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신학 및 역사 이야기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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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퓨리탄 국가교회 (The Puritan church)

    1640년대와 50년대의 급변하는 혼란스런 정치적 신앙적 환경속에서, 그리고 혁명시대의 보다 자유로운 신앙활동 분위기속에서 나타난 다양한 신앙집단들은 다양한 교리적 전례적 입장들을 채택하였다. 내전과 공위시대동안 연이은 의회정권과 군사정권들은 확고한 칼빈주의 신학을 유지하며, 예정론교리를 엄격하고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국가교회를 관장하였다. 하지만 상당수 왕국민들은 이러한 순수한 칼빈주의를 수용하지 못하고 대안적으로 구원론에 관한 반칼빈주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일부는 윌리엄 로드를 넘어 리처드 후커의 전통으로 복귀하였으며, 일부는 예정론을 전면 거부하고 모든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를 선호하는 분리주의자 집단들-General Baptists, Seeker, 퀘이커-에 가담하였다.

    전례활동에서도 이 기간동안에 이와 비슷한 다양성이 분명하게 나타났다. 1645년에서 1660년 사이에 국가교회의 공식적인 전례는 장로제인 공공예배지침서 (Directory for Public Worship)-이제 불법이 된 공동기도서 예식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예식들 수록-로 대체되었다. 새로이 축소되고 단순화된 의식들은 1559년 공동기도서에서 엘리자베스와 초기 스튜어트왕조에서 퓨리탄들이 반대했던 특색들을 제거하였다. 예를들면 세례예식에서 십자성호긋기와 대부모제를, 결혼례에서는 반지와 신랑의 서약을 제거하였다. 장례는 성직자 없이도 가능하였으며, ‘묘지 까지의 행진동안과 묘지에서 기도, 성서낭독과 찬송’을 모두 금지시키고 슬픔과 애도의 외적인 표현을 강력히 금지시켰다.

    지침서는 모든 의례를 완전히 제거하였기 때문에, 대중적인 지지를 확보하는데 실패하였다. 1640년대 후반기와 50년대 동안에 상당수 성직자들은 기존의 기도서 전례에따라 예식을 집례하였다. 많은 여성들은 지침서에서 공식적인 출산기념예식을 삭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예식을 지켰으며, 1653년 둔부의회에서 교회 결혼식을 금지시키고 이를 치안판사 주재의 민간의식으로 대체하였을 때 수백쌍의 결혼예정자들은 교회예식을 위하여 성직자들을 찾아다녔다(Durston, 1989).

    기존 예식들에 대한 지지는 여전히 강력했지만, 또다른 극단에 있는 급진적인 집단들은 1650년대에 매우 혁신적인 전례활동을 채택하였다. 이들중 상당수는 기존의 전문적인 사목자 개념을 폐기하고 평신도들의 설교와 예식 집례를 허용하였다. 또한 이들은 지정기도문을 거부하고 예배때마다 즉석 청원기도를 도입하였다. 한편 퀘이커들은 규정된 예식 자체를 거부하고, 남녀신자들이 성령의 감동에 따라 자유로이 발표할 수 있는 비형식적이며 비구조적인 예배형태에 채택하였다. 이러한 교리적 전례적 혼란상태(Babel)는 1660년 군주제의 복원때까지 지속되었다. 당대인들은 이러한 현상을 왕국교회 권위의 몰락에 따른 당연하면서도 유감스런 결과로 인식하였지만, 일부는 신앙자유를 위한 긴 투쟁으로 얻은 영광스런 결실로 이해하였다. 찰스2세의 복원때에 많은 사람들은 1650년대의 자유로운 포괄적인 전통이 유지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결국 복원된 왕국교회(Anglican Church)의 교리적 전례적 범위는 좁게 규정되었으며, 공위시대 동안에 자유로운 예배활동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교리와 전례활동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되었다.

    10. 왕정복고시대의 왕국교회 (The Restoration Church)

    찰스2세의 치하 동안에 주류 왕국교회의 신학은 꾸준히 예정론적인 신앙을 이탈하여 구원론에 관한 수정된 형태의 로드파 입장을 선호하였다. 리처드 앨리스트리와 제레미 테일러와 같은 유명한 성직자들은 이중예정론을 거부하고, 신자는 신의 은총에 협력해야하며 신성함(holiness)과 복종은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쳤다. 이럼으로써 그들은 왕국교회를 16세기초 토마스 크랜머의 주장에 근접하는 구원론적인 입장으로 복귀시켰다(Clifford, 1990; Spurr, 1991).

    1662년에 제정된 새로운 기도서에 나타난 복원된 왕국교회의 전례는 1559년 기도서의 보수적인 특징들과 로드파의 신앙활동들을 포함하였다. 기도서는 또다시 전례복의 사용, 세례때 십자성호긋기, 결혼례의 반지사용, 제대 가로대에서 성찬배수때 무릎꿇기를 요구하였으며, 이것들에 대한 반대를 ‘위험스런 결과나 …어리석고 무익한 결과만을 야기시킬 뿐’이라고 비난하였다. 더구나 성찬례 에서는 1637년 스코틀랜드에 강요하려다 치명적인 패착이 되었던 기도서의 일부 문구를 포함하였다. 1662년 전례통일법은 성직자들에게 39개 신앙조항과 기도서의 모든 사항들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제한적인 신앙적 표준(orthodoxy)은 이후 반세기동안 지속되었으며, 이를 수용할 수 없었던 수백여명은 왕국교회를 포기하고 비국교도(non-conformist) 또는 반대자(dissent)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7세기말 동안에 칼빈이나 로드보다 훨씬 유화적인 전통을 공부한 성직자들이 왕국교회에서 영향력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리처드 후커의 신학에 근거하여 핵심교리를 최소화하고, 대다수 쟁점들을 아디아포라(adiaphora)-‘사소한 문제들’ -로 규정하여 개인의 양심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신앙적인 논쟁을 축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교리와 의식의 문제에 대한 폭넓은 관용조치를 지지하였다. 내전이전 기간에 이러한 접근방식을 선호하였던 사람들은 옥스퍼드셔의 그레이트 튜에 있는 루시어스 케리(포클랜드경)의 자택에 모여 신학을 토론하였다. ‘그레이트 튜 모임’의 포클랜드경과 존 헤일즈(John Hales), 윌리엄 칠링워스(William Chillingworth)등은 엄격한 교의를 반대하며, ‘개인의 이성에 비추어’ 성서를 해석할 수 있는 평신도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이들중 일부는 1640년대의 폭력적인 신앙투쟁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포크랜드의 경우 마지못해 국왕을 위하여 싸웠지만 1643년 뉴베리 전장에서 자살하였다. 공위시대동안에 이러한 온건한 입장은 캐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엠마누엘 칼리지중심의 학자들- 의 저서에서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이들중 특히 유명한 헨리 모어, 랄프 커드워드와 밴자민 위치코트는 비교의적이며, 개방적이자 이성적인 형태의 왕국교회 신앙을 주장하며, 잉글랜드 프로테스탄트들의 대통합을 추구하였다.

    왕정복고이후 이러한 전통은 점차적으로 확산되어, 1691년 이들중 하나인 존 틸롯슨이 캔터베리 대주교에 임명될 때까지 왕국교회 신학의 주류가 되었다. 이들은 반대자들(dissents, 프로테스탄트 비국교도)에게 관용적이었으며, 신앙적 교리와 이성사이의 관련성에 관심를 갖고 초기 자연과학자들의 업적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전통적으로 이들을 광교회주의자들(Latitudinarians)이라고 명칭하지만, 존 스퍼는 이 용어의 사용을 반대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 용어는 모호하고 비속어로, 예정론적인 신학으로부터 전면적인 후퇴로 배신감을 느낀 퓨리탄들에 의해서 사용되었다(Spurr, 1988, 1991). 그러나 어떤 명칭을 사용하든, 틸롯슨과 같은 성직자들은 17세기말 왕국교회에 중요한 새로운 차원을 도입하였으며, 18세기의 신앙적 지적인 환경의 구성요소들을 예시하였다.

    참고문헌과 추천도서

    2008년 5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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