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설교 자료

부활 6주일 - 다해

(2)
  1. 부활 6주일 - 다해

    제 1독서: 사도 15:1-2, 22-29 RCL:사도 16:9-15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도 회의 사도행전 판이다. 바울로도 이에 대해서 갈라 2:1-10에서 서술하고 있는데, 몇가지 공통점들이 있다. 이른바 등장 인물(dramatis personae: 바울로, 바르나바, 베드로, 야고보)가 같고, 논란이 되는 문제, 즉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위해서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는 문제가 같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한 서술은 사뭇 다르다. 바울로의 서신에서 결국에 사도들의 동의가 있었다고 말한다. 즉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위한 선교를 맡게 될 것이고, 바울로는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를 맡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해당 율법은 이방인 교회에 적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따르면 이 회의가 몇가지 절충안으로 결말을 냈다고 한다. 즉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할 짐을 벗었지만, 몇가지 긴요한 법적 사항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도행전은 아마도 두 가지 서로 다른 사도 회의를 하나로 묶어서 전달하는 것 같다. 첫번째 회의는 바울로가 말한대로 끝을 맺었지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섞여 있는 공동체에서 성찬의 음식을 함께 나눌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명확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갈라 2:11-14에서 바울로가 기술한대로,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한판 소동이 일어났다. 바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두번째 사도회의가 열렸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그 결과를 보고 받았다 (사도 21:25 - 사도 15장에서 말하는대로 만약 바울로가 이 사도들의 절충안이 결정될 때 그 자리에 있었다면, 왜 야고보가 그 내용에 대해서 사도 21장에서 바울로에게 보고하겠는가?).

    RCL의 대체 본문은 바울로의 제 2차 전도 여행, 즉 처음으로 유럽에 가게 되는 여행에 대한 신호탄이다(9-10절). 본문은 리디아와 그의 동료들의 개종을 통해서 필립비에 교회가 설립되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온 집안 식구"의 세례는 아마도 노예들과 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식구들을 가리키는 것이리라(예레미야스).

    제 2독서: 묵시 21:10-14, 22-23 RCL: 묵시 21:10, 22-22:5

    이 본문은 새로운 예루살렘의 내림에 대한 묘사의 연속(부분적으로 반복이고, 부분적으로는 발전된 이야기)이다. 이 내림에 대한 언급이 반복되지만, 그 도성에 대해 좀더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도성이 빛과 성벽, 대문들, 주춧돌들, 그리고 이제 성전이나 태양도 필요없다는 언급들이 나타난다.

    부분적이나마 거룩한 도성과 지상에 있는 교회의 대응이 드러난다. 교회 역시 빛을 내고 있다. 이것은 세속적 권력의 호화로움이 아니라(물론 콘스탄틴 시대 이후에 이러한 것으로 교회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말씀과 성사, 그리고 성령의 현존을 통해 드러나는 빛이다. 교회는 또한 옛 이스라엘의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열 두 대문들과 천사들, 지파들이 그것을 상징한다. 이 교회의 주춧돌은 열두 사도들이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은 교회의 성서에 기록되어 영원히 보존될 것이며, 사도들의 후계자들을 통하여 교회의 교리 속에서 그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는 성전이 존재하다. 이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이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드러나게 되는 가시적인 장소이다. 이 장소가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어디에나 계실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와, 이 지상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구체적인 시공간, 구체적인 전례와 성사, 그리고 빵과 잔 안에서 드러내시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에 교회의 구체성에 대한 논란과 걸림돌이 존재한다. 복음에 대한 세속적인 해석을 선호하는 이들은 이 지상 교회를 없애야 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아직 아님"(not yet)이라는 차원을 무시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미 천상에 있다는 생각을 제시하려 한다. 이것이야 말로 세속적 열광주의일 뿐이다.

    RCL 본문은 11-14절을 생략하고, 24-27절, 22:1-5을 추가한다. 하늘 도성에 대한 묵시록의 묘사 결론인 셈이다.

    복음: 요한 14:23-29 RCL: 요한 5:1-9

    부활절기 막바지에 이르면서 우리는 예수의 고별사를 읽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협조자(파라클라테)가 오실 것을 약속받게 된다. 이 고별사는 부활하셔서 아직 승천하지 않으신 주님께서 오순절 성령의 오심을 준비하는 40일 동안에 들려준 이야기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 고별사를 지상의 예수님께서 행하신 마지막 만찬이라는 정황에 위치시킨다. 이들은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그리고 그 죽음을 넘어서서 성령이라는 선물을 가져다 주는 그분의 영광을 바라다 본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서는 50일 전체가 성령이라는 선물을 축하하는 기간이었다. 성령강림주일 당일만 축하했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절 약속의 성취를 듣게 된다. 요한복음서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주일 저녁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선사하신다(가해와 나해의 성령강림절 복음서 본문을 보라). 바울로 서신에서 전하는대로,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하느님께서 오시어 제자들과 함께 할 처소를 만드신다. 성령의 역할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시는 것"이다. 성령은 새로운 계시를 전달하지 않는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전체를 위한 단 한번의" 계시("내가 너희에게 한 모든 말")를 새로운 이해와 해석과 적용으로 펼쳐 보여주실 것이다. "성령의 역할은 하느님 성부의 말씀을 말그대로(ipsissima verb) 되새겨주는 것을 넘어선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살아 움직이도록 재현하는 것이다. 복음을 창조적으로 개척하는 것이다"(E.C. 호스킨스). 성령의 이 지속적인 활동은 제자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며, 그들의 두려움을 거두어 간다. 성령은 박해와 순교의 시간에도 항상 그들 곁에 협조자로 동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RCL의 대체 본문은 부활절기 막바지에 고별사를 읽는 오래된 전통에서 벗어나 있다. 이 내용은 베데스다(현대 번역에 등장하는 베짜다라는 지명은 고고학적 연구 결과 잘못임이 분명하다) 못 가의 신체 마비 불구자를 치유하시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마르코 2:1-2와 병행하는 이야기를 여러차례 걸러내어 만든 결과이다. 9절 하반부는 어떤 신학적 모티프의 가능성을 열어두는데, 그렇지 않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안식일 치유 사건을 보라.) 이 이야기들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하느님 나라의 안식일 휴식의 의미는 이러한 치유 사건이다 (호스킨스).

    설교

    제 1독서의 예루살렘 회의 이야기는 교회의 일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양한 배경과 신앙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친교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절충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하다는 점을 되새겨 준다. 이러한 해결안은 당면한 문제가 이른바 아디아포라(adiaphora: 부차적인 것)의 범주에 포함된 것일 때 가능하다.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획일성과 일치를 혼동한 때가 있었거니와, 이러한 획일성이 인정할 만한 다원성의 가치를 희생하도록 신앙인들에게 강요되기도 했다.

    제 2독서는 앞서 언급한대로 천상의 예루살렘 도성에 과한 묘사의 연속이다. 설교자가 지난 주일의 내용을 사회 개혁에 대한 도전으로 연결시켰다면, 오늘은 교회의 개혁에 대한 도전과 연결시킬 수 있겠다. 우리의 지상 예루살렘에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가시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세속 사회 안에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는 곳이 있어야 한다.

    요한 복음서의 여러 담화 기사들처럼, 고별사에서 뽑은 오늘 본문도 여러가지 주제를 제공한다. 여기에는 이런 점들을 포함한다: 예수의 가르침을 우리 안에 되새겨 주시며, 그 가르침을 오늘 우리 교회의 상황에 적용하도록 우리의 이해를 열어주시는 선생님인 성령; 세상의 평화와 대비되는 그리스도의 평화. 설교자는 오늘날 교회의 현실에 말하게 될 복음서의 내용을 선택하여 다루는데 어려움이 없어야 한다.

    "Tradition is living faith of the dead, Traditionalism is dead faith of the living."
    2007년 5월 8일 #
  2. 대한성공회는 1,2독서는 RCL을 따랐고, 복음은 요한 14장을 따랐다.
    주제는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로 볼 수 있겠다.

    415장 기뻐 찬송하자
    오늘 주제에 잘 어울리는 곡으로 곡진행도 입당성가나 마감성가로 적당하다. 예수님의 부활과 가르침, 그리고 성령님의 도움심을 노래한 경쾌하면서도 아름다운 곡이다.

    416장 만유의 주재
    예수님의 존귀하심을 노래한 곡으로 층계성가로 적당하다.

    514장 주님의 평화
    복음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를 노래한 아름다운 곡이다. 단조의 곡으로 약간 어둡고 조용한, 그러면서도 결의감이나 장엄함을 주는 곡이다. 봉헌성가로 적당하며, 특별한 시기에는 성체성가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434장 주께서 작별하실 때
    복음 중에서 성신에 대한 부분이다. 성신강림절에 불리는 곡이다.

    2007년 7월 8일 #

이 토론 주제에 대한 RSS 피드

답글

글을 올리려면 로그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