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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변화의 바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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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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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의 바람들
    (Winds of Change)
    Colin Buchanan

    1900년에 잉글랜드와 세계성공회의 대다수 교회들에서 ‘공동기도서’란 용어는 곧 1662년 기도서를 의미하였다. 이 기도서의 90퍼센트 이상은 크랜머가 집필하여 법적으로 승인받은 1552년 기도서였다. 1900년에 기도서에 대한 이러한 획일적인 이해에는 겨우 세가지 예외밖에 없었다. 첫째로 스코틀랜드 성찬예식서(1764년)로 스코틀랜드의 소규모 신자공동체에서 사용되었으며, 그 밖의 다른 모든 예식들은 1662년 기도서의 양식들을 따랐다. 둘째는 미국성공회의 기도서(1789년, 개정판은 1892년)로 이 기도서의 성찬양식은 스코틀랜드(1764년)와 잉글랜드(1662년)의 중간이었으나, 내용과 형식은 1662년 양식과 매우 비슷하였다. 세번째는 아일랜드성공회 기도서(1878년)로 사실상 1662년 기도서와 차이가 거의 없었다. 따라서 ‘공동기도서’란 용어는 단 하나의 전례서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1908년 람베스회의에서 ‘공동기도서의 교육적인 가치와, 성공회 교회들의 결속을 보증하고 신심의 표준으로 이를 보존할 중요성’을 승인할 때도, 이 용어를 아무런 혼동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즉, 주교들은 이처럼 단 하나의 책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초 잉글랜드에서 기도서를 실제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은 심각한 혼돈상태를 드러내었다. 지난 50년 동안에 앵글로-가톨릭운동은 개혁된 1662년 기도서의 전례를 가능한한 과거의 개혁되지 않았던 트렌트회의 시대의 로마 가톨릭교회 전례와 비슷하게 왜곡하고 확대시켰다. 앵글로-가톨릭 운동은 정확하게 1830년대 이후 옥스퍼드운동과 이에 대한 소책자 지지자들(Tractarian proponents) 에서 유래하였으며, 이 운동의 첫 세대들은 공동기도서의 엄격한 준수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제2세대들인 소위 ‘의례주의자들’(ritualists)-선구적인 ‘의식주의자들’ (advanced ceremonialists)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다-의 활동은 분노와 심지어 신경질적인 반발들-법정고발, 폭동, 언론을 통한 여론환기, 공공예배 규제법(Public Worship Regulation, 1874)의 제정, 이 법에 따른 구속, 그리고 의회의 지속적인 압박-을 야기시켰다. 잉글랜드 왕국교회(Church of England)의 국교제도 (establishment)는 곧 의회에서 법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의회에 책임이 있다는 의미였다. 1903년 랜달 데이비슨(Randall Davison)이 켄터베리 대주교가 되었을 때, 그는 성직자들의 비정상적인 예배집례행동에 대한 의회차원의 조사활동을 막는 대신에, 이에 대한 국왕이 임명한 조사위원회(Royal Commission on Ecclesiastical Discipline)를 약속하였다.

    50여년전의 기도서 사용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조사를 해야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 50년 동안에 잉글랜드교회에는 종교개혁이후로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형식의 성찬의식들(eucharistic practices)이 도입되었다. 예를들면 여기에는 빵 대신에 면병의 사용(wafer-bread), 집례자의 동쪽끝 위치(east-end),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찬례 예복, 석제 제대, 포도주와 물의 혼합(mixed cup), 거양, 궤배, 향, 신자들의 영성체가 없는 미사, 죽은자를 위한 미사, 성인들에 대한 기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축성경(라틴어로 속삭임), 축성된 성찬의 보존, 그리고 보존한 성찬 앞에서의 신심활동 등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견진례 예식의 지시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견진례를 받지않은 비국교도들의 영성체를 금지시켰으며,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강요하였으며, 주교들은 처음으로 주교관[모자]을 쓰기 시작하였다. 교회건축물의 고딕양식은 이러한 추세를 뒷받침하였으며, 또한 작곡가들에서 성가대에 이르기까지 교회음악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의식들(practices)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오히려 이들의 확산을 촉진시켰다. 새로운 사상은 잉글랜드교회의 상당 부분을 흡수하였다. 이 사상은 주교제, 사제직 그리고 성사를 매우 ‘고귀한’(high) 교리로 강조하였으며, 공동기도서는 그 자체의 역사적 본질과 완전성을 희생시키더라도 이러한 사상에 기여하여야만 하였다.

    이와 동시에 세계성공회내에서도 제도적인 변화가 서서히 확산되었다. 이는 20세기 동안에 확산되기 시작하여 전례적인 변화(innovation)를 촉진시켰다. 즉, 선교지 교구들은 이제 서서히 자치적인 관구로 발전하였다. 바로 이렇게 새로이 설립된 관구교회들은 대다수 선교지 교구들-극히 일부의 미국성공회 선교지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켄터베리 대교구 산하에 있었다- 과는 달리 전례문제를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이렇게 독립된 관구교회들은 1900년에 9개 였지만, 2000년에는 37개로 늘어났다.

    20세기 전반부에 나타난 변화의 압력은 거의 전부 앵글로-가톨릭의 신학적인 이념들에서 제기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감사성찬례(Eucharist)에 집중되었다. 앵글로-가톨릭계는 크랜머의 1552년 양식이 진정한 가톨릭주의(true Cahtolicism) 의 골격만을 유지하였지만, 종교개혁을 통해서 감사성찬례 전례의 연속성을 진정으로 표현한 완전한 본문은 1549년 양식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스코틀랜드 전례서(1764)와 이보다는 다소 약하지만 미국성공회의 1789/1892년 양식은 성공회의 정체성에 대한 확실한 표현을 보존하였다. 그러므로 필요한 1549년 양식을 다시 도입하든가 아니면 기존의 전례를 1549년 양식의 원칙에 맞게 다시 개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긴 축성기도’로 1662년 양식에서 삼성경 다음의 Prayer for Humble Access를 1549년 양식처럼 제정사 다음에 배치하고, 아남네시스 또는 성령임재기원, 자기봉헌(self-offering) 그리고 송영(doxology)을 추가하는 것이었다. 물론 스코틀랜드와 미국의 양식은 동방교회의 양식처럼 아남네시스 이후에 에피클레시스를 배치하였지만, 이는 서방교회의 ‘가톨릭’ 전통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매우 의심스러운 추가물(gain)이었다. 이들은 축성과 관련된 의례(ceremonial)를 제정사에 집중시켰기 때문에, 제정사 이후에 마치 축성이 완성되지 않은 것처럼 하느님께 축성을 요청하는 청원은 오히려 이 의례를 약화시키게 될 것이었다. 물론 1549년 기도서는 에피클레시스를 제정사 이전에 위치시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종교개혁이전 양식의 봉헌기도(Quam oblationem)와 직접적인 연속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안전하게 ‘서방교회’ 전통이었다. 그러므로 스코틀랜드와 미국의 기도서의 사례로 주장하며 다른 형태의 성찬양식을 채택할 수 있는 정당성을 확보하면서도, 실제로 언급하는 대상은 이것들이 아닌 1549년 기도서였다. 1549년 기도서는 또한 종교개혁 이전의 미사에서 보존된 다른 특징들-영광송(미사 초반에 위치), 자비송, 복음독서에 대한 응답, 죽은자를 위한 청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Benedictus qui vent) 그리고 하느님의 어린양(Agnus Dei) 등-을 복원할 수 있는 선례를 제공하였다. 따라서 ‘긴 축성기도’가 나타나는 곳에는 이들이 항상 포함되었다.

    ‘긴 축성기도’ 프로그램: 1910년에서 1960년까지

    앞에서 언급한 관구교회의 결정권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 세계성공회에서 처음으로 새로운 성찬양식을 도입한 교회는 UMCA의 선교활동으로 탄생한 아프리카의 세 교구들이었다. 이 양식들은 잔지바르(Zanzibar)에서 1918-19년에 소개된 후에 곧북부 로데지아(Northern Rhodesia)와 니아살랜드(Nyasaland)에서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관구별로 양식 개정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잉글랜드교회에서 추진한 기도서 개정활동의 실패(1928-29)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의 다른 글에서 다룰 것이다(Spinks, ‘Crisis’ 참조). 1928년 ‘개정기도서 법안’(Deposited Book)의 의회승인이 실패하였을 때, 많은 온건한 앵글로-가톨릭들은 W.H. 프레어(Frere)가 출판했던 제안으로 복귀하였다. 프레어는 ‘임시양식’(Interim Rite)으로 1662년 축성기도 바로 다음에 [기존의] 영성체후 봉헌기도(Prayer of Oblation)와 주기도문을 배치하여 사용하도록 제안하였다. 이러한 재배열은 크랜머의 문구(wording)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긴 축성기도’ 프로그램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켰다. 1924년 남부 아프리카 관구교회는 시험적인 성찬양식으로 하나로 된 긴 ‘서방교회적인’ 축성경(canon-성찬기도)을 제시하였으며, 5년후에 이를 1662년 양식의 대안으로 사용하는 표준양식 (definitive)으로 제정하였다. 미국성공회는 1928년 개정기도서에서 이 양식을 개정할 때, Prayer of Humble Access를 축성경에서 제외시킴으로서 하나의 통합된 ‘긴 축성기도’로 만들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성공회는 1764년 성찬양식을 1912년의 완전한 공동기도서안에 포함시킨후, 이를 다시 개정하여 1929년에 새로운 공동기도서를 출판하였다.

    이 양식들은 ‘긴 축성기도’가 뚜렸한 특징이었다. 대다수의 경우, 1549년 양식을 기준으로 삼아 제정사 이후에 아남네시스, 가치있는 영성체를 위한 청원, 자기봉헌(self-oblation), 그리고 송영(doxology)을 배열하였다. 잔지바르 (Zanzibar), 니아살랜드 그리고 남부 아프리카 양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남네시스 다음에 에피클레시스를 배치함으로써 분명하게 동방교회전통의 양식이 되었다. 아남네시스 단락-동방과 서방양식 모두에 존재-은 성찬요소들[빵과 포도주]-축성되었든 아니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배경을 제공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앵글로-가톨릭들과 다른 주장자들과의 구분이 분명하게 나타났다. 다른 관구교회들에서 1662년 기도서는 논쟁없이 계속 사용되었으며, 기도서의 개정을 논의할 때-1922년 카나다 기도서와 1926년 아일랜드 기도서처럼-에도 성찬양식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강력하고도 폭넓은 기대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다른 본문들은 한국(1930년대), 실론(1933), 마다가스카르(1945), 일본(1953), 홍콩(1957), 서인도제도(1959) 그리고 CIPBC(1960, 인도, 파키스탄, 버마와 실론 연합교회)의 양식들에 추가되었다. 카나다성공회는 1959년에 합의한 양식을 1962년에 승인함으로써 이 클럽에 가담하였다. 바로 이 때에 이 클럽은 해체되고 있었다. CIPBC와 카나다의 개정양식은 다른 관구교회들(잉글랜드제외) 과는 달리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이 개정작업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합의를 도출하는데 수년이 걸렸다. 그들은 아남네시스에 적나라하게 진술된 본문-주의 명령에 따라 교회는 빵과 포도주를 하느님께 바친다-에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이후 세계성공회내에서 모든 전례적 개정작업은 한가지 방향으로만 진행되었다. 이러한 추세가 점차 확산되었을 때, 메이시 미국성공회의 전례학자인 세퍼드(Massey shepherd)는 1954년 미니에폴리스에서 개최된 최초의 세계성공회총회(Anglican Congress)에서 ‘오늘날 세계성공회에는 기본적으로 두가지 성찬양식이 존재한다. 이 두 양식은 처음 두 기도서[에드워드 6세 치하의]에서 유래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연설 초반에 1549년 양식의 표준적인 특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연설은 20세기중반의 많은 성공회학자들의 인식-세계성공회의 두가지 성찬양식중에서 1549년 양식이 확산되고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을 요약한 것이었다. 1662년 양식의 개정자들 모두가 1549년 양식으로 되돌아간다면, 이는 166년 양식에 대한 ‘불신임’(no confidence)투표가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이들이 기도서를 개정할 때, 그 밖의 다른 전례적 변화들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변화들은1662년 기도서를 부적합한 것으로 보는 앵글로-가톨릭들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특히 주목할 사항들은 주일예배와 장례예식에서 별세자들을 위한 청원, 견진례 예식에서 사도행전8:14-17의 독서(입교례의 두단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인들(과 성인들의 중재기도)에 대한 관심의 확대, 그리고 전례력의 구체적인 항목들에 대한 강조였다.

    논의중인 변화들-그리고 확정된 변화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단순히 축성기도의 문구(wording)를 다루는 것을 넘어서 전례 전반에 대한 폭넓은 변화들을 도입하였다. 의제(agenda) 자체도 역시 변하였다. 이제 기도서 개정의 범위가 확대되었을 뿐만아니라, 이를 요구하는 압력도 앵글로-가톨릭계만이 아니었다. 복음주의자들도 이에 관여하여 변화에 대한 의제를 변경시켰다. 더 많은 항목들을 개정할수록 복음주의자들은 변화에 더욱 개방적이었다. 1960년대 이후로 세계성공회의 전례개정에 끼친 주요한 7가지 영향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전례운동(Liturgical Movement)의 영향들이었다. 이 운동은 일반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유럽대륙의 운동으로 인식되었지만, 1930년대의 성공회에는 주로 가브리엘 허버트(Gabriel Herbert)의 저서들을 통해서 소개되었다. 로마 가톨릭운동의 핵심은 평신도를 그리스도의 몸의 완전한 부분으로, 그리고 더 이상 단순히 서품받은 성직자에 대한 수동적인 증인이 아니라는 새로운 인식이었다. 이러한 재발견은 전례적 양식들의 명료성[쉬운 이해],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 그리고 전례적 행동 내에서와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을 분명하게 전달해야 하는 점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였다(Baldovin, ‘Liturgical Movement’ 참조). 로마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이 운동이 주로 학계(academic position) 에서 진행되었지만, 성공회에서는 거의 정반대였다. Parish Communion운동은 일반적으로 1927년 뉴캐슬(타인 위어 지방의 수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이 운동의 정신은 대체로 실용적이었지만, 학문적인 뒷받침은 나중에 형성되었다. Parish Communion 활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크게 확장되었으며, 로마 가톨릭교회의 변화로 더욱 촉진되었다. 초기변화들중 특별한 것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성찬참여 직전일 자정부터의 금식규정을 완화한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들이 성공회내로 유입되었을 때, 저녁시간의 감사성찬례 거행(로마 가톨릭교회내에서 실시되었다)을 허용하였을 뿐만아니라, 보다 중요하게 대다수 신자들이 성찬에 참석할 수 있도록 주일아침의 중심예배를 감사성찬례로 거행하는 것이었다. 이에따라 주일아침의 감사성찬례는 대다수 평신도들이 참여하는 유일한 예배가 되었으며, 당연히 로마 가톨릭 전례학자들이 지적한 다른 문제들을 제기하였다. 즉, 구약성서의 독서문제; 성서독서와 중재기도의 인도, 회중들의 응답문, 그리고 성찬의 분배에 대한 평신도의 참여문제; 교회건축; 그리고 음악.

    로마 가톨릭교회의 예배에 거의 혁명적인 변화를 야기시킨 제2차 바티칸회의 때문에, 많은 성공회교회들은 권위주의적인(하향식ultramontane) 접근방식을 버리고, 과거에 로마교회와 이를 추종하는 자들이 회피하였던 전례의 다른 특색들의 ‘보편적인’(catholic) 특징에 존중심을 표시할 수 있었다. 성공회교회들은 자신의 모국어로 된 예배에 매우 익숙해 있었지만, 로마교회의 입장처럼 단 하나의 고정된 축성경 또는 축성기도를 제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66년 로마교회가 4가지 성찬기도들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도록 허용한 것은 성공회교회들에서 전례없는 사건이었다. 로마교회는 특별한 경우들(어린이들과의 공동예배등)에 대한 성찬 기도들에까지 그 가능성을 더욱 확대하였다. 따라서 성공회내의 전례분야는 이제 한 세대전까지만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확대되었다.

    둘째로, 그레고리 딕스(Gregory Dix)의 영향이었다. 그는 특출한 앵글로-가톨릭 정신과 확고한 선전능력(propaganda instinct)을 겸비하였으며, 깊은 학문과 잊기 어려운 문체, 도발적인 표현능력을 가진 수도사였다.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그는 ‘별종’(out of box)으로 이해되었다. 딕스는 세례와 견진례에 관하여 집필하였으며, 1890년에서 1970년까지 지배한 두단계 성사론의 입장 (sacramentalist view)-소위 ‘메이슨-딕스해석’(Mason-Dix Line)-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1940년대 남인도 교회들의 통합에 반대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들의 성직의 유효성(validity)에 대하여 흔들리는 앵글로-가톨릭 성직자들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사도적 계승(apostolic succession)에 관하여 집필하였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서 최고의 학문적인 성과는 1945년에 발표한 <전례의 구성>(The Shape of the Liturgy)이었다.

    이 불후의 저서는 앵글로-가톨릭들이 주장해온 신성불가침 항목들을 거의 전부 제거하였다. 또한 이 책은 이상적인 모델로 단 하나의 초기교회 성찬기도가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는 인식을 폐지시켰다-하지만 그는 히폴리투스 (Hippolytus) 를 모델로 추천하였다. 그는 1549년 양식 또한 1552년 양식처럼 크랜머의 쯔빙글리적인 해석(Zwinglianism)을 표현한다고 지적함으로써, 개혁가들을 야유하며 앵글로-가톨릭들의 모델인 1549년 양식을 폐위시켰다. 그는 또한 ‘임시양식’ (Interim Rite)을 공격하였다. 딕스는 성찬례(Eucharist)를 축성된 요소들을 공급하는 것 뿐만아니라, 주님의 행동에서 유래하여 초기교회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의미있는 ‘구성’(shape)을 갖고있는 복합적인 의식들의 표현이라고 재평가하였다(Gregory Dix on the “Shape” of the Eucharistic Liturgy’ 참조). 이들중 하나로 예수의 첫번째 행동(‘예수께서 빵을 들어’ ‘잔을 들어’)을 강조하였다. 이는 전례적으로 성찬요소들의 봉헌례-빵과 포도주를 제대로 가져오는 행동-로 표현되었으며, 딕스는 이 행동을 ‘신자들의 전례’라고 명칭하였다. 이 분야에서 그의 업적은 아마도 1958년 람베스회의 소위원회의 제안에서 가장 잘 요약되었다. 소위원회는 봉헌례(offertory)-‘신자들이 확실하게 참여하여야 한다’-를 축성기도에 더욱 밀접하게 연결시켜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1662년 양식의 봉헌례는 전적으로 헌금에 관한 것으로 말씀의 전례(Ante-Communion)에서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기도(Prayer for the Church Militant on Earth) 직전에 위치하였다(따라서 영성체가 없는 경우에도 자선금의 수집을 허용한다). 1958년 람베스회의는 ‘봉헌례’의 주요한 의미에 대한 변화를 수용하여, 이 변화된 의미에 특별한 전례적인 중요성을 부여하여 이 행동의 위치변경을 추진하였다. 잉글랜드에서는 전도구교회와 신자들(Parish and People) 운동에서 봉헌례 순행(offertory procession)을 채택하였다. 딕스의 책이 십년후에 나타난 로마 가톨릭교회의 ‘봉헌례 기도문들’의 본문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와 관계없이, 로마교회의 기도문들이 소개되었을 때, 이 기도문들은 당시까지 널리 확산된 딕스의 주장을 표현한 것으로 많은 성공회교회들의 전례생활에 당연히 확산되었다. 물론 하느님께 빵과 포도주(축성된 것이나 축성되지 않은 것이나)를 봉헌하는 것이 주님의 명령인 ‘이 예를 행하라’(do this)에 복종하는 것인가, 그리고 어느쪽이든 이 예식은 적합하거나 유익한 신학적인 메세지를 전달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보다 넓은 배경에서 성찬기도 순서의 인쇄된 형태들은 남인도교회(CSI)의 전례서를 시작으로 ‘4가지 행동의 구성’(four-action shape)을 반영하기 시작하였다.

    구성을 강조함으로써, ‘4가지 행동’의 시작전에 평화의 나눔(sharing of peace)을 배치하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제기되었다. 평화의 나눔은 이미 남인도교회의 전례에서 복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58년 람베스회의의 의제로는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나 딕스는 성찬기도에 단 하나의(single) ‘긴 축성기도’ 만을 주장하였을 뿐만아니라, 이를 ‘감사기도’(Thanksgiving)나 ‘대감사기도’ (Great Thanksgiving), 또는 심지어 ‘성찬기도’(Eucharistic Prayer)라고 명칭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독창적인 주장이었다. 이런 점에서 성찬기도의 신학(Eucharistic theology)에 대한 딕스의 특별한 공헌은 ‘아남네시스’의 개념에 대하여 새로운 신학적인 의미[중요성]를 부여한 것이었다. 그는 히폴리투스 (Hyppolytus)에 대한 1933년판에서 일반적으로 ‘기억함’(remembering)으로 번역하였던 분사를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아남네시스”를 행하는 것(doing anamnesis)’으로 번역하였다. 그의 이러한 번역은 ‘아남네시스'가 하느님 앞에서 또는 하느님을 향한 객관적인 행동(objective action)이라는 점 즉, 성찬기도에서 희생의 바침(offering of Eucharistic sacrifice)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강조는 종교개혁의 신학-과거의 십자가 사건에 관심을 단순히 표시한다-에 대한 비난과 의도적으로 대비되었다. 즉, 딕스에게 아남네시스는 하느님 앞에서 현재의 시간에 실현되는(actualized) 그리스도의 희생을 준비(setting out)하는 것이지, 그 실재(reality)가 개인의 신앙이나 정신적 성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었다. 딕스가 제2차 바티칸회의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의 변화를 어떻게 평가하였을가는 이제 추측으로만 가능할 뿐이지만[1952년에 사망], 성공회 기도서의 본문과 이해에 끼친 그의 영향을 엄청난 것이었다.

    세계성공회의 전례형태에 끼친 세번째 영향은 남인도교회의 전례서였다 (Buchanan, ‘South India’ 참조). 이 전례서 제작의 핵심인물인 레슬리 브라운 (Leslie Brown)은 남인도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장(1948-52)으로 활동한 후에 우간다의 주교가 되었으며, 1958년 람베스회의 소위원회의 서기로 활동하면서 전례서의 개정작업을 확실하게 검토하였다. 이 때에 CSI 전례서는 전세계적인 찬사를 받았으며, 소위원회의 주교들은 이 전례서의 원칙들 상당수를 지지하였다.

    네번째 영향은 각 성공회교회들 사이의 공식적 준공식적인 활동들로부터 나타났다. 1958년 람베스회의에서 새로운 의제-딕스와 CSI-는 사실상 과거의 ‘긴 축성기도’를 대체하였다. 소위원회는 기도서개정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오히려 이를 활용하여 향후에 관구교회들을 안내할 원칙들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제시작업에는 적어도 4가지 가설을 전제로 한다. 즉, 크랜머는 초기교회의 양식들을 복원하려는 의도였으며, 둘째로 그의 노력은 초기교회에 대한 불충분한 자료들 때문에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으며, 세째로 20세기의 전례학자들은 더 많은 자료들을 갖고있기 때문에 크랜머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초기교회의 단일한 양식이 발견된다면 이는 모든 논쟁들을 일소할 것이다. 또한 람베스회의는 성찬례의 희생(Eucharistic Sacrifice)에 관한 논쟁이 정리될 수 있다고 선언할 정도로 심사숙고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소위원회는 에피클레시스의 역할과 성격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축성에 관해서는 ‘우리는 성서적이고 초기교회적이며, 이후에 지속된 논쟁들의 이면에 있는 축성의 개념에 대하여 관심을 두고자 한다…그리고 이는 감사를 통한 축성이라고 명칭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중요한 진술(statement)을 하였다. 또한 소위원회는 세례에 관한 중요한 사항을 지적하기를 회피하였지만, 서품예식과 관련하여 이 예식의 핵심이 기도속의 안수(laying-on of hands with prayer)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매우 중요한 조치를 취하였다.

    람베스회의 본문(text, 진술문)은 출판이후 몇십년동안 그 자체로 전례개정 작업에 대한 판단기준(point of reference)이 되었다. 그러나 람베스회의는 마찬가지로 각 관구교회의 전례개정활동들을 조정할 수 있는 방안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독립한 관구교회들은 독자적으로 전례문제를 해결할 권한을 보유하였기 때문에, 다른 관구들과의 접촉을 쉽게 약화시켜 공동의 전례적인 특성(ethos)이나 순서(order)를 약화시키거나 삭제할 수 있었다. 1964년 아프리카의 5개관구장들을 위하여 레슬리 브라운이 편찬한 <아프리카를 위한 전례서>(A Liturgy for Africa)라는 제목의 책을 시작으로 여러차례에 걸쳐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Mombo, ‘Eastern Africa’ 참조). 이 전례서의 본문은 다시 다른 기도서들에 영향을 끼쳤으며, 또한 1958년 람베스회의에서 통과된 전체결의안(plenary resolution)에 대한 응답으로 1965년과 69년에 출판된 두개의 ‘성찬례의 구조와 내용에 관한 범성공회적인 문서’(Pan-Anglican Document on the structure and contents of the Eucharist)에도 영향을 주었다. 1968년 람베스회의 직전에는 런던에서 주교들과 전례학자들간의 협의회가 개최되었으며, 1971년 호주성공회의 전례위원회는 세계성공회협의회(Anglican Consultative Council, ACC)에 전체 관구교회들을 위하여 전례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요청은 1987년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협의회에서 다시 제기되었지만, 이러한 기구와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재정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그 사이에 개정활동의 조정을 위한 다른 방식이 나타나고 있었다. 1985년 전세계의 15개 관구 전례학자들이 보스톤에서 모임을 갖고 세계성공회 전례협의회 (International Anglican Liturgical Consultation, IALC)를 결성하였다. 또한 이들의 보스톤 성명서는 어린이들의 영성체 참여기준을 견진례나 연령에 관계없이 세례만을 기준으로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1987년 북부 이탈리아의 브릭센에서 다시 모임을 갖고 (‘위원회’ 보다는) ‘협의회’의 개념에 합의한 후, ACC에 이러한 개념의 채택과 승인을 요구하였다. 이 의제는 당연히 다음 회의인 1989년 요크모임에서 통과되었다. 그 사이에 람베스회의가 1988년에 개최되었다. 이 회의의‘전례를 통한 교회의 갱신’(Renewal of the Church in Liturgy)에 관한 중요한 성명서는 교리적인 관심사(Dogmatic Concerns) 분과에서 나온 결의안으로 다소 약화되었다. 이 결의안은 켄터베리 대주교와 관구장들(Primates)이 다음과 같은 입장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세계성공회의 기도서에 관한 자문기구’를 설치하도록 요청하였다.

    (a) 성서의 공적인 독서
    (b) 그리스도께서 세운 두가지 성사들의 사용
    (c) 세가지 성직 각각에 대한 주교의 서품형식의 사용
    (d)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의 공적인 낭독과 교육
    (e) 초교파적인 전례적 발전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며…신앙과 생활에서 그리스도교의 통일성을 나타내는 다른 전례적인 표현들의 사용

    이러한 추천의 본래 의도는 전례적인 독창력을 감시하거나 더나아가 제한하려는 것이었지만, 람베스회의의 요청을 수행하는 과제는 1993년에 IALC로 이관하였다. 따라서 전례학자들은 스스로를 감독하는 과제를 부여받았다. 전례협의회의 회의방식(pattern)-이제 매 4년마다 개최-은 1998년 람베스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받았다.

    다섯째로, 1960년대에 전례의 언어(language)에 대한 혁명이 시작되었다. 1967년까지 거의 모든 새로운 전례서들(공식적인 본문들이나 비공식적인 기도문들 또는 묵상문들)은 의식적으로 튜더왕조시대와 흠정역 성서의 문체를 사용하였다. 이는 긴 종속절과 다양한 수사적인 용법들로 구성된 길게 늘어지는 문장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겠지만, 가장 편리한 구별법은 대명사였다. 즉, 하느님을 ‘thou’보다는 ‘you’로 부른다면, 라틴어식의 튜더시대 문체는 확실히 유지될 수 없다. 하지만 하느님을 ‘thou’로 언급할 때는 크랜머의 문체를 피하기 어렵다.

    1960년대까지 영어권의 예배자들은 누구도 ‘thou’형식의 기도문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는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었다. 즉, 성서의 현대어 번역, 즉석기도의 변화, 기도에 대한 어린이들의 교육, 찬송가에서의 변화, 그리고 1960년대 후반에 나타난 로마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지방어 전례에서 비롯되었다. 먼저 1966년에 뉴질랜드와 호주성공회의 기도서 초안들이 나타났으며, 이들을 제외하면 1967년말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모든 공식적인 영문전례의 문체는 하느님을 ‘thou’로 불렀지만, 그 이후의 새로운 전례서들은 하느님을 ‘you’로 언급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전례서 초안들이 나타나기 시작 하였으며, 1968년에 초교파적으로 조직된 국제 영어본문 협의회(International Consultation on English Texts, ICET)는 영광송, 삼성경과 주기도문과 같은 ‘공통 예배본문들’에 대한 새로운 영문번역을 출판하였다. 결과적으로 전체 예식들-정말로 기도서 전체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써야했다. 이에따라 미국성공회는 <Prayer Book Studies 17>(1967)에서 ‘Green Book’(1970)으로, 잉글랜드성공회는 1967년의 ‘Series 2’에서 ‘Series 3’(1971년에 처음 출판)로 변경하여야 했다. 이제 전체 영어권에서는 분명한 분기점이 지정되었다.

    이것으로 언어의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이후로 여성들이 사제서품을 받음에 따라, 지시문에서 이제 더이상 ‘그는’ 또는 ‘그에게’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어 수동형(또는 중립형)으로 전환하여야 했다. 세속적 문체에서 인간 전체를 표현할 때 포괄적인 용어로 남성명사와 대명사의 사용을 중단함에 따라, 기도문의 문체도 ‘모든 인간들(men)을 사랑하고 봉사하는’과 같은 본문을 유지할 수 없었다. 성서의 문체도 New Revised Standard Version(1989)에서 ‘포괄적인’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전례문의 변화는 이보다 앞서 1979년의 미국성공회의 기도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잉글랜드성공회의 <대안예식서>(1980)처럼 이러한 문화적 변화 이전에 승인된 본문들은 해안에 떠내려온 고래처럼 보였으며, 더구나 영어권 예배자들 상당수의 불만을 자아내었다(당연히 변형하여 사용하였다). 이는 또한 남성 명사와 대명사가 하느님을 지칭하는데 여전히 적합한가-이는 쉽게 조정하기 어려운 전통이다-라는 심각한 질문을 제기하였다.

    여섯째로, 1950년이후의 전례형태(liturgical world)는 회중들의 참여를 크게 확대하였다. 기도서 예배의 본래 전통에 따르면, 각 전도구교회는 단 한권의 기도서만을 보유하며, 신자들은 ‘전례’을 듣고 참여하는 부분에서는 집례자의 낭독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662년 지시문은 아침기도와 저녁기도에서 죄의 고백을 ‘집례자를 따라’ 낭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문자해득률이 증가하고, 많은 나라들에서 성공회신자들은 기도서를 직접 소유하거나 교회가 제공한 기도서를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662년 기도서의 분위기(ethos)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즉, 집례자는 교회안의 맨앞에서 기도서를 낭독하고, 신자들은 이를 듣기만 하였기 때문에 매우 성직자 중심적(clericalist) 이었다. 1662년 기도서의 감사성찬례를 지시문대로 따르면, 신자들은 주기도문을 두번 낭독하며, 십계명에 응답하며, 아마도 신경과 영광송을 집례자와 함께 낭독하며, ‘마음을 드높이’와 ‘우리 주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에 응답하고 (아마도 삼성경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같다), 기도와 권고문들에 ‘아멘’으로 응답하였다. 더구나 1662년 기도서에 따르면 어느 부분에도 찬송가의 노래는 없었다. 감사성찬례에서 신자들은 전형적으로 무릎꿇고 침묵하고 있었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신자들은 정심기도, 죄의 고백, Prayer of Humble Access, 그리고 심지어 영성체후 기도까지도 낭독하였다면, 이는 기도서 정신(ethos)의 확장이었다. 문제는 새로운 양식들이 이러한 평신도의 참여를 예배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로 만들었는지, 아니면 약간 강제성을 띤(널리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추가조항’ (add-on)이었는가 였다.

    낭독에의 참여문제는 이제 감사성찬례의 행동에 대한 참여로 확대되었다. 1950년대이후 딕스가 추천한 평신도의 ‘봉헌례’순행 이외에도, 각 관구교회들은 평신도들에게 성서의 독서, 기도의 인도, 그리고 성찬의 집행을 허용하였다. 1950년 남인도교회는 연도의 중재기도와 성찬기도의 환호응답들(acclamations)에 대한 선례를 제공하였다. 1958년 람베스회의는 전자를 권고하였으며, 후자는 다른 교회들의 사례-CSI와 아프리카전례서(1964), 그리고 1966년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기도문들-를 통해서 확산되었다. 이외에도 1960년대 중반이후 평신도의 참여를 촉진시킨 다른 영향들은 평화의 나눔(평신도의 참여수준 향상), 대화식 설교, 그리고 전례의 비형식화(특히 어린이들과의 공동예배에서) 등을 통해서 전달되었다. 이처럼 새로운 변화들 상당수는 공식적인 본문들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예배 현장에서 실제로 활용되었다. 즉, 보다 융통성있는 본문들을 사용함으로써 혜택을 받으며, 이러한 적응작업(adaptation)을 폭넓게 확대할 것을 암시하였다. 또한 은사운동(charismatic movement)에서 공식적인 기도서의 사용방식도 과거의 지시문으로 규제된 한계를 확장시켰으며, 다양한 형태의 음악, ‘예배인도자’ (worship leadership), 평신도 사목직(lay ministries), 그리고 심지어 집에서 만든 예술품과 공예품들을 예배에 도입함으로써 공식적인 예배의 문화를 변화시켰다. 이에 따른 결과는 제한적이고 규제적이기 보다는 적극적이고 권한을 위임하기 위하여 지시문과 기타 지침들을 점진적인 변경시켰으며, 또한 점진적으로 대안적인 양식들을 제공하고 추가자료들을 첨부하였다. 1979년 미국성공회 기도서중 감사성찬례의 개요 또는 ‘지침’구조(제3양식)는 이후 다른 교회들의 전례개정때에 선례로 애용되었다.

    마지막으로, 일곱번째 영향은 문화화(inculturation)의 시작이었다. 이미 39개 신앙조항의 34조는 특정한 국가교회들이 스스로 양식과 의례를 제정하고 변경하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고 선언하였으며, 1908년 람베스회의는 세계성공회의 각 관구들에서 적용(adaptation)과 변화의 적합성을 예견하였다. 그러나 20세기 내내 전세계적으로 의식에 대한 변화들(ceremonial variations)은 다른 지방문화속에 예배를 토착화시키려는(indigenize) 시도로부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앞에 언급한 (‘서방교회의’) 신학적인 차이들로부터 형성된 것이 더 많았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사용되는 음악과 전례복, 예술품, 건축술은 성서와 기도서와 함께 영국(Britain)으로부터 수입된 것들이었다. 전통적인 민족 또는 국가문화는 종종 비그리스도교적인 신앙으로 치부되어, 그리스도안으로 세례를 받지 못하고 일소되었다. 1985년까지 문화화의 변화에 대한 암시는 공식적인 양식들 본문에서 희미하게 나타났다. 한국의 경우, 평화의 인사때에 서로 머리숙여 인사하고, 파퓨아 뉴기니에서는 삼성경에서 rattle[딸랑이]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실제 예배에서는 더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지방의 고유음악이 간혹 공식적인 본문들에서 사용되었으며, 마오리족들은 공식적인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더라도 평화의 나눔때에 코를 맞비비며 인사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인 양식들의 본문과 지시문, 주해는 이러한 경향을 거의 암시하지 않았다. 예를들면, 1979년 미국성공회 기도서-특히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번역본에서-는 문화적으로 타당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사용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 전달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20세기말기에야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 이후시대(post-colonial) 지역문화와 전통에 대한 주장은 이러한 추세의 한 특징이었다. 또 하나의 특징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회의 이후(post-Vatican) 교회음악과 건축을 문화화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피선교지의] 제2,3세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선조들처럼 물려받은[전통적인] 문화적인 양식들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1988년 람베스회의는 ‘각 관구교회는 필수적인 보편적인 성공회의 예배표준과 전통적인 전례자료들에 복종하면서, 그들의 문화적 상황에서 그리스도인 에 적합한 예배의 표현을 자유로이 추구할 수 있다’고 결의함으로써, 문화화를 권장하였다.

    이 7가지 영향들과 이들간 상호작용의 결과는 20세기 동안에 지속적으로 추진된 기도서 개정활동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이 책의 제5부와 6부에서 검토한다. 20세기는 전세계 성공회교회들을 위하여 크랜머의 이상이었던 ‘단 하나의 사용례’를 추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국에는 각 관구들 뿐만아니라 관구교회내에서 조차도 다양성(variety), 다원성(pluralsm), 그리고 상이성 (difference)을 권장하는 것으로 마감하였다. 즉, 단일성(uniformity)이 ‘가족간의 닮은꼴’(family resemblance)로 변화하였다. G.J. 커밍(Cuming)은 그의 저서인 <성공회 기도서의 역사>(History of Anglican Liturgy)의 끝맺는말에서 이에 대한 ‘적합한 은유는 이제 더이상 어머니와 자녀들이 아니라’-1662년 기도서와 그 이후의 기도서들-‘같은세대의 사촌들이다’라고 썼다.

    2009년 2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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