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ning: Creating default object from empty value in /home/skhcafe/liturgy/my-plugins/post-meta/post-meta.php on line 18

Warning: Creating default object from empty value in /home/skhcafe/liturgy/my-plugins/post-meta/post-meta.php on line 21

Warning: Creating default object from empty value in /home/skhcafe/liturgy/my-plugins/post-meta/post-meta.php on line 24

Warning: Creating default object from empty value in /home/skhcafe/liturgy/my-plugins/post-meta/post-meta.php on line 27

Warning: session_start(): Cannot send session cookie - headers already sent by (output started at /home/skhcafe/liturgy/my-plugins/post-meta/post-meta.php:18) in /home/skhcafe/liturgy/my-plugins/bb-topic-views.php on line 18

Warning: session_start(): Cannot send session cache limiter - headers already sent (output started at /home/skhcafe/liturgy/my-plugins/post-meta/post-meta.php:18) in /home/skhcafe/liturgy/my-plugins/bb-topic-views.php on line 18

Warning: Creating default object from empty value in /home/skhcafe/liturgy/bb-includes/functions.php on line 1513
번역: The Study of Anglicanism-Anglicans and Mission « 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번역 프로젝트 자료

번역: The Study of Anglicanism-Anglicans and Mission

(
Deprecated: Function eregi() is deprecated in /home/skhcafe/liturgy/bb-includes/gettext.php on line 294
1)
  1. Cranmerian
    회원

    성공회와 선교

    T. E. Yates

    성공회는 보편적 교회(세계 그리스도교회Church universal)의 선교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교회와는 달리 선교에 대한 성공회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공식적인 이론집은 없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경우, 제2차 바티칸회의 이후 발표된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Dogmatic Constitution of the Church, Lumen Gentium),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Decree on the Missionary Activity of the Church, Ad Gentes),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Declaration on the relationship of the Church to the non-Christian Religions, Nostra Aetate)과 같은 문서들은 선교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공회의 입장은 개별 [관구]교회의 선교활동과 개인들의 저서들에 대한 연구 그리고 간헐적으로 발표된 공식문서들의 언급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추구될 수 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드러난 성공회 선교의 특징적인 강조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교회를 이식시키고 토착[현지]인 사목직을 양성했다는 면에서 토착화(현지화indigenization)를 강조하였다. 일찌기 1765년에 서품받은 아프리카인인 필립 콰쿠(Philip Quaque)는 아프리카의 서부 해안지방에서 50년동안 사목활동을 하였다. 그는 특별한 사례였지만, 그이후에 인도의 압둘 마시(1825년에 서품), 카나다 인디언인 헨리 버드(Henry Budd, 1850), 그리고 해방된 노예이자 최초의 아프리카인 주교가 된 새무얼 크로우더(Samuel Crowther, 1864년에 주교축성)를 꼽을 수 있다. 둘째로, 교육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물론 이는 개종자 또는 첫 현지인 사목직을 훈련시키려는 목적이었다. 바베이도스[서인도제도]의 코드링턴 칼리지는 1745년에 학교로 설립되었으며, 1830년에 신학대학으로 재설립되었다. 캘커타의 비샵스 칼리지(Bishop’s College)는 1820년에 설립되었으며, 시에라리언의 포라베이(Fourah Bay) 칼리지는 1827년에 설립되었으며 첫 학생들중 하나가 새무엘 크로우더였다. 오클랜드(Auckland, 뉴질랜드)의 성요한 칼리지는 1847년 SPG의 5천파운드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이들 교육기관들은 성공회 선교활동의 특징인 유명한 교육기관들중 일부이다. 이 두가지 강조점들 외에도, 성서와 성공회 기도서를 현지어로 번역하는 활동을 강조하였다. 1872년 순교한 멜라네시아의 존 패터슨(J. C. Patterson)처럼 순교한 주교들이나 1884년[1885년초] 우간다의 소년 순교자들과 같이 선교현장의 영웅들 이외에도, 선교활동에 대한 이론가들과 저술가들도 있었다. 이들은 이러한 분야에서 전체 그리스도교회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들중 일부를 언급한다면, 사상가이자 선교전략가들로는 헨리 벤(Henry Venn), 로랜드 앨런(Roland Allen)과 맥스 워렌(Max Warren)을, 학자로는 스티븐 닐(Stephen Neill) 주교와 케네스 크랙(Kenneth Cragg) 주교를 꼽을 수 있다.

    초기단계: 18세기

    1662년 공동기도서는 함께 살고있는 주위의 비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성공회신자들의 책임을 인식하였다. 즉, ‘성년후보자를 위한 세례’ 예식은 ‘신앙으로 개종하는 우리의 대농장지 원주민들과 다른 사람들을 세례하는데 항상 유용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에 잉글랜드교회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포교성성(Sacred Congregation for the Propagation of the Faith)(약칭으로 포교국Propaganda)(1622)의 설립과 로마 가톨릭 선교사 로버트 드노빌리(Robert de Nobili 1577-1656)-인도의 브라맨들(승려계급) 사이에서 활동-의 선교활동, 그리고 장로교회 선교사 존 엘리어트(John Eliot, 1604-90)-북아메리카의 이로쿼이족 인디언들 사이에서 선교활동-에 상당하는 인물들이 없었다. 17세기말에 워리크셔 셀던교회의 관할사제인 토마스 브레이(Thomas Bray, 1656-1730)-그의 활동은 이 책의 앞글에서 언급되었다(p. 40 참조)-는 성공회의 첫 선교단체인 SPCK(1698)를, 그리고 18세기초에 SPG를 설립하였다. 윌리엄3세의 국왕특허장(Royal Charter)으로 설립된 SPG는 ‘해외에 있는 대농장지들, 식민지들 그리고 공장들’에 ‘학식있고 정통신앙를 갖춘 성직자들의 부족’을 충당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바로 이러한 제한때문에 SPG가 아니라 SPCK가 인도의 트랭쿼바에서 활동하는 덴마크 선교활동을 지원하였으며, 잉글랜드의 국왕이 통치하지 않는 지방들에서 독일 선교사들-일부는 루터교 성직자들-을 고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PG는 처음부터 두가지 책임, 즉 ‘우리 왕국민들을 위하여 활동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가의 신앙을 정착시키는 것 [...] 그리고 그후에 원주민들의 개종을 최선의 방법으로 실행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들에 전속사제들(chaplains)을 공급하는 것 이외에도, SPG는 1704년에 뉴욕주의 북부에 있는 올버니에서 모호크족 인디언들 사이에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이들중 4명을 런던에서 앤 여왕을 알현하도록 주선하였다. 여왕은 이들에게 ‘모호크족의 인디언 예배소에서 사용하도록’ 은으로 만든 성찬용 접시[성반] 세트를 선물하였다. 또한 뉴욕의 흑인 인구들에 대한 선교활동도 시작되었다. 18세기 대농장지 주인이었던 크리스토퍼 코드링턴-바베이도스 총독-은 1710년 그가 소유하였던 흑인노예들과 토지를 SPG에 유증하였다. 이 기부로 1745년에 코드링턴학교를 설립하였으며, 후에는 대학으로 전환하여 많은 성공회 성직자들을 양성하였다. 마지막으로 노예들의 비참한 처지때문에 SPG의 선교사들중 하나인 토머스 탐슨은 아프리카의 서부해안을 다시 방문하였다. 그의 주도로 세명의 아프리카 소년을 잉글랜드로 유학보냈으며, 이들중 하나인 필립 콰쿠는 1765년에 최초로 비유럽인 성공회사제로 서품받았다.

    미국의 독립전쟁으로 SPG의 활동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1781년 영국군의 항복후에 SPG의 선교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선교회는 미국교회를 지원하는 거의 80년 동안에 300명의 성직자를 후원하였으며, 그중 100명은 미국교회에서 활동중 사망하였다.

    자원선교단체들의 시대: 19세기

    SPG는 토머스 브레이의 개인적인 주도로 그리고 국왕의 후원와 특허장으로 제한을 받는 선교단체였지만, CMS(Church Missionary Society, 국교회선교회)는 그러한 제한을 받지않는 자원단체(voluntary society)였다. 18세기말에는 다양한 선교단체들이 설립되었다. 그중에서 범교파적인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1795년에 설립)는 성공회 복음주의자들에게 모델을 제공하며 기폭제가 되었다.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토론그룹인 <Eclectics Society>는 LMS와 초교파적인 영국과 외국의 성서협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와 같은 단체에 참여함으로써 교회당파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쉽게 받았다. 찰스 시메온(Charles Simeon)은 이러한 비판과 ‘이교도’에 대한 순수한 관심으로 1796년의 한 집회에서 ‘이교도들에 대한 국교회의 선교는 어느 수준으로 그리고 어떠한 형태로 정립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였다. 이후 1799년에 ‘아프리카와 동양 선교회’(Society for Missions to Africa and East)가 설립된 후 CMS(오늘날에는 Church Mission Society)로 개칭하였다. 같은 계열로 LMS에 자극을 받아 ‘유대인 선교를 위한 런던선교회’(London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ity among the Jews)- 오늘날의 명칭은Church’s Ministry among Jewish people-가 1809년에 발족하였다. 또한 식민지와 대륙 선교회(Colonial and Continental Church Society)-오늘날의 명칭은 대륙간 선교회(Inter-continental Church Society)-도 처음부터 성공회 복음주의자들이 설립하였다.

    SPG가 국교회 선교회인 반면에, CMS는 복음의 전파를 위한 단체라는 논평은 어느정도까지는 사실이다. 즉, SPG는 선교회가 지원하는 자들이 교회[국교회]의 대리인들이라는 점을 열심히 강조하였지만(따라서 19세기에 모든 후보자들은 규정상 대주교 산하의 심사실에서 면접을 받아야 했다), CMS는 역사적으로 보다 커다란 독립성을 유지하였다. 또한 SPG는 교회이식(설립church planting)을 크게 강조하였지만, CMS는 무엇보다도 개개인의 개종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들은 매우 제한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SPCK와 SPG의 설립자들은 할레의 A. H. 프랑케(Francke)와 같은 자들의 경건주의 그리고 이들의 주장인 개심에 대한 경건주의적인 강조에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19세기중반 CMS의 의장인 헨리 벤은 누구보다도 교회설립(교회이식church planting)을 확고히 믿었다. 또한 CMS의 설립자들중 일부는 SPG의 회원이었다. CMS의 의장이었던 조시아 프래트는 1819년 익명의 소책자에서 대중들에게 기부대상으로 SPG를 추천하였다. 그러나 SPG와 LMS와 달리, CMS의 설립자인 존 벤의 응답은 ‘고교회파의 원칙이 아니라 국교회의 원칙’으로 전형적인 성공회 복음주의자였다. 새로이 설립되기 시작하는 해외 피선교지의 성공회 주교직과 CMS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일은 이 단체의 역사에서 주요한 주제들중 하나일 것이다.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노예무역의 폐지뿐만 아니라 인도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표시하였다. 이 두가지 관심사는 19세기초반 선교활동에 활력을 제공하였다. 인도의 경우, 동인도회사(EIC)의 운영권은 SPG처럼 국왕특허장에 의해서 규정되었다. 윌버포스는 인도에 선교사들을 파견하기를 희망하면서, 특허장에 교직의 서임을 포함시키려고 오랫동안 노력하였다. 덴마크의 트랑쿼바와 네델란드의 동인도지방의 정책들과 같은 식민지 모델들을 따라, 1793년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대한 특허장을 갱신할 때에 공식적인 선교사 서임조항을 추가시키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는 동인도회사의 전속사제 임명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동인도회사의 전속사제들은 주로 케임브리지에 있는 찰스 시메온의 사목활동에 영향을 받은 신실한 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중 헨리 마틴(Henry Martyn, 1781-1812)은 그의 학문적인 명석함, 신앙심과 헌신적인 활동으로 가장 뛰어났으나 너무 일찍 사망하였다. 1813년 동인도회사에 대한 새로운 특허장에 따라 캘커타주교-동인도회사 전영토를 관할-로 토머스 미들턴(Thomas Middleton)이 임명되었다. 윌버포스의 소위 ‘경건조항’(Pious Clause)-선교사의 활동을 촉진시키는 조항-은 지속적이고 격렬한 논쟁끝에 포함되었다.

    이는 19세기에 영향력있는 기관들-식민지 관리자[총독]들 또는 무역상들-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이 선교운동에 항상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나타내는 여러가지 현상들중 하나였다. 새로운 주교[미들턴]는 국왕의 특허장[임명장]이 토착 인도인과 관련하여 권한을 행사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한편으로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곤경에 빠졌다. 그의 계승자인 레지널드 허버(Reginald Heber)는 전임자보다 덜 제한적이었다. 그는 1825년 헨리 마틴이 개종시킨 압둘 마시의 사제서품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사목직을 토착화시키려는 초기 성공회의 선교입장중 한 사례였다면, 데니얼 윌슨(Daniel Wilson)의 주교직(1832-52)은 주교에 의한 국교회 치리구조와 임의단체인 선교회 사이의 지속된 긴장관계를 드러내었다. 이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선교활동을 주도하고 발전시킨 수도회들과 로마의 중앙 통치기구 사이의 긴장관계와 같은 것이었다. 결국 1839년에 CMS의 친구였지만 확고한 체제를 주장하는 주교와 선교회의 런던 위원회 사이의 협정으로 해결되었다.

    CMS와 SPG는 19세기 동안에 인도에서의 선교활동을 크게 확장시켰다. 이외에도 케임브리지 델리선교회(Cambridge Mission to Delhi)(1877)와 영국성공회 여성선교회(Church of England Zenana Missionary Society, 1880)가 설립되어 인도선교에 가담하였으며, 후에 각각 SPG와 CMS와 합병하였다.
    노예무역은 직접적으로 CMS의 첫번째 아프리카 선교의 계기가 되었다. 재커리 머콜리(Zachary Macaulay)-역사학자인 토머스 머콜리의 아버지-는 1791년에 시에라리온회사를 설립하였다. 이곳은 해방된 노예들의 이주지[식민지]로, 대다수는 영국의 해군 소함대의 활동으로 노예무역선에서 구출된 아프리카인들이었다. 이곳에서의 CMS 선교활동은 T. F. 벅스턴(Buxton)과 같은 자들에게 아프리카를 그리스도교와 상업으로 교화시키고 변모시킬 수 있다는 꿈을 심어주었다. 벅스턴은 그의 책 <아프리카 노예무역과 그 치유책>(African Slave Trade and its Remedy, 1839)에서 ‘선교사들과 학교선생님들, 쟁기와 삽을 결합시켜 [...] 문명을 발전시키며 [...]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 이러한 행복한 변화의 동인이 되도록 하자’고 썼다. 초기에 노예선으로부터 구조된 자들중 한 사람은 새무얼 크로우더였다. 그는 포라베이 칼리지에서 공부한 후 1834년에 사제로 서품받았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또하나의 ‘즐거운 꿈’을 품었다. 즉, 시에라리온으로 이주한 여러 부족민들이 그들의 부족들에 대한 선교사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1843년 현대의 나이지리아인 요루바족(Yoruba)에 대한 CMS선교사가 되었다.

    미국식민지의 상실이후 영국정부는 범법자들의 추방지를 새로이 찾아야 했다. 정부는 보타니만(Botany Bay, 호주의 시드니 인근)으로 결정하였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보편적인 박애정신으로 이들에 대한 전속사제로 1786년 호주로 자원한 리처드 존슨을 찾았다. SPG와 SPCK는 그의 비용과 장비를 지원하였다. 이후에 새무얼 마즈던(Samuel Marsden)이 합류하였으며, 그는 선교현장으로 뉴질랜드를 목표로 하였다. 마즈던은 CMS를 설득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먼저 이들을 문명화시키고 그후에 선교하였다. 성공회의 선교활동 중에서 북극지방에 대한 선교는 에스키모족들중 약 80퍼센트가 성공회신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초기의 마오리족에 대한 선교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이곳에서 식인종이며 전투적인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메세지에 커다란 응답을 보였으며, 1830년대와 40년대에 그리스도교를 빠르고 즉각적으로 확산시켰다. 또다시 영웅적인 개척자 주교인 셀윈(Selwyn)과 CMS 사이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하였다. 그는 데니얼 윌슨처럼 주교로서의 그의 권한들을 유지하였으며, 그의 경우 이를 선교사들의 배치문제까지 확대시키려고 하였다. 국가의 법적인 기구와 관계없는 교회회의적인(synodical) 치리구조에 대한 그의 사상은 CMS의 본부인 솔즈베리 스퀘어에 있는 전통주의자들을 또다시 경계하게 만들었다.

    솔즈베리 스퀘어[선교본부들이 있던 런던의 한 구역이름]의 독보적인 인물인 헨리 벤은 19세기 성공회의 지도적인 선교전략가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는 CMS의 설립자들중 한사람의 아들로 1841년부터 72년까지 명예의장(honorary secretary)이었다. 그는 경쟁단체인 SPG의 에드워드 호킨스(Edward Hawkins, SPG의장, 1843-64)와 가깝게 접촉하면서 의견을 같이 하였다. 벤은 자원단체인 CMS를 국내와 국외의 주교직과 해외에 신설되는 주교직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해외의 주교직은 그의 활동시기에 9개에서 50개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벤의 위대함은 무엇보다도 토착[현지]교회에 대한 비젼과 실천에 있었다. 그는 그의 이상들을 CMS를 위해 쓴 일련의 논문들에서 발전시켰다. 첫째로, 토착교회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조직적인 명령에 의해서 설립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방식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토착민 그리스도인들’의 소집단들은 토착민 전도구교회들로 통합되어, ‘자립, 자치 그리고 자기확장[자전]’의 집단이 되어야 한다. 현지선교회의 역할은 [토착교회를 위한] 발판이 되는 것으로 적당한 시기에 해체되어야 하며, 따라서 선교활동의 종결(euthanasia)’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 때에 토착교회는 독립되는 것이며, 선교사들-종종 유럽의 외국인들-은 ‘토착교회 지역을 넘어서’ [새로운 지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토착민 전도구교회들이 발전함에 따라 그들은 하나의 교구를 형성할 것이다. 이러한 토착교회 사상의 ‘완성’(crown)은 곧 토착민 주교일 것이다.

    벤의 사상은 전도자(evangelist)-‘토착민 지역을 벗어나’ 복음을 설교하는 역할을 수행-와 목회자(‘정착된 교회’를 발전시키는 역할) 사이의 분명한 구별을 전제하였다. 그러나 벤이 1861년 시에라리온에서 그의 비젼을 실천하였을 때, 유럽인 주교는 유럽인들의 식민지잔류를 이유로 계속 남아있었다. 그가 새무엘 크로우더를 설득하여 주교직을 맡도록 하였을 때, 실제로 크로우더는 벤의 계획의 ‘완성’인 정착된 교회의 주교가 아니라 니제르강 지역의 주교로서 주교직을 가진 전도자였다. 안타깝게도 위대한 그리스도인 개척자요, 통역자이자 목회자가 (벤의 의도대로) 아프리카인들의 준비된 지도력의 상징이 아니라, 아프리카인 지도력의 예견된 실패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은 부분적으로 벤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CMS가 서부 아프리카에 들어간지 60년만인 1864년에 아프리카인 주교를 탄생시켰다는 것은 벤의 비젼의 한 증표였다. 이는 토착교회와 토착사목직에 대한 성공회의 바램을 나타내는 또하나의 사례였다.

    1849년 희년[50주년]을 맞이할 때까지 CMS는 인도, 동부와 서부 아프리카, 뉴질랜드, 카나다 그리고 중국에 350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SPG는 서인도제도(1712), 서부 아프리카(1752), 카나다(1759), 호주(1793), 인도(1818), 남아프리카(1820), 뉴질랜드(1841) 그리고 보르네오(1847)로 선교지역을 확대하였다.

    인도폭동에서 19세기말까지

    성공회의 선교역사에서 1857년은 전환점이었다. 이 해에 인도폭동[세포이 항쟁]이 발생하였으며, 그 이후에 정부는 동인도회사를 대체하는 지배권력이 되었다. 아프리카의 경우, 같은 해에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개최되었던 데이비드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의 연설은 특별한 변화를 야기시켰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교 평의원회관(Senate House 강당)의 연설에서 ‘나는 여러분이 아프리카에 관심을 갖기를 간청합니다. 이제야 개방된 그 나라는 이후 몇년안에 나와 인연이 단절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 나라가 다시 폐쇄되지 않도록 하십시요! 나는 무역과 그리스도교를 위한 길을 만들기 위하여 아프리카로 돌아갑니다. 여러분이 제가 시작한 활동을 수행하겠습니까. 나는 이 활동을 여러분에게 맡깁니다!’라고 말하였다. 리빙스톤의 호소에 대한 이상한 결과는 한때 런던선교회 소속이었으나 선교사의 생활을 탐험가의 생활로 대체한 한 스코틀랜드 장로교신자[리빙스톤]가 1858년 위대한 앵글로-가톨릭 선교단체을 설립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점이다. 본래 이 단체의 명칭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중앙아프리카 선교회’(Oxford and Cambridge Mission to Central Africa)였으나, 더럼과 더블린 대학교들의 참여로 영국대학교 중앙아프리카 선교회(Universities’ Mission to Central Africa)로 개칭되었다. UMCA는 운좋게 출발하였다. C. F. 메켄지(Meckenzie)는 1867년에 ‘니아사 호수와 쉬어강 인근에 거주하는 부족들에 대한 선교주교’로 축성받음으로써, 주교가 개척 전도자이자 선교지도자여야 한다는 일부 소책자운동가들의 꿈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메켄지는 곧 말라리아로 사망하였지만, 그의 계승자들인 윌리엄 토저와 어드워드 스티어 주교들은 UMCA의 사업을 강화시켰다. 토저는 선교거점을 잔지바르섬으로 이동시켰으며, 스티어는 아랍 노예시장의 장터에 직접 Christ Church 대성당을 건축하였다. 이후의 주교인 존 하인은 UMCA의 목적을 ‘현지에 거주하는 인종과 나라의 특별한 상황에 맞추어, 유럽의 영향에 관계없이, 이 땅의 백성들의 그리스도교회인 [...] 토착민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남아메리카 선교회(South American Mission Society)는 마오리족 선교활동의 위대한 개척자인 헨리 윌리엄스처럼 은퇴한 해군장교출신인 앨런 가디너에 의해서 1844년에 설립되었다. 하지만 1851년 티에라 델 푸에고에서 비극적인 사망[아사] 이후에야 선교활동은 시작되었다. 19세기 동안에 선교활동은 파라과이(1888)와 칠레(1895)에서 시작되었으며, 1900년이후 아르헨티나(1911)와 페루(1974)에서도 시작되었다.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토착민 사목직을 발전시키는 것을 강조하였다. 1937년에 첫 마푸치 인디언이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1966년에 7명의 마타코부족 인디언들이 사제서품을 받았다. 오늘날 이 선교회는 세계성공회의 다른 관구교회들-미국성공회와 남아프리카관구 등-에 지부들을 설립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명칭은 SAMS International을 사용하고 있다. 세계성공회의 한가지 특징은 영국성공회 내에서 설립된 선교회들이 해외의 자매교회들에서도 독립적인 선교단체-예를들면, 호주와 뉴질랜드의 CMS-로 설립되었다는 점이다.

    지면이 허락하지 않아 19세기 후반부에 활기차게 진행된 성공회의 선교활동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극동지방[동아시아]의 선교활동 초기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여야 한다. 첫째로, 극동지방의 사례는 서구의 전함외교와 무역압력이 그리스도교 선교에 의심스런 이점들을 제공한 경우였다. 먼저 중국은 영국의 압력을 받아 1842년에 조약을 맺으며 무역을 허용하는 특정한 ‘조약항들’을 개방하였으며, 1858년에는 내륙으로의 확대를 허용하였다. 이 조약들의 한 결과로 아편의 무역이 영국의 대중국 정책의 일부가 되었다. 일본도 마찬가지로 고립정책을 사용하였지만,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1854년에 항구들을 개방하였다. 둘째로, 이 두 나라의 경우는 성공회의 선교활동이 이제 더이상 영국에 본부를 둔 선교회들의 독무대가 아니하는 점을 과시하였다. 미국과 카나다 성공회도 이제 고려해야 하는 주요단체가 되었다. 중국의 경우, 미국성공회의 선교사인 윌리엄 분(W. J. Boone)은 1840년 상하이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844년 중국에서 축성받는 주교였다. 이 때문에 CMS와 영국 성공회인들 사이에 교회의 관할권 문제가 제기되었다. 모든 성공회의 선교사들, 언어학자들과 통역자들중 가장 훌륭한 인물중 하나인 유대인 개종자 새무얼 쉬레쉬스키(S. I. J. Scherewschewsky)는 1859년에 중국에 합류하였으며, 1877년에 주교로 축성되었다. `1881년 전신마비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서와 기도서의 북경관화[표준중국어] 번역을 추가하였으며, 또다른 중국어 형식인 ‘easy Wenli’[쉬운 문어체]로도 번역하였다.

    일본은 미국성공회의 선교사들과 후에 카나다성공회의 선교사들이 SPG와 CMS의 선교사들과 함께 활동한 지역이었다. 각 단체들은 지리적으로 서로 다른 지역을 관할하였다. 채닝 무어 윌리엄스(Channing Moore Williams)-초기 미국선교사-는 1866년에 중국과 일본의 주교가 되었으며, 1869년부터 오사카와 교토에 거주하였다. 에드워드 비커스테트-앞서 언급한 케임브리지 델리선교회에서 활동-는 1886년에 주교로 축성되었으며, 토착화된 일본인 성공회에 대한 그의 비젼은 1887년에 니폰세이코콰이[한자인 일본성공회의 일본어발음]로 실현되었다. 이 교회에는 모든 종류의 성공회적 요소들이 포함되었다. 적어도 한 유명한 성공회 기관인 성바울로학교(교토소재, 1874년에 설립)-오늘날의 리쿄대학교-는 교육기관들을 통한 선교에 대한 성공회적인 접근을 보여주는 사례였으며, 현재도 그러하다. 윌리엄스 주교가 설립자였다. 마찬가지로 유명한 의료기관인 성루가병원(교토소재, 1900년에 설립)은 버지니아의 리치몬드 출신인 루돌프 튜슬러 박사가 설립하였다. 더구나 버지나아출신 선교사이자 주교인 헨리 터커(Henry St George Tucker)-교토주교-는 20세기초에 일본성공회의 자치를 권고하였다. 성공회교회는 일본의 전체인구중 극소수(오늘날 약5만)에 불과하지만, 문화적인 보급은 이들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20세기: 선교회들에서 선교회로

    세계적인 차원의 선교대회들이 리버풀(1860)과 런던(1888)과 뉴욕(1900)에서 개최되었지만, 1910년 에딘버러에서 개최된 세계선교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는 특별히 중요하였다. 성공회의 경우, 이러한 중요성은 켄터베리 대주교인 랜덜 데이비슨의 참석으로 상징되었다. 그는, SPG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성공회 내의] 모든 입장들을 완전히 대표하지 않을 수도 있는 대회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였다. 사실상 다양한 성공회의 입장들이 표현되었다. 찰스 고어주교, 거룩한 선교회(Society of the Sacred Misson)의 허버트 켈리(Herbert H. Kelly, 당시 한국에 파견하는 성공회선교사 후보자들을 훈련시키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SPG의장인 몽고메리주교, CMS 선교사이자 아랍을 연구하는 학자인 템플 가디너(이 대회에 관한 그의 책은 널리 독서되었다), 그리고 젊은 간사인 윌리엄 템플 등이 참여하였다. ‘신생[선교지] 교회들’의 지도자들 중에서 이후에 인도성공회의 노나칼교구 주교가 되는V. S. 아자리아(Azariah)도 참석하였다. 데이비슨 대주교는 대회의 연설에서 성공회의 대표자로서, ‘교회의 생활에서 선교회들의 자리는 반드시 중심적인 자리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아자리아는 국가적인 지도자들과 해외의 선교사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즉, ‘다가올 모든 시대를 통해서 인도의 교회는 성장하여 선교회의 영웅적인 활동과 희생적인 노력들을 감사하며 증언할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재산으로 가난한 자들을 보살펴 왔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육신을 불태웠다. 우리는 [여러분께] 사랑을 요청하며, 우리에게 친구가 되어 달라.’

    기존의 선교방식을 비판하는 또하나의 목소리는 SPG의 선교사이자 저술가인 롤랜드 앨런(Roland Allen, 1868-1947)으로부터 제기되었다. 그는 1912년 <Missionary Methods: St Paul’s or Ours?>를 출판하였다. 그는 [선교의] 목적이 교회이식[설립]인가 선교활동의 영구화인가를 질문하였다. 서구교회의 선교사들은 성 바울로와는 대조적으로 지역교회에게 건강한 발전에 필요한 완전한 영성적 권위를 부여하는데 실패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앨런은 마찬가지로 선교회들과 거대한 ‘국가단위의’(national) 교회[국가교회]들을 의심하였다. 이 두가지 기관들은 지역교회에서 하느님의 선물들[은사들]이 발전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는 선교회들이나 국가교회들이 강요하는 정통교리들과 외적인 행정기구들에 반대하며, 성령에 대한 보다 커다란 신뢰를 요구하였다. 선교사들은 개종자들이 그들을 지나치게 의존하게 만들었다는 그의 비판은 위대한 선교사인 존슨(W. A. B. Johnson)의 죽음에 대한 시에라리온 개종자의 논평을 상기시킨다. 즉, ‘우리는 예수님보다 존슨님을 더욱 의지하였습니다.’ 앨런에게 이것은 결정적인 고발장으로, 성바울로는 지역의 원로들에게 지도력을 이양하고 새로운 지방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결점이 없었다.

    이 글에서 제1차 세계대전으로 비그리스도교인들에게 제기된 심각한 질문들을 지적하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계대전은 소위 그리스도교 국가들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1차와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잉글랜드에서 일부 CMS지지자들은 이 선교회의 지도자들이 자유주의적인 경향으로 변하고 있다고 경계하며 성서선교회(Bible Churchmen’s Missionary Society)를 창립하였다. 이러한 분할은 1922년에 발생하였다. BCMS(오늘날 명칭은 Crosslinks)는 버마, 중국, 이란, 인도, 북극지방, 카나다, 동부 아프리카 그리고 모로코에서 활동하였다. 한편 일부 지방에서는 개종이나 분열보다 초기[고대]시대 그리스도교회를 복원하려는 성공회의 노력을 나타내는 유명한 사례들이 있었다. CMS는 특히 1820년대와 30년대에 인도 남부의 말라바르 해안지방에 있는 옛 시리아정교회들(Syrian Malabar Church) 사이에서 활동하였다. 에디오피아에서 BCMS는 초기교회인 이집트정교회(Coptic Church)와 함께 활동하였다. BCMS의 알프레드 벅스톤은 1931년 에디오피아를 방문하여 ‘복음화의 활동에서 이 선교회에 부과된 몫을 [...] 수행하기 위하여 [...] 이 초기교회를 격려하고 돕는 것이 온당한 정책일 것이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계속적으로 추진되었다. 동부 아프리카의 경우, 영적 부흥운동은 교회생활의 쇄신을 촉진시킴으로써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발로콜레(balokole) 또는 ‘구원받은 백성들’ 운동은 1930년대 동안에 그 영향력을 동부 아프리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루완다 선교회-조 처치(J. E. Church) 박사가 유명한 회원이었다-는 CMS와 계속해서 제휴하였으나, 지지자들에게는 루완다 CMS로 알려졌다.

    윌리엄 템플 대주교가 1942년 켄터베리 대주교직에 취임하였을 때, 그는 전세계의 모든 주요 인종집단들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존재한다는 점을 ‘우리시대의 위대한 새로운 사실’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는 선교회 운동에 대한 적합한 찬사였으며, 또한 새로운 미래를 지적하였다. 즉, 1958년 람베스회의의 표현대로 ‘“국내”와 “국외”를 나누는 국경이 없는 전세계에 대한 선교’였다. 1963년 토론토에서 개최된 세계성공회회의(Anglican Congress)에서 마이클 램지 대주교는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의 선교를 함께 계획하고, 단일한 과제를 실천하기 위하여 우리의 자원들을 사용하여야 한다. “선교사”라는 용어는 이제 일종의 식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돕는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선교사들이 잉글랜드에 와서 우리나라에 있는 후기 그리스도교시대의 이교사상[무종교]을 개종시키는 활동을 지원하며, 우리 잉글랜드인들의 교회를 그리스도의 보다 충실한 추종자가 되도록 지원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하나의 세계’라는 측면은 다른 위대한 종교적 전통들에 대한 인식의 성장을 나타내며, 이슬람교와 힌두교와 불교에 대한 신뢰는 1950년이후 종종 민족주의적인 열망과 연계되었다. 이후에, 이것들 외에 ‘선교사 파견국가들’ 내에도 다른 인종들과 종교들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종교간의 관계들에 대한 선구자적인 연구는 성공회 학자이자 이슬람교에 대한 심오한 연구가인 케네스 크랙 주교의 <Call of the Minaret>(1956)에서 시작되었다. 이 책은 CMS의장인 맥스 워렌을 크게 감동시켰다. 그는 다른 위대한 종교적 전통들에 대한 성공회 학자들의 연구서들을 ‘Christian Presence’라는 시리즈로 직접 편집하였으며, 시리즈 전체 서문에서 다른 종교의 신앙들에 대한 적합한 접근방법으로 크랙의 대화방식을 지지하였다. 즉,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이슬람교도, 힌두교도와 불교도들의 체험에서 진정한 종교적 내용이 무엇인지 또는 그들의 신의 존재가 무엇이든 [...] 그들과 함께 “현존”하는지를 묻기 위하여, 우리의 신발을 벗는 것이다 [...]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의 꿈들을 짓밟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비그리스도교와의] 대화를 가톨릭신자들이 ‘이들 사이에서 발견한 영성적 도덕적 자산을 보존하고 증진시키는’ 수단으로 인식한 시기였다(Nostra Aetate). 잉글랜드에서는 1976년 세계 이슬람교축제(World Festival of Islm)의 개최장소인 영국에서 데이비드 브라운 주교-크랙처럼 이슬람교 학자이자 연구자-는 연구서인 (1976) [새로운 출발점]를 출판하여 널리 인정받았다. 그는 이 책에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이슬람교의 집회로 당황한 사람들을 안내하려고 노력하였다. 선교단체들은 BCMS/CMS공동으로 Other Faiths Theological Project(타종교 신학프로젝트, 1979년, 스티븐 닐 주교를 첫 위원장으로)의 설립으로 응답하였다. 또한 연속적인 람베스 타종교 강좌(Lambeth Inter Faith lectures)는 이 문제의 중요성을 지적하였다.

    전체 세계성공회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협의기구인 세계성공회협의회(Anglican Consultative Council)가 1971년 케냐의 리무루에서 개최되었다. 이 협의회에는 모든 성공회 관구교회들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였고, 켄터베리 대주교가 의장이었다. 이 모임 또한 대화를 추천하며, ‘대화는 단순히 또다른 형태의 복음화가 아니라, 각자가 [...] 대화 당사자일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후 연속적으로 개최된 ACC 회의들-더블린(1973), 트리니다드(1976), 온타리오(1979), 뉴카슬(1981) 그리고 바데그리(1984)-은 ‘Partners-in-Mission’협의기구를 설립하여 그 결정사항들에 따라 선교를 수행하였지만, 20세기에 변화된 선교의 본질을 강조하였다. 즉, 더블린 보고서의 표현대로, ‘전세계에는 단 하나의 선교만이 있다 [...] 어느 한 장소에서 선교에 대한 책임은 기본적으로 그 장소에 있는 [지역]교회에 속해있다.’ 한편 스티븐 닐 주교는 1964년에 ‘선교회들의 시대는 종결되었으며, 이제 [지역교회가 주도하는] 선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썼다.

    미래를 위한 제언들

    이 글은 성공회의 주요한 선교단체들의 역사를 주로 다루었다. 이들 단체들의 설립이후부터 이들 단체들을 관구교회내의 선교국으로 통합하라는 요구들이 항상 있었다. 새무얼 윌버포스 주교는 19세기에 이러한 정책의 옹호자였으며, 20세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를 주장하였다. 1978년 런던에 본부를 둔 Partnership for World Mission[세계선교 협의회]의 설립은 자원단체들의 강점들을 결합시켜 하나의 대표부 만들어, 이들과 해외의 성공회 교회들과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였다. 왜냐하면 해외의 성공회 교회들은 개별적인 선교단체들보다는 이러한 대표적인 기구와 먼저 대화하기를 선호하였기 때문이었다. 1981년 잉글랜드에서 개최된 Partners-in Mission[선교협의회]의 표현대로, ‘선교 자원단체들은 그들의 정체성과 유연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교회의 구조들과 통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선교 자원단체들은 전도구교회 차원에서 신앙적 열정과 개인적인 참여를 촉진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잃지 말아야 한다.’ 앞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CMS와 CEZMS가 통합하였으며, 그리고 SPG와 CMD와 오늘날의 UMCA 도 통합되었다. 1965년 이후로 SPG와 UMCA는 합병하여 USPG로 개칭하였다. 1986년에 CMS, USPG와 PWM은 런던의 같은 건물에 입주하였다.

    선교 자원단체와 교회의 구조들 사이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며, 오늘날에는 앞에서 언급한 SAM international의 경우뿐 아니라 Church’s Ministry to Jewish people[영국성공회의 유대인 사목국]의 경우도 국제적인 차원을 포함한다. ACC가 Partners in Mission[선교협의회]를 설립함으로써, 미국성공회의 선교국 사무총장은 CMJ의 미국성공회내 설립을 요청하였으며, 이에따라 1982년에 설립된 CMJ/USA는 버지나아주 페어팩스에 본부를 두고 있다. 하지만 미국성공회나 스코틀랜드교회 (장로교)처럼 선교활동을 교회의 중앙기구들에서 실행하는 세계성공회의 관구교회들이 선교단체들의 새로운 사업들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질 것인가는 앞으로 지켜봐야할 문제이다. 한편으로 선교단체들은 인력과 재정과 사상을 세계성공회 공동체와 서로 교환함으로써 그리고 말과 행동으로 전체 교회와 선교회의 소명을 결합시킴으로써, 스스로 세계성공회 전체의 선교적 필요성들에 응답하는 기구로써 그 기능과 역할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델을 제공하는 사례는 호카이도교구가 추진하였던 쇄신프로그램으로, 선교사로 동부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이 참여하고 런던의 CMS가 재정지원을 담당하였다. 이때에 소통의 수단으로 영어를 공통적인 언어로 사용하는 것은 선교에 참여한 자들의 재량에 맡겨야 하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1989년 이후로 동유럽의 교회들은 성공회의 지원을 환영하였다. 성공회(CMS) 선교협력자들은 성 페테스부르그와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의 초청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으며, 의료와 사목과 청소년선교의 분야에서 루마니아 정교회를 지원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 결론부분에서 두가지 사항을 더 고려하고 싶다. 첫째로, 선교활동은 제2차 바티칸회의의 문서인 Ad Gentes의 지적처럼 약20억의 인구가 비그리스도인인 세계에서 세계성공회의 주요 의제로 계속 남을 것이다. 여기서도 이 글의 시작에서 언급한 기도서의 본래적인 통찰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즉, 선교적인 책임은 비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살고있는 성공회 신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성공회 교회는 존재하는 지역에서 곧 선교회이다. 에밀 브루너의 표현처럼 ‘불이 활활 타오르면서 사는 것처럼 교회는 선교로써 살아간다’. 둘째로 성공회 교회는 전세계 그리스도교(Church Universal)과 함께 시각의 급격한 변화를 겪고있다. 세계성공회의 가장 활발한 교회들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에 있다. 이 교회들의 목소리는 세계성공회 협의체들에서 점차적으로 영향력을 증대시킬 것이며,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부유하지만 활기를 잃은 북반구 교회들-그들의 입장에서 볼때, 지나치게 지성화된 신학적 전통과 약화된 영성 때문에 활기를 잃은 교회들-의 성공회신앙에 건강한 개선책으로 작용할 것이다. 마이클 램지 대주교가 토론토에서 제안한 것처럼, 세계성공회의 신생교회들의 활력은 그들의 선교활동으로 기존의 교회들을 소생시킬 필요가 있다. 1990년 나이제리아 성공회의 10개의 ‘선교교구’설립, 1997년 나이제리아 성공회의 자체 선교회(Church of Nigeria Missionary Society) 설립, 이와 유사한 아시아 성공회교회들의 이웃 아시아 지역으로의 선교활동(사바와 싱가포르의 경우), 그리고 세계성공회를 위한 상설 선교위원회(MISSIO, 1994)의 설립은 대주교의 예견대로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여 선교활동에 대한 성공회내의 새로운 활력을 주는 증표들일 것이다.

    참고문헌

    Dewey, M., The Messengers. London, 1975.

    Gibbs, M. E., The Anglican Church in India 1600-1700. Delhi, 1972.

    Hewitt, G. H. G., The Problems of Success. London, Vol. i 1972; Vol. ⅱ 1977.

    Jacob, W. M., The Making of the Anglican Church Worldwide. SPCK, London, 1997.

    McLeod Campbell, J., Christian History in the Making. London, 1946.

    Murray, J., Proclaim the Good News. London, 1985.

    Nazir-Ali, M., From Everywhere to Everywhere. Collins, London, 1990.

    Neill, S. C.,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London, 1964.

    Stock, E., The History of the Church Missionary Society. 3 Vols., London 1899; Vol. ⅳ, London 1916.

    Thompson, H. P., Into All Lands. London, 1951.

    Warren, M. A. C., The Missionary Movement from Britain in Modern History. SCM, London, 1965.

    Yates, T. E., Christian Mission in the Twentieth Century. London, 1994.

    2013년 2월 21일 #

이 토론 주제에 대한 RSS 피드

답글

글을 올리려면 로그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