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신학 및 역사 이야기

  1. 서평: 디아메드 맥컬로흐, [그리스도교 역사: 그 첫 3천년]
    Book Review: Diamaird MacCulloch, A History of Christianity: The First Three Thousand Years, 2009.

    서평자: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이 책에 붙은 자극적인 부제목은 이 책이 한권의 교재를 넘어서리라는 걸 알려준다. 디어메드 맥클로흐는 많은 역작 가운데 하나인 이 책을 유대교 세계와 아울러 고전의 세계 안에 자리한 그리스도교의 지적, 사회적 배경을 요약하면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놀랍고 새로운 응답을 제공했는 지를 보게 된다.

    그리스-로마 종교는 황제 숭배(황제가 군사적인 독재자가 되어 피비린내나는 갈등 뒤에 계속 손을 대면서 더욱 이상해진)와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했던 지방의 의식들과 신화들이 쉽지 않은 혼합을 이루게 되었다. 유대교 세계는 유대교의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생생한 긴장으로 점철됐다. 이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가져 온 것은 새롭게 열린 유대교의 정체성으로서, 어떤 특정한 국가적 장치에서도 독립된 인간의 정체성이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정치적인 충성심에 기대지 않고, 서로에게 소속된 어떤 형태로서의 종교에 대한 이상을 창조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재빠르게 정치적 힘을 이용하는 쪽으로 나갔고, 그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맥컬로흐는 회의적인 교회사가를 늘 유혹하는 쇠퇴와 타락이라는 구색만 맞춘 진술을 거부한다. 대신에 그리스도교적인 삶과 신앙의 기본 형태들이 구성된 지극히 다양한 방법들을 추적한다. 엄격한 역사가인 저자는 무성하게 피어나는 음모 이론 - 영지주의자, 막달레나 마리아, 템플 기사단과 같은 환상의 세계 - 를 말끔히 털어낸다. 그러나 저자는 과거 시대의 소수파나 분리파가 내름대로 깨인 근대인과 같았다는 요즘의 대중적인 가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예를 들자면, 원죄 문제로 어거스틴에 반대했던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그리 밝고 낙관적인 전망 속에서 나온게 아니라, 인간의 경험의 빛과 어둠에 대해서 별 여지를 두지 않았던 극히 혹독한 도덕성에 기초한 것으로, 우리가 부르는 자유와는 질이 다른 것이었다.

    맥컬로흐가 어거스틴을 다룬 부분은 이 책의 탁월함을 말해주는 한 예일 뿐이다. 저자는 공정하고, 놀랍도록 넓은 식견을 드러내지만, 무비판적이거나 적대적이지 않다. 게다가 저자는 실제로 모든 영역에서 전문적인 문헌에 아주 정통한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교의 동진 확장과 중앙 아시아 교회들의 비참한 역사에 관한 부분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고 연구가 되지 않은 처지를 생각할 때, 이 책에서 가장 훌륭하다. 그 밖에 뛰어난 부분이 여럿이다. 유럽 그리스도교의 선교(저자는 인도에서 그 정치적인 이점을 이용해서 실행한 개신교의 선교적 노력은 “최대의 실패”라고 기술한다)가 이룬 성과와 한계를 다루는 부분, 17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동안 러시아 제국 경계 지역에 있었던 개신교, 천주교, 정교회의 건들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이야기, 그리고 칼빈의 독보적인 유산, 즉 기존 제도의 부분적인 개혁이 아니라, 교황 교회를 옹호했던 이들이 사용했던 바로 그 성서적, 전통적인 자료에 기반하여 보편적(Catholic) 신앙을 새롭게 상상하려 했다고 저자가 평가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잃어버린 세계와, 반짝했다 사라진 가능성들에 대한 언급도 있다. 13세기 중국의 그리스도교 제국, 16세기 폴란드의 유니테리안 공국뿐만 아니라, 중앙 아메리카 이슬람 공화국(스페인에 대항하기 위해 엘리자베스 기 튜더 왕조와 모로코 사이에 마련된 협력안으로 단명으로 끝난 제안) 등이 그 예이다. 맥컬로흐는 지적이면서도 당연히 필연적으로 일어난 발전을 독자들이 볼 수 있도록 돕는 역사학자의 몫을 해내고 있다 (특히 이 점에서 교황제를 다룬 부분이 뛰어나다). 저자는 또 이렇게 상실된 가능성들이 필연이었었음을 명백히 한다. 그 사라진 이유는 교회 내의 갈등과 식민주의 그리스도교의 권력이 개입이었다. 저자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이용할 줄 알지만, 어떤 신학적인 제안도 없이 이에 집착하는 여느 역사가들과는 다르다.

    세부적인 면에서 몇가지 실수는 피할 수 없는 법이다. 주교가 쓴 주교관(mitre)은 로마의 공적인 예복에서 나온 게 아니라, 중세 교황이 머리에 쓰던 것들을 변용한 것이다. 흑사병이란 명칭 자체는 언급한 때보다 몇 세기 후에 사용되었다. 또 어쩔 수 없이 몇가지 틈도 보인다. 폭군 이반 대제(Ivan the Terrible) 재임기에 관한 아주 훌륭한 설명 속에서도, 짜르의 포악함을 비판했다가 죽임을 당한 모스크바의 필립 총대주교에 대한 언급과, 흔히들 이야기하는 바와는 달리 동방 그리스도인들이 세속 권력과의 관계에서 늘 무관심하지만은 않았던 여러 사례를 찾아 볼 수 없었다. 렘브란트를 최고의 개신교 성서 주석가라 말한다면, 저자의 방향에 좀더 머리를 끄덕일 만한 여지가 있을 뻔했다. 다시 말해, 단테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 너무나 아쉽다. 많지 않지만 상투적인 교재 냄새가 나는 부분도 있다. 맥컬로우는 어거스틴과 아퀴나스가 말하는 “자기 충만한 신적 존재”와 프란시스 성인의 인격적인 하느님을 비교한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철학적이면서 관계적이고 인격적인 면을 함께 추구하려고 했으며, 단테의 신곡 천국편은 상상력과 영성을 통하여 신앙의 이러한 면모들이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이 성공적인 성과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이 책은 이 분야의 획기적인 저작이다. 그 범위의 섭렵이 놀랍고, 읽기 쉽거니와, 물릴대로 물린 전문가에는 통찰을, 관심을 가진 일반 독자에게는 해명을 제공할 것이다. 영어권에는 이에 맞설 만한 책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야기는 분명하면서도 절제된 언어로 풀려간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지도 그리 광범위하지도 않은 시대와 문화 속에서, 이 책은 놀랍도록 다양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어떻게 활력을 가졌는지에 대한 중대한 증언이다. 그 첫 삼천년은 또한 마지막이 될 것 같지 않다.

    저자: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Guardian, 23th September, 2009
    교정: 2009년 9월 26일

    "Tradition is living faith of the dead, Traditionalism is dead faith of the living."
    2010년 2월 9일 #

이 토론 주제에 대한 RSS 피드

답글

글을 올리려면 로그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