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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태그: 전례 운동 http://liturgy.skhcafe.org/ A Korean Anglican Theology & Liturgy Forum en Mon, 22 Jan 2018 16:11:13 +0000 viamedia on "전례 여행 11 - 예배 전쟁? - 다시 생각하는 고교회와 저교회"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78#post-1219 화, 16 8월 2011 12:27:06 +0000 viamedia 1219@http://liturgy.skhcafe.org/ <p>Cranmerian / 중요한 지적입니다. 이미 이에 대한 논의를 이곳에서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번 글은 그때 펼친 이야기를 요약한 것입니다. <a href="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87" rel="nofollow">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87</a></p> <p>ochlos / 좋은 제안입니다. 좀 더 나은 표현은 "전례 중심의 교회" 혹은 "전례 전통의 교회" 등이라 하면 좋을 것인데, 입에 붙기에 너무 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성사적 교회"라는 표현도 좋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역시 '성사'라는 단어의 쓰임새와 너비에 대한 이해가 엇갈리므로 '전례적'이라는 표현의 장단점을 함께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필요와 맥락에 따라 '전례적 교회' 혹은 '성사적 교회'라는 말을 교차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 ochlos on "전례 여행 11 - 예배 전쟁? - 다시 생각하는 고교회와 저교회"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78#post-1213 화, 09 8월 2011 14:54:22 +0000 ochlos 1213@http://liturgy.skhcafe.org/ <p>'성사적교회'와 '비성사적교회'라고 표현하면 어떨까요? '전례'라는 말이 광범위하기 때문에 '비전례적 교회'라고 하면 아나밥티스트나 무교회주의 등 일부만을 일컫는 말이 될 성 싶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성사'를 '성례전'이라고 부르더군요. 한국 성공회는 '성례전적 교회' '성사적 교회'이다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p> Cranmerian on "전례 여행 11 - 예배 전쟁? - 다시 생각하는 고교회와 저교회"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78#post-1206 월, 01 8월 2011 16:05:30 +0000 Cranmerian 1206@http://liturgy.skhcafe.org/ <p>저교회파, 고교회파라는 용어는 성공회 내에서 피할 수 없는 용어라고 생각합니다.<br /> 그리고 우리 교회내에서 사용되는 이 용어는 거의 대부분이 논쟁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br /> 어느정도라도 개념정리가 필수적이라고 봅니다-시급하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교회<br /> 현실을 파악하고 미래를 설계하는데도 커다란 장애가 계속될 것이며, 이 용어들 자체에 대한<br /> 냉소적인 반응을 지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 viamedia on "전례 여행 11 - 예배 전쟁? - 다시 생각하는 고교회와 저교회"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78#post-1202 토, 23 7월 2011 06:04:39 +0000 viamedia 1202@http://liturgy.skhcafe.org/ <p>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p> <p>11. 예배 전쟁? - 다시 생각하는 고교회와 저교회</p> <p>우리 교회에서 말 많고 탈 많은 이야깃거리 하나는 예배이다. 예배가 대화의 주제가 된다면 전례적 교회로서는 좋은 일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춰보면 사정이 좀 다르다. 성공회 예배는 엄숙하긴 한데, 음악 콘서트나 열탕 같은 열기가 부족하다고 말하는가 하면, 적당한 온기로 온몸을 감싸는 찜질방 같은 맛을 즐기는 게 낫노라는 말도 있다. 모두 일리가 있다. 성공회 예배는 뜨겁고 열정적인가 하면, 엄숙하고 절제된 맛을 건네주기도 한다. 신자 개인과 교회 공동체, 성직자에 따라서 그 맛을 경험하고 느끼는 기대와 방법이 다양하다. 그러나 예배에 대한 생각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의 취향이 아니라, 예배를 이끌고 주도하시는 하느님이다.</p> <p>한편, 식견이 좀 있다는 이들은 종종 한국 성공회의 전례가 ‘고(高)교회’ 일색이어서 문제이고, 그동안 소개되지 않은 개신교 풍의 ‘저(低)교회’ 예배를 받아들여야 한다고들 한다. 반발도 만만치 않다. 저교회 예배는 예배로서 풍모가 없을뿐더러, 요즘은 개신교마저도 성공회의 고교회적인 예배를 모범으로 새롭게 발견하는 처지라고 반박한다. 그런데 이런 구분과 주장이 옳은가? 적어도 이런 용어가 어디서 나왔고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살펴야 한다.</p> <p>‘고교회’나 ‘저교회’라는 용어가 꼭 옳은 표현은 아니다. 성공회 안에 그런 ‘교회’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런 태도를 보인 ‘신자들’이 있었다. 즉 ‘고교회파 신자들’(high churchmen)과 ‘저교회파 신자들’(low churchmen)이 더 나은 표현이다. 또 이런 표현도 ‘영국’ 성공회의 특정한 역사적 시기와 상황에서 나와 다양하게 발전했다. 게다가 성공회는 영국을 넘어서 세계로 발전하고, 지난 20세기에는 ‘전례 운동’이라는 거대한 전례 쇄신 운동을 겪지 않았던가? 그러니 오늘날 우리 교회의 전례를 두고 적용하려면 훨씬 조심해야 한다.</p> <p>‘고교회파 신자들’은 17세기 영국 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애쓴 성직자와 신자들 무리이다. 이들은 영국 교회가 오랜 공교회 전통에 근거하고 있으며, 국가와 교회, 주교직, 전례와 성사들의 권위에 높은(high) 신적인 기원이 있다고 보았다. 19세기의 ‘옥스퍼드 운동’은 이들과는 여러모로 생각이 달랐지만, 교회의 전통과 전례에 대한 강조에서는 비슷한 생각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들은 눈에 보이는 전례의 행동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성찬례를 전례의 중심으로 여겼지만, 그 실천과 변화는 보잘 것 없었다. 오히려 중세 초기 전통을 받아들여서 전례 행동을 장엄하게 꾸민 이들은 후대의 ‘의례주의자들’이었다.</p> <p>한편, ‘저교회파 신자들’은 국교인 영국 성공회 내의 사람들과 국교 자체를 반대하던 사람들(비국교도)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이들은 제도적 교회와 성직, 성사의 권위를 낮게(low) 보려 했다. 이런 흐름은 나중에 소위 성공회 ‘복음주의자들’과도 연결되지만, 그것도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영국 교회 다수를 차지하던 ‘자유파 신자들’이 저교회파였기 때문이다. 이들 역시 예배를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여겼지만, 그 주일 예배 형태는 대체로 ‘아침기도식 예배’였다.</p> <p>고교회파와 저교회파를 딱히 구분하기도 어렵다. 그 안에는 상반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존과 찰스 웨슬리 형제는 전형적인 ‘고교회파’ 출신으로 복음주의 운동을 일으켰고, 헨리 뉴먼은 전형적인 ‘저교회파’ 출신으로 ‘옥스퍼드 운동’을 일으켰다가 천주교로 넘어가지 가지 않았던가? </p> <p>특히 오늘날에는 ‘고교회냐, 저교회냐’라는 구분이 적절하지 않은 이유가 또 있다. 지난 회에 살핀 것처럼, 지금의 세계 성공회와 그리스도교 전반의 예배 생활에 영향을 끼친 ‘전례 운동’ 때문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이 1차 종교개혁이었다면, 20세기 교회 일치 운동과 전례 쇄신 운동은 2차 종교개혁이라 할만하다. 그 의도와는 관계없이 16세기의 개혁이 교회와 성사에 대한 이해의 분열을 낳았다면, 20세기의 개혁은 교회의 공통 유산에 대한 재발견과 그에 근거한 새로운 대화와 이해를 찾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고교회 대(對) 저교회’라는 낡은 틀로 대결할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p> <p>굳이 구분이 필요하다면, 성공회 전통과 20세기 전례 운동의 성과를 함께 받아들여서, ‘전례적 교회’와 ‘비전례적 교회’로 나눌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성찬례를 예배 생활의 중심으로 삼는 교회는 전례적 교회요, 그렇지 않은 교회는 비전례적 교회라 할 수 있다. 전례 행동과 실천에서 보이는 겉모습의 ‘스타일’은 교회 공동체에 따라 다양할 수 있고, 그 다양성은 오히려 격려할 일이다. 다만, 여전히 좁은 해석으로 특정한 신학적 입장을 연결하여 파벌을 떠올리는 주장과 남들을 모방한 스타일은 빗나간 일이기 쉽다. 그참에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축하하러 모인 예배는 사람들의 예배 전쟁 수단이 될 위험이 있다.</p> <p>(성공회 신문 2011년 7월 23일) </p> viamedia on "전례 여행 10 - 전례 운동 2 - 하느님 백성의 예배와 선교 공동체"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74#post-1192 월, 11 7월 2011 14:37:21 +0000 viamedia 1192@http://liturgy.skhcafe.org/ <p>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p> <p>10. 전례 운동 2 - 하느님 백성의 예배와 선교 공동체</p> <p>지난 회에 살핀 것처럼, 성공회는 개인과 공동체가 서로 부딪히는 새로운 상황에서 전례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가치를 조화하려고 노력했다. 비슷한 처지에 있던 다른 교회들도 이 문제를 두고 씨름했다. 특히 19세기 서구 사회의 큰 변화를 맞았다. 사회의 이념과 신앙에서 지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태도가 더 널리 퍼지게 되면서, 교리와 위계로 지탱하던 교회의 관습적 권위는 설 자리를 잃었다. 한편, 급격한 산업화 때문에 오래된 농촌 공동체가 무너지고 도시에는 많은 사람이 몰렸다. 대체로 낮은 임금을 받는 공장 노동자요 도시 빈민이 된 이들의 삶은 비참했고 교회와 전례에서 멀어졌다.</p> <p>교회는 이러한 변화에 당황했다. 이때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와 전례는 어떤 관계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근대 ‘전례 운동’의 물음이었다.</p> <p>전례 운동은 당연히 전례 전통의 교회에서 먼저 움텄다. 성공회가 그랬듯이, 이제 천주교의 성직자들과 전례학자들이 신앙과 교회와 사회 문제를 전례와 연결하여 사태를 진단하고 질문을 던졌다.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이고, 이 예배와 전례 공동체 속에서 신앙이 자란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할 때라야 진정한 신앙을 키울 수 있다. 전례가 신자들의 참여와 공동체성을 잃으면 개인 신앙생활에 왜곡이 일어나고, 이것이 다시 교회에 영향을 미쳐 악순환이 일어난다. 이래서는 세상 속에서 교회가 빛이 될 수 없다. 어떻게 바로 잡을 것인가?” </p> <p>이 운동 처음에는 중세 초기 교회에 대한 낭만적인 동경이 있었다. 중세 초기 교회를 전례와 공동체의 이상으로 생각해서 그 관습과 교리를 회복하면 된다고 보았다. 천주교뿐만 아니라 성공회에도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꽤 있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이런 단순한 과거 회귀로 전례 공동체를 회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새로운 방법을 세웠다. 그것은 성서와 초대 교회, 그후 교회 역사의 다양하고 풍부한 전통에 대한 재발견, 그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 그리고 성령의 힘에 기대어 현대 상황에 적용한 쇄신이었다. </p> <p>전례 운동은 전통의 재발견과 연구와 쇄신이라는 방법으로 다음 내용을 강조했다. </p> <p>첫째, 사회와 교회에서 인간관계의 핵심은 공동체이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공동체의 활동이다. </p> <p>둘째, 형식과 교리와 의무에 치중하던 예배 생활에서 벗어나 교회 공동체와 신앙생활의 바탕인 성찬례와 성무일도를 회복하고 개정해야 한다.</p> <p>셋째, 하느님의 백성인 신자들은 전례, 특히 성찬례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신자는 보편적인 사제직을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p> <p>넷째, 성서와 초대 교회, 다양한 교회 전통의 경험을 회복하고 서로 배워야 한다. 이로써 분열된 그리스도교는 일치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 </p> <p>다섯째, 성찬례를 통해서 경험하는 변화와 나눔은 세속 사회를 향해 비판하고 발언하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p> <p>전례 운동은 위의 강조점을 통해서 성공회, 천주교, 루터교 같은 전례 전통의 교회에 쇄신을 가져왔다. 그뿐 아니라 20세기 내내 다른 교회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례 전통 교회들이 서로 비슷한 전례 구조와 행동을 보이고, 교회력이나 성서정과를 공유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특히 천주교는 1960년대 바티칸 2차 공의회에서 “전례 헌장”을 발표하면서 획기적인 개혁의 원칙을 마련했고, 그 영향으로 교회 일치 대화는 더욱 힘을 얻었다. 유럽의 루터교는 전례가 어떻게 신자의 사회 참여 훈련과 원칙이 되는지 특별히 고민했다.</p> <p>이런 경험에 기대어, 그동안 전례에 관심이 없던 개신교회들도 전례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마침내 1982년 교회 일치 모임인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리마 문서’라는 전례와 신학 문서를 통해서 전례 운동의 중요한 원칙들을 다시 확인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감사하며 하느님을 예배하고 친교하는 공동체이며, 구원 사건을 일으키시는 하느님의 협력자가 되어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선교 공동체이다. 100여년 전 물음에 대한 응답인 셈이다.</p> <p>다만, 이런 전례 운동의 풍요로운 경험과 원칙에서 여전히 비껴있는 교회들도 있다. 특히 전례 운동을 경험하지 못한 선교사들이 시작한 교회들이나, 전례 전통과는 아예 담을 싼 교회들이 그렇다. 지난 100여년 동안 성공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들이 참여하여 마련한 성과를 함께 나누지 못한다면 큰 손실이다. 전례 운동의 큰 흐름과 동떨어져 제한된 경험으로 입과 눈으로만 전수된 전례는 옹색하게 보인다. 반면, 관습적 전례 경험에 대한 반감으로 전례 전통을 좁게 보거나 오해하는 일도 잦다. 전례 운동의 경험이 보여주듯이, 전례 개혁과 쇄신은 풍요롭고 넉넉한 경험과 연구, 그에 대한 열린 태도와 적용으로만 가능하다. </p> <p>지금까지 전례의 오랜 역사를 따라 무겁게 걸어왔으니, 이제 오해하기 쉬운 주제들과 무심했던 이야기들로 가벼운 발걸음을 돌릴 때가 되었다.</p> <p>(성공회 신문 2011년 7월 11일치 6면) </p> viamedia on "전례 여행 9 - 전례 운동 1 - 성공회의 이상과 공헌"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668#post-1186 토, 25 6월 2011 17:41:10 +0000 viamedia 1186@http://liturgy.skhcafe.org/ <p>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p> <p>9. 전례 운동 1 - 성공회의 이상과 공헌</p> <p>종교개혁 이후 근대 사회로 발전하면서 개인의 가치와 공동체의 가치가 서로 다투는 일이 잦았다. 위치가 역전되어, 종종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의 가치를 밀어내곤 했다. 사회생활이든 신앙생활이든 그동안 집단과 공동체가 개인의 자유와 신앙을 억압한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변화는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개인과 공동체가 서로 존중하지 않고 대립하면 개인과 공동체 모두 위험에 빠진다. 개인 신앙의 자유가 교회 전통을 배척하면, 교회는 이를 위협으로 여겨 그 자유를 억누르려 한다. 반대로, 교회가 교권으로 통제를 일삼으면 개인은 교회와 전통을 멀리한다. 사회와 종교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이 와중에 서로 더욱 배타적이 되고 마음은 옹졸해진다. 이를 넘어서는 길이 가능한가?</p> <p>‘근대 전례 운동’은 그 길을 찾으려는 하나의 시도였다. 이 운동은 19세기 중반 성공회와 천주교에서 일어나서 지난 20세기 내내 다른 개신교회들에 영향을 끼친 전례 쇄신 운동이다. 성공회 종교개혁과 그 이후 여러 경험은 이 운동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전례를 통한 교회 개혁과 교회 일치를 이상으로 삼고, 여러 개인의 다양한 신앙 경험을 공동 예배를 통하여 공동체의 경험과 신학으로 안내하려 했기 때문이다. 사회와 교회가 서로 배척하고, 개인과 공동체가 서로 멀리하면서 갈등과 혼란이 심해지던 시기에 성공회의 이상과 경험은 더욱 중요했다. </p> <p>전례 쇄신과 관련한 성공회의 경험은 크게 네 가지이다.</p> <p>첫째, 성공회 고교회 전통과 존 웨슬리가 강조한 전례 생활의 회복이다. 고교회 전통은 성공회 종교개혁 초기부터 초대 교회 연구를 통해서 전례 생활을 교회와 개인의 신앙과 밀접히 연결하려 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면서 예배는 형식적이 되었다. 성찬례 거행 횟수도 매우 적었다. 고교회 전통에 있던 웨슬리는 성찬례를 자주 거행하고 참여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웨슬리는 또, 개인의 신앙적 감동과 변화를 위한 설교를 중요시했다. 설교는 교리 해설이나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위한 복음의 가치와 도전을 담아야 한다고 확신했다.</p> <p>둘째, 19세기 ‘옥스퍼드 운동’은 교회와 성직과 성사의 중요성을 되새겨 주었다. 이 운동에 따르면, 교회는 세속사회를 추종하거나 무시할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거룩한 하느님의 영역을 지키고 확대해야 한다. 성직은 이를 위해 사도에게서 이어오는 봉사직이며, 성사 생활은 그 거룩함을 경험하고 확인하는 일이다. 특히 성찬례는 성사의 핵심으로써 신자 공동체와 성직자가 가장 중요하게 실천할 교회의 생명 활동이다. 이 운동은 교리에 대한 집착 때문에 나중에 중단되고 말았지만, 교회의 본질을 좀 더 깊이 생각하도록 이끌었다.</p> <p>셋째, 성공회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는 위의 여러 성과를 바탕으로 19세기 당시 급격한 산업화로 비인간화하던 세태를 비판하고,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선교 사명과 실천을 제시했다. 이 주장을 따르면, 성찬례는 예수의 성육신 사건이 계속되는 표현이며, 우리가 하느님과 연합하는 통로이다. 이 성찬례에서 나누는 신자들의 친교는 모든 인류가 함께 이뤄야 할 형제애와 자매애의 초석이다. 그러므로 성찬례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세상과 사회의 바른 변화에도 깊이 참여해야 한다. 이 운동은 현대 성공회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과 가르침의 기초를 마련했다.</p> <p>넷째, 성공회 전례학자들의 전례 연구는 교회 일치 운동과 대화의 물꼬를 텄다. 성서 연구, 초대 교회 전례 자료 번역과 연구, 다른 교단 학자들과 대화가 활발했다. 1930년대에는 매주일 성찬례 거행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이때야 비로소 주일 성찬례 거행이 성공회 신앙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그전까지 주일 예배는 대체로 아침기도식 예배였다. 성공회 베네딕토회 수도원장이었던 그레고리 딕스의 연구서 “전례의 형태”는 전례가 교회 일치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는 전례가 교리 문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과 사건을 기억하는 특별한 구조이자 행동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로써 성찬례의 구조와 행동의 원칙에서는 일치하고, 교단마다 전례문을 개정하여 서로 대화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p> <p>성공회의 이러한 경험과 공헌은 개인과 교회, 신앙과 전통을 대립시키던 흐름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신자 개인은 그리스도의 한몸 안에서 지체’라는 성서적인 비유와 가르침을 다시 확인했다. 이를 실제로 경험하는 통로는 함께 드리는 예배이며, 그 예배의 중심은 성찬례이다. 성찬례에 근거해서 교회에 대한 이해, 사목에 대한 이해, 신앙과 영성에 대한 이해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특별히 세상과 사회에 교회가 참여하는 이유와 원칙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교회 일치 운동과 대화가 더욱 활발해졌다. 20세기 천주교의 전례 쇄신과 뒤따른 개신교의 예배 쇄신은 이렇게 성공회의 오랜 경험과 전통에 연결된다.</p> <p>(성공회 신문 2011년 6월 25일) </p> viamedia on "번역: 전례 운동과 그 성과"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26#post-344 목, 09 10월 2008 13:15:43 +0000 viamedia 344@http://liturgy.skhcafe.org/ <p>전례 운동과 그 성과</p> <p>존 F. 발도빈 S.J.</p> <p>차례</p> <p>전례 운동의 뿌리들<br /> 20세기 천주교 전례 운동<br /> 성공회의 흐름<br />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헌장<br /> 제 2차 바티칸 공의의 이후 천주교의 전례 개혁<br /> 주일 성찬례를 위한 성서정과<br /> 성찬기도<br /> 성인 신자의 그리스도교 입교<br /> 전례 언어<br /> 전례 운동, 교회 일치, 그리고 미래</p> <p>고인이 된 감리교 전례학자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예배를 가르치면 되는데 굳이 에큐메니즘(교회 일치 운동)을 가르칠 필요가 있는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이라면 이런 말이 나오리라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 안에 천주교까지를 포함시킨다면 말이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천주교 안에서 일어난 전례 쇄신은 세계 성공회의 전례 개혁에 넓고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두 전통이 서로 주고 받은 영향은 바티칸 2차 공의회 훨씬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글은 다양한 공동 기도서들의 개정과 전례 운동의 관계를 추적한다. 이는 시기 상으로 19세기를 근간으로 하여, 20세기에 들어 꽃피운 성과를 다룰 것이며, ‘원 자료로 돌아가자’는 구호로 대표되는 교부학의 부흥과, 공의회가 최근 성공회 전례 개혁에 미친 영향들을 살필 것이다. 그 결과는, 앞서 화이트가 지적한 대로, 전례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인들이 화해를 향해 가는 기나긴 길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p> <p>전례 운동의 뿌리들</p> <p>대부분의 지적 운동이나 교회 운동의 경우처럼, 전례 운동도 단일한 운동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엄격히 말해서 전례 운동은 어떤 조직 운동도 아니었던게 분명하다. 물론 결국에 여러 단체들과 연구회를 만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전례 운동이 정확하게 언제 시작했는지 말하기도 어렵다. 역사에는 항상 교회의 예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이를 설명하려는 학자들이나 사목자들이 있었다.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르(Theodore of Mopsuestia, 4세기), 메츠의 아말라(Amalar of Metz, 9세기), 그리고 멘데의 두란두스(Durandus of Mende, 13세기) 등이 그들이다. 근대 전례 운동의 뿌리들은 르네상스와 16세기 종교 개혁의 기반이 되었던 초기 자료들에 대한 관심에서 찾을 수 있다. 근대의 역사 비평 방법이 아직 발전되기 전이었지만, 트렌트 공의회 마저도 고대 전례들에 근거하여 전례를 개혁하려고 했다. 16세기 종교개혁가들 역시 전례의 성서적인 근간뿐만 아니라, 교부들의 권위로 돌아가고자 했다. </p> <p>그러나 근대 전례 운동은 고대와 중세의 전례들에 대한 자료집과 연구들과 더불어 18세기에 시작되었다. 이는 근대 성서 비평이 발전되던 때와 같다. 여기서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이들은 프랑스 베네딕도 수사들(무우루스 수사들, Maurists)인데, 특별히 장 마비용 (Jean Mabillon)과 그의 제자였던 에드몽 마르텐(Edmond Martène)이다. 또 다른 초기 전례 편집자는 루디비코 무라토리(Ludivico Muratori)였다. 자크 고아(Jaques Goar), 유세비우 레노도(Eusebius Renaudot), 그리고 지우세페 아세마니(Giuseppe Assemani)는 17세기와 18세기에 동방 전례를 모아 편집했던 이들이다. 고대 전례들, 특별히 성 야고보의 예루살렘 전례, [사도 전승] 8권의 시리아 전례는 18세기 성공회 전례학자들인 하몬 레스랜지(Hamon L’Estrange)와 에드몬드 스티븐스(Edmond Stephens) 같은 이들이 연구했다. 이러한 전례들은 영국 성공회 내의 충성 거부자들(Nonjurors)의 연구서에 많이 드러나는데, [고대 전례들에 대한 연구](1720)을 쓴 토마스 베레트(Thomas Brett)가 대표적이다. 얀센주의자들의 피스토이아 회의(1796)에서 마련된 개혁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기서는 로마 전례력을 과감히 단순화하고, 교회마다 하나의 제대 만을 둘 것과 미사 거행 수를 급격히 줄이는 등의 개혁을 단행했다.</p> <p>20세기 전례 운동의 직접적인 뿌리들은 교부 시대와 중세 시대에 대한 관심에 괄목할 말한 관심이 일어난 19세기에서 찾을 수 있다. 1830년대와 1840년에 에드워드 부버리 퓨지(Edward Bouverie Pusey),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그리고 옥스포드 운동(the Oxford Movement)의 여러 사람들이 교부학의 회복을 대표한다면, 존 메이슨 닐(John Mason Neale), 벤자민 웹(Benjamin Webb), 그리고 이들과 함께 캠브리지 운동(the Cambridge Movement)에 참여했던 이들은 중세적 이상을 옹호했다. (이 부분은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자세히 다룬다. 화이트, “건축” pp.111-114를 보라.) 바로 같은 시기에, 튜빙엔 학파의 천주교 신학자들은 당시 교조화되어가던 스콜라주의에 반대하여 교부들의 신학 방법을 회복하는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은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 발견된 시기이기도 했다. 4세기의 에게리아(Egeria)의 여행기, 예루살렘 교회에서 쓰던 5세기 아르메니안 성서정과, 그리고 히폴리투스를 저자로 언급하는 [사도 전승] 등이다. 이러한 자료들은 교단의 벽을 넘어서서 전례에 대한 공감을 발전시키는데 극히 중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성공회 학자들은 또한 교부 시대와 중세 시대의 전례 자료들을 회복하는데 주요한 영향을 끼쳤는데, 브라이트만(F.E.Brightman, Liturgies: Eastern and Western, 1896), 프레레(W.H. Frere, The Use of Sarum, 1898-1901), 앳칠리(Cuthbert Atchley, Ordo Romanus Primus, 1905), 그리고 레그(J. Wickham Legg, The Sarum Missal, 1916) 등이 그들이다. </p> <p>아마도 19세기 당시 전례 운동의 가장 중요한 전조는 1837년 프로스페 게랑제(Prosper Guéranger)를 통해 프랑스에서 이뤄진 베네딕도 수도회 정신과 그레고리안 성가의 부활이라고 하겠다. 게랑제는 여전히 논란거리이긴 하다. 그가 모본으로 삼은 것이 중세였던데다, 그가 옹호했던 교황지상주의는 프랑스 교회에 남아 있던 네오-고울(neo-Galican) 요소들과 마찰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는 전례 자료들과, 특별히 교회력에 대한 연구에서 거의 혼자서 일하다 시피 했다. 결국, 독일 베네딕도 수도회 마우르스회의 하나였던 마리아 라흐(Maria Laach)가 20세기 전례 운동의 핵심이 되었다.</p> <p>20세기 천주교 전례 운동</p> <p>이로 보건데, 현대 전례 운동의 뿌리들이 매우 복잡하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교부학의 부흥, 그리고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 방법의 발전과 더불어, 19세기 북유럽을 특징지었던 산업 사회에 대한 환상이 깨지기 시작했다. 그 누구보다도 영국의 성공회-가톨릭 의례주의자들(ritualists)이 가장 불만을 드러냈다. 대표적인 예는 19세기 말 홀번 지역 세인트 알반(St. Alban’s, Holborn) 교회의 스탠튼 신부(Father A.H. Stanton), 포츠머츠 지역의 돌링 신부(Father Robert Dolling)였다. 이 선구자들은 예배의 공동체적인 성격은 비인간화화는 사회에 대한 비판과 곧바로 이어져야 한다고 이해했다. 그런 점에서 전례 회복에 대한 자극이 대체로 북유럽에서 일어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열매를 맺게 되는 이 전례 운동에 공헌한 세 가지 주요 흐름이 있다. 그것은 벨기에의 전례 운동,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전례 운동, 그리고 교황의 어떤 선도적인 노력이었다. </p> <p>근대 전레 운동에 대한 그 어떤 평가도 랑베르 보뒤엥(Lambert Beauduin)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다. 그는 벨기에의 한 교구 사제로, 1905년 루벵의 몽 세자(Mont César) 베네딕도회 수사가 되었다. 20세기 전례 운동의 핵심어가 된 ‘예배 공동체 참여자들의 온전하고, 의식적이며, 적극적인 참여’라는 말은 보뒤엥이 처음으로 가장 중요하게 언급했던 것이다. 그 이전의 전례 운동이 역사적 자료에 집중했다면, 20세기 전례 운동 역시 이 경향을 이어 가면서도 전례를 참여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확신은 기도서 개혁을 이끈 이들에게도 중심적인 것이 되었다. 성공회-가톨릭 의례주의자들처럼, 보뒤엥과 같은 천주교의 선구자들도 전례와 사회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했다. 즉 전례를 통해 봉헌된 세상이 하느님께서 보고자 하시는 세상의 모습이라면, “전례적 세상”은 비인간화하는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뒤엥이 진행했던 계획 가운데 하나는 번역된 미사를 가지고 사람들과 함께 쉬운 말로 매달 미사를 드리는 것이었고, 일반 신자들을 위해서 쉬운 글을 써서 알리는 것이었다. 화이트의 시각에서 언급해야 할 중요한 점이 있는데, 보뒤엥 역시 교회 일치 운동에 헌신했다는 점이다. 그는 벨기에 아메-쉬-뮤스(지금의 쉬베통)에 천주교-정교회 연합 수도원을 설립했다.</p> <p>근대 전례 운동에 대한 또 다른 주요 공헌은 마리아 라흐(Maria Laach) 뷔론 수도원에게 있었다. 이 수도원의 일데폰스 헤어베겐 수도원장(Abbot Ildephons Herwegen)은 1931년 전례와 수도 생활 연구회를 세웠다. 마리아 라흐는 전례 활동에 관한 많은 학문적 연구를 내는 중심지가 되었고, 신학자 오도 카젤(Odo Casel)을 배출했다. 카젤의 저서는 그리스도의 삶에 들어있는 신비들(mysteries)이 전례를 거행하는 지금 전례 안에 드러나야 한다(mysterienlehre)고 주장했다. 이것은 후대 전례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특별히 바티칸 2차 공의회 전례 헌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스트리아 어거스틴 수도회의 피우스 파르쉬(Pius Parsch)는 바티칸 2차 공의회 이전 시기에 전례적 참여를 증진시켰던 또 다른 중요한 사람이었으며, 같은 영향을 끼친 뮌헨의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는 1920년대와 1930년대 대학 청년 미사를 시작했다.</p> <p>천주교 안에서 전례 역사 연구 역시 20세기에 진전을 이뤘다. 어떤 점에서 이 과정은 역설적이기도 했다. 교리 신학과 사변 신학은 20세기 시작에 있었던 근대주의의 위기, 혹은 그 이후부터 의문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언어학적 연구와 역사적 연구에 더 힘을 쏟았다. 예를 들어 요세프 융만(Josef Jungmann)의 [로마 양식 미사](Missarum Sollemnia: The Mass of the Roman Rite, 1949)는 바티칸 2차 공의회를 통해서 고무된 전례 개혁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는 원래 교리 교육 신학자였다가 전례로 관심을 바꾼 경우였다. 교리 신학은 너무나 위험한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미셸 앙드리외(Michel Andrieu)는 로마 ‘오디네스’ (ordines: 중세의 전례 지침서)를, 히에로니무스 엥버딩(Hierominus Engberding)은 고대의 집전 사제용 전례서(sacrametaries)를 각각 편집해냈다.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파리에는 전례 연구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인 고등 전례 연구소(the Institut Supérieur de Liturgie)가 사목 전례 센터(Centre Pastorale Liturgique)와 연합하여 개소했다. </p> <p>이후 천주교뿐만 아니라 교파를 초월한 전례 연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독일 평신도 전례 문헌학자이자 역사가인 안톤 바움스타크(Anton Baumstark)였다. 바움스타크의 저작, 특별히 여러 말로 번역된 [전례 비교 연구](Comparative Liturgy, 1939)는 전례 역사에 대한 비교학적 방법을 기술한 것으로, 학자들이 자기 교단 전통의 역사에만 매몰된 연구 영역을 넘어서는데 도움을 주었고, 예배 역사의 좀더 넓은 흐름과 함께, 전례 발전의 많은 법칙들을 발견하도록 했다. 무엇보다도, 바움스타크는 전례의 진화가 ‘최초의 다양성에서 후기의 획일성으로, 그리고 소박하고 단순하고 짧은 것에서 복잡하고 장황한 것으로’ 진행되었다고 주장했고, 그에 대한 근거를 들었다. 그는 또한 전례의 진화에 작동하는 두 가지 법칙을 소개했다. 그 하나는 유기적 발전의 법칙, 다시 말해 정원의 잡초처럼 최초 전례들에 후대에 추가된 부분들이 초기의 요소들을 억누르게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금은 역설적인데) 가장 최초의 요소들은 가장 거룩한 축일들에 남아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움스타크의 제자들 가운데는 바티칸 2차 공의회 이후 생겨난 전례에 대한 초교파적인 공감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역사학자들이 있었다. 베르나르 보트(Bernard Botte), 주앙 마테오스(Juan Mateos), 로버트 태프트(Robert Taft), 그리고 가브리엘 윙클러(Gabriel Winkler) 등이 그들이다.</p> <p>교황의 지지가 없었더라면 전례 운동이 그렇게 성공하지 못했으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비오 10세가 1905년, 그레고리안 성가의 회복을 촉구하고, 좀더 잦은 성찬례와 영성체를 권장한 것을 시작으로, 전례 운동은 천주교 내 고위권의 지지를 받았다. 전례에서 신자들의 적극적 참여라는 원칙은 그리스도교의 정신에 ‘가장 중요하고 절대로 필요한’ 원천으로서, 바티칸 2차 공의회 전례 헌장 (14항)이 지지한 원칙 가운데 하나인데, 실제로는 비오 10세가 그레고리안 성가의 회복을 촉구하면서 한 말을 변형시킨 것이다.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교황 비오 12세는 전례에 관한 교령 [하느님의 중재자](Mediator Dei, 1947)로 전례 운동을 계속 지지하며, 영성체 전의 금식 규정 완화, 히브리어에 기반한 새로운 라틴어 시편집의 승인(1945), 특정한 예절에 관하여 지역어 사용의 허용(미사와 성무일도는 허용되지 않았지만), 그리고 부활 밤 전례(1953)와 성주간(1956) 예절을 회복하도록 했다.</p> <p>성공회의 흐름</p> <p>20세기의 첫 장은 전례 정신을 붙들어 온 성공회에도 매우 활발한 시기였다. 그 중요한 기구 가운데 하나는 핸리 브래드쇼 회(The Henry Bradshaw Society)로, 1890년에 설립되어 전례 문서들을 출판하기 시작했으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더 많은 영향을 끼친 곳은 알퀸 클럽(the Alcuin Club)인데, 1897년에 설립되어 영국에서 기도서 개정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천주교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기구가 펴낸 출판물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것은 휘태커(E.C. Whitaker), 피셔(J.D.C. Fisher), 그리고 피터 재거(Peter Jagger)가 펴낸 그리스도교 입교(Christian Initiation)에 관한 책들이었다. 커트버트 애칠리(Cuthbert Atchley)의 ‘에피클레시스’(epiclesis)에 관한 저작과, 이후 분 포터(Boone Porter)의 서방 교회의 서품 기도문 연구, 그리고 케네스 스티븐슨(Kenneth Stevenson)의 혼배 축복에 관한 연구도 중요한 성과였다. 마지막으로 버나드 위건(Bernard Wigan)과 콜린 부캐넌(Colin Buchanan)이 영어로 된 성공회 전례들을 모아 펴낸 것도 언급해야 한다. 이것은 학자들과 전례 개혁가들 모두에게 도움을 주었다.</p> <p>기도서의 개혁과 쇄신에서 가장 중요한 공헌 가운데 하나는, 성찬례가 교회의 예배 생활에 가장 핵심적인 활동이요, 그 중심이라는 생각이었다. 이 공헌은 1930년대 거룩한 선교회(the Society of Sacred Mission) 소속 사제였던 가브리엘 허버트(Gabriel Herbert)가 마련한 것이었다. 허버트는 스칸디나비아 전례 운동(특별히 Yngve Brilioth의 [가톨릭적이고 복음적인 성찬례 신앙과 실천] Eucharistic Faith: Catholic and Evangelical - 허버트가 번역했다)과 마리아 라아치의 수사들로 대변되던 유럽 천주교 전례 운동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허버트의 [전례와 사회](Liturgy and Society, 1935)는 20세기 성공회 전례 개혁에 관한 저작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p> <p>현대 성공회 전례 운동은 또한 북미 지역에도 뿌리를 두었다. 이는 뉴헤이븐 버클리 신학교의 윌리엄 팔머 라드(William Palmer Ladd)를 시점으로 한다. 라드는 미국 성공회 신자들에게 헤르베겐 수도원장과 오도 카젤을 소개했다. 그의 가장 영향력있는 제자 가운데 하나였던 매시 세퍼드(Massey H. Shepherd)도 거의 같은 영향을 끼쳤다. 세퍼드는 자기 선생을 만나기 전에 이미 독일 천주교 전례학자들을 공부했었다. 세퍼드는 오랜 동안 미국 캠브리지 성공회 신학교(the Episcopal Theological School)와 버클리 성공회 신학교(the Church Divinity School of Pacific) 전례학 교수로 가르쳤다. 그는 사무엘 웨스트(Samuel West), 존 패터슨(John Patterson), 그리고 존 키니(John Keene)와 함께 1946년 “전례와 선교를 위한 교회 연합”(Associated Parishes for Liturgy and Mission)을 설립했다. 아직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교회 연합”의 첫번째 목적은 주일 아침 성찬례의 중심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도 비슷한 운동이 있었는데, 1949년 “교회와 신자들”(Parish and People)이 같은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p> <p>“교회 연합”의 구성원들, 특별히 세퍼드는 1979년 미국 성공회 기도서를 준비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천주교에서 일어난 새신자 교육에 대한 회복은 “교회 연합”에도 영향을 주어서 미국 성공회 내에서 같은 쇄신을 일으키게 했다. 그러나 바티칸 2차 공의회 이전에 이미 성공회는 전례의 참여적인 본질에 대한 전망과 더불어 전례 연구의 성과를 공유하고 있었다. 세퍼드는 전례 운동이 초교파적으로 섞여 진행되는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학자들의 공동체가 자기 교단 전통에만 충실하려는 태도를 초월했다”고 말한 바 있다. 1959년 바티칸 2차 공의회가 시작되기 전에 쓴 한 글에서, 세퍼드는 전례 운동이 비공식적으로만 진행되는 점을 지적했다. ‘규정할 수는 없는, 자유롭게 생각을 교환하고 개인적인 친분”을 통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처지이며, “이것은 교회의 담을 넘어서 서로 참여하는 것과는 상관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상황은 바티칸 2차 공의회과 공의회 이후의 천주교 전례 쇄신과 더불어 바뀌었다. </p> <p>바티칸 2차 공의회로 넘어가기 전에, “의문의 여지 없이, 성공회 뿐만 아니라, 성공회 밖에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한 사람”(Paul Bradshaw, “Gregory Dix” in Irvine, 11)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바로 성공회 베네딕도회 내쉬돔 수도원의 그레고리 딕스(Gregory Dix, 1901-1952)이다. 그는 특별히 견진 성사와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목직에 대한 연구 분야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는 또한 로마의 히폴리투스가 썼다고 잘못 알려진 [사도 전승]의 한 중요한 판본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이 있는 저작은 1945년에 나온 [전례의 형태](The Shape of the Liturgy)이다. 딕스는 크랜머 대주교의 전례 개혁, 특히 1552년 기도서에 대한 신랄한 비판자이기도 했다. 그는 이 기도서 이면에는 즈빙글리의 신학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성찬례의 식사 행위가 유월절 만찬에 기반하지 않고, 오히려 유대인들이 친교 식사인 ‘차부라’(chabûrah)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딕스는 또한 말씀의 전례가 차지하는 시간의 길이가 성찬의 전례에 결합되었다고 주장했다.</p> <p>그의 저작들은 단순히 암기할 만한 문장들뿐만 아니라, 여러 이론들로도 채워져 있다. 전례력의 발전에 대한 그의 이론이 그 예인데, 이에 대한 응답으로 많은 책들과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p> <p>딕스는 거의 혼자서 “아나포라”(anaphora)라는 초기 성찬 기도를 끝까지 연구해 냈다. 그는 성찬례의 핵심적인 질문은 기도의 본문과는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보편적인 형태, 즉 ‘하나인 네가지 행동’(사중 행동, four-action) 형태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네가지 행동은 초기 교회가 공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마지막 만찬에 드러나는 일곱가지 행동에서 뽑아 적용시킨 것이다. 성찬례는 근본적으로 (빵과 잔을) 들어(봉헌), 축복하고 (성찬 기도), 떼어(쪼갬), 주는 것(나눔-영성체)이다. 이 형태를 재조정하거나 (1662년 기도서와 같이), 혹은 거기서 어느 부분을 생략하는 전통들은 교회의 보편적 전통을 배신하는 것이다. 이 주장의 개별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의문이 있지만(봉헌의 본질과 중심성과 같은), 딕스의 사중 행동 형태가 이후의 성찬의 전례에 대한 모든 전례 개혁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에는 동의할 것이다. 예를 들어, 호주 성공회 기도서(A Prayer Book for Australia, 1995)의 성찬례 1 양식과 영국 성공회 [공동 예배] (Common Worship, 2000)의 2 양식을 보면 그 형태는 분명하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교황 바오로 6세의 미사에서도 이러한 사중 행동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딕스가 마련한 공감에 그 기원을 둔다고 할 수 있겠다(부캐넌, “변화” pp.233-234를 보라.)</p> <p>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헌장</p> <p>천주교에서는 지난 수백년 동안의 학문적 연구, 적어도 반세기 동안에 진행된 사목 전례와 전례 신학의 참여적인 면에 대한 성찰이 그 절정을 맞이한 것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였다. 이 글에서는 굳이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지만, 공의회가 보여준 교회 일치에 대한 열린 태도때문에 다른 교회 전통들은 공의회의 결과물들을 좀더 쉽게 향유할 수 있었다. 사실 공의회는 교회 일치에 관한 교령을 내놓았고, 다른 교단 전통에서 온 많은 에큐메니칼 참관인들이 공의회 내 여러 회의들에 초대를 받았으며, 교회 일치 성성이 바티칸에 설치되어, 이런 협력 관계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매시 세퍼드 같은 선구자들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p> <p>전례 헌장의 많은 내용들은 종교개혁이 마련해 준 통찰과 그 실천들을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개신교와 성공회에서 흘러나온 영향이 천주교에 미친 것이며, 그 반대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자국어 도입과 사용(36항), 성서를 전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고, 성서의 많은 부분을 사용하도록 한 것(24항, 51항), 주님의 날인 일요일의 중심성을 강조한 것(106항), 설교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35항, 53항) 등이다. 자국어의 도입은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러 다른 교회 전통들 안에서 서로 전례 이론으로 영향을 미치고, 협력하여 실천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전례 헌장 자체는 전례 전체가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리라는 생각까지는 갖지 않았다 (36:1항을 보라). 그러나 공의회가 끝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명확해진 것은, 모든 전례 양식들을 번역하는 것만이 전례 헌장의 제안을 실행하는 옳은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p> <p>전레 헌장은 전례를 신자들의 공동 행위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역할을 했다. 헌장의 서문은 비오 10세의 전례에 대한 표현(1905)을 반영하고 있다. 전례는 그리스도교 정신의 필수적인 원천이며, 이는 모든 세례받은 그리스도의 참여에 기초할 때 더욱 강력해진다는 것이었다. “교회는 모든 신자가 전례 거행에 의식적이고 적극적이고 완전한 참여를 하도록 인도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한 참여는 전례 자체의 본질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선택된 민족, 왕의 사제, 거룩한 겨레,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인 그리스도인은 세례의 힘으로 그 참여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전례 헌장, 14항, 참조 30항). 전례 헌장은 또한 신학적 논쟁이 되었던 오도 카젤의 신비 신학적 접근 방법을 지지했다. 로마 미사의 한 기도를 인용함으로써, 전례는 “우리를 향한 구원 사업이 실제로 현재 일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 기도는 카젤이 대(大) 레오 교황의 승천일 설교에서 가져와 자주 인용하던 내용, 즉 “구원자에게 보였던 것이 성사들(sacraments)에 건너 오게 되었다”는 말을 반영하고 있다. 이 신비 신학을 통해서, 성찬례의 기억과 희생과 같이, 교회 전통들 사이에서 난감한 문제로 남아 있는 상황이 진전을 맞게 되었다.</p> <p>전례 헌장에 들어있는 많은 다른 내용들이 이후에도 계속 언급되었다. 그 내용들은 전례 개혁과 쇄신의 일반적 상황에 더불어 현대 성공회 전례서들의 여러 부분에 영향을 끼쳤다. 첫째로, 이 문헌은 전례 예식들의 공적이고 공동체적인 본질을 강조한다. 전례 예식들은 사적인 기능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전례 지침(rubrics)에는 사람들의 참여, 즉 종교개혁 이후의 천주교 전례에서 일어난 변화들을 담도록 했다. 둘째로, 전례 헌장에는 토착화에 관한 장이 있다(37-40항). 이는 분명 성공회의 여러 교회에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뉴질랜드와 호주의 경우인데, 이 두 교회는 최근 개정된 기도서에서 전례의 토착화 측면을 깊숙히 통합시켰다. 마지막으로, 전례 헌장은 16세기 종교개혁의 전례 계획을 지지하는 한편, 전례 언어에 대한 변화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이 부분은 아래에 좀더 길게 설명하겠다. 전례 헌장에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은, 토마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가 썼을 법한 글이다. “예식은 고귀한 단순성으로 빛나야 하고, 간단 명료하여야 하고, 쓸데없는 반복을 삼가야 하며, 신자들의 이해력에 맞추어 전체적으로 많은 설명이 필요 없게 하여야 한다”(34항).</p> <p>제 2차 바티칸 공의의 이후 천주교의 전례 개혁</p> <p>16세기 말 트렌트 공의회의 교부들이 전례 개혁의 상세한 작업들을 특정 위원회들이 해야 할 일로 남겨 둔 것처럼, 바티칸 2차 공의회 이후에도 역시 실제 전례 개혁 작업들은 바티칸 행정부(the Roman Curia)의 일로 남게 되었다. 천주교의 모든 전례, 즉 성찬례를 비롯하여, 성당 봉헌, 구마(exorcism) 의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검토하여 손질을 했다. 이 일을 위해서 바티칸 행정부는 수 많은 역사, 신학, 사목 전문가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 과정은 전례 헌장 실행 위원회(Consilium ad exsequendam Constitutionem de sacra liturgia)가 관장했다. 이 위원회는 이후 예부 성성이 되었고, 다시 거룩한 전례와 성사 훈육 성성(짧게 ‘전례 성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기서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교황 바오로 6세가 천주교 밖의 여러 학자들을 초대하여 이 위원회의 모임에 참여하도록 했다는 사실이다. 영국 성공회 전례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로날드 재스퍼(Ronald Jasper), 미국 성공회 개정 기도서를 축조한 주요 인물인 매시 세퍼드(Massey Shepherd)가 성공회 대표자로 참여했다. 그리하여 20세기 말 가장 중요한 성공회 전례 개혁자인 이 두 사람은 천주교의 전례 개혁의 진행 상황을 깊숙히 알게 되었다. 한편 영국 및 웨일즈 천주교 주교회의 전례 위원회도 성공회 대표를 초대하고 있다.</p> <p>적어도 네 개 분야에서 천주교의 전례 개혁이 세계 성공회 여러 교회들의 전례 개혁과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 확인된다. 즉 주일 성찬례를 위한 성서정과, 성찬 기도, 성인 신자의 그리스도교 입교, 그리고 전례 언어 분야이다. </p> <p>주일 성찬례를 위한 성서정과</p> <p>로마 교회 성서정과 체제는 7세기 혹은 8세기 이후 근본적으로 거의 같은 형태로 유지되었다. 그 체제는 네 개의 주요 전례 절기 - 대림절기, 성탄절기, 사순절기, 부활절기 - 에 기반하며, 공현절 이후와 성령강림절 이후의 주일로 이뤄진다(정확한 주일의 수는 부활주일의 날짜에 따라 정해진다). 구약 성서 본문은 거의 없었다. 주일에는 서신서 본문(복음서 이외의 신약성서에서 뽑은 본문)과 복음 본문이 마련되었다. 16세기 공동 기도서는 로마 전례력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사계재(Ember Days)와 사순절기 전의 칠순절기(Septuagesima), 그리고 특별히 서신서를 포함한 많은 독서 본문을 보태서 완성했다. 전례 헌장이 신자들을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좀더 ‘풍요롭게 나누도록’ 요구했으므로, 성서정과의 개정은 분명한 일이었다. </p> <p>천주교 전례학자 부그니니(Annibale Bugnini)는 성서정과 개정을 “전례 개혁 전체에서 가장 어려운 작업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작업의 결과는 그리스도 중심 원칙에 따른 3년 주기 정과였다. 복음서를 그 중심으로 삼아서, 당일 복음서 본문에 상응하는 구약성서 구절을 선택했다. 제 2독서는 복음서 이외의 신약성서에 선택했는데, 독립적인 계속 독서(적어도 사순절기 이전과 성령강림절 이후)를 따랐다. 3년 주기는 공관복음서 (가해: 마태오, 나해: 마르코, 다해: 루가)에 근거한 것이었고, 요한 복음서의 본문들은 주요 절기(특별히 사순절기와 부활절기)에 배치했다. 요한 6장은 가장 짧은 마르코 복음서가 배치된 나해에 성령강림절 이후 다섯 주일에 걸쳐서 읽도록 했다. 사도행전은 부활절기 동안 제 1독서로 읽도록 했다. </p> <p>영국 성공회는 이 새로운 로마 정과를 받아들이는데 더뎠다. 1960년 대 말, 영국 성공회는 연합 전례 위원회가 내놓은 제안에 근거하여 2년 주기 성서 정과를 공인했다. 이것이 1980년 [대안 예식서]의 성서정과가 되었다. 1980년대 내내 로마 성서정과를 받아들이자는 주장이 일었다. (주간 매일 성찬례 정과는 이미 [대안 예식서] Alternative Service Book 에 채택되었다.) 결국 북미 지역 초교파 공동 본문 협의회(The Consultation on Common Texts)의 작업이었던 개정 [공동 성서 정과](the Revised Common Lectionary) 채택 제안이 나왔다. 이 성서정과는 천주교의 3년 주기 정과를 그 기본으로 받아들이면서 두 가지 매우 중요한 변화를 주었다. 첫째로, 이 성서정과는 주님의 변모 축일(the Transfiguration)의 복음 본문을 사순절기 직전 주일에 배치했다(천주교 정과에는 사순 2주일에 들어있다.). 둘째, 이 성서정과는 성령강림 후 주일(지금은 연중 주일로 부른다)부터는 구약성서 이야기에 대한 계속 독서를 제공하여, 복음 독서와 독립적으로 읽게 했다. 그래서 교회는 “계속 독서”를 읽을 것인지, 당일 복음과 주제로 연결된 “관련 독서”(구약)를 읽을 것인지 선택하도록 했다.</p> <p>1979년 미국 성공회 공동 기도서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로마 성서정과 형태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이후 미국 성공회는 [공동 성서정과]의 사용을 허용했다. 캐나다의 [대안 예식서](Book of Alternative Services, 1985)와 가장 최근의 호주 성공회 기도서는 공동 성서정과를 따른다.</p> <p>세밀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세계 성공회의 개정 전례서들은 천주교에서 개정된 성서정과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주일 성찬례 성서 독서의 급격한 개정은 천주교의 개혁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미첼, ‘전례력’ pp 478-480 참조.)</p> <p>성찬 기도</p> <p>천주교의 전례 쇄신에서 일어난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은 성찬 기도에 관한 것이다. 로마 축성 기도(canon)는 약 1500여년 동안 로마 미사의 유일한 성찬 기도였다.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은 이 기도를 폐기했다. 그 안에 있는 희생제의적 용어와 의미 때문이었다. 한편 루터교나 성공회는 그 서문과 ‘거룩하시다’(sactus)를 보존했다. 1549년 공동 기도서가 로마 축성 기도와 비슷한 성찬 기도를 갖고 있었으나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 한쪽에서는 개혁파 부처(Bucer)가, 다른 한편에서는 보수파 가디너(Gardiner)가 반대하고 나섰고, 1552년 기도서에서 대폭 수정되었기 때문이다 (진스, “크랜머” 참조). 역사적 연구 성과에 따르면, 동방 교회들이나, 서방의 비-로마 교회들(갈리칸과 모자라빅)은 하나 이상의 성찬 기도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로마 축성 기도 역시 한스 큉(Hans Küng)과 같은 신학자들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큉은 이 기도가 현대 기도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전례 헌장 실행 위원회는 로마 축성 기도 개혁을 위한 수 많은 제안들을을 검토했으나, 결국 교황 바오로 6세는 약간의 편집을 거쳐서 이를 유지하고, 새로운 성찬 기도를 몇 개 더 만들어 사용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이 때문에 로마 예식에는 세 개의 새로운 성찬 기도가 만들어졌다. 이 가운데 두 개는 고대 성찬 기도를 근간으로 했다([사도 전승]과 알렉산드리아의 성 바실 아나포라). 이후에도 아홉 개의 성찬 기도가 더 만들어졌다. 두 개는 화해와 일치를 위해, 세 개는 어린이들과 함께 하는 미사를 위해, 그리고 나머지는 특별한 의향을 위해 새로 마련되었다. </p> <p>성찬 기도의 수를 늘린 천주교의 결정은 근대 전례 역사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딕스(Dix)의 통찰을 인정한 것이었다. 즉 오직 ‘하나’의 (혹은 원래의) 성찬 기도를 찾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며, 전례의 형태와 구조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다른 교회들도 곧장 이런 천주교의 변화를 따른다. 1979년 미국 성공회 기도서에는 다섯 개의 성찬 기도가 있다. 두 개는 고대 성찬 기도를 근간으로 하는데, 천주교의 것보다 훨씬 원형에 가깝다. 성찬기도 B는 [사도 전승]의 아나포라를 개작한 것이며 (“거룩하시다”를 넣어서), 성찬기도 D는 알렉산드리 바질 전례에 좀더 충실한 것이다(여기에는 한번의 성령 청원 기도 epiclesis 가 있으며, 성찬 제정사 뒤에 나온다). 1995년 호주 성공회 기도서 역시 다섯 개의 성찬 기도가 있는데, 1662년 기도서의 성찬 기도도 포함하고 있다. 영국의 [공동 예배]는 총 12개의 기도가 있다. 놀라운 사실은 제 1 형식 현대 언어 기도 가운데 하나(성찬기도 G)가 천주교 국제 전례 영어 위원회(Roman Catholic International Commission on English in Liturgy: ICEL)가 제안했다가 바티칸이 거절한 바 있는 기도와 거의 비슷하다는 점이다(416쪽 참조). 현대 성공회 기도서들은 또 성찬 기도 안에 신자들이 참여하는 신앙의 신비 선포 부분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이는 천주교 전례 개혁의 성과였다. 게다가, 굳이 성찬 기도의 한 부분은 아니지만, 봉헌물을 두고 축복 기도를 하는 내용도 선택적으로나마 [공동 예배]에 채택되어 있다. </p> <p>이렇게 비슷한 점들이 많지만, 여전히 다른 점들이 존재한다. 성찬 제정사 이후의 봉헌 기도의 형식과 말에 이견이 존재한다. 미국과 캐나다의 기도서들은 빵과 잔, 혹은 봉헌물의 봉헌이라는 용어와 의미를 채택하지만, 영국과 호주의 기도서들은 다음과 같은 에두른 표현을 쓴다. “이 빵과 잔으로 세상의 죄를 위해 마련하신 주님의 단 한번 완전하고 충분한 희생 제사를 거행하나이다”(호주 기도서).</p> <p>성인 신자의 그리스도교 입교</p> <p>의심할 여지 없이, 공의회 이후의 개혁이 이룬 주요 성과 가운데 하나는 [성인 신자 입교 예식](Rite of Christian Initiation of Adult, 1972)이다. 전례 헌장이 명한 대로, “여러 단계로 나뉘어 있는 어른들의 세례 준비기를 복구시켜, 지역 직권자의 판단에 따라 사용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64항, 참조 66항). 원래는 선교 지역 국가에서 사용하려는 목적이었으나, 금새 여러 곳에서, 특별히 미국에서 대중화되었다. 세례를 위한 새신자 교육은 잘 구성된 여러 예식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몇몇 동안에 걸쳐 지속될 교육 과정과 더불어 그 절정에 이르러 매년 부활 밤 전례에서 세례와 견진례과 첫 성찬례를 함께 드리는 것으로 기획되어 있다. 현대 성공회 전례 개혁은 부활 밤 전례에서 세례 서약 갱신과 더불어, 세례(그리고 견진례)와 성찬례를 거행하도록 하고 있다 (메이어스, “입교” 참조). 이렇게 확장된 성인 새신자의 입교 과정은 교부학의 부흥, 특별히 [사도 전승]의 발견과 깊은 관련이 있다. </p> <p>미국 성공회 안에서 이러한 새신자 세례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대체로 [전례와 선교를 위한 교회 연합]의 노력때문이었다. 미국 성공회 [사목 예식서](the Book of Occasional Services)에 있는 “거룩한 세례를 위한 성인 신자의 준비” 부분에는 그 영향이 분명히 드러난다. 영국 성공회의 [공동 예배]도 이제 새신자 세례 교육을 위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p> <p>전례 언어</p> <p>바티칸 2차 공의회의 전례 헌장이 천주교 전례에서 자국어 사용을 승인한 이후, 언어는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 뿐만 아니라 모든 서방 교회들에게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공의회 두 번째 일정이 진행되던 1963년에 국제 전례 영어 위원회(ICEL)가 구성되었다. 처음에는 10개국 천주교 주교 회의(호주, 캐나다, 영국-웨일즈, 인도, 아일랜드, 뉴질랜드, 파키스탄, 스코틀랜드, 남아프리카, 미국)가 만들었다가, 1967년에 필리핀이 참여했다. ICEL은 천주교 뿐만 아니라, 전체 영어권 그리스도교계에서 전례의 개혁과 쇄신에 큰 힘을 발휘했다. </p> <p>얼마 지나지 않아 영어권 초교파 모임들이 공동 전례 본문 작업을 시작했다. 이 가운데는 북미 공동 본문 협의회(the Consultation on Common Texts: CCT, 1960년대 설립)과 브리티시 전례 연합 모임(the British Joint Liturgical Group: JLG, 1963년 설립, 이후 천주교 가입)이 있었다. JLG와 CCT는 1968년에 국제 영어 전례 본문 협의회(the International Consultation on English Texts: ICET)를 구성했다. 이 모임은 1970년 [함께 나누는 기도 모음](Prayers We Have in Common)을 출간했고, 1975년에 개정판을 냈으며, 1988년의 제 3판은 [함께 드리는 기도](Praying Together)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여기에 소개된 번역들, 예를 들어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그리고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도다” 등은 아직까지 많은 영어권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다, ICET를 이어서 1985년에 설립된 것이 전례 영어 위원회(the English Language Liturgical Consultation: ELLC)이다. ELLC는 근대 전례 운동에서 초교파적인 협력의 성과를 명백히 드러내는 일례이다. 여기에 참여하는 기구들은 아일랜드 전례학자 연합, 호주 전례 협의회, CCT, ICEL, JLG, 그리고 뉴질랜드 연합 전례 모임 등이다. ICEL만이 천주교 모임이고, 나머지는 모두 초교파 모임이다.</p> <p>경건하고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이해가 쉬운 현대 언어를 찾으려는 노력은 모든 교회들에게 두려운 작업이기도 하다. 이는 현대 성공회 전례의 개정 작업에 대한 반대를 불러일으키는 주요 요인이기도 하다 (부캐넌, “보존” pp. 264-267 참조). 그러나 초교파적인 공감 속에서 발전되는 희망의 징조들이 있다. 2003년 영국에서는 3년 주기 성서정과에 상응하여 성서 본문에 기초한 주제 기도(collects) 모음집이 출간되었다. [여는 기도](Opening Prayers)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주제 기도 모음집은 원래 ICEL이 시도했다가, 바티칸이 거절한 바 있었다. 그러나 결국에 영어권 그리스도교계가 받아들였다. 현대 기술력이 발전된 상황 속에서 이와 비슷한 초교파적인 노력이 뒤이어 나타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놀라운 일이 될 것이다. </p> <p>전례 운동, 교회 일치, 그리고 미래</p> <p>이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제임스 화이트가 1980년 교회 일치 운동이 전례에 대한 연구와 교육, 그리고 이에 대한 증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 말은 옳았다는 점이다. 전례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특별히 예배에 대한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의 가치에 대한 초교파적인 공감은 지난 세기를 넘어서 여전히 발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언급한 화이트의 글은 원래, 모든 교회 안에서 전례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고, 서로 다른 교단의 학자들의 연구를 함께 나누기 위해 1975년에 구성된 [북미 전례학회](the North American Academy of Liturgy) 모임에서 발표된 것이다. 결국 이 조직은 종교 간 대화를 촉진하게 되어, 유대교 학자들도 대화에 참여하게 되었다. </p> <p>세계 교회 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the Faith and Order Commission)는 [세례, 성찬례, 사목직](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Lima, 1982)를 펴내면서 전례에 대한 초교파적인 대화를 격려했다. 1983년에 시작된 세계 성공회 전례 협의회(the International Anglican Liturgical Consultation)은 2년 마다 열려서 세계 성공회 내의 관심 주제들을 다룬다. 이 모임은 정기적으로 다른 교파들과도 협력하고 그 성과를 나누는데, 대체로 1960년대 중반에 설립된 또다른 초교파적인 국제 조직인 [전례학회](Societas Liturgica)와 일정을 맞춰 회의를 갖는다. 이 모임은 2년 마다 모이면서 교회 전통들 안에서 상호 관심 주제를 논의한다. 최근 모임에서는 전례 신학, 전례 음악, 삶의 주기와 전례, 그리고 성인과 천사들에 대한 전례적 공경 등에 대해 다뤘다. </p> <p>말할 필요도 없이, 지난 100년 동안 전례 운동과 초교파적인 연합 활동은 전례와 성사에 관련하여 교회들 사이에서 완전한 공감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영국 성공회 안에서 벌어졌던 희생과 봉헌이라는 말을 두고 벌어진 논쟁만 봐도 그렇다. 게다가 위에 언급한 리마 문서에 대해서는 이에 대한 공식적인 응답 만도 책 여섯 권 분량이었다. 한편, 근대 전례 운동은 교회의 삶 속에서 전례를 진작시키려는 사람들 사이에 중요한 공감대를 만들어 냈다. 이에 관해서는 존 펜윅(John Fenwick)과 브라이언 스핑스(Bryan Spinks)가 20세기 전례 운동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열거한 여덟 가지 영역에 잘 요약되어 있다(Fenwik and Spinks, 5-9). 그것을 여기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공동체(사회와 교회 모두)를 위한 노력, 적극적 참여, 초대 교회를 모본으로 삼아 회복하는 일, 성서에 대한 재평가, 성찬례의 재발견, 자국어에 대한 강조,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한 재발견, 사회적 참여와 선포에 대한 강조. 이러한 요소들은 지난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성공회 기도서 개정의 특징이 되었으며, 미래에도 계속될 약속이기도 하다. </p> <p>09X08-NHJ </p> viamedia on "고교회 high church 와 저교회 low church"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87&page=2#post-281 화, 29 4월 2008 18:53:02 +0000 viamedia 281@http://liturgy.skhcafe.org/ <p>논평 감사합니다.</p> <p>뭔가 비슷하면서도, 혹은 동의하는 것 같으면서도 계속 엇나가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 문제는 이미 제 댓글에서 설명한 바이므로 더이상 토를 달지는 않겠습니다. 자칫 불필요하게 말이 반복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서로 어떤 주제만 파고 들면 더 분명한 답과 방법이 옆에 있는데 못보는 경우가 흔하다고 봅니다.</p> <p>아마 저와 Cranmerinan 님도 그럴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러니 이 글타래를 주시하고 있는 분들의 논평을 들어보면 좀 환한 구석이 나타날 것 같습니다. </p> <p>어떻게들 생각하시는지요? </p> Cranmerian on "고교회 high church 와 저교회 low church"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87#post-280 화, 29 4월 2008 14:45:07 +0000 Cranmerian 280@http://liturgy.skhcafe.org/ <p>비아 메디아님은 고교회파와 저교회파와 관련하여 ‘우리식’의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면서, 성사에 대한 강조점과 그 실천과 관련하여 &lt; ‘고교회’는 성찬례를 매주하는 흐름이고, ‘저교회’는 그렇지 않은 ‘흐름’이라고 보면 좀 더 분명하면서 포괄적인 이해를 가질 수 있을 것&gt;이라며, 이를 통해서 과거의 역사를 새롭게 볼 수 잇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과거와의 단절로 성찬례에 대한 이해와 실천의 폭이 크게 확장되었다고 했습니다. </p> <p>저는 앞에서 말씀과 전례(성사)를 성공의 태생적인 특징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저교회파와 고교회파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에 대한 개념규정을 16-7세기에 집중한다고 해서 이후의 전개과정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p> <p>저는 고교회파와 저교회파를 성공회라는 하나의 스펙트럼안에 있는 경향성을 나타낸다고 하였읍니다. 덧붙인다면 이 둘의 중간지대는 오히려 이들보다도 더 넓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가지 성향은 복합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분명하게 구별지을 수 없을 때도 있고 동시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에 어떤 성향을 더 강조하고 덜 강조하였느냐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고 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두가지의 극단적인 성향을 마치 이 두가지 성향의 대표인 처럼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비아 메디아님의 지적처럼 ‘단선적인 개념규정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문제는 잘못된 이해나 교단정치적인 이용을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 극복하자는 것입니다. </p> <p>하지만 성사와 관련하여 비아 메디아님의 고교회와 저교회의 구분법(위의 요약에서)은 또다시 이분법적인 이해를 시도하여 본질을 흐뜨린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구분은 지나친 단순화이고, 성사의 신학적 의미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20세기 이전에 고교회파 성향의 성직자들은 성찬례를 잉글랜드 국교회가 규정한 수보다 자주 거행하였으며, 저교파성향을 포함한 대다수의 교회들은 국교회가 규정한 수(일년에 4번)만큼의 성찬례를 거행하였습니다. 고교회파 성향의 성직자들이 집례하는 성찬례에 모든 신자들이 다 참여했던 것도 아닙니다. 당시 성찬례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적 성찰을 먼저 요구했습니다. 이 때문에 평신도들중 일부만이 자주 참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성찬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는 것이기 때문었습니다. </p> <p>20세기의 전례개혁운동과 교회일치운동의 성과를 수용하여 매주일 성찬례를 거행하고 전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수용하는 것과 고교회와 저교회적인 성향과의 관련성을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닌가 봅니다. 세례와 성찬례에 대한 초대교회들의 삶과 경험을 수용하는데 두 경향의 차이점은 있을 수 있어도, 이 결실의 수용 여부로 구분할 수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입교례(initiation, 오늘날의 세례와 견진, 성찬례참여을 하나로 묶은 것)를 수용하기 주저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고교회적인 성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p> <p>특히 성찬례의 경우, 오늘날 우리교회에서도 차별화(?)를 위하여 명칭까지 새로이 만들고 있습니다만(좋은 의미라도), 전례학 개론이나 초대교회의 삶에 대한 개론서만 읽어봐도 신앙의 선조들이 드렸던 예배 자체가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하나로 묶은 예배였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곧 우리들이 따라야 할 예배이지 무슨 특별한 예배인 것처럼 이름을 만들어야 하는지 안타깝습니다. </p> <p>성사와 관련하여, 성사에 대한 신학적 이해도 여기에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교회파와 고교회파와의 구별에서 성사를 ‘높게’그리고 ‘낮게’보려는 이해를 하나의 기준으로 지적했습니다. 물론 이들은 모두 성사를 좁게, 교회가 규정한 성사들만을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들은 이렇게 좁게 규정할 수 없다고 봅니다.</p> <p>다음으로 이 모든 논의들의 뒤에 숨어있는 ‘현재 우리들의 교회 상황’에 대한 서로 다른 평가입니다. 이 논의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않고 있습니다만 토론의 참여자들이나 관중들은 나름대로의 평가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저 역시 오히려 이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앞에서 사례연구를 제안하였습니다. </p> viamedia on "고교회 high church 와 저교회 low church"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87#post-276 목, 24 4월 2008 15:53:43 +0000 viamedia 276@http://liturgy.skhcafe.org/ <p>어떤 역사적 용어의 사용은 그 유래와 원래 의미와 더불어서, 그것이 현재의 시점에서는 어떻게 사용되고 어떤 의미로 변주되는가도 살펴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이 두 가지 일이 행복하게 만나는 경우도 있지만, 역사가 복잡할 수록 그 의미의 차이가 왜곡되고 변형되는게 심해서, 이에 대한 언급이 불필요한 혼란을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한동안은 역사적인 신학적인 의미를 밝혀내는 일과 더불어, 이 과정에서 우리 현재에 적절하게 적용할 수 있는 안내를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고교회와 저교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관심과 글은 바로 이 고민 선상에 있습니다. </p> <p>이런 점에서 저는 이미 첫글에서 "고교회"와 "저교회"의 구분법 문제, 그리고 이 문제를 '우리 식'으로 바로보는 방법의 내용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분명 하나의 제안이고, 이 제안은 장래에 불필요한 이런 이분법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라고 봅니다.</p> <p>Cranmerian 님은 이런 구분법의 폐기 주장에 반대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만, 이런 구분법의 폐기는 제가 지금 당장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논의의 과정을 거친 후에 내릴 결론의 방향이라고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실제로 '고교회'와 '저교회'의 역사적 맥락을 설명했고, 이른바 학문적인 수준에서 이에 대한 논의를 지속하는 한편, 우리의 사목 현장, 즉 성직자와 신자들이 이 문제를 바라보는 당장의 실천적인 관점을 제공하기 위해서 우리 현실에 맞는 고교회와 저교회에 대한 이해 방식을 제안했던 것입니다. </p> <p>그런데 실제로 Cranmerian 님이 이후에 펼치시는 설명은, 제가 여러 번 지적한 "역사의 연속과 단절"이 어떤 단선적인 개념 규정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고 읽힙니다. 우려하는 바는 Cranmerian 님께서 고교회와 저교회의 역사적 유래와 그 특성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탓에, 그 시각이 이후의 복잡한 역사 전개에 대한 이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 합니다. </p> <p>복잡한 역사 전개의 예는 이미 지적한 웨슬리의 경우도 그러하고, "고교회 운동"이라고 매우 단조롭게 지칭되어 오해가 깊어지는 '옥스퍼드 운동'에도 적용됩니다. 그 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던 존 헨리 뉴먼도 그 신앙적 배경은 실제로 영국 교회 내의 복음주의 흐름이었습니다. </p> <p>이러한 역사에 대해서 우리와 같은 후세대는, 우리 자신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역사라는 거인에 무등을 탄 채로 바라보기에 좀더 멀리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의 무등에 탄 난쟁이인 우리가 기대고 있는 중요한 어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에큐메니칼 대화를 통한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한 좀더 넓은 연구와 전례 운동을 통해서 제기되고 연구된 내용들입니다. 이 최근의 성과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여전히 19세기의 논쟁 안에 머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p> <p>p.s. 저는 어떤 식으로도 "선생"이 아닙니다. 저 역시 밑천이 없으니 이런 동네를 만들어서 듣고 배워보자는 겁니다. 또한 제가 생각하지도, 할 수도 없는 "어떤 불이익"에 대해서는 겁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ㅎㅎ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