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번역 프로젝트 자료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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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교제(주교직Episcopacy)

    Richard A. Norris, JR.

    주교들-그리고 이와 함께 주교와 사제(presbyter) 사이의 직책(office)의 구별-은 단순히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기정사실(부산물given)이었다. 헨리8세는 잉글랜드에 있는 교회를 교황의 관할권에서 분리시켜 왕권[국왕]의 독점적인 감독하에 두었지만, 교회의 다른 치리구조나 사목구조를 변경하지 않았다. 따라서, 에드워드 치하에서 교리와 전례와 사목의 근본적 개혁을 추구하였던 집단이 주도권을 잡았을 때, 개혁 프로그램은 국왕의 권위로 교회의 기존 법적인 구조를 통해서 수행되었으며, 이러한 구조에서 개혁을 집행하였던 지도자들은 주교들이었다. 결과적으로 잉글랜드 개혁가들은 중세기 유럽에서 주교직이 누렸던 귀족적인 모습에 크게 반대하고, 마찬가지로 스위스나 독일의 개혁주의 교회들(Reformed Churches)에서 확산되고 있던 교회성직의 형태(type of church order)에서 어느 정도의 장점을 발견하였다 하더라도, 주교제도와 종교개혁의 대의 사이에 본래적인 대립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에드워드치하의 서품예식서는 주교제를 ‘사도시대부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주교, 사제 그리고 부제라는 사목자들의 성직(order)이 있었다는 점은 [...] 명백한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또한 교회에서 ‘사목자들의 여러가지 성직(order)을 임명하였던 자’는 바로 하느님 즉, 성령에 의해서였다고 주장하였다. 1559년 엘리자베스의 신앙정책(Elizabethan Settlement)은 이러한 원칙과 실제[관행]를 유지하였다. 매튜 파커를 켄터베리 대주교로 축성할 때에, 주교서품의 전통적인 조건들을 확실하게 충족시키기 위하여 면밀한 조치들을 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개혁가들이 이러한 교회치리제도의 독특한 특징으로 이해한 것은 주교제도가 아니었다. 잉글랜드교회를 다른 교회들과 구별시킨 것은 교황수장권에 반대하는 국왕수장권의 원칙과 실제였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은 ‘신실한 군주’(godly prince)의 업무로 이해되었다. 세속의 문제들 뿐만 아니라 교회의 문제들에 대한 권한, 그리고 왕국의 세속업무 뿐만 아니라 교회업무의 치리(ordering)에 대한 그의 수장권[주권, 지상권]에 대하여, 개혁가들은 다윗과 솔로몬과 같은 구약성서의 인물들이 제공한 모델들에 호소함으로써 정당화하였다. 정말로 주교제도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실제[관행]와 ‘사도들의 시대로 부터 내려온’ 변하지 않은 전통에 의해서 지지받을 수 있었다-또한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호소[근거]는, 주얼의 표현대로, ‘사도들과 초기교회의 교부들’의 신앙을 회복하려는 교회의 일반적인 입장과 전적으로 일치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치리(ordering)는 국왕의 업무였다. 잉글랜드에서 교회의 치리구조와 사목직을 초기교회의 형태로 유지시킨 것은 바로 국왕의 권위였다. 제임스1세의 주장처럼 그리고 찰스1세와 그의 대주교가 입증하였듯이[둘다 처형당했다], 군주와 주교는 생사를 함께 하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잉글랜드의 초기개혁가들은 주교들의 임명을 정당화하거나 교회생활에서 주교의 지위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을 제공하기 보다는, 그들이 이해한 주교의 업무를 제시하는데 집중하였다. 즉, 주교들은 왕국의 신앙분야(spiritual) 치리[교회의 치리]를 담당하는 국왕의 대신들이었다. 종교개혁된 교회에서 이는 주교들이 ‘하느님의 순수한 말씀이 설교되고, 성사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올바르게 집행’되도록 감독하는 것을 의미하였다(신앙조항 19항). 왜냐하면 진정한 교회를 결정짓는 특징은 설교와 교육과 성사에서 성서에 충실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주교는 봉건적 귀족이나 왕정의 공직자가 아니라, 정확한 의미에서 사목자(pastor)이다. 그는, 주얼의 주장처럼, ‘백성들을 가르치는 직무(office)에 헌신하는 자’로서 백성들을 은총과 심판의 복음말씀으로 백성들을 통치한다.

    불행하게도, 관습도 분위기도 국왕의 정책도 모든 성직들에서 복음의 설교와 교육에 헌신하는 사목직이라는 이러한 이상을 성취하려는 엘리자베스시대의 개혁가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특히 주교들은 고관의 제복을 입고 멀리 떨어진 존재였다. 따라서 불가피하게도 잉글랜드교회 내에서 스위스와 독일 형태의 개혁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집단은 그들의 판단에 소극적이고 철저하지 않은 개혁조치들에 대하여 점차적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잉글랜드에 진실로 성서적인 교회의 설립을 주장하였으며,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칼빈주의자 ‘권징제도’(discipline)-장로제 형태의 교회정부-를 요구하였다. 그러므로 이 ‘퓨리탄’파들은 토머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와 월터 트래버스(Walter Travers)의 지도하에 주교들과 그들의 정책들 뿐만아니라, 주교직[제도] 자체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성공회에서 주교직과 그 지위와 기능에 대한 성공회적인 이해는 바로 이러한 계속된 논쟁-서로 다른 형식으로 한 세기 이상 지속되었다-을 통하여 형성되었다.

    주교의 직무(office)

    이 논쟁에서 한가지 분명한 중심적인 쟁점은 ‘하느님의 말씀은 사제와 주교 사이에 어떠한 불평등이나 차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관련되었다. 바로 이 사목자들간의 동등성(parity)(즉, 목회자들의 동등성으로, 부제 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의 교리는 피터 롬바르드로부터 내려오는 스콜라신학의 전통 뿐만 아니라 자주 인용되는 제롬의 <에바그리우스에게 보내는 편지>(Epistle to Evagrius)에 호소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이들은 주교가 성직(order)의 권능(power)에서가 아니라 오직 재판권[관할권]에서 사제보다 상관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제롬(부제를 아주 싫어하였다)이나 일부 스콜라신학자들은 실제로 사제와 주교 사이의 차별을 폐지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성공회 저술가들-특히 주교제와 장로제의 조화[조정]에 관심을 가진 자들-은 이러한 차별을 엄격하게 성직(계급order)에 따른 것이 아니라 존엄(명예dignity)의 차이로 이해하는데 만족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성공회 저술가들]는 이보다 더 엄격한 입장을 채택하였다. 이들은 신약성서에서도 불평등[차별, 차이]에 대한 분명한 예시[사례]들을 찾아냈다. 즉, 루가복음에 의하면, 주님은 직접 12제자들과 72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서로 다른 임무를 주었다. 따라서 이는 이후에 주교와 사제의 차별에 대한 토대가 되었다. 또한 사도 바울로가 디모데와 디도에게 부여한 직무(office)는 일반 원로들(elders)을 감독하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러한 증거들은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보편적인 관례(실제, practice)로 확증되었다. 따라서 찰톤(Carleton) 주교(치체스터)는 도르트 교회회의(Synod of Dort)에서 네델란드 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에 ‘사목자들의 동등성이란 이상한 착상’을 포함시키는 것을 격렬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주교직이 별개의 성직(계급order)으로 단순히 직무의 분담이 아니라면, 주교직의 독자적인 직무(office)는 무엇에 근거하는가? 리처드 후커는 1593년에 발표된 토머스 빌슨(Thomas Bilson) 주교의 논문인 <The Perpetual Government of Christ’s Church>에서 진술된 입장을 따르며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주교는 하느님의 사목자이다. 그들은 다른 사제들(presbyters)도 보유하는 권한인 말씀과 성사를 집행하는 권한을 영원히 부여받을 뿐만 아니라, 교직자들(Ecclesiastical persons)을 서품하는 추가적인 권한, 그리고 평신도뿐 아니라 사제들에 대한 치리조직(Government)의 최고책임자(Chiefty)로서의 권한, 관할권(jurisdiction)을 통해서 전도구 사목자들(Pastor)에 대한 사목자가 되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그렇다면, 후커에게 주교와 사제의 차이는 권위의 유래라는 면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제는 말씀과 성사의 완전한(full충분한) 사목자이나, ‘이를 집행하는 그의 권위는 그를 서품한 주교로부터 유래한다. 따라서 두 성직에 공통적인 이러한 것들에서 조차도, 한 성직의 권한은 말하자면 다른 등불들에 불을 빌려주는 확실한 등불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주교직의 독특한 특징들을 ‘성직의 권한의 범위(latitude)’로 그리고 ‘관할권에 속한 권한과 같은 것으로’ 보려는 것으로, 이 두가지 권한들 사이에 구별할 수는 있지만 분리할 수는 없다. 즉, 주교의 관할권 또는 감독권한은 성직서품의 권한으로부터 유래한다. 주교의 직무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설명에 대하여 후커의 계승자들은 거의 똑같은 입장을 채택하였다. 예를들면, 존 코진(더럼주교, 1660-72)은 요크교구의 총사제(Archdeacon)였던 1626년의 한 설교에서 주교직의 권위가 권징권(power of the keys 마태16.19에서 예수가 베드로에게 준 권한)에 있다고 말하였다. 즉, ‘그리스도께서 파송하셨던 처럼 성직을 파송할 권한(key),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신 것처럼 통치하는 관할권[재판권]의 권한(key).’

    주교의 직무(office)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주교의 역할을 말씀과 성사의 사목자(minister)로 약화시키거나, 교구에서 주교와 사제들과의 협동적인 관계 (collegial relation)를 부인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성공회 호교론자들이 주장하는 성직의 차이는 항상 주교와 ‘다른 사제들’ 사이의 차이였다. 그리고 그들은 위트기프트 대주교의 논평-말씀과 성사의 ‘사목직의 경우, 하느님의 말씀의 사목자들은 모두 동등하다[...] 왜냐하면 […] 설교하는 말씀 또는 집행하는 성사는 주교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제의 경우에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에 동의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관할권 또는 치리권(government)을 말할 때, 그들의 의중은 현대인들의 생각처럼 조직체의 관리업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권징(discipline)의 집행-즉 ‘영적인’(spiritual) 기능-이었다. 또한 이러한 활동에서 주교는 다른 사제들을 (보조적인) 동료들이자 상담자들로 인정하였다. 후커는 제롬을 따라 ‘주교가 그들과 의논하고 그리고 교회의 중대한 업무에 대하여 그들의 조언을 활용하는 것을 싫어해야 하는 이유가 없다’고 보았으며, 또한 정말로 ‘대성당 교회들’-수석사제와 사제단이 주교를 보좌하는 교회-이 ‘사도적인 초기교회들의 얼굴과 순수한 모습이 아직도 그대로 볼 수 있는 거울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교구의 활동[업무]에서 주교와 사제들 사이의 협동적인 관계는 주교제와 장로제 교회제도(church orders)의 조화를 추구하였던 어셔(Ussher)대주교의 계획의 기본원리[토대]였다. 물론 그의 제안은 무위로 끝났지만, 그의 사상의 실현은 실질적으로 교구의 치리제도를 총회[교구의회] 형태(synodical forms)로 채택하는 시대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러한 치리제도는 잉글랜드밖의 성공회 교회들에서 최초로 채택되었다.

    사도성, 신권론(divine right) 그리고 계승론

    16세기말과 17세기의 성공회 저술가들은-존 코진 주교의 표현처럼 의회정부와 크롬웰정권 치하에서 주교제를 폐지하였던 ‘자의적이고 초법적인 불신앙’은 말할 것도 없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퓨리탄이나 비국교도들의 비판에 대항하여 주교와 사도적 직무[사도직]와의 관계, 주교직의 ‘신권론’(jus divinum, 신적인 기원), 그리고 주교직의 계승론과 서품의 연속성의 중요성에 관한 질문들을 반복적으로 제기하였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토론들에 참여한 자들이 공유하였던 공통적인 인식을 나타내는 중요한 특징들(tracts)이 있었다. 주교제도에 대한 전체성공회의 입장에 기본적인 원칙은 ‘회중[교회]에서 공적으로 설교하거나 성사들을 집행하는 직무(office)’는 개인이 자기 마음대로 추정하거나 주장할 수 있는 직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에 있는 그리고 교회를 위한 직무(office)로서 이는 ‘교회에서 사목자들을 추천하고 파송할 수 있는 공적인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러한 활동[설교와 성사집행-역자]을 위하여 추천받고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해당될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용어-당연히 의도적으로-로 정리된 39개 신앙조항 23항의 문구들은 주교들을 언급하지 않는다[주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구들은 정당한 사목직의 필수적인 조건이 조직화된 몸(ordered body)으로 이해되는 교회를 통해서 나온다는 원칙을 설명하고 있다. 잉글랜드교회가 정상적이고 적합다고 판단하였던 성직제도[교회조직, ordering]는 당시의 서품예식서와 그 서문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서문에서 ‘공적인 권위를 갖는 자들’이란 표현은 실제로 주교들을 언급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더구나 주교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성직제도(ordering)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된 논거-즉, 이는 ‘사도들의 시대로부터 내려온’ 그리스도교회의 특징이었다는 것-는 서품예석서가 규정한 예식에 또다른 차원의 의미를 추가하였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다른 주교들에 의해서 서품받은 주교들에 의한 서품을 주장하는 것은 권위의 합법적인 수령(계승reception)-이는 단순한 점유 또는 강탈과는 구별된다-이 성직의 연속성과 올바른 전달을 전제한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연속성과 초기교회성(catholicity)에 대한 습관적인 호소는 성직의 차원에서 한 시대와 장소에 있는 교회와 다른 장소와 시대에 있는 교회들과의 통일성이 표현되고 완성되는 것이 바로 주교라는 점을 제시한다.

    ‘서품은 그리스도교회(Body)에서 주교직(episcopé)을 수행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사목직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권위를 받은 자들에 의해서만 집행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회(Body)가 이처럼 서품받은 자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주교들이] 주교직(episcopé)의 사목직으로 서품받은 자는 받드시 인정되고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으로부터 계승에 의한 연속성의 원칙이 나오며, 이는 적어도 인간적인 시각으로 볼 때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1958년 람베스회의]

    성공회 신학자들 사이에 전반적으로 일치하였던 두번째 논점은 교회에서 주교의 직무(office)는 사도의 직무(office)의 부분적인 연속성을 의미한다는 확신이었다. 존 피어슨(체스터교구 주교, 1673-86)은 ‘주교는 평범한 사도’라면 ‘사도는 특별한 주교’라는 절묘한 표현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분명히 이러한 표현으로 앤드류스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전달하려고 하였다. 앤드류스는 ‘감독자들’(overseers)이 ‘사도적인 기능의 핵심부분인 교회의 감독(oversight)과 명령하고 교정하고 서품하는 권한’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후커는 예상대로 이 문제를 다룰 때에 매우 신중하였다. 그리스도로부터 선택되어 교회의 설립을 직접 명령받은 목격자들인 사도들은 계승자들을 두지 않았으며, 또한 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는 더 나아가 사도들이 말씀과 성사의 사목자들(ministers)이라면, 그들의 직무(office)는 사제(presbyter)의 그것[직무]에서 계속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감독(oversight)의 기능이 사도의 직무에 고유한 것이며, 그러한 기능은 그리스도교회의 주교들에서 계속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사도들]을 계승하는 것은 이들을 따라 처음에 이들이 받았던 주교와 같은 권한(Episcopal kind of power)을 보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교의 직무(episcopal office)는 사도적인 직무의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기능들을 계속해서 수행한다고 말하는 것은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fact)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퓨리탄들은 장로제 교회의 성직(직제order)의 일부 형태를 성서에 규정[명령]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전통적인 관례(실제 practice)에 관한 사실들(data)을 넘어서 근본적으로 어떤 형태의 교회성직(직제)을 하느님이 제정한 것(divine institution)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주교제 옹호자들은 이에 대한 응답으로 정말로 주교직의 신권론(divine right)을 주장하기에 적합한 입장을 진술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이러한 주장을 그리스도교회의 연속적인[계속된] 실제[관례]-즉, 전통-에 호소하였다.

    이러한 입장의 핵심요소들은 위트기프트 대주교의 저서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위트기프트는 제네바의 테어도르 베자와의 서신교환에서 주교제가 신적인 기관(de jure divino)이라고 직접적으로 주장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교회정부의 어떤 형태도 성서에 의해서 완전하게 또는 분명하게 규정[명령]되었다는 점을 부인하였다. 이러한 부인은 ‘그리스도교회의 구원에 필수적인’ 문제들과 ‘교회정부’[치리제도]의 문제들 사이의 구별과 연결되었다. 그의 경우, 주교들의 설립이 ‘사도적이며 신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교회는 주교제[직] 없이도 존재하여야 한다는 추상적인 원리도 가능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당연히 로버트 샌더슨(링컨주교, 1660-63)과 일치하였다. 샌더슨은 jus divinum이란 표현의 두가지 의미를 인정하였다. 첫째는 이 표현이 명확한[단정적인] 법칙을 포함한다는 의미이고, 둘째는 사도적인 제정[설립]과 실제[관례]와 같은 것을 언급한다는 의미한다.

    이러한 입장의 가장 철저한 해설가는 리처드 후커였다. 그는 그의 책 <잉글랜드교회의 치리제도의 원칙에 관하여> 제3권에서 퓨리탄의 입장에 반대하는 위트기프트에 동의하며, ‘만약 하느님이 교회의 치리형태의 저자로서 이를 성서에 적시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회의 치리제도의 어떠한 형태도 [...] 합법적이거나 하느님이 규정한 형태도 아니다’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신앙의 문제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일반적을 구원에 필수적인 문제들’을 ‘교회정부’(government)의 문제 또는 ‘외적인 통치의 문제’와 구별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교회성직의 일부 형태들이 다른 형태보다 더 분명하게 성서와 일치한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는 ‘교회의 성직에는 적어도 [...] 적어도 두 종류의 교직자들-즉 하나는 다른 하나에 복종한다-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성서에서 그리고 교회의 모든 기록들에서, 말씀과 성사의 다른 사목자들이 초기에는 사도들에게, 그 이후에는 주교들에게 복종하였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사도들과 주교들 사이에, 그리고 신약성서에서 나타나는 교회정부와 이후 교회의 역사에서 나타난 그것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주교제가 사도적인 기관이며, 그런 의미에서 신적인 기관(de jure divino)인가?

    후커는 이 질문을 제7권에서만 언급하였으며, 특히 두가지 생각을 가진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먼저 그는 주교직의 기원에 관한 하나의 이론을 개진하였다. 이는 19세기에 J. B. 라이트푸트가 제시한 이론과 거의 동일하였다. 즉, 그는 소위 신앙공동체에서 단일한 권위의 필요성에 응답하여 지역교회에서, 말하자면, 사제-주교[사제이자 주교]들의 집단(body)으로부터 주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주교는, [지역적으로] 제한된 관할권 내에서, 사도들이 이러한 제한없이 행사하였던 감독[관리]의 권한(power of oversight)을 떠맡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발전[전개과정]에 사도들이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는가-즉 주교직은 사도적인 기관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후커는 확신하지 못하였다. 그는 그의 주장이 전제하는[가정한] 입장을 설명하였다. 즉, ‘사도들이 사망한 후에, 교회들은 [...] 각 도시마다 사제 한명을 나머지들에 대한 우두머리(chief)으로 만드는데 [...] 스스로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와 동시에 이러한 이해를 전보다 덜 자신하며, ‘사도들이 직접 주교들에게 다른 목회자들(pastors)을 관할하는 권한을 부여하였다’는 점을 더욱 더 믿고 싶다고 발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커는 무엇보다도 그의 이해를 이러한 전제에 근거시키를 싫어하였다-그리고 아마도 그 이유는 학자적인 조심성 뿐만아니라, 퓨리탄들과의 논쟁에서 하느님에 관한 모든 것들은 성서에 포함되어 있거나 최초의 그리스도인 세대에 속해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데 더욱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도들이 주교직의 설립에 어느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사도들만이 이러한 구조(regiment)를 결정하였는가, 아니면 그들이 이를[주교제] 적합하고 필요한 정치형태(policy)라고 판단할 때에 전체교회와 함께 결정하였는가’라는 질문은 그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주교직은 ‘설립 이전에 신적인 지명을 받았거나 설립 이후에 신적인 인존을 받은 것이며, 또한 이런 점에서 [...] 하느님의 명령(ordinance)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후커의 입장-‘신권론’을 단순히 그리스도교회의 보편적인 관례[실제]에 근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주장-은 일반적으로 그 다음 세대의 저술가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그들은 주교직의 사도적인 설립을 확신하였다. 예를들면, 랜슬롯 앤드류스는 ‘사도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교회들을 전반적으로 돌보는(care) 관리자들(overseers)을 서품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7세기에 발견된 성 이그나티우스(안티옥주교)의 원본 저서들-이 문서들은 사도시대 직후의 교회들에 단일 주교직이 확립되엇다는 점을 보여준다-은 이러한 주장을 더욱 강화시켰다. 존 피어슨-이그나티우스에 대한 최고의 연구자였다-은 당대의 공통된 이해를 이렇게 요약하였다.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파송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사도들을, 그리고 사도들은 그들의 계승자들을 파송하였다.’ 그러므로 ‘바로 이러한 사도들의 [권한]이양(전달traditio) 행동에 의해서, 서품의 전체 권한은 주교들에 귀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커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있었다. 예를들면, 존 코진은 주교의 권위가 신권(juro divino)이라고 주저없이 주장하였지만, 그러면서도 주교직이 ‘그리스도나 그의 제자들이 이에 대하여 부여한 어떠한 절대적인 명령’이라기 보다는, 사도들의 관행과 그리스도교회의 지속적인 관습과 교회법들’로부터 유래한다고 확언하였다. 에드워드 스틸링플리트(우스터주교, 1689-99)는 그가 젊은 시절에 믿었던 ‘교회정부의 형태는 그리스도의 법에 의해서 자유로이 제정하도록 남겨졌다’는 주장을 부인하고, ‘사도적인 계승은 성서의 정경들 또는 주의 날[주일]에 대한 준수처럼 신적인 제정이라고 믿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확언하였을 때에, 사실상 후커의 입장으로의 전환을 기록하였다. 더구나 스틸링플리트의 주장은 1930년 람베스회의에서 그리스도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위원회의 보고서에서 반복되었다.

    ‘주교직은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볼때 [...] 성서의 정경과 신경들과 유사한 위치를 차지한다. 만약 주교직이 [...] 그리스도교회의 유기적인 조직체(organism)에서 적응과 성장의 과정에서 나타난 [...] 한 결과였다면, 주교직이 신적인 권위를 결여하였다는 증거가 될 수 없을 것이며, 오히려 그리스도교회 안에서 성령의 생활[역사]이 이를 맡겨진 기능에 가장 적절한 조직(organ)이 되도록 만들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본질,’ ‘본질의 표현,’ 또는 ...?
    (‘Being,’ ‘Well-Being,’ or...?)

    16세말과 17세기의 논쟁들에서 몇가지 특정한 원칙들이 성공회신앙의 공통적인 특징이 되었다. 즉, 주교의 직무에서 사도적인 기능인 감독권(oversight)- 서품권을 포함하며 이로부터 유래한다-은 계속 유지되었다. 더구나 주교직의 설립[제정]-그 근거가 사도적인 설립 때문이든 그리스도교회의 보편적인 실제[관례] 때문이든-은 [잉글랜드]교회 치리제도의 표준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주교 직무의 규정적인 계승-즉, 다른 주교들의 안수를 통한 계승을 요구한다-은 그리스도교회의 사목직의 합법성을 보증할뿐 아니라, 지역교회에 보편적인 교회와의 통일성과 상통관계와 연속성을 확립시킨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러한 원칙들을 수용함으로써, 잉글랜드교회-그리고 이후에는 그 자매교회들-는 주교직을 보유한 교회들과 다른 교회들, 특히 주교에 의한 서품을 시행하지 않는 교회들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원칙들이 갖는 의미의 문제에 직면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잉글랜드교회의 사상과 실제[관행]의 발전과정에서 연속적인 세가지 단계를 고려할 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1662년 이전의 잉글랜드교회의 태도와 실제에 관한 문제이다. 이 기간의 주교직 옹호론은 장로제 모델을 따라 조직된 외국의 개혁주의(Reformed) 교회들이 순수한 교회들이라는 가정하에 수행되었다. 즉. 이들 교회들에서 참 말씀이 설교되고, 성사들이 올바르게 집행하기 때문에, 이들 교회에는 진정한 사목직이 존재한다. 더구나 이러한 확언을 뒷받침하는 원칙은 주교직을 주장하였던 주요 용어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주교직은 ‘통치형태’(government) 또는 ‘외적인 통치’ (external regiment)의 문제이지 신앙의 문제가 아니며, 따라서 주교직이 신적으로 제정되었다 하더라도 ‘구원에 필수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태도는 국내의 장로제주의자(또는 다른) 집단들을 포함시키도록 확대되지 않았다. 이러한 외견상의 불일치에 대한 이유는 다음에서 분명하였다. 즉, 외국의 교회들에서 비주교제 성직들의 정당성은 정확하게 ‘긴급한 경우’ (necessity)라는 이유로 인정되었다. 즉, 이러한 교회들은 실제로 교리와 예식의 성서적인 표준에 따른 개혁이냐, 아니면 주교직의 보존이냐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밖에 없었다. 17세기 성공회의 신학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주교직을 규범으로 장로제 서품을 변칙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매우 운좋게도 잉글랜드국가가 ‘신실한’(godly) 군주들을 보유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즉, 이들 군주[국왕]들의 정책들은 올바른 신앙과 고유한 성직 사이의 선택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성공회 신학자들은 국내에서는 주교제 성직을 요구하였으며(왜냐하면 국내의 비국교도들은 ‘긴급한 경우’를 주장할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해외의 개혁주의 교회들과의 친교를 인정하면서도 이 교회들에게 주교직을 추천하였다.

    두번째 단계는 찰스2세의 복원이후 변화된 상황을 먼저 설명하여야 한다. 1662년에 제정된 전례통일법은 주교에 의한 서품을 받지 않은 성직자들을 잉글랜드교회의 전도구 사목직에서 공식적으로 추방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기본적으로 국내의 국교반대파들(dissenters)을 겨냥하였으며, 의회정권의 통치때에 주교직과 공동기도서를 불법으로 규정하는데 협력하였던 자들에 대한 국교회파의 적대감을 표현하였다. 하지만 이 법률이 잉글랜드 밖에 있는 개혁주의 교회들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이들 교회들은 여전히 진정한 교회들로 인정받았으며, 이 교회들의 사목직들은 비록 변칙적이며 비정상적이라 하더라도 진정하고 유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률은 외국 교회들의 사목직을 장로제로 서품받은 성직자들에 대한 잉글랜드교회의 실질적인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1662년 이전에 (물론 가시적으로 불만이 있었으며 또한 드문 경우였다 하더라도) 잉글랜드 주교들은 외국에서 서품받은 성직자들을 주교의 서품없이 전도구교회의 사목적 책임을 수행하도록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더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세번째 단계는, 제임스2세의 불행한 통치와 ‘명예혁명’(1689)이후 18세기초에, 잉글랜드교회의 환경에서 그리고 교회성직[직제]의 문제에 대한 성공회의 엄격한 또는 ‘고교적인’(High Church) 태도에서 중대한 변화를 낳았다. 한편으로 이 때는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로, 인간의 행동들과 제도들(institutions)은 독단적으로 신의 실재를 중개할 수 있다는 제안 그 자체를 무관심이나 경멸로 받아들이는 시대였다. 더구나 잉글랜드사회에서 교회의 지위는 정말로 변화되었다. 이제 국교회[잉글랜드교회]는 교회의 전통과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이상 ‘신실한 군주’에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 제임스2세와 윌리엄3세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이 점을 분명하게 나타냈다. 더구나 성공회는 이제 더 이상 국민교회(national church)-즉 잉글랜드의 ‘영성’-라고 주장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성공회는 국교거부자들을 관용하는 국가의 국립교회(국가의 법으로 설립된 교회established church)가 되었다. 이 교회의 생활은 의회의 세속적이며 민간적 권위에 공개적으로 종속되었으며, 이 교회의 주교들은 의회의 귀족원에서 투표권을 행사함으로써 정치적인 인물들이 됨으로써, 사목적인 의무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좋은 의도로 말한다 하더라도 크게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윌리엄3세와 메어리2세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한 주교들의 퇴출은 교회의 모순된 상황들과 문제점들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한 변화를 몹시 싫어하였던 ‘고교회파’ 성직자들이 당연히 교회의 주교직 성직제도를 하느님으로부터 승인받은 또는 지명받은 ‘외적인 통치형태’(external regiment)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의 영역을 특징짓는 신적인 선물(divine gift)로 이해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은 의회로부터 독립된 교회의 권위와 정체성의 토대를 주교의 사도적 직무에서 찾기 시작하였다. 존 피어슨은 주교의 서품을 받지않은 자들에게는 죄의 용서권한(power of absolution)이나 성찬례에서 성찬요소들을 축성할 권위가 없다고 스스로 확신하였다. 윌리엄 베버리지(성 아삽 교구 주교, 1704-8)-제임스2세의 통치에 따른 위기와 그 직후에 국교회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는 주교들의 계승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도적인 직무’(Apostolic office)를 영구적으로 보존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이러한 계승의 근본적인 중요성은 [주교의] 안수때에 ‘그리스도께서 직접’ ‘안수때에 계속적으로 현존하며, 그럼으로써 그가 처음에 그의 제자[사도]들에게 불어넣어 주었던 똑같은 성령을 그들을 계승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는 사실의 한 증표이자 보증이라는 특성에 있었다. 즉, 주교직의 ‘사도적인 직무’는 교회 자체를 ‘전정으로 사도적인’ 교회로 나타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정체성에 대한 보증한다. 그러나 주교직의 사도적인 직무는, 사실상 교회에서 성령의 성별하는 현존의 중재적인 상징이기 때문에 그렇다.

    바로 이러한 토대에서 비서약파인 윌리엄 로(William Law)는 뱅고르 주교의 국가교회적인 입장을 공격할 때, ‘성사의 집행은 우리가 시민사회(Civil Society)의 의원이나 학자들이나 구성원으로 생각하고는 수행할 권한이 없는 행동’이라고 단언하며, 또한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로부터 권위를 받은 자들의 연속적인 계승’의 필수성을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만약에 연속적인 계승이 없다면, 그리스도로부터 권위를 받은 사목자들도 없으며; 이러한 사목자들이 없다면, 그리스도교의 성사들도 없으며; 그리스도교의 성사들이 없다면, 그리스도교의 성약도 없으며, 따라서 성사들은 분명하고도 가시적인 보증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교회의 구조(constitution)는 세속사회의 그것과 독립되어 있으며, 또한 오직 그러한 구조-즉, 사도들로부터 계승한 자들에 의한 서품-를 유지함으로써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다. 1791년 노리치교구의 한 주교로 그는 ‘이러한 규정이 없다면 우리는 사기꾼이 되기 쉬우며,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즉, 우리는 우리의 사목직이 유효한지 또는 우리의 성사들이 실재인지를 확신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강조점에 대한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본래 주교직은 그리스도교회의 규범이며 하느님에 의해서 규정되었거나 승인된 직제로 옹호되었다. 그러면서도 한 교회의 절대적이며 불가결한 유일한 표징은 사도적이며 성서적인 가르침에 대한 연속성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제 주교직은 그리스도교회의 정체성의 토대가 되는 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회는 메세지[복음]의 청취와 수용에 의해서 형성될 뿐만아니라, 성령을 통한 하느님의 지속적인 활동의 영역으로 표현되는 역사적으로 설립된 성직-따라서 역사적으로 시민[세속]사회로부터 독립되고 초월된 성직사회-에 의해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교직은 ‘그리스도교회’의 정의의 일부로 이해되는 기관(constitution)이다. 그리고 물론 바로 이러한 ‘고교회파’ 전통은 소책자운동과 그 계승자들에 의해서 다시 주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F. D. 모리스의 사상에 의해서도 주장되었다. 모리스는 ‘주교직의 제정’(episcopal institution)에서 영적이고 보편적인 사회의 예정된 필수적인 증표들중 하나’로 이해하였다.

    시각과 강조점의 이러한 변화에서, ‘역사적 주교직’을 그리스도교회의 정의(문구대로 본질esse)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교회들과, 이를 그리스도교회의 본질의 표현(well-being, bene esse) 또는 ‘외적인 표현’(full being, plene esse)의 문제로 이해하는 교회들 사이에서 벌어진 현대의 논쟁들의 뿌리들은 찾아볼 수 있다. 이 논쟁은 부분적으로 현대의 에큐메니칼운동으로 촉진되었으며, 결코 종결되지 없었다. 그러나 ‘완고한’(high), 또는 소위 ‘배타적인’(exclusivist) 입장은 교회성직의 중요성에 대한 성공회의 입장에 항구적인 영향을 남겼다. 이는 소위 ‘람베스-시카코 4개 신앙조항’에서 의해서도 분명하게 입증되었다. 이 4개조항에서 공교회의 성직(Catholic order)은 가르침 뿐만아니라 성사적인 실제를 ‘그리스도교회의 가시적인 통일성’에 근본적인 한 요소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은 주교가 없는 곳-또는 K. E. 커크(Kirk)의 표현처럼 ‘본질적인 사목직’이 없는 곳-에는 그리스도교회가 없다는 입장을 전적으로 고집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입장은 그리스도교회의 분열이 그리스도의 몸(Body)을 불완전한 형태로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만들었다는 결론을 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1948년 람베스회의는 성공회 신자들이 ‘비주교제 교파교회들의 성사들을 전적으로 무효라고 선언’하거나, 또는 ‘비주교제의 교파교회의 사목직들을 주교제 교회의 사목직의 지위와 권위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제시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사실상 성공회신앙이 17세기에 ‘외국의’ 교회들과 관계에서 가졌던 입장(태도 practice)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성직의 문제들이 그리스도교회의 존재 또는 정체성에 무관심한 문제들이라는 입장으로 복귀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점들

    주교직에 관한 성공회의 논의들의 특징이었던 주제들과 쟁점들에 대한 개관은 위트기프트와 후커의 시대를 시작으로 호교론적이며 논쟁적인 관심사가 논의의 중심이었다고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주교직의 실질적인 활동들에 대한 검토에는 거의 관심하지 않았으며, 또한 일반적으로 서품받은 사목직, 그리고 구체적으로 주교의 사목직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이러한 검토와 성찰은 아마도 그리스도교회에서 주교들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을 부제와 사제 뿐만아니라 주교에까지 서품하는 관습이 세계성공회의 세 관구교회들에서 시작되었고 이제 일부 교회 신자들은 신부들뿐 아니라 신모들도 때문에, 이러한 이해는 보다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더구나, 이러한 관례[실제-여성성직서품]는, 일부 지방에서는 전적으로 당연하겠지만, 일부에서는 근본적으로 변칙적이며 논쟁적이었지만, 적어도 원론적으로 [그리스도]교회 내에서 주교직의 실질적인 기능들에 관한 논쟁과 논의에 집중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성공회신자들은 교회일치운동의 상황에서 그들 자신의 실제[관행]조차도 옹호하지 못하는 주교직을 주장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매우 다양한 문화적인 환경과 방식에서 실행되고 있는 성공회 주교직의 그러한 실제[관행]-이것 또한 경시되었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긍정적인 교훈들이 있다. 따라서, 주교직의 주제에 대하여 생각할 때, 오랫동안 체계적인 고찰이 이뤄지지 않은 광범위한 항목들이 있다.

    먼저, 여성의 성직서품 문제-부제와 사제직 뿐만아니라 주교직까지-는 원칙적으로 여성이 서품받을 ‘자격’이 있는가, 또는 이러한 ‘자격조건’은 무엇인가와 같은 제한적인 질문들보다 훨씬 커다란 문제들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이러한 질문들은, 여성의 서품문제보다는 여성 성직자들-부제, 사제와 주교직에서-의 활기있고 생산적인 사목활동들을 볼 때, 점차적으로 식어가는 문제가 되고 있다. 보다 중요한 질문들은 이러한 현실 자체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다. 예를들면, 엄격한 신학적인 차원에서, 여성들에게 서품받는 사목직들중 하나 또는 두가지 성직만을 허용하고 ‘최고위 성직’[주교직-역자]을 허용하지 않는 이상한 관행[실제]은 성공회신자들이 교회일치의 대화에서 조차도 강조하지 않았던 안건임을 나타낸다. 즉, 성공회신자들이 그리스도교 사목직의 통일성(unity)을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는가의 문제이다. 보다 쉽게 말한다면, 앞에서 지적하였던 [여성서품]관행(practice)이 제시하는 것처럼, 성공회는 ‘3중적인 사목직’ (삼위일체적인 사목직 a threefold ministry)을 말하는가, 아니면 세가지 분명하게 분리된 사목직들(three distinct and separate ministries)을 말하는가? 더구나, 여성의 성직서품으로 성별의 문제들(성의 문제만이 아니라)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서품받은 성직자 집단에서 여성의 현존은 불가피하게 또다른 방치된 문제들을 제기한다. 즉, 그리스도교회에서 사목자 권위의 성격과 특징 그리고 그것의 실행형태[방식]에 대한 문제. 이러한 문제들은 확실히 새로운 문제들이 아니며, 또한 단순히 남녀평등주의자(feminist) 사상의 산물도 아니다. 그러나 서품의 의미에 관한 토론에 대한 남녀평등주의자들의 기여는 다른 환경들과 함께 이러한 문제들을 매우 중요한 쟁점으로 새롭게 부각시켰다.

    따라서 주교의 교육적 직무(교도직teraching office)와 관련된 문제가 제기된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가들은 주교가 근본적으로 두가지 역할을 갖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첫째는 서품권에서 유래하는 감독 또는 치리(oversight or govenment)의 역할, 둘째는 그리스도교회의 공통적인 신앙의 수호자이자 해설가로서의 교육자적인 역할(teaching-role). 성공회의 거의 모든 호교론자들 논쟁가들은 이들중 전자에만 관심하였다. 하지만 성공회의 고전적인 서품예식서에서, 주교후보자에게 묻는 8가지 질문들중 3가지는 가르침과 설교의 직무-성직자 뿐만아니라 신자들까지 대상으로 하는-를 강조하였다. 가르침에 대한 강조의 배경에는 당연히 개혁가들이 주교를 고유한 의미에서 목회자(pastor)-자신의 paroikia[파로이키아, 믿는자들의 신앙공동체, 교구-역자]에서 말씀과 성사를 실행하는 중심적인(principal) 사목자-로 보려는 비젼이 숨어있었다. 그러나 성공회신자들이 그들 자신의 관행[실제]에서 일반적으로 강조하여 왔던 것은 바로 이러한 비젼의 주교직이 아니었다. 또한 이것은 그들이 교회일치를 위한[에큐메니칼] 대화-거의 모든 경우 주교직은 결국에 한 지역의 목회자보다는 보다 넓은 지방을 담당하는 관리자[행정가]로 제시되었다-에서 주교직을 열심히 추천하였을 때에 의미하였던 비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종교개혁가들의 이상이 사실상 신학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고 정당화된다면, 보다 논쟁적으로, 주교가 ‘목자’(shepherd)로 수행[기능]하고 있는 교회의 가르침과 양육의 책임자[resource]로서의 주교의 역할이 현실화될 수 있는 조건들에 관한 질문이 제기된다. 이론적인 차원 뿐만 아니라 실제[현실]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교회의 선교 또는 기능에 대한 논의에 직접적으로 관련될 것이다.

    관심를 요구하는 또하나의 문제는 주교의 관할지구 내에서 주교와 동료사제들과의 협동적인(collegial합의의) 관계, 그리고 관구나 국가단위 교회내에서 동료주교들과의 협동[합의]적인 관계이다. 성공회의 전통에서 주교직은 자주 귀족적인 주교직(prelacy) 또는 과도한 개인주의, 또는 이 두가지 모두에 의해서 나쁜 이미지를 가졌다. 그리고 이러한 결점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주교들을 친교와 상통의 관계들-이를 유지하는 것이 주교직의 본질적인 존재이유이다-로부터 분리시키는 구조들과 태도들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여기서 쟁점은 치리구조와 행정의 문제(그렇다 하더라도)만이 아니다. 이것은 남녀평등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주교가 그리스도교회 위에 군림하느냐, 아니면 교회내에서 중심적인 인물(forcal person)인가의 문제이다. 또한 바로 이런 이유로 이 문제는 주교의 역할로 그리스도교회의 교육적인 역할[교사]에, 그리고 주교의 목회적인 활동의 본질과 확립(setting)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교회에 훈계하는 자로서의 주교의 역할[권위적인 군림],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그리고 교회와 함께 말하는 자로서의 주교의 역할[교사 목회자] 사이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탐구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성공회신자들은 주교직무에 대핟여 그들의 인식을 형성시키고 어느 정도는 왜곡시키는 문화적 사회적 모델들을 비판적으로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의 모든 설명에서 주교는 ‘권위를 가진 인물’(authority figure)이다. 그러나 권위를 가진 인물의 됨됨이와 책무에 대한 질문은 기존사회의 공통된 관행에 의해서 형성된 인식들과 기대들에 크게 의존한다. 현대의 서구사회들에서 주교의 권위는‘성과를 만들어내는’ 전문경영자, 또는 특정한 선거구민[지지자]들의 입장과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선출된 정치가를 모방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시대들과 장소들에서는 다른 모델들이 나타났다. 예를들면, 세속 통치자나 봉건적 영주 또는 부족의 지도자의 모델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서 문제의 모델이 그 시대와 장소에서 그리스도교회에서 목회적인 권위의 본질을 왜곡시킬 위험이 어느 정도인가를 질문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거꾸로 그리스도교회에서 권위의 본질과 원천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를 근거로만 해결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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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day’s Church and Today’s World with a special Focus on the Ministry of Bishops. (The Lambeth Conference 1978 Preparatory Articles.) CIO Publishing, London, 1977.

    2012년 8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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