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번역 프로젝트 자료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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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
    Peter Hinchliff

    그리스도교 생활[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이상들을 정치적인 구조들에 관련시키는 작업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특별히 두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다. 첫째로, 개개인의 사적인 생활과 관련하여 분명하고 명확하게 보일 수 있는 도덕적인 원리들을 한 사회의 단체생활(공동체 생활corporate life)에 적용시키는 일은 복합적이고 까다로울 수 있으며, 둘째로 정치는 권력의 행사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행동을 지배하는 고려대상[요소]들은 종종 신약성서가 그리스도교 생활의 특징들로 간주한 여러가지 특성들-관용, 겸손, 인내 그리고 사랑-과 정면으로 반대된다.

    더구나 신약성서가 씌여진 이후 1900년 동안에, 통치기관(government)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입장, 그리고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통치기관의 이론적인 구조 두가지 모두가 크게 변하였다. 통치기관을 ‘기정사실’(given당연한 것)로 [수용하고] 이에 단순히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던 로마서 13.1-3과 베드로전서2.13은 그리스도인들이 권력의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을 때에, 또는 통치기관의 구성방법이나 그 기관의 정책들의 선택에 대하여 어떠한 영향력도 갖지 못하였을 때에 씌여졌다. 그러나 4세기에 이르러 그리스도인들은 정책의 결정자들이자 권력의 행사자들이 되기 시작하였다. 이제 그들의 경우, 스스로가 주요한 구성원이 되는 통치기관에 단순히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더이상 충분한 도덕적 원리가 되지 않았다. 보다 현대의 시대에 들어와, 그리스도인들이 정부[통치기관]를 창조하는 투표권을 행사하는 동시에 이러한 정부들의 통치대상인 민주주의 사회들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은 훨씬 더 혼동스럽다. 따라서 우리가 정부의 기본적인 존재에 대하여 (간접적이라 하더라도) 책임이 있을 때, 단순히 하느님이 그렇게 만들었으며, 따라서 우리의 도덕적 의무는 복종 뿐이라는 믿음에 안주할 수만은 없다.

    통치기관의 본질에서의 변화들은 잉글랜드에서 국가교회제도(국교제도 religious establishment)의 역사에서 특별히 중요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와 국가에 대한 모든 성공회적인 사상은 바로 이 국교제도로부터 시작되었다. 잉글랜드교회(국교회Church of England)는 종종 영국헌법(British constitution)의 일부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영국은 성문화된 헌법을 갖고 있지 않다. 즉, ‘영국의 헌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영국정부[통치권]가 특정한 시기에 실행하였던 방식에 대한 명칭일 뿐이다. 이중 일부는 법률[의회의 입법으로]로 확립되었으며, 일부는 단순히 관례였다. 따라서 이중 어떠한 것도 특별한 방식으로 확립되거나 보호되지 않는다.

    더구나 16세기에 확립된 잉글랜드의 국교제도는 중세기에 이미 존재하였던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토대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관계의 일부 측면들-십일조세[전도구세], 기본재산들(기본자산들endowment), 교육기관들-은 사실상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다른 측면들은 새로운 상황을 반영하여 변형되거나 개조되었다. 마찬가지로 다른 것들은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특정한 이론을 표현하기 위하여 법에 의해서 과감하게 변경되었다. 그러므로 국교제도(establishment)는 하나의 기본적인 헌법적 문서에서 분명하게 구체화된 단일한 관계가 아니라, 종종 전통과 관습과 같이 불명확하게 규정된 복합적인 관계들이었다.

    그러나 헨리8세 치하에서 국교제도의 이론은 분명하고 단순하였다. 이 이론은 항소금지법(상소제한법, 1533)의 서문에서 왕국을 두가지 영역 즉, 세속적 영역-평신도들-과 신앙적 영역-교직자들와 성직자들-으로 구성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들 두 영역 각각의 정점에는 국왕이 있으며, 국왕은 이 두가지 영역들을 통합시킨다. 이 법률은 잉글랜드교회를 ‘국민들의 교회’(국민교회nation at prayer)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16세기에 언급될 수 있는 인식도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이 법률은 통치기관의 단일한 행정구조에 대한 국왕의 통제권을 주장하였으며, 그리고 중세기 잉글랜드교회의 독립적인 관할권[자치권]을 폐지하였다. 이 법률은 세속적 영역과 신앙적 영역의 조화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이 법률은 의회의[의회에서 제정한] 법률이었기 때문에 그 자체의 이론에 위배되었다. 이러한 부조화[불균형]은 헨리가 성직자들에게 그의 권위에 공개적으로 복종할 것을 강요함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러한 복종은 또한 의회의 법률로 구체적으로 규정되었으며, 이제 성직자들은 국왕의 동의없이 성직자회의(convocation)를 개최하거나 교회법을 제정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신앙적 영역의 입법권은 세속적 영역의 입법권에 의해서 제한되었다.

    헨리의 국교제도는 새로운 그리스도교회를 설립한 것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헨리의 체계[국교제도]는 신학적 신앙적 이유들 때문에 개혁을 희망하였던 많은 사람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실현될 수 없었다 하더라도, 헨리 스스로는 신학적으로 보수적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새로운 그리스도교회를 도입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즉, 교회는 개혁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교회는 계속해서 기존의 예배형태들을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행정적으로도 기존의 방식 그대로 실행되었다. 심지어 헨리의 아들인 에드워드6세의 치하에서 영문기도서를 도입하고 보다 프로테스탄트적인 신학적 입장을 채택하였을 때에도, 상당부분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었다.

    엘리자베스1세가 채택한 신앙정책(settlement of religion)은 가능한 많은 국민들을 잉글랜드 국가교회(English Church)에 포함시킬 수 있도록 균형을 추구하였다. 왜냐하면 엘리자베스는 뚜렷하게 양극화된 왕국을 물려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전임자이자 이복언니인 메리 튜더는 잉글랜드에 교황(교황직papacy)의 관할권을 복원시키고 프로테스탄트들을 해외로 추방하였다. 따라서 엘리자베스는 아직도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교황주의자들, 그리고 이제 귀국하여 권력을 회복하려는 망명가들의 문제에 부딪쳤다. 그녀는 당시의 모든 통치자들처럼 왕국내의 다양한 신앙적 분파들(denominations)을 모두 허용할 의사는 없었다. 유일한 대안은 가능한 넓은 범위의 견해(opinion)를 포용하는 국가교회였다.

    이와동시에 그녀의 해결책은 그녀의 아버지 헨리의 신앙정책 보다는 더 급진적이었다. 여왕의 정책은 그녀의 통치 시작때에 의회에서 제정된 두가지 법률들에 근거하였다. [첫째로] 국왕수장권법(Act of Supremacy)는 헨리8세와 에드워드6세 치하의 연속적인 법률들을 복원하였다. 즉, 로마에 대한 항소와 교회세 납부를 다시 금지시키고, 그리고 성직자들의 복종, 주교를 지명하는 방법, 그리고 국교회에 대한 국왕의 권할권에 관한 법률들을 복원하였다. 또한 이러한 해결책은 국가교회나 국가의 모든 공직자들에게 수장권을 인정하는 서약을 요구하였다. 한편으로 엘리자베스는 국가교회에 대한 헨리시대의 칭호인 교회의 수장(supreme head) 대신에 최고통치자(supreme governor)라는 칭호를 선택하였지만, 이는 실질적인 권한이 아니라 명칭상의 변경일 뿐이었다. 즉, 그녀의 부친[헨리8세]이 주장하였던 권한들이 축소되지는 않았다. 더구나 이 법[수장권법]은 에드위드6세 치하의 법률들 일부를 통합하였기 때문에, 헨리의 입장보다 더 프로테스탄트 신학적인 입장을 승인하였다. 이보다 훨씬 중요한 것으로, 이 법률에 첨부된 일련의 단서조항들은 이단(heresy)을 성서 또는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첫 4차례 공의회의 결정들에 위배되는 것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 또는 성직자회의의 동의를 얻어 의회의 법률에 의해서 이단으로 선언된 것으로 정의하였다. 이는 의회에 이단의 구성요건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새로운 급진적인 시도였다.

    [둘째로] 신앙정책에 도입된 또다른 법률은 새로운 기도서를 공인하는 전례통일법(Act of Uniformity)이었다. 이 기도서는 사실상 에드워드 치하의 두번째 기도서였지만, 분명하였던 프로테스탄트적인 성격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여러가지 조항들을 약화시키고 새로이 개정하였다.

    따라서 엘리자베스는 본래 기도서의 문제에서 매우 빠르게 움직을 의도가 없었지만, 평민원은 귀국하는 프로테스탄트 망명가들의 입장에 공감하는 상당수의 위원들을 포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또한 기도서를 수장권법에 통합시킴으로써, 국왕수장권법을 하나의 전례통일법으로 전환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보다 보수적인 세력을 고립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에, 여왕은 사실상 그녀의 본래 대안을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성직자회의는 기도서를 제정하는데 어떠한 역할도 수행하지 못하였으며, 또한 이 기도서는 단순히 의회의 법률에 의해서만 승인되었다.[이러한 제정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이와는 반대로, 당시 보수파 성직자들이 상당수 포함된 성직자회의와 의회를 무시하고 프로테스탄트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길을 찾았기 때문이었다-역자]

    새로운 신앙정책은 지속적인 사회적 불안과 분열을 방지하지 못하였다. 퓨리탄 당파는 엘리자베스치하 내내 이러한 신앙정책에 계속해서 저항[반발]하였으며, 보다 급진적인 당파는 국왕 수장권과 하나의 국가교회라는 근본적인 윈칙들을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1566년 성직자회의에서 전례복의 사용문제에 관하여 패배한 이후로, 국교회내의 급진파들(dissidents반대파들)은 이제 의회를 통해서 저항하였다. 그들은 평민원에 신앙정책을 근본적으로 변경시키는 일련의 법안들을 제출하였다. 엘리자베스는 이러한 법안들을 반대하며, 의회가 왕권과 성직자회의에 개입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즉, 이러한 조치-이는 왕권초기의 행동들과는 일치하지 않지만-는 이론적으로 교회와 국가 사이의 협력이라는 이론적인 동등성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퓨리탄들은 계속해서 추가적인 개혁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엄격한 통제[제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국교회 거부자들(recusants)-왕국의 신앙정책의 수용을 거부하는 로마 가톨릭신자들-은 국교회 밖에 있었으며, 이들은 이 때문에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는 법적으로 승인된 단 하나의 그리스도교회만이 존재하였으며, 새로운 세대들이 성장함에 따라 법으로 규정된 국가교회는 이제 더이상 하나의 타협물로 인식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의 실재(기정사실 a thing in itself)로 인식되었다.

    엘리자베스 말기에 이르러, 리처드 후커는 잉글랜드교회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인식을 그의 유명한 저서인 <잉글랜드교회의 치리제도의 원리들에 관하여>에서 구체화하였다. 이 책은 국교회와 국가를 하나의 공동체사회(commonwealth)의 두가지 분리될 수 없는 측면들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퓨리탄들에 반대하며 ‘국왕의 지배권[권력]이 영혼의 안녕이 아닌 육체의 안녕을 위하여, 그리고 인간의 영원한 안전이 아니라 인간의 세속적인 평화를 위하여 봉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이며, 이는 마치 하느님이 인간들을 돼지처럼 살찌울 목적으로만 국왕들을 서임하였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논박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당시의 교회를 실질[현실]적인 근거들에 따라 옹호하는데만 관심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신앙정책을 옹호하는 것만큼이나 교회를 변형[변혁]시킬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순수한 그리스도교 사회를 염원하였으며, 그러한 사회에서 국왕의 권위는 법과 관습의 제한을 받으며 백성들 전체의 영성을 고려한다. 잉글랜드교회는 국민적 교회(nation at prayer)여야 한다는 사상은 정말로 후커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퓨리탄들은 엘리자베스치하 말기와 그녀의 계승자인 제임스1세의 치하에서 점점 더 적극적이었다. 찰스1세와의 [영국]내전에서 의회파는 퓨리탄들의 주장을 수용하였으며, 1643년에 이르러 잉글랜드교회를 장로제로 전환시키기 시작하였다. 마찬가지로 의회는 스스로 주교제 교파를 장로제 교파로 대체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히려 의회는 국가단위의 그리스도교회(국가교회, national Church)를 전보다 더 개혁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1643년 의회는 주교직을 폐지하고, 같은 해에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창설하였다.

    이 단체는 국가교회의 새로운 치리형태에 관하여 의회에 조언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물론 이 단체의 성직자들은 [기존의] 잉글랜드교회에서 서품을 받고 면허장(license)을 받았지만 신념에서 퓨리탄들이었다. 이 단체에 지명된 소수의 확고한 주교제 성직자들은 참가를 거부하였다. 이 총회에는 소수의 확고하고 시끄러운 독립파들(Independents)이 참여하였으며, 이들은 각 지역교회 (congregation)가 자신들의 업무와 교리와 사목직을 직접 결정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칼빈주의자 교리와 장로제적인 치리형태를 확고하게 지지하였다.

    그러나 의회와 총회는 정말로 잉글랜드를 장로제로 만들 궁리를 하기도 전에 평민원[의회]과 의회군대 사이의 의견차이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크롬웰 휘하 군대의 승리는 장로제주의에 대한 독립교회주의(Independency)의 승리로 결과하였다. 퓨리탄들은 분열되었으며, 신앙의 문제들에 대한 사적인 판단을 행사하는데 익숙하였다. 장로제 치리형태의 핵심이 교리와 치리형태에서 통일성[단일성]을 유지하도록 고안된 엄격한 권징제도라는 점을 주장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크롬웰의 공화정은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 역사에서 특별히 중요한 시기이다. 모든 실질적인 권력은 군대에 있었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행사하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공화정시기 내내 간헐적으로 제기된 헌법제정작업은 효율적이면서도 유순한 의회정부를 획득하려는 시도들이었지만,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호국경시대의 신앙정책은 독립교회주의를 확립시키려는 시도였으며, 이는 그 자체로 거의 모순이었다. 즉, 독립교회주의는 지역의 신앙공동체[즉, 지역교회]의 독립적인 주권[권한]을 지지하였다.

    공화정 치하에서 신앙의 자유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주교제파와 교황파는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하지만 때때로 그들의 활동에 대하여 묵인하였다. 일신론자들(유니테리안Unitarian)과 일부 과격한 종파주의자들(sectarians) 또한 때때로 제외되었다. 그러나 크롬웰의 신앙정책의 기본적인 의도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완성되지 않은 장로제형태를 수용하여 이를 확대한 것이었다. 즉, 설립된 한 위원회는 사목자들을 선발하였으며, 그들의 입장은 일반적으로 독립파, 장로제파 또는 침례파로, 새로운 국가교회의 일부가 되었다. 또 다른 위원회는 찰스1세 시대로부터 내려온 부적합한 성직자들을 국가교회에서 퇴출시키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발생한 포괄적이며 다양한 국가교회 이외에도, 상당한 정도의 관용이 다른 신앙인들에게 허용되었기 때문에, 최초로 여러가지 교파교회들이 번성하며 조직과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잉글랜드에 다양한 그리스도교 교파들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이것들이 너무 크고 확고하게 뿌리를 내림으로써, 왕정복고 후에 이들을 완전히 박멸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1661년 찰스2세의 귀환은 엘리자베스의 사례를 따라 새로운 신앙정책을 수립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며, 정말로 1662년의 새로운 전례통일법과 새로운 기도서는 이러한 기대의 결과였다. 마찬가지로 외국에서 귀환하는 망명가들이 있었으며, 그러나 이때에 그들은 국왕을 수장으로 하는 ‘잉글랜드교회(Anglican)’이자 주교제 국가교회를 주장하는 고교회파 성직자(High Churchmen)와 군주제주의자들이었다. 공화정의 국가교회 내에 있었던 장로제파 퓨리탄들은 새로운 신앙정책이 그들을 포함하지만 보다 과격한 종파들이나 독립교회파들을 배제할 것으로 희망하였다. 국왕 또한 귀환직전에 공표한 브레다 선언에서 ‘연약한 양심의 자유’를 약속하였다. 그는 귀환 직후에 또하나의 선언에서 장로제파를 수용할 수 있는 신앙정책을 약속하였으며, 소위 사보이회의에서 이러한 타협을 시도하였다. 이 회의는 실패하였으며, 사실상 옛 질서의 복원을 열렬하게 지지하는 의회는 새로운 신앙정책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이 신앙정책은 마찬가지로 국가교회의 최종적인 통제권이 평신도들의 수중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예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직자회의는 기도서를 개정하였으며, 주교직은 잉글랜드교회의 근본적인 부분가 되었다.

    소위 클래런던 법률들(Clarendon Code)은 국가교회의 신자가 아닌 자들에게 제한사항[제약]들을 부과하였다. 지방의 공직자들은 자치단체법(Corporation Act)에 따라 잉글랜드교회에서 성사[성체성사]를 받아야 했다. 1664년에 제정된 법[비밀집회법-역자]은 국교회 이외의 다른 단체들의 예배에 참석하는 행동을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5마일법은 국교회를 반대하는 성직자가 소도시나 도시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범법행위로 만들었다. 그러나 국교거부행위(nonconformity)는 사라지지 않았다. 잉글랜드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가교회 밖에 커다란 교파교회들이 존재하였으며, 이들은 다양한 처벌들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해체되지 않았다.

    국왕은 아마도 로마 가톨릭신앙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계속해서 비국교도들에 대한 처벌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663년 그는 국교반대자들이 받는 처벌의 일부를 완화시키는 관용령을 공표하였지만, 의회의 반대로 이러한 시도는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1668년 그는 또다시 장로제주의자들을 왕국의 신앙정책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하였으나, 또다시 의회가 동의를 거부하였다. 1670년 그는 다시한번 국왕의 대권을 이용하여 의회에서 제정하였던 일부 법률들의 시행을 중지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국가교회에 순응하지 않는 자들을 처벌하는 모든 형법들이 중지된다면, 잉글랜드교회[왕국교회]는 그 특권을 보호받지 못할 것이었다. 의회는 국왕의 관용령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였으며, 1673년에 심사법(Test Act)을 제정하여, 국왕 치하에 있는 모든 공직자들에게 수장권에 대한 서약을, 화체론에 대한 거부를, 그리고 잉글랜드교회에서 [성찬]성사를 받을 것을 요구하였다.

    국교제도에서 가장 급진적인 변화는 아마도 18과 19세기에 발생하였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잉글랜드의 불문 헌법이 급격하게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즉, 입헌군주제, 의회정부 그리고 내각책임제 모두가 이 시기에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국왕은 한동안 계속해서 각료들을 선택할 권한을 보유하였지만, 각료들은 점차적으로 기본적으로 의회에 책임졌다. 내각 또한 출현하기 시작하였지만, 집합적인 내각책임제가 확립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였다. 빅토리아가 국왕이 되었을 때[1837] 조차도 정부에 대한 평민원[하원]의 정치적인 통제권은 아직 왕권을 완전히 배제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평민원[하원]의 수중으로 전환되고 있었으며, 정당제도가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하원에서 다수의 의석을 차지한 자들이 통치권을 부여받는 자들이었다. 이제 국왕의 대권은 국왕의 직접적인 책임으로 독자적으로 실행되는 경우가 훨씬 줄어들었다. 즉, 국왕은 반드시 각료들의 조언에 따라 행동하여야 한다는 것은 이제 관행이 되었다.

    19세기초에 국교제도는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국교회는 잉글랜드가 그리스도교 국가라는 특징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성직자들과 마찬가지로 정치가들도 정기적으로 국교회를 ‘헌법의 일부’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국교회의 지위와 기능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국가의 법적인 체계에 규정된 것으로, 분명하게 정의되고 확고한 구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1888년에 에드워드 킹-링컨주교-이 불법적인 의례행동들(ritualist practices)로 고발되었을 때, 켄터베리 대주교는 종교개혁 이후로 단 한차례만 기능하였던 [특별]법원을 복원시켜야 했다. 이 법원은 실제로 중세기에 대주교들이 교황의 대리인이었다는 사실에서 유래하였으며, 또한 법적인 정당성을 의심받았다. 누구도 이 법원이 정말로 존재하였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또한 누구도 이 법원의 권위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법정의 판결을 추밀원-교회문제들을 심사하는 최종법원-에 항소할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따라서 19세기말에 이르러 국교제도는 혼동스럽고 이해하기 힘든 것이 분명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그동안 헌법이 변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부분적으로 1828년과 29년에 로마 가톨릭신자들에게 정치적인 권리들을 부여하는 법률의 제정이나 심사법과 자치단체법의 폐지 때문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정부의 관행들에서 나타난 변화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의 중요성은 정말로 인식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잉글랜드교회는 더이상 국가의 교회가 아니었다. 이 교회는 여러 그리스도교회들중 하나였다. 이 교회는 특별한 권한들을 보유하였지만, 또한 항상 변화하는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법적 체계에 구속되었다.

    놀랄 필요도 없이 국교제도에 대한 반대가 상당하였다. 초기에 이러한 반대는 십일조세, 교회세와 교육의 문제들에서 국가교회의 특권들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비국교도들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국교제도 자체라는 전체적인 사상이 구태의연하고 비효률적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로부터 나왔다. 예를들면, <The Extraordinary Black Book of 1831>[John Wade의 책]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교회수입이 유럽의 다른 모든 교회들의 총수입 합계보다도 더 많으면서도, 매우 비효률적으로 사용되어 전체 인구의 3분의1에만 봉사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비효율에 대한 비난에 대하여 찰스 제임스 블롬필드(런던주교, 1828-56)와 국교회 특별위원회(교회재산 조사Ecclesiastical Commission)가 주로 응답하였다. 특별위원회(Commission)는 대성당 참사회(성직자회chapter)의 크기와 수입을 제한하고, 각 교구의 수입을 균등 분배하며, 그리고 새로운 교구의 설립을 준비하였다. 위원회는 또한 가난한 성직자의 급여를 보충해주는 중앙의 기금을 설립하였다. 따라서 이 위원회는 잉글랜드교회의 중앙 행정기구의 첫번째 구성요소를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19세기는 또한 국교제도의 이론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옥스퍼드운동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초기에 소책자운동가들은 현상유지(status quo)를 옹호하였으나, 그 이후에야 국가와의 연결을 비판하였다고 때때로 지적받았다. 1833년 존 키블의 유명한 설교인 ‘국가의 배교행위’에서 분명하게 입증된 것처럼, 사실상 그들이 옹호하였던 것은 국가와의 이상적인 관계였다. 정말로 소책자운동가들의 글들중 상당수는 ‘이상적인 국가교회’를 규명하려는 시도에 관심하였다.

    이 시기에 나타난 국가교회의 이상에 관한 중요한 저서들로는 사무엘 테일러 코울리지의 <The Constitution of Church and State>(1820), 토머스 아놀드의 <Principles of Church Reform>(1833), 그리고 W. E. 글래드스톤의 <The State in its Relations with the Church>(1838)였다.

    코울리지는 신앙과 정치가 각각 서로 다른 그 나름의 고유한 관심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그의 입장은 중요하였다. 그는 이러한 관심사들을 역사적 사건들에서 완전하게 실현될 수 없는 필수적인 규정적인[정식] 개념들인 ‘이상들’이라고 불렀다. 국가는 국민들에 관심하고, 교회는 인간[성]을 특징짓는 이러한 특질들(qualities)과 권한들(faculties)의 균형잡힌 발전을 권장하는 일에 관심한다. 그러나 코울리지의 글에서 ‘교회’란 이상적인 그리스도교회의 초월적인 신학적 개념도 아니고, 실제적인 잉글랜드교회도 아니다. 그것은 예술, 과학, 문학과 학문적 연구를 포함하는 국가의 모든 영성적 자원들의 총계를 말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뉴먼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었다 하더라도, 실질적인 국교제도의 발전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아놀드 토머스의 <Principles of Church Reform>은 실용적인 측면들에 더욱 관심하였다. 그의 근본적인 전제는 신학적 명제들의 진리를 확실하게 입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리적인 불일치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그는 국가단위의 교회(national Church)는 교의적인 공식문들과 신앙생활[practice예식]의 통일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포괄적이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이러한 교회가 진정으로 국민적인[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국가교회일 것이라고 믿었다.

    젊은 시절 정치초년생이자 토리파일 때 집필하였던 글래드스톤의 저서는 현존하는 형태의 국교제도를 옹호하였다. 그의 저서가 기존의 국교제도 옹호론과 다른 점은 교회가 국가와의 연결을 수용하는 것이 적합한가를 질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에 국가가 국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적합한 이유를 질문하였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는 두가지 측면들이 있었다. 첫째로, 정치와 정부는 반드시 도덕적 차원을 가져야 하며, 국가는 반드시 해야할 일들-이것들이 적절한지 여부에 관계없이 옳은 것들이기 때문에-이 있다. 따라서 국가는 (국교회를 설립함으로써) 특정한 믿음들을 수용한다고 선포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로, 앞의 문제와 연관된 결과로서, 그는 국가가 진정한[참] 교회를 옹호하는 의무를 갖는다고 믿었다.

    글래드스톤은 이러한 이론을 유지하기가 점점 어려웠다. 1840년에 이르러, 이 주제에 대한 두번째 저서인 <Church Principles Considered in their Results>에서 그는 교회의 신적인 권위을 더욱 확고하게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부분적으로 프로테스탄트 비국교회(Free Churchmen)의 지지에 의존하는 자유당원(Liberal)으로서, 잉글랜드교회가 유일한 참 교회라고 주장하기는 정치적으로 곤란하였다. 그리고 그가 아일랜드 정부의 책임자가 되었을 때, 국교회의 신자들이 거의 없으며 국교회를 정당화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지역에서 그렇게 주장하기는 도덕적으로 더욱 어려웠다. 더구나 잉글랜드가 점점 세속적인 사회가 되어감에 따라, 진리를 제정하는 것[국교회-역자]에 대한 소책자운동가들의 이상들은 사회에서 유지되기도 법에 의해서 지지를 받기도 어려웠다.

    국교제도의 어려움들과 변칙들중 일부는 식민지들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났다. 엘리자베스의 국왕수장권법은 국왕의 모든 영토들에 있는 교직자들과 소송들에 대하여 국왕의 관할권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국교제도는 자동적으로 식민지로 확대되었다. 이것은 국가가 신앙을[교회를] [재정적으로] 후원한다는 이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왜냐하면 장려금은 종종 식민지에 있는 모든 교파들-로마 가톨릭교회 포함-에 지원되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카나다에서 성직자 지원을 위한 특별보유지에 대한 논란처럼, 정부의 재정적 지원은 때때로 국교제도에 대한 대안정책이었다.

    국교제도는 식민지들에서 잉글랜드 국왕의 대권의 일부로서 존재하였다. 그것은 잉글랜드교회의 최고통치자와 그 교회의 신하들 사이의 개인적인 연결고리였다. 이것은 스코틀랜드교회가 영국의 식민지들에서 그와 비슷하게 설립될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서 입증된다. 즉, 스코틀랜드의 신앙정책은 주권자에 귀속된 교회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국교제도는 영토 뿐만 아니라 인물들에도 관심하였다는 증거는 일부 식민지에서 법으로 규정된 교회들이 하나 이상일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나폴레옹전쟁 동안에 네델란드로부터 획득한 남아프리카의 케이프 식민지에서 네델란드 개혁주의교회(Dutch Reformed Church)는 영국이 획득하기 이전에 보유하였던 모든 특권들을 보장받았다. 이는 잉글랜드교회가 식민지에서 ‘법으로 확립된’ 교회라는 기존의 가설에 영향을 주었다.

    찰스1세때에 추밀원의 명령에 의해서 런던주교는 식민지들에 주교관할권을 행사하였지만 효율적이지 못하였다. 인도와 여러 식민지들에 대한 주교들이 축성되었으며, 일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미국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영국의 영토에 있는 주교들은 잉글랜드의 주교들처럼 그들의 주교축성을 합법적으로 만드는 국왕의 특허장(letters patent)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법적인 지위는 잉글랜드교회의 주교들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식민지의 주교들이 그들의 교구에 도착하여 법규를 공표하고, 잉글랜드의 관습을 현지에 적응시키거나 교구의 재정적 기반을 확립하려할 때에, 그들은 일종의 교회회의[교구의회]가 바람직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직자의 복종을 규정한 헨리8세의 법률은 구체적으로 국왕의 허가없이는 어떠한 교회회의[의회]의 소집을 금지시켰으며, 국왕이 지역의 세속적 통치권으로부터 독립된 권위를 행사하려는 교회법률들을 제정을 하는 것이 불합리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은 아마도 식민지들의 교회가 교회회의를 소집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률을 제정하도록 영국의회를 설득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1853년 켄터베리 대주교는 이를 허용하는 법안을 귀족원[상원]에 제출하였으나, 평민원[하원]에서 거부되었다. 정말로 일부 식민지 주교들은 이러한 제안에 불쾌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이 제안은 교회를 국가에 너무나 확고하게 종속시키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국교제도라는 미묘한 개념을 식민지들에 적용시킨다는 것이 극히 어려운 일로 입증되었다. 그리고 잉글랜드인 식민지 거주자들이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아시아 또는 오스트랄라시아에 있는 ‘잉글랜드인들의 교회’(Church of English)의 존재와 일치한다고 인식하였다 하더라도, 모든 식민지들이 이주민 식민지들이 아니었다. 영국의 해외영토 상당수는 잉글랜드 국민들의 이주지가 아니라 그들에 의해서 통치되는 곳이었다. 흑인들이 살고있는 아프리카에서 ‘로마의 주교는 이 잉글랜드의 영토에서 관할권을 갖지 못한다’는 논제를 포함한 신앙조항에 서명을 요구하는 것은 분명히 이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칙이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1857년의 ‘이튼칼리지’ 판결은 독립적인 입법기구를 설치함으로써 국왕의 전권을 제한하였던 식민지들에서 처음으로 국교제도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까지 해외의 국교회[성공회]들 일부는 이미 교회회의에 의한 치리형태 (synodical government)를 실험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이후로 이러한 기구를 설립할 이유들이 없었던 해외의 교구들도 사실상 스스로 조직과 권징의 형태를 고심하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람베스회의는 교회헌장(constitution)의 원형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이제 막 탄생하기 시작한 [독립적인] 성공회 관구교회들이 스스로의 치리형태의 기본이 되었던 세가지 모델들중 하나였다. 다른 두가지는 1853년 켄터베리 대주교의 법안과 미국성공회의 헌장이었다.

    국교제도의 문제는 남아프리카에 있는 국교회[성공회]와 관련된 일련의 법적인 소송들에서 위기에 다다랐으며, 이는 구약성서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방법을 이유로 콜렌조 주교를 이단으로 처벌하려는 시도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연관되었다. 그는 대주교 관할권을 주장하는 케이프 타운의 주교가 설립한 교회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유죄평결과 파문을 받아 교구장직에서 면직되었다.

    그러나 케이프 타운의 주교인 로버트 그레이는 이미 교회회의의 소집에 따른 문제들에 직면하였으며, 다른 식민지의 주교들처럼 국왕의 법집행자들로부터 상반되는 조언을 받았다. 그러나 카나다와 뉴질랜드에 있는 주교들은 이 똑같은 공직자들로부터 교회회의를 소집하는데 아무런 법적인 장애가 없다고 들었다. 따라서 그레이는 1856년 케이프 타운에서 교회회의(synod)를 소집하였다. 그의 성직자중 하나는 이 회의에 참석하기를 거부하였으며, [본국] 추밀원의 사법위원회는 주교와 그의 교회회의는 이를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자들에게만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 또한 이 위원회는 케이프가 독자적인 입법부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주교에게 발행된 국왕의 특허장(letters patent)은 무효라고 판결하였다. 따라서 주교는 반항적인 성직자에 대한 [징계]권위를 갖지 못하였다.

    이러한 판결이 전달되기 전에, 그레이는 콜렌조를 이단죄로 재판에 회부하였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권위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콜렌조는 그에게 교회법에 따른 복종을 서약하였으며, 따라서 이는 자발적으로 그의 관할권을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법위원회는 국왕의 특허장이 [해외에서] 무효이기 때문에, 콜렌조는 서약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결하였다. 이 위원회는 또한 어느 주교도 합법적인 특허장을 보유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두 주교는 국왕에 의해서 교직자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오직 국왕만이 그들을 해임할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

    따라서 콜렌조는 파문판결이후 그의 급여를 중단시켰던 식민지 주교기금(Colonial Bishoprick’s Fund)에 그의 급여를 지불하도록 소송하였다. 재판장인 로밀리 경은 이 소송을 심리한 후 국왕이 임명한 교직자들은 잉글랜드교회의 이름으로 재산을 보유할 수 있는 법인체(corporation)이며, 이런 의미에서 이튼칼리지 판결이후로 추밀원의 모든 판결들에도 불구하고, 법으로 설립된 잉글랜드교회는 식민지들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

    남아프리카 교회는 법원들에서 만들어낸 혼란을 겪은 후에 추밀원의 관할권을 거부하는 헌장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1882년 남아프리카의 또 다른 소송에서 [추밀원의]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는 [식민지의] 교회는 잉글랜드교회와 똑같은 교회일 수 없다고 판결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성공회의 대다수 교회들은 법으로 설립된 교회[국가교회]들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그들의 공동체적인 생활을 국교제도가 아닌 자발적인 계약에 근거시키는 헌장들을 채택하였다. 예를들면, 미국성공회는 국가의 법에 의해서 설립되지 않았으며, 스코틀랜드 성공회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성공회 관구들은 마치 잉글랜드의 자유교회들[비국교회들]과 비슷하게 국가와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세속법원들-이곳에 항소한다면-은 이 교회들의 권징절차들을 마치 경마클럽[자치단체]의 그것과 유사한 것으로 인식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관구들의 수는 계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아일랜드교회[성공회]는 1871년에, 웨일즈교회는 1920년에 국교제도에서 해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영국의 국왕이 통치하던 광대한 해외영토들은 독립하였다. 오늘날 확실하게 국교로 제정된 교회는 세계성공회에서 잉글랜드 밖에 없다.

    심지어 잉글랜드에서도 국교제도는 계속해서 변형되었다. 1903년에는 10년전부터 성직자회의의 개혁과 평신도의 참여를 보장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국교회 입법준비기구(Representative Church Council)를 설립되었다. 1917년 윌리엄 템플은 국교회의 자치를 요구하는 생명과 자유(Life and Liberty) 운동을 출범시켰으며, 1919년 국교회의 전국총회(Church Assembly)를 설립하는 권한이양법(Enable Act)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즉, 의회는 국교회의 업무에 소모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기구의 복잡한 성격은 1920년대에 기도서의 개정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났다. 즉, 장기간의 개정과정중 각 단계마다 성직자회의와 전국총회에서 심의를 받아야 했으며, 그런 다음에도 여전히 의회의 인준을 받아야 했다. 성직자회의와 전국총회에서 승인을 받은 제안기도서는 1927년에 의회로 이송되었다. 하지만 상원에서는 통과되었지만, 하원에서는 부결되었다. 교회의 입법기관들에 의해서 특정부분을 수정한 후에 다시 [의회로] 이송하였지만, 또다시 부결되었다. 이 때문에 켄터베리관구의 주교들은 이 개정기도서를 공인된 기도서처럼 취급한다고 선언하였다.

    국교제도의 해제는 한동안 뜨거운 쟁점이었다. 그리고 국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는 20세기 내내 이런 저런 방식으로 논의되었다. 3개의 특별위원회들은 이러한 관계에 대한 가능한 개정방식에 대한 보고서들을 발표하였다. 1969년 잉글랜드교회의 전국의회(General Synod)-하부조직으로 교구의회와 교무구(deanery) 의회와 함께-는 전국총회(General Assembly)를 대체하였다. 전국의회는 교회법 체계를 개정하고, 대안예식서를 승인하고, 주교를 지명하는 새로운 방법을 채택하였다. 전국의회는 교리와 예배의 문제에서 자치권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에는 의회의 창작품이었으며, 그 후에도 두 기관 사이의 대립은 몇차례 발생하였다. 위기들은 해결되기 보다는 회피되었으며, 1928년 기도서에 대한 논쟁처럼 힘겨루기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에 왕세자의 이혼 그리고 ‘신앙의 수호자’(Defender of the Faith) 보다는 ‘신앙의 지지자’(defender of the faith)가 되겠다는 왕세자의 발언 때문에, 현재의 형태로 국교제도가 지속될 수 있는지에 점점 의문을 갖게 되었다. 노동당과 자유민주당은 상원의 개혁을 공언하고 있으며, 잉글랜드교회의 주교들이 권리로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상원에 계속 참여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94년 전국의회가 온건한 첫번째 조치로 주교의 임명권을 국왕으로부터 제거하는 조치를 채택하자는 제안은 전국의회에서 필요한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하였다. 아마도 국교제도의 해제는 잉글랜드교회의 요청보다는 국왕 또는 의회 또는 다른 세속적인 변화들에 의해서 시작되는 점진적인 과정에 의해서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국교제도는 국교회를 적어도 일부 측면에서 국가의 종[하인]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성공회 전통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며, 정부에 도전하기를 기피한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남아프리카와 우간다와 같은 세계성공회의 다른 지방들에는 교회가 정부의 정책들과 행동들을 분명하게 정죄하였다. 심지어 잉글랜드에서도 교회는 최근에 권력을 장악한 정당을 비판하였다. 당연히 이는 부분적으로 이 글의 서두에서 지적한대로 권력의 본질에 관한, 그리고 정부와 그리스도교 시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형태에 관한 새로운 인식에 따른 결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국교제도의 전통이 성공회신자들에게 종교[신앙]란 공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정치형태와 관련된 오랜 역사는 곧 성공회 교회가 정치적 행동들을 요구하는 여러가지 쟁점들을 숙고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공회는 이러한 문제들에 입장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였으며, 정치적인 행동들은 신학적, 신앙적, 도덕적 차원을 포함한다는 점을 이미 인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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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10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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