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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잉글랜드 종교개혁과 성직자들 - 6 « 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신학 및 역사 이야기

번역 : 잉글랜드 종교개혁과 성직자들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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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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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왕정복고시대의 성직자들

    6.1 주교들

    1660년 군주제의 복원직후 정부의 핵심과제들중 하나는 주교제의 복원이었다. 찰스2세는 귀국직후 첫 몇 개월동안 16명의 새로운 주교들을 임명하였으며, 국왕은 주교선임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단계에서도 통합적인 국교회의 복원을 희망하였기 때문에, 다양한 프로테스탄트입장을 지닌 성직자들을 임명하였다. 더구나 장로제 지지자인 리처드 박스터와 에드먼드 칼래미, 에드워드 레이놀즈에게도 주교직을 제의하였으며, 박스터의 수락을 기대하여 코벤트리-리치필드 주교직을 한동안 공석으로 남겨두었다. 하지만 결국 레이놀즈만이 노리치주교직을 수락하였다.

    국왕은 더이상 어느 특정집단의 포로가 되는 것을 확고하게 회피하였기 때문에, 북원된 주교들의 특징은 다양한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였다. 대다수 새로운 주교들-윌리엄 루시, 니콜라스 몽크, 휴 로이드, 윌리엄 니콜슨, 길버트 아이런 등-은 1640년대에 국왕을 지지하였지만, 로드파나 공위시대 국가교회에 깊이 가담하지 않은 다소 무명의 성직자들이었다. 이들은 이후 수년동안 교구의 행정체계를 복원하고, 1640년대와 50년대에 빼앗긴 교구재산을 회복시키며, 교구법원과 대성당의 수석사제와 참사회를 다시 설립하였다. 또한 이들은 전두구교회 성직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방문조사를 실시하였다. 방문조사를 통해서 새로운 국교회에 미온적인 성직자들에 대한 조치는 각 주교들에 따라 달리하였다. 로버트 샌더슨(링컨)과 브라이언 윌튼(체스터)과 같은 주교들은 새로운 1662년 공동기도서의 사용을 고집하였지만, 아이런사이드(브리스톨)와 험프리 핸치맨 (솔즈베리)등은 보다 유화적인 입장에서 기도서의 모든 항목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한편 레이놀즈와 존 고든(엑시터)은 교구내의 장로제주의자들에게도 성직을 서품하였다.

    찰스는 첫번째 켄터베리대주교에 윌리엄 적스턴을 임명하였다. 적스턴은 고참주교로 1640년대에 부왕을 확고히 지지하였지만, 이제 늙고 병들어 국교회의 치리구조의 재건작업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수 없어다. 1663년 그의 사망직후 런던주교인 길버트 셀돈이 대주교직을 계승하였다. 셀돈은 왕정복고직후 국왕의 통합 국교회 수립정책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전례통일법안에 대한 의회의 토론기간 동안 그는 대다수 의원들과 지주계급들이 장로제주의자들에 대한 양보를 완강히 반대한다는 점을 인식한 이후, 보다 공격적이고 비타협적인 입장으로 선회하여 프로테스탄트 비국교도들을 복원된 주교제교회(Anglicfan Church)에서 제외시키는 전례통일법과 기타 클러랜던법률들을 적극 지지하였다.

    셀돈은 유능한 행정가이자 기민한 정치가로 특히 국교회의 재건활동을 추진하는데 매우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교회의 영향력이 전적으로 재정적인 능력에 의존한다는 점을 인식하였기 때문에, 대주교 취임직후 각 교구의 재산상태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활동을 지시하였다. 그 결과 잉글랜드 전체교구의 재산가치는 년수입 5만파운드 정도였다. 다소 과소평가된 것으로 보이는 이 수치는 엘리자베스시대의 그것보다 상당히 증가한 것이었다. 헤리퍼드와 엑시터등 몇몇 교구들은 여전히 소규모의 수입이었지만, 다른 교구들은 이제 상당한 수입을 갖고 있었다. 1680년대에 켄터베리교구는 년수입6만파운드, 윈체스터는 5만, 일리는 3만파운드를 상회하였다. 이제 모든 교구들은 이전의 토지양도와 물가상승으로 인한 손실을 만회하기 위하여 효율적인 재산관리를 실시하였다.

    1660년대와 70년대초 동안에 셀돈은 정치적 신앙적 반대파(dissent)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국왕과 국교회 그리고 지주계급과의 연합을 강화시키는데 주력하였다. 이러한 밀접한 협력관계는 1677년 윌리엄 샌크로프트의 대주교직 계승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샌크로프트는 대주교임명 이전에 주교직에 조차 임명되지 않았지만, 셀돈처럼 확고한 법집행자로 잉글랜드사회에 복원된 주교제교회(Anglicanism)의 영향력을 확산시키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스튜어트 왕조를 확고히 지지하며 군주제를 신비적인 헌신의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1670년대말 국왕의 동생인 가툴릭신자 제임스의 왕위계승배제 요구를 거부하는 국왕을 확고히 지지하였다. 그는 제임스의 약속-가톨릭군주로서 주교제 국교회의 지위를 위협하지 않는다-을 믿고 찰스말기에 제임스 지지세력을 구축하는데 기여하였다.

    샌크로프트는 국교회 주교들과의 협력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곧 전개된 상황변화에 매우 실망하였다. 1687년까지 그는 국왕의 가톨릭신앙 부흥정책이 국교회에 치명적인 위협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다가오는 여름에 공개적으로 국왕과 대립하였다. 1688년5월 국왕인 제임스는 그의 신앙관용령(Declaration of Indulgence신앙자유령)-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비국교도들에 대한 형사처벌 법률들을 중지시키는 명령-을 전국의 각 교회 설교대에서 발표하도록 명령하였다. 샌크로프트와 6명의 주교들은 이에 항의하여 국왕에게 이 요구를 반대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며, 제임스는 이러한 행동을 ‘모반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7명의 주교들’을 선동모략행위로 체포하였다. 이들은 런던탑에 수주동안 구금된 후 6월에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배심원의 무죄판결로 군중의 환호를 받았다. 이 사건은 국왕의 치욕적인 패배이면서도, 프로테스탄트 국교회에 대한 왕국민의 지지와 국왕의 가톨릭정책에 대한 반감의 정도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대다수 주교들은 국왕의 가톨릭신앙의 복원정책을 매우 경계하며, 곧 그를 폐위시키고 윌리엄과 메리에게 왕권을 이양시키려는 활동을 묵시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수년동안 국왕신권론과 국왕에 대한 저항의 부당성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제임스의 폐위로 양심의 갈등을 겪었다. 샌크로프트와 5명의 주교들은 결국 새로운 공동국왕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하고 ‘비서약파’(Non-jurors)로 퇴출되었다. 이들중 일부는 제임스와 함께 망명하였고 일부는 곧 사망하였기 때문에, 윌리엄은 첫2년동안 16명의 주교들을 새로이 임명하였다. 그는 주로 새로운 국왕을 지지하는 성직자들중에서 제임스의 정책으로 발생한 신앙적 갈등을 약화시킬 수 있는 인물들을 선택하였다. 1691년 샌크로프트 후임으로 임명된 존 틸로슨은 전임자처럼 주교제 국교회의 역할을 크게 강조하지 않았으며, 프로테스탄트 비국교도들에 대한 양보와 화해를 지지하였다. 결국 스튜어트 국왕들에 충성한 17세기 하반기의 주교들은 충성과 헌신에 대한 보상을 거의 받지 못하였다.

    6.2 전도구 성직자들

    1660년 여름 왕정복고직후 수주동안 상당수 전도구교회에서는 과거 20년동안에 퇴출당한 성직자와 현직 성직자사이의 대결상황이 발생하였다. 찰스2세는 이 문제를 공회(Convention)의회 의원들에게 제기하여, 1660년9월 의회는 교직자처리법(Act of the Settlement of Ministers)을 제정하였다. 이 법률에 따라 약700명의 현직 성직자들이 전임자로 교체되었지만, 나머지 현직 성직자들은 교직을 재확인받았다. 이후 수개월동안 새로운 교회당국은 성직자들의 신앙과 예식활동[신앙활]에 깊이 개입하지 않고, 동시에 온건한 퓨리탄들의 교직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더구나 찰스는 첫 2년동안 광범위한 통합 국교회를 건설할 목적으로 약600개의 국왕소유 교직에 다양한 신학적 전례적 입장을 지닌 성직자들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화적인 징후들은 오해였다. 1661년과 62년동안에 복원된 주교들과 기사의회(Cavalier) 의원들이 주도하는 보수파의 반발은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국왕은 주교들과 의회의 압력에 굴복하여 1662년 전례통일법을 승인함으로써, 모든 성직자들에게 좁게 규정된 교리와 전례를 부과하였다. 성직자들은 교직을 유지하기 위하여 주교에 의한 서품을 받아야 하며, 공동기도서에 대한 ‘확고한 동의’를, 39개 신앙조항의 각 항목에 대한 서명을, 장로제주의의 <장엄동맹과 계약>(Solemn Leqague and Covenant)를 거부할 것을, 그리고 ‘국교회와 왕국정부를 변경 또는 개조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요구받았다. 이 법의 집행으로 약930명-전체의 10퍼센트정도-의 전도구 성직자들이 사임하거나 퇴출당했다.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충격은 지방에 따라 달랐다. 런던의 경우 교직자의 33퍼센트가, 레스터셔와 체셔에서는 상당수의 성직자들이 교체되었다. 그 밖의 지방에서는 이처럼 심각하지 않았다. 이 법률에 복종하지 않는 성직자들 모두가 곧바로 프로테스탄트 비국교도 진영으로 합류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상당수는 이들 두 집단사이에 남아, 존 스퍼의 표현대로 ‘전도구교회와 성직자 주변을 맴도는 퓨리탄 잔류파’로 남아 있었다(Spurr,1991, p.45).

    이들의 퇴출에도 불구하고, 전도구교회 교직은 숫자와 지위, 질적인 측면에서 17세기중반의 와해상태에서 상대적으로 빨리 회복되었다. 그러나 전도구 사목직은 여전히 불균등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북원된 국왕과 주교들은 각 교직의 심각한 불균등을 해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많은 가난한 성직자들의 재정적인 문제는 17세기말까지 지속되었다. 1700년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교직중 절반이상이 여전히 년수입 50파운드이하였으며, 3분의1이 35파운드 이하였다. 가난한 교회들은 주로 벵골, 베스-웰스, 체스터, 헤리퍼드, 랜더프, 노리치, 성데이비드, 요크교구에 집중되었다. 성직자들의 빈곤퇴치를 위한 확실한 운동은 1704년 앤여왕의 교직자 보조기금(Bounty) 설립으로 시작되었다. 이 계획으로 국왕과 부유한 성직자, 평신도들은 가난한 성직자를 보조하는 중앙기금(central fund)에 헌금하였다. 이러한 보조금의 결과로 년수입 50파운드이하의 교직은 1700년의 5,600개에서 1800년에 1,000개로 축소되었다.

    아마도 17세기 후반에 일반성직자들에 대한 가장 중요한 변화는 국교회 성직자들과 이들의 이웃인 귀족들과 지주들과의 밀접한 협력관계의 형성일 것이다. 지주계급과 국교회는 1640년대와 50년대 동안에 뼈아픈 체험을 허였기 때문에. 서로의 운명은 상호 의존관계에 있다는 점과, 1650년대의 위기를 야기시킨 세력을 규제하기 위하여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였다. 일반 성직자들은 지역의 지주계급과 더욱 가까워짐에 따라, 지역사회에서 점차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당연히 대다수 일반신자들과 분리될 수 밖에 없었다. 17세기말의 한 논평가의 표현처럼, 지역 성직자는 ‘전도구의 최고 원로이자 교사, 행정관, 법률가, 박사, 통치자’가 되었다. 전도구 성직자 (parson)와 지역의 지주(squire)와의 새로운 협력관계는 18세기 내내 잉글랜드 지방생활의 특징중 하나였다.

    참고문헌 과 추천도서

    2008년 11월 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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