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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태그: 전례 여행 http://liturgy.skhcafe.org/ A Korean Anglican Theology & Liturgy Forum en Mon, 22 Jan 2018 16:09:48 +0000 viamedia on "전례 여행 20 - 전례와 선교"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710#post-1312 일, 15 1월 2012 14:25:48 +0000 viamedia 1312@http://liturgy.skhcafe.org/ <p>20. 세상의 종말 - 전례와 선교</p> <p>“다 이루었다.”</p> <p>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의 막바지에 숨을 거두시며 남기신 말씀이다. 다 이루는 일. 이것이 교회가 말하는 종말의 원래 뜻이다.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이 채워지는 하느님의 시간이 종말이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께서 다 이루신 일의 행적을 되돌아 살피며 다시 기억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오늘과 내일, 하느님께서 만드신 창조세계를 부족함 없이 완성하시려는 일에 참여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전례 안에서 이 기억과 참여의 행동을 시작하고 몸으로 수련한 뒤 세계로 파송 받는 선교 공동체이다. 그러니 교회는 예수께서 이루신 종말을 전례와 선교 안에서 지금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 공동체이다.</p> <p>종말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가 있다. 그 극단적 사례가 바로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날짜를 계산하여 그날을 믿고 준비하는 이들이다. 사회에 희망을 둘 수 없고, 교회에서 신뢰를 발견하지 못할 때마다, 그 실망한 이들을 꼬드겨 사익을 챙기는 못된 거짓 혹설이다. 이들은 교회 역사에 되풀이해서 등장했다. 물론 정해진 날짜에 아무런 일이 없어서 웃음거리가 되기 일쑤였다.</p> <p>그러나 여러 교회와 지도자가 잘못 가르쳐서 이런 불씨가 생겼다. 심판에 대한 공포로 종말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땅을 세속이라 경멸하고 하늘만 거룩한 것이라고 분리해서 가르친 탓이다. 게다가 세상과 사회에 대한 건전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교회는 사람들의 절망감에 기름을 붓는다. 시한부 종말론자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이다. 그러니 그들만 나무랄 일이 아니다. 이런 잘못된 이해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반쯤은 그들과 다름없다.</p> <p>반면, 전례를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삼는 교회는 다르다. 우리는 성찬기도 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가로질러 하느님의 시간을 완성하는 구원의 역사를 기억한다. 우리가 한목소리로 외치는 “신앙의 신비” 선포는 이 종말의 뜻을 바르게 세운다.</p> <p>“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p> <p>하느님은 성육신하시어 우리와 살며 고통당하다 죽으셨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전례 공동체 안에 함께 하신다.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도록 우리를 초대하시고, 주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그분의 잔칫상에 먹고 마시도록 한다. 종내에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 모든 역사는 부족함 없이 거룩하게 완성될 것이다. 이 과정 모두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요, 하느님 시간의 완성이요, 종말이라는 선포이다.</p> <p>종말은 교리가 아니며, 선포에 머물지도 않는다. 종말은 교회의 경험이다. 예수 안에서 펼쳐진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품은 교회가 그 완성인 하느님 나라를 향해 끝까지 걸어가는 순례 경험이다. 이 순례의 핵심은 반복해서 거행하는 성찬례이다.</p> <p>성찬례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행동이요, 시간이요, 공간이다. 메시아가 베푸는 잔칫상이다. 잔칫상에 와서 우리는 차별 없이, 부족함 없이 와서 함께 부르게 먹으라고 초대를 받았다. 축성된 음식을 먹고 우리 자신이 축성되어 변화하라는 초대요, 경험이다.</p> <p>성찬례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고 희망한다. 이미 맛보고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긴장감이 신앙인의 겸손함을 이끌고, 아직 부족한 현실을 견디며 변화를 꿈꾸고 희망하도록 돕는다.</p> <p>성찬례는 미리 맛본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우리를 파송한다. 선교는 어떤 지적 교리나 도덕적 규율을 선전하거나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는 성찬례 안에서 우리가 경험한 삼위일체, 그 춤추는 친교의 삶을 우리 몸으로 이 세상에서 증언하는 일이다.</p> <p>그러니 전례와 걷는 신앙의 순례 여정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p> <p>‘종말의 시간이 전례를 통해서 우리 삶에 파고들어온다. 전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다시 하느님 나라는 전례, 특히 성찬례를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온다. 전례가 끝나고 우리는 이 종말의 하느님 나라를 가지고 세상 속에 나아간다. 성찬례는 하느님 나라의 성사이다.’</p> <p>(성공회 신문 2012년 1월 14일치 6면)</p> <p>사례: 지난 1년 동안 “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을 사랑하고 격려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여러가지 부족한 점이 많은데도, 많은 분의 관심과 격려로 힘을 얻어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좋은 지면을 허락해 주신 성공회 신문사와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p> viamedia on "전례 여행 19 - 전례와 사회"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708#post-1309 금, 23 12월 2011 07:00:22 +0000 viamedia 1309@http://liturgy.skhcafe.org/ <p>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p> <p>19. 성찬례의 인간 - 전례와 사회</p> <p>교회와 사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스도교의 여러 교파는 이 질문에 다양하게 답하고 행동했다. 교회는 세속 사회에 전혀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은가 하면, 예수님께서 정치와 종교 권력을 저항하고 비판하다 희생당하신 분이므로 사회에 대한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는 일은 당연히 교회의 사명이라는 주장도 그에 못지않다. 교회의 사회 참여를 둘러싼 논란은 그 줄다리기가 팽팽하다. 이 일로 교회 안에서는 분란이 일기도 한다.</p> <p>그렇다면 전례 전통에 충실한 성공회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성공회는 그 질문을 좀 다르게 던진다. 교회의 중심 행동인 전례는 사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다시 말해, 전례 안에서 선포되는 말씀, 그리고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룩하게 변하는 사건, 함께 모여서 그 축성된 몸을 먹고 나누는 우리는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성공회 신자는 전례의 사건 속에서 이런 질문에 답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책임 있는 행동을 살피려 한다.</p> <p>‘말씀’이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그리스도이시다. 성서는 ‘말씀이신 하느님-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신 사건을 우리에게 되새겨주는 그릇이다. 적어도 전례 전통의 교회에서는 ‘말씀의 전례’에서 읽는 성서 독서를 성직자나 신자 개인의 호불호나 멋대로 선택하지 않는다. 세계 여러 교회가 함께 연구하여 지정한 정과표를 따른다. 좋든 싫든 성서에 드러난 말씀을 그대로 듣겠다는 뜻이다. 나를 비판하고 호통치는 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그 말씀이 사회를 향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피하고서는 말씀을 듣는 신앙인이라 말하기 어렵다.</p> <p>모든 전례의 목적은 변화이다. 특히 성찬례는 그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낸다. 전례 참여의 중요한 행동 가운데 하나는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을 제대 앞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우리의 땀과 수고, 우리의 잘못과 상처, 우리의 기쁨과 슬픔, 결국 세계 전체를 제대 앞으로 가져온다.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을 변화시켜 주시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 거룩한 변화가 일어나는 사건 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래서 빵과 포도주는 세계 전체를 상징한다. 성찬례 안에서 하느님은 이 세계 전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룩하게 변화시키신다. 이것이 축성이다. 이 변화의 사건을 믿지 않고는 신앙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p> <p>영성체는 세계 전체가 제대 위에 바쳐져서 거룩하게 변화된 것을 나누어 먹는 행동이다. 우리는 그 변화의 결과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 안에 들어가 우리 몸과 영의 에너지와 피가 되어 우리 몸을 돌아다닌다. 새로운 몸과 피를 받았으니 우리 자신도 변한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우리 몸을 돌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 몸은 거부반응을 일으켜 몸이 굳고 더는 살아갈 수 없다. 게다가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을 여럿이 나누어 먹었으니, 교회를 떠나 우리가 들어가 살아가는 세계와 사회도 우리를 통해서 변화와 나눔의 은총이 일어나야만 한다. 이 변화된 그리스도의 몸에 비추어 우리 삶과 우리 사회에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고, 우리 자신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아간다면? 이는 우리가 진정으로 ‘영성체’하지 않았다는 말이다.</p> <p>적어도 성공회 전통은 우리가 전례 안에서 변화를 경험하는 만큼, 사회도 그렇게 변할 수 있으며, 변해야 한다는 희망을 고수했다. </p> <p>“그리스도인은 전례를 통해서 ‘경제적인 인간’(homo economicus)이나 ‘소비적인 인간’(homo consumericus)이기를 포기한다. 대신 ‘성찬례의 인간’ 즉 ‘나눔의 인간’(homo eucharisticus)으로 변화된다.” 지난 세기 최고의 전례학자 그레고리 딕스(Gregory Dix) 수사 신부의 말이다.</p> <p>이것이 전례를 통해서 경험하는 거룩한 변화의 진정한 뜻이며, 전례가 비추는 사회의 비전이다.</p> <p>“거룩한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예배하려 한다면, 우리는 이제 자신의 성막을 나와, 우리 안에 신비하게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세상의 거리로 걸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도시와 마을 사람들 안에서 같은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 빈민촌에 머무시는 예수님에 대한 측은지심이 없이는 우리는 성막에 있는 예수님을 예배하노라 할 수 없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바쳤던 선교사 프랭크 웨스턴 주교의 외침이다.</p> <p>이런 고민과 전통을 돌아보며, 우리는 우선 교회와 전례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세밀하고 신실하게 물어야 한다. 전례 안에서 읽고 듣는 예언자적인 말씀이 불편하더라도 귀와 마음을 열어 그 도전을 받아들이는가? 사적인 고민뿐만 아니라 사회와 세계의 갈등과 아픔을 제대 위에 봉헌하는가? 하느님께서 그 세속적인 것들을 축성하여 우리에게 거룩한 몸으로 나누어 주실 때, 거리낌 없이 우리 살과 피로 먹고 마시는가? 그리하여 우리 교회와 자신도 그 몸을 모시고 세상 밖에 나가 세계와 사회도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실천하는가? </p> <p>(성공회 신문, 2011년 12월 24일자) </p> viamedia on "전례 여행 18 - 성무일도와 성찬례"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706#post-1304 금, 09 12월 2011 05:18:56 +0000 viamedia 1304@http://liturgy.skhcafe.org/ <p>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p> <p>18. 성전의 두 기둥 - 성무일도와 성찬례</p> <p>천하장사 삼손은 들릴라의 꼬임에 넘어가 머리칼을 잘리고 눈까지 빼앗긴다. 결국, 그는 불레셋 사람의 신전 잔치에 무기력하게 끌려가 조롱거리가 된다. 눈멀어 절망 속에 있는 삼손은 주위 사람에게 그 신전을 떠받치는 두 기둥 사이에 자신을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하느님께 마지막으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고는 두 기둥을 밀어 넘어뜨린다. 신전은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p> <p>이 비극적인 마지막 순간은 교회의 삶에 역설적인 질문을 던진다. 교회의 삶이라는 성전을 지탱하는 두 기둥은 무엇인가?</p> <p>전례 전통의 교회에서 교회 생활의 두 기둥은 단연 성무일도와 성찬례이다. 이 두 전례 행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 이래 교회 전통 속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의 가장 깊은 젖줄이었다. 현대 교회의 여러 예배 모양도 바로 이 두 젖줄에서 비롯한다. 건강한 전례 전통 교회를 가꾸려면, 성무일도와 성찬례의 뜻과 실천, 그리고 두 전례의 관계를 잘 살피며 실천해야 한다.</p> <p>성무일도는 조금 무거운 번역어이다. 성무일도라는 말은 매일 기도가 수도원의 발전에 따라 수도자들이 매일 정해진 시간에 따라 드리는 의무적 기도라는 뜻을 담은 용어이다. 매일 기도는 참여자와 열리는 곳에 따라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발전했다. 하나는 일반 교회의 매일 기도요, 다른 하나는 수도원의 매일 기도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 전통은 대부분 사라지고 수도원 전통만이 살아남았다. 다시 말해 일반 교회에서는 한동안 매일 기도가 사라졌다는 말이다.</p> <p>성무일도를 다시 교회의 예배 생활에 회복한 사람은 성공회 전례 개혁가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였다. 크랜머는 수도자의 전유물이 된 성무일도를 대폭 개정하여 공동기도서에 실어 모든 신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아침의 여러 기도를 종합해서 아침 기도(조도)를, 저녁과 밤의 여러 기도를 엮어서 저녁 기도(만도)를 마련했다. 1930년대 주일 성찬례 회복 운동이 있기 전까지, 아침 기도는 주일 예배를, 저녁기도는 성가대가 함께 하는 아름다운 노래 예배(이븐송)로 자리 잡아 성공회 영성을 키웠다.</p> <p>번역어와 역사가 어떻든, 성무일도는 세 가지 구성 요소가 뚜렷하다. 즉 말씀 읽기와 찬양, 그리고 세상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이다. 교회 전통이 찬양에 좀 더 강조점을 둔 반면, 수도원 전통은 말씀 읽기를 강조하곤 했다.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가 그것이다. 세상과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는 늘 성무일도의 핵심을 이뤘다. 그리스도인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늘 세상과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다.</p> <p>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예배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신비를 기뻐하며, 그 부활 사건을 통해서 이루신 구원에 감사하는 공동체 예배이기 때문이다. 성무일도는 성찬례를 준비하고, 성찬례를 다시 일상의 삶으로 확장한다. 성찬례를 둘러싼 준비와 확장이 바로 성무일도의 위치요, 역할이다. 성찬례가 성무일도의 중요한 세 요소 - 독서, 찬양, 기도 - 를 포함하면서(말씀의 전례) 성찬기도와 영성체로 구성된 것(성찬의 전례)은, 주일 성찬례를 통해서 매일의 기도 생활을 완성한다는 뜻이다. 성찬례 막바지에 세상 속으로 파송 받은 우리는 매일 기도 생활과 더불어 선교 사명을 실천한다.</p> <p>매일의 성무일도와 주일의 성찬례는 우리 삶을 새로운 시간으로 나눠 주기적으로 기도하게 한다. 그런 탓에 성무일도를 ‘시간 전례’라고도 부른다. 주간의 매일과 주일을 관통하는 주기적인 리듬감이 우리 기도 생활을 이룰 때, 우리는 몸에 밴 전례 생활을 할 수 있다. 일찍이 사제요 시인이었던 조오지 허버트는 이렇게 노래했다(1663년).</p> <p>“그저 하루만이 아니라, 칠일 동안 내내 / 내가 주님을 찬양하리니 / 내 비록 하늘에 있지 않더라도, 마음을 들어 / 주님께 올리리라.” </p> <p>허버트 신부는 성공회 영성이 매일의 찬양, 말씀 읽기와 기도, 그리고 주일의 성찬례에 뿌리 내리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와 더불어 교회력이 비추는 구원의 역사라는 새로운 시간에 우리 몸과 마음을 맡기는 일이 우리를 봉헌하는 삶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시간의 리듬에 맞춘 전례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빚어낸다. </p> <p>한편, 언젠가부터 우리 교회에서는 주중의 성무일도가 사라지고 매일 성찬례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매일 성찬례가 굳이 성공회의 오랜 전통이라고 할 수 없을지라도, 이미 널리 퍼져 신앙생활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면 좋은 일이다. 다만, 이로써 교회 전례 전통의 다른 한 기둥인 성무일도가 퇴색한다면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세계 곳곳에서 주일 성찬례의 회복과 더불어, 성무일도에 대한 관심과 실천이 새롭게 일어나는 흐름을 보노라니 더욱 그렇다.</p> <p>성공회 신앙 전통의 두 기둥이 튼튼하게 서서 우리 교회의 전례와 신앙을 올곧게 떠받치고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p> <p>(성공회 신문 2011년 12월 10일자 6면) </p> viamedia on "전례 여행 17 - 삼위일체와 전례"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704#post-1281 금, 25 11월 2011 09:10:26 +0000 viamedia 1281@http://liturgy.skhcafe.org/ <p>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p> <p>17. 춤추시는 하느님 - 삼위일체와 전례</p> <p>삼위일체 교리는 지난 2천 년 교회 역사 동안 많은 신학자와 신앙인을 괴롭힌 신학 주제다. 내로라 하는 대학자들도 헷갈려서 많은 이단 논쟁이 여기서 나오곤 했다. 그러니 그 교리를 여전히 잘 설명하지 못하는 신학자, 성직자나, 잘 이해하지 못하는 신자라 해서 자기 머리를 쥐어박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고 삼위일체 교리를 성서의 명확한 근거 없이 몇 사람들이 만들어 강요한 것이라고 내칠 수 없다. 그러기에는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활동이 매우 다채롭고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노라고 성서와 교회가 증언하기 때문이다. </p> <p>교리에 앞서 경험과 증언이 있었다. 난해한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되기 이전에 삼위일체의 행동이 먼저 있었다. 창조하시는 하느님, 성육신하시어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이 먼저 있었다. 이 구원의 행동을 많은 초대 그리스도인이 경험하고 증언했다. 이를 다시 기억하고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하며 물려주는 공간이 바로 전례였다. 이 경험을 좀 더 정교한 논리를 써서 교리로 만든 일은 나중 일이었다. 이 선후를 바꾸면 오해가 생긴다.</p> <p>세례와 성찬례는 삼위일체의 행동을 되새겨 준다.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선물처럼 주어진다. 이 삼위일체 이름이 있고 없음으로 세례가 유효한지 무효인지 판가름한다. 성찬기도의 절정은 막바지 삼위일체 영광송이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 하나되어, 온갖 영예와 영광을 영원토록 받으시나이다.”</p> <p>왜 세례와 성찬례는 이 삼위일체 이름을 고집하는가? 성찬기도 마침 영광송이 드러내듯이,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나누는 관계 때문이다. 서로를 통해, 서로 함께, 서로 안에서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삶이다. 그러니 하나의 세례를 나눈 그리스도인들은 성찬례와 세상의 삶 속에서 이와 닮은 관계를 누리며 살아야 한다. 이런 공동체의 삶이 바로 삼위일체의 삶이다.</p> <p>전례 공동체로 모인 신자들은 거듭해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예배한다. 전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해달라고 청원한다. 이 삼위일체의 전례가 우리를 공동체로 이끌며, 공동체의 신앙을 만들고, 이 신앙을 세상에 적용하며 살아가도록 인도한다. 이런 전례의 경험이 없으면 삼위일체는 우리 삶과는 무관하게 허공을 떠도는 난해한 교리가 된다.</p> <p>다시 말해, 삼위일체는 교리로 설명할 이론이 아니라, 그 삶으로 드러나야 할 행동이다. 그 두 차원은 ‘함께 나누는 친교’(코이노니아)이며, ‘서로 뒤섞여 하나가 되는 춤’(페리코레시스)이다. 15세기 이콘 하나와 20세기 그림 하나는 이를 잘 보여준다. </p> <p>&lt;그림&gt; 안드레이 류블레프 - 삼위일체<br /> <a href="http://en.wikipedia.org/wiki/File:Angelsatmamre-trinity-rublev-1410.jpg" rel="nofollow">http://en.wikipedia.org/wiki/File:Angelsatmamre-trinity-rublev-1410.jpg</a></p> <p>잘 알려진 15세기 러시아 삼위일체 이콘은 원래 낯선 나그네를 환대했던 아브라함 이야기(창세 18장)를 그린 것이다. 낯선 떠돌이를 극진하게 대접했던 아브라함은 이 세 손님이 친교를 누리는 시간과 장소를 마련했다. 이 친교의 현장이 바로 삼위일체 이콘이 되었다. 이 이콘을 설명하기보다는, 이것이 비추는 친밀한 교제를 응시하는 일이 먼저다.</p> <p>&lt;그림&gt; 앙리 마티스 - 춤<br /> <a href="http://en.wikipedia.org/wiki/File:Matissedance.jpg" rel="nofollow">http://en.wikipedia.org/wiki/File:Matissedance.jpg</a></p> <p>20세기 초 화가 앙리 마티스는 ‘춤’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옷을 입지 않은 여럿이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어떤 이들은 나체는 우리가 태어난 삶의 본연이고, 서로 마주 잡은 손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고, 원은 그들이 만든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풀이한다. 그러나 춤을 추는 운동이 더 중요하다. 신앙은 뜻풀이가 아니라 행동이라는 말이다. 삼위일체는 춤추는 하느님이시며, 우리를 춤의 공동체가 되도록 부르신다. </p> <p>삼위일체의 전례가 가진 이 두 가지 차원은 교회에 선교적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낯선 이들을 환대하는 공동체인가? 우리는 낯선 이들과 함께 손을 붙잡고 춤을 출 수 있는 공동체인가? 우리는 전례를 이런 삼위일체의 춤으로 만들 수 있는가?</p> <p>이 질문과 씨름할 때, 레너드 코헨의 노래가 들린다.</p> <p>“불타는 바이올린 선율과 당신의 아름다움에 맞추어, 나와 춤을 춰요. 내가 모든 두려움을 넘어서 평온으로 모여들 때까지, 나와 춤을 춰요. 당신의 손으로 나를 만지고, 사랑이 끝날 때까지, 나와 춤을 춰요. 사랑이 끝날 때까지, 나와 춤을 춰요.”</p> <p><a href="http://www.youtube.com/watch?v=1MsgJsin3p0" rel="nofollow">http://www.youtube.com/watch?v=1MsgJsin3p0</a></p> <p>(성공회 신문 2011년 11월 26일자 6면) </p> viamedia on "전례 여행 16 - 전례와 성령"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703#post-1272 수, 09 11월 2011 16:18:09 +0000 viamedia 1272@http://liturgy.skhcafe.org/ <p>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p> <p>16. “우리에게 내리시는 영” - 전례와 성령</p> <p>지난 20세기는 성령 운동의 시대라 할 만큼 성령의 활동에 대한 체험이 세계 교회 곳곳에서 남달랐다. 이 체험은 성령쇄신 운동, 은사(카리스마) 운동, 오순절 운동 등으로도 불린다. 이 체험은 신앙인의 뜨거운 내적인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신앙은 교리와 관습을 머리와 이성으로 이해하는데 머물지 않는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용서의 은총을 가슴과 몸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이런 각성과 주장이 널리 힘을 얻었다. 교회의 기존 관습과 구조에 변화를 일으켰고, 급속한 양적인 성장도 이끌었다. </p> <p>성부 하느님의 높으신 위엄과 성자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희생을 너무 강조했던 탓일까? 교회의 신학과 관습은 너무 무겁고 복잡하여 자신에게 닥친 신앙적 갈증을 풀어주지 못한다고들 느꼈다. 이런 와중에 마음의 상처를 감싸는 위로, 감정을 격하게 흔드는 힘을 체험한 이들은 그것이 성령 하느님의 활동이라고 증언했다. 이는 과연 그동안 교회 생활과 신학에서 잊혀진 성령 하느님을 재발견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p> <p>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운동들은 지금 몇 가지 질문과 씨름하고 있다. 성령 하느님 체험이 개인의 감정에 머문 나머지 공동체에는 무관심하지 않는가?(개인주의) 몇몇 특별한 은사만 강조하다가 다른 다양한 은사들은 무시하지 않는가?(은사의 차별) 지금의 강렬한 체험에만 의지하면서, 전례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변화를 오해하지 않는가?(전통과 전례의 약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 사건이 현재의 성령 체험과 무관한 것이 되지 않는가?(예수와 성령의 분리) </p> <p>루가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삶은 하느님의 영에 이끌린 삶이다. 예수님은 '영'으로 잉태했고, ‘영’에 이끌려 광야에 나가셨고, ‘영’의 내림을 받아 복음을 선포하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그 ‘영’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셨다. 마침내 그 ‘영의 몸’으로 부활하셨다. “주님의 영(프뉴마)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며,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가 4:18) 이 ‘프뉴마’가 바로 예수의 삶 속에 녹아든 성령 하느님이시다.</p> <p>교회의 전례 속에서 우리는 그 ‘영’에 이끌려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한다. 더불어, 그 ‘영’이 예배 공동체로 모인 우리 모두에게 내리기를 청원한다. 예수 기억(아남네시스)과 성령 청원(에피클레시스)이 성찬기도의 핵심이다. 이 둘이 함께하지 않으면 성찬기도는 불완전하고, 이 둘을 우리 의식과 몸과 행동에 새기지 않으면 예배는 완전해질 수 없다. </p> <p>그렇다면, 완전한 예배 속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과 사람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성찬기도 전체는 축성기도이다. 이 축성은 이중으로 일어난다.</p> <p>첫째, 성령께서는 빵과 포도주와 같은 세속적인 사물을 거룩하게 하신다. 우리가 창조 세계에서 땀 흘리고 수고하여 만들고 거둬들인 것을 거룩하게 하신다. 이로써 에덴동산의 타락 이후 저주와 징벌이었던 우리의 노동은 이제 거룩한 것이 된다. 우리가 봉헌한 하찮은 빵과 포도주는 이제 고귀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어 우리 생명을 살린다. 이 거룩한 변화는 이제 세상의 그 어떤 작은 사물도, 생명도, 생활도 고귀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품게 한다. </p> <p>둘째,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일치하게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당부하셨다(레위 11:44-45; 1베드 1:16). 우리 힘만으로 그리할 수 없으니 성령께 우리를 거룩하게 해달라고 청원한다. 그러므로 축성기도는 봉헌한 예물만이 아니라, 예배에 참여한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 되도록 바치는 기도이다. 이때 거룩한 몸의 표지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인 ‘우리’이다. 그래서 이 축성기도는 그리스도의 한 몸과 한 피를 나누는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위한 청원 기도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룩하게 된 공동체 안에는 차별이 없다. 오직 기도를 통한 연대만이 있다.</p> <p>성령은 바람처럼 마음대로 분다. 그 자유로운 성령을 우리 손아귀에 붙잡아 두고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지난 세기에 성령의 바람은 교회의 굳은 관습과 짓누르는 권위주의를 무너뜨리고 신앙의 활력을 교회에 불어넣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성령의 바람은 예수님의 삶을 이끄신 복음과 해방과 자유의 영을 우리 몸 안에 되살리라고 촉구한다. 세상의 질서와 세속적인 것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오히려 그 거룩한 가능성을 발견하라고, 우리 등을 떠민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분열된 우리의 신앙과 삶을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로 변화시키라고 부른다.</p> <p>전례는 성령이 이끄시는 그 거룩한 변화의 체험 현장이다.</p> <p>(성공회 신문 2011년 11월 12일자 6면) </p> viamedia on "전례 여행 15 - 전례의 기억과 시간"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702#post-1271 목, 20 10월 2011 14:07:49 +0000 viamedia 1271@http://liturgy.skhcafe.org/ <p>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p> <p>15. “나를 기억하라” - 전례의 기억과 시간</p> <p><strong>“나를 기억하여 이 일을 행하라.”</strong></p> <p>그리스도교는 기억 위에 세워진 종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교회 역사 속에서 계속 펼쳐지는 신앙인들의 삶과 증언을 기억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종내에 완성되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기억한다. 이 역사의 기억을 망각하고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전례와 전례력은 이 기억을 우리 온몸으로 보존하고 축하하며 우리 일상 생활에서 훈련하는 장치이다.</p> <p>전례를 통한 기억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기억이다. 교회는 이 전례적 기억을 성서 희랍어를 따라 ‘아남네시스’라 부른다. 성찬기도는 이 특징을 아주 잘 보여준다. 성찬기도는 하느님을 향한 감사 기도인데, 이 감사는 기억에서 나온다. 하느님께서 과거에 베푸셨고, 현재도 베푸시고, 미래에도 베푸실 사랑과 은총의 구원 행동에 대한 기억이다. 성찬기도는 그 기억의 세 차원을 이렇게 아우른다.</p> <p><strong>과거 기억</strong>: 이 기억의 핵심은 하느님의 창조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보시기에 참 좋은 것’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하고 하느님과 이웃에게 죄를 범했다.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베푸셨지만, 인간은 배신을 계속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몸소 인간이 되시어, 우리가 사는 사회, 정치, 경제 환경 속에서 함께 사셨다. 그러나 그 삶의 방식때문에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에게 억압을 당하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우리는 이 고난의 상황과 죽음의 사건을 기억한다.</p> <p><strong>현재 기억</strong>: 예수의 부활은 죽음을 되풀이하는 과거의 악순환을 끊고 새로운 시간을 여는 사건이다. 신앙인은 죽음을 이기신 예수의 부활을 ‘지금 여기서’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예수 부활 이후, 역사는 부활의 현재형이다. 부활은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마련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사시며 보여주셨던 사목과 선교, 그의 자기 포기와 희생은 이제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넘어서 부활의 생명과 몸을 이룬다. 그 부활을 사는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방법이다.</p> <p><strong>미래 기억</strong>: 우리 신앙에서 기다림과 기억은 같은 말이다. 성찬기도는 일치와 정의와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찬 시간의 완성을 기억한다. 종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심판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모든 것을 거룩하게 채우는 사건이다. 먼저 떠나간 이들과 지금 살아가는 우리들이 모두 모이는 시간이다. 세상이 만든 분열과 분리의 벽을 무너뜨리고, 다같이 하느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시간이 바로 종말이다. 삼위일체 하느님께 드리는 성찬기도의 마지막 영광송은 우리 삶을 그 삼위일체의 사랑과 친교처럼 만들겠다는 다짐이다.</p> <p>그러나 시간은 기억의 적이다. 시간은 망각을 부추기고, 사람들은 그 망각에 기대어 잘못을 숨기기도 한다. 시간의 망각을 막으려는 기억 장치가 바로 전례력(교회력)이다. 망각하는 세상의 시간을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시간으로 재배치한 새로운 달력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삶의 행적에 우리 자신의 삶을 얹혀 놓는다. 예수님을 닮고자 한다면 그분이 가신 길과 세월을 그대로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p> <p>전례력에 따라 전례에 참여하면서 우리의 기억은 두뇌의 작동에 머물지 않고 우리 몸과 일상 생활을 수련하도록 이끈다. 계획이 잘 짜여진 운동으로 ‘몸짱’을 만들 듯이, 전례력에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만들기’를 한다. 이런 뜻을 깊이 헤아리지 않으면 전례력과 전례는 거추장스러운 전통의 찌꺼기가 되고 만다. 이런저런 체력단련 도구를 사다가만 놓고, 그 작동법도 모르고 계획대로 실제 운동도 하지 않으면서 그 도구만 나무라는 꼴이다. </p> <p>이 모든 기억은 우리에게 위험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으셨으니, 그 길을 기억하고 따르는 일은 위험할 수 밖에 없다. 하느님의 정의로운 창조 세계를 회복하시려고 스스로 한없이 낮추신 그리스도의 포기와 희생, 고난과 죽음을 누군가 선포하면, 우리가 바라는 편안한 삶을 위협하는 소리로 듣기도 한다. </p> <p>이 모든 기억은 다른 어떤 이들에게도 위험한 말로 들린다. 그 기억은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다가 스러져간 한 청년의 삶을 되새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일을 덮고 싶은 가해자들에게는 그 사건을 기억에 되살리는 일은 위험하다. 그래서인지 그 가해자들은 종종 그 기억의 장치를 고장내고는 쓸모없다고 단언한다.</p> <p>예수님에 대한 기억은 ‘위험한 기억’이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복음의 가치에 따라 우리 자신에게 도전하고, 우리의 변화를 요구하고, 우리의 책임있는 행동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그 기억의 장치와 궤도인 전례와 전례력 안에서, 우리는 이 위험한 도전에 몸과 마음을 열어야 한다. 온몸을 통해서 기억한다는 것은 그 위험을 온몸으로 산다는 것이다. </p> <p><strong>“나를 기억하여 이 일을 행하라.”</strong></p> <p>(성공회 신문 10월 22일, 6면) </p> viamedia on "전례 여행 14 - 전례와 몸의 감수성"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701#post-1270 화, 11 10월 2011 14:21:32 +0000 viamedia 1270@http://liturgy.skhcafe.org/ <p>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p> <p>14.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 전례와 몸의 감수성</p> <p>“그 어떤 것도 나에게 아무런 존재가 되지 못하던 시절. 어머니가 조개껍데기 모양의 예쁜 마들렌 케이크를 주셨다. 기력이 빠진 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고 마들렌을 적신 차를 조금 맛보았다. 케이크 부스러기가 섞인 따뜻한 차가 입천장에 닿자마자 나는 몸서리 쳤다. 갑자기 그 맛이 기억났다. 그리고 거리 위쪽의 오래된 잿빛 집이 작은 현관과 분리된 무대처럼 우뚝 치솟았다.”</p> <p>마르셀 프루스트의 &lt;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gt;라는 긴 소설을 다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병상에서 그가 맛본 작은 마들린 케이크와 홍차의 향기가 잊고 있었던 오랜 기억을 새롭게 살려주었다는 이 대목쯤은 어디선가 들었을 것이다. </p> <p>이 경험에 공감했는지 심리학자들은 냄새가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실험으로 밝혀내기도 했다. 그리고는 맛과 따뜻함에 묻어난 냄새가 기억을 상기하는 현상을 ‘프루스트 효과’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교회 전통을 통해서 보았더라면, ‘전례 효과’라 고쳐 불렀을지도 모른다. 교회는 몸의 다섯 가지 감각(오감)이 모두 작동하는 전례를 거행하면서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전례적 교회는 몸의 오감을 총동원하여 과거의 사건을 오늘에 되살리고, 되살린 기억에 따라 내일을 다짐하며 살아가는 교회이다.</p> <p>우리 몸의 오감이 전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예를 들어 간단히 설명한다.</p> <p>시각: 예배를 드리러 신자들이 모이는 교회 공간은 그 시각적 초점이 분명하다. 아무리 크고 찬란한 성당이라도, 전세살이하는 작은 교회라도, 우리 시선의 초점은 중앙의 제대로 모인다. 오랫동안 십자가를 시선의 중심으로 여기기도 했고, 스테인드글라스나 멋진 성화에 눈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러나 전례 공간의 중심은 제대이다. 그 제대는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 </p> <p>촉각: 많은 교회는 입구에 세례대(성천)나 작은 성수대를 마련하여, 성당에 들어오는 신자가 손을 적셔 세례의 기억을 되살리도록 돕는다. 손끝에 묻힌 물의 촉감은 이마로 이어져서 온몸에 십자성호를 긋고, 이전에 받은 세례의 은총이 우리 몸에 물처럼 부어졌음을 되새겨준다. 세례받지 않은 새신자라도 거룩한 물로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한다는 다짐을 한다.</p> <p>후각: 많은 성공회 신자에게 전례의 냄새는 유향을 피우는 냄새이다. 다양한 꽃의 향과 나무의 진액을 뽑아 여러 과정을 거쳐 결정체로 만든 유향은 우리 인간의 고된 노동을 상징하거니와, 우리 기도를 하늘에 올리는 상징이기도 하다. 또한 예배드리는 공간과 성물, 그리고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을 정화하고 드높인다는 다양한 뜻을 지닌다. 이런 해설 이전에 그 냄새는 우리를 아늑한 어떤 기억으로 데려간다.</p> <p>청각: 전례 공간에서 울리는 다양한 소리는 우리의 청각을 자극한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신자들의 목소리, 악기 연주, 그리고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우리 귀에 꽂히는 성서의 말씀과 설교자의 음성, 또 집전자와 신자들의 모든 음성이 청각에 작용한다. 이와 더불어,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안부를 나누는 다정한 잡담마저도 우리가 공동체요 한 식구인 것을 되새겨 준다.</p> <p>미각: 대체로 미각은 후각과 함께 작동한다. 영성체에서 맛보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우리 몸에 직접 영향을 미치며, 말 그대로 우리 몸속 깊이 흘러들어 우리 신앙의 기력을 만든다. 우리 노동의 상징이며 우리 봉헌의 표지이고, 다시 우리에게 그리스도 희생의 은총으로 주어진 선물을 내 몸의 혀로 맛보며 목으로 넘기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몸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p> <p>이러한 감각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전례가 진정한 전례이다. 설령 개인의 신체적인 처지에 따라 몇몇 개별 감각을 느낄 수 없을지라도, 이런 감각에 담긴 상징과 의미를 알고, 다시 전례와 일상에서 몸으로 느끼는 훈련을 거듭할 때 전례에 더욱 깊이 참여할 수 있다. 전례는 몸으로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기억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오감을 넘어선 육감의 전례를 드릴 수 있다. 이제 전례는 육감이다. 우리는 이것을 전례적 감수성이라고 한다.</p> <p>“사람이 죽은 뒤, 사물이 부서지고 흩어진 뒤, 과거의 먼 시간을 거치며 살아남는 것은 없다. 다만, 맛과 냄새만이 살아남을 터이니, 어쩌면 그것은 더 미약한 것일지언정 더 오래가며, 더 불확실할지언정 쉽게 소멸하지 않는다. 이것은 더욱 신실한 것이어서, 오랫동안 꿋꿋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것은 영혼처럼, 모든 것들이 남기고 간 폐허 속에서도, 기억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버티는 힘이다. 어떤 위협이나 유행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 작고 미세한 한 방울의 힘이 바로 모든 기억의 광대한 구조를 지탱한다” (마르셀 프루스트)</p> <p>이것이 감각을 통한 기억의 감수성이며, 우리 전례가 지향할 영적인 몸의 감각, 즉 교회의 감수성이다.</p> <p>(성공회 신문 2011년 10월 8일, 6면) </p> Elyot on "전례 여행 13 - 성사와 성사성: 하느님 은총의 통로"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88#post-1224 월, 29 8월 2011 10:37:27 +0000 Elyot 1224@http://liturgy.skhcafe.org/ <p>저는 평소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혹시 잘못된 것이 있으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p> <p>하느님이 세상을 다스려 가신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개입" 이란 어느 특정한 시점에만 일어나는 간헐적인 사건이 아니라, 마치 수학에서 말하는 "유리수의 조밀성" 처럼, 끊어짐 없이, 빈틈 없이, 삶의 모든 순간들에 촘촘히 일어나는 사건이다. </p> <p>초월해 계신 분이,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세계" 에 이렇게 개입하시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주고 받음의 관계가 아니라, 하느님 쪽에서 인간에게 다스리심 또는 돌보심의 행업이 일방적으로, 한 방향으로 움직여 오는 것이므로: 인간의 입장에서, 하느님의 그러한 활동을 일종의 "선사해 주심" 으로 보아 "은총 (charis)" 이라고 부른다.</p> <p>그러므로 성사란,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사건인 은총을 은총으로 알아보게끔 하는 행위이므로, 성사 그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 내리시는 행업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달라지는 것은 인간의 감각적인 상태일 뿐으로, 평소에는 일상의 다양한 일들로 분산되어 있던 주의와 감각이, 성사의 시간에는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을 감지하는 일에 모아진다. 이러한 시간을 자주 가지면, 그만큼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더 민감해질 수 있으므로, 인간 쪽에서 더 행복한 마음으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성사에 참여하거나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이 그에게 은총 내리기를 그만 두시거나, 덜 내리시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그냥 끝없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을 뿐이다.</p> <p>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하느님께 간절히 청원드릴 것이 있어서 교회에 나오거나, 기도를 한다. 원의를 하느님께 아뢰러 성사에 참여한다는 발상은 너무도 흔하거니와, 이것을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을까? 은총이 인간의 행위와 관계없이 하느님의 하느님되신 본성으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으로 쏟아지고 있는 것이라면, 인간이 하느님께 아뢰든 아뢰지 않든, 될 일은 될 것이고, 안될 일은 안되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이라면, 되는 것은 되어서 은총이고, 안된 것은 안되었기 때문에 또 그것대로 은총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뢸 필요가 있는가?</p> <p>그러나, 은총에 대한 그러한 개념을 갖는다고 해서 사람이 아뢰기를 멈추게 되는 것은 아닌데; 일단 바라는 마음이 있고, 자기 앞에 하느님을 두고 있다면, 은총을 어떠한 것이라고 생각하든 자신의 그러한 바람 때문에 하느님께 아뢰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아뢰는 일은, 그러한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무언가 더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터져나오는 탄원인 것이다. </p> <p>그러므로 결론은: 하느님이 하시는 모든 행업은 은총이며, 그 은총을 은총으로 의식하는 일에 바쳐지는 행위가 성사이다. 그러나, 인간이 은총을 의식하든 그렇지 못하든, 하느님의 은총 내리시는 일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흔히 인간이 자신의 소망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을 때 하느님께 청원의 기도를 드리지만, 이 역시 실질적으로 하느님의 은총내리시는 양상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인간이 자신의 불완전함 때문에 발하고 마는, 일종의 탄식, 한숨일 뿐이다. </p> <p>하느님께서 기도 바치는 사람의 사정을 어여삐 보아주시어 그에게 개인적인 돌봄을 베풀어 주신다는, 대단히 인격적인 방식의 하느님 묘사가, 구약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위와 같은 은총관과는 다소 대립된다. 위와 같은 생각에서라면, 인간은 하느님께 아뢸 수만 있을 뿐, 실제로 아무 것도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이며, 무슨 일이 닥치든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이 성숙한 태도가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p> viamedia on "전례 여행 13 - 성사와 성사성: 하느님 은총의 통로"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88#post-1223 토, 27 8월 2011 02:26:42 +0000 viamedia 1223@http://liturgy.skhcafe.org/ <p>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p> <p>13. 성사와 성사성 - 하느님 은총의 통로</p> <p>이번에는 ‘성사’를 둘러싼 두 가지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하나는 그 다양한 뜻풀이와 쓰임새, 그리고 원칙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사의 개수를 관한 것이다.</p> <p><strong>1) 십몇 년 전 신학교 교실 풍경</strong></p> <p>교수 신부님은 뜬금없이 “성사(聖事: sacrament)란 무엇이오?”하고 신학생들에게 물으셨다. 무슨 맥락에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신학생들은 이런저런 단답형 대답을 내놓았다. 신부님은 그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셨는지, 옆자리로 연이어 한 사람씩 물으셨다. 어느 동료의 대답이 기억에 남는다. “말 그대로, ‘거룩한(聖) 일(事)’입니다.” 신부님은 한숨을 쉬셨고,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잘못된 대답이었을까? </p> <p>사실 신부님이 원하시던 답은 “성사란,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은총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5세기 히포의 성 어거스틴 이후로 정해진 모범 답안이다. 그러나 이 오래된 개념 정의를 내놓지 않은 학생들을 탓해야 할까? 실제로 이 답을 학생들이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성사’라는 말은 그 맥락에 따라서 크고 작은 의미로 다양하게 쓰인다. 학생들의 여러 단편적인 생각을 모아서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는지 연결해 주는 것이 더 나은 교수법이 아니었을까?</p> <p>‘성사’라는 말이 우리말로 전해지기까지 우여곡절이 있다. 성사를 지칭하는 성서의 원래 낱말은 ‘미스테리온’(신비)이다. 이 말이 라틴어로 ‘사크라멘툼’(맹세)으로 번역되었다. 다시 이 말은 한자어를 조합한 우리말 ‘성사’(거룩한 일/것)가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큰 ‘신비’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성육신 사건이다. 그래서 성육신 사건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를 근원적 성사라고 한다. 더 나아가 최근의 성사신학은 하느님의 은총이 물질로 세상에 드러난 ‘창조’ 사건으로 근원적 성사를 확장한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창조 세계와 참인간인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도록 드러났다. 이것이 성사의 원칙, 즉 성사성이다. </p> <p>이를 바탕으로, 교회는 성사를 좀 더 구체적인 상황에서 다양하게 썼다. 넓게는 성찬례가 성사 자체이며, 좁게는 성체(축성된 빵과 포도주)가 성사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은총과 서약의 예식인 세례도 성사이다. 그리스도인이 인생에서 겪는 중요한 고비들을 하느님께서 은총을 내리시는 계기와 통로로 보고 그 예식을 점차 성사라 불렀다. 견진, 고해, 혼인, 조병, 성직서품이다. 그 계기마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듬뿍 내려 축복하셨으니 모두 ‘거룩한 일’이다.</p> <p><strong>2) ‘7’ 성사와 ‘2’ 성사</strong></p> <p>그리스도교는 서로 나뉘어서 자기 전통에 따라 발전했기 때문에, 성사의 개수를 두고도 설왕설래가 많다. 이런 우스개가 흔히들 오간다. “천주교는 7성사, 개신교는 2성사(세례와 성찬례), 성공회는 천주교인 앞에서는 7성사, 개신교인 앞에서는 2성사.” 이런 말이 마뜩잖다면, 우리 기도서에서 구분한 ‘두 개의 성사’와 ‘다섯 개의 성사적 예식’도 마찬가지일 성 싶다. 한편, 천주교 여성 신자는 이런 우스개를 던지기도 한다. “남자에게는 7성사, 여자에게는 6성사." 여성성직을 거부하는 천주교에 대한 자조 섞인 비아냥이다.</p> <p>한편, 정교회 측의 답변은 우리 생각을 더 넓히라고 제안한다. “우리도 7성사. 세례와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성사이며, 다른 다섯 개의 예식도 당연히 성사.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이 7개의 성사에 그칠 수 있겠는가? 하느님께서 지금도 펼치시어 우리에게 드러나고 경험하는 은총이 모두 성사가 아닌가?” 이 셈법에 따르면, 성사는 아브라함이 밤 하늘을 우러러 보았던 별의 수 만큼이나 많다. 성사가 몇몇 구체적인 예식을 가리킨다 하더라도, 그 의미를 좁게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경고이겠다. 교단을 막론하고 교회는 지금 이 경고를 깨닫고 있다.</p> <p>20세기 전례학의 거두 제임스 화이트(감리교)는 개신교 신학의 미래가 성사성에 대한 감각의 회복과 그 실천에 달려 있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현대 교회 안에서 풍요로운 성사적 삶을 막고있는 장애물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p> <p>첫째, 성사를 하느님의 현존하는 행동으로 보지 않고, 과거에 있었던 하느님의 행동에 대한 인간의 기억으로만 보려는 태도이다. 또,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분리하는 사고 방식에 물들어, 성사 안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기 어렵다.</p> <p>둘째, 최근에 일어나는 위협 가운데 하나는 몇몇 교회 성장 운동을 통해서 더욱 두드러진다. 여기서는 성사과 교회력, 그리고 성서정과가 우리 문화에 적절하지 않고 혼란을 일으킨다고 하면서 이를 밀어내려 한다.</p> <p>셋째, 생각없이 대충 성사를 집전하는 것도 풍요로운 성사적 삶을 막는다. 준비없이 드리는 성찬례와 성사는 그 안에서 이뤄지는 하느님과의 사귐이라는 신앙을 약화시키고 파괴한다. 여러 성사의 의미에 대한 가르침이 부족해지면서 이제 성사에 대해 무지한 세대가 되어 버렸다.</p> <p>다행히, 우리 교회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p> <p>(성공회 신문, 2011년 8월 24일치, 6면) </p> viamedia on "전례 여행 12 - 말씀과 성사: 하나인 전례"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87#post-1221 화, 16 8월 2011 13:16:44 +0000 viamedia 1221@http://liturgy.skhcafe.org/ <p>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p> <p>12. 말씀과 성사 - 하나인 전례</p> <p>‘말씀’과 ‘성사’의 관계에 대해 오해가 크다. 그 대표적인 예는, “개신교는 말씀 중심의 교회, 천주교는 성사 중심의 교회”라는 말이다. 이런 주장에서는 ‘말씀’을 성서 구절이나 설교로, ‘성사’를 영성체나 축성된 성체로 좁게 이해한다. 한편, 성공회는 이 둘의 균형을 훌륭하게 이루고 있다고 짐짓 자신한다. 그런데 그 자신감이 늘 개운치는 않다. 둘 중에 어느 한 쪽으로 명확히 가야 한다는 대범한 주장을 우리 교회 안에서 종종 듣기 때문이다. 다른 교회들이 만들어 놓은 좁은 틀에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할까?</p> <p>‘말씀’이란 무엇인가? 성서인가? 설교인가? 그도 아니면 성서를 읽거나 설교를 통해 느껴지는 어떤 감동의 물결인가? 이런 물음에 적어도 성공회는 단순히 ‘예’라고만 대답하지는 않는다.</p> <p>‘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근거는 창세기와 요한복음에 있다.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다(창세기 1장).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데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요한복음 1장). 여기서 ‘말씀’은 성서도 아니요, 설교도 아니요, 우리의 감동도 아니다. ‘말씀’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항상 어떤 사건을 일으킨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사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사건들이 바로 ‘말씀’이다.</p> <p>‘성사’란 무엇인가? 좁은 이해로는 영성체요, 축성한 성체이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살펴야 한다. ‘성사’에 대한 교회의 오랜 정의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보이도록 나타나는 사건”이다. 그 원초적인 성사의 사건은 창조의 은총이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성육신의 은총이었다. ‘말씀’의 사건과 그대로 겹친다. 이 원초적 성사가 오늘 우리에게 계속 일어나는 곳과 때가 바로 성찬례라는 성사이다. </p> <p>말씀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면 성사에 대한 이해도 빗나간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는 말씀의 영역을 머리로 제한하기 시작했다. 여러 학자는 교회가 머리 중심의 그리스 철학과 교류하면서 이런 변화가 있었노라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말씀과 사건(성사)의 연결이 약해졌다. ‘말씀’을 설교나 교리로 축소하는 일이 생겨났다. 그러자 사람들은 느끼고 만지는 직접적인 경험에 치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설교보다는, 겉으로 분명히 드러나는 성사의 행동들에 지나친 관심을 둔 것이다. 중세 교회의 극단이다. </p> <p>16세기 종교개혁은 잊혀졌던 ‘말씀’을 회복하자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성서와 소위 ‘바른 해석’(교리)에 대한 강박관념이 강했던 것 같다. 그래서 교회의 성사와 전례 안에서 말씀의 위치와 관계를 되살리기보다는, 여전히 성사와 대결하고 성사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흐름을 만들었다. 또 다른 극단이다.</p> <p>성공회는 세 가지 해결책을 시도했다. 첫째, 기도서 전례문을 성서의 근거에 따라 재구성했다. 이를 세례와 성찬례, 그리고 다른 사목적인 성사들에 적용했다. 둘째, 성찬례 안에서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 두 구성 부분이 균형있게 관계하도록 했다. 셋째, 매일기도(성무일도)를 수도자나 성직자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되살려서, 공동체 안에서 말씀의 잔치(성서 독서, 찬양, 중보 기도)를 회복하도록 했다.</p> <p>20세기 교회 일치 운동과 전례 쇄신 운동을 통해서 대부분의 교회는 말씀과 성사에 대해서 좀 더 일치된 이해에 이르렀다. 말씀과 성사는 하나인 전례의 두 축이다. 어느 한 축이라도 빠지면 전례가 뒤뚱거린다. 말씀없는 성사는 없다. 성사는 말씀인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사건이 우리 앞에 눈에 보이도록 드러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사없는 말씀도 없다. 말씀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특정한 형태를 갖고 선포되어야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성사의 사건이기 때문이다.</p> <p>성찬례의 구조는 그 관계를 잘 드러낸다. </p> <p>말씀의 전례는 말씀의 선포와 경청이다. 독서(구-신약, 시편, 복음서)는 그 자체로 설교와 대등할 만큼 중요한 말씀 선포의 사건이다. 독서 자체가 말씀 전례의 핵심이다. 이런 점에서 전례 독서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살펴봐야 한다. 설교는 독서에서 읽은 말씀을 우리의 상황으로 가져다 주는 길잡이이며, 뒤에 이어질 성찬의 전례에서 일어나는 신비를 비춘다. 그래서 설교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잇는 다리이다. </p> <p>성찬의 전례는 말씀 듣기와 설교라는 길잡이를 따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신비 사건을 우리 몸으로 경험하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성찬기도 안에서 우리는 말씀이신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함께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돌아보고, 영성체를 통해서 그 말씀을 먹고 마신다. 이것이 말씀과 성사의 관계이다. 현대 교회는 이제 “말씀은 성사를 비추고, 성사는 말씀을 구체화하여 우리 몸으로 느끼게 한다”는 고대 교회의 진리를 다시 깨닫고 있다.</p> <p>우리는 함께 말씀을 먹어야 한다. 그리고 성사를 통해서 말씀을 몸으로 살아야 한다.</p> <p>(성공회 신문 2011년 8월 13일치 6면)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