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번역 프로젝트 자료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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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코틀랜드: 주교제파와 서약거부파
    (Scotland: Episcopalians and Nonjurors)

    Charles Hefling

    잉글랜드 이외의 지방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된 최초의 완전한 공동기도서는 1637년에 잠깐 세상에 출현하였다. 이 스코틀랜드 기도서(Scottish Prayer Book)는 확실히 잘못된 판단과 불운에 다른 것이었지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스코틀랜드 뿐만아니라 세계성공회 전체의 전례적 발전과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 기도서의 서문은 의도적으로 보이는 선동적인 선언으로 시작하였다. 그리스도교회는 ‘모든 시대에 법으로 규정된 공동예배 형태를 갖고 있었다.’ 규정된 전례서(set liturgy)는 통일성(uniformity)을 촉진시키고, 통일된 공적인 예배는 분열(schism)과 당파(division)를 예방하기 때문에, 지나친 기대라 할지라도 전체 교회를 위해서는 단일한 기도형태가 훨씬 바람직하다. 더구나 스코틀랜드 국왕인 제임스6세는 1603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을 계승하여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1세가 되었기 때문에, 잉글랜드교회와 스코틀랜드교회(Scottish Kirk)는 ‘동일한 독립적인 군주의 통치하에’ 있는 교회들로 서로 확실한 통일성을 가져야 한다. 이미 제임스 치하에서 스코틀랜드의 강력한 장로제 교회에 주교직을 도입하였으며, 성찬배수때의 무릎꿇기와 성탄절과 부활절의 준수와 같은 관례들을 법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공적인 예배에 관한 ‘법으로 규정된 형태’ (prescript form)는 여전히‘녹스의 전례서’ (Knox’s Liturgy)인 공동예식서(Book of Common Order)였다. 이 예식서는 약 75년전에 공식적으로 공동기도서를 대체하였다. 그동안 새로운 스코틀랜드 전례서에 대한 제안들은 논의되었지만, 1625년 찰스1세의 왕위계승때까지 아무런 결실은 없었다. 서문은 계속해서 ‘그의 아버지[부왕]의 좋은 의도를 무위로 끝내지 않기 위하여’, 새로운 국왕은 ‘왕권을 계승한 직후 새로운 공동기도서를 제작하도록 명령을 내렸다’고 설명한다.

    기도서의 제작경위와 제작자에 대해서는 아주 분명하지 않다. 이 기도서는 처음부터 그리고 아직까지도 ‘로드의 전례서’(Laud’s Liturgy)라고 말하지만, 이는 잘못된 명칭이다. 윌리엄 로드-1633년부터 켄터베리 대주교-는 확실히 스코틀랜드 기도서를 좋게 생각하였고, 또한 잉글랜드 기도서로부터의 일탈사항들, 특히 치열한 쟁점이었던 성찬예식의 변화들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사항들은 그가 직접 개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잉글랜드의 기존 기도서를 본문 그대로 채택할 것을 선호하고 추천하였다. 결국 로드는 개정된 기도서를 승인하였고 국왕은 이를 허가하였지만, 개정작업은 잉글랜드가 아닌 스코틀랜드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개정에 대한 공로나 비난은 전적으로 켄터베리 대주교가 아닌 던블레인 주교인 제임스 웨더번(James Wedderburn)이 받아야한다.

    누가 제작하였든지 관계없이, 성찬예식(Communion office)에서의 변화들은 항상 특히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엘리자베스 기도서 양식과는 대조적으로, 스코틀랜드 기도서는 집례자에게 빵과 포도주를 성찬식탁에 올려놓기 전에 ‘제물로 바치도록’(offer up) 지시하며, 성찬행동들(manual acts)을 규정하고, 성찬배수 직전에 주기도문을 낭독하도록 요구하였다. 성찬의 분배때에 사용하는 문구는 두 경우 모두 ‘당신의 몸과 영혼을 영원히 지켜주리라’(preserve thy body and soul unto everlasting life)에서 끝맺음으로써, ‘기억하며’(in remembrance of)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신다는 문구를 생략하였다. 이 예식에서 명칭을 붙인 축성기도(Prayer of Consecration)-오늘날의 성찬기도-는 빵과 포도주를 성별하기 위하여(sanctify)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의 축복을 기원하며(invoke), 제정의 말씀 직후에 ‘기억의 예식 또는 봉헌기도’(memorial or prayer of oblation)를 추가하였다. 이 모든 변화를 고려할 때 스코틀랜드 예식은 1549년 기도서 예식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크랜머가 그 직후에 보다 프로테스탄트적’ 또는 ‘대륙의 개혁교회적으로’ 개정한 기도서-1559년과 1602년 기도서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를 원상태로 복귀시키려는 고의적인 노력-좋든 싫든 간에-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기도서의 가장 커다란 시도(innovation)는 전례본문으로 사용되는 송가들과 십계명 그리고 다른 성서본문들 뿐만아니라, 복음과 서신까지도 햄프턴궁회의에서 퓨리탄 성직자들의 요청으로 새로이 ‘공인받은’ 번역성서를 따랐다는 점이다. 또한 지시문에서 ‘priest’(사제)란 용어를 성서적으로 올바른 용어인 ‘presbyter’로 모두 교체하였으며, 성서독서에서 경외서 대신에 정경성서의 본문만을 지정하였다. 사소하지만 흥미로운 많은 변화들은 오랫동안 퓨리탄들의 불만이었던 사항들을 수정하였다는 점 이외에도, 전통적인 스코틀랜드 사용례(usage) -즉, 성탄절을 ‘율’(Yule)로, 부활절을 ‘파스크’(Pasch)라고 명칭하였다-를 수용하였다는 점이다. 반면에 국왕은 성인들의 축일을 삭제하기 보다는 더 추가하였으며, 비정경성서의 본문들의 낭독을 복원시켰다. 연도는 그대로 보존되었으며, 선창과 후창(versicles and responses) 역시 보존되었다. 장로제파들은 이런 형태의 기도들이 회중들에게 ‘아멘’이상의 대답을 요구함으로써 성직자의 지위와 존엄을 약화시킨다고 반대하였다. 마찬가지로 퓨리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시문에서 회중들의 자세를 규정하고, 세례예식의 십자성호긋기와 결혼예식의 반지사용을 명령하며, 평신도에 의한 세례집행을 허용하였다.

    대체로 1637년 기도서는 여러가지 타협적인 내용으로 보아 결국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수용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런 기회조차도 없었다. 이 기도서의 공식적인 수명은 시작한 날에 성 자일즈 대성당의 예배가 폭동으로 변하면서 끝났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기도서 역사상 대중적인 민간전승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유일한 일화일 것이다. 이야기에 따르면, 선동자는 제니 지디스(Jenny Geddes)라는 야채상인으로 집례중인 에딘버러주교에게 예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알리기 위하여 권자를 들어 그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어쨋든 이러한 소란은 미리 준비한 것으로 보이며, 시위자들은 새로운 기도서의 내용 뿐만아니라, 주교제와 주교가 지시하는 예배서까지도 반대하였다. 이들의 저항은 곧 다가올 격변들에 대한 전조였다. 즉, 스코틀랜드에서의 주교전쟁, 두 왕국에서의 내전, 주교제 치리구조와 기도서의 폐지, 군주제의 폐지 그리고 공화정 정치. 1637년 기도서가 남긴 영향은 한참 이후에야 가능하였다.

    1660년 찰스2세를 국왕으로 옹립하는 군주제의 복원과 함께 스코틀랜드의 주교직도 복원되었다. 그러나 장로제의 당회(kirk-session, 장로회의), 지역노회(presbyteries, 노회)와 지방의회(synods)로 구성된 기존 조직구조에 대한 변화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전례적 통일성은 차치하고, ‘법으로 규정된 형태의 공동기도’조차도 요구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주교제파들(Episcopalians)의 예배는 사실상 주기도문의 낭독과 송영(doxology)의 사용을 제외하면 장로제파들의 그것과 거의 같은 예식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정치적 환경은 또다시 변하였다. 찰스를 계승한 동생 제임스2세이자 7세의 가톨릭신앙과 고압적 자세는 곧 수용하기 힘든 것이 되었으며, 더구나 두번째 아내이자 로마 가톨릭 신자인 왕비의 왕자 출산으로 교황파가 다시 왕위를 계승한다는 망령이 되살아났다. ‘명예혁명’ (1688-89)은 국왕을 폐위시키고, 윌리엄(오렌지공)과 그의 아내인 메리 스튜어트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공동국왕으로 옹립하였다. 스코틀랜드 주교들은 이들을 새로운 국왕으로 인정하기를 주저하였다. 이 때문에 윌리엄-네델란드 칼빈주의자-은 스코틀랜드 왕국교회의 치리구조를 장로제로 복원시켰으며, 이 제도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명예혁명 당시에 스코틀랜드 인구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였던 주교제파는 이후 100년동안 정치적으로 불리하고, 교회론적으로 복잡하였지만, 전례적으로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다수 성직자들과 모든 주교들은 양심상의 반대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교직자들에게 부과된 새로운 국왕인 윌리엄과 메리에 대한 충성서약을 실행함으로써, 이미 제임스왕과 그 후계자들에게 서약한 충성을 모독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양심의 갈등없이 서약한 일부 주교제파 사목자들과 일단의 서약거부자들은 교직을 그대로 유지하였지만, 많은 성직자들은 ‘강제로 퇴출’당하였다. 1712년에야 신앙의 자유는 법적으로 허용되었지만, 이 때에도 공식적으로 메리의 동생인 앤(Anne)을 여왕으로 인정하는 주교제파들에게만 허용되었다. 한편 의회는 로마 가톨릭 신자를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시켰으며, 결과적으로 앤의 사망이후 왕권은 다음 서열의 프로테스탄트 계승자인 독일의 하노버공국 선제후인 조지(George)에게로 넘어갔다. 또다시 새로운 국왕에 대한 충성서약과, 앤의 이복동생이자 가톨릭신자인 ‘노왕위요구자’(Old Pretender)의 권리를 부인하는 서약을 요구하였다. 많은 스코틀랜드인들과 이들중 많은 주교제파들은 1715년 무장반란때까지 해외로 망명한 스튜어트왕가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제임스 복위파(Jacobites)의 복위운동을 억압하기 위하여 제정된 법률들중 하나는 주교제파의 예배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사목자들은 아일랜드나 잉글랜드의 왕국교회에서 서품을 받았을 때에만 신앙의 자유(toleration)에 대한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 주교들과 이들로부터 서품받은 성직자들은 바로 이 법에 의해서 신앙의 자유에 대한 자격을 상실하였다. 결과적으로 소수파인 주교제파는 두 개의 집단으로 분리되어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허가받은’(qualified) 사목자가 이끄는 신자공동체는 잉글랜드 교회의 공동기도서를 사용하며, 또한 그 교회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잉글랜드 왕국교회의 전초기지처럼 보였다. 서약거부파의 신자공동체-초기에는 다수파로 민족적 성향이 강하였지만, 가난하고 고립되었다-는 제임스 복위운동을 지지하는 성향이었기 때문에 형법과 정부의 탄압정책의 대상이었다.

    주교들-모두 서약거부자들이었다-은 1660년의 경우처럼 언젠가 합법적인 국왕이 스코틀랜드 왕국교회(Kirk)에 주교제를 복원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이탈하여 분리된 교회를 조직하는데 소극적이었다. 그때까지 그들은 주교의 계승을 유지하는데 적극적이었다. 1637년의 스코틀랜드 기도서는 완전히 잊혀지지 않았지만, 새로운 개정판을 발행한다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며, 또한 국가를 위한 기도들을 개정하는 것은 기도의 대상인 왕실을 분명하게 선언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규정된 기도문’(read prayers)을 사용하는 일부 서약거부자들은 빈곤과 정치적인 제한으로 대부분의 경우 잉글랜드 기도서의 예식문을 사용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잉글랜드 기도서는 성찬예식의 후반부를 제외하고는 스코틀랜드 기도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이 성찬예식을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성찬예식을 할 경우, 일부 성직자들은 분명히 1637년 양식을 사용하였으며, 일부는 잉글랜드 양식에 적절한 기도문들을 삽입하여 그와 비슷한 양식을 재현하였다. 머지않아 이러한 사용상의 어려움에 대한 해결책은 후에 알려진대로 ‘wee bookies’[우리들의 전례서]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 팜플렛[소책자]들-5×8인치로 약 24쪽 분량-은 <스코틀랜드교회에서 성찬례 성사를 집례할 때 사용하는 성찬예식서>(The Communion Office for the use of the Church of Scotland, as far as concerneth the ministration of that Holy Sacrament)로, 일부는 <찰스1세의 승인을 받은>(Authorized by K. Charles I.)이란 문구를 첨부하였다. 출판날짜를 기록한 것들중 가장 오래된 책(1722)은 스코틀랜드 기도서의 [감사성찬례] 양식본문중에서 장문의 권고문(선택사항), 예식 끝에 있는 본기도들과 지시문들, 그리고 처음부터 신경까지-이름을 밝히지 않은 국왕을 위한 기도 포함-를 생략하고 나머지를 정확하게 그대로 재생하였다. ‘성사를 집례할 때’ 나머지 본문들은 1637년의 성찬예식에서 [기존의 예식들과] 차이를 나타내는 모든 부분으로, 잉글랜드 기도서-두 예식의 공통부분 수록-에 추가하여 사용하기 편리하게 값싼 소책자 형식으로 인쇄하였다. 이 소책자가 인기를 얻자, 1637년 성찬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하여 ‘wee bookies’는 18세기와 그 이후까지 간헐적으로 출판되었다.

    이는 하나의 고정된 전통이 아니었다. 잉글랜드의 인쇄소들은 표준서에 일치하는 기도서를 인쇄해야 하지만, 스코틀랜드 주교제파에게 적용되는 이러한 규정은 없었으며, 또한 1662년 기도서의 경우처럼 지켜야 할 ‘검인 기도서’(sealed)도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재인쇄된 본문들은 문구에서나 또는 일부분과 단락들의 배열에서 서로 다르기 시작하였다. 인정받는 표준판이 나타난 1764년까지 흥미롭고 중요한 많은 변화들이 축적되었다. 이러한 변화들의 의미는 영향을 준 신학적 변화[전개]을 고려할 때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잉글랜드 서약거부파의 전례

    많은 스코틀랜드인 뿐만아니라 잉글랜드의 일부 성직자들도 ‘명예혁명’을 수용할 수 없었다. 9명의 잉글랜드 주교들-켄터베리대주교 포함-이 윌리엄과 메리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하였다. 이들과 함께 약4백여명의 성직자들은 서약거부의 대가로 교구와 전도구의 교직을 박탈당하였다. 스코틀랜드의 경우처럼 퇴출당한 주교들은 계승자들을 축성함으로써, 18세기 내내 잉글랜드에서 지속된 교구없는[무임소] 서약거부파 주교직을 창설하였다. 이들은 국교회로부터 이탈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예배를 1662년 기도서에 따라 집례할 법적인 의무가 없었다. 초기에 대다수는 1662년 기도서를 사용하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부는 독립성을 이용하여 특히 성찬예식에 대한 변화와 추가사항들을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1716년까지 이러한 의식들(practices)중 특히 4가지가 논쟁점이 되었다. ‘usagers’은 이 4가지를 근본적인 요소로 인식하며, 이러한 요소들이 없는1662년 기도서를 심각한 결함으로 인식하였다. 보다 보수적인 서약거부자들은 이를 불필요하거나 다소 부적당하다고 인식하였다. 이 ‘greater usages’중 두가지는 성찬용 포도주에 물을 섞는 의식과, 별세자를 위한 공적인 기도(prayer for the depart)였다. 또다른 두가지는 성찬기도의 중심문-축성기도-의 내용에 영향을 주었다.

    Usagers은 이 기도문[성찬기도]을 숙고한 후 부족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이들은 찰스시대 성직자들(Caroline Divines)의 신학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이 성찬기도를 성찬례 교리면에서 충분하지 않으며, 오로지 로마파의 오류들만을 부정할 뿐이라고 인식하였다. 즉, 교회는 가장 초기교회의 전례서들에 표현된 것들과 같은 보다 완전하고 적극적인 교리를 필요하였다. 특히 당시에 가장 오래되고 초기 교부시대의 것으로 알려진 <Apostolic Constitutions>에 포함된 ‘클레멘트’(Clementine)의 전례서와 다른 초기교회 양식들은 모두 기도서에 없는 특별한 요소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축성기도에서 그리스도의 제정의 말씀 다음에 ‘성체봉헌’ (oblation)과 ‘성령기원’(invocation)을 포함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구원활동을 기억하며 빵과 포도주를 분명하게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며, 또한 성령이 빵과 포도주에 임재하여 이 바치는 제물[성찬요소들]을 축복하고 성별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만들어 주도록 기원한다. Usagers은 이처럼 보다 장문의 축성기도 형태가 크랜머의 그것보다 훨씬 더 사도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greater usages’중에서 성체봉헌과 성령기원을 더욱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초대교회적 특성을 단순히 고문서의 근거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이들이 복원시키려는 전례의 형태는 성찬례의 본질과 목적(what the Eucharist is and does)에 대한 신학적인 개념을 의미하였다. 즉, 성사로서의 성찬례를 구성하는 축성기도는 성찬례를 희생(sacrifice)으로 인식하는 교리-특히 그리스도가 스스로 봉헌한 단 한 차례의 위대한 희생과 관련하여-의 에 대한 다른 방식의 이해[표현]였다.

    이 까다롭고 매우 논쟁적인 문제에 대하여 usagers은 누구보다도 왕국교회의 학자인 존 존슨(John Johnson of Cranbrook)의 권위에 의존하였다. 존슨은 그의 핵심저서인 <the Unbloody Sacrifice>에서 성찬례는 진정으로 희생적(sacrificial) 이기 때문에, 모든 희생들처럼 속죄적(propitiatory)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희생자의 죽음이 그 자체로 봉헌하는 희생예식은 아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자기봉헌(self-oblation)인 ‘희생의식’(sacrificial solemnity)은 십자가의 사건(crucifixion)으로만 구성되지 않고, 성찬례의 제정에서 시작하여 대제사장(high priest)으로 천국 즉, 지성소(Holy of Holies)에의 입성으로 완결되는 것이었다. 다른 발로 표현하면, 단 한번의 희생은 최후의 만찬에서 그리고 해골산(Calvary)에서 그리고 승천에서 발생하였다. 존슨의 경우, ‘성찬례에서의 봉헌(oblation)을 십자가에서의 그것과 그 다음의 천국에서의 그것과 구별하는 것은 정말로 전체적인 신비(whole mystery)를 혼동시키거나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며, 또한 이를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희생-당대의 특이한 희생-을 이렇게 이해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못박힌 육체와 흘린 피는 그리스도 스스로 봉헌한 것이었지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신비안에서’라 할지라도 빵과 포도주로 표현되어 실효있게 그리고 자발적으로(actively and voluntarily) 봉헌되었다. 교회 또한 성찬봉헌(eucharistic oblation)에서 이렇게 봉헌하였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한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봉헌행동 즉, 하느님에게 자신을 바치는 행동이었다. 그 이외의 어떠한 매개체(agency)도 이처럼 위대한 축복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성령만이 교회의 성찬례에서 축성의 주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성령에 기원하기 전까지 축성은 완결되지 않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뿐만아니라 하느님앞 제대에 놓인 그리스도의 성사적 몸과 피와 함께 산자와 별세자를 위한 중재기도를 마칠 때까지 축성은 완성되지 않는다.

    이는 존슨과 그의 추종자들의 성찬례신학이었다. 당연히 이들은 1549년 기도서-4가지 ‘usages’중 일부를 포함-와 1637년 스코틀랜드 기도서-성령기원과 성체봉헌 포함-의 양식에서 이러한 점들을 칭찬하였다. 반면에 1662년 기도서의 양식에서는 존슨이 설명한 ‘unbloody sacrifice’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존슨은 대다수 서약거부자들처럼 법으로 규정된 전례를 직접 수정하기를 회피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4명의 서약거부 주교들-두명은 잉글랜드인, 두명은 스코틀랜드인-은 ‘초대교회의 전례서들에 일치하는’예식을 작성하기로 결심하였다. 새로운 양식은 1718년 <초기교회의 전례와 첫 공동기도서에 따른 성찬예식서>(A Communion Office, taken partly from Primitive Liturgies: and Partly from the First English reformed Common Prayer Book)라는 제목으로 출현하였다. 이 예식서는 ‘신자들 앞에서’ 물과 포도주를 섞도록 지시함으로써,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온전한 상태를 위한 기도(Prayer for the Whole State of Christ’s Church)를 본래의 형태로 복원함으로써 ‘usages’중에서 두가지를 포함하였다. 즉, 이 기도문에 ‘신앙의 징표를 갖고 우리를 떠나 이제 평화의 영면속에서 쉬고 있는’ 자들을 위한 청원을 포함하였다. 이 중재기도는 축성 다음에 낭독되며, 축성기도는 ‘클레멘트’(Clementine) 기도문을 번역하여 사용하였다. 따라서 봉헌기도(oblation)과 성령기원-나머지 두가지 ‘usages’-도 분명하게 포함되었으며, 이를 초기교회의 위치인 제정사와 중재기도 사이에 배치하였다.

    이 ‘새로운 예식서’의 출판은 기도서를 따르는 서약거부자들과 usagers 사이의 갈등을 완화시키는데 실패하였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몇 년간 지속된 소책자 논쟁, 상호 파문 그리고 주교직의 계승을 위한 경쟁적인 축성 이후에야 이들은 통합을 위하여 Usagers의 전례서를 폐기하기로 하였다. 모든 서약거부자들은 ‘양심에 따라 동일한 대의로 고통받는 자들’로 하나의 공동예배 형태만을 사용하기로 공식적으로 동의하였다. 그것은 곧 공동기도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기도서를 성찬예식의 특정한 문구들을 1718년 전례서의 기도문과 같은 뜻으로 이해하며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은 곧바로 붕괴되었기 때문에, 어느 파가 더 이익을 얻었는 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새로운 예식을 집필하였던 주교들중 하나는 이의 폐지와는 관계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관할권을 인정하는 서약거부자들은 이 예식서[1718]를 계속 사용하였으며, 후에[1748] 그의 계승자인 토마스 데콘(Thomas Deacon)의 저서인 <Compleat Collection of Devotions, both Publick and Private: Taken from the Apostolic constitutions, the Ancient Liturgies, and the Common Prayer Book of the Church of England>[1734년에 출판]으로 대체하였다. 데콘의 저서에 있는 성찬기도 양식을 일반적으로 서약거부파의 전례서(1734)라고 한다. 이 양식은 기도서의 일부와, 상당부분의 Apostolic Constitutions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1748년 데콘이 이를 ‘우리의 전례서 또는 공동기도서’로 지정할 때까지, 서약거부파들은 국교회로 거의 흡수되었으며, 데콘 스스로도 그가 ‘혁명 이전의 잉글랜드교회’의 주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Orthodox British Church’에서 <Compleat Collection>이 실제로 어느 정도로 사용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스코틀랜드 성찬예식서(1764)

    반면에 스코틀랜드에서 4가지 ‘greater usages’는 서약거부 주교제파들 사이에 점차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들중 일부는 1718년 전례서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중 하나인 토마스 래트레이(Thomas Rattray)는 후에 주교이자 수좌주교 (의장주교Primus)가 되었다. 그는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서 존슨과 거의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였으며, 또한 ‘usages’ 뿐만아니라 연구와 예배에 사용할 목적으로 번역한 성제임스의 전례 전체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기도서는 잉글랜드 기도서에 대한 유일한 대안 기도서로 모든 주교들이 승인하였다. 그들은 이를 ‘가장 강력하게’ 추천하였지만 1637년 기도서를 쉽게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사실상 ‘wee bookies’의 사용을 허용하였다. 하지만 ‘bookies’들은 모두 똑같은 내용이 아니었다. 엄격한 전례적인 통일성은 스코틀랜드에서 정착한 것이 전혀없는 이상이었다. 더구나 주교제파 성직자들 사이에서도 그들의 주교가 추천한 예식을 사용할 때 어느 정도의 자유를 허용받았다. 즉, 이 기도문들을 실제로 사용할 때 변경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인쇄된 순서 역시 실제로 사용하는 예배에 맞게 조정된 것으로 보인다.

    예를들면, 1735년에 출판된 한 ‘wee bookie’는 표지(title-page)에 ‘이 예식의 모든 부분은 자연적인 순서에 따라 배열되었다’고 발표하며, 그리스도의 교회의 온전한 상태를 위한 기도(Prayer for the Whole State)를 스코틀랜드 기도서처럼 축성이전이 아니라, 서약거부파의 전례서처럼 축성 이후에 배치하였다. 또한 이 예식은 바로 이(‘for the whole state of Christ’s Church’) 기도문 직전의 기도 초대문(bidding)에서 ‘지상에 있는’ (militant here in earth)이란 문구를 삭제함으로써 ‘usages’중 하나인 죽은자를 위한 기도를 강조하였으며, 또한 축성기도에 일부 문구를 추가함으로써 또 하나인 봉헌(oblation)을 강조하였다. 본래의 축성기도문은 ‘당신의 비천한 종들인 우리는 … 이 신성한 선물들로 당신의 아들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기억의 예식을 거행합니다’(we thy humble servants do celebrate and make…with these thy holy gifts, the memorial which thy Son hath willed us to make) 였으나, 이 양식은 대문자로 인쇄된 문구를 추가함으로써 기념을 ‘이 신성한 선물들로, 이제 저희는 이를 당신께 바칩니다’(with these holy gifts, WHICH WE NOW OFFER UNTO THEE)로 변경하였다. 이러한 수정문을 만든 장본인이 누구인가와 그 이유는 누구도 확실히 알수 없었지만, 당시에 이러한 수정에 대한 반대는 없었다. 이 수정문들은 이후의 출판물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으며(여전히 ‘찰스1세의 승인을 받은’것으로 주장), 1764년의 표준판에서도 채택되었다. 또한 일부 ‘bookies’에서는 성령기원(invocation)을 1637년 양식의 위치-제정의 말씀 이전-에서 초기교회와 잉글랜드 서약거부파를 따라 축성기도의 끝에 배치하였다. 이러한 변화 역시 1764년 표준판에 채택되었다.

    이 표준판은 수좌주교와 또 한명의 주교에 의해서 출판되었지만, 공식적인 인준으로 권위를 얻었다기 보다는 점진적이고 거의 비공식적인 수용과정을 통해서 권위를 확보하였다. 관행으로 이 예식의 장점들을 인정하였고, 그 사용례를 승인하였다. 한편 그 외의 예식서들은 더이상 다시 출판되지 않았다. 더구나 이 표준판은 소위 40년간이라는 ‘시험기간’후에 출판되었다. 존슨과 래트레이, 그 밖의 학자들의 연구에 영향을 받은 개정부분들은 실제적인 예배를 통해서 일부는 수용되고 일부는 폐기되었다. 1764년 예식의 문구는 첫 기도서부터 1637년의 스코틀랜드 기도서에서 인용하였기 때문에 거의 전부가 크랜머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 ‘구성’은 점차적으로 서약거부파의 새로운 예식과 거의 동일한 것이 되었다. 이 예식에는 축성이전의 가치있는 성찬배수를 위한 기도, 평화의 인사 그리고 ‘Christ our Passover’를 생략하였지만, 이러한 차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기원(invocation)을 ‘동방교회 전례’(eastern)의 위치인 제정의 말씀 다음에 배치하였다는 점과, 중재기도를 축성 다음에 배치하였다는 점이다. 1764년 표준판에 채택된 본문의 변화들중 하나는 이러한 배열을 설명하는 똑같은 신학적 근거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549년 이후로 모든 기도서들은 십자가사건을 언급한 후에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그 곳에서 단 한번의 봉헌으로 완전하고, 완벽하며, 부족하지 않은 희생과 봉헌 그리고 보상을 하셨습니다’(who made there, by his one oblation of himself once offered, a full, perfect, and sufficient sacrifice, oblation, and satisfaction)라고 하였다. 1764년의 양식은 이 구절을 ‘단 한번의 봉헌으로 완전하고 완벽하며 부족하지 않은 희생을 하셨습니다’(who, by his own oblation of himself once offered, made a full, perfect, and sufficient sacrifice)라고 표현하였다. 이처럼 변형된 성찬기도는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자기봉헌(self-oblation)을 최후의 만찬과 성찬례, 그리고 십자가사건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도, 그의 단 한차례의 희생을 한 사건-즉, 십자가사건-으로 간주하는 해석도 배제하지 않는다.

    사무엘 시베리(Samuel Seabury)가 최초의 미국주교로 축성받은 후에 미국교회에 도입하려고 생각했던 예식이 바로 1764년 스코틀랜드 성찬예식이었다. 그는 미국독립후에 과거 식민지였던 커네티컷주에 잔류한 잉글랜드교회 성직자들에 의해서 주교직에 선출된 후, 주교서품을 위하여 잉글랜드를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장벽에 부딪쳤다. 국가교회의 인정와 구체적으로 국왕에 대한 충성서약은 모든 주교들에게 요구되었다. 시베리는 더 이상 대영제국의 신민이 아니었으며, 이러한 서약을 할 수가 없었다. 잉글랜드 주교들은 무관심하지는 않았지만, 그들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정부는 대체로 정치적인 이유들 때문에 협조를 거부하였다. 따라서 1784년 시베리박사는 스코틀랜드의 애버딘(Aberdeen)에서 잉글랜드 국교회정부와 관련이 없는 서약거부파 주교들로부터 주교축성을 받았다. 다음날 새로이 축성받은 주교와 축성주교들은 두 교회들 사이에 전례에 관한 ‘협정’(concordat)에 서명하고 봉인(seal)하였다. 스코틀랜드 주교들의 열렬한 바램은 시베리가 ‘스코틀랜드교회가 [sic] 성찬예식으로 사용하는 형식 (pattern)을 따름으로써 커네티컷주의 교회들의 성찬예식을 ‘가장 초기교회적인 교리와 예식에 적합하게’ 거행하는 것이었다. 시베리는 이 예식을 진지하게 검토하도록 권고받았으며, 그는 이를 도입할 때 ‘논의와 설득이라는 부드러운 방법들’을 사용하도록 권유하였다. 케네티컷주의 새로운 주교가 자신의 약속을 얼마나 성실히 수행하였는가는 다른 이야기이며, 마찬가지로 새로이 구성된 미국성공회가 첫번째 기도서를 제작할 때에 축성기도문을 잉글랜드 양식이 아닌 스코틀랜드 양식을 채택하게된 협상과정도 이 글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논의와 설득이라는 부드러운 방법들’과 스코틀랜드 양식의 본래적인 장점들, 그리고 여러가지 정치적인 협상들이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채택된 이후, 16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스코틀랜드 전통은 미국기도서를 통해서 성공회전통을 주장하는 많은 다른 교회들의 감사성찬례 예배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내에서 1764년 성찬예식서의 운명은 스코틀랜드 주교제파의 교회론적인 정체성(ecclesial identity)과 밀접하게 결합되었다. 18세기말경까지 장로제교회와 하노버왕조는 일시적인 이탈현상이라는 점과, 스코틀랜드교회 [주교제교회]는 소위 법적으로 인정받은 단체는 아니지만 (시베리와의 협정에서 처럼) 서약거부파 주교들과 상통관계에 있는 교회라는 점, 또는 제임스2세이자 7세의 후계자가 국왕이 될 점들을 주장하기는 점점 어려워졌다. 1788년 제임스의 손자인 ‘어린 왕위요구자'(Young Pretender)가 사망하였을 때, 제임스 복위운동(Jacobitism)은 더 이상 심각한 정치적인 위협세력이 아니었다. 이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제정된 처벌법들은 이제 목적을 상실하였으며, 서약거부파들 역시 존재이유를 상실하였다. 소수인 주교제파 교회들은 잔존하는 잉글랜드 서약거부파들과 이미 결별하고, 잉글랜드 왕국교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1792년 공민권을 제한하였던 법률들은 39개 신앙조항과, 이름을 적시한 왕가를 위한 공적인 기도를 수용하는 조건으로 마침내 폐지되었다. 이러한 조건을 수용한 ‘허가받은’ (qualified) 신자공동체들은 하나씩 스코틀랜드 교구들에 가입하였으며, 잉글랜드나 아일랜드에서 서품받은 성직자들은 이전의 서약거부 주교들의 관할권을 인정하였다.

    부드러운 통합에 대한 장애는 예배였다. 명예혁명이후 최초로 개최된 1811년의 총회(General Synod)에서 제정된 교회법은 스코틀랜드 성찬예식서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고, 각 의회(synod)와 축성식에서 의무적으로 사용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이와동시에 이전의 ‘허가받은’ 신자공동체들-주로 잉글랜드인들-은 1662년 기도서를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까지 주교제 교회는 특히 스코틀랜드 남부지방에서 점점 잉글랜드화와 잉글랜드 왕국교회화 되었다. 이러한 추세를 개탄하며 스코틀랜드 성찬예식을 이 교회의 ‘독립적이고 국가적인 교회로서의 독특한 특징’으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 주교는 1637년 기도서 전체-성찬예식을 18세기의 변화에 맞게 개정하며-를 출판하기로 결심하였다. 그의 독자적인 열정은 동료 주교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하였으며, 또한 찬송가 작가인 존 메이슨 닐(John Mason Neale)-<An Earnest Plea for the Retention of the Scotland Liturgy> 출판-과 같은 앵글로-가톨릭 지지자들은 아마도 유익한 만큼 유해로왔다. 잉글랜드에의 동화가 지속됨에 따라, 1863년 스코틀랜드 성찬예식의 공식적인 우선순위가 역전되었으며, 오히려 그것의 사용은 의무가 아닌 단순히 허용되었다. 이 예식은 독특한 특징을 가진 예식이 아니라 오히려 이제 사라질 위기에 처하였다. 이 때-19세기말-에 이 예식은 스코틀랜드적인 특성 때문에 다시한번 존중받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복원은 상당부분 존 다우든(John Dowden)의 노력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주교제교회 신학대학의 학장으로 스코틀랜드 성찬예식에 관한 그의 저서-1884년에 첫 출판-에서 1764년 본문을 표준판(definitive)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이 예식의 성령기원 (invocation)에서만 결점을 발견하였다. 즉 ‘빵과 포도주가…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하게(become) 기원하는’ 기도에 대한 선례가 없었다. 1889년에 주교들-이때 다우든은 이들중 하나-은 이 예식을 보다 일반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변화하다’ (become) 보다는 ‘존재하다’(be)를 사용하는 개정양식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채택되지 않았지만, 상황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곧이어 새로운 교회법은 이에 대한 규제를 폐지하였으며, 1912년 스코틀랜드교회를 위한 공동기도서 완전판-1637년이후 최초로-이 출판될 때, 성찬예식에 신중하게 균형을 유지한 성령기원을 포함하였다.

    그러나 ‘국가적인 성찬예식서’(national eucharistic service)-때때로 이렇게 명칭하였다-는 1929년에 출판된 스코틀랜드 공동기도서에서 최고조에 달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기도서는 제작하는데 10년이 걸렸으며, 그동안에 잉글랜드의 제안기도서(1927)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각 교구의회가 이를 승인한 후, 전국총회(General Synod)에서 이를 공인하였다. 이 기도서의 형태는 고전적(classical)이었다. 즉, 전례력, 일일기도의 성서와 시편정과, 아침기도와 저녁기도, 연도, 본기도들, 복음정과, 서신정과, 감사성찬례, 사목적 예식들, 서품예식 그리고 성시. 또한 추가된 내용(enrichment)으로는 한밤기도(Compline), 두가지 짧은 연도, 그리고 여러가지 경우(occasion)를 위한 기도의 시작때에 사용하는 계응(versicle and reponse)이 있었다. 그러나 내용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두가지 완전한 감사성찬례 양식, 즉 ‘일반적으로 스코틀랜드 성찬예식서라고 하는…스코틀랜드 전례’와 ‘주의 만찬 또는 감사성찬례의 집행예식’ 이었다. 후자의 양식은 사실상 1662년의 감사성찬례 양식이었다. 하지만 이 양식을 우선시함으로써, 1637년부터 18세기의 ‘wee bookies’를 거쳐, 1912년의 개정양식, 그리고 여기서 또다시 개정된 감사성찬례 양식까지 내려온 스코틀랜드 양식을 마지막으로 폐지시키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또다시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역시 세계성공회의 다른 관구들처럼 그때부터 전례의 문제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1929년의 스코틀랜드 기도서는 오늘날에도 독립된 책-사실상 또 하나의 ‘wee bookie’-으로 출판되고 있다.

    참고문헌

    2009년 2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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