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신학 및 역사 이야기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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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의 글은 크랜머의 생애로 http://en.wikipedia.org/wiki/Thomas_Cranmer 개재된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위키피디아의 특성상 한 사람이 일관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여러사람들이 첨삭하였기 때문에, 일관성과 구체성이라는 두가지 문제가 혼돈되고 있지만 크랜머에 대한 간단한 글이라고 생각되 일단 번역하였습니다. 원본의 각주는 생략하였지만, 참고문헌에 모두 소개하였습니다. 원문과 대조하면서, 그리고 용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참고하면서 읽으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봅니다. Good luck!

    차례에서 나타나듯이 크랜머의 생애는 초기 잉글랜드 종교개혁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물론 크랜머 이전에 이미 개혁을 주장하고 실천하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정보는 이 포럼에 번역된 수잔 도란의 책[잉글랜드 종교개혁]을 참고하십시요.

    엄밀한 의미에서 잉글랜드 종교개혁이란 에드워드왕 치하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전반기 [1520년대부터 1558년까지]에 크랜머의 역할은 핵심적이었습니다. 후반기는 엘리자베스왕 치하[1558-1603]로 이때에 종교개혁 신학과 이에따른 신앙생활방식[신앙활동]이 안정적으로 정착되었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헨리치하에서의 혼인무효소송과 부분적인 개혁지향은 소위 개혁성향의 성직자들과 정치가들이 정치권과 교회지도부에서 영향력있는 자리를 확보하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크랜머의 생애와 신학에 관한 연구는 최근 20여년 동안에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특히 그동안 소위 교파적인 관심[confessional perspectives]에서 연구하고 평가하던 방식을 비판하며, 소위 당시적인 관점-16세기의 상황과 대륙의 종교개혁과의 관계와 비교-에서 연구하고 평가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연구서들은 참고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멕클럭의 저서 <크랜머>는 이제 거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말로 번역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과 내용[신학 포함]을 담은 책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티클 별로 하나씩 번역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크랜머의 생애와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논의할 때, 우리들은 많은 의문과 질문들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이 때마다 문제를 깊이있게 논의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토머스 크랜머와 잉글랜드 종교개혁

    차 례

    1. 대학까지 (1489-1527)
    2. 혼인무효소송에의 참여 (1527-32)
    3. 켄터베리 대주교에 임명되다 (1532-34)
    4. 수장대리의 휘하에서 (1535-42)
    5. 개혁의 후퇴 (1539-42)
    6. 국왕의 지지를 받으며 (1543-47)
    7. 외국의 개혁가들과 종교개혁 교리들 (1547-49)
    8. 공동기도서 (1548-49)
    9. 개혁의 확대 (1549-51)
    10. 최종적인 개혁 프로그램 (1551-53)
    11. 재판들, 전향서들 그리고 순교 (1553-56)
    12. 그 이후와 유산

    토머스 크랜머(1489년7월2일-1556년3월21일)는 헨리8세와 에드워드6세의 치하 동안에 켄터베리 대주교로서,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이끈 지도자였다. 그는 헨리가 그의 부인인 케서린(아라곤 출신)과의 이혼[혼인무효]을 요구한 소송을 지지하였으며, 그 결과로 잉글랜드의 교회는 교황청과 단절되었다. 그는 토머스 크롬웰과 함께 국왕수장권(Royal Supremacy)의 원칙을 지지하였으며, 이에따라 국왕은 그의 영토내에 있는 교회에 대한 주권자로 인정되었다.
    크랜머는 켄터베리 대주교로 재임하는 동안에, 개혁된 잉글랜드교회의 교리적 전례적인 구조들을 정착시켰다. 헨리의 치하에서 크랜머는 교회내의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의 권력투쟁 때문에 급진적인 변화들을 추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최초로 공식적으로 승인받은 모국어[지방어] 예식인 연도와 권고문(Exortation and Litany)을 발행하는데 성공하였다.

    에드워드가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에 크랜머는 중요한 개혁들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두편의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를 집필하고 편찬하였다. 이는 잉글랜드교회에서 사용될 완전한 전례서였다. 또한 그는 잉글랜드로 망명온 대륙의 개혁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성찬례, 성직자의 독신생활, 예배장소에서 성상들의 역할, 그리고 성인숭배와 같은 분야들에 대한 새로운 교리적인 표준들을 발전시켰다. 크랜머는 기도서, 공식설교문집(Homilies) 그리고 기타 출판물들을 통해서 새로운 교리들을 공표하였다.

    로마 가톨릭신자인 메리1세가 왕권을 계승하였을 때, 크랜머는 반역죄와 이단죄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거의 2년여 동안에 구금당하면서 교회당국자들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아 전향서(recantation)를 몇차례 작성하였으며, 최종적으로는 로마 가톨릭신앙에 완전히 전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처형 당일에 그는 극적으로 자신의 전향서들을 철회하며 순교자로 사망하였다. 그의 유산은 <공동기도서>와 그의 작품으로부터 유래된 성공회 신앙선언문인 <39개 신앙조항>을 통해서 잉글랜드교회와 세계성공회 내에 오늘도 살아있다.

    1. 대학까지 (1489-1527)

    크랜머는 1489년에 노팅햄셔의 아슬락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토머스와 아그네스-는 소규모 부농이었지만, 귀족출신은 아니었다. 그들의 큰아들 존은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았으며, 토머스와 그의 동생 에드먼드는 성직자의 길을 준비하였다. 크랜머의 어린시절 교육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아마도 그는 마을의 문법학교[초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14살이 되었을 때(아버지는 2년전에 돌아가셨다), 그는 최근에 설립된 케임브리지의 예수 칼리지(Jesus College)에 진학하였다. 놀랍게도 그는 논리학과 고전문학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는 문학사 과정을 마치는데 8년이나 걸렸다. 이 시기 동안에 그는 중세기 스콜라철학의 저서들을 수집하였으며, 이를 평생 보관하였다. 한편 문학석사 과정을 공부하는 동안에, 그는 이전과는 매우 다르게 인문주의자들, Jacques Lefèvre d’Etaples과 에라스무스를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이 시기에는 특별한 지연없이 3년만에 과정을 마쳤다. 1515년 문학석사 학위를 받은 직후에, 그는 예수칼리지의 평의원(Fellowship)으로 선발되었다.

    크랜머는 MA를 취득한지 얼마되지 않아 조앤(Joan)이라는 여인과 결혼하였다. 그는 아직 사제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의 평의원 직을 상실하였으며, 따라서 거주할 곳을 잃고 말았다. 그는 자신과 아내를 부양하기 위하여 다른 칼리지에서 강사직(reader)로 일하였다. 조앤은 첫 아이를 출산하는 동안에 사망하였으며, 예수칼리지는 크랜머를 평의원으로 복직시킴으로써 그에 대한 관심을 표시하였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1520년에는 이미 사제이자 대학교가 수여하는 설교자들에 포함되었다. 1526년에 그는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케임브리지에 체류하였던 30년 동안 크랜머의 사상과 경험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전통적으로, 그는 성서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인문주의자로 1520년대에 확산되었던 루터의 사상들을 쉽게 수용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방주[난외주석]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크랜머는 초기에 마틴 루터에 대해서는 반감을, 그리고 에라스무스에 대해서는 찬사를 표시하였다. 국왕의 대법관인 울지 추기경은 유럽 각지에 파견하는 외교사절로 에드워드 리, 스티븐 가디너 그리고 리처드 샘슨과 같은 케임브리지의 학자들을 선발하였다. 크랜머도 스페인에 파견하는 외교사절의 수행원으로 선발되었다. 최근에 발견된 두편의 크랜머 편지에는 잉글랜드의 국왕인 헨리8세와 크랜머의 만남을 묘사되어 있었다. 1527년6월 스페인으로부터 귀환한 크랜머는 국왕과 반시간 동안 면담하였다. 그는 국왕을 “가장 친절한 군주”라고 표현하였다.

    2. 혼인무효소송에의 참여 (1527-32)

    헨리8세의 첫번째 결혼은 1502년 그의 형인 아서(Arthur)의 사망에서 시작하였다. 당시에 헨리7세는 아서의 미망인이 된 케서린(아라곤 출신)을 왕위 계승자[헨리8세]와 약혼시켰다. 이 약혼은 곧바로 사망한 형제의 아내와의 결혼을 금지한 성서본문(레위기 18장과 20장)과 관련된 의문들을 제기하였다. 두사람은 1509년에 결혼하였으며, 계속되는 유산과 사산끝에 1516년 딸 메리를 얻었다. 1520년대까지 헨리는 아직도 왕위를 계승할 왕자를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를 하느님의 분노를 나타내는 확실한 표징으로 인식하고 바티칸에 혼인무효를 신청하였다. 그는 울지 추기경에게 이 소송을 집행하는 책임을 맡겼으며, 울지는 대학교의 전문가들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527년부터 크랜머는 케임브리지의 교수직 이외에도 혼인무효 변론을 지원하였다.

    1529 년 여름에 크랜머는 케임브리지에서 발생한 전염병을 피해서 훨탐 홀리 크로스에 있는 지인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바로 이때에 국왕의 지방순행을 동행하던 케임브리지 동료들인 스티븐 가디너와 에드워드 폭스를 만났다. 이 세사람은 혼인무효 소송에 대하여 논의하였으며, 크랜머는 지금까지 추진되었던 로마에서의 법적인 해결을 포기하고 유럽 전역에 있는 대학교 신학자들의 입장을 의뢰할 것을 제의하였다. 가디너와 폭스가 이러한 논의를 국왕에게 보고하였을 때, 헨리는 이러한 제의에 깊은 관심을 표시하였다. 이 때에 국왕이나 대법관인 토머스 모어가 이러한 계획을 분명하게 승인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계획은 집행되었으며, 크랜머는 대학교들로부터 의견들을 수집하기 위하여 로마에 파견된 팀에 합류하도록 요청받았다. 에드워드 폭스는 이에 대한 조사결과를 종합하였으며, 팀은 <대자료모음집>(Collectanea Satis Copiosa)과 <대학교들의 판결집>(The Determination)을 편찬하였다. 이 책들은 국왕이 자신의 영토 내에서 최고의 관할권을 집행한다는 논점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지지하였다.

    크랜머가 최초로 접촉한 대륙의 개혁가는 시몬 그리나에우스(Simon Grynaeus)였다. 그는 스위스의 바젤에 사는 인문주의자로 스위스 개혁가인 훌드리히 츠빙글리와 요하네스 오에콜람파디우스(Johannes Oecolampdius)의 추종자였다. 1531년 여름 그리나에우스는 잉글랜드를 방문하여 그가 국왕과 대륙의 개혁가들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제의하였다. 그는 크랜머와 친분을 쌓기 시작하였으며, 바젤로 귀국한 후에 스트라스부르그의 마틴 부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크랜머를 소개하였다. 그리아에우스의 초기 접촉들은 궁극적으로 크랜머를 스트라스부르그와 스위스 개혁가들과 친분을 갖도록 만들었다.

    1532년1월, 크랜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찰스[카를] 5세의 궁정에 주재하는 잉글랜드 대사직에 임명되었다. 황제가 제국를 순회하였을 때, 크랜머도 그를 따라 라티손(Ratison, 레젠베르크)에 체류하였으며, 루터파 도시인 뉘른베르크를 지날 때에는 종교개혁의 영향들을 처음으로 목격하였다. 그해 여름 제국의회(Imperial Diet)가 뉘른베르크로 이전하였을 때, 크랜머는 이 도시의 교회개혁의 지도자인 안드레아스 오시안더(Anderas Osiander)를 만났다. 이들은 서로 친분을 쌓았으며, 7월 동안에 크랜머는 놀랍게도 오시안더의 부인의 조카인 마가레트와 결혼하였다. 성직자로서의 독신서약을 무시하고 결혼을 하였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행동이었다. 당시에 엄격한 독신생활을 지키지 못하는 일부 성직자들은 배우자를 정부로 맞이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학자들은 이때에 크랜머가 온건한 정도라 하더라도 특정한 루터파 교리들을 수용하였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사적인 생활에서의 이러한 진전[변화 혁신]은 정치적인 생활과 일치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숙모인 케서린의 혼인무효를 지지하도록 황제인 찰스-케서린의 조카-를 설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3. 켄터베리 대주교에 임명되다 (1532-34)

    크랜머가 황제를 따라 이탈리아로 이동하는 동안에, 그는 자신이 사망한 윌리엄 워햄 켄터베리 대주교를 계승할 후임자로 지명되었을 알리는 1532년 10월1일자 국왕의 편지[칙허]를 받았다. 또한 잉글랜드로 귀국하도록 명령받았다. 대주교에 대한 임명은 헨리의 구애를 받고있는 앤 불린의 가문에서 확보하였다. 크랜머의 승진이 런던에 알려졌을 때, 사람들은 크랜머가 교회에서 중요하지 않은 직책을 보유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놀라워했다. 크랜머는 11월19일 만투아를 떠나 1월초에야 런던에 도착하였다. 헨리는 크랜머의 대주교직에 필요한 교황의 교서를 확보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직접 지불하였다. 교서는 쉽게 확보되었다. 왜냐하면 잉글랜드주재 교황대사는 최종적인 결별을 피하기 위하여 잉글랜드의 요구를 수용하라는 로마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교황의 교서는 1533년3월26일경에 도착하였으며, 크랜머는 3월30일 성 스티븐 채플(St Stephen’s Chapel)에서 대주교로 축성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교서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크랜머는 혼인무효 소송절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에 앤의 임신이 알려졌기 때문에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헨리와 앤은 1533년1월24 또는 25일에 몇사람만을 증인으로 삼아 비밀리에 결혼하였으며, 크랜머는 2주후에야 알게 되었다.

    이후의 몇개월 동안에, 대주교와 국왕은 국왕의 혼인문제를 국내의 최고 성직자에 의해서 재판하는 방식에 관한 법적인 절차를 확립하는데 전력하였다. 법적인 절차들에 관한 초안들은 국왕과 대주교 사이에 교환된 편지들에 보존되어 있다. 일단 절차에 대하여 합의를 본 이후부터 크랜머는 곧바로 5월10일에 대주교 법원을 개회하며 헨리와 케서린에게 출석을 요청하였다. 가디너는 국왕 대리인으로 출석하였으나, 케서린은 직접 출석하지도 대리인을 보내지도 않았다. 5월23일 크랜머는 헨리와 케서린의 혼인은 하느님의 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하였다. 심지어 그는 헨리가 즉각적으로 케서린과 별거하지 않는다면 파문을 당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이제 헨리는 자유로이 결혼할 수 있는 신분이 되었으며, 크랜머는 5월28일에 헨리와 앤의 결혼을 유효하다고 확인하였다. 6월1일 크랜머는 직접 앤의 대관식을 주재하고 도유의식을 수행하였으며, 여왕에게 홀과 권장을 전달하였다. 교황 클레멘트7세는 이러한 반항에 몹시 분노하였지만, 잉글랜드와의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을 피하라는 다른 국왕들의 압력 때문에 결정적인 행동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7월9일 교황은 헨리가 9월말까지 앤과의 관계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그와 그의 자문관들(크랜머 포함)을 파문한다고 발표하였다. 헨리는 앤을 그의 부인으로 유지하였으며, 9월7일 앤은 엘리자베스를 출산하였다. 크랜머는 출산 직후에 영아를 세례하였으며, 대부모들중 하나가 되었다.

    케임브리지 시절 이후로 크랜머의 신학적인 입장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평가하기란 어렵다. 그가 계속해서 인문주의를 지지하였다는 증거는 있다. 즉, 그는 전임 대주교가 부여한 에라스무스의 연금을 연장시켰다. 1533년6월 크랜머는 개혁가를 권징(처벌)하며 화형에 처하는 어려운 임무에 직면하였다. 존 프리트(John Frith)는 성찬에 관한 그의 입장 때문에 사형판결을 받았다. 크랜머는 직접 그를 설득하였지만 그의 입장을 바꾸지 못하였다. 크랜머는 프리트의 급진적인 입장들을 거부하였지만, 1534년에 이르러 그는 로마와 결별하였으며 그리고 새로운 신학을 정립하였음을 분명하게 표시하였다. 그는 자신의 교구에 있는 보수적인 인물들을 휴 라티머와 같은 새로운 사상을 추구하는 인물들로 교체하였다. 또한 그는 신앙적인 논쟁들에 개입하여 개혁가들을 지지함으로써, 로마와의 연결을 유지하려는 신앙적 보수파들을 실망시켰다.

    4. 수장대리의 휘하에서 (1535-38)

    크랜머는 자신의 대교구에서 주교들로부터 즉각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는 교회법에 따른 방문조사(visitation)를 실행하였을 때, 보수파 주교들은 그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1535년 크랜머는 일부 주교들-존 스토키슬리, 존 롱랜드와 스티븐 가디너 등등-과 대립하였다. 이들은 국왕수장권법에서 대주교의 역할을 규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크랜머의 권한관 직함[칭호]을 거부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국왕의 최고대신인 토머스 크롬웰은 수장대리직(vice-gerent)-왕국교회의 수장 대리인-을 신설하며 자신이 취임하였다. 따라서 크랜머는 국왕의 교회관할권에 행사하는 수장대리인 크롬웰에 압도되었다. 그러나 크랜머가 자신의 하급적인 지위에 불만을 표현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뛰어난 학자였지만, 같은 성직자인 반대파들을 압도할 수 있는 정치적인 능력을 갖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제들은 크롬웰에게 의존하였다.

    1536년1월29일 앤 여왕이 아들을 유산하였을 때, 국왕은 케서린과의 결혼생활 동안에 자신을 괴롭혔던 성서의 금지명령을 또다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유산후 얼마되지 않아 국왕은 제인 시모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4월24일에 이르로 그는 크롬웰에게 이혼을 준비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알지도 못하고 크랜머는 4월22일까지 사소한 문제들에 관하여 크롬웰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5월2일 앤은 런던탑에 수감되엇으며, 크랜머는 크롬웰의 긴급소환을 받았다. 바로 다음날 크랜머는 여왕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을 강조하며 여왕의 유죄에 대한 자신의 의구심들을 표현하는 장문의 편지를 국왕에게 보냈다. 편지가 전달된 이후에 크랜머는 앤과의 혼인을 종결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5월16일 그는 런던탑에서 앤을 면담하고, 그의 고해성사를 집례하였으며, 다음날 앤과의 혼인이 무효였다고 발표하였다. 이틀뒤 앤은 처형되었다.

    수장대리직은 국왕의 통제하에 개혁을 추진하였다.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에 균형이 형성되었으며, 이는 헨리 치하의 왕국교회의 교리들을 규정하는 첫번째 시도인 <10개 신앙조항>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첫 다섯개 조항들은 개혁가들의 영향을 수용하여 성사를 기존의 7가지에서 3가지-세례, 성찬 그리고 고해-로 축소하였다. 후반 다섯개 조항은 성상들, 성인들, 예식들과 의식들, 그리고 연옥의 역할들을 설명하였으며, 이는 전통주의자들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이 문서를 초안하였던 두가지 문서들을 보면, 서로 다른 신학자 팀이 작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의 경쟁이 서로 다른 교정문서-하나는 크랜머, 다른 하나는 더럼주교인 커트버트 터스톨 주도로-에서 표현되었다. 최종적인 문서는 양진영을 만족시키면서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7월11일까지 크랜머, 크롬웰, 그리고 성직자회의(Convocation)는 <10개 신앙조항>에 동의하였다.

    1536년 가을 잉글랜드의 북부지방에서는 일련의 폭동들이 발발하였다. 이를 전체적으로 <은총의 순례> 반란이라고 불렀으며, 헨리의 정책에 대한 가장 심각한 도전이었다. 크롬웰과 크랜머는 반란자들의 분노의 표적이었다. 크롬웰과 국왕은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하였으며, 크랜머는 조용히 지냈다. 헨리의 왕정이 안전하다고 확신하였을 때에, 정부는 <10개 신앙조항>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몇개월의 논쟁끝에 나온 결실은 <그리스도인의 규범>-비공식적으로는 처음부터 주교신앙서(Bishop’s Book)라고 알려졌다-이었다. 이 책은 1537년2월 수장대리직이 최초로 소집한 왕국교회 교회회의[켄터베리와 요크의 통합 성직자회의]에서 처음으로 제안되었다. 그러나 교회회의가 진전됨에 따라, 크랜머와 폭스가 의장직과 조정직을 맡았다. 폭스는 최종적인 편집을 거의 모두 맡았으며, 이 책은 9월말에 출판되었다.

    출판된 후에도 이 책의 지위는 여전히 모호하였다. 왜냐하면 국왕은 당시에 이 책을 완전히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초안에 대한 편지에서 헨리는 책을 독서하지 못하였지만 출판을 지지한다고 말하였다. 그의 관심은 온통 제인 시모어의 임신과, 곧이어 출생할 왕세자에 집중되었다. 제인은 11월2일에 왕세자를 출산하고 며칠후에 사망하였다. 그녀의 장례식은 11월12일에 거행되었다. 바로 이달에 헨리는 주교신앙서를 읽기 시작하였다. 그는 수정안을 크랜머, 샘슨 그리고 다른 주교들에게 보냈다. 국왕에 대한 크랜머의 응답은 다른 주교들 보다 훨씬 대결적으로, 국왕에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이 응답들은 이신칭의[신앙의인화] 또는 믿음으로만(sola fide)과 예정론과 같은 종교개혁 신학을 지지하는 분명한 진술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응답은 국왕을 설득시키지 못하였다. 새로운 신앙진술문은 1543년에서야 국왕신앙서(King’s Book)로 출판되었다.

    1538년 국왕과 크롬웰은 루터파 제후들과 정치적 신앙적 동맹을 결성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할 준비를 하였다. 헨리는 1537년 여름부터 쉬마칼트동맹으로부터 새로운 외교사절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루터파들은 이러한 제안을 환영하며, 독일의 각 시에서 파견된 공동대표단-마틴 루터의 동지인 프리드리히 미코니우스(Friedrich Myconius) 포함-을 잉글랜드에 파견하였다. 대표단은 1538년5월27일에 잉글랜드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국왕과 크롬웰, 크랜머와의 첫 모임 이후에, 람베스궁으로 옮겨 크랜머의 주재하에 신학적인 차이점들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차이점들에 합의는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먼저 대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크롬웰이 너무 바빠 빠졌기 때문이며, 두번째로 잉글랜드 대표단이 보수파와 개혁파로 동등하게 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대화는 여름 내내 지리하게 지연되었으며, 독일대표단은 크랜머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협상은 국왕의 지명자에 의해서 치명적으로 무력화되었다. 크랜머의 동료이자 추밀원 위원이며 국왕의 측근이었던 에드워드 폭스가 사망한 자리에 국왕은 크랜머의 보수파 경쟁자인 커트버트 턴스톨을 지명하였기 때문이었다. 8월5일 독일대표단은 국왕에 특별히 세가지 문제-성직자의 의무적인 독신생활, 성찬례에서 포도주의 배찬금지, 별세자를 위한 사적인 미사-를 제기하였다. 턴스톨은 이 문제에 개입하여 국왕의 결정에 영향을 끼쳤다. 결과는 독일대표단의 최대 관심사들에 대한 철저한 거부였다. 크랜머는 독일대표단들에게 위기에 처한 “잉글랜드에 있는 수천의 영혼들을 고려하여” 협상을 계속하도록 간청하였지만, 그들은 구체적인 성과를 전혀 확보하지 못하고 10월1일 출국하였다.

    5. 개혁의 후퇴 (1539-42)

    대륙의 개혁가인 멜란히톤은 헨리왕이 자신을 만나기를 고대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1539년초 멜란히톤은 헨리에게 몇차례 편지를 보내며, 그의 신앙관-특히 성직자의 독신생활-을 비판하였다. 4월말 또하나의 독일대표단이 멜란히톤의 권고를 받아 잉글랜드를 방문하였다. 크롬웰은 국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새로운 루터파 대표단의 임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국왕은 입장을 바꾸기 시작하였으며, 루터파와의 협상 보다는 잉글랜드내의 보수적인 의견들을 결집하는데 집중하였다. 1539년4월28일 3년만에 의회가 개회되었다. 크랜머는 출석하였지만, 크롬웰은 병환으로 참석할 수 없었다. 5월5일 귀족원은 교리를 심의하고 결정한 위원회를 관례대로 보수파와 개혁파의 균형으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전면적인 개정에 필요한 구체적인 활동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였다. 5월16일 노퍽 공작은 위원회가 아무런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며, 귀족원이 직접 6가지의 교리적 논점들을 심의하자고 제의하였다. 이 논점들이 곧 6개 신앙조항법의 기본이 되었다. 그들은 실재적 현존(real presence), 성직자의 독신생활, 고해성사의 필수성, 사제에 대한 사적인 죄의 고백과 같은 교리들에 대한 보수적인 해석을 확언하였다. 6개 신앙조항법이 의회에서 통과될 무렵에 크랜머는 아내와 자녀들을 해외로 피신시켰다. 이 때까지 가족들은 아마도 켄트 지방에 있는 포드궁에 은밀하게 거주하고 있었다. 이 법은 6월말에 의회에서 제정되었으며, 이를 완강하게 반대하였던 라티머와 니콜라스 샥스톤은 각각 교구장직을 사임하였다.

    개혁가들의 패배는 단기적이었다. 9월에 이르러[1539] 헨리는 이 법률의 결과들과 그 제정자들에게 불만을 나타내었다. 항상 충실하였던 크랜머와 크롬웰이 다시 총애를 받기 시작하였다. 국왕은 대주교에게 공인성서(Great Bible)의 새로운 서문을 집필하도록 요청하였다. 이 성서는 1539년 4월에 크롬웰의 지휘로 처음으로 출판된 영문 번역성서였다. 서문은 독자들에게 말하는 설교의 형식이었다. 한편 크롬웰은 클리브공국 제후의 동생인 앤과 헨리와의 혼인계획을 국왕으로 승인받았기 때문에 매우 기뻐하였다. 크롬웰은 이 결혼으로 쉬마칼트 동맹과의 관계가 복원될 수 있다고 믿었다. 헨리는 1540년1월 앤을 처음 만났을 때 몹시 실망하였지만, 크랜머가 집례한 혼인예식으로 마지못해 결혼하였다. 그러나 헨리는 곧 이혼을 요청함으로써 혼인은 커다란 재난이 되었다. 이 때문에 헨리는 난처한 입장에 놓이고, 크롬웰은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그의 옛 정적들은 약화된 크롬웰의 입장을 이용하여 6월10일 그를 체포하였다. 크롬웰은 곧 그의 모든 친구들-크랜머 포함-의 지지를 상실하였다. 그러나 크랜머는 앤 불린을 위하여 국왕에게 편지를 썻던 것처럼, 이제 크롬웰의 과거 공적들을 옹호하는 편지를 국왕에게 보냈다. 7월9일에 소집된 수장대리직 주재의 교회회의-이제 크랜머와 가디너가 주재-는 앤과 헨리와의 혼인을 무효로 선언하였다.

    혼인무효 이후 7월28일에 크롬웰은 처형되었다. 이제 크랜머는 누구와도 짐을 나누어 질 수 없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헨리 치하의 나머지 기간 동안에 크랜머는 전적으로 국왕의 권위에 의존하였다. 1541년6월말 헨리는 새로운 부인 케서린 하워드와 함께 처음으로 북부지방을 순행하였다. 크랜머는 추밀원 위원으로서 런던에 남아 동료들인 대법관 토머스 오들리와 허트퍼드 백작인 에드워드 시모어와 함께 국정업무를 맡고 있었다. 크랜머는 이처럼 왕국교회 이외의 중책을 맡은 것은 처음이었다. 10월에 국왕과 여왕이 여전히 순행중일 때, 존 라셀이라는 한 개혁가가 크랜머에게 케서린의 혼외정사를 폭로하였다. 크랜머는 이 사실을 오들리와 시모어에게 알리며 헨리의 귀환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국왕의 분노를 두려워한 오들리와 시모어는 크랜머에게 이 사실을 국왕에게 알리도록 권유하였다. 크랜머는 모든 성인의 날을 기념하는 미사 때에 이 사실을 국왕에게 알렸다. 이에따른 조사에서 혼외정사의 진실이 드러났으며, 케서린은 1542년2월에 처형되었다.

    6. 국왕의 지지를 받으며 (1543-47)

    1543년 켄트 지방의 몇몇 보수파 성직자들은 개혁성향인 두 성직자 리터드 터너와 존 블랜드를 추밀원에 고발하며 비난하였다. 이들은 추밀원에 제출할 고발장을 준비하였지만, 마지막 순간에 스티븐 가디너의 조카인 저메인 가디너에 의해서 추가사항들을 보충하였다. 이 새로운 고발장은 크랜머를 공격하며 1541년부터 대주교의 범죄들을 적시하였다. 이 문서와 이후의 행동들은 소위 <대성당 사제들의 음모>(Prebendaries’ Plot)의 토대가 되었다. 고발장은 런던에 있는 추밀원에 전달되었으며, 아마도 1543년4월22일에 독회되었다. 확실히 국왕은 그날밤에 크랜머에 대한 고발장을 보았다. 그러나 대주교는 자신에 대한 고발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람베스궁에 있던 그의 조사관들은 터너의 사건을 자세히 조사한 후에 무죄로 방면하였다. 이는 보수파들을 격분시켰다.

    크랜머에 대한 음모가 진행되는 동안에. 개혁가들은 또다른 전선에서 공격을 받았다. 4월20일 성직자회의는 주교신앙서의 개정을 논의하기 위하여 다시 소집되었다. 크랜머는 소위원회들을 주재하였지만, 보수파들은 이신칭의[신앙의인화]를 포함한 개혁사상들을 삭제할 수 있었다. 5월5일 새로운 개정서인 <그리스도인의 필수적인 교리와 신앙>(A Necessary Doctrine and Erudition for any Christian Man)이 출판되었다. 교리적으로 이 책은 주교신앙서 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다. 5월10일 개혁가들은 또다른 타격을 받았다. 의회는 참신앙증진법을 제정하며, “불순한 서적들”을 파기시키고 영문번역 성서의 독서를 귀족 신분인 자들로 제한하였다. 5월부터 8월까지 개혁가들은 조사를 받고 전향하거나 구금되었다.

    5개월동안 헨리는 대주교에 대한 고발에 대하여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마침내 국왕은 직접 이 사실을 대주교에게 알렸다. 크랜머의 비서인 랄프 모리스에 의하면, 1543년9월 어느날 국왕은 크랜머에게 자신의 고발장을 요약한 문서를 보여주었다. 이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최고 조사관으로 크랜머를 임명하였다. 기습적인 수색으로 증거들을 수집하고 주모자들을 밝혀냈다. 전형적으로 크랜머는 음모에 가담한 성직자들을 즉각적으로 굴복시켰지만, 결국에는 용서하고 그들의 본직을 수행하도록 허용하였다. 헨리는 크랜머에 대한 신뢰의 표시로 자신의 반지를 주었다. 11월말 추밀원이 크랜머를 체포하려고 하였을 때에, 귀족들은 그에 대한 국왕의 신뢰를 알아차리고 기겁하였다. 크랜머의 승리는 저메인 가디너의 처형과 두명의 보조자들을 구속시키는 것으로 끝났다.

    크랜머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환경속에서 교회를 개혁하는 작업, 특히 전례의 개혁을 조용히 추진하였다. 1544년5월27일 최초의 공식적인 지방어 예식 즉, <권고문과 연도>로 알려진 중재기도의 순행예식을 출판하였다. 이 예식은 약간 수정되었지만 오늘날에도 공동기도서에 남아있다. 전통적인 연도는 성인에 대한 기원을 사용하였지만, 크랜머는 본문에서 이러한 기원을 삭제함으로써 이러한 특색을 철저하게 개혁하였다. 이제 더 많은 개혁가들이 평민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따라서 6개 신앙조항법과 참신앙 증진법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새로운 법률들을 도입하였다.

    1546년 가디너, 노퍽공작, 대법관인 릿슬리(Thoma Wriothesley) 그리고 런던주교인 에드먼드 보너를 포함한 보수파 진영은 개혁파들에 대한 최종적인 도전을 시도하였다. 크랜머와 연계된 몇몇 개혁가들을 목표하였다. 라셀과 같은 몇몇 개혁가들이 화형으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강력한 개혁성향의 귀족들인 에드워드 시모어와 존 더들리가 여름에 해외로부터 귀국하였으며, 이들은 보수파의 득세를 저지시킬 수 있었다. 가을에 발생한 두가지 사건은 이러한 균형을 파괴하였다. 가디너는 주교관할 사유지들[별장]을 국왕과 교환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실각하였으며, 노퍽공작의 아들은 반역죄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공작에 크랜머가 개입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또한 이제 국왕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됨에 따라 더이상의 음모는 없었다. 1547년1월28일 크랜머는 국왕에 대한 마지막 의무를 실행하였다. 그는 마지막 예식들[종도성사]을 실행하는 대신에 헨리의 손을 꼭 붙잡고 개혁된 신앙선언문을 낭독하였다. 크랜머는 헨리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였으며,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는 의미에서 수염을 길렀다는 얘기도 있었다. 수염은 또한 과거와의 단절을 나타내는 표징이었다. 대륙의 개혁가들은 옛 교회를 거부하는 의미로 수염을 길렀으며, 이제 이러한 의미의 수염은 잉글랜드에서도 널리 이해되었다. 1월31일 그는 국왕의 마지막 유언을 집행하는 인물중 하나로 시모어를 호국경(Lord Protector)으로 지명하고 소년왕인 에드워드6세를 맞이하였다.

    7. 외국의 개혁가들과 종교개혁 교리들 (1547-49)

    시모어의 섭정 동안에 개혁가들은 이제 권력을 장악한 정권의 일부가 되었다. 각 관구들[대교구들]에 대한 국왕의 방문조사는 1547년8월에 시행되었으며, 방문조사를 받는 각 전도구교회들은 <공식설교집>(Homilies)을 확보하도록 지시받았다. 이 책은 12편의 설교문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중에서 4편은 크랜머가 집필하였다. 신앙의 의인화[이신칭의]에 대한 크랜머의 주장에 대하여 가디너는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또한 “신앙의 결과로 나타나는 선행에 관한 설교”에서 크랜머는 수도원제도, 그리고 전례중의 암송들과 의식들에 수반되었던 여러가지 개인적인 행동들을 중요시하였던 관행들을 공격하였다. 따라서 그는 필수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선행의 범위를 크게 축소시키며 신앙의 최우선성을 강화시켰다. 방문조사를 받은 각 전도구교회들은 “의심스러운 신심을 조장하는 성상들을 모두 제거하라”는 국왕명령문(Injunctions)을 게시하였다.

    한편 크랜머의 성찬이해들-이미 공식적인 가톨릭교리에서 이탈하였다-은 대륙의 개혁가들로부터 또 한차례의 영향을 받았다. 크랜머는 쉬마칼트동맹과의 첫 접촉이후로 마틴 부처와 지속적으로 접촉하였다. 그러나 황제 찰스5세가 뮐베르크에서 승리함에 따라, 이제 잉글랜드만이 유일한 프로테스탄트 왕국으로 남아 핍박받는 대륙의 개혁가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함으로써, 크랜머와 부처와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다. 크랜머는 부처에게 성찬신학에 관한 질문들을 포함한 편지(지금은 유실되었다)를 보냈다. 1547년11월28일자 답신에서 부처는 실재적 현존을 거부하며, 화체론과 성찬숭배를 정죄하였다. 이 편지는 잉글랜드로 망명온 두명의 이탈리아인 신학자 피터 마터와 베르나디노 오키노에 의해서 크랜머에게 전달되었다. 마터는 또한 존 크리소스톰의 서신으로 추정되었던 <Ad Caesarium Monachum>을 갖고 왔었다. 이 서신은 실재적 현존을 반대하는 초기교회의 주장을 제공하였다. 이 문서들은 성찬에 관한 크랜머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1549년3월 스트라스보르그 시당국은 마틴 부처와 파울 파기우스에게 시를 떠나도록 요청하였다. 크랜머는 즉시 이들에게 잉글랜드로 오도록 초청하며, 잉글랜드 대학교들의 교수직을 약속하였다. 이들은 4월25일에 잉글랜드에 도착하였으며, 크랜머는 특히 18년간의 서신교환후에 처음으로 부처를 직접 만나 매우 기뻤다. 그는 이들 신학자들이 전례와 교리의 개혁을 지원하며, 새로운 세대들을 훈련시키기를 기대하였다. 이 밖에도 크랜머의 초청을 받은 개혁가들에는 폴란드 개혁가인 라스키 등이 있었지만, 크랜머는 오시안더와 멜랑히톤을 설득하는데 실패하였다.

    8. 공동기도서 (1548-9)

    예배에서 영어의 사용이 확산됨에 따라, 왕국교회를 위한 완전한 통일적인 전례서의 필요성이 분명해졌다. 전례서를 만든 첫번째 모임은 1548년9월에 과거의 쳇시수도원과 윈저성에서 개최되었다. 참가자의 명단은 부분적으로만 알려졌지만, 그 구성원은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였다. 이 회의들 이후 12월14일과 19일 사이에 개최된 귀족원에서 성찬에 관한 토론이 있었다. 크랜머는 이 토론에서 자신이 실재적 현존의 교리를 이미 폐기하였으며, 그리고 성찬의 현존은 오직 신앙적[영적]일 뿐이라는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의회는 성탄절 직후에 전례통일법(1549)을 제정함으로써 기도서의 출판을 지지하였다. 이와함께 성직자의 결혼도 법적으로 허용하였다.

    크랜머가 기도서의 제작에서 어느정도로 직접 편집하였는가를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오늘날까지 많은 전례학자들은 그가 사용하였던 원자료들-솔즈베리전례, 헤르만 폰 비트, 그리고 오시안더와 유스투스 요나스를 포함한 여러 편의 루터파 자료들-을 밝혀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이 책을 편찬한 방식과 함께 작업한 동료들을 밝혀내는 일이다. 그러나 그를 도와주었던 인물들을 알 수 없다 하더라도, 크랜머가 이 책의 편집과 전체적인 구조를 결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새로운 기도서는 1549년6월9일부터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규정되었다. 이는 곧바로 데븐과 콘웰 지방의 반란-기도서반란-을 촉발시켰다. 7월초에 이르러 폭동은 잉글랜드의 동부지방으로 확산되었다. 부처는 이제막 케임브리지에서 강좌직을 맡자마자 폭동으로 급히 피신하였다. 반란군들은 6개 신앙조항, 라틴어 미사와 빵만의 배찬, 그리고 연옥에 체류하는 영혼들을 위한 기도의 복원을 주장하였으며, 또한 수도원의 재건을 요구하였다. 크랜머는 국왕에게 보낸 편지에서이들의 요구를 강력히 반대하며 반란군들의 사악함을 비난하였다. 7월21일 크랜머는 성바울로 대성당에서 진압군을 징집하면서 공식적인 왕국교회을 수호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 설교의 초고-유일하게 잔존하는 그의 설교문이다-는 그가 반란군을 다루는 문제를 피터 마터와 논의하였음을 보여주었다.

    9. 개혁의 확대 (1549-51)

    기도서반란과 다른 사건들은 시모어 섭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추밀원은 양분되었으며, 반대파들은 존 더들리를 중심으로 시모어를 축출하려고 결집하였다. 크랜머와 다른 두 위원들-윌리엄 페지트와 토머스 스미스-은 처음에는 시모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양진영은 급박하게 서신을 여러차례 교환한 후, 무혈 쿠데타는 1549년10월13일 시모머의 호국경 직을 종결지었다. 신앙적으로 보수파 정치인들이 더들리의 쿠데타를 지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혁가들은 여전히 새로운 정부를 장악하였으며, 잉글랜드 종교개혁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서모어는 런던탑에 구금되었지만, 1550년2월6일에 석방되어 추밀원에 복귀하였다. 크랜머는 자신의 옛 전속사제였던 니콜라스 리들리 주교를 로체스터에서 런던교구로 승진시켰으며, 존 포네트를 로체스터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제 보수적인 성직자들은 퇴출되고 개혁가들로 대체되었다.

    크랜머와 부처가 서로 협력하고 협의한 첫번째 결실은 <성직서품예식서>(Ordinal)-사제를 서품하는 예식-이었다. 이 예식은 첫번째 기도서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1550년야 출판되었다. 크랜머는 부처의 초안을 채택하여 부제, 사제 그리고 주교를 위임하는 세가지 예식을 창작하였다. 같은 해에 크랜머는 기도서에 포함된 성찬신학을 반공식적으로 설명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에 관한 진실하고 보편적인 교리에 대한 변론>(Defence of the True and Catholic Doctrine of the Sacrament of the Body and Blood of Christ)을 출판하였다. 이것은 속표지에 최초로 크랜머의 이름을[크랜머의 이름으로 집필된 최초의 완성본이었다] 담은 완전한 책이었다. 이 책의 서문에서 크랜머는 로마와 자신과의 싸움을 요약하면서, 잘 알려진 문구로 “묵주기도, 면죄부, 순례 그리고 교황식(popish) 신앙활동들”을 잡초에 비유하면서, 이 잡초들의 뿌리는 화체론, 실재적 현존 그리고 미사의 희생적 성격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부처는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진전을 지원하면서도, 그는 진행속도를 염려하였다. 부처와 파기우스는 1549년 기도서가 특별히 진전된 내용이 아니라고 인식하였지만, 크랜머는 이 첫번째 형태를 잠정적이며 오직 첫번째 단계라고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1550년 겨울[1-2월]에 이르러 부처는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크랜머는 그를 소외시키지 않고 지속적으로 접촉하였다. 이러한 관심은 전례복논쟁 동안에 보상받았다. 이 사건은 최근에 취리히에서 돌아온 존 후퍼-하인리히 불링거의 추종자-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크랜머의 기도서와 성직서품 예식서에 불만이었다. 특히 의식들과 전례복들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1550년5월15일 추밀원은 그를 글로스터교구의 주교로 선택하였을 때, 그는 예식서에 규정된 전례복들을 착용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는 대륙의 개혁가인 얀 라스키 등의 지지를 획득하였다. 라스키는 대륙의 프로테스탄트 피난민들을 위하여 특별히 지정된 예배장소인 런던의 외국인교회(stranger church)의 지도자였다. 그의 교회의 치리형태와 전례는 크랜머의 그것들 보다는 훨씬 더 개혁적이었다. 그러나 부처와 베리미글리(피터 마터)는 후퍼의 반대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속도조절(timing)과 권위를 주장하는 크랜머의 논점을 지지하였다. 크랜머와 리들리는 자신의 확고한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결국 후퍼는 구금당한 후에야 굴복하였다. 1551년3월8일 그는 공식적인 <성직서품 예식서>에 따라 주교직에 축성되었으며, 국왕 앞에서 주교의 전례복들에 대하여 설교하였다. 정부의 권위로 조심스런 단계들을 통해서 개혁을 추진한다는 크랜머의 입장은 유지되었다.

    10. 최종적인 개혁 프로그램 (1551-53)

    1551년10월16일 시모어가 반역죄로 체포된 이후, 정치권에서 크랜머의 역할은 점차 약화되었다. 12월에 시모어는 재판을 받았을 때에, 반역죄는 취소되었지만 중범죄에 대한 유죄를 판결받았으며, 성급하게 1552년1월22일에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크랜머와 더들리의 불화를 알리는 시작이었다. 이 해에 섭정은 교회의 재산을 점진적으로 침탈하였기 때문에 두사람 사이의 불화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나 이시기의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도 크랜머는 동시에 세가지 개혁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즉, 교회법의 개정, 기도서의 개정, 그리고 교리선언문의 작성.

    왕국교회의 치리를 규정하였던 본래의 로마 교회법은 로마와의 단교이후 개정이 분명하게 필요하였다. 헨리 치하에서 몇차례 개정을 시도하였지만, 이러한 계획들은 급격한 교회개혁으로 지연되었다. 종교개혁이 안정을 찾음에 따라, 크랜머는 이 작업을 추진할 위원회를 1551년12월에 구성하였다. 그는 피터 마터를 위원회에 포함시켰으며, 또한 라스키와 후퍼에게도 참여를 요청하였다. 크랜머와 마터는 잉글랜드교회의 개혁된 교회법의 성공적인 실행이 국제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크랜머는 트렌트 교회회의-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응-를 대항하기 위하여 잉글랜드의 주도하에 유럽의 모든 종교개혁 교회들을 결집시키려고 계획하였다. 1552년3월 크랜머는 대륙의 최고 개혁가들인 불링거, 존 칼빈, 그리고 멜랑히톤을 잉글랜드로 초청하며, 전세계적인 교회회의를 개최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한 응답들은 실망적이었다. 멜랑히톤은 응답하지 않았으며, 불링거는 멜랑히톤과 자신이 황제와 루터파 제후들 사이의 전쟁으로 독일을 떠날 수 없다고 응답하였다. 한편 칼빈은 이에 대하여 열성을 보이면서도 초청에 응하지 어렵다고 대답하였다. 크랜머는 칼빈의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 “우리는 잉글랜드교회를 최대한으로 개혁할 것이며, 성서의 모델을 따라 그 교리와 법률들을 개정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고 말하였다. 교회법 개정작업에 대한 일부 사본에는 크랜머와 마터의 교정과 논평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종적인 개정안이 의회에 제출되었을 때, 크랜머와 더들리의 불화는 돌이킬 수 없었으며, 더들리는 귀족원에서 교회법안을 사실상 폐기시켰다.

    첫 기도서와 마찬가지로, 개정된 기도서의 작업과정과 참여자들에 대해서도 모호하다. 그러나 크랜머가 개정과정을 주관하고 지도한 것은 분명하였다. 개정작업은 켄터베리 대교구 성직자회의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던 1549년말에 시작되었다. 1550년말에는 마터와 부처에게 기도서의 개정방향에 대하여 문의하였으며, 그들의 응답은 개정기도서에 상당히 반영되었다. 영적인 현존이라는 입장을 보다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배수자에게 성찬을 배찬하는 문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꾸었다. 새로운 지시문은 일상용 빵을 성찬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사용하고 남은 빵과 포도주를 사목자가 사용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성찬과 물질적인 현존과의 관계를 분리시켰다. 또한 새로운 기도서는 연옥론의 교리를 지지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별세자를 위한 기도들을 모두 삭제하였다. 이 기도서의 사용을 승인하는 1552년 전례통일법은 11월1일부터 이 기도서만을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거의 최종적인 순간에 더들리의 개입으로 확정판이 공식적으로 인쇄되지 못하였다. 그는 북부지방을 순행하는 도중에 뉴카슬에서 활동하는 존 녹스의 설교에 감명을 받아, 그를 국왕 전속사제로 선발하여 개혁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녹스는 국왕 앞에서의 설교에서 영성체 동안에 무릎꿇는 자세를 공격하였다. 1552년9월27일 추밀원은 새로운 기도서의 인쇄를 중단시키고, 크랜머에게 이를 개정하도록 요구하였다. 크랜머는 장문의 편지에서 전례서의 개정은 의회와 국왕의 승인으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0월22일 추밀원은 전례서를 그대로 유지하고, 대신에 무릎꿇는 자세가 어떠한 숭배를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소위 “검정색 지시문”(Black Rubric)을 추가하기로 결정하였다.

    마찬가지로 42개 신앙조항의 작업에 대해서도 모호하다. 1549년12월에 이미 대주교는 그의 주교들에게 특정한 교리적인 조항들에 서명하도록 요구하였다. 1551년에 크랜머는 주교들에게 한 신앙조항을 제시하였지만, 이 문서의 지위에 대해서는 모호하다. 크랜머는 교회법 개정작업에 진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조항을 작성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의 교회회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후에야 신앙조항에 관심을 가졌다. 1552년 9월에 이르러 크랜머와 존 체크(John Cheke)는 신앙조항의 초안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체크는 학자적인 동료로서 신앙조항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임무를 맡았다. 마침내 42개 신앙조항이 1553년5월에 출판되었을 때, 이 책의 표지는 신앙조항이 성직자회의의 합의와 국왕의 승인을 받았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사실상 그렇지 않았다. 이러한 실책은 대주교와 추밀원 사이의 잘못된 소통의 결과였을 것이다. 크랜머는 이를 추밀원에 불평하였지만, 당국의 응답은 신앙조항이 성직자회의의 시기 동안에 제작되었다고 지적함으로써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하였다. 추밀원은 크랜머에게 신앙조항에 대하여 주교들의 서명을 받으라는 불운한 과제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많은 주교들은 이를 반대하며 이 책의 표지의 비정상적인 성격을 지적하였다. 크랜머가 이러한 책무를 수행하는 동안에 이를 무효화시킬 수 있는 커다란 사건이 전개되고 있었다.

    11. 재판들, 전향서들 그리고 순교 (1553-56)

    에드워드6세는 폐결핵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추밀원 위원들은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들었다. 1553년5월 추밀원은 대륙의 개혁가들에게 에드워드의 건강이 나아지고 있다고 안심시키는 편지들을 보냈다. 그중 하나가 멜랑히톤에게 보내는 것으로 1551년 2월 부처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흠정교수직에 초대하는 편지였다. 이전에도 헨리와 크랜머는 멜랑히톤의 방문을 설득시키는데 실패하였다. 이번 초청에서는 추밀원이 그의 여행경비를 선불로 지불하는 열렬한 노력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멜랑히톤은 잉글랜드로 오지 않았다. 한편 추밀원은 메리-헨리와 케서린의 딸이자 로마 가톨릭신자-를 대신하여 제인 그레이 부인-에드워드의 사촌이자 프로테스탄트 신자-을 왕권계승자로 지명하기 위하여 몇몇 판사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1553년6월17일 국왕은 그의 유언장에서 제3차 계승법과는 다르게 제인을 계승자로 지명하였다. 크랜머는 에드워드와의 독대를 시도하였지만, 거부당하고 추밀원 위원들과 함께 국왕을 알련할 수 밖에 없었다. 에드워드는 그에게 자신의 유언장을 지지하라고 말하였다. 크랜머가 제인을 지지하기로 결정한 것은 6월19일 이전이었으며, 이 날에 새로운 왕위계승을 승인하기 위하여 성직자회의를 소비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받았다.

    7월 중순에 이르러 각 지방에서 메리의 왕위계승을 요구하는 심각한 반란들이 발생하였으며, 추밀원에서 제인에 대한 지지는 붕괴되었다. 곧이어 메리가 여왕으로 선포되었을 때, 더들리와 리들리, 체크 그리고 제인의 아버지인 서퍽공작은 구속되었다. 그러나 대주교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 8월8일 크랜머는 에드워드의 장례식을 기도서의 예식들을 따라 거행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피터 마터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에게 잉글랜드를 떠나도록 충고하였다. 개혁파 주교들은 직위를 상실하였고, 보수파 성직자들-보너 등등-은 이전의 직책으로 복원되었다. 크랜머는 논박없이 무너지지 않았다. 켄터베리 대성당에서 거행하는 미사를 그가 승인하였다는 소문이 나돌았을 때, 크랜머는 이러한 소문이 거짓이라고 선언하며, “우리의 전임 국왕인 에드워드6세 치하의 모든 교리들과 신앙은 잉글랜드에서 지난 수천년 동안 지켜온 것들 보다 훨씬 순수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었다”고 말하였다. 당연히 정부는 그랜머의 선언문을 선동죄에 해당한다고 간주하고, 9월14일 성실청에서 개최되는 추밀원에 출석할 것을 요구하였다. 바로 이날에 크랜머는 마터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크랜머는 곧바로 런던탑에 수감되었으며, 그곳에서 휴 라티머와 니콜라스 리들리와 재회하였다.

    1553년11월13일 크랜머와 다른 4사람은 재판에서 반역죄에 대한 유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1554년 2월내내 제인을 지지하였던 정치지도자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이제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을 처리할 시간이었다. 추밀원은 1554년3월8일 크랜머와 리들리, 라티머를 이단죄에 대한 두번째 재판을 위하여 옥스퍼드의 보카도 감옥으로 이전시키도록 명령하였다. 이시기 동안에 크랜머는 스트라스부르크로 피신한 마터에게 편지를 몰래 보낼 수 있었다. 이 편지가 그가 친필로 쓴 것들 중에서 잔존하는 마지막 문서였다. 그는 교회의 절망적인 상황이 곧 하느님의 구조를 받을 것이라는 증거라고 말하며, “우리가 끝까지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다’고 썼다. 크랜머는 1555년9월12일에 재판을 시작할 때까지 17개월 동안에 격리되어 있었다. 재판은 잉글랜드에서 개최되었지만, 이는 교황청 관할로 최종적인 판결은 로마로부터 전달되었다. 크랜머는 심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는 자신에게 부과된 모든 사실을 인정하였지만, 반역죄와 불복종 또는 이단죄를 부인하였다. 크랜머의 재판 직후에 시작된 라티머와 리들리의 재판은 곧바로 판결을 내리고 10월16일에 화형시켰다. 크랜머는 탑으로 끌려나가 그들의 화형을 지켜보았다. 12월4일 로마는 크랜머의 대주교직을 박탈하고 그들의 선고를 집행하도록 세속권위체에 인계하도록 결정하였다.

    마지막 날이 다가오면서 크랜머의 환경은 변화되었으며, 이 때문에 그는 몇 편의 전향서들(recantations)을 작성하였다. 12월11일 크랜머는 보카도 감옥에서 풀려나 Christ Church[칼리지]의 학장 집에 연금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환경은 지난 2년간의 감옥생활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제 그는 학문사회에서 손님 대우를 받았다. 한 도미니크 수도사인 우안 드 빌라란시아(Juan de Villagrancia)가 찾아와 교황의 수장권과 연옥론에 대하여 크랜머와 토론하였다. 1월말과 2월초에 씌여진 첫 4개의 전향서에서 크랜머는 왕과 여왕의 권위에 복종하고 교황을 교회의 머리라고 인정하였다. 1556년2월14일 그는 성직에서 강등된 후에 보카도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사실상 그가 인정한 것은 매우 적었기 때문에, 에드먼드 보너 주교는 이러한 인정서들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2월24일 옥스퍼드 시장에게 크랜머를 3월7일에 처형하라는 명령서가 전달되었다. 이틀후 다섯번째 진술서-사실상 첫번째 전향서이다-에서 크랜머는 모든 루터파와 츠빙글리파 신학을 부인하고 교황수장권과 화체론을 포함한 모든 로마 가톨릭신학을 수용하였으며, 가톨릭 교회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진술하였다. 그는 가톨릭 신앙으로 복귀하여 기쁘다고 발표하며, 성사적인 사면을 받고 미사에 참석하였다. 크랜머의 화형식은 연기되었으며, 교회법의 관례에 때라 그는 사면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메리는 더 이상의 집행연기는 불가능하다고 결정하였다. 그의 마지막 전향서는 3월18일에 발표되었다. 이는 자포자기한 사람의 표징이었으며 무차별적인[전반적인] 죄의 고백이었다.

    크랜머는 3일간의 여유가 있었다. 그는 마지막 전향서를 대학교회(University Church)의 예배에서 공개적으로 발표하라고 명령받았다. 그는 연설문을 먼저 작성하여 제출하였으며, 사망후에 출판되었다. 처형 당일의 예배에서 그는 설교대 앞에서 기도, 그리고 국왕에게 복종하라는 권고를 한 후에 자신의 설교를 제출한 문서와는 전혀 다르게 발표하였다. 그는 성직 강등의식 이후에 자신이 작성하였거나 서명한 모든 전향서들을 부인하며, 자신의 손이 커다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화형으로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교황에 대하여 말한다면, 본인은 그의 모든 거짓된 교리들과 함께 그를 그리스도의 적이자 적그리스도로 거부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곧 설교대에서 끌려나와 6개월전 라티머와 리들리가 화형당하였던 바로 그 자리에서, 불길이 자신의 주위를 감싸자 약속대로 자신의 오른 손을 불구덩에 먼저 집어넣었다. 그리고 죽어가는 목소리로 ‘주 예수여, 나의 영혼을 받아주소서... 나는 천국이 열리고 예수님이 하느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본다”고 말하였다.

    2010년 3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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