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신학 및 역사 이야기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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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수도원의 해산[해체]

    헨리의 수도원 해체는 몇가지 근본적인 면에서 종교개혁이전의 수도원 해체와는 달랐다. 이전의 해체는 주교에 의해서 교직추천권자나 수도원 설립자의 후손들의 허락을 얻어 실행하였지만, 이후의 해체는 국왕에 의해서 의회에서 법률로 제정하여 교직추천권자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단행하였다. 더구나 헨리의 해산정책은 형식적으로 수도원재산의 교회내 전용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수도원해산으로 획득한 수입 일부를 교회조직과 교육 목적으로 사용하였지만, 대부분은 국왕의 금고로 귀속되었으며, 교회는 상당한 재산손실을 감수하였다. 마지막으로, 1530년 이전의 해체기준은 각 수도원의 생존능력과 수도생활의 수준이었지만, 1536년의 해체기준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임의적인 재정적인 능력-즉 수도원의 년수입 200파운드 이하-이었다. 따라서 1536년 수도원 해산법률의 서문에서 수도원제도의 합리화와 수준향상을 위하여 소규모 수도원들을 해체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로 남아있는 수도원들에 엄격한 규정이나 개혁을 도입하려는 진지한 시도는 전혀 없었다.

    소규모 수도원의 해체직후 정부는 수도원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을 직접 공격함으로써 급격한 쇠퇴를 촉진시켰다. 그러나 헨리의 해산정책은 잉글랜드에서 수도원생활을 실질적으로 금지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산해체[몰수]를 통해서 생존수단을 제거함으로써 말살시켰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1536년의 소규모 수도원의 해산법률을 제정하였을 때 완전해산을 의도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국왕의 정책은 교회재산의 상당부분을 몰수하고 제한된 수의 수도원재산을 교회에 남겨놓는 것으로 보인다. 보다 과감한 정책은 몇년뒤에 우연히 실행되었다.

    수도원 해산정책은 1535년1월 왕국교회의 수장대리직에 임명된 후 미리 기획한 전 교회에 대한 방문조사를 승인한 토마스 크롬웰에 의해서 실시되었다. 그는 1520년대말 울지의 가신으로 추기경의 일부 수도원의 해체를 관장하였기 때문에, 이 때에 해체활동에 필요한 법적 행정적 절차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개인적으로 수도원제도와 교회기관의 상당한 재산보유를 매우 싫어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며, 아마도 장래에 전 교회의 재산해체를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서류들중 1539년 늦여름이나 가을에 작성된 익명의 문서는 ‘국왕의 재산확장과 왕국의 방어를 위하여’ 왕국교회의 재산해체를 건의하였다. 헨리 역시 성직자들의 상당한 재산보유를 특히 황제적 왕권 인식과 상충된다고 믿어 몹시 싫어하였으며, 1533년에 그는 ‘성직자들이 소유한 재산을 왕권에 재통합시킬’ 의도를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헨리는 국왕의 수입과 권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특히 왕국의 방어를 위하여 재정이 필요할 때에 교회소유 재산의 제한적인 몰수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결국에 그는 왕국교회 재산의 전면적인 몰수를 거부하였다. 이는 아마도 의회에서 충분한 지지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530년대에 정부가 chantry나 주교들의 재산보다 수도원재산을 겨냥하였던 것은 부분적으로 울지의 수도원 해체사례 때문이기도 하였으며, 또한 부분적으로 수도원제도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었다. 더구나 수도원들의 국제적인 관계는 국왕의 공격에 매우 취약하였다. 왜냐하면 대륙의 모체 수도원에 대한 잉글랜드 분원들의 복종행위는 황제적 왕권사상과 상충될 뿐만 아니라 왕국의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와의 단교와 국왕수장권에 대한 일부 수도원들의 반대활동은 이러한 인식을 강화시켜 결국 정부의 철저한 보복대상이 되었다. 런던의 차터하우스(Charterhouse)의 카르투지오 수도사들은 1535년 수장권에 대한 서약을 완강히 거부함으로써 가장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즉 고위수도사 6명이 처형되었고, 그외 10명이 뉴게이트감옥에서 굶어 죽었다. 북부지방 수도원의 수도사들도 저항하였으나 결국 위협과 협박에 굴복하였다. 성 올번스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은 국왕의 혼인무효와 로마와의 단교를 정죄하였으며, 시온에 있는 수도원은 헨리와 볼린의 혼인을 분명하게 승인하는 진술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프란시스코 엄수회, 브리제트수도회와 일부 시또수도원들은 수장권 서약을 거부하였다(Cross, 1990, 1993; Clark, 2000).

    소규모 수도원의 해체는 1535년 세금부과를 위한 교회기관들의 재산조사 활동으로 시작되었다. 조사결과인 교회재산 조사대장(Valor Ecclesiasticus)은 수도원의 숫자와 위치, 이들이 소유한 토지와 동산의 가치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정부에 제공하였다. 조사완결 몇개월후 크롬웰은 새로운 권한인 수장대리로서 각 수도원에 대한 방문조사를 실시할 6명의 조사관(commissioner)을 임명하였다. 이들은 86개의 조사항목을 갖고 1535년9월부터 조사를 시작하였다. 이들의 목표는 앞으로의 해체작업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수도원의 타락과 미신행위등 가장 비판적이고 악의적인 내용을 수집 공표하는 것이었다. 조사관들이 기록한 실사보고서(comperta)는 6개월안에 의회에 제출되었다. 한 학자의 말대로, ‘이들의 조사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보고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Hoyle, 1995, p.295).

    1536년3월초 의회에서 제정된 제1차 수도원 해산법안은 년수입200파운드 이하인 수도원의 재산을 국왕에게 양도하였다. 이들 수도원의 원장들만 연금을 제공하고 나머지 수도사들은 다른 수도원으로 전출하거나 제속사제로의 전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국왕은 약80개의 수도원에 대하여 일정비용을 받고 해체집행의 연기를 허용한 것으로 보아 전체적인 계획 뒤에는 재정적인 동기가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수도원들은 85퍼센트가 연수입200파운드 이하였기 때문에, 수도생활을 지속하려는 수도사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일부 수도원을 보존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수도원들은 후원자(patron)들의 청탁으로 일시적으로나마 해체를 모면하였다. 정부가 이러한 예외를 허용하고 일부 새로운 수도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는 점으로 보아, 헨리와 크롬웰이 이 단계에서 수도원제도를 완전히 폐지시킬 계획을 갖고있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1536년의 법률제정이후 남아있는 202개의 수도원에 대하여 거의 1년동안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 그러나 1537년4월 퍼니스수도원은 재산을 국왕에게 양도하도록 권고받았다. 이후 2년동안 잔존하는 수도원들은 이 사례에 따라 스스로 해체하여 그 재산을 국왕에게 양도하도록 권유와 압력을 받았다. 이 기간동안 정부는 수도원의 해산을 정당화하는 선전활동을 펼치며, 수도원을 사기와 미신, 우상숭배의 소굴로 묘사하였다. 일부 수도원장들은 국왕의 해체요구에 쉽게 굴복하지 않았으며, 소수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들은 콜체스터, 리딩과 글래스톤베리의 수도원장들로 이 때문에 반역죄로 처형되었으며, 이들의 토지는 몰수되었다. 에섹스지방의 왈담수도원은 제일 마지막으로 1540년3월에 굴복하였다. 그러므로 1539년에 제정된 제2차 수도원해산법은 이미 진행된 수도원들의 재산양도를 단순히 확인하고, 국왕에게 ‘이후 해체되는’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할 것을 허용하였다.
    이처럼 수도원제도를 폐기시키는 이상한 과정은 제1차 수도원해산법의 표현 때문 이었다. 1536년의 법률에서 규모가 큰 수도원들의 수준은 만족스럽기 때문에 개혁을 빙자한 완전해체 방안을 금지시켰다. 또한 1539년에 수도원의 완전해체가 기정사실이 아니었다면, 의회에서 완전해체를 승인 받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이러한 두번째 해체과정은 헨리의 급박한 재정적 필요와 왕국내부의 안전 때문에 실행되었다. 전자의 경우[재정적 이유], 교황의 파문교서를 집행하기 위하여 찰스5세와 프란시스1세의 연합공격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정부는 해안지방을 요새화하는데 상당한 비용이 필요하였다. 후자의 경우[내부안전], 1536-7년의 북부지방반란-<은총의 순례>난-에서 보여준 수도사들의 지원활동은 정부의 보복대상이 되었다. 즉 반란군들은 요크셔의 솔리, 리볼스와 젠볼스 수도원의 지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어거스틴과 길버트 수도회의 수사들(canons) 또한 반란에 깊이 개입하였다. 이 때문에 14명의 수도사와 탁발수도사들이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이중 10명이 처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당연히 모든 수도원들을 가상의 반란세력(potential fifth column)으로 인식하였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수도원의 해산은 오랫동안 특히 학자들과 예술품 애호가들의 비탄의 대상이었다. 중세시대의 훌륭한 건축물들의 손실은 막대하였다. 일부 수도원들은 전도구교회와 14개의 대성당으로 전용되었지만, 3분의1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또다른 3분의1은 폐허로 변하였다. 중세시대 공예술의 중요한 사례들은 수도원의 각종 접시류(plates)의 몰수와 용해로 사실상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다. 비록 헨리는 존 리랜드를 통해서 수도원 도서관의 소장품들을 국왕도서관으로 구출하는데 집중적인 노력을 하였지만, 소규모 수도원의 모든 필사본들과 규모가 큰 수도원들의 상당수 소장품들은 파괴되거나 분실되었다. 오늘날 국가의 문화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헨리의 수도원 해체사건은 매우 혐오스런 파괴행위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인식은 당대인들도 공유하였으며, 북부반란의 한 지도자인 로버트 애스크는 ‘수도원들은 [원문 그대로] 이곳을 지나는 주민들과 여행자들에게는 왕국의 아름다움들중 하나였다’고 선언하였다.

    수도원 페쇄는 당대인들에게 다른 면에서 충격적이었다. 물론 가장 직접적인 충격을 받은 자들은 바로 이곳에서 살며 생활하던 사람들이었다. 해체에 협조한 수도원장들은 관대한 연금과 대체직책을 보장받았지만, 대다수 수도사들은 거처와 직업을 상실하였다. 1535년이후 성직지원자들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절반이하의 수도사들만이 전도구교회와 chantry에서 활동하는 재속사제로 전환하였다. 추방된 수도사들에게 준 년평균 연금은 5파운드10실링-최저생존 임금에 해당-이었으며, 상당수는 그 이하를 수령하였다. 탁발수도사와 여성수도사들은 최악의 영향을 받았다. 연금은 각 수도원의 재산에 따라 책정되었기 때문에, 탁발수도사들은 수혜자격조차 없었으며, 상당수 여성수도사들은 어렵게 생활하였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여성수도원의 경우 연금은 적당하였지만, 대다수인 가난한 수도원출신 여성수도사들은 커다란 피해를 받았다. 링컨교구의 경우, 88퍼센트가 년평균 5파운드이하의 연금을, 60퍼센트가 2파운드이하의 연금을 받았다. 요크셔의 한 여성수도원의 경우 두명을 제외한 모든 수도사들이 년1파운드만을 받았다. 이 액수로 생활하기에는 분명히 어렵기 때문에 가족들이 집으로 데려가거나 생활비를 지원하였다. 일부 수도사들은 생활비를 줄이기 위하여 공동생활을, 일부는 수도원 밖에서 스스로 신앙공동체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비록 1539년의 6개신앙조항법으로 결혼을 금지시키고 10년후에야 가능하였지만, 일부는 결혼하였다.

    각 수도사들이 겪은 고통스런 사례들은 상당히 많았지만, 수도원해체가 끼친 사회적 영향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잉글랜드 인구의 3분의1이 이미 빈곤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소액 연금수령자들을 추가한다고 커다란 차이는 없었다. 빈민구제활동 역시 개인과 도시지자체, 왕국의 법률제정으로 수도원을 대신하였기 때문에 그 영향은 미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선활동에 유산을 기증하였으며, 에드워드6세 시대부터 빈민구제기금을 각 전도구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징수하였다. 더구나 입스위치와 런던처럼 각 도시들은 빈민들을 위하여 구빈원(almhouce)과 빈민원(hospital)을 설립하여 기근때에 식량을 무상 또는 저렴한 가격으로 배급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교육기관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 또한 매우 제한적이었다. 16세기초에 다른 학교들이 수도원 학교와 나란히 존재하였기 때문에, 수도원 학교의 폐쇄로 전국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또한 새로이 설립된 왕립학교들(royal grammar school)이 수도원대성당 학교들-켄터베리, 칼라일, 일리 노리치, 로체스터와 우스터-의 기능을 대신하였다. 반면에 일부 교육기관과 특히 두 대학교는 수도원재산의 몰수로 오히려 혜택을 받았다. 몰수된 수도원재산중 일부는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년수입2,200파운드)와 캐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년수입1,640파운드)를 설립하는데 사용되었으며, 또한 두 대학교의 왕립교수직을 설립하고 신학부의 학생들과 강사들(reders)을 지원하는데 사용되었다.

    자선과 교육활동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은 과장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수도원 해산은 교회기관의 개혁기회를 상실하였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헨리는 ‘남아도는’수도원재산을 왕국교회의 다른 분야로 전용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분명히 이런 방향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본래 1-8개의 새로운 교구를 설립하겠다는 계획과는 달리 6개의 교구만 실질적으로 설립하였으며, 새로운 교구로 전환된 재산도 턱없이 부족하였다. 새로운 교구는 500파운드이하의 수입이 책정되었으며, 브리스톨교구는 재정적으로 빈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행정구조상 매우 복잡하였다 (Betty, 1998). 체스터교구는 겨우 연수입420파운드로 ‘교구의 실직적인 행정조직을 포기할 때에만’ 생존이 가능하였다(Haigh, 1976). 결국 잉글랜드교회는 다수의 대규모 교구들과 소수의 빈약한 교구들이라는 기존의 구조를 지속하였다. 마찬가지로 수도원재산을 교육적 사회적 목적-설교자, 학교, 빈민원과 인문학연구 지원-으로 전용하겠다는 계획의 대부분은 국왕의 긴급한 재정적 필요 때문에 실현되지 못하였다.

    국왕은 수도원해산으로 모두 합쳐 연수입132,000파운드에 해당하는 토지를 획득하였지만, 이처럼 막대한 수입은 대체로 낭비되었다. 만약 헨리가 새로이 획득한 토지를 보존하면서 잘 관리하였다면, 그의 후계자들은 이러한 재정적 기반으로 잉글랜드에 절대왕권[전제주의왕권]을 실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상당량의 토지들을 곧바로 평신도들에게 매각함으로써 좋은 기회를 상실하였다. 처음에 헨리는 상대적으로 소규모 토지만을 총신들에게 분배하였지만, 1542년 전쟁 결심으로 새로운 토지의 3분의2를 매각함으로써 새로운 재산의 상당부분을 낭비하였다. 국왕은 이 막대한 자금으로도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비용을 완전히 충당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다른 교회기관들의 재산-chantry, 재속칼리지 교회와 신앙조합의 소유재산-을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에드워드치하에서 이러한 기관들 역시 해체되었으며, 그 재산은 국왕에게 양도되었다.

    기존의 수도원 소유토지들은 토지소유자들에게 매각되었기 때문에, 토지몰수와 매각으로 새로운 토지소유계층을 창출하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자영농과 중간정도의 토지소유자[젠트리]들이 토지시장의 활성화로 가장 큰 혜택을 받았다. 도시 자치체들은 서로 다른 영향을 받았다. 일부 소도시들-선 애바스(도시트지방)와 램지(헌팅턴셔)등-은 경제적으로 수도원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수도원의 해체로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며, 반면에 규모가 큰 도시들-브리스톨, 코벤트리, 노리치와 워윅등-은 수도원과 이후의 chantry 소유토지들을 매입함으로써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커다란 이익을 얻었다. 이 도시들은 처음에 상대적으로 소수의 토지만을 구입하였으나, 이후 토지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새로운 토지들을 매입함으로써 불경기에도 생존뿐만 아니라 성장할 수 있는 수입원을 확보하였다. 또한 이 도시 자치체들은 교회기관에서 운영하던 부속학교와 빈민원의 기능까지도 인수하였다 (Tittler, 1998).

    전 수도원토지를 새로이 소유한 평신도들은 또한 수도원이 소유하였던 십일조 세금과 교직추천권도 매입하였다. 물론 수도원의 해산 이전에도 평신도들에게 교직추천권을 매각하였다. 그러나 1530년대와 40년대동안에 교직추천권의 매각규모는 이전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이제 평신도들의 영향력은 전도구 교회까지로 확대되었다. 켄터베리교구의 경우, 평신도 소유의 교직추천권은 1534년의 16퍼센트에서 1540-53년에 38퍼센트로 증가하였다. 링컨교구는 1536년 이전의 33.5퍼센트에서 그 이후 55퍼센트로 증가하였다.

    대다수 평신도들이 수도원 해체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고 오히려 일부 토지소유계층은 혜택을 받았지만, 이들이 수도원의 해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수도원의 폐쇄때에 수도사들에 대한 군중들의 폭력행위는 발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부 수도원을 폐쇄하러온 행정관(commissioner)들에 대한 폭력행위가 발생하였다. 데번지방의 엑시터에서 한 행정관(commissioner)은 가재도구로 공격하는 여성들을 피하려다 갈비뼈가 부러졌으며, 노섬버랜드지방의 핵삼에서 두 행정관은 마치 전쟁중에 도시를 방어하기 위하여 무장한 채 시가지에 모여있는 군중들과 대치하였다. 더구나 <은총의 순례>에 가담한 반란군들 대다수는 ‘해체된 수도원의 원상회복’을 요구하며 일시적이나마 무력으로 55개의 수도원을 복원하였다.

    수도원의 해체를 반대했던 모든 사람들이 폭력에만 의존했던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자기지역의 수도원을 보존하기 위하여 왕실인사들에게 청원하였다. 슈루스베리 백작는 그의 조상들이 묻혀있는 곳이자 ‘내가 설립한…가난한 웜슬리 수도원’을 위하여 왕실의 한 의전관[내실 담당자]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1536년 특정 수도원의 보존을 청원하였던 이들 평신도들은 이후의 토지매입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즉 수도원재산의 매각이 불가피하였을 때, 슈루스베리 백작같은 이들은 국왕에게 토지의 판매를 청원하였다. 이들은 토지뿐만 아니라 중세기 건축물에서 나오는 석재, 채색유리와 납등을 채취하여 새로운 세속용 저택들을 건축하는데 사용하였다.

    당연히 수도원토지를 소유한 평신도들은 메리 튜더의 왕위계승이후 교회로의 반납을 매우 싫어하였다. 메리의 남편인 필립은 이 문제 때문에 로마로의 복귀가 지연될 것를 우려하여 평신도들의 수도원토지 소유를 인정하는 안을 로마와 협상하였다. 최종 합의안은 평신도들을 안심시켰지만, 토지의 완전소유권을 인정한 것이 아니고, 미래에 취소할 수도 있는 교황의 특면으로 소유를 허락하는 것이었다. 메리치하에서는 6개의 수도원이 새로이 설립되었다- 베네딕트수도회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카르투지오수도회(쉰), 브리제트수도회(시온), 도미니크수도회 (스미스 필드), 프란시스코수도회(그린위치), 도미니크 여성수도회(킹스 랭글리, 후에 다트포드). 여왕 스스로 이 모든 수도원을 건립하였지만, 웨스트민스터를 제외하고 그리 넉넉한 재원을 지원하지 못하였으며, 이들 수도원의 모든 재산은 연수입 2천파운드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제도에 대한 여왕의 태도는 수도원을 설립하지도 유산을 기증하지도 않는 신하들보다는 훨씬 헌신적이었다. 한편 전직 수도사들중 소수만이 새로이 설립된 수도원으로 복귀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일반적으로 수도원의 복원에 냉담하였다. 약100명 정도만이 다시 설립된 수도원으로 복귀하였으며, 그중 절반은 특별전시용인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 가입하였다.

    폴추기경은 수도사들을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몬테 카시노의 베네딕트수도회 수도사2명을 초청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이와 동시에 그는 예수회 수사들을 잉글랜로 파송하겠다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제의를 거부하였다. 이를 거부한 이유들은 수사들의 영어구사능력의 부족과 스페인과의 연관성 때문이었지만, 개인적인 관계가 더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최근들어 폴과 로욜라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예수회의 활동이 폴이 기획한 잉글랜드 신학교설립과 경쟁관계를 형성할 것을 우려하였다. 학자들은 폴의 결정을 비판하였지만, 메리의 짧은 통치기간 때문에 예수회의 활동효과는 의문이다. 엘리자베스는 왕위계승과 함께 새로운 수도원들을 해체하면서 국왕수장권을 서약하는 수도사들에게 연금을 제의하였지만, 소수만이 이를 수용하고 나머지는 해외로 망명하였다.

    2008년 9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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