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신학 및 역사 이야기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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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7 장 성직자들

    1.종교개혁 직전의 성직자들

    종교개혁 직전의 모든 성직자들-수도사, 재속 고위 성직자와 전도구 사목자-은 단일한 성직자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복장과 독신생활, 그리고 때때로 교육수준에서 평신도와 뚜렸하게 구별되었으며, 성체축일의 시가지 순행때 처럼 분리된 신분(계급)으로 인식되었다. 성직자들 사이의 갈등으로 이들의 단일성 [통일성]은 깨질수도 있었지만, 이들은 소명[직분]에 관계없이 다른 성직자들과의 개인적인 또는 직무에 따른 관계를 형성하며 이를 소중히 여겼다. 중세기말의 노리치교구와 코벤트리-리치필드교구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전도구 성직자들이 남긴 유언장의 수혜자와 집행자, 증인들은 동료 재속성직자 뿐만아니라 수도사들 이었다(Tanner, 1984; Cooper, 1999).

    성직자들의 이러한 동질감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서로 다른 성직활동을 수행 하였으며, 재속사제들은 서로 다른 직무와 전문성을 추구하였다. 가장 분명한 구별중 하나는 재속성직자-주로 전도구교회의 사목을 담당-와 수도성직자-세상과 단절하고 규칙에 따라 공동체생활을 수행-였다. 그러나 16세기초에 이르러 이러한 구별은 점차 모호해져 일부 수도사들도 전도구교회에서 사목활동을 하였으며, 많은 재속성직자들도 서약없이 공동체생활을 수행하였다. 여기에 또 하나의 구별은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직책을 소유한 고위성직자들-주교, 참사회회원과 수도원장들-와 일반성직자들이었다. 일반성직자들은 전도구교회와 chantries, 여러가지 전속사제직(chaplain)을 담당하였으며, 학자들은 이들을 종종 ‘프롤레타리아트 성직자’(clerical proletariat)로 표현하였다.

    1.1중세말기의 수도원

    중세말기의 수도원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수도사들의 생활은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과 후대의 비판자들이 주장했던 것보다 훨씬 덜 쇠퇴하였다. 수도원 지망자들은 전반적으로 감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15세기말과 16세기초 동안에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더구나 클레어 크로스는 수도원 자체에서 의도적으로 지망예상자들을 제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수도원생활은 실제로 수도사들의 숫자가 나타내는 것보다 훨씬 인기있었다고 볼 수 있다(Biller and Dobson, 1999). 그렇다 하더라도 지망자의 숫자는 수도원에 따라 달리하였다. 예를들면, 링컨교구의 크로랜드와 루스팍 수도원과 노리치대성당의 수도원은 감소하였으나, 글래스톤베리와 클리브수도원과 대다수 카르투지오 수도원들은 증가하였다. 전반적으로 볼때, 제1차 수도원해산 때에 약650개의 수도원에서 약7천명의 수도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탁발수도사 생활은 일반적으로 인기가 적었지만, 1536년 잉글랜드에 약3천명이 있었으며, 노리치등 일부지방에서 수적으로 월등하였다.

    한편 여성수도사들의 숫자는 15세기중반이후 서서히 증가하였지만, 흑사병발발 이전의 최고수준인 5천명을 결코 회복하지 못하였다. 1차 수도원해산 직전까지 약2천명의 여성수도사들이 136개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대다수 여성 수도사들은 진정한 신앙적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후대의 프로테스탄트들과 일부 학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유아나 귀찮은 과부를 수도원으로 버린 것은 아니었다. 1350년에서 1540년 기간동안 이스트 앵글리아지방의 여성수도사들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대다수는 14-17세때에 수도원에 입문하였다(Gilchrist and Oliva, 1993; Oliva, 1998). 더구나 요크왕조와 초기 튜더왕조시대의 귀족출신 여성들을 연구한 바바라 해리스는 여성수도원들이 결혼지참금을 지불하지 않으려는 부모들의 딸을 폐기하는 장소가 아니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였다(Harris, 1993). 마지막으로 수도원 해산때에 약85퍼센트의 여성수도사들이 다른 수도원으로 전근하기를 선택하였다는 사실은, 재정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하더라도 이들 대다수가 수도생활에 전념하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Blair and Golding, 1996).

    수도사들의 사회적 출신신분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 없지만, 가능한 자료들에 따르면 다양한 계급출신들이 수도원에 입문하였으며, 대다수는 해당지역의 ‘중간계급’인 자영농과 안정된 장인(craftman)집안 출신이었다. 단지 소수의 여성수도사들만이 귀족집안 출신이었다. 수도원 해산이후 연금수혜자 명단에 기록된 958명중에서 귀족이나 기사의 딸로 밝혀진 수도사는 4퍼센트이하 였으며, 이들외에 10퍼센트 정도가 이들 집안출신인 것으로 보인다. 수도사들이 상대적으로 다양한 사회계급 출신이었다는 점은 중세말기 수도원의 강점으로도 볼 수 있지만, 귀족출신이 소수였다는 점은 유력한 가문과의 관계가 약화됨으로써 필요시 수도원의 이익을 보호받을 수 없었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수도사들에 대한 학자들의 비판들중 상당부분은 이제 부당한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수도사들은 문맹이 아니었으며, 당시의 지적인 활동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지도 않았다. 중세말기 동안에 점차 많은 수도사들이 잉글랜드의 두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일부 중요한 수도원들은 고위직에 학위를 요구하였다. 또한 일부 증거에 따르면, 대학교의 직책에 대한 수요는 수도원이 재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숫자를 능가하였다. 물론 여성수도사들은 대학에 입학할 수는 없었지만, 상당수는 문맹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크셔와 이스트 앵글리아 지방의 여성수도원들과 수도사들은 사적인 기도와 공적인 독서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신심도서들과 성서자료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더구나 전국적으로 수도원들은 대형 도서관을 보유하고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미들섹스지방의 시온(Syon)수도원은 지적활동의 산실이었다. 시온수도원은 1415년 60여명의 여성수도사와 25명의 남성수도사(이중17명은 사제)로 구성된 브리제트(Brigettine)수도원으로 설립 되었으며, 유력가문 출신의 여성수도사들과 학자 수도사들을 보유한 부유한 수도원이었다. 이 곳의 수도생활의 핵심은 사적인 독서활동으로, 이곳 출신의 저술가들은 동료수도사들과 평신도들을 위하여 전통적인 신앙논문과 교리문답서, 기타 신심도서들을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이들의 저서들은 널리 이용되었으며, 이중 일부-특히 리처드 위트포드의 <Werke For Huoseholders>(7판인쇄)와 윌리엄 본드의 <Devote Treatyse>(3판인쇄)-는 베스트셀러였다.

    각 수도원의 도덕적 수준과 영성적 활력은 거의 전적으로 수도원 지도자들의 자질에 따라 좌우되었다. 방문조사 기록(주교관할 수도원에만 해당)을 보면 여러가지 심각한 위반행위들이 기록되어 있다. 1530년 도체스터수도원(옥스퍼드셔) 에 대한 방문조사관들은 수도원학교 교사의 대낮 음주행위를 적발하고, 부원장과 일부 고위수도사들(canons)의 ‘성적이탈행위’를 의심하였으며, 또한 수도원장을 공공연한 태만행위와 규칙위반행위로 고발하였다. 예딩햄 여성수도원(요크셔)의 경우, 1530년 성적이탈행위 전력이 있는 한 수도사가 결혼을 위하여 도망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방문조사 보고서들은 사소한 성적위반행위와 수도원 규칙의 느슨한 집행만을 지적하였다. 노리치대성당의 수도원에 대한 보고서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1492년부터 1532년까지 다섯번의 방문조사에서 성적이탈행위 (종종 경범에 해당)는 매번 지적되었으며, 다른 위반사항들로 한가로운 잡담행위, 카드와 주사위놀이, 학문에 대한 열의부족등을 지적하였다. 마찬가지로 노리치 교구내의 여성수도원들에 대한 보고서들도 잡담, 비단허리띠 착용, 과식등과 같은 사소한 규칙위반 사항들만 열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위반사항들은 수도원 생활에서 항상 나타났던 문제들이었으며, 종교개혁 직전까지 증가추세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일부 수도원의 경우 경제활동의 확대로 영성적 활동이 약화되었을 수도 있다. 대규모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세상과 단절하기 보다는 오히려 경제활동과 재산관리 활동으로 더욱 깊이 개입하였다. 반면에 소규모 수도원들은 영성적 활동을 증진 시키거나 수도원의 비품들을 유지할 수 있는 재정이 부족하였다. 결과적으로 일반적인 세속활동과 진부함(활력부족)은 종교개혁 직전시기의 잉글랜드 수도원들의 보편적인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성적인 활력을 유지한 수도원들이 어느정도 존재하였다. 앞서 언급한 시온수도원외에, 프란시스코 엄수회 수도원들은 잉글랜드의 6개분원에 엄격한 규칙을 도입하였으며, 9개의 카르투지오 수도원들도 내핍생활[금욕], 침묵[고행]과 기도에 대한 규정을 엄격하게 실행하였다.

    중세말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16세기초에 이르러 수도원들이 영성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기능을 상실한 상태에 있었다는 주장은 어느정도 타당하다. 영성적인 면에서 설립자와 그의 친지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기능은 점차 약화되었으며, 특히 후손들이 없을 경우 절멸하였다. 더구나 이제 평신도들은 죽은자를 위한 기도와 미사의 집례를 칼리지교회와 chantries에 의뢰하는 것이 보다 저렴하였기 때문에, 수도원은 ‘연옥을 위한 교회기관’ 으로서의 기능을 상당히 상실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1450년이후 새로이 설립된 수도원은 3개의 탁발수도회뿐이었다. 수도원의 사회적 유용성 역시 중세말기에 이르러 점차 약화되었다. 15세기에 이르러 귀족들과 지주들은 자녀들을 수도사들이 운영하는 학교 대신에, 다른 귀족들의 집안이나 세속학교나 법학원에 보내는 것을 선호하였다. 일반적으로 여성수도원들은 소수의 학생들(보통 6명미만)만을 학비를 받고 교육시켰다. 자선활동과 구호활동에서만 수도사들이 여전히 유익한 기능을 수행하였지만, 이것조차도 당대의 필요성을 충족시킬 정도였는지는 의심스럽다. 16세기초 동안에 평신도들은 의연품과 생활보조금의 형태로 시행되는 수도원의 구제활동을 비판하며, 구걸행위를 금지시키고 정당한 빈민들에게만 혜택을 줄 수 있는 보다 조직적인 구호제도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여러가지 기능들의 쇠퇴 때문에 전국적으로 외부와 단절된 수도원 [은둔수도원]들에 대한 평신도들의 지원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상대적으로 소수의 평신도들만이 은둔수도원에 유산을 기증하였다. 1500-36년 사이에 솔즈베리시의 유언자들중 10퍼센트만이 은둔수도원에 유산을 기증하였지만, ‘은둔수도원보다 시민들의 신앙생활에 훨씬 적극적으로 개입한’탁발수도회에는 30퍼센트가 기증하였다(Brown, 1995,p.47). 노리치교구의 경우, 지주들과 자영농들 대다수가 전도구교회에 유산을 기증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남성수도원에는 약14퍼샌트만이, 여성수도원에는 약21퍼센트이 기증하였다. 수도원이 가장 활발했던 요크와 더럼교구에서 조차도 이러한 비율은 1520년이후 18퍼센트를 넘지 못하였다. 더구나 이들 유산기증중 상당수는 체납된 십일조세금이었다. 마찬가지로 유언자들이 선택한 매장지도 평신도들과 수도원의 관계가 약화되었음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소수의 평신도만이 매장지로 수도원을 선택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도원에 대한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미약했다면, 마찬가지로 수도원에 대한 공개적인 적대감 역시 거의 없었다. 수도원의 법적 관할권 때문에 불평과 소송, 때때로 폭력사태까지 발생하였지만, 1534년이전에 누구도 수도원의 전면폐지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평신도들과 성직자들은 개혁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였다. 존 콜레트와 같은 개혁주장자들은 설립자의 규정을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일부는 더나아가 ‘쇠퇴한’ 수도원들을 해체하고 그 재산으로 새로운 기관을 설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성격의 실용적인 개혁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헨리6세는 부왕[헨리5세]이 해산시킨 외국수도원의 분원들의 재산중 일부를 이용하여 이튼칼리지와 킹스칼리지를 설립하였으며, 윈체스터주교인 윌리엄 웨인플리트는 6개의 쇠퇴한 수도원의 재산으로 옥스퍼드에 마그댈런 칼리지를 설립하는데 사용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16세기초에 빈번히 발생하였다. 존 피셔는 버크셔와 켄트지방에서 헤체된 여성수도원들의 재산으로 캐임브리지에 성요한 칼리지를 공동설립하였으며, 마찬가지로 토마스 울지도 1524년에서 29년 사이에 29개의 수도원을 폐쇄하고, 이들의 재산을 카디널 칼리지와 입스위치학교를 새로 설립하는데 사용하였다. 더구나 그는 1538년11월 수도사가 12명이하인 수도원들을 헤체시킬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교황의 교서를 확보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수도원해체의 확대와 이를 이용한 새로운 교구의 설립에 대한 교황의 허가권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계획을 시작하기도 전에 권력을 상실하였다.

    1.2 종교개혁직전의 주교들

    종교개혁이전에 잉글랜드와 웨일즈에는 21개의 교구가 있었다. 대체로 주교들은 평신도 귀족들보다 훨씬 많은 토지를 보유하였으며, 유일하게 가장 가난한 주교만이 이들보다 적은 재산을 보유하였다. 가장 부유한 주교직인 윈체스터주교는 년수입이 3,880파운드였지만, 웨일즈의 성다윗(St David) 주교직은 457파운드밖에 안되었다. 14세기말과 15세기초의 주교들은 전임자들처럼 세속적 기능과 영성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봉건영주로서 거대한 토지와 가솔들을 관리하였으며, 한편으로 국왕의 신하로서 국왕 측근조언자, 중요한 공직자, 또는 해외로 파견되는 대사직을 수행하였다. 물론 상당수는 법률가로 국왕이나 귀족들을 자문하였다. 한편 사목과 영성의 지도자로서 이들은 이단을 척결하고 설교를 권장하며, 성직자의 서품과 어린이들의 견진, 성지의 축성등 성사적 임무를 수행하였다. 주교들은 교회법적으로 설교를 해야하는 의무는 없었다. 따라서 일부는 전혀 설교를 하지 않았지만, 대다수는 지식층을 대상으로 라틴어로 설교하였으며, 존 피셔 (로체스터교구)와 니콜라스 웨스트(일리교구)는 일반 신자들을 대상으로 모국어로도 설교하였다.

    전반적으로 주교들은 여러가지 기능들을 매우 효율적으로 수행하였으며, 상대적으로 덜 부패하였다. 세속적인 삶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울지만이 자녀들을 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다른 주교들도 마찬가지였으나 보다 은밀했을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였다. 울지는 교직겸임과 이로인한 부재교직자로 잉글랜드 주교들중에서 유일하지는 않았지만 유별난 인물이었다. 다른 주교들은 주교승진 이전에 교직겸임자였지만 주교승진과 동시에 겸임교직을 사임하였지만, 울지는 주교직과 동시에 여러 중요한 교직들을 계속 보유하였다. 1514년 요크대주교에 임명되었지만, 1529년 왕정에서 축출당했을 때에야 부임하였다.

    주교들이 국왕의 신하로서의 업무 때문에 자신의 교구를 장기간 부재하는 경우는 흔히 발생하였다. 하지만 각 교구는 주교의 직접적인 개입없이도 운영될 수 있는 종합적인 행정기구를 보유하였으며, 또한 대리주교(suffragan)와 주교직무대행 (vicar general), 주교권한대행(commissary)을 임명하여 부재기간동안 주교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베스-웰스교구의 주교인 존 클럭은 울지를 대신하여 수차례 해외에 파견되었을 때, 세명의 대리주교를 임명하여 주교의 고유업무를, 동생에게는 주교재산의 관리를 맡겼다. 리처드 폭스(윈체스터교구) 주교는 옥새상서 (Lord Privy Seal)직을 30년동안 수행하면서 자주 그리고 장기간 부재하였지만, 유능한 대리인들을 임명함으로써 그의 교구에서 직무태만의 징후는 거의 없었다.

    교구에 상근했던 종교개혁이전의 주교들은 직접 교회법원을 관장하고 성직자들을 감독하며, 이단자들을 처벌하는 매우 유능한 행정가들이었다. 주교들중 90퍼센트 이상이 대학교 학위를 소지하였으며, 3분의2는 일반법 또는 교회법 전공자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교구의 사법업무와 국왕의 행정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더구나 상당수 주교들은 기존의 효율적인 교구업무활동에 만족하지 않고 중요한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예를들면, 로버트 셔번 치체스터주교는 교구의 사법기구를 완전히 개편하였으며, 피셔주교는 성직자들의 교육수준 향상과, 자신의 설교집과 기타 설교자료집의 출판을 통해서 설교능력이 있는 성직자들을 양성하는데 노력하였다.

    전반적으로 종교개혁이전의 주교들은 학문활동을 열심히 후원하였다. 15세기말과 16세기초 동안에 적어도 20명의 주교들이 두 대학교에 새로운 교육기관과 장학금을 설립하였으며, 이들중 12명은 다른 교육기관들도 설립하였다. 새로이 설립된 교육기관들 대다수는 신학적 압장과 교과과정상 전통적이었지만, 일부는 대륙의 교육개혁운동, 즉 휴머니즘의 영향을 반영한 선구적인 기관이었다. 리처드 폭스주교는 옥스퍼드에 성체축일(코퍼스 크리스티)칼리지를 설립하면서 희랍어와 라틴어 공개강좌 교수직을 신설하여 인문학의 연구를 특별히 강조하였다. 피셔는 캐임브리지대학교 부총장과 총장시절에 세가지의 성서언어-히브리어, 희랍어와 라틴어-에 대한 연구를 장려하였으며, 1516년 새로운 교육기관인 크라이스트 칼리지의 설립정관에 이 언어들에 대한 연구를 규정하였다. 울지조차도 이런 면에서 개혁적인 주교로 분류될 수 있다. 그는 새로 설립한 옥스퍼드의 카디널칼리지의 설립정관에 진정한 신앙을 옹호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스콜라철학의 방법론뿐만 아니라 고전원서(classic text)에 대한 연구를 규정하였다.

    16세기초의 주교들은 전반적으로 높은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존 콜레트와 같은 도덕주의자들 또는 존 스켈턴과 같은 풍자작가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들의 비판은 부분적으로 교회개혁에 대한 당대인들의 기대감과, 부분적으로 주교들의 미약한 개혁의지에 대한 좌절감을 반영한 것이었다. 더구나 공격중 일부는 구체적으로 울지의 막강한 권력과 자만심을 겨냥한 것이었다.

    1.3 종교개혁직전의 일반성직자들

    1500년경에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재속사제의 숫자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체로 2만6-7천명 정도가 적절한 예측일 것이다. 이 숫자는 전체 남성인구의 약4퍼센트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분명히 약8천8백개의 전도구 교직을 담당하는 성직자들은 부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직이 없는 상당수의 사제들은 전례보조사제, 비상근 전속사제, 교직자가 상주하지 않는 전도구교회의 보좌사제와 같은 단기 직책을 위하여 경쟁하였다. 그러므로, 고질적인 비상근행위(부재교직absenteeism) 에도 불구하고 성직자의 부족으로 전례와 사목활동이 방치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

    이 시기의 일반성직자들이 무지하였다는 당대의 도덕주의자들의 비판은 지나친 것이었다. 교직을 보유한 성직자들 대다수-전도구교회의 교직, chantry나 칼리지교회의 종신보유권을 소유한 성직자들-는 적어도 라틴어에 익숙하였으며, 성서와 신학에 적절한 지식을 보유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교직에 임명되기 전에 종종 자격과 능력에 대한 검증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들의 사회적 출신배경을 살펴보면, 이들이 15세기에 확산된 문법학교와 초등교육기관에서 교육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한 예측에 의하면, 16세기 전반까지 전체교직의 약 20-25퍼센트는 대학졸업자들이었다(Marshall, 1994). 교육수준이 가장 높았던 지역은 런던으로, 런던의 교직보유자들중 대학졸업자는 1429-79년의 25퍼센트에서 1479-1529년의 60퍼센트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통계는 전도구 사목자들의 교육수준이 크게 향상되었음을 나타내지만, 이들 대학졸업자들 모두가 전도구교회에서 직접 사목활동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바로 대다수의 부재교직자들로, 대학에서 계속 공부를 하거나 왕실 또는 교구 행정가로 활동하면서 급여로 교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대학에서 법률이나 신학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전도구 사목직에 필요한 전례와 교육, 사목활동에 적합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교직을 보유하지 않은(무교직, unbeneficed) 성직자들의 교육수준은 일반적으로 교직보유 성직자들보다 훨씬 낮았다. 모든 성직자들은 서품전의 시험으로 라틴어에 익숙해야 했지만, 일부는 속이거나(이들의 고백으로 알 수 있다), 일부는 본문을 암기하였다. 성직서품후에는 더 이상의 심사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교육과 지식수준은 잘해야 기본적인 수준이었다고 볼 수있다. 1530년 스토키슬리 런던주교는 58명의 보좌사목자(curate)들의 교육과 사목능력을 심사하였을 때, 14명만이 만족스런 수준이었다. 그외 16명은 미사집례 금지처분을 받았으며, 6명(이중 2명은 MA소지자)은 공부후 재심사를, 나머지(두명의 MA와 두명의 BA)는 무지 또는 ‘읽기와 쓰기부족’이란 이유로 전도구 사목직을 박탈하였다(Chili, 1997). 스토키슬리는 인문주의학자로 아마도 너무 높은 수준을 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그가 사목직을 박탈한 6명은 모두 대학졸업자들이었다.

    구체적인 성서지식과 신학적 이해의 부족은 종교개혁 이전의 성직자들에게 커다란 장애요소는 아니었다. 이들은 설교를 인근의 수도사나 탁발수사들에게 맡길 수 있었기 때문에 분기별 설교의무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은 각종 지침서들을 이용하여 성사를 올바르게 집례하고, 평신도들에게 기초적인 신앙을 교육할 수 있었다. 이런 종류의 실용적인 서적들로는 존 머크의 <Festivals>-주일과 축일에 사용하는 74편의 설교 수록-과 <Instruction to Parish Priests>-신경과 십계명, 7가지 성사에 대한 요약된 설명 수록-를 꼽을 수 있다(Rubin, 1991). 또한 성직자들이 남긴 유언장에 기록된 서적들을 볼 때, 많은 성직자들이 이런 종류의 설교집과 교육지침서들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아마도 이를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극소수의 교회회장들만이 성직자의 교육수준에 대하여 불평하였다. 1499년 서퍽지방에 대한 존 모톤 추기경의 방문조사때에 489개의 전도구교회에서 단 두명의 성직자만이 교육수준의 부족으로 정직처분을 받았으며, 1511-12년 워햄 대주교의 켄트지방 방문조사때에 260개 전도구교회중에서 단 4명의 성직자만이 무지로 고발당하였다(Haigh, 1993).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인 만족도가 전도구 사목자들의 충분한 능력 때문인지 아니면 전도구민들의 식별력 부족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피터 마샬은 후자를 주장하며, 방문조사 기록에서 설교는 평신도들의 우선 관심사에서 밀려나 있었다고 지적하였다(Marshall, 1994).

    당대의 도덕주의자들과 후대의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이 이 시기의 재속사제들을 비판한 또 하나의 쟁점은 성직자들의 독신생활 서약의 위반이었다. 루터파인 로버트 반스는 잉글랜드 성직자들중 3분의 1만이 정말로 순결하다고 주장하였으며, 사이먼 피쉬는 특유한 과장으로 사제들이 10만명의 여성들을 농락하였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방문조사 기록에는 이러한 무절제한 성적타락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서퍽과 켄트지방, 링컨교구, 노리치와 윈체스터 대교무구에 대한 16세기초의 방문조사 기록에서 전체 성직자들중 5퍼센트 미만이 성적이탈행위로 고발당하였으며, 유죄판결을 받은 숫자는 이보다 훨씬 적었다.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고발당한 소규모 성직자들의 경우는 성직자 독신생활의 보편적 현상이라기 보다는 성직자들의 내연생활(concubinage)에 대한 평신도들의 용납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피터 마샬은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며, 독신생활은 사제직의 핵심으로 성적 부도덕은 사제의 의무에 대한 결정적인 파기로 인식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성적타락으로 대죄상태에 있는 사제도 그리스도의 몸을 만지고 먹을 수 있다는 인식은 당대인들이 아주 싫어하는 주장이었다’(Marshall, 1994, pp.151-3). 따라서 사제가 불법적인 내연관계에 있다고 의심받을 때, 사제의 도덕적 권위는 심각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에 중상모략으로 고소하여 법원에서 명예를 회복할 수 밖에 없었다.

    재속사제들이 전반적으로 전례와 사목활동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하더라도, 전도구교회의 행정분야에 대한 개혁은 필요하였다. 제일 먼저, 전도구제도는 수세기동안 방치되어 있었으며, 전도구의 크기는 그간의 인구변동을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 즉 일부 전도구는 너무 커져서 한 교회로는 전도구민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일부는 미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반독립적인 지교회(예배소, chapel)나 chantry성직자들에게 의존하였다. 둘째로, 상당수 전도구교직은 상근성직자에게 적절한 수입을 보장하지 못하였다. 잉글랜드의 경우, 75퍼센트가 년수입 15파운드이하였으며, 그나마 이중 절반이 10파운드 이하였다. 이처럼 낮은 급여의 원인중 하나는 교직의 사유재산제도(appropriation) 때문이었다. 1535년에 3천3백개 이상의 전도구교직이 사유화된 교직이었다. 즉 이들 전도구교회의 담임사목자나 대리사목자는 소규모의 급여만을 받았고, 많게는 교직수입의 3분의 2까지를 교직추천권자(소유권자patron)나 관할사제(rector)-보통 수도원이나 최근에 설립된 두 대학교의 칼리지들이 교직권을 보유하였다-가 차지하였다. 당연히 낮은 보수로 능력있는 성직자를 유인할 수 없었으며, 결국 적절한 수입을 확보하기 위하여 두개이상의 교직을 맡는 교직겸임(pluralism) 현상이 발생하였다.

    15세기 동안에 교직겸임 현상은 꾸준히 증가하였다. 1490년에서 1529년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겸직성직자는 교직보유 성직자들중에서 10퍼센트 정도를, 잉글랜드 전체로는 약25퍼센트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겸직 정도의 심각성은 지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1526년 요크셔의 이스트 라이딩대교무구의 경우 6퍼센트만이 겸직 성직자들이었지만, 1511년 캔터베리교구의 경우 15퍼센트를, 런던은 약34퍼센트나 되었다(Marshall, 1995; Zell, 1974; Brigden, 1989). 앞서 지적한 것처럼 상근 성직자가 없는 전도구교회는 주로 보좌사제나 임시사제(chaplain)들이 수행하였기 때문에, 교직겸임은 특히 십일조 세금이 상주하지 않는 교직보유 성직자에게 귀속되었을 때에야 전도구민들의 불평대상이 된 것으로 보인다.

    전도구교회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는 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의 주제였다.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주장에 의하면, 많은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의 교육수준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며, 성직자들의 재정적인 착취와 성직자의 특권에 대하여 몹시 분개하였다. 학자들은 주로 당시의 저서들(literary works)-특히 사이먼 피쉬의 <The Supplication of the Beggars>-과 당시의 유명한 사건들-리처드 훈의 사건등-에 의존하여 이러한 해석을 지지하는 상당수의 증거들을 제시하였다. 이들 학자들, 특히 유명한 제프리 디킨스는 더 나아가 이러한 ‘반성직자주의’(anti-clericalism)가 1529년 의회의 성직자에 대한 공격과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성공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Dickens, 1964).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C. 헤이와 J. 스캐리스브릭이 주도하는 수정주의학자들의 도전을 받았다. 이들은 디킨스가 제시한 당시의 저서들을 의심하면서, 대신에 당시의 방문조사와 법원의 기록들에서 성직자들의 불법행위에 대한 불평이 만연하지 않았다는 점은 종교개혁 직전에 성직자들에 대한 평신도들의 만족감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Haigh, 1983; Scarisbrick, 1984). 디킨스는 1987년 이들의 비판에 대한 재반박을 제시하였지만, 그 이후로 수행된 많은 연구들은 수정주의학자들의 입장을 강화하였다(Dickens, 1987). 예를들면, 비트 큐민은 각 지방의 교회회장들의 기록서 10개를 분석하여, 평신도들이 전도구교회의 이익을 위하여 성직자와 매우 잘 협력하였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그는 성직자들이 평신도들의 생활을 통제하려고 함으로써 불만을 야기시켰다는 종전의 주장과는 대조적으로, 평신도들이 성직자와 전도구교회 활동을 사실상 통제하였다고 설명하였다(Kumin, 1996).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평신도와 성직자 사이의 긴장관계를 나타내는 증거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개별 성직자들과 교인들 사이의 ‘마찰과 언쟁’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이 존재하며, 개별 성직자에 대한 평신도들의 마찰이나 불만족의 정도는 수정주의학자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컸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잔존하는 방문조사 기록은 완전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 않다. 즉 이 기록들은 완전한 것이 아니며, 또한 전도구민들은 지역사회에 대한 충성심, 교회당국자들에 대한 불신 또는 마찰없는 생활추구 때문에 해당 성직자를 고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십일조 세금과 장례세에 대한 분쟁은 1530년이전에 많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쌍방의 타협이 실패한 후에야 법정으로 전환된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구나 일부지역에서 1510년이후 물가상승으로 담임성직자들이 지역의 관례를 무시하거나 더 높은 세금이나 물품으로 확대함으로써, 십일조 세금소송은 더욱 심각하게 자주 발생하였다. 런던의 경우, 십일조 세금과 각종 경비에 대한 분쟁으로 전 지역사회가 부당한 세금요구라는 인식으로 성직자를 반대하였다(Brigden, 1981, 1989; Wunderli, 1981).

    2008년 9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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