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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태그: 하느님 나라 http://liturgy.skhcafe.org/ A Korean Anglican Theology & Liturgy Forum en Tue, 23 Jan 2018 08:14:44 +0000 viamedia on "전례 여행 20 - 전례와 선교"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710#post-1312 일, 15 1월 2012 14:25:48 +0000 viamedia 1312@http://liturgy.skhcafe.org/ <p>20. 세상의 종말 - 전례와 선교</p> <p>“다 이루었다.”</p> <p>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의 막바지에 숨을 거두시며 남기신 말씀이다. 다 이루는 일. 이것이 교회가 말하는 종말의 원래 뜻이다.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이 채워지는 하느님의 시간이 종말이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께서 다 이루신 일의 행적을 되돌아 살피며 다시 기억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오늘과 내일, 하느님께서 만드신 창조세계를 부족함 없이 완성하시려는 일에 참여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전례 안에서 이 기억과 참여의 행동을 시작하고 몸으로 수련한 뒤 세계로 파송 받는 선교 공동체이다. 그러니 교회는 예수께서 이루신 종말을 전례와 선교 안에서 지금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 공동체이다.</p> <p>종말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가 있다. 그 극단적 사례가 바로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날짜를 계산하여 그날을 믿고 준비하는 이들이다. 사회에 희망을 둘 수 없고, 교회에서 신뢰를 발견하지 못할 때마다, 그 실망한 이들을 꼬드겨 사익을 챙기는 못된 거짓 혹설이다. 이들은 교회 역사에 되풀이해서 등장했다. 물론 정해진 날짜에 아무런 일이 없어서 웃음거리가 되기 일쑤였다.</p> <p>그러나 여러 교회와 지도자가 잘못 가르쳐서 이런 불씨가 생겼다. 심판에 대한 공포로 종말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땅을 세속이라 경멸하고 하늘만 거룩한 것이라고 분리해서 가르친 탓이다. 게다가 세상과 사회에 대한 건전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교회는 사람들의 절망감에 기름을 붓는다. 시한부 종말론자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이다. 그러니 그들만 나무랄 일이 아니다. 이런 잘못된 이해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반쯤은 그들과 다름없다.</p> <p>반면, 전례를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삼는 교회는 다르다. 우리는 성찬기도 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가로질러 하느님의 시간을 완성하는 구원의 역사를 기억한다. 우리가 한목소리로 외치는 “신앙의 신비” 선포는 이 종말의 뜻을 바르게 세운다.</p> <p>“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p> <p>하느님은 성육신하시어 우리와 살며 고통당하다 죽으셨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전례 공동체 안에 함께 하신다.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도록 우리를 초대하시고, 주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그분의 잔칫상에 먹고 마시도록 한다. 종내에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 모든 역사는 부족함 없이 거룩하게 완성될 것이다. 이 과정 모두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요, 하느님 시간의 완성이요, 종말이라는 선포이다.</p> <p>종말은 교리가 아니며, 선포에 머물지도 않는다. 종말은 교회의 경험이다. 예수 안에서 펼쳐진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품은 교회가 그 완성인 하느님 나라를 향해 끝까지 걸어가는 순례 경험이다. 이 순례의 핵심은 반복해서 거행하는 성찬례이다.</p> <p>성찬례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행동이요, 시간이요, 공간이다. 메시아가 베푸는 잔칫상이다. 잔칫상에 와서 우리는 차별 없이, 부족함 없이 와서 함께 부르게 먹으라고 초대를 받았다. 축성된 음식을 먹고 우리 자신이 축성되어 변화하라는 초대요, 경험이다.</p> <p>성찬례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고 희망한다. 이미 맛보고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긴장감이 신앙인의 겸손함을 이끌고, 아직 부족한 현실을 견디며 변화를 꿈꾸고 희망하도록 돕는다.</p> <p>성찬례는 미리 맛본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우리를 파송한다. 선교는 어떤 지적 교리나 도덕적 규율을 선전하거나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는 성찬례 안에서 우리가 경험한 삼위일체, 그 춤추는 친교의 삶을 우리 몸으로 이 세상에서 증언하는 일이다.</p> <p>그러니 전례와 걷는 신앙의 순례 여정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p> <p>‘종말의 시간이 전례를 통해서 우리 삶에 파고들어온다. 전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다시 하느님 나라는 전례, 특히 성찬례를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온다. 전례가 끝나고 우리는 이 종말의 하느님 나라를 가지고 세상 속에 나아간다. 성찬례는 하느님 나라의 성사이다.’</p> <p>(성공회 신문 2012년 1월 14일치 6면)</p> <p>사례: 지난 1년 동안 “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을 사랑하고 격려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여러가지 부족한 점이 많은데도, 많은 분의 관심과 격려로 힘을 얻어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좋은 지면을 허락해 주신 성공회 신문사와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p> viamedia on "정치적 행동인 전례: 윌리암 카버너 인터뷰"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236#post-530 화, 21 4월 2009 16:09:28 +0000 viamedia 530@http://liturgy.skhcafe.org/ <p>Liturgy as Politics: An Interview with William Cavanaugh</p> <p><a href="http://viamedia.or.kr/2009/04/20/568">정치적 행동인 전례: 윌리암 카버너 인터뷰</a></p> <p>당신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전례적 행동에 참여할 때,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한 적이 있는데, 무슨 뜻인가?</p> <p><blockquote> 전에 “성찬례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때 내 첫마디는 이랬다. “한가지 약속할 것이 있습니다. 성찬례의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지 말해 준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미사를 빼먹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 전례는 의미로 축소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럴 거라면, 그 의미를 알았는데 굳이 교회에 나갈 이유가 무엇인가? 의미만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라면 반복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주 둔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주일마다 교회가 갈 필요가 있겠는가?</p> <p>이게 대체로 우리가 갖고 있는 전례와 사회 생활에 대한 접근 방식이다. 그저 전례의 상징과 의미들을 “읽으려고” 한다. 그런 다음 그 의미를 뽑아내서 “현실 세계”에 적용시켜려 한다. 봉헌은 우리의 재산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둥, 평화의 인사는 국제 관계 속에서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는 둥, 이런 식이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접근 방식은 전례가 어떤 몸, 즉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내는 행동이라는 점을 말하지는 않는다.</p> <p>앙리 드 뤼박(Herny de Lubac)은 말한다. “성찬례가 교회를 만든다”고.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무슨 별장 같은 게 아니다. 교회는 그 원래 의미에서, 예수의 정치학을 행동하는 사회적 공간이다. 교회가 어떤 정치 정당이 되어야 한다거나, 정당의 정치적 행동을 전례 안에 끼워 맞추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교회가 - 비그리스도인과 협력해서라도 - 평화와 자비의 공간, 정의로운 경제 교환의 공간을 창조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말이다.</p> <p>이런 점에서 “광야의 목소리”(Voices in the Wilderness)나 포콜라레 운동(Focolare movement)의 경제 공동체 등은 예수 정치학의 좋은 사례들이라 생각한다. 세계로부터 회피하려는 종교 분파나 정적주의와는 달리, 이러한 운동들은 변화를 만들어내는데 효과적이다. 어떤 점에서 평화와 정의를 국가에 요청하는 운동들보다도 낫다.</blockquote></p> <p>근대 세속 정치학의 가정 가운데 하나는 국가는 세속적이며 종교는 사적(private)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16세기 유럽을 망쳐놓은 종교 전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 가정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p> <p><blockquote>교회가 정치적 권력을 다시 획득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떤 강제적인 권력을 의미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세속 국가를 평화 유지자로 보는 신화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른바 종교 전쟁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종교 간의 싸움, 그러니까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싸움이 아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 전쟁은 서로 다른 신적 정치 질서들(theopolitical orders) 간의 전쟁이었다. 바로 이때라야 왜 가톨릭 신자가 가톨릭 신자를 죽였는지 설명할 수 있다. 30년 전쟁의 후반부는 합스부르그와 부르봉 간의 싸움이었다. 두 가톨릭 왕조끼리 싸운 것이다.</p> <p>교회는 이런 피투성이 전쟁에 책임이 없지 않다. 교회는 폭압적인 권력에 얽혀 있었다. 그러나 근대 국가 역시 죄없는 방관자가 아니었다. 국가의 전체 기구들은 군주들이 전쟁을 좀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찰스 틸리(Charles Tilly)가 적은 대로, “전쟁은 국가를 만들었고, 국가는 전쟁을 만들었다.” 근대 민족-국가는 폭력에 기반하여 세워졌다. 교회가 폭력에 저항한다면, 교회는 그 사적인 개인주의에서 벗어나서 정치적인 목소리를 지녀야 한다. 그것은 국가 권력을 다시 획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대해서 참된 말을 발설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교회가 연루되었던 폭력의 죄과를 현재 국가가 저지르는 폭력을 거절함으로써 속죄를 받을 수 있다.</blockquote></p> <p>교회가 국가에 관여하는 것을 염려하는 사람들은 종종 탈리반 형태의 정권을 예를 들며 위험하다고들 하는데, 합당한 염려인가?</p> <p><blockquote>분명컨데, 난 탈리반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을 괴롭히는 정권은 감시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종교적 폭력에 관한 신화가 특정한 형태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식을 염려한다. 바로 이런 방식이다. “저기 있는 놈들은 종교적 광신자들이다. 그들의 폭력은 비합리적이며, 절대주의적이고 분열적이다. 우리는 민주적인 세속 국가 사회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폭력은 합리적이며, 온화하고, 화합을 도모한다. 그들은 우리가 배운 교훈을 얻지 못한 놈들이다. 종교는 공적인 영역에서 없어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놈들을 폭격해서 사람들이 한층 높은 수준의 합리성을 얻도록 도와야 한다.” 내 생각에 이런 사고 방식이 이라크 전쟁과 테러리즘에 대한 공적인 담론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p> <p>이 신화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구 상에서 가장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동시에 우리 군사비가 다른 모든 나라가 합친 것보다 많은 것을 합리하도록 한다. 우리가 휘두르는 폭력은 폭력으로 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와 합리성과 평화를 확산시키는데 애쓰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미군과 그 대리자들에 진행된는 전쟁의 결과는 5만명이 넘는 이라크 시민의 죽음이며, 2백만명의 베트남 사람의 죽음, 그리고 2십만 명의 과테말라 농민들의 죽임이었다. 우리가 “종교적 폭력”을 악귀로 바라보는 한, 이러한 전쟁들은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우리는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어떤 종류의 폭력도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blockquote></p> <p>당신은 칠레의 폭압적인 피노체트 정권에 대한 교회의 대응을 연구했다. 칠레의 가톨릭 주교들이 했던 것처럼, 교회는 정치 권력 혹은 그러한 현상 이면에 있는 것들에 어떻게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p> <p><blockquote>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는 하나의 가정이다. 칠레에 관한 내 책에서,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사례로 삼으려고 했다. 주교들이 한 일과 풀뿌리 교회들이 한 일은 국가가 사람들의 상상력을 봉쇄하고 있을 때 이를 부수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깨닫게 되었다. 국가더러 스스로 정의로울 걸 요구하는 게 쓸모 없는 짓이라는 걸 말이다. 교회는 국가가 정의를 구현하리라 기대할 수 없다. 교회는 스스로를 심각하게 어떤 공적인 몸,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 생각한다. 바로 이 몸이 세상 안에서 정의와 평화의 공간을 창조한다. 이는 종종 국가에 대한 저항을 수반한다. 칠레에서 몇몇 주교들은 고문에 책임이 있는 사람을 파문했다. 그리고 풀뿌리 교회들은 정권의 희생자들을 돕고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 변화는 조용하게 오지 않았다. 대체로 그런 일은 없다.</blockquote></p> <p>고문은 피노체트 정권 아래 정부에 의해 자행됐다. 미국 정부는 고문을 눈감아 주고 있다. 미국 교회들은 고문을 이용했던 칠레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p> <p><blockquote>부시(Bush)는 존 매케인 의원이 미국 요원들에 의한 고문 방지를 목적으로 한 수정안을 대상으로 부결권 행사로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가 칠레에서 배울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이 점에 그리 놀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칠레는 예외적이라고들 생각했다. 칠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긴 민주주의 전통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들 군사 정권은 단기간으로 끝날 것이며, 그리 폭압적이지도 않으리라 생각했다. 미국 역시 예외적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자유를 위한 하나의 신호라고 여긴다.</p> <p>예외주의(exceptionalism)는 두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미국을 예외적이라 여기기 때문에, 미국은 법 위에 있고 예외적인 잣대를 적용할 수 있다고들 생각하게 된다. 어떤 국가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되면 - 메들린 올브라이트가 말한 대로 미국은 “없어서는 안될 국가”이다 - 국가는 그 생존을 위한 이익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라고 여긴다.</p> <p>칠레에서 배울 수 있는 또다른 하나 - 교회는 국가가 스스로 정의를 행하리라 기대하는 것 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분명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 억류자들에 대한 불의한 처우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교회는 ‘정당한 전쟁’에 대한 결정을 대통령에게 미뤄둬서는 안된다. 교회가 어떤 전쟁이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결정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전쟁에서 싸우는 것을 거절해야 한다. 이것이 현재 미국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라 생각한다. 정당한 전쟁 이론이 한치라도 의미있는 것이라면, 그 때문에라도 교회는 정당한 전쟁에 대한 결정을 국가에 미룰 수 없는 것이다.</blockquote></p> <p>당신은 연예 산업, 특히 디즈니 기업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관여에 대해서도 글을 썼다. 대체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분야에 관해서 두 가지 선택이 있는 것 같다. 대중 연예 사업 속에서 복음의 신호를 찾든지, 아니면 그 부도덕성때문에 이를 피하는 것 말이다. 당신 생각은?</p> <p><blockquote>전체 대중 연예 사업를 받아들이거나 회피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 무엇이 좋고 나쁜 지를 식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p> <p>내가 디즈니를 비판하는 것은 그 영화나 다른 미디어에 관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내용도 분명 비판의 대상이다. 디즈니에 관하여 내가 관심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권력이다. 자유 시장이라고는 하나, 디즈니는 소수의 거대한 사업체가 소비 패턴에 영향을 주고 문화를 획일화하는 권력을 갖게 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수백만의 부모들은 디즈니가 뱉어내는 것을 구입하느라 안달이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라이온 킹이나 다른 상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p> <p>자유 시장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강박감을 갖게 되는가? 이론적으로, 자유 시장에서는 모든 개인은 자신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무엇이 객관적으로 좋다는 감각이 없는 문화 속에서, 남는 것은 힘이다. 의지는 좋은 것(선한 것)으로 이끌리지 않고, 마케팅의 권력이 의지를 움직인다. 거대 초국가 산업은 그 자라나는 권력으로 자유의 절단된 단편 만을 양산하고 있다.</blockquote></p> <p>당신은 또 교회와 관련된 대학들의 정체성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런 기관들이 그 신학적인 근거를 굳건히 지키면서, 고등 교육 시장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p> <p><blockquote>미국 고등 교육의 큰 아이러니는 다양성을 추구한다면서, 대학들과 대학교들이 대동소이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대학들 안에서 인종적, 성적, 계급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일에 절대 찬성한다. 그러나 어떤 사명의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학교는 특별한 어떤 것에 대해 믿지 않게 된다. 진정한 다양성은 대학 내부의 다양성 뿐만 아니라, 대학들 간의 다양성이다. 어떤 대학이 침례교이든, 천주교이든, 감리교이든, 대학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로 정체성을 찾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곳이 독특하게 침례교적이고, 천주교적이고, 감리교적인 것에 따라서 모두 풍요롭게 되는 것이다. 교회 관련 학교들은 그들이 독특한 선교 이념을 가질 때라야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한 정체성이 싫다면 그런 학교를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면 될 일이다.</p> <p>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기반한 학교들인 어떤 정통 교리에 입각한 엄격한 기준을 모든 학생들에게 강요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학교의 실무자들, 교수진, 학생들 사이에 충분한 합의가 있어야 일관된 대화가 지속될 수 있다. 많은 대학생들이 자신의 교육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까닭은 우리가 바로 이런 아이러니 속에서 가르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지적인 방법들과 입장들, 그리고 세계관들을 뒤섞은 샐러드를 제공하고, 아무거나 원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하고 있다. 이건 정말로 중요하지 않다. 많은 현대 대학들은 지성적으로 일관되지 못해서, 지성적인 활력이 아니라 냉소주의만 낳고 있다.</blockquote></p> <p>어떤 점에서 일관성이 없다는 것인가?</p> <p><blockquote>교수진 임용이 가장 관건이다. 많은 교회 관련 학교들은 현재 많은 수의 교수진과 실무자들을 갖게 되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그 학교를 설립한 교단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의혹을 갖고 있다. 물론 모든 학교는 아웃사이더가 필요하다. 만일 내가 1950년대의 가톨릭 대학에서 가르친다면, 소수의 좋은 맑스주의자가 교수진에 있어서 여러 문제들을 헤집어 놓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시계추는 다른 방향으로 흔들렸다. 각각 학부 안에 가톨릭 관점으로 심리학이나,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몇 명 씩은 있었으면 좋겠다.</p> <p>이것은 학생들에게 큰 문제이다. 학생들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받는 교육이 학제를 넘어서서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생물학 시간에 창세기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교수는 이런 학생들을 수업을 방해하는 이들처럼 취급한다. 교회 관련 학교들이 창조론자 만을 임용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학교는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에서 배운 것들을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연결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에 대해 동감하거나 이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다.</blockquote></p> <p>우리와 같은 다원적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요한 14장 6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는 구절을 두고 고민하게 되었다. 당신은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는가?</p> <p><blockquote>이 구절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많다.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은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St. Catherine of Siena)에게서 따온 말이다. “하늘로 가는 모든 문이 하늘이다. 주님께서 나는 길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카타리나 성인은 그리스도를 하늘과 땅 사이의, 신성과 인성 사이의 다리라 생각한다. 하늘과 땅 사이의 그 다리는 이미 하늘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p> <p>이 설명을 좋아하는 건, 이 말이 수단과 목적이라는 이분법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늘로 가는 수단이 아니다. 전쟁은 평화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자유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전제 조건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늘을 지금 이 땅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설령 그 실천 속에서 죽임을 당하더라도. 어떤 멀리 있는 종말의 시점에 그리스도에게 가는 길을 만드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길이다.</blockquote></p> <p>이번 주일에 설교를 하게 된다면, 어떤 본문을 선택해서, 어떻게 살펴볼 것인가?</p> <p><blockquote>대림절이 가까오고 있으니, 아마 절기 독서에 있는 대로 이사야에 있는 위대한 본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 같다. 전체 전례력을 통틀어서 좋아하는 독서 본문들이다. 새롭게 변화된 현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이사야 11:1-9 를 선택할 것 같다.</p> <p>우디 앨런은 이렇게 말한다. “사자가 어린 양과 함께 어울릴는지 몰라도, 어린 양은 쉽게 잠들지 못할 걸?” 이사야에서 말하는 어린 양과 늑대가 함께 어울린다는 본문을 선택하면서도, 우디 알렌의 지적을 이른바 현실주의(realism)의 사례라고 생각한다. 이 현실주의는 말한다. “순진하면 안된다. 현실 세계 속에서 어린 양은 늑대와 함께 하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역사를 바꾸실 때라야, 우리는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큰 막대기를 들고 다녀야 한다.”</p> <p>그러나 그리스도교적인 이사야서 해석으로는, 하느님께서 이미 역사의 구원을 위해 행동하셨다.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이미 햇순이 돋아났다. 대림은 성탄에서 완성된다. 사람들은 대체로 하느님 나라의 “아직 아님”(not yet)을 하느님의 행동 지연으로 본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어떤 것도 지연시키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길”인 아들을 주셨다. “아직 아닌” 것은 우리가 지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가 그리 살아가고 있다. 이사야의 전망을 하느님께서 이뤄주시겠지 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복음은 하느님께서 이미 행동하셨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주셨다. 그 분 안에서 이사야가 바라보던 새롭게 변화된 현실은 완성되었다.</blockquote></p> <p>The Christian Century. Dec. 13, 2005:28-32. Copyright 2005 CHRISTIAN CENTURY. Translated and reproduced by Nak-Hyon Joo in Korean with permission. </p> viamedia on "선교와 복음화 - 선교의 다섯가지 지표"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47#post-383 화, 06 1월 2009 06:52:22 +0000 viamedia 383@http://liturgy.skhcafe.org/ <p>우리가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는 선교의 개념은 무엇일까요? 최소한 성공회는 선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성공회 안에서 선교에 대한 어떤 공동의 이해를 갖고서 선교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 속에서, 이미 십수년 전에 번역해서 소개한 바 있거니와, 최근 세계성공회 선교와 복음화 회의에서 재확인하고 있는 선교에 대한 이해를 다시 나누고, 우리가 갖고 있는 선교 개념과 행동을 되돌아 보았으면 해서 올립니다.</p> <p>아래는 1999년 세계성공회 선교와 복음화 위원회(MISSIO)가 재천명한 선교의 다섯 가지 지표를 요약 번역한 것입니다. </p> <p>원문 전문: <a href="http://www.anglicancommunion.org/ministry/mission/fivemarks.cfm" rel="nofollow">http://www.anglicancommunion.org/ministry/mission/fivemarks.cfm</a></p> <p><strong>선교와 복음화 - 선교의 다섯가지 지표</strong></p> <p><strong>교회의 선교는 그리스도의 선교이다.</strong> 그러므로, 선교는,</p> <p>-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된 소식을 선포하는 일이다.<br /> - 새로운 신자들을 가르치고, 세례 주고, 키워 내는 일이다.<br /> - 사랑의 봉사를 통하여 인간의 필요에 응답하는 일이다.<br /> - 사회의 불의한 구조를 변화시키도록 노력하는 일이다.<br /> - 창조 질서를 온전히 보존하고, 지구 생명을 지탱하고 새롭게 하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p> <p><strong>선교: 복된 소식을 선포하는 일</strong></p> <p>선교의 이 첫번째 지표는 모든 선교를 요약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선교 사명 자체를 요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4:17, 마르 1:14-15, 루가 7:22, 요한 3:14-17). 이것은 다섯 지표 가운데 하나 혹은 첫째가 아니라, 모든 우리의 모든 선교 활동 전체를 담은 핵심 선언이다.</p> <p><strong>맥락 속에 있는 선교</strong></p> <p>모든 선교는 그 특수한 상황, 즉 맥락 안에서 전개된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한 근본적인 일치가 있다 하더라도, 선교의 형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와 시간, 문화의 다양성에 따라 형성되어, 그 안에서 구체화하여 선포한다. </p> <p><strong>선교 - 전례의 거행과 감사</strong></p> <p>성공회 전통 가운데 중요한 특징은 예배가 우리의 공동 생활에 중심적이라는 우리의 믿음이다. 그러나 예배는 우리가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서 부수적으로 하는 어떤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예배 그 자체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증언이다. 우리의 생명과 생활 전체가 거룩하다는 표징이요, 우리 삶의 희망과 의미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할 때라야 찾을 수 있다는 표지이다 (로마 12:1). 우리가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그분의 죽음을 선포한다(1고린 11:26). 우리의 전례 생활은 우리가 받은 선교 소명에 생명을 주는 필수적인 것이다. 전례 생활은 선교의 다섯가지 지표에 나타난 공적인 증언 형태를 떠받치는 근본이다.</p> <p><strong>교회는 선교이다</strong></p> <p>이 다섯 가지 지표는 선교의 실천을 강조한다. 신실한 실천이야말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응답에 대한 잣대이다 (마태 25:31-46, 야고 2:14-26). 그러나 우리를 도전하고 있는 문제는, 단지 선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교의 백성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교회 생활 전반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통치의 표지가 되고, 그것을 미리 맛보는 곳이 되고,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p> <p><strong>선교는 하느님의 행동이다.</strong></p> <p>"선교는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 선교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우리의 발명품이거나 선택 사항이 될 수 없다" (1998년 람베스 회의). 선교의 주도권은 하느님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복음을 살고, 이를 선포함으로써 하느님의 선교를 위해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을 뿐이다. 선교의 다섯 가지 지표는 이 점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p> <p><strong>선교와 삼위일체</strong> </p> <p>선교는 창조하고, 화해를 만들며, 변화를 일으키는 하느님의 행동이다. 이는 삼위일체 안에서 발견되는 사랑의 공동체를 그대로 따르는 일이다. 이 행동은 예수라는 인격 안에서 모든 인간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하느님 통치의 표지요, 미리 맛봄이요, 도구가 된 하느님의 백성이 성령의 힘 안에서 신실하게 실천하고 증언할 때 드러난다. </p> <p>우리는 하느님의 변화시키는 선교에 우리 자신을 동참시킬 때 일치를 이룬다. 선교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말하는 지를 밝히는 초석이다.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