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설교 자료

부활 5주일 -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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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부활 5주일 - 다해

    제 1독서: 사도 14:21-27 RCL: 사도 11:1-18

    제 1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하며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자신들이 세운 신앙 공동체들을 다시 방문한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사도 14:23에 나타난 원로(프레스비테로스)의 안수 보도가 루가 기자의 착오라고 본다. 만약 고린토전서에 나타난 양상이 바울로가 세운 교회의 전형적인 현상이라면, 그 사목직은 카리스마적인 것이었다 (1 고린 12:4-11, 27-30). 여기 사도행전 14장에서 루가 기자는 자기 당대 교회에서 벌어지는 것을 염두하고 이 안수 예식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바울로 시대의 카리스마적인 사목직이든, 루가 시대의 사제직이든, 혹은 2세기와 그 이후의 삼성직에 관한 것이든, 이러한 사목직의 기능은 첫 사도들이 마련해 놓은 기초에 터잡은 교회를 지키는 것이다.

    사도들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있는 교회로 돌아온 후, 이들은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보고한다. 이방인들에게까지 신앙의 문을 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자신들의 선교 전략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사도들은 하느님의 목적에 사용되는 도구일 뿐이다.

    RCL의 독서는 베드로가 예루살렘 공동체에 보고한 고르넬리오 이야기의 두번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제 2독서: 묵시 21:1-5a RCL: 묵시 21:1-6

    본문의 내용은 환시자 요한이 보는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시이다. 이 "새로운 것들"은 원칙적으로 부활을 통하여 세워진다. 그리고 교회 생활 속에서 이것들이 이뤄지리라는 희망이 자리 잡고 있다.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이제 하느님께서는 진정 하느님의 백성들과 머무신다. 여기서 그 기쁨을 먼저 맛보는 경험이 나타난다. 하지만 세상이 끝나기 전에 하느님 백성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질 것이다. 이 교회 안에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으며, 신앙을 가진 이들은 모든 것이 이제 새롭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RCL 본문은 5b-6절을 추가하여, 이 환시자에게 주는 하느님의 메시지로 결론을 맺도록 하고, 독자들이 이 진리를 확신하도록 돕는다.

    복음: 요한 13:31-33a, 34-35 RCL: 요한 13:31-35

    복음서 본문의 시작 부분을 초기 그리스도교의 성가로 생각하면, 하느님과 사람의 아들의 영광을 다루고 있는 이 다섯 줄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최근의 주석가들도 이를 고대 성가로 이해한다. 이 구절은 사람의 아들인 그리스도께서 옥좌에 오르시는 것을 축하하며, 그분께서 영광 중에 다시오시리라는 기대를 보여준다. 과거형에서 미래형으로 전환하는 흐름이 이를 말해 준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들어올려지셔서]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신다면 [받으셨기에] [그분이 들어올려지셔서]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다.
    아니, 이제 곧 주실 것이다. [기대하고 있는 파루시아의 때에]

    이 성가를 통하여, 요한 기자는 시제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과거형은 성자의 성육신 안에서 성자를 통한 하느님의 계시가 드러난 영광스러운 사건을 가리키고(이런 점에서 '예수의 변모 사건'이 그분의 전체 사목 활동에 편만하게 비추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미래형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자의 승천을 통하여 일어난 그 영광스러운 사건이 다시 일어나게 되리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성가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영광의 신학에 대한 기본적인 주제를 드러내는 하나의 표현이라고 하겠다.

    고별의 시점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남기신다. (루가 22:29에서 예수께서 남기신 계약과,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마지막 만찬의 제정사를 보라.) 어떤 학자들은 요한의 사랑 개념이 산상설교에 나타난 사랑 개념보다 제한적이고, 내향적이라고 비판한다. 요한 공동체의 그리스도는 원수를 포함하는 사랑을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의 서로 사랑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대로 이것을 공관복음서의 마지막 만찬 제정사와 대비하여 본다면, 이 사랑의 계명은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아가페 식사라는 상황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가페 식사는 공동체 안의 사랑에 대한 가장 중요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RCL에 포함된 33b절은 예수께서 떠나심으로써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새로운 상황을 상기시킨다. 예수께서는 이 지상에서는 더이상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실 것이다.

    설교

    사도행전의 본문을 가지고 안수(서품)의 주제를 다룰 수 있겠다. 주님의 교회에 새로운 성직자(사목자)를 세우시는 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은 주교들과 사도들의 후계자들을 통하여 성사적으로 활동하신다.

    환시자가 보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와 사회의 개혁에 대한 주제를 둔 설교를 구성할 수 있겠다. 사회 복음 운동(즉 하느님 나라를 사회의 진보와 동일시하는)의 허점을 피하면서, 서로가 협력하여, 그리고 선한 의지를 가진 세속의 사람들과도 연대하여 새로운 예루살렘에 대한 한결 나은 표징을 이 땅에 세워나가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기도 하다 (위르겐 몰트만).

    복음서 본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이루는 사랑이라는 '새 계명'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명령일 뿐만 아니라,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에 주신 선물이다.

    "Tradition is living faith of the dead, Traditionalism is dead faith of the living."
    2007년 5월 1일 #
  2. 당일 본기도 등을 참고할 때, 주제는 '영광의 하느님, 사랑의 계명'으로 볼 수 있다.

    입당성가
    371장 성도여 다함께
    영광의 하느님은 찬송받으실 분이시다. '할렐루야 아멘'을 반복하면서 영광의 하느님을 찬송하는 예배의 자리로 초대하는(함께 나아가는) 내용의 곡으로 입당성가로 적당하다.

    층계성가
    513장 주님의 본을 따라
    당일 주제 중에 '사랑'에 적합한 곡이다. 2/4박자의 빠른 곡으로 분위기에 따라서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드리는 미사에는 적합하지 않다. 비교적 작은 인원이 여러가지 타악기를 사용하면서 여러번 반복해서 부르기에 좋을 듯 하다. 예수님께서 직접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가자.

    마감성가
    523장 주님을 섬기기로
    마지막 때까지 주님을 섬기며 살겠다는 다짐의 곡으로 마감성가로 적합하다.

    2007년 7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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