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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4주일 -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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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부활 4주일 - 다해

    제 1독서: 사도 13:14, 43-52 RCL:사도 9:36-43

    제 1독서는 여전히 구약성서 대신에 사도행전을 사용한다. 사도행전은 부활 사건 이후 첫 몇년 사이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보여주고 있거니와, 이는 부활 경험이 사도들의 교회에 미친 여파를 반영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바울로와 바르나바가 이른바 제 1차 전도 여행 중에 비시디아 안티오키아에서 행한 설교에 대한 것이다. 이 사건의 패턴은 전형적이어서, 전도 여행 내내 다른 도시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즉 사도들이 회당(시나고그)에서 설교를 하고, 여러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믿음을 갖게 된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사도들의 메시지를 거부하며, 사도들에 반대하여 준동한다. 이에 사도들은 이방인들에게로 가겠노라는 의지를 밝힌다. 하느님 말씀의 선포는 성공하리라는 약속이 없다. 다만 사람들이 듣고자 하건 아니건 간에 그 말씀은 선포되어야 한다(에제 3:11). 중요한 것은 말씀이 신실하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말씀을 처지에 따라 그럴 듯하게 꾸며보려는 인위적인 묘책이나 기술보다 더 중요하다.

    RCL 본문은 다시 살아난 다비타(도르가) 이야기를 다룬다. 사람을 다시 살린 이야기로서는 예수님이 하신 일이 아닌 유일한 경우이다. 그 역사성을 고려해서 말한다면, 초대 교회는 베드로가 이 기적을 행했다고 믿었다는 것이겠다 (로체). 루가 기자에게 이 이야기가 중요한 까닭은, 이 이야기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확산시키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제 2독서: 묵시 7:9, 14b-17 RCL: 묵시 7:9-17

    대체로 우리는 이 본문을 "모든 성인의 날"(제성축일)로 연결시키곤 한다. 하지만 이 본문은 부활절기에 적합하다. 순교자들이 누리는 기쁨은 또한 기쁨으로 변한 슬픔이기도 하다. 순교자들은 "큰 환난"을 겪은 사람들이다. 그저 그런 고난이 아니라, "환란"이다. 이것을 목격하여 보도하는 이는 이들의 순교가 메시아가 겪는 비탄과 고난의 일부,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누는 일이라고 여긴다. 파스카, 즉 과월절의 이미지가 "어린 양의 피"로 드러나고 있으며, 순교자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는 목자의 이미지가 드러난다. 이는 복음서에 반복되는 이미지이다.

    RCL은 생략된 10-14절을 추가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천상 전례에서 불리는 두개의 노래가 포함되어 있다.

    복음: 요한 10:27-30 RCL: 요한 10:22-30

    이 복음서 본문은 10장 앞부분에 나오는 목자 이야기의 한 부분이라기 보다는, 그 다음 구절, 즉 RCL 본문의 시작인 22절이 가리키는 봉헌절에 대한 예수의 이야기 속에 나타난 목자 이야기에 대한 공명이라고 하겠다.

    RCL이 덧붙인 23-26절은 예수를 따르는 이들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대비시켜서, 착한 목자의 주제를 다시금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안됐지만 이 축제 기간은 요한 공동체와 이들이 추방당한 회당(시나고그)의 논쟁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요한 공동체에 속한 신자들은 그분의 양떼이지만,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아니다.

    몇몇 주석가들을 따라서 본문을 재배열하여 이 구절들을 앞에 나온 착한 목자 이야기로 되돌리고픈 유혹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앞선 나온 주제로 돌아가서 이를 좀더 발전시키는 것이 요한 기자의 특징이다. 즉 앞에 나온 착한 목자 비유의 설명은 문과 목자를 다루었지만, 이 이야기는 양떼와 이들이 목자와 맺는 관계, 목자를 따르는 생활(제자직) 속에 이미 마련된 영원한 생명의 향유, 그리고 이들은 (마지막 심판 날에) 죽지 않을 것이며, 목자의 손에서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는 즉각적이며 반복적인 보증을 다루고 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전형적인 요한 기자의 언어로 기술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기록한 예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재현하고 있다. 지상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이에 응답하는 것은 마지막 심판 날에 하느님께 받아들여질 지 아닐 지를 판단하게 될 매우 결정적인 사안이다 (루가 7:22-23, 12:8-9을 보라).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에 관한 결론 구절은 니케아 신경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지만, 복음서 기자가 원래 의미하는 바는 이러한 이후 교리적 선언에 나타난 존재론적 혹은 형이상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히브리적 사고의 역동적이며 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은, 역사 속에서 아버지의 부름에 대하여 아들이 응답하기 때문이며,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말씀과 행동의 완벽한 연합을 만들어 낸다. 물론 이 역사는 요한 복음서의 서언이 분명히 하는 바와 같이(요한 1:1-14),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그 외적인 배경이 된다.

    설교

    여전히 세 독서를 통해서 공동의 주제를 엮어내기가 쉽지 않다. 사도행전의 본문은 다시한번 교회의 선교 사명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지가 어느 곳에서 배척당한다면, 다른 이들에게로 옮겨가야 한다. 이런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나는것을 알 수 있다. 서구 세계는 대체로 복음의 메시지를 배척하고 있지만, 다른 세계에서 복음을 듣고자하는 열망이 기적처럼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선교 사명을 위해 힘을 쏟아야 할 곳은 어디인가?

    제 2독서는 순교자들의 기쁨에 관해서 묘사하고 있다. 이 기쁨은 부활절 전례를 통해서 미리 경험할 수 있다.

    복음서 본문은 착한 목자에 관한 주제에 대한 공명을 선사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착한 목자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도 좋겠다. 우리는 그분이 다만 지상에서 사목 활동을 하시는 동안에만 착한 목자"였다"고 믿지 않는다. 그분은 지금도 (28절이 현재형인 것에 주목하라) 그분의 양떼에게 생명을 주신다. 또한 그분은 부활하신 주님으로서 여전히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다. 사도들이 첫 부활절에 보았던 부활하신 주님을 이제 우리는 더이상 볼 수 없는 처지에, 우리는 어떻게 이 부활절 신앙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 답은 우리의 전례, 즉 말씀과 성사를 통해서 주님께서 여전히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는데 있다.

    "Tradition is living faith of the dead, Traditionalism is dead faith of the living."
    2007년 4월 18일 #
  2. 한국의 성서정과는 RCL의 본문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1독서는 죽었다가 베드로에 의해서 다시 살게 된 다비타(도르가, 사슴) 이야기입니다. 이름이 '사슴'이라니, 참 곱네요. 마음씨도 이름처럼 고와서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한 사람이며, 특히 당시 사회적 취약계층인 과부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베드로에 의해서 다시 살아난 다비타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엉뚱한 생각이 분심을 만들어내는데요 ^^; 혹시, 성인 성녀 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하여 검색해 보니 1세기 '수절' 성녀로 다비타가 등장합니다. 더 자세한 설명이 없으나 같은 년대인 것으로 보아 사도행전의 인물과 동일인물인 것으로 보입니다. 성서 본문을 자세히 보면, 여러종류의 인칭대명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신도' , '신도' , '과부들' , '성도' 등입니다. '과부-신도-성도' 이 셋은 어떤 기준으로 구분되어 불린 것일까요? 이 구분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수 있는 분은 답글을 부탁드립니다.
    다비타는 성도는 아니었는지 '여신도'로만 등장하네요. 그래서 몇몇 성인사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일까요. 요빠는 예루살렘 서북쪽 항구도시로 과거에 요나가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다르싯으로 가는 배를 탄 항구입니다. 요빠의 뜻은 '아름다움'이라고 하네요.

    요빠가 항구인 점, 다비타가 성인사전에 '수절'성녀로 등장하는 점을 고려하여 다비타의 삶을 재구성하면 이렇지 않았을까요?

    "아름다운 항구도시 요빠에 살고 있던 다비타, 그는 이름만큼이나 아리따운 여인이었으며, 그에게는 어부일을 하는 남편이 있었는데, 어느 날 큰 풍랑이 인 다음날 남편은 소식이 없었다. 슬픔에 잠겨있던 다비타, 그느 어느 맑은 날 예수님을 뵙게 된다. 다비타는 예수님의 제자(개역성서에는 제자로 번역되었다. 많은 여제자들 중 한사람은 아니었을까)가 된다. 그는 예수님이 그리 하셨듯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 특히 과부들에게 구제사업을 열심히 하였다. 그러던 중 과로로 병을 얻어 죽게 되었고, 베드로가 찾아와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 살게되었다. 그는 평생 남편을 사랑했고, 예수님을 사랑했고, 민중을 사랑했다."

    상상에 의한 과도한 미화이겠지만 그의 삶이 정말 그렇지 않았을까요? ^^

    2007년 4월 25일 #
  3. 당일 본기도 등을 참고할 때, 주제는 '목자되신 주님께 순종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신도'가 적당할 것 같다.

    106장 부활하신 이 아침에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에 모든 신도들의 부활소망을 갖게 된다. '아무도 내 양들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복음 말씀이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더욱 든든히 갖게 한다. 이 소망을 잘 담고 있는 성가이다. 같은 내용으로 '118장 예수살아 계시니'가 있다. 118장은 독일 코랄이므로 느려지지 않게 불러야 한다. 우리 성가는 늘임표(페르마타)를 모두 쉼표로 바꾸어 현대적으로 표현하였으나, 원래악보는 쉼표자리에 페르마타로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코랄의 페르마타는 음을 늘여서 부르라는 신호가 아니라 잠깐 쉬는 쉼표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118장의 쉼표에 주의하여야 한다. ~두렵잖네 ' 무덤권세~ 이 부분의 쉼표를 늘임표로 부르는 경향이 있는데, 잠깐 쉬는 방식으로 불러야 원곡의 느낌을 잘 살릴 수 있다.

    567장 오 놀라운 구세주
    당일 주제에 아주 적합한 곡이다. 구세주 예수님은 '위험할 땐 바위에 숨기고, 샘솟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목자가 되신다. 비유로 노래할 뿐아니라 '큰 기쁨중 주님을 찬양토록 내 생활을 도우'신다고 구체적으로 노래한다. 마지막 날에 다비타가 일어난 것 처럼, '나 일어나' 예수님을 맞이할 것임을 노래하며 묵시록과 사도행전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말씀과 성사를 통해 확신을 얻은 신자들이 파송을 하며 다시 한번 그날의 말씀을 떠올릴 수 있도록 마감성가로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층계성가는 '선한목자' 부분을 노래하면 적합하다.

    봉헌성가로는 515장 '길을 잃은 양떼처럼'과 524장 '주예수 내맘에 들어와'가 적당하다. 둘 모두 시편과 복음의 말씀을 잘 담고 있다.

    2007년 4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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