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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최근 토론 주제</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link>
<description>A Korean Anglican Theology & Liturgy Forum</description>
<language>en</language>
<pubDate>Thu, 09 Sep 2010 12:32:08 +0000</pubDate>

<item>
<title>viamedia on ""치유 예식이 있는 성찬례"에 대하여"</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7#post-1062</link>
<pubDate>수, 28 7월 2010 09:55:52 +0000</pubDate>
<dc:creator>viamedia</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62@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작년부터 트위터를 이용하는데, 우리 성공회 신부님들을 가끔 뵙니다. 그분들 가운데, 원주 교회(대전교구)에 계신 국충국 신부님께서 &#34;Healing Eucharist&#34;에 대한 궁금증과 고민을 던져 주셨습니다. 그 이후 오간 대화를 잠시 여기에 옮겨 놓고, 이에 대한 대화의 장을 마련하려고 몇 마디 보탭니다. 참여와 대화 부탁합니다.&#60;/p&#62;
&#60;p&#62;&#60;strong&#62;차례&#60;/strong&#62;&#60;br /&#62;
트위터 대화의 내용&#60;br /&#62;
요약&#60;br /&#62;
의미의 확장&#60;br /&#62;
전례 색깔&#60;br /&#62;
성찬례에서 위치&#60;br /&#62;
안수하는 방법&#60;br /&#62;
도유하는 방법&#60;br /&#62;
안수와 도유 이후&#60;br /&#62;
성찬의 전례와 영성체&#60;/p&#62;
&#60;p&#62;&#60;strong&#62;트위터 대화의 내용&#60;/strong&#62; (주: 트위터의 성격 상 대화가 곧바로 대응하지 않으니, 맥락을 따라 읽으셨으면 합니다.)&#60;/p&#62;
&#60;p&#62;cookcg (국충국 신부)&#60;/p&#62;
&#60;p&#62;Healing Eucharist 가 뭔가요? 치유 은사집회 같은 것인가요? 다른 나라 교회를 보니, 일 주일에 한 번은 Healing Eucharist 가 있던데, 궁금합니다. 치유기도를 포함한 미사? 도유? 혹은 안수?&#60;/p&#62;
&#60;p&#62;주중에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모든 미사 참여자에게 안수기도를 통한 치유와 회복의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는 service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품식때만 할 것이 아니라...&#60;br /&#62;
(8:42 AM Jun 8th)&#60;/p&#62;
&#60;p&#62;viamedia (주낙현 신부)&#60;/p&#62;
&#60;p&#62;@cookcg 교단/공동체 맥락에 따라 그 이해가 달라질 겁니다. '치유'에 대한 이해가 다르니까요. 성공회(미국)의 경우 주중에 치유 기도 예배나 미사를 드립니다. 한국에서 언뜻 떠오르는 '치유예배'와는 전혀 다릅니다.&#60;/p&#62;
&#60;p&#62;@cookcg 좋은 시도라 생각합니다. 설교(신경-생략 가능, 신자들의 기도) 후, 평화의 인사 전에 초대하여 이마에 기름을 바르며 안수하고 기도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함께 한 신자들도 모여 어깨에 손을 얹으며 참여하면 좋을 것입니다.&#60;br /&#62;
(3:43 PM Jun 8th)&#60;/p&#62;
&#60;p&#62;cookcg (국충국 신부)&#60;/p&#62;
&#60;p&#62;@viamedia 일전에 말씀드렸던 치유성찬례가 수요일 저녁에 있을 예정입니다. 특정문은 예식문에 있고, 병자치유 축복문은 '축복기도서'(윤바우로주교님)를 이용할 계획입니다. 제의 색깔은 어떤 것이 좋을까요?  &#60;/p&#62;
&#60;p&#62;@viamedia 치유성찬례는 그것에 맞게 죄의 고백 부분이 좀 더 강조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 공도문의 예비기도 부분에 있는 사제와 신자가 서로 주고받는 사죄기도가 적당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60;br /&#62;
(5:22 AM Jul 26th)&#60;/p&#62;
&#60;p&#62;viamedia (주낙현 신부)&#60;/p&#62;
&#60;p&#62;@cookcg 1. 성찬례 맥락에 두신다면 &#34;치유 예식과 성찬례&#34; 혹은 그와 비슷한 표기가 더 나을듯 하고요. '병자 치유'라고 부가 해석된 번역 제목을 피하고 '치유'라는 말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cf. BOS 1994.&#60;/p&#62;
&#60;p&#62;@cookcg 2. 한편, 전례 색깔은 통상 해당 절기에 따릅니다. 치유를 '조병성사'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의 맥락에 종속시키지 않고 '일상'에서 좀 더 넓게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에 따라 참회를 부각시킨다면, 자색을 쓸 수도 있겠습니다.&#60;/p&#62;
&#60;p&#62;@cookcg 3. 참회 예절은 필요에 따라서(사목자의 결정), 혹은 신자들의 요구에 따라서 사용할 수도 있겠으니, '예비기도'(1965)의 사용도 그 맥락에서 쓰기에 좋다고 생각합니다(현대 어투로 고치는 일 필요).&#60;/p&#62;
&#60;p&#62;@cookcg 4. 한편, 좀 더 배려할 부분은 '안수하며 기름을 바르는 일'입니다(위치는 설교와 평화의 인사 사이). 사제뿐만 아니라 참여자 모두를 초대하여 어깨에 손을 얹고 안수 기도에 참여토록 하고, 향이 좋은 기름을 쓰길 바랍니다.&#60;/p&#62;
&#60;p&#62;@cookcg 이후, 이 치유 예식에 대해 신부님의 생각과 준비 과정, 그 첫 시도와 실제를 [전례 포럼]에서 나누어 주셨으면 합니다. 많은 분들이 큰 배움을 얻을 것입니다. 저도 거기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덧붙이겠습니다.&#60;br /&#62;
(Mon Jul 26 2010 12:33:54 (PDT) )&#60;/p&#62;
&#60;p&#62;&#60;strong&#62;요약&#60;/strong&#62;&#60;br /&#62;
위 내용을 다시 정리하고, 대화를 위한 논의 점을 제공하기 위하여 몇 마디 덧붙입니다.&#60;/p&#62;
&#60;p&#62;치유 예식과 함께 하는 성찬례: 외국의 여러 성공회에는 이른바 &#34;치유 예배&#34;가 널리 퍼져 있습니다. 대체로 주중의 미사(성찬례)를 이 '치유'의 주제로 정례화한 것입니다.&#60;/p&#62;
&#60;p&#62;성공회의 '치유 예식'은 대체로 성찬례 맥락 안에 자리 잡고, 안수(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하는 행동)와 도유(기름을 붓거나 바르며 축복하는 행동)를 합니다. 도유가 성직 서품 성사나 조병 성사에만 제한되어버린 역사적 경험이 있으나, 다시금 다른 성사(세례/견진)와 더불어 치유 예배의 맥락에서도 쓰이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좋은 전통의 바른 회복이라 할 만합니다.&#60;/p&#62;
&#60;p&#62;한국 성공회 기도서(2004)의 '조병 예식'은 전통적인 '조병 성사'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치유 예배로 곧바로 적용하기에 불편한 점이 있지만, 부분적으로 생략하고 상황의 필요에 따라 부가하여 치유 예배를 구성하는 내용으로 쓸 수 있습니다.&#60;/p&#62;
&#60;p&#62;국충국 신부님께서는 대전교구에서 성공회 출판부를 통해 출판한 [축복 기도서](1999)의 '공기도 때의 병자 치유 축복'(92-99쪽)을 바탕으로 하고, 공도문(1965년) 미사 예비기도의 내용을 '참회 예절'로 부가하여, 치유 예식이 있는 성찬례를 구성하셔서 신자들과 함께 하겠다는 생각을 나눠 주셨습니다. 좋은 기획이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축복 기도서]는 대체로 미국 성공회 [사목 예식서](BOS, 1994)의 번역판입니다.&#60;/p&#62;
&#60;p&#62;&#60;strong&#62;의미의 확장&#60;/strong&#62;&#60;br /&#62;
기존의 '조병 성사'라는 전통적인 이해에서 구체적인 질병을 위해서만 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봅니다(이런 제한은 전형적인 서방 교회의 영향입니다. 동방 교회는 이런 제한을 거의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치유'는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고뇌, 생각의 혼란 등과 같은 심적인 무게를 함께 나누고, 하느님의 어루만지시며 고치시는 손길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치유 예식을 일상화하고 정례화하는 일은 의미가 큽니다. 안수와 도유도 이렇게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확대되면 좋을 것입니다. &#60;/p&#62;
&#60;p&#62;&#60;strong&#62;전례 색깔&#60;/strong&#62;&#60;br /&#62;
통상 해당 절기를 따릅니다. 치유는 일상적인 삶에서 지속되는 문제이니, 일상적 전례력(교회력)의 색깔을 바꿔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참회 예절을 통해서, 참회의 의미를 좀 더 부각하는 것이라면, 자색을 써도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cf. 공도문, 1965). &#60;/p&#62;
&#60;p&#62;&#60;strong&#62;성찬례에서 위치&#60;/strong&#62;&#60;br /&#62;
치유 예식을 독립적인 예배로 사용할 수 있으나, 성찬례의 맥락에서 사용한다면(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설교 뒤(신경과 신자들의 기도 생략 가능)에 두고, 끝나면 곧바로 평화의 인사로 넘어가면 좋을 것입니다. &#60;/p&#62;
&#60;p&#62;&#60;strong&#62;안수하는 방법&#60;/strong&#62;&#60;br /&#62;
집전(집례) 사제는 안수를 받고자 하는 이를 초대하여, 그의 이름을 부르며(친밀감)을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합니다. 이때, 사제만 여기에 참여할 것이 아니라, 해당 전례 혹은 예배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제대 앞으로 초대하여, 안수받는 이의 어깨에 손을 얹어 그를 위한 기도와 축복에 참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성직 서품식의 안수와 같은 형태). 치유 예배의 성사적 특징 가운데 중요한 한 차원은 '손이 닿아 어루만지는 일'입니다. 공동체의 손길을 통해서, 하느님의 치유의 힘이 전해지니, 우리는 그 안에서 모두 '성사'를 이룹니다.&#60;/p&#62;
&#60;p&#62;&#60;strong&#62;도유하는 방법&#60;/strong&#62;&#60;br /&#62;
안수가 끝나면, 바로 이마에 기름을 바르거나, 머리에 부어서(기름이 귀하니 쉽지 않지요) 도유를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좋은 향기가 나는 기름을 썼으면 합니다. 성유는 원래 구별이 없었으나 그 사용례에서 세 가지로 분리되었습니다(특히 서방 교회 전통에서). 게다가 조병성사에서 쓰는 성유는 향을 넣지 않는 관습이 퍼졌는데, 아마도 병자를 위한 배려였으리라 생각하나, 지금은 따를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성유의 좋은 향이 도유받은 이에게 남아 넘쳐서 '그리스도의 향기'로 남는 성사가 되었으면 합니다. 특히, 치유 예식을 위한 성유는 사제가 축복하여 쓰는 오랜 전통이 있었으니, 참조할 만합니다.&#60;/p&#62;
&#60;p&#62;&#60;strong&#62;안수와 도유 이후&#60;/strong&#62;&#60;br /&#62;
치유 예식이 끝나고 성찬례로 이어진다면, 그 모인 자리에서 곧바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면 좋을 것입니다. &#60;/p&#62;
&#60;p&#62;&#60;strong&#62;성찬의 전례와 영성체&#60;/strong&#62;&#60;br /&#62;
성찬의 전례에서는 성찬기도 4양식(기도서 2004)을 쓰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영성체를 할 때는, 안수와 도유를 받은 이를 먼저 초대하여 영성체를 하도록 배려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영성체 후 기도는 그 '치유'의 맥락에서 마련된 기도를 함께 하고, 축복 기도도 그 맥락에서 선택하면 좋을 것입니다.&#60;/p&#62;
&#60;p&#62;여기저기서 경험하고 고민하던 바를, 국 신부님의 시도에 자극을 받아 적어 보았습니다. 좀 더 다양한 대화와 경험을 통해서,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더욱 깊이 경험하고, 신자들을 도울 수 있었으면 합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aashish on "가입 인사드립니다."</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9#post-1076</link>
<pubDate>화, 24 8월 2010 18:55:43 +0000</pubDate>
<dc:creator>aashish</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76@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안녕하세요?&#60;br /&#62;
바울로입니다.&#60;br /&#62;
가입 인사드립니다.^^&#60;br /&#62;
모든 분들이 주 안에서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Elyot on "번역: 코프 주교 서신 - "한국의 영국 성공회 평신도들에게""</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0#post-1041</link>
<pubDate>금, 02 7월 2010 17:16:40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41@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번역 프로젝트의 자료들은 제가 섣불리 다룰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되어서, 프로젝트 캔터베리 웹사이트 (http://anglicanhistory.org) 의 글들 가운데 대한성공회와 관련 깊은 것을 골라 시도해 보았습니다. 시간이 나는대로 계속 보완하겠습니다. &#60;/p&#62;
&#60;p&#62;어색하거나 잘못된 부분들을 알려주시면 곧 바로 잡겠습니다.&#60;/p&#62;
&#60;p&#62;---------------------------------------------------------------------------------------&#60;/p&#62;
&#60;p&#62;원문: &#60;a href=&#34;http://anglicanhistory.org/asia/kr/corfe.html&#34; rel=&#34;nofollow&#34;&#62;http://anglicanhistory.org/asia/kr/corfe.html&#60;/a&#62;&#60;/p&#62;
&#60;p&#62;한국의 성공회&#60;/p&#62;
&#60;p&#62;주교 C. J. 코프&#60;/p&#62;
&#60;p&#62;서울, 1905.&#60;/p&#62;
&#60;p&#62;소개&#60;/p&#62;
&#60;p&#62;한국의 영국 성공회 평신도들에게&#60;/p&#62;
&#60;p&#62;한국 관구 성공회의 사제단과 평신도들에게&#60;/p&#62;
&#60;p&#62;선교직에 있는 이들에게&#60;/p&#62;
&#60;p&#62;관구의 사제단에게&#60;/p&#62;
&#60;p&#62;성찬식 거행의 관구적 용례&#60;/p&#62;
&#60;p&#62;선교의 두폭화&#60;/p&#62;
&#60;p&#62;성경과 교리 교육&#60;/p&#62;
&#60;p&#62;공동 기도서와 전례 번역&#60;/p&#62;
&#60;p&#62;성찬&#60;/p&#62;
&#60;p&#62;교리학습자들의 인가&#60;/p&#62;
&#60;p&#62;교회 훈련&#60;/p&#62;
&#60;p&#62;---------------------------------------------------------------------------------------&#60;/p&#62;
&#60;p&#62;원문: &#60;a href=&#34;http://anglicanhistory.org/asia/kr/corfe1.html&#34; rel=&#34;nofollow&#34;&#62;http://anglicanhistory.org/asia/kr/corfe1.html&#60;/a&#62;&#60;/p&#62;
&#60;p&#62;한국의 성공회 평신도들에게.&#60;/p&#62;
&#60;p&#62;1899년,6월 25일,서울.&#60;/p&#62;
&#60;p&#62;사랑하는 형제 여러분,&#60;/p&#62;
&#60;p&#62;최근에 강화와 서울에서 신자들이 세례를 받았고, 더불어 신자 가족 전체가 그리스도의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되어,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실한 감사함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계 곳곳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여러분들이 근 십년동안 계속해 온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60;/p&#62;
&#60;p&#62;그러나 이러한 신실한 감사의 마음과 함께, 한층 무거워진 책임감도 뒤따라야 하겠습니다. 이 책임은 무엇보다도 저와 사제단이 잘 의식하고 있어야 하겠지만,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또한 나누어 가져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국 내의 성공회가 소수 유럽인들만의 것이었던 동안에는, 왜 우리는 교회와 기도소에서 거르지 않고 예배를 드리는가, 우리의 다른 이들에 대한 책임은 &#34;함께 있지 않은 이들을 향해 부지런히 나아가는 것&#34; 으로 국한되었습니다. 삶 속에서의 지속적인 실천을 통하여, 우리 종교의 드높은 진리와 힘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두 달 동안에 우리의 의무는 즉시 더욱 분명하고 더욱 진지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인하여, 한국인들 - 남자, 여자, 어린이들 - 은 &#34;믿음의 가정&#34; 안에 받아들여졌고, 우리와 함께 &#34;신적 본성의 담지자&#34; 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서로 다른 직분들을 본다면, 이제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들에게 감사함으로 가득 채워주시는 하느님, 그리고 우리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우리와 그들 간에는 큰 차이점이 있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가장 어린 형제들이며, 마치 사도 바울이 말한 &#34;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34; 과 닮아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형성되었으며, 그들의 경험은 이교도 세계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이제 막 그들은 미신의 어둠으로부터 나와 그리스도 복음의 밝은 빛 속에 섰으며, 오랫동안 형성되어온 그리스도교적 인물들의 사례들에게서 모범을 구하고자 할 것입니다. 처음에 깊은 호기심을 가지면서도 우리들을 바라보앗던 그들의 의심스러운 눈길들은 이제 공감과 격려를 갈망하며, 또한 수많은 세부적인 가르침들을 갈망하는 것으로 바뀌어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의 선배들인 우리들로부터 보다 자세한 교육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60;/p&#62;
&#60;p&#62;바로 이 부분에, 제가 말씀드린 우리들 모두의 한층 무거워진 책임이 있습니다 - 그 책임은 나의 형제인 여러분 모두가 지고 있으며, 이는 사제들에게보다 여러분에게 더욱 무겁게 지워져 있습니다. 우리의 한국인 그리스도인들은 평신도들입니다. 여러분들처럼 그들도 우리의 입으로부터 구원의 길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들의 새로운 의무들이 여러분들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여러분이 주장할 수 있는 어떠한 특권도 그들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형제로서 환영하고자 한다면, 만약 우리가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그들에게 주려고 한다면, 신앙 교육이 바로 그것인데,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 - 그렇지 않습니까? - 즉 우리들 각각의 신심생활과 예배생활을 그들이 처음으로 배우는 그리스도교회 정식 신자들의 신심생활과 예배생활과 일치하는 생활로 만들어가도록 요청받고 있는 시점인 것입니다. 보편적 교회의 특권들을 향유하는 불변의 조건인 이러한 규칙들은 그들에게 낯선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교 전통의 나라에서 성장한 우리들은 이러한 규칙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우리의 지식에 따른 것입니까? 우리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하인들과 교사들, 친구들, 그리고 지인들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규칙들을 지켜야 하며 똑같은 특권들을 향유할 권리를 갖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무경험을 고려할 때, 그들은 여러분에게서 길잡이를 찾으려 하고 여러분이 놓는 예를 따르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 여러분이 선택한 이 나라에서, 하나이며 나뉘어지지 않은 보편적인 교회의 전통을 영속시키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대단한 특권입니다.&#60;/p&#62;
&#60;p&#62;이제 몇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것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이 한국인 신자들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주는 문제들이며, 또한 새로운 열정으로 시작하는 그들의 신앙생활이 우리들에게 유익한 영향을 주어야 하는 분야들입니다.&#60;/p&#62;
&#60;p&#62;교리 학습자들을 위한 교리 문답 제5권은, 여러분들이 알고 있듯이, 영국 성공회의 신자들인 우리들의 생활을 규정짓도록 배운 신앙생활들의 개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에 대하여 한국인 신자들이 배우는 것은, 여러분들이 배웠던 것과 똑같은 것으로, 영국 성공회가 성서와 기도서, 초기 교회의 보편적 전통들에 근거한 것으로 성공회의 공식적인 신앙선언문들에서 가르쳐운 것들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그들이 여러분들이 배웠던 것들과 다르게 배운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60;/p&#62;
&#60;p&#62;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교리학습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금식생활과 자선활동은 하느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명하신 의무로, 영국 성공회도 신자들에게 지키도록 요구한다고 말입니다. 죄의 고백과 사면은 모든 신자들이 지켜야 하는 의무입니다. 죄많은 영혼이 성사적인 죄의 고백과 개인적인 죄의 용서의 확신이 더욱 많이 필요할 때, 이들에 대한 축복은 필요에 따라 교회의 모든 신자들에게 해당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과된 의무와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하느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며, 또한 가시적인 일치에 대한 최고의 증언이자 연속적인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60;/p&#62;
&#60;p&#62;이와 같은 근본적인 사안들에 대하여, 우리의 사제들이 교리학습자들에게, 우리 본국의 형제들을 특징짓고 자주 동요시키기도 하는, 의견과 신앙생활의 다양성을 이곳에서 또한 조장하고 반복하리라고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의 세례 성사를 9년동안 준비하면서, 우리의 가장 행복한 봉헌적 생활은 형식과 정신의 통일을 이루었으며, 저는 이것이 교회의 역사 전체에서도 정말 유례가 없는 일이리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잘 고려되고, 잘 시행되었으며, 잘 증명된 통일성에서, 우리의 한국인 형제들은 그 풍부한 혜택을 누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인하여, 9년동안 우리가 “가르침과 친교” 의 오순절적 합일을 유지하였다면, 이제는 그 어느때보다도 더, 우리 모두에게 허락된 “위대한 은사” 를 부지런히 사용함으로써, 날마다 “주 예수의 부활을 목격” 하는 가운데 오순절적인 “힘” 을 보일 것입니다.&#60;/p&#62;
&#60;p&#62;성사적 고백&#60;/p&#62;
&#60;p&#62;성사적 (일반적과 구별되는) 고백은, 우리 본국의 형제들이 기도서에서 보장된 자유를 누리려 했을 때 부딪혔던, 그러한 어려움들을 우리의 한국인 형제들에게 가져다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일의 감사 성찬례를 준비하는 신자들과 죽음을 앞두고 있는 병자들에게 주는 권고를 한국인들도 듣게 될텐데, 본국의 소박한 이들을 혼동시키고 있는 쓸데없는 논란들은 여기 동반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러하듯이 그들에게도, 성사적 고백이 &#34;강제적&#34; 인 성격을 띤다면 이는 개인의 양심 때문이지, 사제가 강요하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사제는 &#34;권고하고,&#34; &#34;움직이며,&#34; 그리고 나서 그의 사제직을 집행할 사람들, 즉 그에 의하지 않고는 &#34;그 자신의 양심을 잠재울&#34; 수 없는 이들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이 관구의 평신도들은 지금까지, 성사적 고백이 한편으로는 우리가 소홀히 한 바도 아니며 다른 한편으로는 거룩한 성사를 받기 위한 준비로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사제단이 요구한 바도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60;/p&#62;
&#60;p&#62;교회 훈련&#60;/p&#62;
&#60;p&#62;이와 밀접히 연관된 것이 교회 훈련의 문제입니다. 참회 예식의 서문을 작성한 그리스도 안의 우리 교부들은 초대 교회의 훈련이 실전된 것을 안타까워 했으며, 영국의 우리 형제들은 그것이 복구되도록 지금도 해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본국에서 그것의 복원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무엇인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이 &#34;복구&#34; 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의 정착을 가로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저는 봅니다. 동시에 저는, 미래의 한국 성공회 주교회의가 어떤 훈련 규정들을 그들이 따를 수 없겠다고 발표할 때, 여러분의 동의를 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여러분이 이 나라에서 이방인이지만, 여러분의 권리들은 조약에 의해, 여왕의 신민이자 영국 성공회의 신자로서 보장되어 있습니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Elyot on "번역:  [지면 논쟁 연재] 성경은 동성애에 반대하는가?"</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6#post-1051</link>
<pubDate>금, 09 7월 2010 15:25:32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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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60;p&#62;Is the Bible anti-gay?&#60;/p&#62;
&#60;p&#62;Is there justification in scripture for the row that is splitting the Anglican Communion apart?&#60;/p&#62;
&#60;p&#62;guardian.co.uk, Monday 14 December 2009 09.00 GMT &#60;/p&#62;
&#60;p&#62;As the Anglican Communion lurches deeper into schism, with one part electing partnered gay people as bishops, while another urges that they be hanged, both sides claim the Bible is on their side. So what does it say, and can it reasonably be read as urging tolerance? These questions have, admittedly, been ground almost to death in the last 20 years. But there are still people for whom they come as a surprise: what should they be told?&#60;/p&#62;
&#60;p&#62;Monday's response&#60;/p&#62;
&#60;p&#62;Theo Hobson: It's anachronistic to call ancient Israelite culture anti-gay. In any case, Christians must keep their moral thinking mobile&#60;/p&#62;
&#60;p&#62;Wednesday's response&#60;/p&#62;
&#60;p&#62;Davis Mac-Iyalla: The prejudice against gay people among conservative Christians is a cultural attitude not reflected in Jesus' teachings&#60;/p&#62;
&#60;p&#62;Thursday's response&#60;/p&#62;
&#60;p&#62;John Richardson: The short answer is that the Bible is anti-gay. But this doesn't necessarily mean what we take it to&#60;/p&#62;
&#60;p&#62;Friday's response&#60;/p&#62;
&#60;p&#62;Judith Maltby: The Bible can be read in many different ways. The church's confusion about sexuality has its roots elsewhere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Elyot on "번역: "변증론자 이글턴" &#60;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62; 서평"</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3#post-1048</link>
<pubDate>금, 09 7월 2010 13:03:14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48@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원문: &#60;a href=&#34;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belief/2010/jan/08/religion-eagleton-atheism-progress&#34; rel=&#34;nofollow&#34;&#62;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belief/2010/jan/08/religion-eagleton-atheism-progress&#60;/a&#62;&#60;/p&#62;
&#60;p&#62;변증론자 이글턴&#60;/p&#62;
&#60;p&#62;테오 홉슨1)&#60;br /&#62;
가디언&#60;br /&#62;
2010년 1월 9일&#60;/p&#62;
&#60;p&#62;나온지 거의 일년 정도나 지난 책에 대해 뒤늦게 언급하게 되어 안됐지만, 나는 테리 이글턴2) 의 &#38;lt;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38;gt; 을 최근에 읽어보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이 근래에 나온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교 변증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 그 저자가 &#34;그리스도인&#34; 이라는 호칭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60;/p&#62;
&#60;p&#62;이 책은 도킨스와 히친스3) 를 논박하고 있다; 그 안에는 합리성에 대한 편협한 부르주아적 해석, 그리고 신앙은 진보의 과정에서 계몽을 통해 무화되어 버렸다는 견해에 대한, 많은 논쟁적인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다 좋은 내용들이지만,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혁명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글턴의 생각이었다.&#60;/p&#62;
&#60;p&#62;그는 물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 즉 가난한 자에게 정의가 있다는 생각에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일반적인 마르크스주의적 견해에는 반대한다: 죽은 예수를 물신화하는 대신, 우리는 예수가 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던 바로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대신,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화가 결코 현실도피적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수의 &#34;죽음과 저승에 내려감은 광란, 폭력, 몽매, 자아 포기로의 여행이다, 그토록 깊은 단절을 가져온 그 혁명이 우리의 우울한 삶의 조건에 해답을 줄 수만 있다면.&#34; 이러한 종류의 혁명은 일반적인 마르크스주의자라면 화를 내며 환영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해 버릴텐데, &#34;우리의 우울한 삶의 조건&#34; 은 정치적인 방식으로 개선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글턴에게 있어서, 원죄로 인한 타락이라는 관념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이 점은 뒤이어 그가 도킨스와 히친스를 다음과 같이 논박할 때 확인되는데, 그들은 &#34;타락과 구원 같은 매우 유서깊은 관념들을 너무도 간단히 무시해 버린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아우슈비츠 이후에조차 구원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34; 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60;/p&#62;
&#60;p&#62;이글턴에 의하면, 그들은 역사에 대한 이차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합리성의 증대를 통해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 그들은 다음과 같은 거대하고 심오한 역설을 오만하게 윤색하고 있다: 진보는 근대성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안정하며, 가장 나쁜 종류의 잘못으로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역사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견해는 기적의 개입에 근거하고 있지만, 어떤 점에서 그것은 합당한 이야기가 된다: &#34;그리스도교 신학은, 진보라는 오만한 관념 없이도 역사가 변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34;&#60;/p&#62;
&#60;p&#62;그는, 도킨스와 히친스의 주요한 맹점은, 진정한 인간주의4) 는 &#34;비극적인&#34; 면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거부한다는 데에 있다고 한다: &#34;사회주의, 그리스도교,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종류가 있을 수 있지만, 비극적 인간주의는 자아 포기와 극단적 갱신의 과정을 통해서만 인간성은 그 본연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고수한다.&#34; 이는 다음과 같은 커다란 질문을 낳는다: 어떠한 종류의 &#34;과정&#34; 이 적절한가? 이따금 극장에서 비극을 감상하는 것으로 충분한가?5)  아니면 정신 상담을 받으면 되는가?6) 아니면 노동당에 투표하기?7) 아니면 타락과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화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종교의 개입이라는 권위적인 부작용 없이, 어떻게 그 그리스도교적 관념에 접근하거나 그것을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게 할 수 있겠는가?&#60;/p&#62;
&#60;p&#62;이 책의 귀중한 덕목은 이글턴이 어떤 안정적인 포지션을 고수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대신, 비록 그 자신이 정확히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교 신화는 사회주의적인 철저함의 가장 훌륭한 형태를 밑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그는 인정하고 있다. 유명한 지식인으로서, 그는 놀라울 정도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 자신 아직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을 겸손히 받아 들이고 있다, 마치 아직 학생이기라도 한 것처럼.&#60;/p&#62;
&#60;p&#62;나는 이 책이 매우 신중하게 &#34;속내를 드러내는&#34; 것으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자신이 마르크스주의보다는 그리스도교에 가깝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죄로 인한 타락이라는 관념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그러하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인간의 행위는 삶을 바르게 사는 것을 통해 신뢰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만이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34;구원&#34; 이다. 이글턴은 분명히 이 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교에 공감하고 있다는 데 대해 왜 그토록 신중할까? 앞서 나는 그가 학생같다고 말했다, 좋은 의미에서, 아직 일종의 모색자처럼 보인다는 뜻으로. 그러나 아마 그는 학생을 닮았으되, 그리스도인이라는 라벨이 붙는 것이 너무도 쿨하지 못해서 견딜수 없어 하는 학생을 닮은 것 같다.&#60;/p&#62;
&#60;p&#62;역주&#60;/p&#62;
&#60;p&#62;1) 영국의 신학자. &#60;a href=&#34;http://www.guardian.co.uk/global/2007/jun/03/theohobson&#34; rel=&#34;nofollow&#34;&#62;http://www.guardian.co.uk/global/2007/jun/03/theohobson&#60;/a&#62;&#60;br /&#62;
2)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 &#60;a href=&#34;http://en.wikipedia.org/wiki/Terry_Eagleton&#34; rel=&#34;nofollow&#34;&#62;http://en.wikipedia.org/wiki/Terry_Eagleton&#60;/a&#62;&#60;br /&#62;
3) 리처드 도킨스는 &#38;lt;만들어진 신&#38;gt; 등을 통해,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38;lt;신은 위대하지 않다&#38;gt; 등을 통해, 최근 몇년간 무신론 논쟁을 주도해 왔다.&#60;br /&#62;
4) 여기서의  &#34;humanism&#34; 은 도킨스와 히친스가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들의 무신론적 입장을 반영하여 &#34;인본주의&#34; 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34;humanism&#34; 은 뒤에 보듯이 그리스도교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므로,  &#34;신본주의&#34; 의 대립어로 설정되어 있는 &#34;인본주의&#34; 에 대한 관습적 이해 때문에 적절하지 않은 선택이 된다. &#34;인도주의&#34; 는 인본에 근거하여 박애로까지 나아갔을 때에 쓰기에 적합한 말, 즉  &#34;humanitarianism&#34; 에 가까운 말인 것 같다. &#34;인문주의&#34; 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고전학자들을 언급할 때에 가장 적합한 말이며, 다른 경우에는 반드시 인문 &#34;학&#34; 과의 관련을 전제하는 듯 보이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34;인간주의&#34; 라고 하면, 인간의 무엇에 대한 주의를 말하는 것인지 얼른 감이 잡히지 않지만, 다른 단어들이 갖는 오해의 가능성들 때문에, 가장 중립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34;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성숙 또는 완성을 지향하는 모든 종류의 생각 내지는 활동&#34; 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냥 &#34;휴머니즘&#34; 이라고 한국어로 쓰는 것이 더 나은지도 모르겠다.&#60;br /&#62;
5)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극장에서 비극을 감상하여 카타르시스를 통해 감정을 순화하면, 이것이 종교와 같은 효과를 갖겠는가?&#60;br /&#62;
6) 종교라는 중세적인 방식이 아니라, 정신 상담이라는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대안을 선택하면 되겠는가?&#60;br /&#62;
7) 그냥, 정치적으로 보다 평등을 지향하고 인도주의적인 선택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Elyot on "번역: 개종자들은 천주교의 생경함에 목이 막힐지도 모른다"</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2#post-1047</link>
<pubDate>금, 09 7월 2010 12:59:38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47@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원문: &#60;a href=&#34;http://www.timesonline.co.uk/tol/comment/columnists/libby_purves/article6884592.ece&#34; rel=&#34;nofollow&#34;&#62;http://www.timesonline.co.uk/tol/comment/columnists/libby_purves/article6884592.ece&#60;/a&#62;&#60;/p&#62;
&#60;p&#62;더타임즈&#60;br /&#62;
2009년 10월 22일&#60;/p&#62;
&#60;p&#62;개종자들은 천주교의 생경함에 목이 막힐지도 모른다&#60;/p&#62;
&#60;p&#62;리비 퍼브즈&#60;/p&#62;
&#60;p&#62;성공회 사제들을 환영하는 천주교 측의 조치는, 두 교회 사이의 차이점을, 그리고 &#34;공격은 최선의 방어&#34; 라는 식의 접근이 갖는 어려움을 부각시킨다. 아일랜드의 천주교계 교육 시설에서의 아동 학대 은폐에 대한 또다른 발표가 있던 날 저녁에 나온 이 조치는, 마치 베네딕트 교황의 전략인 것처럼 보인다. 그의 성공회측 이탈자들에 대한 갑작스러운 환영은, 천주교 위계질서의 남성적이고 억압적인 권위적 구조에 의해 비롯된, 수십년간 이어진 아동 학대의 스캔들로부터 확실히 스포트라이트를 거두어 갈 것이다. &#34;빼가기&#34; 같은 표현은 지나쳐 보이겠지만, 여기에는 단순한 힘의 정치 이상의 것이 있다. &#34;로마로의 쇄도&#34; 는 천주교의 사제 부족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고, 종교개혁과 결부되어 넘어간 오래된 교회 건물들을 되찾게 해줄 것이며, 성공회를 불안에 휩싸이고 자유주의적인 잔여분파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결과! 이윽고 천주교에서 매주 기도하는대로 &#34;영국의 개종&#34; 이 될 것이다.&#60;/p&#62;
&#60;p&#62;그러나 망설이고 있는 사제들은 조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그들을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성격의 잘못으로 비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에 대해 관대하고 유연하지 못함 - 주로 여자와 동성애자들 - 그러면서도 믿음에 대해서는 통탄할만큼 유연한 태도. 개신교 나라인 영국에서 천주교인으로 자라 나면서, 우리는 둘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우리는 교황의 오류 없음을 믿지만, 그들은 믿지 않고, 대신 여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성변화 聖變化 의 기묘한 교리 -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기적 - 를 배웠다. 그들은 성찬식을 단지 상징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이 원하면 성변화를 믿을 수 있으며, 마리아의 무염시태와 몽소승천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여학생의 초롱초롱한 눈에, 코르셋처럼 옥죄는 천주교의 교리에 비해 성공회는 훨씬 자유롭고 쉬워 보였다; 그들은 고교회와 저교회 사이에서도 선택할 수 있으며, 복음주의적 완고함과 딸랑거리는 교회종 소리 사이에서도 선택할 수 있었다. 천주교는 다만 한 가지 맛일 뿐이었다. 성공회 사제들은 가족을 가질 수 있지만, 천주교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성공회 교인들은 피임도 할 수 있었다.&#60;/p&#62;
&#60;p&#62;우리는 다른 북소리에 행진했다. 종교회의가 여성 사제들을 인정하고, 많은 성공회 교인들이 이에 반대 입장을 표했을 때, 우리 원조 천주교인들은 (배교자들이긴 하지만) 당황하였다: 교황의 권위, 성변화, 이혼에 대한 완고한 훈계, 피임 금지가 그들에겐 전혀 상관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쪽 사제들은 분파들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고, 아내와 아이들을 온전하게 갖추었다 - 이러한 용인은 어렵게 독신을 지키는, 그리고 그 점이 변치 않을 것이라고 들어 온 천주교 사제들에겐 모욕이 될 것이다. 이번의 새로운 조치에서, 유일한 단서조항은 결혼한 사제가 주교로 승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승진하려면, 아마도 아내가 사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60;/p&#62;
&#60;p&#62;그러나 개종한 사제들은, 아마 그들이 희망했던만큼 행복하게 되지는 못할 것이다. 여자 사제들과 마주쳐야 하는 공포, 그리고 동성애 커플에 대해서 그들을 바티칸식으로 &#34;근본적으로 잘못&#34; 되었다고 여겨 피부를 벗겨내는 형벌에 처하는 대신, 그들의 시민 결합을 축복해야만 하는 공포로부터는 해방되겠지만 말이다. 수정된 기도서가 있기는 하겠지만, 개종한 신자들은 그들의 방식이, 그리고 종래의 목가적인 조언들조차도 엄격하게 제한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캔터베리의 나직한 목소리 대신, 바티칸의 타협없는 목소리 앞에서 움찔하게 될 것이다.&#60;/p&#62;
&#60;p&#62;성공회는 쉽지않은 타협 위에 기초되었고, 이 점은 수세기를 지나오는동안, 스스로를 상냥하게, 나아가 너무 겸손하게까지 만들었다: 믿음의 혼합 샐러드가 된 것이다. 천주교는 더 오래되었고, 더 어두우며, 질긴 날고기와 같다. 개종자들은 목이 막힐지도 모른다.
&#60;/p&#62;</description>
</item>
<item>
<title>Elyot on "번역: 믿음에 빚진 예술"</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81#post-1046</link>
<pubDate>금, 09 7월 2010 12:57:07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46@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원문: &#60;a href=&#34;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belief/2009/dec/07/religious-art-catholicism&#34; rel=&#34;nofollow&#34;&#62;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belief/2009/dec/07/religious-art-catholicism&#60;/a&#62;&#60;/p&#62;
&#60;p&#62;믿음에 빚진 예술&#60;/p&#62;
&#60;p&#62;메리 케니&#60;br /&#62;
가디언&#60;br /&#62;
2009년 12월 9일&#60;/p&#62;
&#60;p&#62;질문: 훌륭한 예술은 신 덕분에 가능했는가 ? &#60;/p&#62;
&#60;p&#62;저메인 그리어 (역주: 1939년생 호주 출신의 영문학자로, 저명한 여성이론가입니다. 좋은 도판 자료들이 많이 들어있는 2003년 예술사 책인 &#38;lt;The Beuatiful Boy&#38;gt; 는 &#38;lt;아름다운 소년 보이&#38;gt; 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도 출간되었는데, 반응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네요, 교보문고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만) 는, 자신이 회화에 대한 안목을 갖게 된 것은, 호주에서 천주교계 학교에 다니던 시절, 아일랜드 출신 수녀가 보여주었던 성화들을 통해서라고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60;/p&#62;
&#60;p&#62;나 역시 더블린에서 천주교계 학교를 다녔는데, 비슷한 성화들을 많이 보았었다. 거기엔 라파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무리요, 그리고 베르니니 조각의 사진들이 있었다. 우리는 프라 안젤리코와 원근법에 대한 그의 작품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고, 수태고지는 유럽 예술의 역사에서 가장 자주 그려진 주제라고 배웠다. 우리가 본 성화들은, 위대한 걸작들의 값싸고 자그마한 이탈리아산 복제품들이었지만, 내 기억에, 그것들은 아주 예쁘고 색깔이 선명했었다. 나중에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나는 익숙한 이미지들을, 성모와 아기 그리고 모성의 부드러움이 중심에 표현된 작품들을 많이 알아볼 수 있었다.&#60;/p&#62;
&#60;p&#62;실제로, 내가 아일랜드, 영국, 그리고 유럽 대륙의 많은 미술관들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나는 유럽 예술의 자기 증명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볼 수 있었는데: 바로 성화들이었다. 학창시절의 수녀님들은 성모자상에 관심이 많았고, 그것을 구주 강생의 주제와 연결시켰지만 - 천주교는 대체로 구약에 약하다 - 그 밖에도 성경에는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상상을 불어넣어 준 이야기들이 아주 많이 있다. 나의 경우에는 성화들에서 시작해서 - 종종 그것들은 교훈적이고, 때로는, 특히 십자가 장면에서는 다소 처연하다 - 나중에는 가정 생활을 표현한 네덜란드 회화들이 내게 가장 잘 맞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19세기 서사 예술의 감상적인 허위를 좋아한다 (역주: 아마 19세기의 소설이나 극장 예술 작품들에 나오는 감상적 장면들을 얘기하는 듯 합니다. &#38;lt;라트라비아타&#38;gt; 의 비올레타나 &#38;lt;백조의 호수&#38;gt; 의 오데트 같은 경우들이 아닐까요)) .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이 성화들에 대한 애호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60;/p&#62;
&#60;p&#62;천주교 - 그리고 확실히 라틴계 - 문화는 그림 중심인 데 반해, 개신교 - 그리고 북유럽 - 문화는 글 중심이라는 점은 자주 지적된다. 우리들의 시대에도, 라틴계 문화는 잡지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고 - &#38;lt;Hello!&#38;gt; 지가 스페인에서 발행된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역주: 연예인의 가십 등이 많이 나오는 화보 중심의 잡지라네요) -  북유럽 사람들은 신문의 글을 더 선호한다; 개신교인들이 천주교의 성화보다는 성경 본문의 글을 더 좋아했듯이 (그리고, 우리는 정교회를 잊어서는 안된다: 러시아의 성당들은 그들의 소중한 아이콘들과 함께, 성경 주제들에 대한 강력한 그림들로 가득 차 있다) .&#60;/p&#62;
&#60;p&#62;현대의 매체들이 그림, 브랜드의 로고들과 함께, 그리고 공항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신호와 표시들이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나 이해되는 데서 보이듯이, 더욱 이미지 중심이 되어감에 따라, 남북 유럽 문화에 대한 종래의 분석은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이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이야기가 된다. 많은 개신교 국가들에서도, 이를테면 네덜란드에서는 훌륭한 종교 회화 작품들이 나왔다.&#60;/p&#62;
&#60;p&#62;성화는 우리의 예술적 유산의 원천이자 묘판이다. 당신은 그리스도교적인 (그리고 유대적인) 전통에 지식이 없이 유럽 예술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의 주제들은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계속, 많은 훌륭한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쳐, 그들의 상상력을 작동시키고, 그들에게 풀어나갈 이야기 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 물론, 메디치 가의 교황들과 같은 훌륭한 후원자들도 제공해 주었다 (교황이 부패하면 부패할수록, 일설에 의하면, 더욱 예술을 후원하였다) .&#60;/p&#62;
&#60;p&#62;기독교 세계, 유럽이 한 때 스스로를 그렇게 칭했던 대로, 에서 유럽 예술의 위대한 개화에 대하여, 한 가지 언급되어야 할 점이 있다. 예술가들 자신이 반드시 아주 경건한 기독교인인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들 자신보다 더 높은 존재가 있다는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에 동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아니다. 인간은 자신보다 더 좋은, 더 높은, 더 비범하고 기적적인 존재를 열망해야만 한다. 그러한 생각이  유럽의 위대한 성당들을 짓도록 하였고, 또 그에 어울리는 음악을 발전하게 하였다. 종교 예술이 모든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은 유럽 예술의 현란한 성취의 출발점이 되었다.&#60;/p&#62;
&#60;p&#62;나는 현대 예술을 경멸하지 않는다: 누군가 로트코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는다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이가 벽돌더미에서 영감을 받는다고 해도, 역시 괜찮다 (그 느낌이 진실한 것인 한에서, 즉 단지 유행에 영합하는 것이 아닌 경우에) . 트레이시 에민의 흐트러진 침대 (역주: 여기를 참고하세요. &#60;a href=&#34;http://en.wikipedia.org/wiki/My_Bed&#34; rel=&#34;nofollow&#34;&#62;http://en.wikipedia.org/wiki/My_Bed&#60;/a&#62;) 는 기발한 발상이라고 생각하며, 그 자신의 방식으로, 하나의 도덕적 우화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눈을 사로잡았던 성화들은, 다음 세 가지를 나에게 남겨 주었다. (1) 나는 예술의 아름다움이 주는 즐거움에 가장 잘 반응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를 전율하게 한다. (2) 나는 이야기적인 요소에 기뻐한다,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3) 현재의 자기 자신보다 더 높은 상태로 고양되는 느낌 역시 나를 전율하게 한다. 저메인 그리어가 옳았다: 우리 모두는 성화들에게 얼마간 예술적인 빚을 지고 있다.
&#60;/p&#62;</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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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Elyot on "사도 바르나바 축일의 매일기도 본문에 대하여"</title>
<link>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79#post-1036</link>
<pubDate>금, 11 6월 2010 09:34:59 +0000</pubDate>
<dc:creator>Elyot</dc:creator>
<guid isPermaLink="false">1036@http://liturgy.skhcafe.org/</guid>
<description>&#60;p&#62;안녕하세요 ^^. 요즘 기도서를 이용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한 신자입니다...&#60;/p&#62;
&#60;p&#62;마침 오늘이 사도 바르나바 축일이어서, 여기에 맞는 독서를 해보려고 하는데요, 한국 성공회 기도서, 그리고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다른 기도서들마다 각기 다른 본문을 제시해 주고 있어서 혼란스럽습니다.&#60;/p&#62;
&#60;p&#62;한국 성공회 기도서는, 욥기 29.11, 시편 112, 사도 11.19-30, 요한 15.12-17 를 읽으라고 제시해 주고 있는데요,&#60;/p&#62;
&#60;p&#62;영국 성공회 홈페이지에 매일 업데이트 되는 기도서에는, 아침 기도: 시편 100,101,117, 예레미아 9.23,24, 사도 4.32-37, 저녁 기도: 시편 147, 전도서 12.9-14, 사도 9.26-31 로 되어 있어요,&#60;/p&#62;
&#60;p&#62;그리고 오레무스 홈페이지에 나오는 기도서에는, 시편 59-61, 전도서 31.3-11, 사도 4.32-끝 으로 되어 있습니다.&#60;/p&#62;
&#60;p&#62;왜 이렇게 다 다른지요 ? 그리고 한국 성공회 기도서의 성무일과 성서정과표에는 왜 시편 외 본문은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가 구분되어 있지 않은지요 ?&#60;/p&#62;
&#60;p&#62;아 참, 그리고, 한국 성공회 기도서 성무일과 성서정과표에는, 구약 한 부분, 서간 한 부분, 복음 한 부분, 이렇게 제시되고 있는데요, 그럼 아침 또는 저녁 기도 중에 1 독서와 2 독서를 나눌 때, 이 셋을 어떻게 할당시켜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구약과 서간을 합쳐서 1 독서로 하고 복음만 2 독서로 읽을지; 아니면 서간도 복음도 신약이니까, 구약만 1 독서에서 읽고 서간과 복음을 합쳐서 2 독서에서 읽을지... &#60;/p&#62;
&#60;p&#62;어떻게 드리는 기도든 다 좋은 것이겠지만, 기왕 성공회에 와서 성공회 방식을 따르기로 했으니까, 가장 적합한 형식을 찾아서 익숙해 지고 싶은데, 쉽지가 않네요 ^^.&#60;/p&#62;
&#60;p&#62;가르침 부탁드립니다 ^^.
&#60;/p&#62;</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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