회신앙의 가상적인 영원한 본질이 아니라 개념적인 구성-즉 역사의 사실들에 대한 실질적인 적응-이라는 점을 보다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p> <p>4. 성공회적인 종합</p> <p>이제 성공회의 자아규정에 대한 몇가지 증언들을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성공회적인 종합의 세가지 구성에 관하여 살펴보자. 제임스1세(그의 불미스러운 개인적인 명성에 대해서가 아니라)는 그 자신의[당시의] 성공회신앙(Jacobean Anglicanism)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609년에 ‘짐은 세가지 신경들, 즉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과 아타나시오신경을 믿는 공교회적(catholic) 그리스도인이며 [...] 그리고 짐은 이것들을 만든 고대의[초기교회의] 교부들과 공의회들이 이해하였던 것과 똑같은 의미에서 이것들을 믿으며 [...] 짐은 첫 4차례의 공의회들을 공교회(catholic)이자 정통신앙(orthodox)으로 존경하고 인정하며 [...] 성서에 관한 한 짐이 이를 믿는다는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하였다. 제임스가 성서를 제일 마지막에 언급한 것은 성서가 가장 덜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서 최고의 권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었다. 39개 신앙조항은 이미 ‘성서는 구원에 필수적인 모든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확언하였다(제6조). 근본적인 진리와 이차적인 진리, 즉 구원에 필수적인 것들과 부차적인 것들-제2차 바티칸회의에서는 진리들의 등급(계서조직hierarchy of truths)이라고 표현하였다-에 대한 인식은 신앙조항에서 함축적으로 표현되었다. 신경들은 ‘그것들[신경들]은 성서의 가장 확실한 보증들에 의해서 입증될 수 있다’(신앙조항 제8항)는 사실로부터 권위를 갖는 것으로 인정받는다. 성서와 전통 사이의 이와같은 불균형은 잉글랜드교회의 교회법에서도 표현되었다. 즉, ‘잉글랜드교회의 교리는 성서에 근거하며, 또한 앞서 말한 성서에 일치하는 초기교회의 교부들과 공의회들의 가르침들에 근거한다’(Canon A5). 성서와 전통에 대한 이러한 결합-성서에 압도적인 지위를 부여한다-은 성공회신앙의 개혁된 가톨릭신앙(reformed Catholicism)을 나타낸다. </p> <p>19세기에 성공회적인 종합의 기본구조[범위]를 확대시켜 성서학 연구와 과학적 발견들과 내재적인 세계관을 수용하였을 때, 개혁된 가톨릭신앙은 ‘자유주의적인 가톨릭신앙’(liberal Catholicism)으로 변형되었다-그리고 찰스 고어(1853-1932)는 이러한 변화에 대한 중요한 주창자였다. 어쨋든 찰스 고어는 성공회적인 신학적 방법론에서 성서적 요소를 약화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는 ‘성공회 교회의 특징은 처음부터 공교회적인 교회(Church catholic)의 구조와 주요 공식문들에 대한 확고한 보존과 ‘종교개혁의 중심적인 신앙적 주제인 “성서로의 복귀”를 결합시킨 것이었다’고 썼다. 그러므로 고어에 의하면, 성공회신앙은 성서적 가톨릭신앙(scriptural catholicism), 즉 ‘성서를 교회에서 지배적인 권위를 갖는 최고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가톨릭신앙’을 증언한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학식[학문learning]의 부흥은 성공회적인 종합에 세번째 요소-학문적 연구에의 호소-를 소개하였다. </p> <p>‘종교개혁시대에 잉글랜드교회가 가톨릭신앙의 초기교회적인 구조를 거부하지 않았으며, 또한 새롭고 더욱 자유로운 운동도 거부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성공회 교회의 자랑거리[영광]이다. 이 교회는 초기교회의 구조-신경들, 교회법, 성직의 계서조직, 성사들-를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새로운 학문과 성서에 대한 새로운 호소와 역사적 비평주의의 자유와 사적인 판단의 의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p> <p>찰스 고어는 1889년 공적인 생활을 시작할 때에 성공회 가톨릭신앙의 개혁적 특징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적 특징도 확언하였다. 즉, ‘성서적이며 성서의 전체를 상징하며, 이성적이며 모든 순수한 탐구의 빛을 추구할 수 있으며,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문제들과 요구들을 자유롭게 다루는 [...] 가톨릭신앙(Catholicism)’이다. 고어는 그의 영향력이 가장 컸던 1914년 옥스퍼드의 주교로서 이러한 입장을 다시 강조하였다. 즉, 종교개혁 이후로 성공회신앙은 성서를 ‘교의적인 필수조건의 유일한 최종적인 판단기준’으로 삼는 ‘자유주의적 또는 성서적 가톨릭신앙’을 대표하였다. 고어가 그 이상으로의 발전-특히 비주교제 교회들과의 상통관계, Lux Mundi(1889)를 넘어서는 비판적인 입장들, 그리고 인준받지 않은 전례적인 창착들을 금지시키기 위하여-을 저지하기 위하여 이러한 종합을 동결시키려고 시도하였던 특히 자기만족적이며 독단적인 방식은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나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그리고 학문적인 요소들 세가지에 호소하였다는 점에서 고어는 고전적인 성공회적인 자아규정의 대표자이다. </p> <p>성공회적인 종합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1930년의 람베스회의에 제출된 보고서에서 인정받았다. (윌리엄 템플이 초안하였던) 이 문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p> <p>‘보편적인 그리스도교회에 대한 우리의 특별한 성격 그리고, 우리가 믿는 것처럼 우리의 독특한 공헌은 우리가 역사적 상황으로 인하여 우리의 신앙공동체 안에서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과 성직을, 복음적인[개혁적인] 교회들이 증언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에의 직접적인 접근, 그리고 지적인 탐구의 자유(이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발전하는 지식과의 상호 의존관계가 지속적으로 달성된다)를 결합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p> <p>성공회 호교론자들은 최근까지 똑같은 주장을 반복하였다. 1965년 마이클 램지 대주교는 로마 가톨릭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을 집필하면서, 성공회적인 종합에서 자유주의적 구성요소를 약화시켰지만 개혁적 가톨릭신앙을 강조하였다. 램지는 ‘우리 교회는 두가지 측면들을 갖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p> <p>‘한편으로 우리는 고대시대의 교회[초기교회]로부터 가톨릭전통과 연속성를 보유한 교회라고 주장하며, 우리의 가톨릭전통과 연속성은 거룩한 성사[성체성사]에서 그리스도의 실재적 현존에 대한 믿음, 그리고 사제의 용서선언 권능을 포함하는 주교직과 사제직의 성직을 포함한다. 우리는 남성과 여성들을 위한 수도공동체들과 같은 가톨릭 그리스도교계에 속하는 여러가지 기관들을 보유하고 있다.’</p> <p>그럼에도 불구하고 램지 대주교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p> <p>‘우리 성공회의 전통은 마찬가지로 또다른 측면을 갖고 있다. 우리는 종교개혁을 거치며, 종교개혁에서 유래한 많은 체험들-예를들면 성서의 개방-을 높이 평가하는 교회이다. 즉, 성서의 권위, 성령의 활동을 통한 개인적 확신과 개심을 매우 중요시한다.’</p> <p>필자는 이 시점에서 먼저 이에 대한 몇가지 평가를 말하고 싶다. 성공회신앙을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그리고 자유주의적 요소들의 종합으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만, 우리를 충분하게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이는 성공회신앙의 독특한 특징을 나타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종교개혁 교회들과의 양자대화를 통해서 성공회는 이 교회들도 [동서로] 분열되기 이전의 그리스도교회 그리고 교부시대의 그리스도교의 고전적인 교리들에 호소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였다. 종교개혁 교회들 역시 건전한 학식[학문]이나 영적인 자유에 대하여 부족함이 없다. 더구나 제2차 바티칸회의에서 시작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내부적인 개혁과정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들에 대한 성공회의 반대를 완전히 무력화시키지는 못하였지만, 성공회 옹호론의 전통적인 반로마 가톨릭 입장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다. 성공회-로마 가톨릭교회 국제위원회(ARCIC)가 교리의 분야에서 성취한 공통적인 근거는 비판의 여지가 남아있고 바티칸의 완전한 승인을 얻지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성공회 정체성을 로마교회로부터 구별시키는데 기여하였던 성공회 호교론의 여러가지 측면들을 더욱 약화시킨다. </p> <p>모든 당파들에 속한 성공회 성직자들(churchmanship)은 성공회의 신앙이 가톨릭이자 개혁적이며 이와동시에 지적인 탐구에 개방적[호의적]이라는 인식에 동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약속으로부터 이끌어내는 결과는 서로 다르다. 일부는 이러한 세가지 호소가 여성을 성직에 서품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다른 일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해석한다. 일부는 루터교회들과 완전한 상통관계(intercommunion)를 갖는데 아무런 신학적인 장애가 없다고 해석하며, 다른 일부는 그러한 결론을 따를 수 없다고 해석한다. 일부는 성공회 내에서 교리적인 급진주의자들에 대하여 관용적인 입장을 채택할 수 있다고 해석하며, 다른 일부는 이를 배신행위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자기모순적인 상황은 우리들에게 성공회신앙의 독특성이 구성요소들-성공회신앙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혼합의 성격(nature of mixture)에 있는 것이 아닌가를 질문하게 만든다. </p> <p>5. 성공회신앙의 핵심(essence)</p> <p>그렇다면 결국 성공회신앙은 하나의 기풍[정서 ethos], 하나의 접근방법, 하나의 마음가짐[삶의 태도]인가?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하였던 성공회적인 종합의 ‘정적인’ 이해(static view)가 비아 메디아-타협과 상호간의 양보에 기초하여 여러가지 요소들 사이의 균형을 찾으려는 행동-에 대한 시도를 대표하는 것이라면, 성공회적인 종합에 대한 보다 신비적인 이해(mystic view)는 성공회신앙을 서로 반대되는 것들을 화해시키고 갈등들을 초월하려는 시도로 이해된다. 만약에 첫번째 이해[정적인 이해]가 ‘균형, 자제, 온건, 절제(measure)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라면(P. E. More), 두번째 이해[신비적 이해]는 비젼, 열정 그리고 모험에 호소한다. 전자는 성향상 보수적이며, 후자는 진보적이다. 전자는 변호적이고, 후자는 창의적이다.<br /> 마이클 램지가 쓴 것처럼, 성공회신앙은 하나의 체계나 신앙고백이 아니라, 하나의 방법론, 하나의 사용법 그리고 하나의 방향[경향]’이다. 복음, 공교회(Catholic Church) 그리고 건전한 학문에 호소한다 하더라도, 이것들은 말 그대로 서로 나란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반응하며 서로를 변형시켜 새로운 결합[배합]들을 발생시켜 창조적으로 혼합된다. 램지의 &lt;The Gospel and the Catholic Church&gt;는 이를 성취하기 위한 시도로 유명하다. 램지와 비들러(Vidler)는F. D. 모리스의 사상에서 이러한 접근방법을 발견하였다. 모리스는 서로 경쟁하는 체계들의 근거들 밑을 파헤쳐 그러한 체계들을 조직화시키면서도 왜곡시키는 살아있는 원리들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모리스의 경우, ‘신적인 질서’와의 만남으로 태어난 이러한 원리들은 궁극적으로 서로 양립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따라서 비들러 역시 성공회신앙의 독특성은 신학적인 체계가 아니라 소명(vocation)이라고 주장한다. </p> <p>‘성공회신학은 상반된 체계들의 화해를 추구하고 그것들을 독점적인 체계들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면서도, 각각의 체계가 주장하는 원리가 그리스도교 진리의 전체 궤도 내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며, 결국에는 그 궤도 내에 있을 때에만 보존된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할 때에 성공회신앙의 독특성에 일치하며, 또는 [...] 상반된 것들과 긴장관계에 있으면서도 정말로 서로 보완적인 원리들이 될 때에야 성공회신앙의 독특성에 충실한다.’ </p> <p>H. R. 맥아두(McAdoo)는 17세기 성공회신앙에 대한 중요한 연구서에서, 그러한 화해시키는 방법론을 찾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성공회의 신학적인 방법론의 전반적인 특징’이라고 보았던 ‘살아있는 긴장의 양극성[대립] 또는 특질’에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Lux Mundi를 출판한 ‘Holy Party’와 함께) 17세기 신학자들(Caroline divines)을 성공회신학의 가장 진정한[확실한] 대표자들로 지지하였다. 그는 후커부터 시작된 이러한 접근방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p> <p>‘본질적으로 타협이나 지적인 방편[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사상적 특질이자, 일반적으로 서로 배타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이 사실은 상호 보완적으로 이해되는 접근법인 비아 메디아에 대한 인식이 표면밑에 존재하였다. 이것들은 타협이라는 줄다리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서로를 빛으로 밝혀주고 풍부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살아있는 긴장속에서 보존되었다.’ </p> <p>성서와 전통, 계시와 인간이성, ‘신경에 근거한 정통신앙과 비본질적 요소들에 대한 자유, 초기교회에 대한 호소와 새로운 지식의 환영, 그리스도교회의 역사적 연속성과 국가단위의 교회들(national churches)’-이 모든 것들은 하나로 결합되어 성공회신학의 독특한 정신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17세기에 발생하였던 잉글랜드교회의 내부적인 투쟁과 신학적 논박들을 다소 이상화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은 맥아두의 이론이 주는 매력을 약화시키지 못한다.</p> <p>이와 비슷한 내용이 1930년 람베스회의에서 주장되었다. 이 회의의 한 위원회는 교리들을 구체화시키지 않고 ‘잉글랜드교회[영국성공회]가 [...] 항상 대표하였던 이상들(전형, ideals)’을 설명하였다. 이러한 이상들은 독특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교회의 이상들이다. 이들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개방된 성서[성서의 개방], 목회적 사제직(pastoral priesthood), 공동체적인 예배(common worship), 이러한 예배와 일치하는 행동강령(standard of conduct) 그리고 진리에 대한 두려움없는 사랑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들에 대한 수식어들이다.</p> <p>성서는 개방되어 있다. 즉,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제한받지 않으며, 교회당국에 의해서 성서의 해석을 통제, 감시와 제한을 받지 않는다. 성공회의 공식문서들에서 성서에 부여한 최고의 지위는 단순히 겉치레[입에 발린 말]가 아니라, 종교개혁 이후로 성공회의 평신도들이 성서를 지역어로 읽고 연구하여 그들 나름의 확신에 도달하여 이를 표현하는데(16과 17세의 정치적인 한계 내에서) 누렸던 자유와 일치한다. </p> <p>성공회의 사제직은 목회적인(pastoral) 사제직이다. 즉, 하느님의 백성들인 평신도들의 영성적 특권들을 제한하는데 기여하는 성권계급(사제계급, sacerdotal caste)이 아니며, 또한 믿음과 실제(신앙생활practice)에 관하여 법을 제정하고 이의 실천을 감시하는 책무를 맡은 지시적이고, 서기와 율법교사와 재판관같은 성직이 아니다. 이는 하나의 사제직-즉, 권위적, 성서적, 심지어 중재자적인 기능들을 갖고 있다(이러한 기능들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으로 세례를 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갖는 사제적 성격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이지만, 진정한 목회자(true pastor)로서 우리의 인간적 조건들에서 관대함과 인간적 필요들에 대한 관심, 경청하는 자세, 공동의식를 포함하는 사제직이다.</p> <p>예배는 공동체적이다(common). 말하자면, 예배는 전례적으로 자격이 없는 평신도들을 위하여 대리자적인(vicarious) 사제직에 의해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스티븐 사익스의 표현을 사용하면) 포괄적인 참여가 생명인 그리스도교회의 전체 사제적인 몸[모든 신자들]이 공유하는 것이다. 더구나 전도구교회라는 제도 아래서 예배는 자기선택적인(self-selecting) 엘리트들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이미 세속적인 목적을 위하여 존재하는 한 지역공동체의 공동체적인 기도이다. 성공회의 공동예배의 성격은 항상 모든 종파적인(sectarian) 경향들을 거부한다. </p> <p>마지막으로, 진리에 대한 성공회신앙의 사랑은 두려움을 모른다. 진리와 양심적인 증언에 대한 학문적인 탐구는 성공회신앙에서 보호를 받는다. 필자는 성공회의 포용성에 대한 스티븐 사익스의 비판적 관점에서 성공회신앙의 핵심에 대하여 이러한 특정한 태도(어조, note)를 인용하고 있는 아이러니를 잘 알고있다. 사익스에 의하면, 성공회의 포용성은 진리에 대한 두려움없는 사랑이 아니라, 쇠퇴하는 교회를 보존하려고 시도하는 나태한 정신들을 위한 탈출구로 무제한적인 포용성에 호소함으로써 신학적인 쟁점들을 고의적으로 위장하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필자는 성공회신앙이 학문적인 진실성(integrity)을 높이 평가하며, 성공회신앙의 경계 내에서 폭넓은 신학적 입장들의 활성화를 허용하였다는 주장하는 것은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p> <p>성공회의 이상은 확실히 고귀한 것이지만, 앞으로 완전하게 성취되어야 한다. 이것은 신앙의 영역에서 권위의 역할에 대한 특별한 입장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성서, 전통 그리고 이성에 호소하지만, 우리가 살고있는 현대의 다원적인 상황이라는 알려진 맥락(context)에서 그렇다. 결과적으로 이 세가지 원천들 또는 범주들은 서로에 대하여 제한하는 견제와 균형으로서 봉사하기 위하여, 서로를 제한하고 상대화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교회의 문화적 이념적인 상황과 대화하면서 창조적인 사고를 생산하기 위하여, 역동적인 방식으로 결합된다. 그 결과는 권위에 대한 약화된[부드러운] 인식-일부는 무력화되었고 말할 것이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조건에 매우 적합한 권위이다. </p> <p>성공회신앙의 독특성에 대한 질문은 정당하고 필수적인 질문이지만, 우리가 갖는 최고의 관심사가 될 수는 없다. 정체성의 문제는 교회를 포함해서 개인들과 기관들 모두를 괴롭히는 질문이지만, 이에 집착하는 것은 신경증일 것이다. 정체성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완전성(integrity)의 자연스런 결과물이다. 스티븐 사익스는 정체성 없이는 완전성이 없다고 주장하였지만, 필자는 그 반대방향을 선호한다. 즉, 독특한 정체성은 반드시 완전성을 보증하지 않는다. 정체성은 모든 모호한 수단들-홍보활동 기업들에 의해서 인간의 의식을 조작하는 것을 포함하여-에 의해서 조작될 수 있지만, 완전성에 도달하는데는 지름길이 없다. 완전성과 정체성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성공회신앙은 존재한다. 그것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변수들은 그것들 사이의 타협들과 함께 이미 정해져 있다. 우리는 이것들에 대하여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성공회신앙의 소명(vocation)은 관례대로 이러한 변수들 안에서 정보와 통찰의 모든 정당한 원천들에 호소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또한 인간의 구원(redemption)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다. 50여년전에 마이클 램지는 이렇게 말하였다. </p> <p>‘성공회 교회는 복음과 교회와 건건한 학문에 대한 매우 균형잡힌 증언으로 역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정당화되지만, 그것의 보다 커다란 정당화는 그 자신의 역사를 통해서 한 부분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있다. 성공회의 자격들은 그 중심[soul]에 긴장과 노고[진통]을 겪고 있는 그 불완전성이다. 그것은 서투르고, 난잡하며, 그것은 단정함과 논리적임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그리스도교회의 최고 형태’라고 자랑하도록 보내진 것이 아니라, 교회의 부서진 모습(brokenness) 그 자체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바쳤던 보편적인 그리스도교회를 가리키도록 보내졌다.’ </p> <p>6. 성공회신앙의 소명</p> <p>성공회신앙은 초기 그리스도교회에 근거하며, 또한 사도들로부터 내려오는 신앙과 직제(order), 예배와 증언과의 연속성을 갖는 공교회적인 신앙(catholic faith)을 열망[지향]한다. 개혁가들은 고대시대[초기]의 브리튼교회(British Church), 즉 597년 켄터베리의 성 어거스틴의 선교보다 훨씬 이전에 존재하였던 자치적인 교회에 호소하였다. 예를들면, 엘리자베스 치하의 파커 대주교는 잉글랜드의 주교직이 아리마테아[아리마대]의 요셉(Joseph of Arimathea)의 방문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주얼은 잉글랜드교회가 가톨릭 교회(Catholic Church)로부터 이탈한 것이 아니라, 로마의 오류들로부터 이탈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휘트기프트는 ‘우리는 우리가 유익하다고 발견한 것들을 보존하고, 사악하다고 발견한 것들을 거부하거나 개혁하였기’ 때문에, 잉글랜드교회는 ‘변형된 것’이 아니라 ‘개혁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후의 세대에서 찰스 고어는 성공회신앙이 ‘로마없는[로마에 복종하지 않는] 가톨릭신앙’(Catholicism without Rome)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가베트(Garbett)는 ‘당연히 잉글랜드교회는 로마교회에의 복종으로부터 해방된, 이 나라[잉글랜드]에 있는 가톨릭교회(catholic Church)다’고 확언하였다. </p> <p>성공회신앙의 공교회성(catholicity)은 중세시대의 추가물들을 제거한 초기교회의 형태들을 사용하는 예배와의 연속성, 그리고 브리튼(Britain)에서 먼 옛날에 시작된 전도구들과 전도구교회들에서 실천되었던 사목적 돌봄(pastoral care)과의 연속성에 근거한다. 성공회의 공교회성(Catholicity)은 또한 역사적으로 계승된 세가지 성직인 주교, 사제, 그리고 부제의 보존에 근거한다. 무엇보다도 성공회신앙의 공교회적 특성(catholic character)은 성서와,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의 교의들을 결정하였던 분열되기 이전의 그리스도교회의 신경들과 공의회들(교회법적으로 첫 4개의 공의회들)을 충실히 따른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더 나아가 성공회신앙의 공교회성은 성공회가 신앙의 논쟁적인 문제들에 대한 [전체] 그리스도교회(그리고 특정지방의 교회)의 판결권한을 인정하였다는 사실에 의해서 증명된다. 성공회신앙은 공의회에 소집된 [전체] 그리스도교회의 권위에 호소함으로써 스스로 가톨릭신앙의 제왕적인(군주제적인monarchical) 전통[교황중심의 전통]에 반대되는 공의회전통(conciliar tradition)에 속해 있음을 입증한다.</p> <p>성공회신앙은 개혁된 신앙을 열망한다. 성공회신앙의 근본적인 개혁적 성격은 무엇보다도 성서에 부여하는 지위에서 입증된다. 즉, 성서는 그리스도교회의 진리에 관한 모든 다른 원천들[자료들]을 평가하는 기준이다. 개혁가들은 바로 이 성서의 기준에 따라 중세 가톨릭신앙의 여러 측면들-즉, 교황의 전세계적인 관할권, 사제직의 성권적 직위(sacerdotal office), 미사의 속죄적 희생제의(propitiatory sacrifice), 평신도에 대한 포도주 배찬의 금지, 성서의 본질을 파괴시키는 화체론, 외래어로된 전례서, 강제적인 성직자 독신제도, 의무적인 고백성사, 연옥론과 공덕[공로]의 보고(treasure of merits), 성인들에 대한 제의[숭배]와 그들의 중재자적인 역할, 수도생활과 비교하여 평신도 소명의 격하-을 거부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개혁가들은 세속통치자(magistrate)-즉 구약성서의 신실한 국왕(godly prince)-가 세속적 통치 뿐만 아니라 신앙적 통치에서도 최고통치자(supreme governor)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하였던 것도 (그들의 성서이해에 따라) 바로 이 성서의 권위에 따른 것이었다. 그들은 법적 의인론[칭의론]의 교리에 대한 근거로 (명백하게) 성서에 호소하였으며, 더구나 이 교리를 (루터의 표현대로) 교회를 세우거나 멸망시키는 표준으로 주장하였다. </p> <p>성공회신앙은 이성적 신앙을 열망한다. 학자들의 탐구를 환영하는 성공회의 전통은 종교개혁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엄격한 통치조직으로부터 핍박받은 많은 학자들이 잉글랜드교회로 피신하였다. 성공회신앙은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교회의 믿음들과 주장들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였다. 더구나 교회의 구성원들 사이의 의견충돌에 놀랄정도로 관용적이었다. 만약 외적인 형태들이 존중된다면(그리고 이것들이 단순한 속임수로 멸시되지 않는다면, 왜냐하면 이것들은 성공회의 가장 근본적인 확신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영성적 자유에 대한 원칙은 성공회의 역사에서 권력투쟁들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형성되었다. 성공회신앙은 분명하게 성서연구(prophesying 성서에 대한 토론)의 자유에 헌신한다. 칼 포퍼의 주장처럼, 만약 합리성이 이성적 비판에 대한 개방에 있다면, 성공회신앙은 정정당당하게 이성적 신앙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p> <p>완드(Wand) 주교는 ‘지지자이자 비판자의 입장에서 성공회신앙의 세가지 가장 분명한 특징들은 관용(tolerance), 절제(constraint) 그리고 학문이다’고 주장하였다. 필자는 그가 신앙, 희망 그리고 자선이라고 말하였다면 더더욱 기뻐하였겠지만, 완드의 세가지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가베트는 잉글랜드교회를 ‘세계에서 가장 관대한(liberal-minded) 교회’라고 부르며, ‘아마도 우리는 이 교회를 모든 교회들 중에서 가장 자비로운(관대한charitable)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고 추가하였다. 그리스도교의 미덕들중 가장 훌륭한 것이 자비이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이 훨씬 좋게 들린다.</p> <p>건전한 학문에 제공하였던 폭넓은 관용과 규제완화는 개인적인 자유라는 계몽주의적 이상 그리고 양심의 최고성에 따른 결과물이 아니었다. 관용과 규제완화를 16세기에서 찾는다면 시대착오적일 것이다. 이것들은 튜더왕조의 통치술에 따른 냉정한 타협물들의 한 표현이다(헨슬리 헨슨의 유명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온건정책처럼 보였다. 이 정책은 교회당국[교권]의 월권행위를 약화시키는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에, 영성적 자유의 원리로 재해석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신하들의 마음과 정신을 들여다보는 것을 거부하였던 것은 바로 정치적인 편의추구라는 이유들 때문이었지만, 이러한 정책은 결과적으로 신앙적 묵인이라는 원리를 표현한 것으로 신학적인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따라서 정치적 조작이라는 현실(reality)이 영성적 자유라는 수사적 표현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왜 안되는가[그래도 괜찮지 않은가]? 비코(Vico)와 프로이드가 우리들에게 가르쳐준대로, 우리의 최고의 열망들중 일부는 다소 교훈적이지 않은 세속적, 육체적 욕구들에서 역사적으로 또는 진화론적으로 기원[유래]하였다. </p> <p>잉글랜드 종교개혁에서 건전한 학문의 역할에 대하여 다소 장비빛같은 크레이톤의 평가에 반대하며 헨슨이 지적한 것처럼, 17세기말까지 이러한 과정으로부터 나타난 것은 전반적으로 건전한 학문에 대한 호소뿐 아니라, 특정한 경우 비판의 기능에 대한 수용이었다-즉, ‘거룩한 문서들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그리고 독립적인 연구를 통해서 초기 그리스도교시대의 진정한 판단을 입증함으로써, 건전한 학문을 현재의 전통을 개정하는데 적합한 것으로 솔직하게 수용하는 것이다.’ 학문에 대한 주장들은 비판의 권리를 의미하며, 이는 영성적 자유의 원리에 의존하였다. </p> <p>정의상의 결함, 실용주의, 혼동과 불일치, 실패한 운동과 재구성되지 않은 편견에 대한 호의, 무관심과 무능력에도 불구하고, 성공회신앙은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개인적인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구조들을 옹호하는 목적을 가진 편향적인 교회당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대한 두려움없는 추구에 적합한 장소와 환경을 제공한다. 헨슨의 표현처럼,</p> <p>‘잉글랜드교회의 교리적 불일치는 의심의 여지없이 혼란스럽고, 실제로 당황스러우며 그리고 종종 수치스럽다 하더라도, 무원칙에 대한 안이한 묵종이나 진리에 대한 부끄러운 무관심 보다는 훨씬 존경스러운 것들에 근거한다. 이것은 사려깊고 책임적인 잉글랜드 성직자들이 [세속]당국의 난폭한 권한이 신앙적 의견의 영역으로 끼어드는 것을 싫어하였다는 점을 나타낸다. 진리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고 옹호하는 조건들에 대한 보다 정당한 인식 때문에, 그들은 지금 그리스도교회의 모든 분야에서 긴급히게 부딪치고 있는 문제-즉, 신경들에서 표현되었고 이론적으로 변경할 수 없으며 시간적으로는 신성불가침하였던 신학적 전통들과 크게 증가된 인간 지식 사이를 조화시키는 방법-의 해결책을 발견하려는 개인적인 노력들을 회피하지 않았다.’ </p> <p>성공회신앙은 역사적으로 권위의 문제에 대하여 독특한 접근방법을 고집하였다. 권위에 대한 성공회신앙의 원자료들은, 다방면으로 분산되어 있다 하더라도, 서로를 제한시키면서도 서로를 밝혀준다. 현대의 지성적 상황에서 이것은 교의의 성급한 공표, 절대자에 대한 독단적인 해설, 그리고 교권의 고압적인 행사를 금지시키기 때문에 유익한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현대 그리스도교의 딜레마들에 좌절당한 우리들 모두에게 일시적인 만족감을 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우리의 자매교회들에서처럼 우리의 무거운 짐으로 입증될 것이다. 따라서 성공회신앙의 소명은, 교회당국의 검열권에 대한 두려움없이 스스로 동료들의 비판을 받음으로써, 개개인들이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서 진리를 증언할 수 있는 영성적 자유의 환경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의 절대필요한 조건은 교회의 예배생활과 기본적인 세례신앙의 고백 (그리고 성직자의 경우 주교에 대한 교회법적인 복종)에 대한 지속적인 참여이다. 이러한 규율(규칙discipline)은 난폭한 개인주의를 약화시키는데 도움을 주며, 개별 사상가들이 그들을 양육시켰던 전통에 남아있음을 확신시킨다. 여기서 필자는 확실히 한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다. 즉, 성공회의 영성적 자유에 대한 찬양은 반드시 성공회의 신학적인 유산에 대한 보다 강력하고 존중하는 태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오늘의 우리를 만든 원천들과 보다 확실하게 협력하는 것을 배우게 되며, 또한 우리가 이것들을 가볍게 여기거나 멸시할 수 있는 환상에 빠지지 않게 한다. </p> <p>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성공회신앙의 독특한 정체성은 전례나 영성 또는 치리제도(polity)의 측면보다는 신학적 방법론의 영역에서, 그리고 이를 알려주는 권위에 대한 이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성공회신앙의 이러한 신학적인 정체성이 마치 ‘전문적인’ 신학자들만이 성공회신자로서 완전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엘리트주의적으로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말자. 분별있는 그리스도인들 모두-성직자든 평신도든-는 신학활동(doing theology)에, 즉 하느님에 관한 것들에 대한 숙고-전례와 사적인 기도, 성서의 독서와 연구에서-에, 또는 전도구교회나 교구의회의 차원에서 교회의 치리에 참여하는 일에, 또는 생활의 세속적인 문제들을 다루거나 이것들의 보다 창조적인 기쁨을 누리는 일에, 지속적으로 참여한다.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정들 그리고 우리가 만드는 모든 우선순위는 좋든 나쁘든 성공회의 신학적인 방법론을 예증한다. 성공회신앙에서 우리들은 반드시 이것들이 우리들을 강요하도록 만들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가 이것들의 형성과정에 개입한다. 우리는 성공회신자로서 지적으로 특권을 부여받았다. 우리의 신학적인 전통은 고귀한 전통이다. 우리의 신학적인 원천들은 방대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적어도 충분하다. 만약 우리가 현재에 그리스도교 진리를 엄격하고 체계적으로 파악하는데 실패하였다고 질책받는 것이 당연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을, 쇠퇴를,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치유하여야 하는 과제임을 나타낸다.</p> <p>참고문헌 </p> <p>Avis, P. D. L., Anglicanism and the Christian Church: Theological Resources in Historical Perspective. T. &#38; T. Clark, Edinburgh/Fortress, Minneapolis, 1989.</p> <p>Avis, P. D. L., Authority, Leadership and Conflict in the Church. Mowbray, London, Trinity Press International, New York, 1992.</p> <p>Avis, P. D. L., ‘Keeping Faith with Anglicanism’, R. Hannaford (ed.), The Future of Anglicanism. Gracewing, Leominster, 1996, pp. 1-17.</p> <p>Avis, P. D. L., ‘The Distinctiveness of Anglicanism’, C. J. Podmore (ed.), Community-Unity-Communion. CHP, London, 1998.</p> <p>Hannaford, R. (ed.), The Future of Anglicanism. Gracewing, Leominster, 1996.</p> <p>McAdoo, H. R., The Spirit of Anglicanism. A. &#38; C. Black, London, 11965.</p> <p>More, P. E. and Cross, F. L. (ed.), Anglicanism: The Thought and Practice of the Church of England, Illustrated from the Religious Literature of the Seventeen Century. SPCK, London, 1935.</p> <p>Neill, S., Anglicanism. Mowbray, London, 1977.</p> <p>Sachs, W. L., The Transformation of Anglicanism: From State Church to Global Commun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p> <p>Sykes, S. W., The Integrity of Anglicanism. Mowbray, London and Oxford, 1978.</p> <p>Sykes, S. W., Unashamed Anglicanism. DLT, London, 1995.</p> <p>Van der Pol, W. H., Anglicanism in Ecumenical Perspective.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5.</p> <p>Vogel, A., (ed.), Theology in Anglicanism. Morehouse Barlow, Wilton, 1984.</p> <p>Warren, A. (ed.), A Church for the Nation? Essays on the Future of Anglicanism. Gracewing, Leominster, 1992.</p> <p>White, S. R., Authority and Anglicanism. SCM, London, 1996.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