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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태그: 영성체 http://liturgy.skhcafe.org/ A Korean Anglican Theology & Liturgy Forum en Mon, 22 Jan 2018 16:10:45 +0000 viamedia on "전례 여행 19 - 전례와 사회"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708#post-1309 금, 23 12월 2011 07:00:22 +0000 viamedia 1309@http://liturgy.skhcafe.org/ <p>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p> <p>19. 성찬례의 인간 - 전례와 사회</p> <p>교회와 사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스도교의 여러 교파는 이 질문에 다양하게 답하고 행동했다. 교회는 세속 사회에 전혀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은가 하면, 예수님께서 정치와 종교 권력을 저항하고 비판하다 희생당하신 분이므로 사회에 대한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는 일은 당연히 교회의 사명이라는 주장도 그에 못지않다. 교회의 사회 참여를 둘러싼 논란은 그 줄다리기가 팽팽하다. 이 일로 교회 안에서는 분란이 일기도 한다.</p> <p>그렇다면 전례 전통에 충실한 성공회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성공회는 그 질문을 좀 다르게 던진다. 교회의 중심 행동인 전례는 사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다시 말해, 전례 안에서 선포되는 말씀, 그리고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룩하게 변하는 사건, 함께 모여서 그 축성된 몸을 먹고 나누는 우리는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성공회 신자는 전례의 사건 속에서 이런 질문에 답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책임 있는 행동을 살피려 한다.</p> <p>‘말씀’이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그리스도이시다. 성서는 ‘말씀이신 하느님-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신 사건을 우리에게 되새겨주는 그릇이다. 적어도 전례 전통의 교회에서는 ‘말씀의 전례’에서 읽는 성서 독서를 성직자나 신자 개인의 호불호나 멋대로 선택하지 않는다. 세계 여러 교회가 함께 연구하여 지정한 정과표를 따른다. 좋든 싫든 성서에 드러난 말씀을 그대로 듣겠다는 뜻이다. 나를 비판하고 호통치는 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그 말씀이 사회를 향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피하고서는 말씀을 듣는 신앙인이라 말하기 어렵다.</p> <p>모든 전례의 목적은 변화이다. 특히 성찬례는 그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낸다. 전례 참여의 중요한 행동 가운데 하나는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을 제대 앞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우리의 땀과 수고, 우리의 잘못과 상처, 우리의 기쁨과 슬픔, 결국 세계 전체를 제대 앞으로 가져온다.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을 변화시켜 주시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 거룩한 변화가 일어나는 사건 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래서 빵과 포도주는 세계 전체를 상징한다. 성찬례 안에서 하느님은 이 세계 전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룩하게 변화시키신다. 이것이 축성이다. 이 변화의 사건을 믿지 않고는 신앙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p> <p>영성체는 세계 전체가 제대 위에 바쳐져서 거룩하게 변화된 것을 나누어 먹는 행동이다. 우리는 그 변화의 결과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 안에 들어가 우리 몸과 영의 에너지와 피가 되어 우리 몸을 돌아다닌다. 새로운 몸과 피를 받았으니 우리 자신도 변한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우리 몸을 돌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 몸은 거부반응을 일으켜 몸이 굳고 더는 살아갈 수 없다. 게다가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을 여럿이 나누어 먹었으니, 교회를 떠나 우리가 들어가 살아가는 세계와 사회도 우리를 통해서 변화와 나눔의 은총이 일어나야만 한다. 이 변화된 그리스도의 몸에 비추어 우리 삶과 우리 사회에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고, 우리 자신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아간다면? 이는 우리가 진정으로 ‘영성체’하지 않았다는 말이다.</p> <p>적어도 성공회 전통은 우리가 전례 안에서 변화를 경험하는 만큼, 사회도 그렇게 변할 수 있으며, 변해야 한다는 희망을 고수했다. </p> <p>“그리스도인은 전례를 통해서 ‘경제적인 인간’(homo economicus)이나 ‘소비적인 인간’(homo consumericus)이기를 포기한다. 대신 ‘성찬례의 인간’ 즉 ‘나눔의 인간’(homo eucharisticus)으로 변화된다.” 지난 세기 최고의 전례학자 그레고리 딕스(Gregory Dix) 수사 신부의 말이다.</p> <p>이것이 전례를 통해서 경험하는 거룩한 변화의 진정한 뜻이며, 전례가 비추는 사회의 비전이다.</p> <p>“거룩한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예배하려 한다면, 우리는 이제 자신의 성막을 나와, 우리 안에 신비하게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세상의 거리로 걸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도시와 마을 사람들 안에서 같은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 빈민촌에 머무시는 예수님에 대한 측은지심이 없이는 우리는 성막에 있는 예수님을 예배하노라 할 수 없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바쳤던 선교사 프랭크 웨스턴 주교의 외침이다.</p> <p>이런 고민과 전통을 돌아보며, 우리는 우선 교회와 전례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세밀하고 신실하게 물어야 한다. 전례 안에서 읽고 듣는 예언자적인 말씀이 불편하더라도 귀와 마음을 열어 그 도전을 받아들이는가? 사적인 고민뿐만 아니라 사회와 세계의 갈등과 아픔을 제대 위에 봉헌하는가? 하느님께서 그 세속적인 것들을 축성하여 우리에게 거룩한 몸으로 나누어 주실 때, 거리낌 없이 우리 살과 피로 먹고 마시는가? 그리하여 우리 교회와 자신도 그 몸을 모시고 세상 밖에 나가 세계와 사회도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실천하는가? </p> <p>(성공회 신문, 2011년 12월 24일자) </p> Cranmerian on "비세례인의 영성체"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71#post-1197 월, 18 7월 2011 15:13:20 +0000 Cranmerian 1197@http://liturgy.skhcafe.org/ <p>저는 두 교단의 정책적인[원칙] 변화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세례와 영성체[성찬에의 참여]가 연결되어 있다는 원칙에도 공감합니다. </p> <p>평신도로서 느끼는 것은 사목현장에서 사목자의 목회원칙에 따라 그 실행방식이 다르지 않나<br /> 생각합니다. 전에 다녔던 엘에이의 큰 교회에서 관할사제 신부님께서는 평화의 인사가 끝나면<br /> 광고를 하면서[당시에 제게는 인상적이었습니다], 광고를 끝내고 성찬의 전례를 위하여<br /> 제대로 올라가지 직전에 세례받은 모든 신자들을 성찬에 초대한다며 참여를 권고하시더군요. </p> <p>그리고 교회의 조그만 가족같은 교회에서는 관할사제께서 성찬기도를 끝내고 영성체를 시작하기<br /> 직전에 이 성찬에 모든 교우들[예배참여자들]을 초대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p> <p>하지만, 신앙교육이나 설교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말씀하시겠지요.</p> <p>다른 신부님들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시는지 궁금하군요? </p> zinkoo on "비세례인의 영성체"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71#post-1189 화, 05 7월 2011 06:11:25 +0000 zinkoo 1189@http://liturgy.skhcafe.org/ <p>지금 미국 방문 중인데 어제는 감리교 교회에서 영성체를 했습니다. 그런데, 감리교는 세례를 받지 않아도 본인이 신앙이 있다고 하면 영성체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듣기로는 미국 성공회도 그런 방향으로 가려고 한다는데 여기에 대해서 다른 분들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제 생각은 두 개의 성사는 연결되는 것이기에 세례를 받지 않고 영성체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p> Cranmerian on ""보혈 조력"이 성공회 신학에 맞나요?"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22#post-1133 월, 31 1월 2011 13:15:11 +0000 Cranmerian 1133@http://liturgy.skhcafe.org/ <p>두 분의 지적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러면서도 명칭에서는 여전히 '조력' '분배'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여전히 무의식적으로나마 말씀하시는 원론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p> <p>평신도가 참여하는 것이 조력을 위하여, 봉사만을 위한 것이 아닐 것이며, 또한 성직자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도 아닐 것이며, 오히려 신앙공동체의 예배에서 신자로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두 분의 말씀에서도 그런 뜻을 읽습니다.</p> <p>저는 아주 오래전에 미국 엘에이에 있는 성 제임스[야고보]교회에서 이 교육을 받았습니다. 매 주일 아침 일찍 예배에 참석하곤 했는데 어느 해에 한국인 신부님께서 이러한 봉사를 권해서 교구에서 시행하는 한나절 교육을 받고 '수료증'(?)을 받고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p> <p>교회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chalice bearer'라고 했는데 교육을 받는 장소에서 받은 조그만 책에는 'lay eucharistic minister'(LEM)라고 적혀있더군요. 이에 대한 역사 이야기와 제대에서의 실습(?)으로 잘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였지만 하루를 보내고, 그 다음부터 교회의 9시예배에서 순번으로 한달에 한번정도 봉사했습니다.</p> <p>이 글을 읽고 미국성공회 사전을 찾아보니, 본래의 명칭은 헌장에 있는 그대로 LEM이고, 성체와 보혈의 나눔활동을 모두 허용하고, 특히 병환으로 교회의 예배에 출석하지 못한 신자들에게 성찬을 전달하는 역할까지 수행한다고 합니다. 일부 보수적이거나(?) 관행적인 교회에서는 주로 보혈을 조력(?)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chalice bearer라는 명칭만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 점에서는 한국성공회도 마찬가지군요. 성체와 보혈에 차별없이 허용한다고 규정하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차별하고 있으니까요.</p> <p>다시 명칭으로 돌아가서, 미국성공회의 정식용어를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평신도 성찬사목자'라고 할 수 있지요. 너무 거창하지만, 한번쯤 생각해볼 수 없을까요?</p> <p>앞에서 나온 용어들 중에서 '조력' '분배'라는 말은 성찬례, 신자와 성직자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지속시킬 수 있으며, 영성체라는 말은 성찬을 받는다는 것, 특히 성체를 받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나눔[하느님과 신자, 그리고 신자들과의 나눔]의 의미를 살릴 수 있는 용어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미국성공회의 용어는 너무 거창하다면, '성찬 봉사자'라는 말은 어떨까요?</p> <p>그리고 두 분의 말씀대로 이러한 봉사자들에 대한 교육과 이들의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은 없을까요? </p> viamedia on ""보혈 조력"이 성공회 신학에 맞나요?"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22#post-1129 토, 29 1월 2011 06:53:37 +0000 viamedia 1129@http://liturgy.skhcafe.org/ <p>"보혈 조력"이라는 말에 대한 zinkoo 님의 흥미롭고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지적하신 점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많은 분이 이 지적에 귀 기울였으면 합니다.</p> <p>zinkoo 님께서는 "보혈 조력" 대신에, 좀 더 넓게 "분배 조력"이라는 말을 제안하셨습니다. 제 생각에는 "영성체 봉사자"라고 하는 것이 더 분명하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성체 '분배'라는 말을 잘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행위에 대한 세밀한 지시어보다는 우리 모두가 하는 "영성체" 행위를 돕는 것을 드러냈으면 합니다. 그러니 "영성체 봉사자"가 어떨까요? 이러면 "전례 봉사자"라는 큰 범주 안에서 일관성 있는 용어를 마련해 볼 수 있으리라 봅니다.</p> <p>"보혈 조력"과 성공회 신학의 일관성에 대한 문제 제기는 신학적 문제 이외의 여러 다른 문제를 제기합니다. 무엇보다도 오래된 관행 탓에 잘못 이해하게 된 신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교회 내의 권위주의 문제와도 닿아 있습니다.</p> <p>성공회의 일반적인 영성체 방법인 "성체와 보혈"을 함께 영하는 내용은 이미 zinkoo 님이 제대로 지적하셨습니다. 이해를 확장하기 위해서 좀 더 덧붙이겠습니다. </p> <p>언뜻 차별적으로 보이는 이 행태는 역사적 연원이 있다고 봅니다. 서방 교회에서는 중세 이후로 영성체 자체가 별로 행해지지 않았으며, 있다 하더라도, "성체"만 영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점을 호되게 비판했고, 성공회 역시 그 종교개혁 전통에 따라서 이른바 "양형" 영성체를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참고로 동방 교회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이런 문제가 없습니다. 큰 성작에 빵과 포도주를 섞어서 축성한 뒤, 숟가락으로 이를 떠먹이니까요.)</p> <p>문제는 '성체'만 영하다가, '보혈'을 영하게 된 것이, 하나의 부가적인 현상처럼 인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혈'을 영하는 것은 이차적인 것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고, 이런 부차적인 것은 사제보다는 부제나 다른 이들이 맡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잘못된 관습을 정확하게 개선하지 못해서 생긴 또 다른 잘못된 관습입니다.</p> <p>이 사안은 영성체 봉사와 관련하여 두 가지 문제를 일으킵니다. </p> <p>그 하나는 사제만 성체를 나눠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그리고 '부차적인' 보혈은 다른 '하위 성직자'나 허가를 받은 신자가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등급을 마련한 것입니다. 권위주의지요. 이미 지적된 대로, 성체와 보혈은 그 영성체 봉사자의 교회 직급과 연결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자가 성반을 받들 수 있고, 사제가 성작을 받들 수 있습니다. 부제가 성반을 받들 수 있고, 역시 주교가 성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p> <p>이로부터 야기된 두 번째 문제는, 영성체를 돕기 위한 사제의 성찬례 참여 문제입니다. </p> <p>제 경험을 들어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제가 한동안 성가수녀회의 주일 미사 채플린으로 일했고, 이른 아침 미사가 끝나면 서울 주교좌 성당 9시 미사에 참석한 몇몇 분들을 위한 성서 연구 모임을 지도했습니다. 이 모임이 끝나는 시각이 약 11시 45분쯤인데, 곧장 11시 미사를 드리는 성당으로 뒷문을 통해 들어가 성직자석에 참여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성체'를 사제가 나눠줘야 하는데, 사제가 부족하니, 저더러 미사 중간에, 그것도 성찬기도마저 거의 끝나고 영성체만 하는 때에 참여해달라는 것이었죠. 아직도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p> <p>이는 매우 좋지 않은 관행입니다. 성찬례는 그 사건에 참여한 전체 공동체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관행은 공동체의 '지금 여기'의 사건과 관계없는 (좀 세밀하게 말한다면) 이가 갑자기 끼어드는 행위입니다. 게다가 이는 성직자의 역할을 공동체 안과, 그 사건에서 찾기보다는 성직자의 '기능'에 맞춰서 이해하는 무의식의 단면을 드러냅니다. 다시 이것이 바로 잘못된 여러 성직자 권위주의의 밑거름이 됩니다. </p> <p>내친김에, 원래 토론 주제와는 다르지만, 이 두 번째 행태와 조금은 관련이 있는 이야기를 보태겠습니다. 어떤 분들, 특히 몇몇 성직자들은 이미 그날 미사에 참석하여 영성체를 했다는 이유로, 다른 시간에 행하는 미사에 참석하고도 영성체에는 참여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성체는 한 번만 한다는 오래된 관습이 구전으로 내려오던 바가 있었으나, 이는 명백히 잘못된 신학에 근거한 행태입니다. 즉 성찬례와 영성체를 '지금여기'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하느님의 지속적인 사건이요, 그 구원 행동에 대한 축하와 참여인 것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다들 영성체하는데 멀뚱히 앉아 있는 그런 분들을 다시는 뵙지 않았으면 합니다.</p> <p>더 많은 논의가 이어졌으면 합니다. </p> zinkoo on ""보혈 조력"이 성공회 신학에 맞나요?"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22#post-1126 목, 27 1월 2011 19:25:07 +0000 zinkoo 1126@http://liturgy.skhcafe.org/ <p>대한성공회에는 "보혈조력"이라는 직분이 있는데 이 직분의 이름이 성공회 신학에 맞는지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성공회에서는 성체와 보혈 중 한 쪽이 더 중요하다고 하지 않는데 보혈조력이라고 하면 성체는 조력을 할 수 없고 보혈만 할 수 있는 것이 되어서 차별을 두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 대부분의 성공회는 이러한 구별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령 우리 교회에도 보혈 분배를 도와주는 성도들이 있는데 주교님이 그들에게 준 윤허에는 성체와 보혈을 다 조력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성체를 먼저 분배하다 보니 사제가 성체를 분배하고 조력자가 보혈을 분배하는 것이 보통이지만요. 그러나, 성도들이 많아서 분배를 나누어서 할 경우 조력자가 성체를 분배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따라서 "보혈조력"은 "분배조력"으로 이름을 바꾸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p> viamedia on "어린이 영성체 문제와 몇 가지 제안"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13#post-1118 목, 06 1월 2011 16:17:05 +0000 viamedia 1118@http://liturgy.skhcafe.org/ <p>"부모가 받아서 먹여" 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 </p> zinkoo on "어린이 영성체 문제와 몇 가지 제안"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13#post-1115 금, 31 12월 2010 00:30:39 +0000 zinkoo 1115@http://liturgy.skhcafe.org/ <p>신부님 의견에 절대 동의합니다. 영성체를 시작하는 시기는 세례 이외의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한 받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 아직 너무 어려서 지시 사항을 못 알아 들을 정도의 나이는 (2실 미만?) 제외해야 하지 않을까요? 부모가 받아서 먹여 주는 것도 방법일 것 같긴 하지만요. </p> viamedia on "어린이 영성체 문제와 몇 가지 제안"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13#post-1113 금, 24 12월 2010 07:58:09 +0000 viamedia 1113@http://liturgy.skhcafe.org/ <p>성공회 안에서 어린이 영성체 문제에 대한 몇 가지 고민과 질문이 전해진 바 있습니다. 교회 현장에 있는 선생님들과 성직자들의 고민과 지혜를 듣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여, 저 나름대로 고민한 내용을 나누고자 합니다. 생각을 나누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좀 더 진전이 있었으면 합니다. </p> <p>어려운 조건에서도 애쓰시는 교회 학교 선생님들과 조언을 주신 신부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p> <p>~~~</p> <p>어느 교회의 선생님께서 고민 어린 내용을 나눠주셨습니다. 그 세부 내용은 여기서 밝히지 않겠습니다. 관련된 어린이 영성체 문제에 대해서 우선 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 생각을 간명하게 밝힌 뒤,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 몇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이후 고민의 나눔과 토론으로 발전시켜 주시기 바랍니다.</p> <p>1. 저는 모든 세례받은 사람은 유아든지 성인이든지, 나이와 관계없이, 영성체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p> <p>2. 현재 한국 성공회 법규에 영성체 나이에 대한 제한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첫 영성체 교육을 한 뒤에 영성체에 참여할 수 있다고 밝힙니다(헌장 15조 및 교구 법규 127조)</p> <p>3. 영성체 대신에 영성체를 흉내 내서 다른 어떤 것을 주는 것에 저는 절대 반대합니다. 매우 좋지 않은 관습입니다. </p> <p>4. 어린이 영성체의 가장 좋은 방법은, 말씀의 전례 부분을 따로 가진 뒤, 성찬의 전례 시에 어린이들이 가족에게 돌아가 (가족이 신자가 아닌 경우에는 선생님들과 함께) 그 이후 모든 전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성찬례의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p> <p>5. 다만, 교회마다 어린이 영성체에 대한 '합의'가 있을 것입니다. 그 합의가 성직자의 사적인 견해보다 더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점차 모든 어린이가 나이와 관계없이 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교회(신자)를 설득해야 하며, 처지에 따라 어린이 영성체 방법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p> <p>위의 주장은 저 자신이 전례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실제로 사목하는 성직자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래 내용은 위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것입니다. </p> <p><strong>1. 세례는 그리스도인 됨의 출발이며, 성찬례에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strong> </p> <p>세례는 그리스도인 됨의 출발입니다. 그리고 이 성사는 본질적으로 성찬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 이후의 세례와 성찬례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요, 원칙이며, 전통이었습니다. 세례-(견진-기름 부음)-성찬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입교 의식(Christian Initiation)의 기본 형태입니다.</p> <p>물론 이러한 이해와 행동의 전통은 성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유아 세례가 퍼지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원죄'에 대한 신학과 더불어 유아 세례가 퍼지면서, 세례가 대체로 유아 세례로 한정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앙교육(catechism. 이를 '교리교육'으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된 행태에 대한 잘못된 번역입니다)을 유아에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문제 삼아 신앙교육 후에 첫 영성체를 하는 관습이 발전했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종교개혁기에는 유아세례를 반대하며 세례는 성인에게만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세례가 유아이든 성인이든 하느님께서 주도하시어 베푸시는 은총의 성사인 것으로 이해하고 오래된 교회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유아세례자뿐만 아니라 성인 세례 후보자들을 위해 세례 후보자 교육(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대하여)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생각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현대 성공회는 이 전통을 깊이 지지합니다.</p> <p>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성인 세례자의 경우, 신앙교육 후 세례-(견진)-성찬례로 이어지는 입교식을 통해서 오랜 교회의 전통을 회복하여 적용시킬 수 있지만, 유아세례자는 경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p> <p>이에 대해서 두 가지 주장이 맞섭니다. 1) 어떤 이들은 신앙교육을 받지 않은 유아세례자의 경우는 신앙교육을 받을 때까지, 특히 성찬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마련되기까지 영성체를 미뤄야 합니다. 천주교와 많은 개신교, 그리고 여러 나라의 성공회가 아직 이런 주장을 폅니다. 그래서 적정한 나이(이것이 또한 논란거리입니다만)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2) 한편, 이런 주장은 세례 자체를 차별하는 처사라는 반대가 있습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주도권으로 일어나는 은총의 성사인데, 어떻게 사람이 그 등급을 구분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게다가 신앙교육을 받았다 하더라도 성찬례의 깊은 신비를 어느 누가 전적으로 알 수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주장에 선 분들은 모든 세례자에게 영성체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세례와 성찬례라는 성사의 의미에도 맞고, 논리적으로도 바르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성공회를 비롯하여 여러 개신교에서 새로운 지지를 받고 있으며, 점차로 그 실천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p> <p>저는 후자의 태도가 성사에 대한 바른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성공회에서는 성사에 대한 좀 더 넓고 깊은 이해와 그에 따른 일관된 실천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든 성인이든 세례받은 모든 이들은 영성체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실천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p> <p><strong>2. 한국 성공회의 해당 법규는, 유아세례자에 대한 영성체를 '첫 영성체 교육' 후에 한다고 말합니다.</strong> </p> <p>오랜 교회의 관습으로 유아세례를 차별해온 탓에, 우리 교회의 법규는 '첫 영성체 교육'이라는 단서를 두고 어린이 영성체를 허락합니다. 여기서 간단히 몇 가지 문서의 조건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p> <p>관구 법규 제15장과 서울 교구 법규 제127조(2007년판 기준)입니다. </p> <p>1) 성체성사 집전자는 각 성체성사 중에 성체를 영하여야 한다.<br /> 2) 모든 세례자는 성체성사 중에 성체를 영할 수 있다.<br /> 3) 유아세례자는 첫 영성체 교육을 받은 후 성체를 영할 수 있다.</p> <p>2항과 3항에 논리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세례자'에 '유아세례자'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인 세례"(우리가 신조에서 고백하는)에 차별을 두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큽니다. 물론 교회의 오랜 관습을 반영한 것입니다.</p> <p>한편, 성공회 기도서(2004년)는 위의 관구 법규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p> <p>"세례받은 모든 신자는 성찬에 참여할 수 있으며, 유아세례자는 교리학습을 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교리학습 후 첫 영성체를 할 수 있다." (기도서 235쪽)</p> <p>기도서의 이 설명은 법규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실제 적용이 매우 좁아진 해석입니다. "교리학습을 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이라고 하여, 나이 제한을 암시하였습니다. 또 법규의 '첫 영성체 교육'을 '교리학습'으로 말을 바꿨습니다. 오랜 관습이었으니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법규가 원래 가지고 있는 사목적인 여유로움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나이'를 매우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세례 전후를 통해서 계속되어야 할 신앙교육인 신앙의 대화(catechism)와 신앙 신비 교육(mystagogy)의 연속성이 깨지는 문제를 당연시할 여지가 있습니다. </p> <p>게다가 이를 적용하는 일에서 사목 현장에서 몇 가지 혼란이 있는 듯합니다. 가상으로 사례 하나를 들겠습니다. '교리학습'을 받았든 안 받았든, 이미 어린이가 영성체를 한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임 사제가 바뀌어서 어린이 영성체 참여 정책을 바꾸어, 특정 나이가 되지 않거나, '교리학습'을 받지 않았다고 판단되면, 영성체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판단일까요? 일관성 있는 사목 정책일까요?</p> <p>백번 양보에서, '나이'와 '교리학습'을 유아세례자의 첫 영성체 조건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이와 교리학습이 아니라, '첫 영성체'입니다. 다시 말해, 나이와 교리학습이라는 조건은 '첫 영성체'라는 행위에 종속된다는 말입니다. 이미 '첫 영성체'가 이루어졌다면, 그 임의적 조건들이 소급되어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즉 그 '어린이'는 이후에도 계속 영성체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다시 뒤집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에, 이를 뒤집어서 해당 어린이들의 영성체를 금지한다면, 어린이들에게 큰 혼란을 줄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사목적인 정책의 혼란과 더불어, 교회 법규를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p> <p>다시 말씀드리면, 법규가 계속 제한하는 한, '첫 영성체 교육'을 한 후에 유아세례자의 영성체를 허락하는 방법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첫 영성체'를 한 뒤라면, 그 해당 유아세례자에게 영성체를 금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p> <p><strong>3. 한편, 영성체 때에, 어린이에게 성체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주는 것에 저는 절대 반대합니다. 매우 좋지 않은 관습입니다.</strong></p> <p>영성체를 하지 못하는 어린이(비신자이든 신자이든)에게, 영성체를 하는 줄에 참여하게 해서, 성체 대신에 다른 과자나 사탕, 심지어 비타민을 주는 행동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사목자 자신이 성찬례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 참여자들에게 성찬례에 대한 오해를 부추길 수 있는 잘못된 행동입니다. 영성체 때의 성체와 보혈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다른 것이 대체할 수 없습니다. 특히나 그것은 성찬기도를 통하여 공동체 안에서 주님 몸의 현존으로 축성된 것이 아닙니까? 그 현존을 나누고 새기며, 몸으로 받아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 성찬례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그 핵심은 사라진 채로, 영성체에 대한 법적인 문제와 신학적인 문제(자신의 해석에 따라서)를 피하고자, 그 대체물을 어린이에게 주는 행동은 성찬례와는 관계없는 매우 자의적인 행동입니다.</p> <p>어떤 분들은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 영성체를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영성체 훈련의 한 방법으로 사용한다고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영성체에 참여하지 못하는 어린이의 심정을 이해하고 이를 달래고 환영하기 위한 표시로 그리한다고도 할 법합니다. 좋은 의도, 특히 그 사목적인 배려를 깊이 이해하지만, 그 좋은 의도를 전혀 다른 맥락에 잘못 적용시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되풀이하자면, 그리스도의 현존에 참여하는 행위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심어줄 수 있습니다. 사족입니다만, 정말로 어린이에게 어떤 선물을 줄 것이라면, 미사가 끝나고 나갈 때, 간단한 빵이나 과자를 모든 어린이에게 줄 수 있을 것입니다(정교회 전통 참조).</p> <p><strong>4. 어린이는 성찬례에서 말씀의 전례 부분을 따로 가진 뒤, 성찬의 전례 부분(특히 평화의 인사 때부터)에 모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strong> </p> <p>이 경우 어린이들은 은 가족에게 돌아가 (가족이 신자가 아닌 경우에는 선생님들과 함께) 그 이후 모든 전례에 참여합니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으로 성찬례 전체의 맥락 속에서 영성체를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성찬례의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나아가, 처지가 허락한다면, 입당 순행을 어린이들과 함께 하고, 개회 예식 첫머리에서 아이들에게 그날 미사에 대한 권고(혹은 기도)를 한 뒤, 다시 어린이 예배(말씀의 전례를 위한)로 이동하도록 보내는 방식이 좋을 것입니다.</p> <p><strong>5. 이상의 논의와 관련하여 다음 사항을 제안하고자 합니다.</strong></p> <p>우선 교회마다 어린이 영성체에 대한 '합의'가 있을 것입니다. 그 합의가 성직자의 사적인 견해보다 더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합의 내용이 없다면, 지금부터 시작해서 어린이 영성체에 대한 합의와 전통을 만든 것이 좋다고 봅니다. 전례를 연구하고 그 사목적이고 선교적인 적용에 관심이 많은 저로서는, 점차 모든 어린이가 나이와 관계없이 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교회(신자)를 설득해야 한다고 봅니다.</p> <p>위에서 말한 제 생각을 정리하고 제안하면 이렇습니다.</p> <p>1) 이미 '첫 영성체'를 한 경험이 있는 어린이는 중단 없이 계속 영성체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위에서 밝혔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경우는 법규에 나온 제한 사항에 해당하지 않습니다.</p> <p>2) 법규를 적용한다면, 되도록 이른 나이에 첫 영성체 교육을 하여 영성체를 준비하고, 영성체에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린이도 자신이 영성체에서 배제되고 있는지 아닌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영성체에 대한 그런 접근이 성인의 '설명적 이해'에는 해당할지 몰라도, 그 신비에 대한 감각에서는 어린이들이 더 가깝다는 것을 오래도록 경험한 바 있습니다. </p> <p>3) 세례를 받은 이든 아니든, 성인이든 어린이이든, 영성체 때에는 성찬례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영성체를 하는 줄에 참여해야 한다고 봅니다. 영성체를 할 수 없는 분들은, 성체와 보혈을 나눠주는 성직자(혹은 조력자) 앞에서 양손을 십자 형태로 가슴에 포개고, 성직자(혹은 조력자)가 각각 "그리스도의 성체" "그리스도의 보혈"을 들어 보여주며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물론 성체를 받아서 영하지는 않습니다. 이 경우, 어린이(어른들도 가능)에게 손을 얹어 강복할 수 있습니다.</p> <p>4) 한편, 특수한 사정에 따라서 세례받은 신자라도 영성체를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면병에 만들 때 쓰는 밀가루의 '글루텐' 알레르기가 있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서는 글루텐이 제거된 밀가루로 만든 면병을 따라 축성하면 좋을 것이나, 사정이 그렇지 못하면, 위와 같이 손을 가슴에 포개고 영성체에 참여합니다. 또 술에 문제가 있는 분들의 경우, 보혈을 마시지 않고 같은 방법으로 영성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p> <p>5) 어린이들이 성찬의 전례 전체에 참여하도록 합니다. 될 수 있으면 입당 시에 집전자와 함께 순행에 참여한 뒤 말씀의 전례 동안 어린이 예배를 위한 말씀의 예배를 하도록 이동하면 좋을 것입니다.</p> <p>몇 분들의 고민이 제게도 닿아서, 이런 나눔과 토론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경청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 viamedia on "어린이들의 영성체에 관해서"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21#post-223 목, 17 1월 2008 10:58:25 +0000 viamedia 223@http://liturgy.skhcafe.org/ <p>Zinkoo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세례를 받은 이상 유아라도 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으나, 그렇지 못하더면, 최소한 법에 규정된대로 6세를 전후해서 첫 영성체를 통해서 성찬례에 완전히 동참하게 해야 합니다.</p> <p>nagio99님이 지적한 내용은 성직자들이 가벼이 여겨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것들이라고 봅니다. 일관성은 사목에서 매우 중요하니까요. 게다가 위에 말씀하신대로 법규가 있는데, 특별한 신학적 이유와 근거에서 아니라 성직자들이 제각기로 대처한다면 문제이겠지요. </p> <p>또 영성체때 사탕이나 과자를 주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방법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다른 데에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p> <p>다만 이 주제글이 좀더 살아나서, 사목 현장에서의 현실적인 문제점들과 고민을 나누면서 신학적으로나 교회법적으로 일관되면서도 각 사목 현장에서 실행가능한 방법을 찾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