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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토론 주제: 번역 : The Study of Anglicanism-lex orandi, lex credendi http://liturgy.skhcafe.org/ A Korean Anglican Theology & Liturgy Forum en Sun, 25 Jun 2017 13:45:22 +0000 Cranmerian on "번역 : The Study of Anglicanism-lex orandi, lex credendi"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1024#post-1911 수, 20 3월 2013 04:04:49 +0000 Cranmerian 1911@http://liturgy.skhcafe.org/ <p>6. 기도의 법-신앙의 법<br /> (Lex Orandi-Lex Credendi)</p> <p>W. Taylor Stevenson</p> <p>성공회신앙(Anglicanism)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의 예배는 탄원과 찬양뿐 아니라 신학적인 실험(experimentation)이자 공식화(formulation분명한 입장의 발표, 개념화)의 중심적인 무대로 매우 독특한 역할을 한다(pp. 55-81참조). 예배와 믿음과의 이러한 연관성은 종종 라틴어 인용구인 렉스 오란디 렉스 끄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i)-‘기도의 법이 믿음의 법이다’-라는 용어로 논의되고 있다.</p> <p>이러한 독특한 상황(situation)은 성공회신앙에서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리고 그 강점들과 한계들은 무엇인가? 예배를 신학적인 실험과 공식화의 중심적인 활동무대로 만드는 과정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러한 독특한 상황을 재조정하여 강점들을 강화하고 한계들[약점]을 축소시키는 방법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교회론과 성사론 그리고 사목직(ministry)과 관련하여[비교하여] 어떻게 다른가? 이 글의 목적은 이러한 질문들을 차례로 탐구하는 것이다. </p> <p>1. 성공회의 신학과 자기이해에서 예배가 차지하는 독특한 역할</p> <p>하나의 특정한[독특한] 성공회적인 신학은 과거에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며, 또한 현재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다른 교파교회들처럼] 토머스[아퀴나스]나 루터, 칼빈이나 츠빙글리와 같은 신학자가 없다. 또한 성공회신앙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도권(magisterium)이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서 신학연구의 표준을 제공하였던 신학적 주제들에 맞먹는 권위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성공회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로는 분명하게 리처드 후커를 꼽을 수 있지만, 16세기말 그의 저서인 &lt;잉글랜드교회의 치리제도의 원칙에 관하여&gt;는 체계적인 방식에서[신학적인 체계로] 결정적[표준적]이거나 영향력있는 것이 되지는 못하였다. 만약에 성공회의 사상에 지속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주는 신학이 있다면, 그것은 4차례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을 거치며 최종적으로 칼케돈 공의회(451)에서 완결된 논쟁적이고, 모호하며[이중적이고], 주로 그리스도론 중심적인 초기교회의 신학(초기교부들의 신학pastristic theology)이다. 그러나 이 신학은 현대의 역사의식에 맞지 않는 그리스문화적인 사상형식들(Hellenistic thought-forms)로 설명되었기 때문에, 성공회 신학의 여러 원자료들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p> <p>16세기초부터 현재까지 성공회신앙에 결정적인 것은[표준이 되었던 것은] 공동기도서-이후의 개정판들 포함-였다. 기도서는 아침기도와 저녁기도의 매일기도예식[성무일과], 성찬례[감사성찬례]와 세례와 다른 성사들을 집행하는 형식들, [대]연도, 성직서품예식서, 성시집 그리고 기타예식들과 기도문들을 포함하였다. 기도서는 그 이후에 몇차례만 개정되었으며 성격상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처음 두권의 공동기도서(1549년과 1552년)가 성공회적인 신학과 실제[신앙활동practice]를 확립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첫번째 기도서는 [기존의 예식을] 프로테스탄트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개정되었다. 그러나 두번째는 이 시기 동안 잉글랜드교회에서 신학과 신앙활동의 급격한 변화를 반영하여 그러한 변화들을 보다 철저하게 [프로테스탄트 방향으로] 개정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학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활동[실제 예배]을 그리스도인들의 ‘프락시스(praxis)’ (실천, 실생활) 안에서 서로 의존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당대의 관심은 적어도 중요한 전례적인 실험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곧 성공회의 탄생부터 성공회신앙의 특징이 되었다. </p> <p>1549년 기도서의 집필과정은 토마스 크랜머(1489-1553)가 관장하였으며, 따라서 기도서에는 그의 신학적 성향이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그는 최초의 기도서에 포함되었던 여러 본문들을 수년에 걸쳐 수집하고, 편집하고, 직접 집필하였다. 결과적으로 만약 누군가를 결정적인[표준적인] 성공회 신학자로 꼽는다면, 그는 바로 토머스 크랜머이다. 그러나 신학자를 신학적인 주제들에 대한 체계적인 고찰들을 저술한 자로 규정한다면, 그는 신학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사제이자 목회자였으며, 켄터베리 대주교로서 행정가이자 정치가였다. 그외에도, 그는 사실상 오늘날의 명칭으로 전례학자(liturgiologist)였다. 그의 신학은 (1)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기도하는 기도문들의 선택, 배열, 그리고 집필을 통해서 표현되었으며, 또한 (2) 기도문들과 이를 동반하는 의식행동(의례ceremony)의 변화를 허용하는 범위를 규정한 지시문으로 표현되었다. 더구나 기도서의 ‘성서독서표’(Lectionary)는 교회력에 따라 매주간 교회의 예배에서 독서할 성서본문을 융통성있게 규정하였다. 이러한 방법들에 의해서 ‘예배의 법은 믿음의 법’ 즉, 렉스 오란디, 렉스 끄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i)가 되었다. 즉, 공동기도서에 따라서 매일 낭독하고 기도하는 본문들은 성공회 신자들의 그리스도교 이해와 체계적인 신학적 고찰[숙고]을 깊이있게 표현[제공]한다. 이러한 상황(situation)은 16세기의 종교개혁 동안에 성공회신앙에 널리 유행하였으며, 또한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다. </p> <p>1549년 기도서의 집필[제작]과정의 두가지 측면은 이 글의 주제에 핵심적이기 때문에 특별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p> <p>첫째로, 크랜머의 기도서는 신학적인 공식화[작업]과 신학적인 실험을 위한 활동무대였다. 1549년 기도서를 집필[제작]할 때에 크랜머는 라틴교회, 그리스 정교회, 루터[파]교회 등의 원자료들에 의존하였다. 1549년 직전 10년 동안 그는 앞으로 사용될 기도서의 주요한 부분들을 준비하였으며, 일부는 잉글랜드의 전도구교회들에서 실험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실험적인 전례들에 대한 신학적 대중적 반응은 1549년 기도서의 제작과정에 반영되었다. 따라서 1549년 기도서는 사실상 그 자체로 실험적인 본문들이었으며, 따라서 1552년과 59년에 계속해서 개정되었으며, (잉글랜드 퓨리탄들의 정권장악으로 한동안 폐지되었다가) 1662년에 다시 개정되었다. 이러한 기도서의 공식화, 실험과 재공식화의 과정에서, 잉글랜드교회의 개혁은 효과적으로 수행되었으며, 따라서 [종교]개혁된(Reformed) 교회이자 보편적인(Catholic) 교회라는 독특한 형태의 그리스도교회를 확립하였다. 잉글랜드에서 1662년 기도서는 오늘날까지도 최근의 개정된 전례서들과 함께 정규(legal) 기도서로 사용되고 있다. </p> <p>이와 비슷하게 신학적인 공식화와 실험이라는 과정은 미국성공회의 기도서(1789)를 시작으로 세계성공회의 다른 교회들에서도 자신들의 기도서를 제작할 때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따라서 1662년 이후로 가장 포용적이며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개정기도서인 1979년의 미국성공회 기도서도 이와 똑같은 과정을 통해서 제작되었다. 즉, 연속적인 ‘시험용’(trial) 기도서들(또는 일부분만으로 시험예식들)을 제작하여 이를 미국성공회의 개별 교회들의 상황속에서 실험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시험적인’전례서들로 매주 기도하였던 신자들의 반응들은 1979년의 최종적인 기도서의 형태에 신중하게 반영되었다. 이 기도서가 허용하는 전례적인 이해의 범위는 이전 세기들에서 상상할 수 있었던 것들을 능가하였으며, 기도[문 예식]에 대한 이러한 융통성(유연성flexibility)은 20세기 후반의 다원화된 교회(pluralistic church)에서 발견되는 믿음의 융통성-즉, 렉스 오란디 렉스 끄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i)-을 반영하고 강화시킨다. </p> <p>2. 성공회신앙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잉글랜드 기풍(English ethos)</p> <p>종교개혁 시기에 잉글랜드에 있던 교회에 알려진 예배와 신학의 그리스도교 유산은 서구유럽의 다른 지방들에 알려진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앞에서 설명한 신학적인 공식화[과정]와 그리스도인의 자기이해에 대한 그러한 독특한 접근방식이 왜 잉글랜드에서만 발생하였는가? 이러한 종류의 역사적인 질문들은 관련된 쟁점들이 너무 복합적이기 때문에 결정적인 또는 완전한 대답들을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잉글랜드의 정치적 사회적 조건들은 레스 오란디 렉스 끄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a)의 과정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독특한 방식을 낳는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더구나 이러한 조건들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이러한 성공회적인 과정의 강점들과 약점[한계]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p> <p>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조건들을 필자는 간단으로 ‘잉글랜드적인’(English), 또는 보다 일반적으로 ‘성공회적인’(Anglican, 잉글랜드교회적인) 기풍(민족정신ethos)으로 명명하려고 한다. 기풍[정서]이란 한 인종[민족]집단의 지배적인 조건들[상태들]과 가설들[태도들](conditions and assumption)로 구성되며, 이 집단의 믿음들과 관습들을 알려주는 숨어있는[근본적인] 감정들이다. 기풍[정서]은 숨어있는 가설들과 감정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다루기[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가설들과 감정들]은 숨어있기 때문에 아무런 저항없이 수용되며, 따라서 그 집단을 지배한다. 기풍[정서]은 ‘정신적인 습관’(habit of mind)이지만, 보다 중요하게는 ‘마음의 습관들’(habits of heart)-즉,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로 구성된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잉글랜드적인 정서의 두가지 측면은 이 글의 목적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첫째는 공감(의견일치consensus), 포용성(포괄성comprehensiveness) 그리고 계약(계약문서화contract)이 사회의 질서를 확립시키고 유지시키는 규범적인 양식이라는 가설이다. 이러한 가설에 따른 생활(living-out)은 폭력적인 갈등을 만들지 않으며, 이러한 상태의 연속은 바람직하고 가능하다는 또 하나의 가설을 만든다. 둘째로 잉글랜드적인 기풍[정서]에는 인간의 문제들[인간사]에 접근할 때에는 추론적인 관심(speculative interest)을 결여한채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pragmatism)을 따른다. 잉글랜드적인 기풍[정서]의 이 두가지 근본적인 측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를 강화시킨다. 이 글과의 관련성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는 각각에 대하여 간단한 추가적인 논평이 필요하다. </p> <p>2.1 . 공감, 포용성 그리고 계약 </p> <p>적어도 대헌장(Magna Carta, 1215)의 시대 이후로 잉글랜드인들은 그들의 계서[계급]적인 중세사회를 변형시키기 위하여 간헐적이었지만 지속적인 투쟁에 참가하였다. 중세사회의 강점은 중세기의 다양한 경제적-정치적 구성원들에 어느정도의 질서를 부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의 약점은 부과한 질서가 제한적이며 취약하기 때문에, 거의 끊임없이 제한적인 전쟁상태를 야기시킨다는 점이다.</p> <p>신학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교회가 이러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하여 취한 화해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중세의 사회질서는 유럽뿐 아니라 잉글랜드에서도 인간사회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비젼과 긴장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긴장관계는 그리스도교회가 취하였던 일시적 휴전이라는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교회의 죄인 보호구역’(지성소sanctuary)의 관행으로 표현되었으며, 그리고 보다 일반적이며 모호하게는 교회와 국가와의 수세기에 걸친 갈등[투쟁]-잉글랜드에서는 1162-74년 동안에 토마스 베켓 대주교와 헨리2세와의 갈등-으로 표현되었다. 실질적으로, 이러한 중세적인 사회질서는 소위 개인적인 자유라는 의식(20세기가 아닌 13세기의 기준에서)이 싹트고 상업과 국제적인 교역에 의해서 자급자족의 농경절서가 점진적으로 변형되고 있던 사회에 통일성과 안정성을 제공할 수 없었다. </p> <p>2.2.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Pragmatism) </p> <p>이것이 바로 대헌장을 생각할 수 있게 만들고 결국 성공시킨 상황이었다. 대계약(Great Charter, 마그나 카르타의 영어명칭)은 잉글랜드 치리구조[헌법]의 발전과정에서 첫번째 주요문서일 뿐만 아니라, 이후의 발전과정의 정신을 확립시켰다. 대헌장은 실용적인 문서였다. 즉, 대헌장은 당대의 해악들에 대한 명확하고 실용적인 해결책을 정립시켰다. 이 문서에는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내용이 거의 없다. 대계약을 존 왕에게 요구한 대토지소유 계급들(남작들barons)은 혁명가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보통법(Common Law)과 대토지소유 계급의 의회, 그리고 다른 계급들과의 연대를 통해서 국왕을 제한하기 위하여’ 행동하였다. 남작들은 ‘자유민’(freemen)의 실질적인 지지를 받으며 행동하였다. 강경한 주장과 곧이은 타협의 과정에서 ‘중도적인 입장’(middle way)-via media-을 추구하였으며, 이러한 행동은 당시에 가능하였던 가장 포괄적인 공감[의견일치]을 목표로 하였다. 이러한 공감은 하나의 계약-즉 대계약[대헌장]-으로 확립되었으며, 대계약은 ‘그후에도 지속적으로 다시 문제화, 이에 따른 개정, 이에 대한 위반과 다시 문제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p> <p>3세기가 지난후[16세기에] 앞서 설명한 첫번째 공동기도서(1549)는 대헌장을 만들었던 과정과 매우 유사한 과정을 통해서 제작되었다. 크랜머와 다른 지도자들은 십여년 이상의 기간 동안에 잉글랜드 교회의 예배와 믿음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의 일치를 성취하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여론]를 형성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혁명이 아닌 개정과 수정이란 방식을 통해서 수행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중세말기의 교회에 의존하려는 자들과, 대륙의 종교개혁에 의존하려는 자들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middle way)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중도적인 입장’은 하나의 ‘계약문서’로, 즉 1549년의 공동기도서로 표현되었다. 이 계약은 실용적인 계약으로 교리적인 추론과 논쟁의 문제들 대부분을 회피하고, 잉글랜드 백성들이 매주 예배하는 방식에 대한 실용적인 문제만을 추구하였다. 처음부터 이러한 계약은 ‘따라서 지속적으로 다시 문제화, 이에 따른 개정, 이에 대한 위반과 다시 문제화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연속성은 지속적인 잉글랜드적인 또는 성공회적인 기풍[정서]의 표현이다. 이러한 기풍[정서]은 다른 역사적인 시기와 문화적 상황에서 다르게 표현된다 할지라도, 서로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의견일치[공감]과 포용성[포괄성] 그리고 계약문서화의 과정을 낳고있다.</p> <p>2.3.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추론적인 관심의 결여</p> <p>잉글랜드적인 또는 성공회적인 기풍[정서]의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다. 역사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겠지만, 전통적으로 영국섬 (브리튼섬Britain)과 관련된 이단은 영국인(브리타니아인 또는 아일랜드인) 수도사 펠라기우스(410-18에 주로 활동)가 유일하였다. 그는 신의 은총 이외에도 각 개인이 구원을 향한 첫번째이자 중요한 단계를 시작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실용주의적인 사상, 즉 ‘실질적인’(체감할 수 있는sensible) 사상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또한 잉글랜드적인 기풍[정서]과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잉글랜드인들의 신심(piety)과 신학은 17세기의 퓨리탄부터 18-9세기의 복음주의 운동들까지 펠라기우스적인 성향을 진지하게 나타내었다. 더구나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측면을 크게 강조하는 구세군(Salvation Army, 1885)은 잉글랜드적인 기풍[정서]에서 탄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길버트와 설리번의 오페라타의 유쾌한 가사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잉글랜드인이 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p> <p>이러한 실용주의적인 성향이 적어도 대헌장 시대부터 유독 잉글랜드에서만 발생하는 가는 정확하게 대답할 수 없고 다만 추론할 수 밖에 없다. </p> <p>그러나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발생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성향은 잉글랜드의 헌정과정에서[치리구조를 결정짓는 과정에서] ‘보통법’(common law)으로 구체화된 사법적체계에 깊이 베어있다. 또한 이러한 정서는 경험주의라는 영국의 철학적인 전통을 낳았으며, 또한 18-9세기의 자연과학의 발전과정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p> <p>3. 성공회 기풍내에서 lex orandi, lex credendi의 장점들과 한계들</p> <p>3.1. 장점들</p> <p>성공회적인 기풍[정서] 안에서 렉스 오란디 렉스 끄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a) 과정의 장점들은 앞의 설명에서 분명하게 입증되었다. </p> <p>첫째이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러한 과정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형성시켰던 전통들을 높이 평가하며 매우 중요시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이러한 전통들의 전례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전례는 한편으로 기본적으로 성서와 전통의 상징들(symbols)과 신화들(myths)과 은유들(metaphors)로 표현된다. 다른 한편으로, 성서와 전통들은 믿는자들에 의해서 전례의 상황에서 수용된다. 이는 마치 전례가 당대의 상황에서 기도되는 것과 같다.</p> <p>둘째로, 역사적인 과정속에서 그리스도교 전통들을 지속적으로 수용(appropriation)하거나 정리하는 작업(ordering)은 이러한 전통들이 살아있는 믿는자들의 집단 즉, 교회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세째로, 전통들의 정리작업은 교회 그리고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의 정리작업에 대한 포괄적인 공감을 목표로 하는 숙고와 협상의 과정을 통해서 진행된다. 네째로,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형성된 공감은 실용적으로 전례적인 계약, 즉 공동기도서로 공식화되며, 이 기도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적용되는 방식으로 교회 그리고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정리작업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다섯째, 기도서는 기본적으로 다양한 전례적인 본문들을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한 상징들과 신화들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기도서와 직접적으로 상반되지 않는한 개인적인 신심과 다양한 형태의 추론적인 신학체계들을 발전시키는데 공헌할 것이다.</p> <p>전반적으로 이러한 장점들은 아래에서 설명하는 성공회신앙의 일반적인 특징들을 낳았다. 첫째로, 전통과 연속성 그리고 질서(order)를 중요시한다. 둘째로, 질서(order)의 중심인 기도서를 확고하게 보존하는 것은 바로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론을 매우 강조한다. 세째로, 과거의 전통을 현재에 적합한 공감으로 다시 만드는 것은 바로 이성적인 인간의 숙고와 토의 그리고 협상을 통해서이기 때문에 인간론을 중요시한다. 네째로, 과거의 전통들은 반드시 현재의 공감을 형성할 필요성과 갈등하기 때문에, 성공회신앙을 과거의 전통이나 현재의 재공식화를 우상화하려는 것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자기비판적인 요소가 현존한다. 다섯째로, 공감에 대한 기대 그리고 인간론의 중시 때문에, 성공회신앙은 인간적인 문화-예를들면 비판적인 역사연구들, 자연과학과 예술 등-에 비판적이지만 적극적인 태도를 강력하게 나타낸다.</p> <p>3.2. 한계들[약점들] </p> <p>성공회신앙의 한계들은 앞의 장점들의 이면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전통의 전례적인 본문들에 대한 정성스런 존경을 통해서 질서(order)와 통일성을 찾는 분명한 장점은 이러한 본문들에 대한 역사적이자 기술적인[사소한] 토론들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소비함으로써, 교회생활에 매우 필수적인 전통들의 현재적인 재해석을 상대적으로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부분적으로 성공회신앙을 주변의 문화와의 상호작용으로 방향전환함으로써 보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렉스 오란디(lex orandi예배의 법)는 지니치게 렉스 끄레덴디(lex credendi 믿음의 법)를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리고 유명한 예외들도 있지만), 이는 문제의 양면들이 제기하는 합법적인 주장들을 통합함으로써 균형을 성취하려는 ‘중도적인 입장’을 추구하는 성공회적인 노력을 배신하는 것이다. </p> <p>또다른 문제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여러가지 한계[약점]들은 협상을 통해서 공감을 성취하고 그러한 공감을 계약으로 구체화하려는 성공회신앙의 실용적인 기대(desire)로부터 발생한다. 이러한 기대는 성공회신앙에 내재된 ‘달콤한 합리성’(sweet reasonableness 빚좋은 외형적인 타협)을 낳는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합법적인 차원이다. 교회와 사회에서 질서와 통일성 그리고 안정성을 증진시키는 성공회신앙의 가치는 쉽게 입증된다. 그러나 이와동시에 합리성과 질서에 대한 이러한 실용적인 기대는 한 사회의 지배적인 요소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희생시켜 평화를 얻으려 함’으로써 통일성에 대한 비젼을 잃어버리는 싸구려 타협으로 전락하기 쉽다. 역사적인 전통들은 되풀이되고, 많은 관점들은 다시 인정받지만, 어느 하나도 열정적으로 확언되지 않으며, 복음적인 입장은 계승되지 않는다. 이러한 풍조가 만연할 때, 예언자들의 나팔소리[목소리, 경고]를 외치는 것은 불가능해지며, 또한 이러한 경고를 외치는 자들은 성공회 공동체 내에서 서서히 밀려나게 된다(따라서 외형적인 ‘평화’만를 보존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의 가장 유명한 사례는 존 웨슬리의 감리파운동과 관련하여 1739년(성공회교회들이 그를 외면한 해)부터 1784년(감리파 평신도 설교자들의 연회annual conference에서 법적인 헌장을 채택한 해)까지 발생하였다.</p> <p>3.3. 성공회의 한계들, 성공회의 합법성, 그리고 미래의 방향</p> <p>전례와 예배의 중심성에 대한 정당한 강조뿐 아니라 공감에 대한 실용적인 관심을 갖는 성공회신앙의 한계들은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인 폴 리꾀르(Paul Ricoeur, 1913-2005)의 철학과 함축적인[내재된] 신학의 검토[심사]을 통해서 보다 넓은 시각에서 평가받을 수 있다[이해될 수 있다]. 리꾀르는 18세기부터 오늘날까지 넓게는 인간적 담론(discourse), 구체적으로는 신앙적인 담론에 대한 중요한 문제[의문]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였다. 전문용어로 서술한다면, 이 문제는 다음과 같다. 생각(Cogito)은 존재(being) 안에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보다 덜 전문적이며 그리고 분명하게 신학적인 용어로 이 문제를 서술한다면 다음과 같다. 나의 생명(life)은 하느님의 실재 안에서 발견되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실재가 나로부터 유래하는가? 이 중요한 문제는 널리 인지되었으며, 또한 버나드 로너건(Bernard Lonergan), 칼 라너(karl Rahner), 볼프하르트 판낸베르그(Wolfhart Pannenberg)와 여러 신학자들도 이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이 글의 관심사에 가장 적합한 내용은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한 리꾀르의 고찰들로, 그는 인간적 담론(discourse)에서 상징과 신화들의 기능을 매우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제 이에 대한 고찰들을 살펴보자. </p> <p>리꾀르가 우리들에게 유의하도록 요구한 것은 초월적인 질서(transcendent order)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부족이다. 이 초월적인 질서는 인간의 생활 그 자체- 즉 인간의 체험, 상상, 숙고 그리고 행동-를 절대적으로 결정짓는다. 이 초월적인 질서는 신성(the sacred), 성스러운 것(the holy), 근원적 존재(Being) 그리고 하느님(God)과 같이 여러가지로 언급된다. 명칭과 관계없이 신성은 우리에게 말을 걸며, 그리고 우리는 상징들 그리고 상징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설화들(이야기들narratives) 또는 신화들로 이에 응답한다. 바로 이 응답이 인간생활의 모든 차원들에서 인간생활을 구성하고 형성시킨다. </p> <p>리꾀르의 요점을 놓치기 쉽다. 신성이 우리 안에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해석물, 즉 인간의 신앙[종교] 의식[인식]의 산물로 나타난다는 것이 논점이 아니다. 신성은 먼저 우리 안에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과 함께 신성 안에 있다. 신성은 정말로 모든 사람들 안에 있지만, 신성은 그것[신성]의 초월적인 원천으로부터 그곳에서[각 사람] 반사[투영]되거나 상상되는 것처럼 파생적으로만 존재한다. 즉, 우리는 신을 닮았다(theomorphic)거나, 전통적으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p> <p>상징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기능하도록 허용하는 상징들의 특성은 무엇인가? 리꾀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p> <p>&lt;‘상징은 사상을 낳는다.’ 필자가 매우 매력적이라고 발견한 이 금언(maxim)은 두가지를 말한다. 상징은 준다[뭔가를 나타낸다]. 즉, 필자는 의미를 가정하지 않지만, 상징은 의미를 준다[나타낸다]. 그러나 상징이 주는 것은 사상을 위한 어떤 것으로, 즉 생각할 어떤 것이다. 주는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가정한다(positing). 그러므로 이 말[구절]은 모든 것은 이미 수수께끼[불가사의]로 말해졌다는 점을, 그리고 모든 것을 사상의 차원에서 다시 시작하고 또다시 시작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제시한다. 필자가 곱씹에 이해하고 싶은 것은 바로 상징들의 영역에 버려져있는 사상 그리고 가정하고 생각하여야 하는 사상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다.&gt; </p> <p>‘상징이 사상을 낳는다.’ 먼저 주고[나타내고] 그 다음에 가정한다는 것이 이 글의 관심사들에 매우 중요하다. 즉, 기도의 법(lex orandi)이 우선하며, 신앙의 법(lex credenda)는 본질적인 요소이지만 논리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파생적[이차적]이다. 이 두가지 반쪽들 사이의 변증법적인 관계성은 밀접하며 전반적이다. 즉,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할 때, 우리는 이미 상징들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서가 매우 중요하다. 즉, 먼저 주고[나타내고], 그 다음에 생각한다. 바로 이 순서는 우리들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하느님 안에 위치시킨다. 그리고 그 반대의 순서는 아니다. 바로 이 순서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래적인 안셀름적인 특징을 설명한다. 즉,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이해를 뒷받침하는 신앙에 대한 적합한 해석을 추구하는 이해, 이는 교대로 이미 물려받은 것[신앙 이해]을 변경시킨다. 바로 이러한 과정 안에서 그리스도교 설교는 본질적이고 불가분의 역할을 찾는다. 그리고 이 과정은 개인의 생활과 교회의 생활을 통해서 계속된다. </p> <p>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처럼, 성공회신자들에게도 신성이 이처럼 먼저 주어지는 것(givenness)은, 교회에서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 예수를 기억할 때,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표현하는 상징들과 신화적인 이야기들에서 최초로 그리고 가장 완전하게 증명되었다. 바로 이렇게 주어진 상징들과 이야기들이 의례[의식]로 상연되고 기도되고 낭송되며 노래로 불려진다. 이것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성상들(icons)이다. 의미는 그곳에서, 즉 상징들이 이야기들에 결합된 이러한 상징들에서 나타난다. 바로 이러한 상징들과 이야기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중심적이자 결정적이다. </p> <p>상징들의 매우 복합적인 세계 내에서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어느 지점에서 시작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신경에 요약된 것처럼 예수의 사목활동[공생애]과 죽음과 부활의 상징적인 생활에서 시작한다. 이 이야기가 우선권을 갖는다. 다른 이야기들과 신심활동들-예를들면 성인들의 삶과 관련된 것들-은 이 우선권을 가진 상징적-이야기적인 범위(궤도orbit) 안에 편입될 수도 있다. 그리고 정말로 다른 종교들의 상징들과 신화들도 이 범위 안에 편입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들에서 수용된 상징은 그것이 우선권을 갖는 그리스도의 이야기와 일치하는[조화하는] 경우에만 정당한 것으로 수용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조건(given)으로부터 가정하는 일(positing)이 진행되며, 신앙에 대한 사려깊은 해석이 시작된다. </p> <p>우선권을 가진 그리스도의 상징들과 이야기들은 그리스도교회의 전례적인 예배 안에서 기억되고 기도될 때, 가장 근본적으로 성서 안에 살아있다. 각 개인이 성서와 기도를 사용하는 방식은 그리스도교회의 보다 포괄적인 체험에 의존한다. 어떠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나 신학도 그리스도교체험의 이러한 차원의 기본전제(givenness)를 완전히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성공회신앙은 이 점에 대해서 크게 의식하며 매우 강조한다. 바로 이 점이 교회생활에서 렉스 오란디 렉스 끄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a)에 대한 특별한 이해와 함께 공동기도서와 전례를 최우선으로 강조하는 성공회신앙에 체험적 이론적 근거이며, 따라서 그 정당성을 제공한다.</p> <p>성공회신앙이 이러한 체험의 차원을 완전히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하더라도, 성공회신앙은 교회의 생활과 신학을 해석할 때에 상징과 신화 그리고 예배의 중요성이 비젼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것을 너무나 자주 허용하였다.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이는 앞에서 설명한 성공회신앙의 본래적인 특성을 위배하는 것이며, 타협과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질서(order)를 추구하려는 경향 때문에 빠지기 쉬운 위반이다. 그 결과는, 한 개인이나 전통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였을 때에 나타나는 것처럼, 스스로와 다른 것들에 충실하게 기여하지 못하는 창의력의 부족과 산만함이 나타난다. 따라서 20세기의 신학에, 특히 역사학의 분야들(성서, 초기교회, 그리고 전례)에 대한 성공회의 기여도는 매우 크지만, 성공회신학 전반은 정체성과 창의성의 상실로 특징지었다. 20세기초 지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y)에 대한 성공회신앙의 기여는 제한적이었으며, 20세기 중반의 신정통주의신학에 대한 참여는 거의 없었다. 보다 최근으로 지난 30여년 동안에 나타난 신학의 언어학적 그리고 해석학적인 관심사에 대한 성공회신학의 참여는 ‘하느님과의 대화’(God talk)의 타당성에 관심을 가진 이안 램지(Ian Ramsey)와 일부 학자들의 유익하지만 제한적인 연구들로 제한되었다. </p> <p>그러면,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라는 복음서의 명령에 충실하려면, 성공회신학의 나아갈 길(way forward)은 혁명적인 새로운 시작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교회의 생활과 사상에서 잃어버렸던 렉스 오란디 렉스 끄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a)의 중요성에 대한 비젼을 복원(재이해reappropriation)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p> <p>4. 상징은 사상을 낳는다: 성공회신학에서 lex orandi, lex credendi의 복원[재이해]</p> <p>성공회신앙 안팎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은 렉스 오란디 렉스 끄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a)의 과정에 대한 참여에 근거한 안셀름식 신앙운동의 필요성을 지지하는 여론이 나타났다. 이 과정을 요약한 경구-또는 ‘태그’-는 폴 리꾀르의 ‘상징은 사상을 낳는다’이다. 이 경구는 어떤 의미에서 라틴어 태그를 다시 진술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된 거대한 영성적인 모험을 (우회한 것이 아니라) 헤쳐나온 아래의 방식들을 명확하게 또는 암시적으로 설명하는 형식으로 이 경구를 다시 진술한 것이다.</p> <p>첫째로, ‘상징은 준다[나타낸다]’: 즉, 우리는 상징들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발견한다.’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들을 인간으로 의식할 때, 우리가 우리의 모국어 내에 깊이 스며있는 신화들의 이야기 구조에 서로 연결된 일련의 상징들(a matrix of symbols)로부터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상징들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정체성과 가치와 자존심(self-worth) 그리고 질서에 대한 인식을 우리들에게 준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상징들은 우리에게 우리의 인간성(humanity)을 준다. 따라서 상징들이 우리에게 우리의 자아를 줄때, 상징들은 선행적 은총(prevenient grace)의 현현들(표현들manifestations)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상징들을 발견하다. 이는 상징들이 우리를 먼저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증언(testimony)이다. 즉, 우리를 발견한 은총은 신성(the sacred), 즉 하느님이며; 상징들은 신의 현현들(theophanies)이며; 이 하느님의 특별한 상징들과 신화들은 성서의 그것들로 예배하는 교회에 의해서 수용되고 살아 숨쉰며; 바로 이러한 상황이 성공회가 믿음보다 기도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기도문을 둘러싼 상징들이 신의 현현들이기 때문이다. </p> <p>한편으로 ‘상징은 준다[나타낸다]’라는 구절에 의해서 지적된 이 첫번째 확언은 교회가 처음부터 말했던 것을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이제 이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형성하는데 인간적인 주제와 언어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정하는 방식으로 확언된다. 이러한 역할의 인정은 18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서구의 철학과 심리학이 인간적인 주제와 언어에 몰두[집중]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더구나 기도의 우선성[선행성]을 확언하는 이러한 새로운 방식은 지난 한세기 동안의 종교사(history of religions) 연구의 덕택이었다. 특히 종교사 연구에서 성공회 신자들은 포용성과 공감에 대한 그들의 기대 때문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종교사연구는 우리들에게 모든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을 형성하는데 상징들과 신화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깨닫게 하였다. 이러한 중심적인 역할에 대한 인식과 함께, 상징들과 신화들의 다원적 성격과 역사적으로 한정된 성격에 대하여 철저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특정한 신앙적인[종교적인] 전통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전통들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상징들과 신화들이 존재한다. 상징은 주며[나타내며], 그리고 상징은 우리의 통제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들 그 자체인 역사적인 과정에서 또다시 준다[나타낸다]. 그러므로, 어느 한 상징, 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상징처럼 하나의 상징체계가 다른 것들로부터 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어느 한 전통의 상징들이 다른 전통의 상징들에 대하여 확고한 지배권을 주장할 수도 없다. 오히려 한 전통 안에 있는 상징들과 다른 전통들의 그것들은 서로를 비판하고 보완하는 대화적인 관계에 있다. 이는 상징적인 생활 내에 자기비판적인 원리가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따라서 한 특정한 상징적인 전통에 대한 특권적인 지위를 요구하고 추구하는 것은 그러한 전통에 참여한 자들에게는 불가피하고 필수적이지만, 그러한 요구는 인간적 증언에 기초하며, 그리고 종말론적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증언들의 지속적인 갈등이 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한 완전한 인식에서만 가능하다. 스티븐 사익스(Stephen sykes)는 이 점을 그리스도교와 관련하여 현명하게 지적한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수반하는 것들은 본질적으로 논쟁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은 하나의 [만들어진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며, 더구나 그 과정은 비판에 의해서 촉발되는 끊임없는 상호대화(dialectic)를 수반한다’고 주장하였다. </p> <p>둘째로, ‘상징은 사상을 낳는다’: 즉, 사상이 있으려면, 반드시 생각할 대상[실재물, something]이 있어야 한다. 생각되어야 할 것[대상]은 상징들 즉, 신의 현현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에 의해서 새로운 우리 자신들을 발견한다. 상징들은 우리에게 말을 걸며, 우리의 반응을 요구한다. 우리의 반응은 상징들에 대한 생각이다. 이 생각은 처음에 상징들을 의례(의식ritual)와 신화의 이야기식의 구조에 위치시키는 형식을 취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인간활동의 모든 영역에 대한 이러한 양식들[예식들]과 상징들의 중요성에 관하여 신학적인 숙고를 진행한다. 바로 이 과정이 신앙적인[종교적인] 자각[인식, 의식]을 구성[형성]한다. 모든 인간적 생각은 이러한 자각[의식]에 뿌리를 두며, 이러한 뿌리성을[토대를] 유지할 때에만 그 생명력[활력]을 유지한다. 사익스는 보다 구체적으로 ‘공동체적인 예배(상징들과 예식들과 신화들이 계속적으로 반복된다)는 [...] 교리, 윤리, 신화, 사회적 표현, 의례[예식]적 처험 그리고 내적인 체험이 통합적으로 결합되는 현장[무대]이다’고 진술하였다. </p> <p>이 모든 것들은 렉스 오란디(lex orandi)와 관련하여 렉스 끄레덴디(lex credenda)의 위치를 다시 서술하는 한가지 방식이지만, 이는 다르게 다시 서술된다. 이제 기도와 믿음(사상) 둘다의 ‘법’은 보다 적합하게 ‘과정’ 또는 ‘생활’로 명명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라틴어 인용구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제야 분명하게 표현된다. 이 점은, 현대의 서구학자들이 인간적인 주제, 언어, 그리고 비판적인 역사의식의 태동에 몰두하며 서로 밀접한 관계속의 발전을 통해서 분명하게 표현되는 것은 당연하였다. (이러한 발전들 자체는 성서적, 그리고 특별히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의식의 종말론적이며 성육신적인 상징들에 근거한다. 하지만 이 주제는 여기서 논의할 수 없다.) 상징들이 사상을 낳는 것처럼, 여기서 모든 것은 과정이다. 이 과정은 상징에 내재된 의미의 실질적으로 무한한 측면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개조시키며, 거꾸로 상징들이 새로운 사상을 낳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 과정은 계속된다. 비록 이 사상은 이를 만들어낸 상징들에서 그 뿌리성[토대 근거]를 잃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과정은 새로운 것, 미래의 것에 종말론적으로 지향한다. 궁극성과 완성에 대한 모든 주장들은 의심의 법칙에 지배되며, 과정은 계속된다. </p> <p>5. 성공회신앙에서 교회, 성사들, 그리고 사목활동에 대한 영향</p> <p>앞의 탐구는 성공회신앙이 신학적인 진술과 탐구를 위한 원천이자 활동무대로 일반적으로는 예배에 대하여 그리고 특별하게는 성사들을 강조하는 것을 결정적으로 확언한다. 상징들이 낳는 사상은 무엇보다도 근본적으로 예배와 예식(rite)의 상황에서 발생한다. 한 공동체 안에 있는 개인들은 상징이 나타내는 거룩함의 현존에 응답하고 내면화하려고 시도한다. 렉스 오란디 렉스 끄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a)에 대한 이러한 평가들이 교회, 성사들 그리고 사목활동(ministry)에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지면의 제한으로 간단하게 살펴보자.</p> <p>5.1. 교회</p> <p>한편으로 개인보다는 교회와 교회의 예배규정을 우선시[강조]하는 것은 분명하게 확언되었다. 우리를 발견하고 우리에게 우리의 인간성을 부여하는 상징들의 수여자는 바로 의례로 형성된 교회이다. 이것은 급변하는 사회적 추세들과 무비판적인 개인주의 사이에서 갈팡지팡하는 사회에서 종종 인기없는 메세지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고 똑같은 이유들 때문에, 교회는 인간생활의 목적과 이러한 목적을 얻는 수단들에 대한 최종적이고 완전한(우상적인) 대답들을 제시한다는 주장을 잃어버렸다. 교회는 신의 현현들인 상징들의 과정을 통한 표현(processive unfolding)을 통제하지 못하며, 오히려 이것에 의해서 형성되고 이에 응답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과 신학적인 공동체는 교회의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상징들과 신화들은 변하지 않지만, 상징들과 신화들로부터 나오는 교리들과 의례들, 교회법 등은 계속적으로 변화하며 항상 잠정적이다. 따라서 상징들로부터 나와 상징들 자체로 나아가고 있는가, 이러한 충실성(fidelity)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신학의 끊임없는 과제이다. 성공회신앙은 이 과제에 대한 관심을 과거보다는 덜 제한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p> <p>5.2. 성사들</p> <p>상징들-하느님의 현현들-은 이것들이 위치한 신화적인 이야기들과 함께 구약과 신약의 성서들에서 가장 포괄적이며 권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성서들은 의례적으로 형성된 교회공동체에 의해서 전달되고, 독서되고, 그리고 지속적으로 다시 이해된다. 그러므로 성서보다 성사들에 우선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경향(전례에 대한 지나친 관심, 지나친 예식활동, 설교의 강조나 축소를 통해서 나타난다), 또는 성서를 성사들보다 우선적인 위치에 놓으려는 경향(전례 축소주의, 의례에 대한 무관심, 인간생활의 지성화를 통해서 나타난다)은 똑같이 렉스 오란디 렉스 끄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a)-또는 ‘상징이 사상을 낳는다’-가 주는 통찰력들에 충실한 것이 아니다. 성공회신앙은 가장 특징적으로 전자의 경향에 굴복하였다. 하지만 최근의 전례학 연구는 이러한 불균형을 교정하려고 매우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이 두가지 경향들-둘다 기형이다-은 현대적인 인식에 대하여 끊임없이 나타나는 유혹들이다. </p> <p>5.3. 사목활동 </p> <p>렉스 오란디 렉스 크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a)는 그리스도교 사목활동에 전반적인 영향을 주는 세가지 기본적인 통찰력들을 생산한다. 첫째로, 일반적으로 인간의 생활 그리고 특별히 그리스도교의 생활은 싱징적인 생활이다. 즉, 우리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상징들 안에서 그리고 상징들을 통해서 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상징들을 통해서만 생활의 완전성과 용기 그리고 기쁨을 얻기 때문이다. 둘째로, 상징들은 하느님의 현현들이며 하느님의 선행적 은총을 모든 사람들에게 부여한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살고 있다. 개인들은 상징들을 거부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지만, 누구도 상징들로부터 배제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상징적인 생활, 즉 은총의 생활은 전향적인 또는 종말론적인 생활이다. 결과적으로 ‘진리’를 구성하며 받드시 믿어야 하는 것, 또는 ‘유익한 생활’을 구성하며 받드시 복종하여야 하는 것에 대한 최종적, 배타적인 판결들은 단지 우상적이라고만 판단될 수 있다.</p> <p>참고문헌</p> <p>Clarke, W. K. L. (ed.), Liturgy and Worship: A Companion to the Prayer Books of the Anglican Communion. SPCK, London, 1932.</p> <p>Cross, F. L. (ed.),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UP 1958, 3rd edn, OUP 1997.</p> <p>Spinks, B., ‘Two Seventeenth Century Examples of “Lex credenda lex orandi”: The Baptismal and Eucharistic Theologies and Liturgies of Jeremy Taylor and Richard Hooker’. Studia Litugica 21.1 (1991) pp. 165-89.</p> <p>Stevenson, W. T., ‘Is There a Characteristic Anglican Theology?’ in The Future of Anglican Theology. Edwin Mellin Press, New York and Toronto, 1984.</p> <p>Sykes, Stephen W., The Identity of Christianity. SPCK, London/Fortress Press, Philadelphia, 1984.</p> <p>Trevelyan, G. M., History of England. Longman, Green and Co., London, 1945.</p> <p>Wainwright, G., Doxology: The Praise of God in Worship, Doctrine and Life. OUP, New York, 1980; Epworth Press, London, 1982.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