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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대농장지, 선교지 그리고 식민지의 성공회와 기도서 « 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번역 프로젝트 자료

번역 : 대농장지, 선교지 그리고 식민지의 성공회와 기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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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Cranmerian
    회원

    개척지, 선교지, 그리고 식민지
    (Plantations, Missions, and Colonies)

    William L. Sachs

    1849년8월16일 남아프리카 이스턴 케이프 지방의 그라프 레이네트에서 사목활동을 하고 있던 윌리엄 롱(William Long)은 케이프타운의 로버트 그레이 (Robert Gray) 주교에게 감격적인 편지를 썼다. ‘저는 먼저 주교님께 새로운 교회의 주춧돌을 설치하였다는 사실을 알려드려 매우 기쁩니다. 이 의식은 8월9일 목요일에 거행하였습니다…아침기도와 주교님이 제시하셨던 연설후에, 이 지방의 민간 책임자께서 주춧돌을 설치하였습니다. 예배를 거행하였던 학교 교실은 꽉 찼으며, 참석한 잉글랜드인들와 네델란드인들은 모금결과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습니다. 모금액은 16파운드였습니다.’

    롱의 편지는 식민지에서 성공회신자들의 생활방식과 예배의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즉 공동기도서에 따른 예배를 강조하고, 주교의 관리권과 민간 통치권의 지원(civic authority)을 유지하는 친숙한 특징들은 식민지 세계에서도 잉글랜드교회의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롱의 편지의 시기에 이르러 성공회 신자들은 교회의 정체성과 소명을 위하여 이제 더이상 식민지의 체제(order)에 의존할 수 없었다. 즉, 과거 성공회신앙의 국교회성(establishment)과 이제 점차적으로 드러나는 세계적 성격 사이의 중요한 단절현상(discontinuity)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롱이 남아프리카 상황을 묘사한 것처럼,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 역시 모두 잉글랜드 왕국민들이 아니었다. 성공회는 새로운 상황에서 여러 민족들을 사목하는 도전에 직면하였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교회는 선교에 대하여 새로이 이해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제 식민지 체제 안에서 뿐만아니라 넘어서까지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선교를 위한 기회는 새로운 상황적 현실에 맞게 교회의 형태를 적응(adapt)시키도록 요구하였으며, 기도서에 따른 예배는 이러한 적응요구에 대한 응답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되었다.

    롱은 곧 교회의 적응활동(adaptation)에서 나타나는 가장 분명한 측면들중 하나를 대표하였다. 그는 이 편지를 보낸후 몇 년안에 교회의 식민지 적응활동 (adaptation)을 반대하는 여러가지 법적소송을 시작하였으며, 법적인 구속력이 있는 입법권을 가진 남아프리카 교회회의(synod)를 소집한 브레이주교의 권한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였다. 롱은 교회회의는 위험스러운 새로운 제도(innovation)로 남아프리카교회를 잉글랜드교회의 관할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시도라고 믿었다. 그는 잉글랜드교회가 남아프리카 상황에서 사목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잉글랜드의 교회라고 주장하였다. 단기적으로 롱은 법률적인 재확신을 얻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전세계의 성공회신자들은 어쩔 수 없이 기존의 관습적인 교회생활 방식들을 새로운 현실(realities)에 적응시켜야 하며, 잉글랜드의 선례와 새로운 지역에서의 체험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상황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과정을 수행함으로써, 기존의 교회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현실속에 교회를 정착시키도록 요구하는 선교적 도전을 성공적으로 대처하였다. 교회의 예배방식을 적응시키는 과제는 선교의 핵심이었다.

    조직체들의 적응과정은 연속성과 단절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해결책을 수반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시작부터 1900년까지 성공회의 식민지 체험에서 나타나는 세가지 주제들을 논의함으로써, 성공회신자들이 기도서예배를 식민지 상황에 적응시켰던 단계들을 설명하려고 한다. 첫번째 주제는 각 식민지 생활의 초기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인 예배의 비공식적인 형식들(informal forms), 둘째로 보다 발전된 식민지에서의 교회의 역할, 마지막으로 교회가 식민지 체제 속에 안주하지 않고 선교활동를 조직하기 시작한 방식들이다. 실제로 교회는 잉글랜드 전통과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예배를 현실적 상황에 적응시키는 전형적으로 성공회적인 방식을 채택하였다. 공동기도서는 성공회 신자들이 연속성과 변화 사이에서 체험한 긴장을 표현하였다. 즉, 한편으로 기도서는 교회의 잉글랜드적인 전통을 존중했던 자들에게 확실한 근거를 제공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선교적 상황에 처한 교회에 적합한 새로운 예배형태의 표본을 제공하였다. 놀라운 것은 기도서를 각각의 상황에서도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성공회신앙의 문자적인 상징(icon)으로 인식하지 않고, 낯선 상황속에서 교회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예배형태를 위한 기본원리로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기도서는 이전에 상상하지 못하였던 다양화를 낳은 교회생활의 토대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기도서예배는 성공회신자들에게 교회의 본질을 재규정한 신앙공동체의 이상을 상징하였다. 즉, 기도서예배는 이제 더이상 잉글랜드 사회체제를 상징하지 않으며, 하느님 나라의 구현이라는 교회의 소명을 의미하였다. 즉,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다양한 문화를 가진 백성들을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희망을 반영하기 위하여, 기도서예배는 상황적 현실에 적응하여야만 하였다.

    필수적인 비형식성

    잉글랜드의 확장은 여러가지 형태의 탐험와 무역으로 시작하였다. 점차적으로 그리고 기본적으로 상업적인 이유들 때문에 북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 그리고 아프리카의 몇 곳에 정착지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정책결정자들이 해외의 여러지역에서 잉글랜드의 영향력을 결집시키는 것을 최우선순위로 선정함에 따라, 식민지(colonization)의 형태들이 결정되었다. 19세기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확장과 통제의 분명한 결과로 제국이라는 사상이 마침내 꽃피기 시작하였다.

    잉글랜드왕국교회(Church of England)의 해외확장도 마찬가지로 우연적인 방식으로 시작하였다. 잉글랜드인들의 탐험이 전개되었을 때, 식민지 잉글랜드인들의 예배활동에 대한 초기의 사례들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일반적으로 바다의 선상에서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기도서의 매일기도-때때로 선장이 집례-를 드렸으며, 또한 잔존하는 항해기록은 장례예식의 거행을 언급한다. 선박들이 낯선 해안에 근접하였을 때, 1662년 기도서는 이주자들이 찾는 희망과 위안을 제공하였다.

    일단 상륙한 후, 선박의 승객들은 공동체를 건설하였으며, 여기에는 교회건물도 포함되었다. 처음에 교회의 존재는 몇명의 성직자들의 사목활동으로 표현되었다. 이들 초기 식민지 성직자들은 아마도 잉글랜드교회의 선교단체에서 파송되었거나, 개인적인 결심으로 떠나온 자들로, 자신들의 생활안정을 확보하면서 교회를 새로이 건설하여야 했다. 대다수는 학교를 설립하거나, 이미 설립된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어느 경우든 기도서예배는 학교의 일상학습의 한 부분이었다.

    19세기초 남아프리카의 희망봉 지역에 있었던 ‘W. 라이트’라는 신부는 윈버그에 학교를 설립하고 이곳에서 주일예배를 집례하였다. 처음에 학교는 몇 개의 오두막집(hut)-그 중 하나는 예배실로-으로 구성되었다. 신자들은 급격히 증가하여 몇 주만에 120명이 되었다. 이 지역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의 확대로, 예배실로 사용하던 오두막집을 교회건물로 교체하였으며, 라이트는 ‘감사성찬례’를 포함한 보다 완전한 형식을 갖춘 예배를 정기적으로 집례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지역의 잉글랜드 주민들 모두가 라이트의 성공을 환영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운영하던 학교와 교회는 여러 인종의 학생들과 주민들을 포함하였기 때문이었다. 17세기부터 19세기초까지 식민지교회(colonial church)는 잉글랜드 왕국민들의 범위를 넘어서는 복음전도(evangelism)를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라이트의 체험이 제시하는 것처럼, 식민지 생활 초기에도 잉글랜드교회는 이미 잉글랜드적인 특성을 넘어서야 하는 현실(prospect)을 직시하였다.

    일반적으로 초기 식민지 성직자들은 예배와 사목활동을 잉글랜드 주민들에게만 한정하였지만, 그나마도 적절한 시설의 부족으로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를 빨리 확장할 수 없었다. 1825년9월 에드워드 저지 신부-최근에 희망봉에 도착-는 그의 잉글랜드 후원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곳에서 가장 절실히 필요할 것은 잉글랜드주민들을 위한 교회인 것같다. 교회 건물 건축의 지연으로 여러 곳에서 분노가 폭발하는 것같다’고 썼다. 저지신부는 이 곳에 오기 전에는 ‘잉글랜드 주민들이 이렇게 소중하다고 생각하지 못하였으며…우리 교회신자들은 몇명씩 이곳 저곳에 교회없이 흩어져 있으며, 만약 적절한 시설이 갖추어진다면 그야말로 교회를 꽉 채울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교회가 완전히 조직될 때까지 완전한 기도서 예배는 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식민지 환경에서 기도서에 따른 예배를 정기적으로 거행하는 것은 교회발전의 토대였다. 최초의 식민지 성직자들중 하나였던 알렉산더 위테이커 (Alexander Whitaker)는 1661년부터 17년까지 버지니아에서 활동하면서, ‘매주일 우리는 오전에 설교를 오후에는 교리교육을 실시하였다…한달에 한번 성찬예식을, 일년에 한번은 엄숙한 금식을 실시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첫 식민지였던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에 대한 초기기록은 예배의 분위기와 행사를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예배실은 가로 60피트, 세로 24피트였으며, 총독께서 성소를 삼목으로 수리하고 검정색 호두나무로 만든 성찬식탁을 기증하였다. 모든 신자석과 설교대를 삼목으로 만들었으며, 날씨에 따라 열고 닫을 수 있는 커다란 삼목창문을 설치하였다. 세례대는 카누처럼 속이 빈 나무로 만들었으며, 건물 서쪽끝에 있는 첨탑에는 두 개의 종을 설치하였다.’ 더구나 예배용으로 지정된 공간은 규칙적인 기도서 예배를 권장하였다. 보고서는 매일 아침 10시에 ‘사람들은 각자 기도를 드렸으며, 그리고 오후 4시 저녁식사 전에도 기도를 드렸다. 매주 목요일에 설교를 하며, 주일에는 두차례의 설교를, 두명의 설교자들이 매주 교대로 설교하였다.’ 총독을 위하여 특별한 자리를 준비하였다. 그는 ‘성가대석에 있는 녹색 우단의자에 앉으며, 의자앞에는 우단방석을 놓았다. 통치위원회(Council)와 부대장, 장교들은 그의 양옆에 앉았다.’ 버지나아는 성공회 예배의 식민지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초기 사례이다(Btydon, Religious Life in Virginia, 7).

    제임스타운 교회는 대다수 식민지 교회들 보다 빨리 성장하여 화려한 건축물을 짓고 격식을 갖춘 예배를 거행하였다. 식민지 예배의 초기 모습과 거행은 전형적으로 비형식적이었지만[격식을 다 갖추지 못한 예배], 그 내용은 친숙한 것이었다. 매일기도 예식들은 주로 성서독서와 기도, 그리고 성서에 기초한 설교였다. 교회건물이 제대로 갖추어질 때까지 음악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1836년 아프리카 서부 해안지방에서 활동한 미국선교사 제임스 톰슨은 편지에서 새로운 식민지 환경에서 널리 이용되었던 비형식성(약식예배, informality)의 사례를 생생하게 전달하였다. 그는 ‘주일(Sabbath) 모임에 식민지 총독, 우리 가족, 그리고 원주민 어린이들이 참석하였다. 이들중 두 명은 영어를 매우 잘 이해하여, 예배 동안에 열심히 응답문들과, 특히 주기도문과 신경의 낭독에 참여하였다’고 기록하였다(Spirit of Missions, I, #10).

    때때로 성공회 성직자들은 식민지 환경에서 교회를 구성하는데 매우 고생하였다. 1842년 아프리카의 서부 해안지방에서 활동하던 존 페인(John Payne)은 ‘오늘 오후 나는 하느님이 제게 주신 소규모 신자들을 위하여 성찬예식을 몇차례 거행하였다. 이들은 그라웨이에 거주하는 학교선생님-나의 사목관할이다-과 나의 아내, 한 남자와 두명의 여성 학자들, 그리고 내 요리사였다. 이 때에 두명이 방문하여 예식에 참여하였다’고 보고하였다. 페인은 여러 중요한 축일에 예배를 거행하였지만, 점차적으로 문화적 장벽에 부딪쳤다. 1842년9월9일 그는 ‘이날 저녁은 매주 한 가정에 모여 여성들의 은전(은혜benefit)을 위하여 예배를 드리는 날이다. 최근까지 우리는 신앙적 예식들에서 이들이 나타낸 무관심을 상당히 걱정하였다. 이제야 나는 이것이 남성들과 함께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관습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모임을 시작한 이후로, 참여자는 꾸준히 증가하여 오늘 저녁은 29명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교회는 항상 쉽게 성장하지 않았다. 1836년 두명의 미국선교사들이 광조우 (‘광동’)를 통과할 때, 중국인은 이들이 ‘외국인 거주자들의 은전을 위하여’ 예배를 거행하며, 참가자들은 여러나라 국적의 그리스도교인들로 30에서 50명이지만, 때로는 그 숫자가 ‘거의 두배이상’되었다고 논평하였다. 미국인 방문객들은 ‘이곳에 모인 남자들의 대다수는 잉글랜드인이며, 우리의 예배를 선호하였다. 잉글랜드회사는 이곳에 있는 동안 전속사제를 배치하여 정기적으로 공적인 예배를 거행하였지만, 지금은 중단되고 예배실은 한동안 폐쇄되었다’고 기록하였다(Spirit of Missions, I, #3). 그러나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북아메리카에서 잉글랜드교회(Church of England)는 정착하였다. 식민지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교회는 필요한 사회적 기반을 확보하였으며, 교회의 예배는 친숙한 형식이 되었다.

    식민지 질서의 구체화[구체적 표현]

    새로운 환경에 대한 잉글랜드의 항구적인 영향력이 확립됨에 따라, 교회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체계화하기 위하여 교회의 예배활동을 적응시켜야 했다. 잉글랜드의 식민지 체제의 외양이 구체적으로 확립됨에 따라, 교회는 신앙적인 권력복합체(religious establishment, 주류세력의 신앙)에 적합한 구조들과 형식들을 발전시켰다. 이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662년 공동기도서에 따라 완전한 형식을 갖춘 예배를 정기적으로 거행하는 것이었다. 식민지체제의 확립으로 교회는 당시의 잉글랜드 관습을 반영한 여러가지 기도서 예식들을 거행할 수 있었다. 영국 밖에 있는 식민지교회들 중에서 이처럼 기도서에 의존한 예배를 거행할 수 있었던 첫번째 사례는 버지니아의 교회였다.

    버지니아의 교회는 특히 18세기의 식민지체제를 잘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유명하였다. 식민지 버지니아에서의 성공회신앙(Anglicanism)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은 사회적 질서[체제]에 대한 비젼에 따라 기도서를 사용된 방식에 대하여 생생하게 통찰하였다. 일반적으로 주일예배는 11시에 규칙적으로 시작되었으며, 기도서에 따라 아침기도와 연도 그리고 Ante-Communion으로 구성되었으며, 성서본문의 일부분에 대한 해설적인 설교를 포함하였다. 많은 지역교회에서는 주일에 저녁예배도 거행하였다. 일반적으로 감사성찬례는 일년에 4번 거행하였다. 신자들은 예배가 75분에서 90분 정도 소요된다고 예상하였다.

    버지니아에서 기도서 예배의 현실적인 상황인 식민지체제는 또한 18세기 중반까지 유행하였던 교회건축의 양식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건축양식은 단순한 디자인으로 그리스 십자가와 아주 비슷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벽돌로 건축되었다. 내부에는 신자들의 신심을 천국으로 연결시키도록 고안된 ‘높게 치솟은 빛으로 장식된’ 공간을 설치하였다. 신자석은 사회적 신분에 따라 구별하였으며, 지역의 지도층 가족들을 위하여 특별한 공간을 마련하였다. 설교대는 신자석과 독서대 보다 훨씬 높게 설치되어 버지니아 교회의 예배를 구체적으로 표현(embodiment) 하였다. 신자들에게 위쪽을 응시하도록 요구하는 이 수직식 디자인은 고착된 계급적인 사회질서를 표현하였다. 이러한 인식들은 식민지 생활속에 널리 퍼져있었다. 그러나 설교대와 여기서 나오는 메세지의 핵심은 교회가 고정된 사회질서를 지지하는 것을 넘어서 식민지생활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기도서의 고정된 전례-반복적인 예배로 사회적인 권고들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보일지라도-는 또한 개개인의 생활의 점진적인 변환(transformation)을 권장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기도서 예배는 복음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개심(conversion)의 수단으로 계획되지는 않았지만, 잉글랜드인으로 태어나 개심한 자들을 교육시키고 영성생활을 형성시켰다.

    영성생활의 확립(spiritual formation)은 잉글랜드 거류민들의 공적인 생활 뿐만아니라 사적인 생활을 위한 것이었다. 예배에의 적극적인 참여는 자기훈련 (self-discipline자제) 의식을 고취시키고, 어려운 신앙적 여정을 견뎌내는 능력을 주입시켰다. 기도서는 죄악과 타락으로부터 단 한번에 극적이고 결정적으로 구조하는 대신에, 개인적인 신심을 표현하며 선행을 베풀고 가족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신앙을 지속적으로 심화시키도록 요청하였다. 잉글랜드 신앙인들의 과제는 성서와 기도서를 안내서로 활용하며 일일생활에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었다. 공적인 예배는 그 자체로 목적이거나 사회체제의 토대가 아니었다. 기도서의 전례들은 식민지의 잉글랜드인들에게 적합한 영성적 여정을 유지하려는 요구에 지속적으로 응용되었다.

    버지니아에서 이러한 정서는 매우 심각하였기 때문에, 개인적인 신심활동과 가족의 신심활동이 공적인 예배만큼이나 중요하였다. 식민지 버지니아의 젠트리중 하나인 윌리엄 비어드2세는 때때로 공적인 예배에서 겪는 갈등-특히 그가 싫어하는 성직자의 설교로-으로 개인적인 신심활동이 약화되는 것을 느꼈다. 버지니아의 성직자 지도자들은 그들의 동료들에게 평신도들의 신심생활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예배를 집례하도록 주기적으로 권고하였다. 성직자들은 전반적으로 기도서에 의존하는 규칙적인 신심활동을 권장하였으며, 기도서는 개인적인 생활과 가족적인 생활을 형성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버지니아의 식민지 젠트리들은 때때로 그들의 사적인 신심생활과 교회의 공적인 활동 사이에서 마찰을 일으켰다. 미국의 독립혁명이 발생하기 몇해 전에 부유한 지주인 랜던 카터는 그의 성직자와 자주 충돌하였다. 1772년 어느 주일 오후에 관하여 그는 일기장에서 사목자가 그 날을 ‘성사의 날’로 지정하였기 때문에, 카터는 ‘교회회장으로서… 빵과 포도주와 접시 모두를 준비하였다. 우리는 11시에 시작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사목자는 10시에 그곳에 도착하여 기도문을 낭독하고 많은 신자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가버렸다. 그곳에 있던 몇몇 신자들은 사목자가 자기 시계로 11시 11분이었다고 말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이 사목자에 대한 카터의 혐오감은 이전에 이미 분명하였다. 1771년 그는 일기장에서 그가 ‘사목자에게 매우 건조한 기간에 비를 기원하는 기도를 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누구도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변명하였다. 그래서 나는 어제 비를 기원하는 기도에 참여하겠다고 요청하였다. 그는 자기 집에 충분한 물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대답으로 17일간 덥고 건조한 날씨후에 단 10분만이라도 몸을 담글 수 있는 물을 위하여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그는 내가 집에 간다면, 내 집에서 비를 기원하는 기도를 드릴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집에 가 있지 교회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고 대답하였다.’ 카터는 또한 세례를 교회에서만 거행하는 문제로 사목자와 갈등하였다. 그는 세례를 주로 가족들의 예식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가정에서 거행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성직자와 갈등하면서 공적인 예배보다는 사적이고 가정 중심적인 신심활동의 중요성을 훨씬 강조하였다. 그의 이런 입장은 독특한 것이 아니었다. 기도서에 따른 통과의례 예식들은 지역교회에서 뿐만아니라 젠트리들의 집에서도 자주 거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인 예배에의 참석은 중요하였으며, 정기적으로 불참할 경우 신자들 사이의 작은 관심사가 되었다. 1760년5월13일 마리아 테일러 비어드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데이비스라는 사람의 불참을 얘기하면서, 그가 사목자의 교체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 사목자가 정기적으로 좋은 설교를 하며 ‘이달에 성사를 거행할 것을 공고하였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그보다 더 나은 사목자를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기록하였다.

    평신도들의 감성과 이를 떠받치는 영성은 종종 식민지 교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식민지 젠트리들은 전형적으로 식민지교회와 그 사목자들을 후원하였다. 1730년대에 윌리엄 프록터라는 젊은이는 버지니아의 웨스트오버에 있는 윌리엄 비어드2세의 농장(plantation)에서 가정교사이자 사서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이 직책은 임시직이었으나, 비어드는 프록터가 장래에 버지니아에서 교직을 맡도록 도와주었다. 이러한 도움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대다수 식민지의 성공회교회들 처럼 버지니아 교회는 잉글랜드의 신앙적인 권력복합체(주류세력의 신앙, religious establishment)가 해외로 확장됨에 따라, 부유한 평신도들과 그들의 특권에 의존하였다.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은 성직자를 임명하고 교회용 토지를 확보하며, 교회건물을 건축할 때 나타났다.

    신자공동체의 형성과 이들을 위한 예배공간의 확보는 확립된 교회구조를 영국밖으로 확장하는 것 이상의 문제였다. 버지니아의 사례에서 처럼, 식민지에서 교회의 목적은 기도서에 따른 예배에 뿌리내린 생활방식을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양육시키기 위해서는 성스런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인식을 육성시키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버지니아의 경험은 식민지교회가 기도서 중심의 신심(ethos)을 육성할 수 있는 예배소들(chapel)와 전도구 교회들을 건설하는데 신앙적 권력복합체를 어떻게 활용하였는가를 보여준다. 많은 식민지들에서 성공회 젠트리들은 그들의 사유지(estate)에 가족들과 하인들을 위하여 정기적인 예배를 거행할 수 있는 예배소를 건설하였다. 이러한 패턴[모형]은 주로 대농장 중심의 농업지역의 식민지에서 보다 흔히 나타났다. 그렇다 하더라도 많은 가족용 예배소들은 이후에 발생한 전도구교회 제도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항구와 도시 중심의 식민지의 경우, 교회는 곧바로 신자공동체와 전도구교회 제도를 설립하며 확장하였다. 이러한 방식(approach)은 호의적인 젠트리들의 적극적인 지원이나 식민지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촉진되었다. 예를들면, 1825년에서 1830년 사이에 남아프리카의 케이프지역에 4개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 지역에는 아직 상주 주교-로버트 그레이주교는 20년후에 도착-가 없었기 때문에, 총독이 교구장 역할을 수행하며 모든 사목자들을 임명하였다. 모든 성공회 신자공동체는 식민지의 총독과 통치위원회(Council)가 제정한 특별법령에 따라 운영되었다. 이 법령은 예배와 이에 필요한 모든 환경들을 제공할 것을 규정하였다. 식민지가 성장함에 따라, 식민지 정부(civil authority)는 교회시설을 확장하는데 적극적으로 행동하였다. 1846년 로버트 그레이 주교가 케이프타운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신자공동체는 케이프타운, 배더스트, 윈버그, 로덴보쉬, 그레이엄타운, 포트 엘리자베스, 시드베리 그리고 포트 버퍼드에 형성되었다.

    호주에서도 교회의 초기단계에 이와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1820년대 이전의 교회는 정부의 한 기관으로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다. 식민지정부는 사목자들을 지원하였으며, 사목자의 뿐만아니라 교회와 학교를 위하여 토지를 제공하였다. 때때로 죄수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필요한 건물을 건축하였으며, 성직자들은 정부의 지시를 받는 민간정부의 일원으로 행동하였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총독들은 잉글랜드교회의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함으로써 모범을 보이도록 요구받았으며, 대다수는 그렇게 하였다. 교회는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 이러한 잇점을 활용하였으며, 이를 이용하여 확장하였다. 호주교회는 또한 죄수들에게 예배장소를 제공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으며, 죄수들은 주일의 아침기도와 연도 Ante-Communion에 참석하여야 했다. 초기 호주교회의 체험에 대한 기록은 죄수들이 종종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사목자들은 곧 어린이들-때때로 죄수들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예배와 사목활동을 개발하였다.

    잉글랜드의 영향력이 확립된 식민지에서 조차도 교회는 심각한 적응을 요구하는 도전에 직면하였다. 교회는 건물과 성직자를 공급하는 일이외에도, 새로운 환경에서 알맞는 신앙생활을 정립시키는 과제에 맞게 예배의 분위기(tenor)를 변경시켜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과제의 의미를 알려주는 최초의 암시들중 하나는 1700년5월 메릴랜드주의 성직자들에 행한 토마스 브레이(Thomas Bray)의 연설에서 드러났다. 브레이는 런던주교로부터 메릴랜드주 성직자들을 관할하는 주교권한대행 (commissary) 또는 감독관(overseer)(이 직책 역시 식민지 미국의 교회생활에 대한 적응이었다)으로 임명되었으며, 또한 SPCK(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그리스도교 신앙교육 촉진회)의 설립자로 창조적인 교육사업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연설에서 교회의 과제로 교육(teaching)의 필수성과 기도서예배의 중심성을 상기시켰다. 그는 교육의 기본적인 활동으로 설교를 강조하며, 설교때에 사목자들은 ‘신자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교리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인식시켜야 할 뿐만아니라 우리 성공회의 대 절기들(great Festivals 대축일)을 보다 신실하게 지키도록 교육시켜야 한다…이 지방에는 어린이들 뿐만아니라 어른들도 상당수가 세례를 받지않고 있다’고 지적하며, 더 나아가 ‘우리는 이 성사의 본질과 필수성을 자주 설교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브레이에게 기도서 예배는 교회생활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예배의 방식(manner)은 식민지의 요구사항들에 맞게 적응되어야 했다. 브레이는 [해외]교회가 국교회적인 잉글랜드적인 지위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고 인식한 최초의 성공회 신자들중 하나였다.

    이러한 인식은 북아메리카[북미주]의 뉴잉글랜드-퓨리탄신앙이 주류세력의 신앙이었다-에서 특히 뚜렸하게 나타났다. 퓨리탄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한 안식처로 뉴잉글랜드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확고하게 정착시키고 다른 신앙을 거의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말 잉글랜드의 식민지 체제에 흡수된 이후 어쩔 수 없이 기도서예배를 지키는 국교회 신앙공동체를 허용하였다. 국교회신자들은 이 기회를 활용하여 새로운 잉글랜드 자원을 이용하여 교회를 확장시켰다. 1701년에 설립된 해외 복음전도회(SPG,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는 선교활동을 효율적으로 지원하였다. 이 단체의 선교사들은 소외된 지역을 방문하여 기본적인 그리스도교 교리를 설교하고, ‘건전하고 의롭고 신실한 생활’의 토대로 공동기도서의 성사와 예식들을 준수할 것을 강조하였다.

    SPCK와 SPG는 잉글랜드교회에서 설립된 여러 선교단체들중 최초의 단체들이었다. 19세기초에 설립된 교회선교회(CMS, Church Missionary Society)는 아프리카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넘어 아시아 일부지역으로 확대하였다. 이후 19세기 중반에 설립된 중앙 아프리카 대학선교회(UMCA, Universities’ Mission to Central Africa)는 교회를 개척할 목적으로 주교를 축성하여 파송하는 방식의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잉글랜드외에도 카나다와 호주 성공회 역시 19세기 후반기에 선교활동을 조직하였다. 미국성공회는 19세기초에 ‘미국성공회 국내외 선교 위원회’(Domestic and Foreign Mission Society of the Protestant Episcopal Church)를 조직하여 선교를 강조하였다.

    북아메리카에 파송된 최초의 SPG 선교사들 중에서 조지 키스(George Keith)는 대부분의 시간을 뉴잉글랜드의 영국식민지 거주자들에게 할애하면서 교회를 개척하는데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도 있었다. 뉴잉글랜드 거주민들 상당수는 어느 교파교회와도 거의 접촉이 없었으며, 대다수는 잉글랜드 교회를 알지 못하였다. 그들을 성공회 신자로 형성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서에 익숙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키스와 다른 성공회 성직자들은 먼저 기도서 예배가 열정이 부족하고 반복적으로 거행된다는 인식과 싸워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또한 현실적으로 성공회신앙을 수용한 자들은 기도서 예식들에 규정된 응답문들 (responses)을 알지 못하였으며, 일부는 교회에서 천박하게 행동하였다. 이 때문에 뉴잉글랜드 성공회 성직자들은 예배를 활기차게 만들기 위하여 여러가지 수단을 고려하였다. 1730년대에 코네티컷주 뉴런던의 성직자인 매튜 그레이비즈(Matthew Graves)는 교회에서 기도서를 엄격하게 따르면서도, SPG의 권고에 따라 비성공회신자들이 함께 모인 가정에서는 예배를 변경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722년 성공회로 개심함으로써 커네티컷 퓨리탄 사회를 뒤흔들었던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도 이와 비슷한 입장을 채택하였다. 그는 기도서 예식들에 매우 충실하면서도, 잉글랜드교회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문의 내용을 변경하였다. 또한 이에 대한 SPG의 불평에 대하여, 그는 기도서의 형식에 대한 변화는 사소한 문제이며 뉴잉글랜드 땅에 교회를 정착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라는 이유로 불평을 무시하였다.

    이처럼 기도서 예식들의 문구를 변경시키는 행동들은 교회와 예배방식(manner)에 대한 연이은 도전들과 비교할 때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식민지의 성공회신자들은 복음주의 그리스도교회(evangelical Christianity)의 첫번째 거대한 파도인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의 영향력을 체험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잉글랜드의 존 웨슬리(John Wesley)와 연결된 이 운동은 복음전도자인 조지 와이트필드(George Whitefield)의 지칠줄 모르는 여행을 통해서 대서양 건너편의 형태를 구성하였다. 와이트필드는 잉글랜드교회에서 서품받은 부제였지만, 때때로 전도구교회들과 기도서예식들을 회피하였다. 그는 그의 열정적인 설교를 강조하는 비형식적인 대중적 집회를 장려하였기 때문에, 교회당국과 충돌하였다. 1740년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찰스톤에서 이 지역교회의 주교권한대행인 알렉산더 가든은 와이드필드의 예배인도를 금지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와이트필드를 좌절시키거나 복음주의 열기를 완화시키기는 불가능하였다. 일부 식민지 성직자들은 복음주의적 양식을 기도서예배에 통합시키는 방법들을 추구하였지만, 그 영향력을 지속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복음주의운동 (Evangelicalism)은 전통적이며 잉글랜드적인 기도서예배에 대하여 적응을 요구하는 도전을 표현하였다.

    또 하나의 도전은 잉글랜드교회에서 시작된 옥스퍼운동의 영향력이 식민지 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19세기 중반에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 운동은 교회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잉글랜드왕권에 의존하는 대신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전례적 토대들의 회복을 강조하였다. 많은 식민지 성직자들은 국가에의 의존에서 벗어나 교회의 선교활동의 진정한 토대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강조를 이해하고 공감하였다. 식민지는 이미 이러한 이상을 추구하는 기름진 토양이었다. 따라서 교회시설의 건축과 전도구제도의 확립을 통해서 예배에서 보다 정교한 의례들을 포함하는 예배를 촉진시켰다. 그러나 윌리엄 브로턴주교와 같은 교회지도자들은 기관으로서의 교회의 확립보다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호주 성공회의 첫 주교인 그는 옥스퍼드운동의 탄생 이전에 주교직에 축성되었다. 그는 구식풍의 고교회파 성직자로 교회의 독특한 성격은 예배와 사목직(ministry)에 근거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옥스퍼드운동이 잉글랜드를 밖으로 확산됨에 따라, 이러한 전제는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때때로 대립적인 결과를 야기시켰다.

    남아프리카의 네이틀(Natal) 관구교회의 체험은 기록으로 정리된 좋은 사례이다. 1850년대에 피터마리츠버그 대성당의 수석사제인 제임스 그린(James Green)은 교회의 ‘세속성’의 유혹에 대한 방지책으로 성찬례를 자주 거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린은 20세기까지도 실행되지 않았던 의례들-성가대와 회중들의 찬송과 응답문 참여-을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이러한 변화들은 1850년대에 네이틀 이외의 지역에서도 시행되었다. 성앤드류교회는 전례복을 입은 성가대를 구성하였으며, 아침기도에서 송가들과 시편을 노래하였다. 1856년 성앤드류교회의 축성식때에 성가대는 전례복을 입었으며, 성직자들은 중백의와 영대, 두건(hood)를 착용하여 언론에 널리 보도되었다. 더반의 성바울로교회에서는 성소 안에 성가대석을 설치하고, 의례들-에수의 이름 때에 인사하기 등-을 추가하였다. 이보다 주목을 끌었던 것은 몇몇 성직자들이 성찬례 동안 성체와 성배의 거양과 궤배(genuflextion)를 도입하였다. 1860년대에 이르러 몇몇 전도구교회들은 주일예배를 노래로 하는 감사성찬례만을 거행하였으며, 10년후 대례복(cope)과 제의(chasuble)와 같은 성찬전례복들을 도입하였다. 앵글로-가톨릭 방식의 예배는 남아프리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 영향력은 북아메리카 뿐만아니라 잔지바르, 탱가니카의 동부와 남부지방으로 확대되었다. 서인도제도의 대다수 교회들도에서 고교회적인 예배는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다른 교회들도 앵글로-가톨릭의 의례를 쉽게 받아들였다.

    1882년 네이틀주교인 매크로리는 12개의 전도구교회들이 ‘감사성찬례를 적어도 매주 거행하고 있으며, 머지않아 모든 전도구교회들이 그럴 것으로 기대한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그는 노래로 하는 저녁기도와 찬송가 <Hymns Ancient and Modern>의 사용은 널리 확산되었다고 자신있게 기록하였다. 일부 네이틀 전도구교회들에서 전례의 강화에 대한 격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교회의 독특한 성격의 보증으로서 예배를 강화하려는 이러한 전환은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매크로리와 다른 전례 혁신가들(innovator)이 말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적응노력(adaptation)들이 기도서의 역할에 대한 교회의 관습적인 이해를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교회가 선교를 위하여 식민지적인 정체성을 넘어서기 시작하였을 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성공회 선교단체들의 설립

    1861년초 로버트 브레이 케이프타운주교는 ‘지금까지 우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던 우리 잉글랜드 형제들의 신앙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제는 완결되었다고 생각한다’고 선언하였다. 해외의 성공회교회들(Anglicans)은 교회의 주요활동을 식민지체제에의 적응에서 비잉글랜드 문화권에 교회를 정착시키는 것으로 강조점을 전환함으로써,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세계성공회 교회들의 과제는 비잉글랜드 주민들에 대한 선교활동이었다. 성공회 교회들의 선교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공동기도서를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키려는 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예를들면, 1870년대 줄루인들(Zulu) 사이의 예배활동은 적극적으로 의례중심(ritualistic direction)으로 전개되었다. 네이틀(Natal) 지방에서 제대의 십자가와 촛대를 사용하기 시작한 곳은 바로 선교교회였다. 주로 강과 개울에서 실시하였던 개종자들의 세례예식은 이제 전례복을 입은 성직자와 성가대가 인도하는 노래 감사성찬례와 함께 거행되었다. 기도서의 예식들에 대한 중요한 변화는 없었지만, 선교현장은 기도서의 사용방식을 기존의 식민지적인 예배방식-아침기도와 연도-에서 감사성찬례(Holy Communion)로 전환하도록 요구하였다. 더구나 이제 감사성찬례는 의례중심적이었을 뿐만아니라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거행되었다. 이러한 전환은 선교활동에서 우연히 발생한 것은 아니 었으며, 모든 선교사들은 예배를 교회생활의 핵심으로 강조하였다.

    성공회교회들은 선교현장에 대한 체험을 쌓아감에 따라, 선교활동의 범위를 점차적으로 분명하게 규정하였다. 선교활동은 주민들에게 그들의 문화적 토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문서들-성서와 공동기도서 -을 소개하는 과제을 포함하였다. 이 문서들은 선교사들의 메세지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보고(repository)로 인용되었다. 기도서의 구체적인 표현인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메세지를 연극적으로 전달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항상 충분한 분량의 성서와 기도서를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또한 인쇄된 문서들-특히 진리의 보고로서-을 사용한 경험이 전혀 없는 주민들에게 이것들의 사용법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19세기초 서부 카나다의 원주민들 사이에서 겪은 성공회교회들의 체험은 이를 잘 나타낸다. CMS와 SPG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은 일상생활 뿐만아니라 성서와 기도서의 일부를 번역하기 위하여 토착어를 배우는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본래적인 적응과정은 필수적이었다. 일부 선교사들은 책 전체를 인쇄물로 번역하는 과제의 가치를 의심하였다. 즉, 이들은 그 대신에 적합한 본문들과 전례만을 번역한 소책자나 팜플렛을 이용하는 것이 원주민 문화권에서 더욱 실용적이었다고 경험하였다. 1870년대에 브리티쉬 콜럼비아주에서 CMS 선교사로 활동한 윌리엄 던칸(William Duncan)과 같은 몇몇 선교사들은 인쇄된 기도서가 오히려 효과적인 선교활동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결론짓고, 성직자주의(clericalism)와 형식주의 그리고 인쇄된 교재들을 회피하고 간단한 기도와 설교를 선호하였다.

    던칸의 이러한 입장은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일반적으로 선교사들은 개종을 성서와 기도서에 대한 확고한 근거로 연계시켰으며, 개종한 신자공동체의 성장을 인도하기 위하여 각 책들의 일부분을 선택하여 인쇄하였다. 당연히 이 책들은 쉽게 사용될 수 없었다. 적응작업(adaptation)이 필요하였으며, 어떻게 적응시킬 것인가[적응방법들]는 19세기 후반기에 선교사들이 자주 고민했던 문제였다. 1880년말 남아프리카의 주교였던 헨리 켈러웨이(Henry Callaway)는 한 편지에서, 자신은 ‘급진적인 창안(innovation)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며, 오히려 철저하고 충분한 심사숙고를 위하여 변화시도를 방해하고 싶다’고 단호하게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과제가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특별히 교회가 이교도 주민들 속에서 활동하는 경우’ 교회의회(Synod)에서 권고하는 수정사항들을 탐구할 자유를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지나친 변화에 대한 충분한 보호규정은 남아프리카 교회의회(Synod)가 기도서의 형식과 사용방식(use)에 대한 수정을 제안할 때 이미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켈러웨이는 선교현장에서 필요한 여러가지 수정활동을 직접 시행하였다. ‘내가 사우스 베일에 있을 때에 마리츠버그주교의 허락을 받아, 나는 우리 원주민들을 위하여 축약된 Ante-Communion인 원주민 기도서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이 기도서는 네이틀 교회들처럼 성찬례를 자주 거행할 때, 이를 대안으로(option) 사용한다면 매우 유익할 것으로 보인다.’ 다른 변화들도 제안되었으며, 필요에 따라 채택되었다. 일부 선교사들은 성찬예식에서 집행문[배찬사]을 수정하였다. 더구나 ‘견진례 예식의 첫부분에 나오는 권고문은 영문에서 줄루어로 번역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나는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번역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매우 유익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나는 교회들에게서 이러한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켈러웨이의 이야기는 기도서를 선교적 상황에 적응시키는 노력의 중요성을 보여줄 뿐만아니라, 기도서의 잉글랜드식 사용례와 선교지에서 토착민 신자공동체를 건설하는 효과적인 전략들을 서로 조화시키려는 성공회교회들의 노력이 나타나기 시작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한 토착민들의 세례와 견진례를 매우 강조하였다. 이들은 이 성사들을 받은 대규모 신자들의 숫자를 보고할 때에 가장 자랑스러웠다. 예를들면, 인디아의 마드라스교구 주교의 티너벨리 방문에 대한 CMS 보고서는 ‘나룰과 수란데이, 파부르지역의 견진례 후보자들이 교회에 모였다. 이 곳에서 예배는 11시에 시작하였으며, 주교는 313명에게 견진례를 거행하였다’고 크게 다루었다. 트라방코어에 대한 보고서 역시 이와 비슷하게 일년도 안되어 132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공동기도서에 따른 예배는 개종자들을 승인하고 이들의 새로운 신앙을 유지시키는 통과의례 예식으로 기여하였다. 개종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신자공동체의 예배는 보다 정기적으로 거행될 수 있었으며, 교회건물을 건축하며 지역 지도사들을 양성하고함으로써 교회는 토착화될 수 있었다(Spirit of Missions, 18, #10).

    잉글랜드 왕국교회의 다양한 선교단체들은 서로 다른 전략을 구사하였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고교회적인 SPG는 선교를 완전한 예배와 사목직으로 구성된 교회를 정착시키는 것으로 강조하였다. 19세기중반 직후에 데이비드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의 지속적인 선교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조직된 UMCA 역시 SPG와 같은 목표를 추구하였다. 이 두 단체-후에 USPG(United Society for the Propaggation of the Gospel)로 통합되었다-는 새로운 선교활동을 시작하거나 기존의 선교활동을 보다 조직적으로 구성하기 위하여 선교사 주교를 파송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SPG와 UMCA는 선교활동을 구체적으로 잉글랜드교회의 예배와 사목직의 이전(conveyance)으로 이해하였다.

    CMS도 마찬가지로 선교활동으로 교회를 정착시키데 집중하였다. CMS는 19세기에 사무총장이었던 헨리 벤(Henry Venn)의 영향으로 토착교회의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잉글랜드교회의 전략을 구체적으로 추구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CMS선교사들은 가장 중요한 과제를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 복음의 전파(evangelism)라고 믿었다. 선교사들은 새로운 지역으로 들어가 주민들을 개종시켰다. 이 목적을 위하여 선교사들은 잉글랜드교회의 특성과 직접적인 관계없이 기본적인 설교와 교육 그리고 예배에 주력하였다. CMS는 주교의 관할권(oversight)과 교회의 조직구조 (ecclesiastical infrastructure)를 확보하기에 앞서 지역사회에 교회를 정착시키려는 의도였다.

    잉글랜드교회의 여러 선교단체들의 서로 다른 전략과 주기적인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들 단체들은 기도서를 사용하는 방식 뿐만아니라 선교형식과 목표에서 많은 공통점들을 갖고 있었다. 잉글랜드교회의 모든 선교사들의 의도는 분명히 성공회적인 예배와 사목직으로 구성되고 토착 지도자들이 주도하는 토착교회의 형성이었다. 당연히 잉글랜드교회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또는 나중에 개종자들을 기도서 전례에 익숙하도록 교육하였다. 따라서 CMS와 SPG의 니제르강 지역과 뉴질랜드의 선교활동들을 비교한다면, 두 단체는 항상 토착교회의 주교제와 예배를 지지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잉글랜드교회 선교사들은 지역문화를 배우는 충실한 학생들이었으며, 문서들-특히 기도서-의 번역활동을 활발하게 수행하며, 기도서를 지역에 맞게 적응시키는데 노력하였다. 그리스도교가 정말로 서구세계 밖에 있는 문화권에 어떻게 토착하였는가는 20세기에서야 보다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지만(Douglas, ‘Inculturation’참조), 잉글랜드교회 선교사들은 초기부터 이 문제의 복합성에 익숙하였다. 그들은 선교공동체에서 예배에 대한 질문과, 선교적 상황에서 공동기도서의 적응문제로부터 이를 분명하게 인식하였다. 20세기 후반까지 세계성공회, 즉 세계적인 교회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선교사들(Anglicans)이 잉그랜드교회의 전통을 전달할 때 연속성과 변화를 조심스럽게 조화시켰기 때문이었다.

    19세기말까지 잉글랜드교회의 전통을 선교지에 적응시키는 과정은 상당히 진행되었다. 기도서의 형태와 사용방식은 선교지에 적합한 토착적인 형태를 창조하는데 핵심적인 요소들이었다. 또한 문서들을 번역하고, 친숙한 예배형태를 보급하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는 점도 분명하였다. 인쇄된 문서들에 의존하는 잉글랜드와 미국의 선교활동은 보다 분명한 적응전략으로 보완되어야 했다. 선교적 상황에서 기도서의 사용방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19세기말에야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어느 선교사는 1875년 미국성공회의 잡지인 <The Spirit of Missions>의 특집논설에서 ‘우리는 대중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라고 질문하였다. 저자는 적합한 교회구조와 음악을 넘어서 ‘보다 짧고 유연한 예식들’을 특징으로 하는 ‘활기찬 예배’를 강조하였다. 그는 이를 어려운 과제라고 지적하면서, ‘기도서를 사랑하고 존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양보하지 않을 것이며, 기도서의 단 한 글자를 고치는 것도 끝까지 반대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Spirit of Missions, 36, #5).

    그러나 기도서를 고치는 것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였다. 그는 계속해서 ‘나는 교회가 기도서를 현재의 삶의 필요에 맞게 적응시키는 권한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허가가 아니라 법의 허용이며, 어느 예식이나 문구의 개정이 아니라 사용할 때의 유연성(flexibility)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상상했던 유연성은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즉시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선교지와 국내의 성직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세례-특히 어린이들의 세례-를 강조하는 신앙을 교육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어린이들에 대한 교육은 특히 잉글랜드와 미국 거주자들에게 익숙한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요구하였다.

    선교현장에서 기도서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1870년대에 더욱 심화되었다. <The Spirit of Missions> 역시 예배에서 적합한 성서독서와 설교에 관하여 여러가지 논설들을 발표하였다. 이 논설의 주요 필자인 버클리신학교 (커네티컷)의 프란시스 러셀(Francis Russell)은 교회의 선교활동에는 기도서의 언어를 ‘보다 의미있는 표현으로 사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기도서를 세심하게 연구하여야만 ‘보다 깊은 의미’를 ‘예배자들의 마음’에 심어줄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예배인도자의 어조는 각 전례안에 있는 자연적인 특성들에 충실하여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기도서의 전례들을 낭독할 때, 각 기도문은 기원과 청원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명심하여 각각을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하여야 한다. 기도서의 각 문구들을 주의깊게 표현하도록 노력한다면 ‘기도문의 의미와 효과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교회의 선교적 의도는 기도서의 형태가 아니라 기도서를 표현하는 ‘감성적 특성’에 달려있다(Spirit of Missions, 36, #5, 6).

    19세기말에 성공회 교회들은 선교적 접근방식을 현지에 맞게 개정하였으며, 기도서의 사용방식에 대한 변화 역시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였다. 이제 교회는 스스로를 잉글랜드의 신앙적인 권력복합체(religious establishment)의 식민지 지부에서 탈피하여 스스로 신앙을 전달하는 선교단체로 새롭게 이해함으로써, 기도서를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키는 방법을 찾으려고 시도하였다. 이것이 성공회교회의 자기이해와 예배의 역할에 주는 의미는 분명하였다. 케이프타운의 수석사제는 이러한 이상을 추구하면서, 19세기말에 ‘잉글랜드교회의 위대한 에너지’는 모두 선교단체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매우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여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추구할 목적과 방법을 확신하였다. 하느님의 왕국을 지상에 건설하라는 소명에 대하여 성공회 교회들은 그들의 예배를 선교현장에 적응시킴으로써 부분적으로 그렇게 하였다. 성공회교회들은 20세기에서도 각 관구교회들에서 기도서에 대한 광범위한 개정작업를 수행해야 한다는 점과, 이러한 개정은 지역적 형태에 대한 존중을 포함할 것으로 항상 인식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기도서의 개정작업은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왜냐하면, 성공회 교회들 사이에 일종의 원칙들이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교회는 더이상 식민지 생활에 근거하지 않고, 예배에 근거하며 선교활동에 헌신하는 독특한 사회로 하느님의 왕국을 실현하도록 소명받았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그리스도교의 과제들에 대한 성공회의 접근방법이었다는 점은 분명하였다. 왜냐하면, 선교활동으로 전환한 이후에도 교회는 공동기도서에 따른 예배를 근본적인 토대로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성공회 교회들이 전세계적인 신앙공동체로 성장할 때, 기도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소명에 대한 성공회적인 표현을 형성하는 필수적인 근거를 제공하였다.

    참고문헌

    2009년 1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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