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신학 및 역사 이야기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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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잉글랜드혁명과 성직자들

    5.1주교들

    1630년대 말까지 로드파 주교들이 야기시킨 적대감의 심각성은 이미 1640년에 발생한 혁명적인 위기의 초기단계에서부터 분명하게 나타났다. 1640년 봄 로드의 공관인 람베스궁은 성난 런던군중들로부터 여러차례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활동이 격화될 때까지도 주교들은 자신들의 개혁정책을 여전히 확고하게 추진하였다. 이들은 1640년 여름에 개최된 성직자회의 에서 지난 10년동안 추진해온 새로운 정책들(innovations)을 인준하는 보수적인 교회법들을 강압적으로 통과시켰다. 더구나 이들은 의회의 장로제주의자들의 공격을 예상하였기 때문에, 모든 성직자들에게 ‘대주교, 주교, 수석사제(deans), 총사제 등등’으로 구성된 국교회정부를 변경시키려는 활동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요구하였다. 이 ‘등등 서약’의 강요는 바로 이 정책의 비인기성과 주교직의 나쁜 평판을 묵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11월 장기의회의 개회이후, 주교제의 ‘완전한 폐기’(root and branch)를 주장하는 청원서들이 전국의 각 지방에서 의회로 무더기로 제출되었다. 1640년12월에 제출된 한 청원서에 의하면, 주교제 치리구조는 ‘고통스런 체험을 통해서 왕국민들의 양심과 자유, 재산에 심각한 해악, 고통과 불만을 야기시킨 주범’이었다. 의원들은 로드를 런던탑에 구속하였지만, 이후 수개월동안 주교제폐지 주장에서 후퇴하였다. 이들의 망설임은 부분적으로 주교제 보존을 요구하는 수많은 청원서들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아마도 이 보다 더 큰 이유는 의회 양원의 의원들 상당수가 장로제의 선택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초기교회의 치리구조를 모델로 개혁된 사목중심의 주교직으로 전환하는 것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제안은 하원[평민원]의 지도자인 존핌과 일부 비로드파 주교들(윌리엄스와 어셔), 상당수 일반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제거한 주교직을 설립하여, 다시는 로드파들처럼 국교회를 장악할 수 없기를 기대하였다. 국왕인 찰스 역시 로드와 결별하고 1641년에서 43년 사이에 적어도 11명의 새로운 주교들을 임명함으로써 주교직보존 주장을 지원하였다. 이들 대다수는 그린달과 애보트의 전통을 이어받은 확고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이처럼 축소된 주교제 계획은 1641년 상원[귀족원]에서 주교들의 의석배제를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무산되었다. 1642년 내전발발 직후 주교제를 지지하는 의원들은 교직에서 은퇴하거나 국왕을 지지하였다. 이제 웨스트민스터에 남은 의원들은 압도적으로 장로제주의자들로 주교직의 완전한 폐지를 지지하였다. 이들은 1645년 이제 병약한 로드를 재판에 회부하여 반역죄로 처형하였다. 다음해 찰스에 대한 군사적 승리이후 1646년10월에 주교제를 완전히 폐지시키고, 대신에 웨스트민스터 성직자총회가 추천한 장로제도로 대체하였다.

    그러나 정상적인 교구행정은 이 이전에 이미 와해되었다. 내전발발 직후 대다수 주교들은 공관거주와 교구업무를 포기하였다. 매튜 렌은 체포되어 런던탑에 구금되었으며, 다른 주교들은 1640년대와 50년대에 자유로웠지만 공적인 생활에서 은퇴하여 칩거하였다. 솔즈베리주교였던 브라이언 더파는 1650년대에 친구들에게 ‘마치 거북이처럼 등딱지안에서’생활하였다고 설명함으로써, 당시의 동료주교들을 대변하였다. 주교들은 이러한 처신으로 무사하였지만, 한편으로 국왕파와 주교제 보존에 대한 분명한 공개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또한 보다 보수적인 성직자들은 공동기도서의 폐지나 새로운 정권에의 순종, 또는 교직의 포기와 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분명한 지침을 제공받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로버트 셜리와 같은 확고한 국왕지지 평신도들은 주교들의 지도력 포기에 크게 실망하여, 1650년대중반 찰스 스튜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들을 파면하고 크롬웰반대를 지도할 수 있는 새로운 성직자로 교체할 것을 요구하였다.

    주교들이 새로운 정권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저항활동을 포기하였다면, 일부 주교들은 사적으로나마 최소한의 의무를 수행하였다. 1650년대중반 민사결혼(civil marriage)이 도입되었을 때, 브라이언 더파주교는 리치먼드(서리지방)의 서재를 예배소로 개조하여 혼인예식을 집례하였다. 특히 로버트 스키너와 같은 주교들은 성직자들을 서품하는 중요한 활동을 하였다. 1650년대말까지 주교들의 숫자는 점차 감소하였으며, 망명왕정은 크랜머로부터 내려오는 잉글랜드주교들의 사도적 계승이 중단될 것을 우려하였다. 찰스와 그의 측근들은 이를 막기위하여 주교들에게 공석인 교구에 새로운 주교를 즉시 서품할 것을 명령하였다.

    5.2 전도구 성직자들

    전도구 성직자들은 주교들의 강력한 지도력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godly정권의 탄압에 매우 취약하였다. 1640년에서 60년사이에 전국의 8,600개 전도구의 성직자중 28퍼센트인 거의 3천명이 교직을 박탈달하거나 여러가지 형태의 시련을 겪었다. 많은 성직자들이 즉각 퇴출(eject)당하거나 사임압력을 받았으며, 다른 성직자들은 국왕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체포, 추방 또는 거액의 벌금을 내야했다. 1640년대 동안에 ‘직무태만’(delinquent) ‘불명예’(scandalous)와 ‘불만분자’ (malignant)로 분류된 성직자들에 대한 의회파의 탄압은 산발적이자 비조직적 이었지만, 지방에 따라 그 강도는 달리 하였다. 의회는 1641년과 42년 동안에 전도구 성직자의 정화[숙청]를 요구하는 수많은 청원서들을 접수한 이후, 1642년12월에 교직자 정화위원회(Committee for Plundered Ministers)를 설립하여 로드파와 국왕지지 성직자들을 교직에서 제거하고 의회지지 성직자들을 임명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 위원회는 1643년에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의회는 곧바로 이러한 활동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퇴출작업을 수행할 지방위원회를 설립하였다. 결과적으로 전도구 성직자들의 운명은 지방정치에 좌우되었으며, 지방의 의회파들이 이를 최우선 과제로 인식했던 지방에서 가장 많이 면직당했다.

    이스트 앵글리아의 경우, 1644년초 맨체스터백작이 의심스런 성직자들을 퇴출시키는 특별권한을 위임받은 이후, 여름과 가을에 상당수 성직자들을 퇴출 시켰다. 이와 비슷한 권한은 요크셔의 경우 페어팩스에게, 체셔의 경우 윌리엄 브레리톤에게 부여된 후, 수많은 퇴출활동은 계속되었다. 일부 지방에서 내전 후반기에 새로운 종류의 급진적인 godly의회파-서머셋의 존 파인과 에섹스의 쿡-들이 출현하였다. 이들 또한 보수적인 성직자들에 대한 퇴출작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지방위원회들은 적극적인 활동을 회피하였기 때문에, 내전 당사자들을 적극 지지하지 않은 상당수 온건한 성직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한편 일부 성직자들은 영향력있는 평신도 교직추천권 소유자들의 보호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1640년대에 성직자 퇴출작업의 규모는 각 지방별로 크게 차이가 났다. 가장 심한 지역은 런던으로, 전체 성직자의 약36퍼센트가 교직을 상실하였으며, 켄트지방과 이스트 앵글리아, 동중부지방, 북서지방, 남서지방 등이 평균 이상이었으며, 서중부지방과 서번밸리와 페나인 남부지방 등은 평균이하였다.

    퇴출사유로는 국왕지지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이 죄목으로 처벌받은 성직자들은 분명한 국왕지지자들 뿐만 아니라, 중립적이었거나 의회와 그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성직자들도 포함되었다. 일부는 공동기도서의 ‘교황제’의식을 고집하였다는 이유로, 또는 사목적 의무를 적절하게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퇴출대상이 되었다. 일부는 음주와 도박등 비도덕적이고 수치스런 행동 때문에 퇴출당했다. 교직겸임 성직자들도 godly전도구교직을 확립하려는 개혁가들의 분명한 표적이었다. 대다수 퇴출대상 성직자들은 소수인 godly집단의 개혁정책과 높은 사목적 기대에 따라 선정되었으며, 소수의 경우 전도구민들이 교직자를 의회당국에 고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열렬한’ 소수파의 입장은 대다수 이웃들의 입장과 매우 달랐으며, 많은 경우 성직자 퇴출사건으로 전도구내에 깊은 갈등이 존재하였다. 특히 불화를 일으킨 문제는 주일엄수로, 성직자들은 전도구민들의 오락행위를 용인하였다고 비난받았다.

    1650년대 중반 부적격자와 ungodly성직자를 정화하려는 새로운 정책이 시도되었다. 1654년8월 크롬웰과 그의 정부는 ‘수치스럽고 부저격한’ 성직자들을 퇴출시키는 법률(ordinance)을 제정하여, 평신도 심사관들(ejector)로 구성된 각 지방위원회에 지역 성직자들에 대한 정보수집과 퇴출권한을 부여하였다. 마찬가지로 이에 따른 결과는 지방마다 달랐다. 많은 지방에서 평신도들은 심사관으로 활동하는 것을 기피하였으며, 극소수 성직자들만이 새로운 위원회에 소환되었다. 그러나 버크셔, 데번지방, 서부 요크셔와 윌트셔등 일부 지방에서 일부 심사관들은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상당수 성직자들을 퇴출시켰다. 더구나 1654년부터 성직을 지망하는 자들은 38명의 평신도와 성직자로 구성된 성직후보자 ‘심사위원회’(Triers)에서 먼저 심사를 받아야 했다. 이 위원회는 성직지망자들의 신학적 정치적 적합성을 심사하기 위하여 런던에서 정기적으로 회합하였다.

    1640년에서 60년까지의 퇴출활동으로 일반성직자의 자격과 성격, 신뢰도는 상당히 증진되었지만, 퇴출활동이 끼친 전반적인 영향을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 심사를 받은 거의 3천명의 성직자들중에서 천여명은 교직을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퇴출당한 성직자들중약400명은 이후에 다른 전도구교직에 임명되었으며, 약200명의 교직겸임자들은 하나의 교직만을 유지하였고, 또 다른 270명은 당국의 적극적인 방해에도 불구하고 교직을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내전 이전의 국교회는 이 기간동안 말단조직까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존 모릴에 의하면, 1640년대 말까지 잉글랜드교직중 거의 3분의 2는 여전히 1642년의 보유자들로 남아있었다(Morrill, 1982). 따라서 확고한 독립교회파와 장로제파 성직자들은 아마도 1650년대 내내 소수파였을 것이다.

    많은 보수적인 성직자들은 공위시대 내내 전도구민들에 대한 사목활동을 지속하였다. 이들은 교구민에 대한 사목적 의무를 강조함으로써 공화정과 호국경 정권에 대한 협력을 합리화하였다. 이들의 숫자는 칩거한 주교들-로버트 스키너등-이 서품한 새로운 성직자들의 합류로 증가하였다. 공위시대 성직자들의 강한 보수성은 조지 허버트의 <시골교직자The Country Parson>-시골성직자의 전통적인 역할과 책임을 강조, 1652년에 출판-의 폭발적인 인기에서 잘 나타났다. 그러므로 공위시대의 godly통치자들은 1630년대의 로드처럼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전도구교회 성직자들을 자신들의 신앙적 목표를 수행하는 특별집단(task force)으로 변혁할 수 없었다. 이들의 실패는 곧 godly nation을 건설하려는 과업은 매우 힘겨운 싸움이며, 내전 이전의 기도서 국교회의 복원 가능성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음을 의미하였다.

    2008년 10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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