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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2주일 -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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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부활 2 주일 - 다해

    제 1독서: 사도 5:12-16 RCL: 사도 5:27-32

    여기서는 성령 강림 사건 이후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있었던 사도들의 사목 활동 광경을 엿볼 수 있다. 이 광경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분의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사도들의 설교는 여기서 언급되지 않지만, 말씀의 선포 없이는 이러한 표징들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 없다.

    “주를 믿는… 수효는… 늘어났다”(14절)에서 “늘어났다”는 말은 “더해졌다”의 의역이다. 즉 새로운 신자들이 추가되었다는 말로, 이미 존재하는 공동체에 이들이 새롭게 이끌려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하여 메시지를 듣고 함께 모인 것이 아니었다. 공동체가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더해졌다”는 표현은 신적 수동형(reverential passive)으로, 이들을 이 공동체에 “더해준” 주체는 하느님이셨음을 암시한다. 교회가 새로운 신자들을 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새로운 신자들은 그들의 뜻에 따라 신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원받은 공동체로 옮겨 주신 것이다.

    RCL의 대치 본문은 (그 맥락을 설명하는 27절 전반부를 제외하고) 로마 가톨릭 정과의 다음 주 제 1독서의 내용이다 (420쪽을 보라 – 다음 주 제 1독서 해설을 보라 – 역자 주).

    제 2독서: 묵시 1:9-11a, 12-13, 17-19 RCL: 묵시 1:4-8

    RCL의 본문은, 4절을 빼면, 그리스도 왕 주일 (나해)의 본문과 같다 (해당 내용 참조). “일곱 영신”(4절)은 아마도 성령의 다양한 기능을 가리키는 것 같다(이사 11:2을 보라).

    다른 본문들은 묵시에 대한 환시(vision)의 시작이다. 환시자인 요한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며, 일곱 교회를 위한 메시지를 받는다. 몇몇 학자들은 이 환시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현현의 연속이었다고 주장했다. 사실 원래의 부활 현현에 대한 묘사에서 이러한 환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1고린 15:3-8). 게다가 초기 전승에서 이 부활 현현들은 “하늘로부터” 나타난 것이다 (바울로 서신, 마르코, 마태 28:18, 요한 21장). 지상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유령인 듯이 나타나는 설명 (루가 24장, 요한 20장)은 오히려 이후에 발전된 전승이다. 그러나 바울로는 자신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현현은 그 날짜뿐만 아니라, 그 현현의 원칙에서도 “마지막”으로 나타나 것이라고 강조한다 (1고린 15:8). 바울로 자신은 이후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환시(‘신비로운 영상’)를 경험한다 (2고린 12:1-4: 여기서 그는 자신이 하늘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나타나셨노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게다가 부활 현현은 교회를 형성하고 교회에 세상 안에서 이룰 선교 사명을 주는 계시였다. 그 이후에 나타나는 환시들, 즉 고린토 12:1-14에 나타난 바울로의 환시와 우리가 읽은 환시자 요한이 본 환시는 부활일에 시작된 것의 연속이다. 특별한 추가 사항이 없이, 여기서는 청각적인 면에서 본래 부활 계시를 반복해서 말해주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하늘에 오르신 분으로 드러난다.

    복음: 요한 20:19-31

    부활 2주일의 전통적인 본문인 이 장면은 두 가지 부활 현현을 그리고 있다. 그 하나는 부활일 밤에 제자들에게 일어난 현현으로, 마태오, 루가, 그리고 오늘 본문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일주일 후에 토마에게 일어난 현현으로, 요한 복음서에 만 있는 특별한 이야기이다. ‘의심’이라는 요소는 거의 처음부터 이 부활 현현 전승을 특징짓는 것이었고, 이 부활 현현이 단순히 마음에 품었던 생각의 성취가 아니었다는 점을 밝혀주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변증적 목적으로 확장되어 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분이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초기 전승은 부활하신 분을 좀더 영적인 용어로 설명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이는 후기 전승에서는 부활하신 몸의 육체적 실제성에 강조를 두어, 지상의 예수와 부활하신 분 사이의 변화 속에 놓여 있는 동일성에 대한 진리를 지켜내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이야기를 후대 교회의 관심사에 맞추어 자기 식대로 변경하여 제공한다. 부활 현현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어떻게 부활하신 분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답변: 그분을 보는 것이 믿음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제자들마저도 예수를 보았을 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신앙을 가져야 했다. 그러므로 예수를 보지 못한 이들도 첫 증인들의 증언을 믿는 것으로 신앙을 얻을 수 있는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설교

    세 본문들 모두 부활절기에 적절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들을 함께 연결시킬 수 있는 방법이 선뜻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설교를 위해서는 세 가지 선택이 있겠다. 사도행전을 택한다면, 설교자는 “더해졌다”는 말이 사용된 뜻을 가지고 부활 밤 전례에 있었던 성인의 세례(있었다면)와 연결시켜서, 그들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어떤 클럽에 가입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리고 하느님의 행동에 의해서 그들이 이미 존재하는 공동체에 “더해졌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묵시록의 본문은 부활 현현과 부활하신 분에 대한 그 이후의 환시가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사용할 수 있다.

    복음서 본문은 본 것과 보지 않은 것, 그리고 이와 관련한 신앙이라는 주제를 준비할 수 있다. 설교자는 현대 그리스도인이 지닌 의심들과 함께, 어떻게 이러한 의심들이 세상을 뛰어넘은 신앙에 의해서 대치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다루어 볼 수 있겠다.

    "Tradition is living faith of the dead, Traditionalism is dead faith of the living."
    2007년 4월 7일 #
  2. 익명
    미등록

    정성스레 쓴 글 잘 읽고 참고하여 갑니다.
    사도행전의 '더해졌다'라는 라는 단어를 시작으로, 하느님의 은혜로 지금도 더해지고 있는 우리 교회에, 하느님은 그 은혜를 통하여 이 교회공동체에 어떤 열매를 원하시는가? 연결된 질문으로,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사건을 요한복음서는 무엇으로 말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평화의 사건, 그 평화는 서로 용서하고 화해함으로 이루어지는 평화의 사건... 이렇게 설교를 풀어가보려고 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어 감사합니다.

    2007년 4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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