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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태그: 성찬례 http://liturgy.skhcafe.org/ A Korean Anglican Theology & Liturgy Forum en Mon, 22 Jan 2018 16:09:37 +0000 viamedia on "전례 여행 20 - 전례와 선교"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710#post-1312 일, 15 1월 2012 14:25:48 +0000 viamedia 1312@http://liturgy.skhcafe.org/ <p>20. 세상의 종말 - 전례와 선교</p> <p>“다 이루었다.”</p> <p>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의 막바지에 숨을 거두시며 남기신 말씀이다. 다 이루는 일. 이것이 교회가 말하는 종말의 원래 뜻이다.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이 채워지는 하느님의 시간이 종말이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께서 다 이루신 일의 행적을 되돌아 살피며 다시 기억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오늘과 내일, 하느님께서 만드신 창조세계를 부족함 없이 완성하시려는 일에 참여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전례 안에서 이 기억과 참여의 행동을 시작하고 몸으로 수련한 뒤 세계로 파송 받는 선교 공동체이다. 그러니 교회는 예수께서 이루신 종말을 전례와 선교 안에서 지금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 공동체이다.</p> <p>종말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가 있다. 그 극단적 사례가 바로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날짜를 계산하여 그날을 믿고 준비하는 이들이다. 사회에 희망을 둘 수 없고, 교회에서 신뢰를 발견하지 못할 때마다, 그 실망한 이들을 꼬드겨 사익을 챙기는 못된 거짓 혹설이다. 이들은 교회 역사에 되풀이해서 등장했다. 물론 정해진 날짜에 아무런 일이 없어서 웃음거리가 되기 일쑤였다.</p> <p>그러나 여러 교회와 지도자가 잘못 가르쳐서 이런 불씨가 생겼다. 심판에 대한 공포로 종말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땅을 세속이라 경멸하고 하늘만 거룩한 것이라고 분리해서 가르친 탓이다. 게다가 세상과 사회에 대한 건전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교회는 사람들의 절망감에 기름을 붓는다. 시한부 종말론자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이다. 그러니 그들만 나무랄 일이 아니다. 이런 잘못된 이해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반쯤은 그들과 다름없다.</p> <p>반면, 전례를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삼는 교회는 다르다. 우리는 성찬기도 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가로질러 하느님의 시간을 완성하는 구원의 역사를 기억한다. 우리가 한목소리로 외치는 “신앙의 신비” 선포는 이 종말의 뜻을 바르게 세운다.</p> <p>“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p> <p>하느님은 성육신하시어 우리와 살며 고통당하다 죽으셨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전례 공동체 안에 함께 하신다.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도록 우리를 초대하시고, 주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그분의 잔칫상에 먹고 마시도록 한다. 종내에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 모든 역사는 부족함 없이 거룩하게 완성될 것이다. 이 과정 모두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요, 하느님 시간의 완성이요, 종말이라는 선포이다.</p> <p>종말은 교리가 아니며, 선포에 머물지도 않는다. 종말은 교회의 경험이다. 예수 안에서 펼쳐진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품은 교회가 그 완성인 하느님 나라를 향해 끝까지 걸어가는 순례 경험이다. 이 순례의 핵심은 반복해서 거행하는 성찬례이다.</p> <p>성찬례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행동이요, 시간이요, 공간이다. 메시아가 베푸는 잔칫상이다. 잔칫상에 와서 우리는 차별 없이, 부족함 없이 와서 함께 부르게 먹으라고 초대를 받았다. 축성된 음식을 먹고 우리 자신이 축성되어 변화하라는 초대요, 경험이다.</p> <p>성찬례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고 희망한다. 이미 맛보고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긴장감이 신앙인의 겸손함을 이끌고, 아직 부족한 현실을 견디며 변화를 꿈꾸고 희망하도록 돕는다.</p> <p>성찬례는 미리 맛본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우리를 파송한다. 선교는 어떤 지적 교리나 도덕적 규율을 선전하거나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는 성찬례 안에서 우리가 경험한 삼위일체, 그 춤추는 친교의 삶을 우리 몸으로 이 세상에서 증언하는 일이다.</p> <p>그러니 전례와 걷는 신앙의 순례 여정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p> <p>‘종말의 시간이 전례를 통해서 우리 삶에 파고들어온다. 전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다시 하느님 나라는 전례, 특히 성찬례를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온다. 전례가 끝나고 우리는 이 종말의 하느님 나라를 가지고 세상 속에 나아간다. 성찬례는 하느님 나라의 성사이다.’</p> <p>(성공회 신문 2012년 1월 14일치 6면)</p> <p>사례: 지난 1년 동안 “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을 사랑하고 격려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여러가지 부족한 점이 많은데도, 많은 분의 관심과 격려로 힘을 얻어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좋은 지면을 허락해 주신 성공회 신문사와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p> viamedia on "전례 여행 19 - 전례와 사회"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708#post-1309 금, 23 12월 2011 07:00:22 +0000 viamedia 1309@http://liturgy.skhcafe.org/ <p>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p> <p>19. 성찬례의 인간 - 전례와 사회</p> <p>교회와 사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스도교의 여러 교파는 이 질문에 다양하게 답하고 행동했다. 교회는 세속 사회에 전혀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은가 하면, 예수님께서 정치와 종교 권력을 저항하고 비판하다 희생당하신 분이므로 사회에 대한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는 일은 당연히 교회의 사명이라는 주장도 그에 못지않다. 교회의 사회 참여를 둘러싼 논란은 그 줄다리기가 팽팽하다. 이 일로 교회 안에서는 분란이 일기도 한다.</p> <p>그렇다면 전례 전통에 충실한 성공회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성공회는 그 질문을 좀 다르게 던진다. 교회의 중심 행동인 전례는 사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다시 말해, 전례 안에서 선포되는 말씀, 그리고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룩하게 변하는 사건, 함께 모여서 그 축성된 몸을 먹고 나누는 우리는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성공회 신자는 전례의 사건 속에서 이런 질문에 답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책임 있는 행동을 살피려 한다.</p> <p>‘말씀’이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그리스도이시다. 성서는 ‘말씀이신 하느님-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신 사건을 우리에게 되새겨주는 그릇이다. 적어도 전례 전통의 교회에서는 ‘말씀의 전례’에서 읽는 성서 독서를 성직자나 신자 개인의 호불호나 멋대로 선택하지 않는다. 세계 여러 교회가 함께 연구하여 지정한 정과표를 따른다. 좋든 싫든 성서에 드러난 말씀을 그대로 듣겠다는 뜻이다. 나를 비판하고 호통치는 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그 말씀이 사회를 향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피하고서는 말씀을 듣는 신앙인이라 말하기 어렵다.</p> <p>모든 전례의 목적은 변화이다. 특히 성찬례는 그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낸다. 전례 참여의 중요한 행동 가운데 하나는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을 제대 앞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우리의 땀과 수고, 우리의 잘못과 상처, 우리의 기쁨과 슬픔, 결국 세계 전체를 제대 앞으로 가져온다.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을 변화시켜 주시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 거룩한 변화가 일어나는 사건 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래서 빵과 포도주는 세계 전체를 상징한다. 성찬례 안에서 하느님은 이 세계 전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룩하게 변화시키신다. 이것이 축성이다. 이 변화의 사건을 믿지 않고는 신앙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p> <p>영성체는 세계 전체가 제대 위에 바쳐져서 거룩하게 변화된 것을 나누어 먹는 행동이다. 우리는 그 변화의 결과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 안에 들어가 우리 몸과 영의 에너지와 피가 되어 우리 몸을 돌아다닌다. 새로운 몸과 피를 받았으니 우리 자신도 변한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우리 몸을 돌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 몸은 거부반응을 일으켜 몸이 굳고 더는 살아갈 수 없다. 게다가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을 여럿이 나누어 먹었으니, 교회를 떠나 우리가 들어가 살아가는 세계와 사회도 우리를 통해서 변화와 나눔의 은총이 일어나야만 한다. 이 변화된 그리스도의 몸에 비추어 우리 삶과 우리 사회에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고, 우리 자신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아간다면? 이는 우리가 진정으로 ‘영성체’하지 않았다는 말이다.</p> <p>적어도 성공회 전통은 우리가 전례 안에서 변화를 경험하는 만큼, 사회도 그렇게 변할 수 있으며, 변해야 한다는 희망을 고수했다. </p> <p>“그리스도인은 전례를 통해서 ‘경제적인 인간’(homo economicus)이나 ‘소비적인 인간’(homo consumericus)이기를 포기한다. 대신 ‘성찬례의 인간’ 즉 ‘나눔의 인간’(homo eucharisticus)으로 변화된다.” 지난 세기 최고의 전례학자 그레고리 딕스(Gregory Dix) 수사 신부의 말이다.</p> <p>이것이 전례를 통해서 경험하는 거룩한 변화의 진정한 뜻이며, 전례가 비추는 사회의 비전이다.</p> <p>“거룩한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예배하려 한다면, 우리는 이제 자신의 성막을 나와, 우리 안에 신비하게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세상의 거리로 걸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도시와 마을 사람들 안에서 같은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 빈민촌에 머무시는 예수님에 대한 측은지심이 없이는 우리는 성막에 있는 예수님을 예배하노라 할 수 없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바쳤던 선교사 프랭크 웨스턴 주교의 외침이다.</p> <p>이런 고민과 전통을 돌아보며, 우리는 우선 교회와 전례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세밀하고 신실하게 물어야 한다. 전례 안에서 읽고 듣는 예언자적인 말씀이 불편하더라도 귀와 마음을 열어 그 도전을 받아들이는가? 사적인 고민뿐만 아니라 사회와 세계의 갈등과 아픔을 제대 위에 봉헌하는가? 하느님께서 그 세속적인 것들을 축성하여 우리에게 거룩한 몸으로 나누어 주실 때, 거리낌 없이 우리 살과 피로 먹고 마시는가? 그리하여 우리 교회와 자신도 그 몸을 모시고 세상 밖에 나가 세계와 사회도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실천하는가? </p> <p>(성공회 신문, 2011년 12월 24일자) </p> viamedia on "전례 여행 18 - 성무일도와 성찬례"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706#post-1304 금, 09 12월 2011 05:18:56 +0000 viamedia 1304@http://liturgy.skhcafe.org/ <p>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p> <p>18. 성전의 두 기둥 - 성무일도와 성찬례</p> <p>천하장사 삼손은 들릴라의 꼬임에 넘어가 머리칼을 잘리고 눈까지 빼앗긴다. 결국, 그는 불레셋 사람의 신전 잔치에 무기력하게 끌려가 조롱거리가 된다. 눈멀어 절망 속에 있는 삼손은 주위 사람에게 그 신전을 떠받치는 두 기둥 사이에 자신을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하느님께 마지막으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고는 두 기둥을 밀어 넘어뜨린다. 신전은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p> <p>이 비극적인 마지막 순간은 교회의 삶에 역설적인 질문을 던진다. 교회의 삶이라는 성전을 지탱하는 두 기둥은 무엇인가?</p> <p>전례 전통의 교회에서 교회 생활의 두 기둥은 단연 성무일도와 성찬례이다. 이 두 전례 행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 이래 교회 전통 속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의 가장 깊은 젖줄이었다. 현대 교회의 여러 예배 모양도 바로 이 두 젖줄에서 비롯한다. 건강한 전례 전통 교회를 가꾸려면, 성무일도와 성찬례의 뜻과 실천, 그리고 두 전례의 관계를 잘 살피며 실천해야 한다.</p> <p>성무일도는 조금 무거운 번역어이다. 성무일도라는 말은 매일 기도가 수도원의 발전에 따라 수도자들이 매일 정해진 시간에 따라 드리는 의무적 기도라는 뜻을 담은 용어이다. 매일 기도는 참여자와 열리는 곳에 따라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발전했다. 하나는 일반 교회의 매일 기도요, 다른 하나는 수도원의 매일 기도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 전통은 대부분 사라지고 수도원 전통만이 살아남았다. 다시 말해 일반 교회에서는 한동안 매일 기도가 사라졌다는 말이다.</p> <p>성무일도를 다시 교회의 예배 생활에 회복한 사람은 성공회 전례 개혁가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였다. 크랜머는 수도자의 전유물이 된 성무일도를 대폭 개정하여 공동기도서에 실어 모든 신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아침의 여러 기도를 종합해서 아침 기도(조도)를, 저녁과 밤의 여러 기도를 엮어서 저녁 기도(만도)를 마련했다. 1930년대 주일 성찬례 회복 운동이 있기 전까지, 아침 기도는 주일 예배를, 저녁기도는 성가대가 함께 하는 아름다운 노래 예배(이븐송)로 자리 잡아 성공회 영성을 키웠다.</p> <p>번역어와 역사가 어떻든, 성무일도는 세 가지 구성 요소가 뚜렷하다. 즉 말씀 읽기와 찬양, 그리고 세상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이다. 교회 전통이 찬양에 좀 더 강조점을 둔 반면, 수도원 전통은 말씀 읽기를 강조하곤 했다.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가 그것이다. 세상과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는 늘 성무일도의 핵심을 이뤘다. 그리스도인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늘 세상과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다.</p> <p>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예배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신비를 기뻐하며, 그 부활 사건을 통해서 이루신 구원에 감사하는 공동체 예배이기 때문이다. 성무일도는 성찬례를 준비하고, 성찬례를 다시 일상의 삶으로 확장한다. 성찬례를 둘러싼 준비와 확장이 바로 성무일도의 위치요, 역할이다. 성찬례가 성무일도의 중요한 세 요소 - 독서, 찬양, 기도 - 를 포함하면서(말씀의 전례) 성찬기도와 영성체로 구성된 것(성찬의 전례)은, 주일 성찬례를 통해서 매일의 기도 생활을 완성한다는 뜻이다. 성찬례 막바지에 세상 속으로 파송 받은 우리는 매일 기도 생활과 더불어 선교 사명을 실천한다.</p> <p>매일의 성무일도와 주일의 성찬례는 우리 삶을 새로운 시간으로 나눠 주기적으로 기도하게 한다. 그런 탓에 성무일도를 ‘시간 전례’라고도 부른다. 주간의 매일과 주일을 관통하는 주기적인 리듬감이 우리 기도 생활을 이룰 때, 우리는 몸에 밴 전례 생활을 할 수 있다. 일찍이 사제요 시인이었던 조오지 허버트는 이렇게 노래했다(1663년).</p> <p>“그저 하루만이 아니라, 칠일 동안 내내 / 내가 주님을 찬양하리니 / 내 비록 하늘에 있지 않더라도, 마음을 들어 / 주님께 올리리라.” </p> <p>허버트 신부는 성공회 영성이 매일의 찬양, 말씀 읽기와 기도, 그리고 주일의 성찬례에 뿌리 내리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와 더불어 교회력이 비추는 구원의 역사라는 새로운 시간에 우리 몸과 마음을 맡기는 일이 우리를 봉헌하는 삶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시간의 리듬에 맞춘 전례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빚어낸다. </p> <p>한편, 언젠가부터 우리 교회에서는 주중의 성무일도가 사라지고 매일 성찬례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매일 성찬례가 굳이 성공회의 오랜 전통이라고 할 수 없을지라도, 이미 널리 퍼져 신앙생활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면 좋은 일이다. 다만, 이로써 교회 전례 전통의 다른 한 기둥인 성무일도가 퇴색한다면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세계 곳곳에서 주일 성찬례의 회복과 더불어, 성무일도에 대한 관심과 실천이 새롭게 일어나는 흐름을 보노라니 더욱 그렇다.</p> <p>성공회 신앙 전통의 두 기둥이 튼튼하게 서서 우리 교회의 전례와 신앙을 올곧게 떠받치고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p> <p>(성공회 신문 2011년 12월 10일자 6면) </p> viamedia on "전례 여행 9 - 전례 운동 1 - 성공회의 이상과 공헌"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68#post-1186 토, 25 6월 2011 17:41:10 +0000 viamedia 1186@http://liturgy.skhcafe.org/ <p>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p> <p>9. 전례 운동 1 - 성공회의 이상과 공헌</p> <p>종교개혁 이후 근대 사회로 발전하면서 개인의 가치와 공동체의 가치가 서로 다투는 일이 잦았다. 위치가 역전되어, 종종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의 가치를 밀어내곤 했다. 사회생활이든 신앙생활이든 그동안 집단과 공동체가 개인의 자유와 신앙을 억압한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변화는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개인과 공동체가 서로 존중하지 않고 대립하면 개인과 공동체 모두 위험에 빠진다. 개인 신앙의 자유가 교회 전통을 배척하면, 교회는 이를 위협으로 여겨 그 자유를 억누르려 한다. 반대로, 교회가 교권으로 통제를 일삼으면 개인은 교회와 전통을 멀리한다. 사회와 종교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이 와중에 서로 더욱 배타적이 되고 마음은 옹졸해진다. 이를 넘어서는 길이 가능한가?</p> <p>‘근대 전례 운동’은 그 길을 찾으려는 하나의 시도였다. 이 운동은 19세기 중반 성공회와 천주교에서 일어나서 지난 20세기 내내 다른 개신교회들에 영향을 끼친 전례 쇄신 운동이다. 성공회 종교개혁과 그 이후 여러 경험은 이 운동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전례를 통한 교회 개혁과 교회 일치를 이상으로 삼고, 여러 개인의 다양한 신앙 경험을 공동 예배를 통하여 공동체의 경험과 신학으로 안내하려 했기 때문이다. 사회와 교회가 서로 배척하고, 개인과 공동체가 서로 멀리하면서 갈등과 혼란이 심해지던 시기에 성공회의 이상과 경험은 더욱 중요했다. </p> <p>전례 쇄신과 관련한 성공회의 경험은 크게 네 가지이다.</p> <p>첫째, 성공회 고교회 전통과 존 웨슬리가 강조한 전례 생활의 회복이다. 고교회 전통은 성공회 종교개혁 초기부터 초대 교회 연구를 통해서 전례 생활을 교회와 개인의 신앙과 밀접히 연결하려 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면서 예배는 형식적이 되었다. 성찬례 거행 횟수도 매우 적었다. 고교회 전통에 있던 웨슬리는 성찬례를 자주 거행하고 참여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웨슬리는 또, 개인의 신앙적 감동과 변화를 위한 설교를 중요시했다. 설교는 교리 해설이나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위한 복음의 가치와 도전을 담아야 한다고 확신했다.</p> <p>둘째, 19세기 ‘옥스퍼드 운동’은 교회와 성직과 성사의 중요성을 되새겨 주었다. 이 운동에 따르면, 교회는 세속사회를 추종하거나 무시할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거룩한 하느님의 영역을 지키고 확대해야 한다. 성직은 이를 위해 사도에게서 이어오는 봉사직이며, 성사 생활은 그 거룩함을 경험하고 확인하는 일이다. 특히 성찬례는 성사의 핵심으로써 신자 공동체와 성직자가 가장 중요하게 실천할 교회의 생명 활동이다. 이 운동은 교리에 대한 집착 때문에 나중에 중단되고 말았지만, 교회의 본질을 좀 더 깊이 생각하도록 이끌었다.</p> <p>셋째, 성공회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는 위의 여러 성과를 바탕으로 19세기 당시 급격한 산업화로 비인간화하던 세태를 비판하고,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선교 사명과 실천을 제시했다. 이 주장을 따르면, 성찬례는 예수의 성육신 사건이 계속되는 표현이며, 우리가 하느님과 연합하는 통로이다. 이 성찬례에서 나누는 신자들의 친교는 모든 인류가 함께 이뤄야 할 형제애와 자매애의 초석이다. 그러므로 성찬례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세상과 사회의 바른 변화에도 깊이 참여해야 한다. 이 운동은 현대 성공회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과 가르침의 기초를 마련했다.</p> <p>넷째, 성공회 전례학자들의 전례 연구는 교회 일치 운동과 대화의 물꼬를 텄다. 성서 연구, 초대 교회 전례 자료 번역과 연구, 다른 교단 학자들과 대화가 활발했다. 1930년대에는 매주일 성찬례 거행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이때야 비로소 주일 성찬례 거행이 성공회 신앙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그전까지 주일 예배는 대체로 아침기도식 예배였다. 성공회 베네딕토회 수도원장이었던 그레고리 딕스의 연구서 “전례의 형태”는 전례가 교회 일치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는 전례가 교리 문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과 사건을 기억하는 특별한 구조이자 행동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로써 성찬례의 구조와 행동의 원칙에서는 일치하고, 교단마다 전례문을 개정하여 서로 대화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p> <p>성공회의 이러한 경험과 공헌은 개인과 교회, 신앙과 전통을 대립시키던 흐름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신자 개인은 그리스도의 한몸 안에서 지체’라는 성서적인 비유와 가르침을 다시 확인했다. 이를 실제로 경험하는 통로는 함께 드리는 예배이며, 그 예배의 중심은 성찬례이다. 성찬례에 근거해서 교회에 대한 이해, 사목에 대한 이해, 신앙과 영성에 대한 이해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특별히 세상과 사회에 교회가 참여하는 이유와 원칙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교회 일치 운동과 대화가 더욱 활발해졌다. 20세기 천주교의 전례 쇄신과 뒤따른 개신교의 예배 쇄신은 이렇게 성공회의 오랜 경험과 전통에 연결된다.</p> <p>(성공회 신문 2011년 6월 25일) </p> Cranmerian on ""치유 예식이 있는 성찬례"에 대하여"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7#post-1082 목, 16 9월 2010 14:56:38 +0000 Cranmerian 1082@http://liturgy.skhcafe.org/ <p>치유연도문이 없을 때 분위기가 더 좋았다는 말씀은 이 기도문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말씀이겠지요. 하지만 예배참여자의 입장에서는 도유와 안수 직전에 자신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또한 객관적인 도유와 안수 행동에 더하여, 이에 대한 믿음을 보탠다면 더 큰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p> <p>오히려 이 연도기도문의 내용을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다양한 양식(?)으로 만드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지적하신대로 기도의 내용, 계응의 응답문, 기도문 자체를 서로 나누어 낭독하는 방식 등등 다양한 방식을 사용하였으면 합니다. </p> <p>기도문의 내용은 치유에 관한 성서적 이미지들-성찬례의 성서독서와 연관시켜-을 사용하고, 당일의 참여자들의 상황도 고려한다면, 오히려 이 기도시간은 정말로 간절한 기도로, 다음 순서의 도유와 안수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것입니다. </p> ochlos on ""치유 예식이 있는 성찬례"에 대하여"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7#post-1081 월, 13 9월 2010 00:24:52 +0000 ochlos 1081@http://liturgy.skhcafe.org/ <p>늦었지만, 생각을 올립니다.<br /> 부드럽게 느껴진 것은 뉴질랜드 기도서에서 기인하거나<br /> 번역자의 작업을 통해서 인듯합니다. </p> <p>아직 시작에 불과합니다.<br /> 제가 더 준비를 충분히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br /> 분위기를 일반 성찬례와 차별되는 성찬례로 만드는 것이 필요한데<br />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네요. </p> viamedia on ""치유 예식이 있는 성찬례"에 대하여"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7#post-1079 목, 26 8월 2010 18:00:04 +0000 viamedia 1079@http://liturgy.skhcafe.org/ <p>ochlos / 신부님, 상세한 이야기, 그리고 새로운 시도에 대한 나눔, 감사합니다. </p> <p>위에서 토론한 이야기에는 몇 마디 보탤까 했으나,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마당은 서로 제안하여 경청하고, 경험하고 나누는 곳이니까요. 이런 나눔이 너무도 소중합니다. 다른 분들의 의견도 들어오면 좋을텐데... 어쨌든 이런 나눔이 우리 교회의 전례를 변화시킬 것입니다.</p> <p>물음: 두번째로 가진 '치유 성찬례'(저는 여전히 '치유 예식이 있는 성찬례' 혹은 "성찬례와 치유예식"을 선호합니다만)가 첫번째보다 '좀 더 부드럽고 친절함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신부님의 생각을 나눠 주시기 바랍니다. </p> <p>전통이 자리잡으려면, 누가 뭐라 해도 끈질기게 오래도록 계속해야 합니다. 신부님이 그 전통을 세워가고 계십니다.</p> <p>감사의 합장 ;-) </p> ochlos on ""치유 예식이 있는 성찬례"에 대하여"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7#post-1078 목, 26 8월 2010 17:13:35 +0000 ochlos 1078@http://liturgy.skhcafe.org/ <p>치유예식이 있는 성찬례(우리 교회에서는 '치유성찬례'라고 표현합니다) 두번째 시간을 가졌습니다. 네 분이 나오셨고, 지난번에 비해서 아주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전례속 은혜에 깊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p> <p>이번에는 뉴질랜드 예식서를 따라서 드렸습니다. 그리고 연도를 뺐습니다. 4양식을 성찬기도문을 사용했습니다. 지난번에는 치유성찬례에 어울리지 않게 딱딱한 분위기였다면, 이번에는 좀 더 부드럽고 친절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p> <p>한국성공회에 치유성찬례 전통이 자리잡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p> ochlos on ""치유 예식이 있는 성찬례"에 대하여"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7#post-1072 화, 03 8월 2010 11:58:03 +0000 ochlos 1072@http://liturgy.skhcafe.org/ <p>viamedia/</p> <p>깊이 살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몇가지 답을 써 보았습니다.</p> <p>re.re:1.<br /> 예식 후에 어떤 분에게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대채로 좋았으나,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다 하려고 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다소 긴 '연도문'이 있어서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입니다. 연도문을 통해서 치유 예식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고양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했습니다. 연도문이 익숙하지 않은 것도 원인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p> <p>(논점은 아니지만, 그냥 읽어내려가는 의례적 기도문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의 진심을 담을 수 있도록 이끌어가는 배려로서 연도문을 바칠 때 어떤 특별한 행동이 동반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개신교 기도에서는 회중들이 자발적으로 기도의 중간중간 "주님, 도와주소서." "아멘." "주여..." 등의 반응을 보입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신앙의 깊이를 자랑하려는 듯이 보이기도 하고 기도에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반면, 기도자의 기도의 내용을 회중이 내면화하고 공동의 기도로 드리는 것으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도문이 계/응으로 이루진 것도 기도자 혼자의 기도가 아닌 공동체의 기도임을 드러내 줍니다. 그것이 의례적이지 않기 위해서 계응의 '응' 부분에서 약간 고개를 숙이는 행동 정도는 전례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기도에 깊이 들어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p> <p>re.re:6. </p> <p>확실히 저는 전례 행위의 주체 혹은 주례자는 집전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전례의 행위를 통해서 은총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집전자를 포함한 참례자의 신앙에 상응하여 각 사람에게 혹은 공동체가 은혜를 누립니다. 은혜를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받는 이는 참례자이니 집전자는 주체가 될 수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역사하심은 공동체가 기도로 성별하여 세운 성직자의 전례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성직자는 하느님의 은총을 전례 행위를 통해서 전달하게 되니 적어도 전례행위의 주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p> <p>성직자가 일상에서 반말을 사용한다면 권위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으나, 전례 속에서 특별한 전례 순서 (이를테면 안수, 도유)에서 사용하는 것은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례 속에서 하느님에 대한 경외감이 최고조로 고양되는 순간에 참례자는 자신을 지극히 낮추는 신앙행위가 나타납니다. 그런 순간에 사제가 2인칭 호칭을 애써서 경어를 사용하는 것은 참례자의 신앙행위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건 그저 제 사견입니다. 이런 순간에 경어사용은 뭔가 부조화를 느낍니다.</p> <p>도유/안수의 순서에 있어서 1965년, 2004년 성공회기도서의 "조병예식"을 보면, 도유 후에 안수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순서는 야고보서 5장에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주어라'라는 구절이 근거가 된 것 같습니다. '청원 - 징표'의 이해 속에서 제안하신 '안수-도유'의 순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p> <p>다시 한 번 이런 논의를 통해 치유와 해방감(?)을 느끼게 해 주신 주신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치유 예식을 통해서 가시적인 치유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인간적인 욕심이고, 어찌 보면 성사를 마술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다만, 참례한 교우들이 예식을 통해서 회복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기를 바라는 욕심 혹은 책임감 때문인 것 같습니다. ^^ </p> viamedia on ""치유 예식이 있는 성찬례"에 대하여"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7#post-1070 금, 30 7월 2010 11:16:09 +0000 viamedia 1070@http://liturgy.skhcafe.org/ <p>ochlos / 신부님의 '치유 예배' 보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덕택에 저도 이리저리 더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이 논의를 촉발하신 것입니다. 대단히 깊이 고민하셔서 예식문까지 제공해 주시니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p> <p>번호를 매겨 쓰신 신부님의 고민에 대해서 그 번호에 따라 몇 마디 거들겠습니다. 좀 더 깊이 이 아름다운 성사를 나누기 위한 고민의 확장으로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p> <p>RE: 1.<br /> 성찬례 자체가 곧 '치유의 성사'인 점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무엇보다도 성찬례의 중요성이 훼손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주객전도라 하겠습니다. </p> <p>성찬례 2형식(성찬기도 5양식)은 특수한 상황에서 성찬례 전반을 매우 짧게 만든 형식인데, 그 신학적인 의미가 풍요롭지 않고 너무나 단순한 감이 있습니다. 신부님의 시도가 문제가 아니라, 성찬례 2형식 자체의 문제입니다. 길어질까 염려하셔서 2형식을 선택하시기보다는, '연도문'을 생략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p> <p>RE: 6.<br /> 대체로, 그리고 전통적으로 안수 다음에 도유를 하는데, 그 순서를 달리 한 까닭은 무엇인가요? 별 이유가 없다면, 한 사람씩 안수 후 도유를 하는 것이, 하느님께 대한 청원(하느님의 치유하시는 어루만짐)과 그에 대한 확인과 징표(기름 부음-메시아/그리스도로 세우는 일, 하느님의 자녀로 확증하는 일, 하느님께서 치유하시어 바르는 약)로서 더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봅니다. (세례/견진의 경우. 물론 정교회 전통에서는 도유-세례-도유의 형식이 보편적입니다만.)</p> <p>'당신에게 안수합니다'(혹은 '너에게 안수하노라')는 형태의 예식문(cf.세례)은 서방 교회의 전형적인 '사제 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칫 성사 행위의 주체를 '사제'로 오해하도록 합니다(그 연원이 어디에 있든지). 흥미롭게도 정교회의 세례 예식문을 보면 '사제'를 그 행위의 주체로 내세우지 않습니다("하느님의 종 아무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제가 번역하여 올린 뉴질랜드 기도서의 경우는 이런 부분이 없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p> <p>게다가 "당신에게 안수합니다"라는 경어체를 "내가 안수하노라"는 말로 대치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떤 점에서 그 예식이 갖는 중요성을 어떤 사목적인 권위로 드러내려는 의도로 보이고, 신자들은 이러한 외적인 '권위적 표현'을 통해서 더 큰 힘을 느끼는 경우가 많으니, 하나의 사목적인 배려로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위의 '사제 중심적'인 형태로 비치거나 그것을 강고히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합니다. 우리말 성경이나, 기도서에서 권위를 드러낼 때 대체로 '반말'을 쓰고 있는데, 매우 잘못된 문화적 관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는 '반말'에 대한 제 사적인 편견일 수도 있습니다.</p> <p>RE: 8.<br /> 제 경험으로는, 대체로 모든 사람이 함께 안수하는 것에 참여하는 '전례적 행동'이 안수와 도유의 순간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의도하시는 바는 아니었겠으나, '눈에 띄는 육체적 치유'에 대해 불필요한 기대를 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치유 사건의 주체는 하느님이시요. 그 사건의 신비는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p> <p>다시 한번, 신부님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