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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태그: 성공회 http://liturgy.skhcafe.org/ A Korean Anglican Theology & Liturgy Forum en Mon, 22 Jan 2018 16:09:43 +0000 viamedia on "전례 여행 10 - 전례 운동 2 - 하느님 백성의 예배와 선교 공동체"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74#post-1192 월, 11 7월 2011 14:37:21 +0000 viamedia 1192@http://liturgy.skhcafe.org/ <p>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p> <p>10. 전례 운동 2 - 하느님 백성의 예배와 선교 공동체</p> <p>지난 회에 살핀 것처럼, 성공회는 개인과 공동체가 서로 부딪히는 새로운 상황에서 전례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가치를 조화하려고 노력했다. 비슷한 처지에 있던 다른 교회들도 이 문제를 두고 씨름했다. 특히 19세기 서구 사회의 큰 변화를 맞았다. 사회의 이념과 신앙에서 지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태도가 더 널리 퍼지게 되면서, 교리와 위계로 지탱하던 교회의 관습적 권위는 설 자리를 잃었다. 한편, 급격한 산업화 때문에 오래된 농촌 공동체가 무너지고 도시에는 많은 사람이 몰렸다. 대체로 낮은 임금을 받는 공장 노동자요 도시 빈민이 된 이들의 삶은 비참했고 교회와 전례에서 멀어졌다.</p> <p>교회는 이러한 변화에 당황했다. 이때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와 전례는 어떤 관계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근대 ‘전례 운동’의 물음이었다.</p> <p>전례 운동은 당연히 전례 전통의 교회에서 먼저 움텄다. 성공회가 그랬듯이, 이제 천주교의 성직자들과 전례학자들이 신앙과 교회와 사회 문제를 전례와 연결하여 사태를 진단하고 질문을 던졌다.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이고, 이 예배와 전례 공동체 속에서 신앙이 자란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할 때라야 진정한 신앙을 키울 수 있다. 전례가 신자들의 참여와 공동체성을 잃으면 개인 신앙생활에 왜곡이 일어나고, 이것이 다시 교회에 영향을 미쳐 악순환이 일어난다. 이래서는 세상 속에서 교회가 빛이 될 수 없다. 어떻게 바로 잡을 것인가?” </p> <p>이 운동 처음에는 중세 초기 교회에 대한 낭만적인 동경이 있었다. 중세 초기 교회를 전례와 공동체의 이상으로 생각해서 그 관습과 교리를 회복하면 된다고 보았다. 천주교뿐만 아니라 성공회에도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꽤 있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이런 단순한 과거 회귀로 전례 공동체를 회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새로운 방법을 세웠다. 그것은 성서와 초대 교회, 그후 교회 역사의 다양하고 풍부한 전통에 대한 재발견, 그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 그리고 성령의 힘에 기대어 현대 상황에 적용한 쇄신이었다. </p> <p>전례 운동은 전통의 재발견과 연구와 쇄신이라는 방법으로 다음 내용을 강조했다. </p> <p>첫째, 사회와 교회에서 인간관계의 핵심은 공동체이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공동체의 활동이다. </p> <p>둘째, 형식과 교리와 의무에 치중하던 예배 생활에서 벗어나 교회 공동체와 신앙생활의 바탕인 성찬례와 성무일도를 회복하고 개정해야 한다.</p> <p>셋째, 하느님의 백성인 신자들은 전례, 특히 성찬례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신자는 보편적인 사제직을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p> <p>넷째, 성서와 초대 교회, 다양한 교회 전통의 경험을 회복하고 서로 배워야 한다. 이로써 분열된 그리스도교는 일치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 </p> <p>다섯째, 성찬례를 통해서 경험하는 변화와 나눔은 세속 사회를 향해 비판하고 발언하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p> <p>전례 운동은 위의 강조점을 통해서 성공회, 천주교, 루터교 같은 전례 전통의 교회에 쇄신을 가져왔다. 그뿐 아니라 20세기 내내 다른 교회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례 전통 교회들이 서로 비슷한 전례 구조와 행동을 보이고, 교회력이나 성서정과를 공유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특히 천주교는 1960년대 바티칸 2차 공의회에서 “전례 헌장”을 발표하면서 획기적인 개혁의 원칙을 마련했고, 그 영향으로 교회 일치 대화는 더욱 힘을 얻었다. 유럽의 루터교는 전례가 어떻게 신자의 사회 참여 훈련과 원칙이 되는지 특별히 고민했다.</p> <p>이런 경험에 기대어, 그동안 전례에 관심이 없던 개신교회들도 전례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마침내 1982년 교회 일치 모임인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리마 문서’라는 전례와 신학 문서를 통해서 전례 운동의 중요한 원칙들을 다시 확인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감사하며 하느님을 예배하고 친교하는 공동체이며, 구원 사건을 일으키시는 하느님의 협력자가 되어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선교 공동체이다. 100여년 전 물음에 대한 응답인 셈이다.</p> <p>다만, 이런 전례 운동의 풍요로운 경험과 원칙에서 여전히 비껴있는 교회들도 있다. 특히 전례 운동을 경험하지 못한 선교사들이 시작한 교회들이나, 전례 전통과는 아예 담을 싼 교회들이 그렇다. 지난 100여년 동안 성공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들이 참여하여 마련한 성과를 함께 나누지 못한다면 큰 손실이다. 전례 운동의 큰 흐름과 동떨어져 제한된 경험으로 입과 눈으로만 전수된 전례는 옹색하게 보인다. 반면, 관습적 전례 경험에 대한 반감으로 전례 전통을 좁게 보거나 오해하는 일도 잦다. 전례 운동의 경험이 보여주듯이, 전례 개혁과 쇄신은 풍요롭고 넉넉한 경험과 연구, 그에 대한 열린 태도와 적용으로만 가능하다. </p> <p>지금까지 전례의 오랜 역사를 따라 무겁게 걸어왔으니, 이제 오해하기 쉬운 주제들과 무심했던 이야기들로 가벼운 발걸음을 돌릴 때가 되었다.</p> <p>(성공회 신문 2011년 7월 11일치 6면) </p> prayandwork on "번역: 존 맥쿼리, <<그리스도교 신학의 원리들>> 서문"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58#post-1180 금, 24 6월 2011 15:51:02 +0000 prayandwork 1180@http://liturgy.skhcafe.org/ <p>/ Cranmerian 책 전체를 읽어내기도 버거운 처지인지라 아직 무엇을 나눌 깜냥이 못 됩니다. 그저 공부하면서 연습 삼아 번역해본 것인데 좋은 분들의 조언을 받으면 공부에 진전이 있을 것 같아 올렸습니다. 이렇게 지적해주시는 것이 제게는 참으로 큰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p> viamedia on "전례 여행 8 - 성공회 종교개혁: 전례를 통한 개혁"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61#post-1178 금, 10 6월 2011 14:34:23 +0000 viamedia 1178@http://liturgy.skhcafe.org/ <p>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p> <p>8. 성공회 종교개혁 - 전례를 통한 개혁</p> <p>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을 거쳐서 등장한 교회를 개신교라 부른다. 그 대표적인 세 개의 교회가 루터교, 개혁교회(장로교), 성공회이다. 현대 수백 개의 개신교단은 대체로 이 세 개의 교단에 기원을 둔다. 그러나 16-17세기에 쓰던 ‘개신교’라는 말과 20-21세기에 쓰는 ‘개신교’라는 말에는 그 공통점만큼이나 차이점도 많다. 수백 년을 두고 저마다 다른 처지에서 발전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또 그 첫 세 개의 개신교도 서로 같지 않았다. 이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오해가 생기고 종종 억지주장도 나온다.</p> <p>개신교 종교개혁은 신학과 예배를 새롭게 하여 교회의 신앙생활을 개혁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그 무게 중심은 달랐다. 루터교와 개혁교회는 탁월한 두 지도자 ‘개인의 신학’에 기대고 발전했다. 루터교는 마르틴 루터의 신학을, 개혁교회는 장 칼뱅의 신학을 표준으로 삼았다. 다른 탁월한 동료 개혁자들도 있었지만, 이 두 거인의 그늘에 가리곤 했다. 이들에게 예배 개혁의 잣대는 그 신학적 주장을 얼마나 잘 반영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루터교의 예배 개혁은 점진적이었고, 개혁교회의 개혁은 급진적이었다. 이 두 사례는 2-30여 년 늦게야 종교개혁 대열에 동참한 성공회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그 그림자가 짙다.</p> <p>로마 교회 지배에서 영국 교회를 독립시킨 영국 왕 헨리 8세는 신학과 예배에서 중세 교회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로마 교회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호칭까지 받았다. 영국 교회를 독립시켜 자신을 교회의 수장이라고 불렀지만, 1547년 죽는 순간까지 중세 신학과 예배를 버리지 않았다. 그 생전에는 종교개혁의 핵심인 신학과 예배의 개혁이 거의 없었다. 헨리 8세의 교회 독립을 성공회의 시작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이다. </p> <p>영국 교회에서 신학과 예배의 본격적인 개혁은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의 몫이었다. 그는 독일에서 루터의 신학을 공부했고, 개혁교회의 영향을 받은 동료의 조언을 얻어 예배를 개혁했다. 크랜머 대주교의 개혁 방법은 신학 논문 발표가 아니라 예배문 개정이었다. 1548년에 첫 자국어(영어) 성찬례문이 나왔고, 이듬해인 1549년 마침내 성공회의 가장 중요한 전통이 되는 ‘공동 기도서’가 처음으로 나왔다. 이 첫 기도서는 중세 교회의 여러 전통을 보존하면서도 종교개혁 신학의 중요한 점을 반영했다. 3년 후 나온 1552년 기도서는 종교개혁 신학을 좀 더 반영하기도 했다. 영국을 천주교로 되돌린 메리 여왕 때문에 이런 노력이 잠시 멈추기도 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성공회의 독특한 신학과 예배의 기풍이 자리를 잡았다. 그 결정판은 1662년 ‘공동기도서’였다. 이 역사는 성공회 종교개혁의 몇가지 특징을 잘 드러낸다. </p> <p>첫째, 신학 논쟁보다는 전례를 통한 개혁이다. 신학적 정밀함에 무게를 둔 대륙의 개혁과는 달리, 성공회 개혁자들은 신학적 논쟁을 하느님을 예배하는 일보다 먼저 내세우지 않았다. 실제로는 전례의 언어와 행동 안에서 오히려 신학적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다. </p> <p>둘째, 전례를 통한 일치이다. 신학적 논쟁의 결과는 교회의 일치보다는 교회의 분열이기 일쑤였다. 그러나 ‘공동 기도서’는 예배와 전례 안에서 모든 신자가 하나임을 경험하는 도구였다. 기도서는 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언어와 논리의 토대였으며, 아울러 개인의 신앙생활과 경건생활을 위한 길잡이였다.</p> <p>셋째, 공동의 예배 신학이 바로 교회의 신학이다. 종교개혁의 몇몇 유산은 루터주의, 칼뱅주의처럼 탁월한 신학자의 이름을 따서 불린다. 이에 비해 성공회는 공동기도서를 함께 사용하는 집단의 이름으로 불린다. 성공회 신학과 전통을 뜻하는 ‘앵글리카니즘’을 현대말로 푼다면,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함께 예배하며 경험한 신학과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p> <p>의식했든 안 했든, 성공했든 못 했든, 성공회 종교개혁은 유럽 대륙의 종교개혁과는 다른 기풍을 만들었고, 그 다름으로 그리스도교 전통의 풍요로움에 이바지했다. 그 기반은 ‘공동체의 경험’이었다. 공동기도서는 여러 개인의 다양한 경험을 공동 예배를 통해서 공동체의 경험과 신학으로 안내하는 방법이다. 이에 반해, 특정 신학자의 신학은 그 ‘개인’의 신학이 지배하도록 버려두거나, 신학자들만이 독점적으로 소유한 신학을 부추기기 쉽다. 중요한 것은 ‘신학’의 회복이 아닐는지 모른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 공동체’의 회복이다. 성공회 종교개혁 유산에도 불구하고 이 깨달음을 얻기까지 300여 년의 시행착오가 더 필요했다. 이 회복을 위한 근대 전례 운동은 19세기에 들어서야 움트기 시작한다.</p> <p>(성공회 신문 6월 11일) </p> Cranmerian on "번역: 존 맥쿼리, <<그리스도교 신학의 원리들>> 서문"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58#post-1175 화, 31 5월 2011 13:55:55 +0000 Cranmerian 1175@http://liturgy.skhcafe.org/ <p>존 메퀘리라는 분에 대해서는 주신부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의 &lt;성사들에 대한 안내&gt;(A Guide to the Sacraments)라는 책을 한번 읽어보았습니다 . 당시에 제게는 어려운 책이었지만, 전례에 대한 다른 책들을 읽을 때마다, 이에 대한 신학적 숙고를 참고하느라고 중간 중간 다시 읽어보고 있습니다. 조금은 오래된 책이지만 ‘신학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p> <p>이 서문을 처음 읽었을 때 이 분의 명성을 다시한번 확인하는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기본적인 원칙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부분에 공감합니다. 좋은 책을 읽고 나누기 위하여 이렇게 번역해서 소개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제게는 무엇보다도 두번째 단락이 우리들에게 ‘경종’ 내지는 ‘각성’을 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첨부하신 원분을 살펴보면서 그 뜻을 더욱 분명하게 밝힌다는 의미에서 섣불리 다시 번역해 보았습니다. 물론 저도 번역을 더러 하였지만 정말 힘든 작업이고 많은 시간도 소모되고, 때로는 이해하려고 시작하였다가 번역 그 자체에 얽매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이해하는 것을 번역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정말로 힘들고, 번역하는 사람마다 그 표현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점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p> <p>혹시나, 이미 내가 번역하는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손을 댄다는 일에 기분 좋을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구요. 하지만 서로 격려를 받는다는 마음으로, 그리고 이러한 첫 번역이 없었다면, 그 다음의 교정 또한 더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p> <p>무엇보다도 저자가 말하는 ‘근본적인 신학적인 숙고’가 중요하다는 지적을 되새기고 싶습니다. 적어도 교회의 지도자들-성직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라면, 교회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일들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신학적으로 숙고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요즈음은 어느 교단이나 교회에서도 ‘편리하다’거나 ‘멋있다’고 이러한 신학적 숙고조차 없이 도입하고, ‘불편하다’거나 ‘답습적이다’는 이유로 아주 중요한 것들을 너무나 쉽게 저버리는 일이 많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지만. 어느 경우든 이러한 결정을 하기 전에 한번 더 저자의 지적처럼 ‘근본적인 신학적 숙고’를 거치는 작업을 하나의 과정으로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리라고 생각됩니다. </p> <p>아마도 공부를 하시느라고 이 책을 읽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성공회의 신학에 대한 책들은 많지만, 우리말 로 번역된 책이 거의 없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어려움이 많습니다. 선구자가 된다는 생각으로 매진해주시기를 부탁드리며, 결실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p> <p>제가 번역한 두번째 단락입니다. </p> <p>-----<br /> 신학적 과업은 새로운 문제들과 새로운 상황들, 새로운 지식들이 나타날 때마다 [언제나] 새로이 수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에는 많은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다. [예를들면] 때로는, 신학자들이 교회의 살아있는 신앙과 너무 동떨어진 상아탑속의 사색[논의]에 빠져 길을 잃기도 하고, 때로는 지나간 시대의 신화들[성공적인 신학들?]과 상징들에 지나치게 집착하기도 하고, 때로는 “세련되어야” 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지나친[병적인] 욕망으로,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당대에 유행하는 철학을 따라가며 이를 초라하게 흉내내는 것으로 축소시켜 버린다. 이러한 모든 함정들을 비켜갈 수 있는 신학자는 없다. 그러나 모든 신학이 몇몇 결점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신학적 책무를 져버리거나 교회의 삶에서 신학이 차지하는 위치를 과소평가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신학은 교회에 반드시 필요하다. 교회에서 신학이 실패할 때, 우리는 이것이 더 나은 신학에 대한 요구로 받아들여야지, 신학이 필요없다는 이유로 또는 교회가 신학 없이도 과업을 잘 수행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예를들면,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실천적인 과제들에만 집중할 필요가 있다거나, 또는 그리스도교회에서 신학은 심리학과 사회학과 같은 과학들로 대체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필자는 이러한 문제들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근본적인 신학적인 숙고를 뺏어갈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명백한 신학적 이해에 의해 조명되지[설명되지, 안내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방향을 잃고 돌발적인[한차례로 끝나버리는, 일관성없는] 행동이 되고 말것이다. </p> <p>----------- </p> prayandwork on "번역: 존 맥쿼리, <<그리스도교 신학의 원리들>> 서문"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58#post-1174 화, 24 5월 2011 21:48:04 +0000 prayandwork 1174@http://liturgy.skhcafe.org/ <p>Principles of Christian theology<br /> 그리스도교 신학의 원리들</p> <p>서문 </p> <p>그리스도교 신학은 교회의 신앙을 하나의 일관된 전체로서 생각하고자 한다. 신학은 단지 신앙의 내적 일관성을 보여주려고 할 뿐만 아니라, 즉 말하자면 몇몇 교리들이 어떻게 일치를 이루는지 뿐만 아니라, 현대 세계에서 우리가 헌신하는 다른 다양한 믿음과 태도들과 함께 신앙의 일관성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 임무들이 완수될 때라야, 신앙은 지성적으로 지탱될 수 있고, 인간 삶의 다양성 전체에 합치할 수 있다</p> <p>그러한 신학적 과업은 새로운 문제로, 새로운 상황으로, 새로운 지식으로서 언제고 항상 다시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 길에는 많은 함정이 놓여있다. 때로 신학자는 교회의 살아있는 신앙에서 멀리 동떨어진 아카데믹한 생각 속에서 길을 잃는다. 때로는 지나가 버린 시절의 상징이나 신화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때로는 “세련되어야” 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딱한 욕망 속에서, 신학자는 유행하는 철학에 대한 초라한 반영으로 신앙을 축소시켜버린다. 이러한 함정을 비켜갈 수 있는 신학자는 없다. 그러나 모든 신학은 몇몇 결점을 지니리라는 사실이, 신학적 책무를 져버리거나, 교회의 삶에서 신학이 차지하는 위치를 과소평가하는 일에 대한 변명은 될 수 없다. 신학은 교회에 반드시 필요하다. 교회에서 신학이 실패한다면, 그를 더 나은 신학에 대한 요구로 받아들여야지, 신학을 져버려야 한다거나, 신학 없이 지속되는 교회를 상상하는 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우리자신을 실천적 과제들에게만 바쳐야 한다거나, 교회 안에서 신학의 자리가 심리학이나 사회학 같은 과학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어쩌면 중요하다. – 나는 이러한 문제들의 중요성을 부정할 생각은 전혀 없다 – 이러한 주장들은 근본적인 신학적 사고의 필요성을 조금도 제거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그것이 명백한 신학적 이해에 의해 조명되지 않는 한 방향을 잃은 우연적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된다. </p> <p>모든 신학자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관점이 있으며 그 관점은 여러 방식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의 내용이 다양한 그리스도교 전통의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극단적이거나 종파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고,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사고와 경험들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내가 속한 신학교의 설립자들은, 당파싸움에서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고, 교회의 지배나 실천적 급진주의, 모든 극단적 교리들에서 냉정하기를 원하면서, 중도적인 시각과 감정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다정다감하게 모일 수 있는 학교를 세우고자 했다. 내가 속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오래도록 ‘성공회 중도의 길(via media Anglicana)’을 간직해왔다. 물론, 진리가 언제나 극단들 사이의 중간에 있다고 생각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어쩌면 일부 내가 취한 입장은 어떤 독자들에게는 매우 극단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엔 인간 존재 자체의 양극성에서 비롯하는 어떤 변증법이 신학 안에서 작동한다. 신학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변증법의 영향은 극단적이고 과장된 관점을 배제해왔다. 교회가 붕괴하거나 화석화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안정성과 유연함 모두가 필요하다. </p> <p>솔직히 말하면, 나는 모든 이들을 만족시키려 하지 않았다. 진정한 차이들은 얼버무리고, 모든 관점들이 진정성을 지니는 한 똑같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그릇된 에큐메니즘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신학에는 진리도 진리 아닌 것도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모든 신학적 기획이 시간낭비라는 것을 시사할 따름이다. 우리는 신학 안에 논란의 여지가 있고 분열을 초래할 수 있는 문제들이 있다는 사실과 마주해야 한다. 그 중에는 중요한 것들도 있고 덜 중요한 것들도 있다. 자연신학은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 그리스도교 아닌 종교에서 하느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 유아세례는 필요한가, 아니면 오직 성인들에 대한 세례만 있어야 하는가? 주교는 있어야 하는가? 여성성직은 있어야 하는가? 신학자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결정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그저 얼버무려질 것이다. 나는 이러한 문제들과 더불어 다른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을 정직하게 다루려고 해왔다. 그러나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기존의 입장이 전체 신학구조에서 어떻게 뒷받침되고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는 근거를 제시하려고 했다. 그리고 대안적 관점들에 대한 이해도 함께 제시하기를 원했다. </p> <p>최근 몇 년간 가장 중요했던 에큐메니칼적인 발전은 단연코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천주교의 새로운 노력이었다.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이러한 발전들을 염두에 두었고, 화체설이나 교황권, 성모신학 같은 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는 문제들을 열린 자세로, 그리고 바라기로는 건설적으로 논함으로써 그러한 발전들에 응답하고자 노력했다. </p> <p>우리와 함께 더욱 가까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 안의 다른 신앙들과 그리스도교 사이에 증가하고 있는 교류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내가 보기에, 이제는 몇몇 낡은 배타적 태도들을 버리고 다른 위대한 세계종교들을 향해 그리스도교의 일부인 열림과 관용의 정신을 보일 시기이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열린 자세를 북돋을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진리를 보여주고자 했다. </p> <p>이 책에 포함되어 있는 많은 철학적 범주들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저서들에 빚지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가 발전시킨 철학방식과 개념들은 20세기 철학적 (자연) 신학을 가능케 하는 기반을 제공했으며, 현대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교의 진리 전체를 더 깊이 표현하고 설명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신학이 철학보다 덜 중요해진다는 것을 전혀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세속적인 문화와 소통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신앙을 잘 표현해줄 수 있는 최근의 철학적 작업들을, 우리가 과거의 신학자들처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p> <p>현대의 신학자들 중에서는 칼 라너가 가장 도움이 되었다. 말하자면, 10년 전만 하더라도, 바르트나, 브룬너, 틸리 같은 프로테스탄트 거인들에게 놓여 있던 신학적 리더쉽은 이제 천주교 학자들에게 넘어갔다. 그들 중에 칼 라너(그 자신에 의하면 하이데거의 충실한 학생인)가 가장 탁월하다. 그는 신앙과 이성, 전통과 새로움, 권위와 자유 같은 특유한 신학의 변증법을 구성하는 난제들을 대가의 방식으로 다룬다. </p> <p>루돌프 불트만은 비록 내가 그의 몇몇 입장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았던 적이 없었지만, 여전히 신약성서 이해에 있어서 나의 주된 길잡이이다. 신약성서 신학에 있어서, 나는 동료인 존 녹스에게 특별히 교회의 본질에 관한 그의 깊은 통찰력에 빛을 졌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개인적으로도 많은 신세를 졌다. 감사함과 애정을 가지고 이 책을 그에게 감히 바친다. </p> <p>출판관계자가 이 작업을 나에게 맡긴지도 4년이 지났다. 편집자들의 인내와 정성, 그리고 유용한 조언들을 준 그들의 독자들에게도 감사드린다. </p> <p>존 맥쿼리 </p> <p>유니온 신학교, 뉴욕 </p> <p>신판 서문</p> <p>이 책이 출판된지도 10년이 지났다. 내 자신과 독자들에 대해서 완전한 개정판을 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개정판은 여러 새로운 소재들을 담고 있다. 거의 모든 주제들에 있어서 새롭게 생각하고 또 새로운 신학적 발전들에 주목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p> <p>많은 독자들과 비평을 준 사람들, 그리고 내가 바라는 좋은 책을 만들 수 있도록 나를 자극해준 친구들, 격려해준 출판관계자들에게 감사드린다. </p> <p>존 맥쿼리.<br /> 크라이스트 쳐치, 옥스포드. </p> <p>Principles of Christian theology </p> <p>Preface</p> <p>Christian theology seeks to think the Church’s faith as a coherent whole. It aims not only at showing the internal coherence of the Christian faith, that is to say, how the several doctrines constitute a unity, but also at exhibiting the coherence of this faith with the many other beliefs and attitudes to which we are committed in the modern world. Only if these tasks are accomplished can the faith be held intelligently and be integrated with the whole range of human life.</p> <p>The theological task needs to be done over and over again, as new problems, new situations, and new knowledge come along. But there are many pitfalls along the way. Sometimes the theologian gets lost in academic speculations that are far removed from the living faith of the Church; sometimes he clings tenaciously to the myths and symbols of a bygone age; sometimes, in a pathetic desire to be “contemporary” and “relevant” he reduces the Christian faith to a pale reflection of whatever happens to be the currently popular philosophy. No theologian can hope to avoid all the pitfalls. Yet the fact that every theology will have some flaws is not a reason for turning away from the theological task, or for underestimating the place of theology in the Church’s life. Theology is indispensable to the Church, and where theology fails, we must take this as a demand for better theology and certainly not as an excuse for turning away from it or for imaging that the Church can get along without it. It is foolish, for instance, to suggest that we need devote ourselves only to the practical tasks of Christianity, or that theology can be replaced in the Church by such sciences as psychology and sociology. However important these matter may be –and certainly I have no wish to deny their importance- they do not in the slightest degree take away the need for fundamental theological thinking. Christian action itself will become aimless and sporadic unless it is illuminated by clear theological understanding. </p> <p>Every theologian must write from his own perspective, and this will be limited in various ways. I hope, however, that the presentation offered in this book will be helpful to readers from a wide range of Christian traditions, for I do not think that I have taken up many “extreme” or “sectarian” positions, but have tried to bring to expression the broad mainstream of Christian thought and experience. The founders of the Seminary in which I teach aimed at making it one “around which all men of moderate views and feelings, who desire to live free from party strife, and to stand aloof from all the extremes of doctrinal speculation, practical radicalism, and ecclesiastical domination, may cordially and affectionately rally. The Christian communion to which I belong has for long been celebrated for the via media Anglicana. Of course it would be absurd to imagine that the truth is always midway between the extremes, and perhaps some of my positions will seem extreme enough to some readers. Nevertheless, there is a kind of dialectic that operates in theology and that arises, I believe, out of the polarities of human existence itself. The effect of this dialectic throughout the history of theology has been to exclude extreme and exaggerated points of view. The Church needs both stability and flexibility in its theology if it is to go forward, and not be either disintegrated or petrified. </p> <p>Let me say frankly, however, that I have not tried to please everyone. I have no use for that mistaken kind of ecumenism which glosses over genuine differences and seems to suggest that every point of view is equally valid, so long as it is sincerely held. Those who think in this way are really saying that there is neither truth nor untruth in theology; and this implies, in turn, that the whole theological enterprise is a waste of time. We have to face the fact that there are many controversial and divisive issues in theology, some more important, others less so. Natural theology or no natural theology? A genuine knowledge of God in the non-Christian religions, or no such knowledge? Infant baptism or adult baptism only? Bishops or no bishops? Women in the ministry, or men only? These are issues about which the theologian has got to decide, or else to become evasive. I have tried to deal frankly with these and other controversial questions; but in each case I have sought to give reasons for the position taken, to show how this positions is implied and supported by the total theological structure, and, I hope, to show also some understanding for alternative points of view. </p> <p>By far the most important ecumenical development in recent years has been the new outreach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to Christians of other communions. I have been very much aware of this development while writing this book, and have tried to respond to it by discussing openly and, I hope, constructively, such supposedly divisive issues as Mariology, the papacy and transubstantiation. </p> <p>Equally important are the increasing contacts of Christianity with other faiths in a world where we are all living more closely together. It seems to me that the time has come for the abandonment of some of the old exclusive attitudes, and for a new openness and generosity of spirit on the part of Christians toward the other great world-religions. I have accordingly tried to present the truths of Christian theology in a way which will encourage such openness. </p> <p>For many of the philosophical categories employed in this book, I am indebted to the writings of Martin Heidegger. As it seems to me, his way of phiosophizing and the concepts he has developed provide the basis for a viable twentieth-century philosophical (“natural”) theology, and can be used further for the articulation and elucidation of the whole body of Christian truth in a contemporary way. This does not mean in the very slightest that our theology is being made subservient to a philosophy; but it does mean that, like theologians of the past, we can avail ourselves of such current philosophical work as will best serve to express the faith in terms that communicate with the secular culture of our time. </p> <p>Among contemporary theologians, I have found Karl Rahner the most helpful. In saying this, I am acknowledging that the leadership in theology, which even ten years ago lay with such Protestant giants as Barth, Brunner, and Tillich, has now passed to Roman Catholic thinkers. Among them, Karl Rahner (himself a penetrating student of Heidegger) is outstanding. He handles in a masterly way those tensions which constitute the peculiar dialectic of theology mentioned above: faith and reason, tradition and novelty, authority and freedom, and so on.</p> <p>Rudolf Bultmann has remained my principal guide in the understanding of the New Testament, though I have never been uncritical of some of his positions. In New Testament theology, I am indebted also to my colleague, John Knox, especially for his profound insights into the nature of the Church; and I owe him so much in other and more personal ways that I have ventured to dedicate this book to him, in gratitude and affection.</p> <p>Four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ublishers invited me to undertake this work. I wish to thank their editors for their patience and courtesy, and their readers for some useful suggestions.</p> <p>John Macquarrie </p> <p>Union Theological Seminay, New york</p> <p>Preface to the New Edition</p> <p>It is ten years since this book was first published, and I have felt it a duty both to my readers and to myself to make a thorough revision The revised edition contains a great deal of new material; indeed, there is scarcely a topic on which I have not felt obliged to think afresh and to take note of new theological developments.</p> <p>I wish to thank the many reviewers, critics, commentators, and friends who have stimulated me to produce what I hope will be a more adequate book, and also the publishers for their encouragement.</p> <p>John Macquarrie </p> <p>Christ Church, Oxford. </p> viamedia on "성공회 정체성 - 미국 성공회 한 프로젝트"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59#post-1001 화, 09 2월 2010 12:11:17 +0000 viamedia 1001@http://liturgy.skhcafe.org/ <p>ssyu1 님 / cranmerian 님</p> <p>매우 중요한 의견을 주신 두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p> <p>몇 가지 토를 달면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p> <p>1. 정체성 논의는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정체성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맥락과 신앙 경험 안에서 발전시키고 구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체성은 항상 어느 정도 "배타성"을 염두합니다. 그리고 중립적인 의미에서 이런 배타성은 어떤 집단의 고유한 특성을 드러냅니다. 누구든지 어떤 특성이 있어야, 그것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공헌을 할 수 있습니다. 성공회의 정체성을 생각하는 것은 성공회의 신앙 전통 속에서 다른 신앙 전통, 다른 종교 전통에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느냐와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공헌할 내용이 없으면, 굳이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ㅎㅎ</p> <p>2. 성공회 정체성의 주제 자체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그 주제를 함께 공유하고 정리하고 있느냐는 점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 경험을 함께 나누고 살피고 그것을 정리하는 노력 속에서 성공회 정체성, 그리고 우리의 성공회 전통이 생겨납니다. 그런 노력이 한국 성공회에 부족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미국 성공회의 이번 보고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한국 성공회에서 이런 '개념'잡기 노력이 쉽지 않다면, 다른 나라의 경험과 개념을 우리에게 비춰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됩니다. 특히 이번 보고서의 주제들은 그동안 산발적으로 언급되었던 성공회의 특징들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들을 실마리로 삼아 우리의 신앙 전통과 경험에 대한 고민을 발전시켜 나갔으면 합니다. 그 실마리 없이 맨바닥에서 시작하는 것은 효율성도 없고, 성공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p> <p>3. 지금까지 이런 노력을 교구나 관구 차원에 기대했습니다. 혹은 몇 사람의 신학자에게 기대했습니다. 매우 잘못된 방법입니다. 그 잘못된 방법은 결과를 봐서 압니다. 그동안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내용도 없습니다. 또 염려하신 대로, 어떤 성과도 자신의 권위 혹은 힘의 과시를 위해서 독식하고 마는 위험이 있습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방법,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협력하는 방법입니다.</p> <p>4. 그런 점에서 이 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미 cranmerian 님이 제안하신 대로, 신자들이나 성직자들 자신이 나름대로 관심있는 주제와 내용에 대해서 공부하고 논의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 논의들이 이 포럼에서 나눠졌으면 합니다. 수렴되어 어떤 결과가 마련된다는 더욱 좋은 일이겠지만, 그 과정 자체 만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이 포럼을 활성화시켜 주십시오.</p> <p>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물적인 자원입니다. 인력이 중요하고, 또 그것을 정리해 내는 시간과 비용이 중요합니다. 재정적 지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일을 만들려면 재정적인 지원을 생각해야 합니다. 산발적으로 이곳 저곳 중심없이 돈이 쓰이지 않고, 중요한 일을 위해서 집중적으로 써야 어떤 성과물이 나옵니다. 특히 우리 한국 성공회처럼 여러 면에서 자원/재원이 부족한 처지에서는 이런 지원의 집중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합니다. </p> viamedia on "캔테베리 대주교, 로마 강연 번역문"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62#post-994 일, 22 11월 2009 11:55:03 +0000 viamedia 994@http://liturgy.skhcafe.org/ <p>@ 일러두기</p> <p>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 배경 설명<br /> 캔터베리 대주교의 로마 방문과 강연<br /> 강연 내용 요약<br /> 번역에 대하여<br /> 용어 해설<br /> 인용 및 배포</p> <p>@ 첨부 문서 (아래에서 pdf 다운로드)</p> <p>캔터베리 대주교 로마 강연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br />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에 대한 간단한 해설 - 주낙현 신부<br />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에 대한 미국 성공회의 논평 - 크리스토퍼 엡팅 주교</p> <p>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 배경 설명</p> <p>2009년 10월 19일 천주교 교황청 신앙과 교리 성성은, 성공회를 떠난 특정 그룹들이 천주교로 들어오고자 할 때, 이들을 받아들이고 이들을 위한 특별 관리 교구를 만들도록 하며,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성공회 전례의 일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교황청은 이번 조처는 성공회를 떠난 특정 그룹이 지난 몇년 동안 요청해 온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조처를 담은 [사도 헌장]은 근 시일 내에 발표될 것이라고 했고, 2009년 11월 4일 "ANGLICANORUM COETIBUS"라는 제목의 교황령 [사도 헌장]을 발표했습니다.</p> <p>한편, 교황청은 이 조처를 발표하기 2주 전에야 이와 관련 사실을 캔터베리 대주교 측에 전달했습니다. 발표 당일인 10월 19일 영국 천주교 빈센트 니콜스 대주교와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 발표에 관한 공동 기자 회견을 가졌습니다. 이 공동 기자 회견은 캔터베리 대주교가 이 발표에 동의한다는 의미가 아니며, 갑작스러운 발표에 대한 혼란을 막고자 기자 회견에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번 조치가 불확실하게 떠도는 이들에게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p> <p>이 조처 발표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은 이미 제가 10월 21일 관구 게시판에 올린 글과, 11월 1일자 [성공회 신문]에 기고한 내용을 참조할 수 있으며, 제 개인 블로그인 <a href="http://viamedia.or.kr" rel="nofollow">http://viamedia.or.kr</a>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문서에 첨부)</p> <p>한편, 미국 성공회 교회 일치와 종교 간 관계 책임자인 크리스토퍼 엡팅 주교는 이 교황청 조처에 대한 논평을 짧게 발표했습니다. 그것은 이 조처가 양 교회 간에 있었던 교회 일치 논의의 맥락에서 나온 것은 아니며, 그 성과를 훼손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이 조처로 천주교로 가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천주교 신자일 뿐이고, 이 조처가 교회 일치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이 논평은 관구게시판과 서울교구 성직자 카페, 그리고 성공회 신학-전례 포럼에 게시했습니다. <a href="http://liturgy.skhcafe.org" rel="nofollow">http://liturgy.skhcafe.org</a> (이 문서에 첨부)</p> <p>캔터베리 대주교의 로마 방문과 강연</p> <p>한편,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미 계획에 잡혀 있던 대로, 로마에 방문하고 강연을 했으며, 교황 베네딕도 16세와도 회담을 가졌습니다. 회담에 앞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열린 요한네스 빌레브란트 추기경(교황청 교회 일치 평의회 초대 의장, 1909-2006) 탄생 100주년 기념 강연(11월 20일)에 초대받아, 교회 일치의 신학적 주제와 도전에 관한 강연을 했으며, 여기서 교황청 [사도 헌장]의 파장에 즈음하여, 교회 일치 대화의 방법론을 재정리하고, 논란이 되는 신학적 주제들을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p> <p>캔터베리 대주교의 강연은 성공회의 주장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 지난 40여 년 동안 성공회와 천주교, 그리고 천주교가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들과 나누며 내놓았던 교회 일치 대화 문서의 정신과 그 신학을 되새겨 주었습니다. 이 점에서 캔터베리 대주교는 최근 천주교의 행태들과 조처들이 그간 스스로 참여했던 교회 일치 대화의 정신을 무시하거나, 최소한 이와는 모순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p> <p>강연 내용 요약</p> <p>위에 말한대로,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 강연에서 지난 40여년 동안 성공회, 천주교, 정교회, 루터교, 개혁 교회 등이 참여한 교회 일치 대화와 그 문서들을 되짚으며, 교회 일치 대화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전체가 발전시켰던 교회론(Ecumenical Ecclesiology)을 되새긴 다음, 교회 일치 대화에서 논란이 되는 몇가지 주제들, 특별히 천주교와의 관계에서 논란이 되는 사안들에 대해서, 이 교회론에 바탕하여 비판적인 물음을 던졌습니다. </p> <p>그 내용의 개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p> <p>1. 지난 40여년 동안 그리스도교계는 교회 일치 대화를 통하여 교회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에 어떤 수렴점에 도달했다. 그것은 교회가 근본적으로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있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반영하는 관계여야 한다는 것이고, 이 점에서 교회는 하나인 이중적인 선교적 전망,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communion), 그리고 이에 따라 이웃과 나누는 친교를 지니고 있다. 교회 일치 대화와 실천의 모든 내용은 바로 이 교회 이해에 기초해야 한다. </p> <p>2. 특히, 선교를 위해 일치된 교회를 향한 지난 40여 년의 대화 속에서 볼 때, 이 교회 일치의 선교적 교회론에 따라서, 일차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을 식별해야 한다.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것에 합의해 놓고서, 부차적인 것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일이 타당한 일인가?</p> <p>3. 이 점에서 세가지 신학적 주제가 부각된다. 권위의 문제(교도권, magisterium)), 수위권(primacy), 그리고 지역 교회(local church)와 보편 교회(universal/catholic Church)의 관계이다. 거듭하거니와, 이 신학적 주제들은 천주교를 포함하여 그리스도교가 참여한 교회 일치 대화의 어떤 합의 원칙에 바탕하여 논의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p> <p>4. 권위의 문제: 교회의 권위는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친교를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느냐에 달려 있다. 세례받은 이들이 공동체적인 친교를 지탱하기 위한 책임이 바로 권위의 근간이다. 이 책임을 다하기 위한 상호 협력으로서만 권위가 설 수 있다. 규율적, 위계주의는 권위가 아니다.</p> <p>5. 수위권 문제: 수위권 문제는 교회 일치의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러나 법적 제도적 장치로서만 수위권을 이해하면 이는 곧 통제의 장치가 될 수 있다. 다양한 공동체들이 서로 다르나 함께 친교하면서 하나의 공동체(community of communities)를 이룰 때, 수위권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길이 열린다. 한편 교황청의 [사도 헌장]에 말한 조치는, 성공회를 떠난 이들을 배려한 사목적인 조치일 뿐, 교회론적인 근거는 없다.</p> <p>6.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의 관계: 교회가 하느님과 맺는 친교의 거룩함 속에서 세례와 성찬례라는 성사를 나누는 일에 충실할 때, 그 자체로 보편 교회를 담고 있다. 지역 교회의 어떤 결정, 예를 들어 여성 성직에 관한 결정은 바로 이 세례받은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과 누리는 친교의 거룩함이라는 전망 속에서 진행된 것이라면, 그것은 지역적 결정이지만, 역시 보편 교회의 한 부분이다. 최소한 성공회의 여성 성직 서품은 교회론에 대한 교회 일치 대화의 성과와 원칙을 지역적으로 확장시키고 발전시킨 것이었다. 여성 주교 문제가 실제로 교회의 선교를 훼손한 적이 있는가?</p> <p>7. 불일치 속에서 갖는 일치에 대한 전망: 지난 40여 년 일치 대화에 참여하면서 얻었던 신학적 원칙을 되새기며 여기에 자신을 내어 놓고 성찰해야 한다. 다시 자신의 틀 속에서 이 원칙들을 협소하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은 모순된 일이다. 그간의 대화에서 확인한 영적이고 성사적인 전망이 가져다 주는 도전에 스스로를 맡겨야 한다. </p> <p>번역에 대하여</p> <p>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글들은 의미들이 중첩되어 있어서 읽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영어가 평이하지 않으니 우리말 번역이 힘겹습니다. 이번 강연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능력의 한계도 분명한 터라, 옮기는 과정에서 곤란이 겹쳤습니다. 몇가지를 머리에 담아 번역했습니다. </p> <p>우선 직역을 강조했습니다. 직역과 의역의 경계는 없고, 정확한 번역과 잘못된 번역만 있다는 말에 수긍하지만, 굳이 번명하자면, 캔터베리 대주교의 글 자체에 담긴 조심스러운 수사법을 담아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니 불편한 우리말이 눈에 띌 것입니다. </p> <p>그런 와중에도 제 능력의 한계(우리말/영어)때문에 우리말로 옮기기 어려운 표현들은 풀어쓰거나 의역했습니다. 또한 이미 통용되는 번역어 가운데 잘못 번역되었거나,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들에는 새로운 번역어를 썼습니다. </p> <p>이 모든 과정에서 캔터베리 대주교의 깊은 뜻들이 왜곡되지 않을까 저어했지만, 우선은 독자들에게 접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겠다는 만용을 부렸습니다. 오역이나 잘못된 표현은 지적해 주십시오.</p> <p>용어 해설</p> <p>번역어로 사용된 몇가지 용어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덧붙입니다.</p> <p>천주교: Roman Catholic Church 에 대한 우리말은 '천주교'이니 모든 "Roman Catholic (Church)"에 해당하는 단어는 '천주교'로 번역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가톨릭'이라는 용어때문이기도 합니다.</p> <p>가톨릭: 우리말 음차로 쓰는 '가톨릭'은 catholic 에서 나온 말입니다. "보편적"(universal)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어디에서든 'catholic church'는 "(Roman) Catholic Church"와 대비되어, '보편 교회'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러니 '가톨릭'은 천주교가 독점적으로 쓸 말이 아닙니다. 번역문에 나오는 모든 '가톨릭'은 '보편적'으로 뜻으로 쓰입니다. 이 표기에 대한 논의를 이미 [성공회 신학-전례 포럼]에서 한 적이 있으니 참조할 수 있습니다.</p> <p>자녀됨을 통한 공동의 거룩함: 교회의 목적을 설명하는데 거듭되는 말입니다. filial and communal holiness 등의 표현을 우선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p> <p>친교 / 친교적 공동체: 이 번역문에 나오는 모든 '친교'라는 말은 'communion'의 번역말입니다. 그저 '코뮤니온' 혹은 원어를 따서 '코뮤니오'로 쓸까 했지만, 친교로 정했습니다. 좀더 설명이 깃든 번역어라면 '친교의 공동체' 혹은 '사귐의 공동체'라고 하면 좋겠으나, 어수선해 보여서 그리 했으니, '친교의 공동체' 쯤으로 읽어 주십시오. </p> <p>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 교회론에서 '지역 교회'(local church)라는 말은 '보편 교회'(universal church)와 함께 쓰여, 삶의 맥락에 지역적으로 존재하는 실제 교회를 말합니다. 이때 '지역 교회'는 개별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구 혹은 관구 같은 개별 교회의 지역적 연합을 가리킵니다.</p> <p>인용 및 배포</p> <p>이 번역문은 주낙현 신부의 사적인 공부와 성공회 성직자 및 신자들의 편의를 위한 것입니다. 원저자 및 번역자의 허락 없이 내용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인용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합니다. 또한 번역문 위치 링크 이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배포하지 말아 주십시오.</p> <p>PDF 다운로드 연결: (이미 공지한대로 강연 번역문 전체는 한시적으로만 공개하고, 오늘로 다운로드를 닫았습니다. 강연 전문은 곧 소책자로 출간되어 신자들을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후에 다시 이곳에 등록하겠습니다. 2009년 11월 28일)</p> <p>평화를 빌며</p> <p>주낙현 신부 합장</p> <p>블로그 <a href="http://viamedia.or.kr" rel="nofollow">http://viamedia.or.kr</a><br /> 트위터 <a href="http://twitter.com/viamedia" rel="nofollow">http://twitter.com/viamedia</a><br /> 인터넷 성공회 지식 프로젝트 후원 <a href="http://viamedia.or.kr/support" rel="nofollow">http://viamedia.or.kr/support</a> </p> Cranmerian on "성공회 정체성 - 미국 성공회 한 프로젝트"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59#post-992 화, 10 11월 2009 15:38:33 +0000 Cranmerian 992@http://liturgy.skhcafe.org/ <p>정체성 논의가 뜨겁게 일어나고 있다니 반가운 소식입니다. </p> <p>하지만 이에 대한 환경에 대한 우려를 너무 의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체성을 표현하는 주제들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이를 어느 한 모임에서 모두 소화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미국성공회처럼 다양한 인적 자원과 막강한 재정적 후원이 있지 않는 한,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이를 모두 고려하기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p> <p>오히려 교구의회나 관구의회에서 정식으로 특별위원회를 상설하여 인적 자원과 재정적 자원을 확실하게 지원한다면 어느 정도의 방향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p> <p>이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양한 주제들중 하나를 연구하는 분들이 이를 발표하고 공유할 수 있는 '광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함께 모여 논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곳의 포럼과 같은 곳도 좋은 광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초기 단계에서 비공개적인 공간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두번째로는 이러한 논의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주도적인 모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 <p>거창하게는 '...연구회' 일 수도 있고 기존의 모임이 있다면 그것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성직자들을 다 참여시켜야 할 필요도 없으며, 모두에게 강요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관심있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의견과 연구과정을 공유하고 서로 자극받는다면 좋은 모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실이 생긴다면 그때에 보다 공개적인 활동으로 전파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p> <p>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앞서 발표하신 분들처럼 더 이상 현실의 환경 때문에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이미 독자적으로 공부하거나, 소모임에서 논의하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꼭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 연결고리를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p> ssyu1 on "성공회 정체성 - 미국 성공회 한 프로젝트"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59#post-990 수, 21 10월 2009 11:50:15 +0000 ssyu1 990@http://liturgy.skhcafe.org/ <p>꼭 필요하고 흥미로운 연구라고 생각합니다.<br /> 수 많은 교단중에서 '정체성'이라는 용어에 유독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곳이 성공회가 아닌가 합니다.<br /> '정체성'의 고민은 성공회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 성공회 역사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성공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체성에 관해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면, 역사와 시대속에서 교회가 반응했던 역사에 관해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히 성공회를 드러내는 것이겠지요. </p> <p>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대와 직면한 성공회를 분명히 말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성공회의 연구에 등장하는 이 주제들은 오늘날 미국 성공회가 세상을 마주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당연히 미국성공회의 정체성은 이 주제들로부터 형성되어 갈 것이고요. </p> <p>그렇다면 한국성공회는? 한국성공회에서도 그러한 작업들이 있었으면 합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시대의 요구와 우리의 문제의식들을 모을 수 있다면 이처럼 몇 가지 주제들이 나올 듯 합니다. 그러면 그 주제들을 중심으로 정체성 논의를 지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p> <p>그러나 '주제'그 자체가 꼭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주제'는 단지 정체성 논의를 진행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할 뿐이지요. 예를 들자면 이러한 경우이겠습니다. 만일 한국성공회에서 이 작업을 하였을 경우, '좌파적'이라는 주제가 평신도 층에서 제시되었다고 가정해 봅니다. 물론 반대편에 있는 이들은 '사회참여적'이라는 주제로 해석해서 받아들일 수 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생각하기에는 그들이 사용하는 '좌파적'이라는 용어에는 왜곡되어진 그들의 정치적 시선과 정서가 너무도 깊게 베여있습니다. 그럴경우, 당연히 그들이 제기하는 '좌파적'이라는 주제가 성공회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성공회가 진실로 그들이 생각하는 '좌파적'인가에 대해서는 논의를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p> <p>현재, 한국성공회 내에서도 정체성논의가 뜨겁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성직자들 사이에서 그러한 분위기는 더 고조되어 갑니다. 한국성공회 역시 몇 가지 방향성을 가지고 주제를 설정해 보는 일이 필요하겠지요. 그러한 생각이 간절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염려스러운 현실이 우리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p> <p>그 현실이란,</p> <p>성공회는 당연히 이런 교회다 라는 전제를 갖고서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주제를 설정하는 일,<br /> 소모적 논쟁만을 부각시켜 그것이 정체성을 결정짓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일,<br /> 설정된 주제들을 진지한 논의과 고민없이 무 비판적으로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인정해버리는 일,<br /> 정체성 논의에는 참여하지 않은체 필요한 것만 쏙 빼먹고 결국 자신의 뜻대로만 움직이려는 방관주의와 파렴치함,<br /> 논의 구조의 경직성 </p> <p>등등입니다. </p> viamedia on "성공회 정체성 - 미국 성공회 한 프로젝트"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59#post-987 토, 10 10월 2009 02:26:37 +0000 viamedia 987@http://liturgy.skhcafe.org/ <p>한국 사회에서 "성공회 신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성공회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우리에게 오랜 사목적, 신학적 고민이요, 좀더 본능적으로 생존이 달린 주제이기도 합니다. 여러 논의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하고 싶은 개인적인 의견이 있지만, 잠시 접고 한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p> <p>최근 미국 성공회는 몇년 동안 "성공회 정체성 프로젝트"(Episcopal Identity Project)를 진행하여, 이를 기반으로 성공회의 구체적인 선교 목표와 사목 방향을 잡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고서의 일부를 우선 발표했습니다. 요약된 보고서 내용 가운데 몇가지만 뽑아서 옮겨 놓습니다.</p> <p><blockquote>왜 "정체성"인가?</p> <p>"우리는 누구인가?"<br /> 굳이 성공회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br /> 우리의 중심적인 가치는 무엇인가?<br /> 어떤 점에서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과 다른가?<br /> 우리가 지닌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가?<br /> 우리가 가진 가능성과 기회는 무엇인가?</p> <p>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는지를 알지 못하고서, 우리 교회에서나 세계 속에서 지도자로 설 수 없는 일이다. </p> <p>비판과 고민이 교차한다. 한편으로는 다른 교회의 자료를 받아들여서 그 경험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삼자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우리가 지켜왔던 정체(polity)를 끝까지 밀고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p> <p>이런 고민은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큰 문제는 이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투신이 부족하다는 것이다.<br /> </blockquote></p> <p>이런 정체성에 대한 고민 속에서, 미국 성공회는 여러 대학 연구 기관과 실천 신학자들을 통해서 미국 성공회 성직자들과 신자들에게 성공회의 정체성에 관한 인터뷰와 설문 조사를 해서, 그 강조된 내용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p> <p><blockquote><strong>성공회 정체성의 4가지 분류</strong> (성공회 신자들이 선호하고 중요시 여기는 것을 순서로 분류)</p> <p><strong>핵심 주제:</strong><br /> 그리스도 중심성 - 성사적 - 공동기도서 - 성육신적 - 성서적 - 사목적 </p> <p><strong>2차 주제:</strong><br /> 이성 - 포용적 - 전통 - 공동의 전례 - 예식 - 경험 - 사회의 변화에 대한 대응</p> <p><strong>3차 주제:</strong></p> <p>중용의 길 - 다양한 신학적 입장 - 에큐메니칼 - 다양한 형태의 영성 훈련 - 예언자적 - 사회 변화를 위한 힘 - 함께 나누는 권위</p> <p><strong>기타 주제:</strong><br /> 엘리트 - 구원의 통로 - 고백적<br /> </blockquote></p> <p>어느 주제 혹은 가치들 하나도 빠져서는 안될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성공회 신자들이 느끼고 있고, 또한 바라고 있는 정체성의 주제를 그 경중으로 분류해 살펴보는 것은, 우리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선명하게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어디서부터 출발할 지, 어떤 점에 강조를 두어야 할 지가 분명해진다는 것이지요.</p> <p>여기서 우리 한국 성공회가 배울 점들은 무엇일까요? 공유할 점들은 무엇이고, 우리와 동떨어진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어느 지점에 관심을 두고 있나요? 그리고 그 무게와 지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 교회를 쇄신하기 위해서 우리가 출발해야할 지점, 아니 그 일의 시작과 방향은 어디여야 할까요? 이른 아침에 읽은 자료로 바탕으로 급한 생각을 덧붙였습니다.</p> <p>평화를 빌며</p> <p>주낙현 신부</p> <p>참조: 프로젝트 웹페이지: <a href="http://episcopalchurch.org/aroundonetable/" rel="nofollow">http://episcopalchurch.org/aroundonetable/</a>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