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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토머스 크랜머의 신학 « 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신학 및 역사 이야기

번역 : 토머스 크랜머의 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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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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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David Gagchi and David C. Steinmetz eds., The Cambridge Companion To Reformation Theolog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에 수록된 브룩스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 ]는 역자가 추가한 것입니다.

    토머스 크랜머의 신학
    Peter Newman Brooks

    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은 토머스 크랜머를 16세기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교직자들 중에서 가장 복합적인 인물이라고 인정하였지만, 그의 신학적 유산, 특히 가장 성숙하였을 때의 신학을 규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마치 베토벤의 명작인 <에로이카>(Eroica) 교황곡의 그 무엇처럼, 헨리8세가 켄터베리 대주교로 선택했던 성실한 학자의 삶과 업적에는 영웅적인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학자들은 이러한 판단을 의심의 여지없이 ‘진부하다’거나 ‘순진하다’거나, 심지어는 당파적이며 분파적이라고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튜더시대의 순교자 대주교에게는 특별한 차원이 남아있다.

    필자는 그의 생애를 <에로이카> 교황곡의 4개 악장에 비유하며 설명하고 싶다. 베토벤이 교황곡의 새로운 무대를 시작하였던 것처럼, 크랜머는 ‘이혼문제’로 잉글랜드의 교회를 로마교회로부터 단절시키려는 헨리와 크롬월의 시도에 동참하였다. 그럼으로써 케임브리지의 학자였던 그는 튜더왕정에서 새로운 경력을 극적으로 시작하였다(알레그로 콘 브리오, 빠르고 활기차게). 미사는 여전히 사제의 직분의 초점이자 목적이었으며, 더구나 국왕이 전통주의신앙(Catholicism로마 가톨릭신앙)-교황수장권을 제외하고-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교회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는 두번째 단계는 느리고 심지어 신중하게(라르게토!) 숙고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에[헨리의 사망후에] 편찬된 <공동기도서>의 업적을 스케르초의 부드럽고 활기찬 악장에 비유하는 것이 부적절할지라도, 어리지만 신실한 에드워드6세의 확고한 프로테스탄트신앙은 적어도 크랜머에게 새로운 실험을 시도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하였다. 마지막 악장으로 왕정의 당파싸움, 로마 가톨릭 신자인 메리의 왕위계승, 로마교회로의 복귀,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확립이라는 사목적 비전의 미완성이라는 매우 빠른 변화(알레그로 몰토)보다 더 실망적인 것이 있겠는가?

    튜더왕조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헨리의 ‘중대사”(privy matter)는 오랫동안 학자들의 논쟁거리였다. 엘튼(Elton)에서 스카리스브릭(Scarisbrick)에 이르는 많은 학자들의 다양한 연구들을 통해서 밝혀졌듯이, 소위 “이혼사건”은 국왕수장권을 시행하는 필수적인 배경이 되었으며, 이러한 헌정상의 변화는 중세기 서방교회인 잉글랜드의 두 대교구들[켄터베리와 요크]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환경에서 크랜머의 역할은 다른 대신들의 눈총을 받는 것이었다. 비록 헨리에 의해서 잉글랜드교회의 최고위 대주교로 선택되고 교황의 교서에 의해서 승인받았다 하더라도, 크랜머는 권한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크랜머는 ‘전하에 관한 중대한 소송을...심의하고, 최종적으로 판단하며 판결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켄터베리 대주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요약한다면, 새로운 대주교는 국왕의 주장을 지지함으로써 결국 형의 부인이었던 케서린과의 혼인을 허용한 교황의 특면장을 무효화시키면서, 이러한 결정이 성서적 전거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스스로도 확신할 수 있어야 했다. 어느 사제에게나 이 문제는 양심상의 심각한 갈등을 제기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크랜머를 괴롭혔던 당혹스런 고립감에 관심을 가진 학자는 거의 없었다. 울지는 교회법학자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여 국왕의 소송을 처리하는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크롬웰과 헨리는 빈틈없는 통찰을 통해서 새로운 방침을 정하였다. 즉, 교회법을 포기하고, 대신에 의회에서 법률들을 제정하여 교회에 대한 국왕의 수장권의 확립하는 것이었다. 한편 대주교는 그의 주권자인 국왕과 새로이 설립된 수장대리직(이제 토머스 크롬웰은 소위 G. S. 길버트의 ‘고위집행관’이 되었다)에 충성함으로써,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헌정의 혁명적인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였다. 엘튼은 이러한 혁명적인 변화가 ‘의회법 전권주의’ (omnicompetence of statute)에 의해서 성취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주교는 갈등하는 권위들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그리스도교 최고의 권위로부터 정당성을 찾아야 했기 때문에, 그는 성서에서 이에 대한 확신을 찾았다. 이러한 확신은 단순히 국왕의 첫번째 혼인의 정당성을 부인하는데 사용되었던 레위기 18장과 20장 그리고 신명기 25장에 나타나는 서로 다른 본문들을 조화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왕권과 성권[성직자의 권한]의 대결구도(regnum versus sacerdotium)라는 전통적인 주장과 중세적인 갈등에 전적으로 일치하는 교황권과는 구별되는[다른] 국왕수장권에 대한 확고한 지지였다.

    여러가지 정치적인 사건들과 헌정의 변화 속에서 크랜머는 세속권력을 옹호하였던 루터의 ‘세속권력에 관하여’(Von weltlicher Oberkeit, 1523)에서 표현된 바울로의 교리에서 확신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전통적인 스콜라 신학적인 훈련과 이제 도입되기 시작한 ‘새로운’ 인문주의 방식의 ‘신학’을 공부하였던 학자인 그에게 이러한 상황[신학적인 이해]은 일종의 중년의 위기의식을 겪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루터가 주장하는 메시지의 핵심인 ‘율법과 복음’(law versus gospel)을 수용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1530년대초 뉘른베르크의 오시안더가 헨리의 혼인무효소송을 찬성하였던 방식-비텐베르크 개혁가[루터]는 이를 거부하였다-에 이끌렸다. 결국 대사로서 크랜머의 임무는 교황 클레멘트7세의 주장을 반박하며 헨리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신실한 군주(godly prince)에 대한 복종을 지지하는데 유용한 사도적 전거들(로마서 12장)을 지적함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지지할 수 있었다. 점차적으로 성서는 그의 사상을 확립시키는데 중심이 되었으며, [신실한 군주에의] 복종에 대한 바울로의 인식들은 크랜머가 튜더왕정의 당파정치 속에서도 자신의 사목직[직책]을 개혁가의 직책으로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확신을 제공하였다. 그는 헨리의 이혼을 위하여 동조자들을 규합하는 임무에 몰두하였을 때, 이미 신의 경륜[섭리]에서 군주의 역할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는 사목적 과제의 변화를 추구하기 이전에 먼저 교황의 권위를 거부해야 했을 때, 교회법을 거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다. 이러한 행동을 왕권에 대한 굴복이자 가톨릭신앙에 대한 배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패트릭 콜린슨의 평가에 주목하여야 한다. 즉, 크랜머는 국왕에 굴복하였다기 보다는 헨리의 변덕을 잘 다룸으로써 잉글랜드교회의 개혁을 촉진시켰다.

    따라서 1530년대 중반에 대주교는 국왕수장권의 수용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전보다 단호한 확신으로 국왕의 이러한 주권이 신의 질서를 반영하였으며 성서에서 사도의 권고에 의해서 확언되었다고 주장하였다. 1535년 2월에 보낸 한 편지는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즉, 교황정부의 법률들은 ‘그리스도를 억압하였을’ 뿐만아니라, [로마의] 주교를 이 세상의 신으로 만들었다’고 적시하였다. 성바울로 십자가교회에서 거행되었던 연속적인 설교들에서 누구보다도 크랜머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대주교는 이러한 결론을 ‘성서... [그리고] 거룩한 성인들과 박사[교부]들의 여러 주석들’로부터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였다고 거리낌없이 말하였다. 다음해에 크랜머는 국왕에게 자신의 활동을 보고할 때, 자신이 직접 이제 교황이 아니라 ‘로마주교’의 ‘잘못된 교리들을 지적하고’ 그가 탈취하였던 권위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는 설교의 주요 논점들을 지적하였다. 즉, 만약에 고대시대 제국의 교구가 로마성지(sancta sedes Romana)로 존경을 받았다면, 이는 이름의 거룩함(holiness) 때문이었으며, 그렇다고 결코 교황의 ‘영광과 화려함...탐욕...부정한 생활, 그리고 모든 악덕들의 보존’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이제 거리낌 없이 대주교는 자신이 ‘로마주교와 그의 법률들을 반대하며’ 이 법률들중 상당수가 ‘하느님의 법률들에 위배되며’, 따라서 교황이 이것들을 존중하는 것’ 만큼 ‘높이 존중할 수 없다’고 자신의 군주에게 말한다.

    크랜머는 이제 '공적으로는' 성서적으로 이해된 국왕수정권에 대한 복종을 강조함으로써 서방교회에 대한 교회법과 교황권의 문제를 제거하고, '사적으로는' 루터와 비텐베르그파가 해설한 그리스도인의 책무(Christian commitment)의 본질에 대하여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스콜라신학의 족쇄-하지만 이러한 훈련은 나중에 성찬에 대한 치열한 논쟁 때에 체계적인 서술들에 사용되었다-에서 벗어난 크랜머는 새로운 신학적인 진리를 탐구할 때에 두가지에 크게 의존하였다. 첫째로 무엇보다도 구원방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복음에 대한 루터의 ‘재발견’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둘째로 성서이해에 대한 그의 접근방법은 당시 최신의 학문이었던 에라스무스적인 문헌학[언어학]의 영향을 받았다.

    크랜머는 성찬에 관한 교리를 개정하고 재정의하였다는 점 그리고 이를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일상어]로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설명하였다는 점으로 가장 잘 알려졌지만, 전통적인 로마의 가르침에 도전하는 ‘새로운 신학’은 미사의 문제를 다루기 이전에 고해성사(penance)[당시에 이 용어는 회개와 참회행위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즉, 구원론의 문제-역자]를 우선적으로 숙고하였다. 크랜머의 비망록(commonplace books 인용구 모음집)에 대한 필자의 선구적인 연구를 발판으로 애쉴리 눌(Ashley Null)은 크랜머가 초기시대 교부들 뿐만아니라, 베다(Bede),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er Lombard), 성 빅토르의 휴고(Hugh of St Victor), 토마스 아퀴나스(Aquinas)와 끌레르보의 베르나두스(Bernard)와 같은 중세기 신학자들에게도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분석하였다. 그에 의하면, 1530년대에 크랜머는 초기의 루터처럼 사도 바울로의 메세지를 깨닫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크랜머는 더이상 스콜라신학의 영역에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신칭의(justification sola fide)[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에 대한 루터의 ‘재발견’을 촉진시켰던 똑같은 요소들(요인들 parameters)과 같은 영역에 있었다. 르네상스 예술가들과 저술가들이 옛 고대세계에서 완전성을 보았듯이, 16세기 개혁가들은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조차도 넘어서서 바울로의 교리에서 신약성서의 강조점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로]의 주장으로, 인간은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되어 있으며, 유일하게 용납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로움](imputed righteousness)를 확보하기 위하여 개개인은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활동(saving work)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음으로’(in faith) 선언할 때까지 죄인으로 남아있다. 만약에 학자인 크랜머 박사가 학구적이라서 ‘다마스커스 도상의 체험’과 같은 경험에 적합한 대상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1532년 대륙을 순회하며 황제의 궁정주재 대사로서 뉘른베르크에 체류함으써, 그는 새로운 ‘마르틴주의’(Martinism, 당시에는 루터주의보다는 이렇게 불렀다-역자해설)를 직접 목격하는 것 뿐만아니라 이를 심각하게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크랜머가 새로운 신학에 감명받았다는 점은 결혼으로 오시안더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확고한 루터파 사목자가 결코 믿음의 가족이 될 수 없는 자를 자기 부인의 조카의 신랑으로 환영하며 혼인예식을 주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그가 새로운 신학으로 개심하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분명한 증거가 될 수도 있다. 만약에 그렇다면, 마틴 루터를 사로잡았던 복음의 진리-구원에 관한 한 단순한 신앙[믿음]이 선행보다 우선한다-를 확신하며 개혁가의 대열에 공개적으로 합류하려던 크랜머의 의지는 곧바로 좌절되었다. 헨리8세는 연로한 대주교인 워햄의 사망이후 톤턴 총사제[당시 크랜머의 교직-역자]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며 소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크랜머는 자신의 새로운 신학적인 통찰력을 모호하게 표현할 수 밖에 없었으며, 보다 큰 목적을 위하여 용감한 진리의 투사가 되기 보다는 때때로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처사였다. 한편 그리스도교 국가권(Christendom)의 가톨릭[전통적] 신조에 대한 국왕의 단호한 보수적 입장-교황권에 대한 주장을 제외하고-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대주교는 <그리스도인의 규범>(Institution of Christian Man, 1537)[주교신앙서]-새로이 설립된 왕국교회의 교리를 규정한 핵심적인 신앙선언문-을 비평한 헨리의 주석들에 대하여 곧바로 반박하였다. 크랜머가 제기한 것들중 세가지 문장은 루터의 신학과의 유사성을 나타내며, 특히 언어의 간결함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의 의인화(justification, 구원) 이후에 나타나는 선행들만이 하느님을 기쁘게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선행들은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과 사랑을 부여받은 마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인화 이전에 우리가 실천하는 선행들은 인간의 눈으로 너무나 훌륭하고 영광스럽다 하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허락되지도 수용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의인화 이후에만 하느님의 법이 요구하는대로 선행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곧 헨리시대의 정점들과 저점들에서도 크랜머와 소수의 개혁파들이 순탄한 길을 걸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에 그들이 성취한 최고의 업적이 ‘공인성서’(Great Bible, 1539년 4월)의 출판-다음해에 크랜머는 열정적인 서문을 추가하였다-이었다면, 그들의 최저점은 확실히 <6개 신앙조항법>이었다. 이 법률은 고해성사와 미사에 관한 “옛 신앙”을 확고하게 지지하였으며, 곧이어 1540년에 크롬웰이 실각당하고 처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인 후퇴는 결코 대주교의 사적인 연구를 가로막지 못하였으며, 헨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크랜머는 궁정의 당파정치를 겪으면서도 성서와 특히 초기교부들에 대한 연구에 헌신하였다. 설교를 확산시키려는 계획들은 1542년의 캔터베리 대교구 성직자회의에서 커다란 저항을 받았다. 성직자회의가 ‘공인성서’를 커다란 개정없이 유지시키는 문제에 대해서 양분되었다는 것은 매우 놀랄 일이었다! 그러나 크랜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대륙의 신학[종교개혁 신학자들의 신학]을 추구하였다. 그는 제대의 성사[성체성사]에 대한 루터의 성서적 이해들-즉, 그리스도의 제정사(라틴어로 Hoc est corpus meum이것은 나의 몸이다)에 대한 비텐베르그 개혁가[루터]의 확고하고도 비타협적인 입장에 대하여-에 매료되었으며, 스위스 개혁가들의 방식을 따라 이러한 성서적인 범주들을 희석시키려는 시도를 강력히 거부하였다.

    고해성사에 집중되었던 인용문 모음집(florilegia)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다. 그러나 영국 국립도서관의 종교개혁시대 소장품들중에서 크랜머와 그의 전속사제들이 성찬례에 관하여 수집하였던 인용문 모음집 부분은 2절지로 거의 50여장에 해당한다. 이 인용문들중 상당수는 이 성사에 대한 ‘실재적 현존’(real presence)[육체적 현존]의 이해를 강화시키기 위하여 수집되었다. 초기교부들의 자료들 외에도, 마르부르크 대화(1529)에서 루터와 스위스 개혁가 사이에 벌어진 논쟁의 쟁점이 되었던 인용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인용문들은 신약성서의 기록을 순수하고 말 그대로 이해하려는 루터의 입장을 크랜머가 잘 이해하고 이를 지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Dialogus>(1530)[오이콜람파디우스의 저서로 루터와는 다른 성찬이해를 나타낸다-역자]에서 수집한 성찬에 관한 인용문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유명한 사건이었던 이 논쟁의 다른 면에 대해서 깊이 고려함으로써 개혁주의[스위스-역자] 진영의 연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매우 존경하였음을 나타낸다. 무엇보다도 인용문 모음집의 증거에 의하면, 크랜머는 아테네파들(Athenians)[잉글랜드의 인문주의자들]이 과거를 이해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확고한 근거없이 신학적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양심적인 차원을 보여준다. 그러나 비서들의 비망록들, 대주교의 난외방주들(marginalia) 그리고 유사한 주제들에 대한 대주교의 글 모음집-이 모두는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새로운 신학’의 근본적인 주제들에 집중되어 있다-은 하나의 신학으로 존경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칼빈의 결정판인 <기독교강요>의 분석들 그리고 루터의 여러가지 저술들과 비교할 때에 토마스 크랜머의 기고문들은 매우 빈약하다.

    크랜머의 강점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개혁에 대한 그의 기여는 근본적으로 사목적 신학을 강조하였던 전례에 대한 기교들(skills)로 널리 기억되고 있다. 황제에게 파견된 대사로서 대륙을 여행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예배를 직접 목격하였을 때, 그는 이러한 개인적인 체험과 전례자료들의 수집으로 전례연구에 관심을 가졌다. 레티클리프(Raticliff)는 상당수의 사적인 전례자료들이 현존하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이들 대부분이 1540년대 전반에 작성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데이비드 셀윈(David Selwyn)은 대주교의 소장도서들중 전례부분이 ‘주로 중세기 자료들’이라고 하였지만, 마찬가지로 상당수의 소장서적들이 ‘크랜머 소유의 프로테스탄트 서적들의 운명’[몰수된 후 파기되었다-역자]을 겪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대관식(1547년2월)에서 어린 에드워드6세를 그의 영토 내에서 ‘하느님의 대리자이며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 옹호하는 연설을 하였을 때, 그는 이미 ‘하느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며, 우상을 파괴하였다’고 확신할 정도로 이미 상당한 개혁을 실행하였다.

    7월에 이르러, 호국경 서머셋은 추밀원을 이용하여 국왕의 전권으로 <공식설교문집>(공식강론집Book of Homilies)을 발행하였다. 크랜머는 이 설교문들중 ‘구원’, ‘신앙’ 그리고 ‘선행’에 관한 설교문에서 전통적인 신앙(1543년 국왕신앙서에서 승인된 교리)을 거부하며 루터파와 같은 용어로 집필함으로써, 누구보다도 스티븐 가디너의 분노를 자아내었다. 윈체스터 주교[가디너]는 중요한 논점을 지적하며, ‘이신칭의’의 수용은 곧 서방교회의 성사교리에 치명적인 영향들을 끼칠 것으로 정확하게 평가하였다. 그는 “믿음만으로’는 ‘궤변’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이러한 이해는 올바른 가톨릭 전통의 신경에서 차지할 자리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대주교에게 루터의 이설을 포기할 것을 경고하였다. 가디너는 ‘성찬례는...그러한 교리와 조화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였을 뿐만아니라, 이러한 문제들은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고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의인론에서 ‘믿음만으로’의 교리를 인정하는 자는 누구나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성찬의 성사를 거부할 수 밖에 없다고 확신하였다. 그해[1547년] 가을 의회가 소집되었을 때, 의회는 성사를 비난하거나 비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다음해 봄에는 ‘두종류의 성찬 즉, 빵과 포도주’의 배령을 허용하는 국왕포고문을 ‘영성체 예식서’(성찬예식서The Order of Communion) 앞에 첨부하였으며, 이 예식서는 라틴어 미사-미사의 의식이나 예식을 전혀 변경시키지 않고-에서 사제가 신자들에게 축성된 성찬들을 배찬하기 이전에 영어로 된 죄의 고백과 사면 그리고 성서에서 인용한 일련의 ‘위안의 말씀들”을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다.

    만약에 이 작은 ‘예식서’(Order)가 1544년의 영문 연도처럼 매우 조심스럽게 집필되었다면, 그 이면들도 표면상의 문제 만큼이나 중요하였다. 1548년 부활주일(4월1일)을 시작으로 전례개혁은 이제 희생[제의]을 바치는 사제중심의 예식을 신자들의 영성체로 전환시켰으며, 또한 이를 정중하지만 일상적인 언어로 거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것들은 서서히 실행되야만 했다. 왜냐하면 통합된 전례서는 매우 조심스럽게 편집될 필요가 있으며, 또한 튜더왕국의 각 교구들과 전도구 교회들에 소개되기 이전에 먼저 폭넓은 지지를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크랜머는 이 임시적인 예식서를 만들 때, 마틴 부처가 스트라스부르그와 쾰른의 교회들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작성하였던 예식서에 크게 의존하였다. 이 예식서의 출판소식은 급속도로 확산되었으며, 프랑크푸르트 도서판매전 조차도 첫 출판된 바로 그 달에 이 ‘예식서’의 인쇄본들을 확보할 정도였다. 종교개혁중인 유럽은 잉글랜드를 주시하였으며, 크랜머의 혁명은 시작되었다.

    그의 앞길에는 좌절과 성취가 놓여 있었다. 비록 크랜머는 자신의 개혁적인 비젼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종종 자신의 주장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1549년 <공동기도서>의 출판으로 혁명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직전에 열린 윈저성의 위원회[기도서 집필위원회-역자]를 주재하면서 각종 예식들의 초안들과 이에 첨부할 각종 지시문들을 수집하고 토론할 때, 대주교는 이 최대의 프로젝트에 대한 반대가 엄청나다는 점을 깨달았다. 어떠한 것도 직설적으로 보이지 않아야 하며, 이 첫번째 기도서를 수용하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는 교회와 국가의 핵심적인 조직들은 하나로 결속시켜야 했다. 예를들면, 전통적인 신앙을 주장하는 중진 성직자들이 다수 포함된 성직자회의를 공식적으로 소집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를 야기시켜 호국경 서머셋 정권이 중대하게 추구하는 신앙정책을 지연시킬 우려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평민원에서 새로운 전례를 규정하는 법안은 평민원에서 무지한 지방과 소도시 출신의 의원들로부터 조롱을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은밀한 작전들을 준비하였으며, 이에따라 특별히 소집된 회의들을 통해서 먼저 주교들에게, 그 다음으로 대학의 일부 신학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귀족원의 의원들에게 이를 공개하였다.

    이 글에서 1549년 전례통일법에 규정된 전례서를 시행하였던 구체적인 경위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공동기도서>의 공식적인 출판으로 왕국은 이제 법적으로 예배의 변화를 따라야 했다. 이러한 변화들은 아직도 ‘옛신앙’의 전례들로부터 전통적인 [예식]구조들을 상당부분 보존하였지만, 크랜머의 영성적인 기교[전례에 대한 기술]로 새로운 종교개혁 교리들에 공감하는 일련의 기도문들로 보완되었다. 무엇보다도 대주교의 위원회는 기존의 여러가지 예식서들-적어도 다섯가지 이상으로 구분된 중세기 예식서들-을 적어도 하나의 전례서-성직서품예식서 제외-로 통합하였다. 지금까지 사용하였던 미사경본(missal), 성무일도서(breviary), 주교예식서(pontifical), 예식지침서(manual) 그리고 순행예식서(processional)는 이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에게 <공동기도서>(Common Prayer)로 통합되었다. 이제 전통적으로 복잡하게 구분되었던 예식서들은 단 한권의 책으로 제대용과 휴대용 크기로 교체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출판사들이 큰 돈을 벌 수도 있었겠지만, 사목적 배려로 기도문의 가격을 통제하여 위처치와 그래프톤의 출판사들에서 인쇄된 기도서들은 저렴한 ‘2실링’에서 ‘3실링2페니를 넘지 않는’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성찬에 대한 크랜머의 ‘정통적이며 납득하기 쉬운 교리’(sound and comfortable)는 마찬가지로 그의 개혁의제에 중요한 부분이었다. 성서와 교부들에 대한 수년간에 걸친 연구의 성과는 1549년 기도서의 ‘거룩한 영성체’(감사성찬례holy communion)였다. 비록 루터의 1523년 예식서[Formula Missae et Communionis로 미사의 희생적 의미를 제거하도록 제시된 안내서로 미사라는 용어를 여전히 사용하였다-역자]처럼 크랜머는 이 예식의 명칭에 ‘일반적으로 미사라고 불렀던’(기존의 미사commonly called the mass)이라는 문구를 포함시켰지만, 그는 기존의 유효한 희생제의라는 인식을 완전히 삭제하고 그리스도 자신의 희생, ‘찬양과 감사의 희생’, 그리고 예배참여자들이 ‘마땅하고 거룩하며 살아있는 희생으로 바치는 그들의 영혼과 육신들’의 봉헌을 강조하였다.

    크랜머는 이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그는 이 기도서를 ‘모든 선량한 백성들에게 적합한 매우 신실한 예식(godly order)을 규정한 책’이라고 주장하였다-하였지만,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반발은 소위 ‘기도서반란’으로 나타났다. 콘월과 데번 지방의 반란군들은 추밀원에 보낸 요구서에서 일상적인[빈번한] 영성체라는 취지를 취소하고, ‘성체과 성수’와 같은 성사물[준성사]들의 보존, 산자와 죽은자들을 위한 성찬봉헌들(oblations), 그리고 별세자들을 위한 기도들을 허용하도록 요구하였다. 대주교는 즉각적으로 대응하면서 요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그들의 무지를 질타하며, 신자들을 오류에 빠지도록 지도하는 성직자들의 잘못된 신학을 ‘사악하고 거짓된 원리들’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교회의 복리를 위한 사목적 원칙들을 기도서의 서문에 첨부하지 않았던가? 의식들(ceremonies)을 설명하는 지침들을 기도서에 부록으로 첨부하였으며, 이 글에서 ‘일부 의식들을 삭제하고 또다른 일부 의식들을 보존하였던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였다. 크랜머가 직접 집필하였던 이 글은 논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

    "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으며, 그리고 인간에 의해서 제정된 의식들 중에서, 일부는 처음에 신실한 의도와 목적으로 제정되었으나, 결국에는 허영과 미신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또다른 일부는 무분별한 신심활동과 지각없는 열성으로 ... 도입되었다... 이러한 의식들은 백성들의 눈을 멀게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에, 이것들은 삭제되고 완전하게 제거되어야 한다. 이와 다른 의식들은 인간에 의해서 제작되었지만, 교회에서의 올바른 질서에 유익하고 그리고 신앙의 교화(edification)에 적합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계속 보존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인정된다."

    대주교는 타협적인 표현을 결코 패배라고 인식하지 않았다. 그는 중도적인 입장으로 온건함을 지키는 것을 선호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서문[기도서 서문]은 이미 비아 메디아-많은 사람들에게 이 용어는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신학적인 특징으로 인식되었다-를 표명하였다.

    그가 옛 예식들을 개정하면서 활력없는 가톨릭[전통적인] 통일성을 촉진시킨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은 개정된 공적 전례들이 종교개혁 신학을 분명하게 표현하도록 처리한 방식에 의해서 입증된다. 즉, ‘왜냐하면 우리들은 모든 국가들이 하느님의 영예와 영광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의식들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Of Ceremonies, 역자] 교황들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들과 그들의 의식들은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것들이며, 그리고... 당연히 적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다.’이러한 정죄는 단순히 논쟁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주교는 사목적 판단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 분에 의해서만 가질 수 있는 것들을 지시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그의 빵, 그의 포도주와 그의 물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신성함(holiness)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미신들을 세웠다. 악마는 우리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떼어내기 위하여 모든 수단들을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도 우리가 그리스도 대신에 그를 따르며,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것들을 그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믿게할 목적으로 그의 신성한 미신들을 지키도록 요구한다."

    보수적인 가디너와 급진적인 존 후퍼(잉글랜드 츠빙글리!)의 교묘한 공격을 받은 직후에 더들리의 새로운 정부는 급진적인 신앙정책을 명령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크랜머에게 확실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에따라 크랜머는 1552년에 그의 ‘신실한 기도서’를 개정하면서, 본래의 <공동기도서>를 ‘개선’하거나 ‘변경’시키지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모호한 표현들을 제거한 전례서로 만들었다. 이 개정작업을 할 때에, 대주교는 스트라스부르그의 훌륭한 개혁가인 마틴 부처의 <기도서 비평>[Censura]을 참고하였다. 부처는 1548년 아우그스부르그 화의(Augsburg Interim)로 인하여 잉글랜드로 망명온 이후 람베스궁[대주교의 관저]에서 체류한 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최초의 신학부 흠정교수로 임명되었다. 그가 쓴 <비평서>(Censura, 교회의 징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거룩한 영성체에 관한 것이었다. 종교개혁 원리들이 미사와 이와 관련된 미신들을 ‘결코 충분하게 정죄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정하면서도, 부처는 축성기도가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환시키는 사악하고 신성모독적인 화체론을 유지시키고 확언하는 수단으로’ 왜곡되어 사용될 수 있는 상황을 회피하도록 도와주었다.

    종교개혁시대에 제작된 최고의 전례서들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추구하는 모든 신앙인들을 위하여 제작되었다. 그리고 크랜머는 부처를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주교는 <Defence of the True and Catholic Doctrine of the Supper of the Lord>(1550,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에 대한 참되고 보편적인 교리에 대한 변론서)의 ‘독자들에 대한 서문’에서 자세히 설명할 때, 성서와 초기교회 교부들로부터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주님의 포도원을 질식시켰던 잡초들을 완전히 제거하였음을 주장하며, ‘완전히 제거하지 않을 경우’ 그것들은 또다시 기름진 땅을 광야로 변질시킬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부처가 여러가지 경험으로부터 그의 요점을 제시하였을 때, 이에 대한 응답으로 크랜머는 오해를 야기시켰던 많은 모호한 표현들을 1552년 기도서에서 완전히 제거하였다. ‘미사’라는 용어 자체를 삭제하고 예식의 명칭을 ‘주의 만찬을 거행하는 예식’(Order for the Administration of the Lord’s supper)으로 변경하였다. ‘사제’(priest)는 이제 더이상 ‘석재[돌]제대(Altar)의 중앙이 아니라, 겸손하게 성찬식탁(Table)의 북쪽면에’ 위치하도록 규정하였다.[모든 교회는 동-서 방향으로 건축되었다-역자]. 새로운 예식은 1549년의 그것과는 달리 영광송을 낭독하지 않으며, 대신에 십계명을 그날의 성서독서-서신과 당일의 복음-에 이전에 낭독하도록 규정하였다. 니케아신경과 설교 후에(설교를 예배의 이 시점에 규정한 지시문은 기도서에서 설교에 대한 유일한 지시문으로 말씀과 성사가 하나로 거행된다는 종교개혁 신학을 강조하는 것을 나타낸다), 교회를 위한 기도, 죄의 고백과 사면[사죄문]을 수르숨 꼬르다(축성경의 시작송으로 가장 오래된 초기교회의 시작송이다) 이전에 위치시켰다. 그 다음으로 소위 ‘영성체를 위한 겸손의 기도’(Prayer of Humble Access)를 1549년 예식에서 교회를 위한 기도의 위치로 변경하였다. 따라서 부처가 매우 염려하였던 빵과 포도주의 유효한 희생이나 숭배(adoration)라는 인식들을 분명하게 제거하였다.

    요약한다면, 옛 축성경(canon)의 여러가지 구성요소들을 서로 다른 자리에 배치함으로써, 크랜머는 중세기 미사에서 뿌리깊게 강조되었던 희생(희생제의 sacrifice)에 대한 인식을 능숙하게 제거하였으며, 또한 ‘축성’이란 용어 자체도 완전하게 제거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다음 기도문은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을 제정하였던 성서의 기록을 단순히 낭독하도록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의 연대기>(Greyfriars’ Chronicle)에 나타나는 새로운 예배에 대한 분명한 언급은 이러한 인식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즉, ‘...모든 성인의 날에 빵과 포도주에 대한 새로운 예배서가 바울로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에드워드왕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잉글랜드에서 활기차게 진행되었던 종교개혁은 갑자기 중단되었다. 더구나 더들리 가문에 혜택이 돌아가도록 만든 왕위계승을 변경하는 문서인 ‘수정문’(왕위계승 수정문Device)에 서명함으써, 크랜머는 사실상 자신에 대한 사형집행 영장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런던탑과 옥스퍼드시의 감옥인 보카도(Borcardo)에서의 시련은 크랜머에게 회개[고해 penance]와 성찬례에 관한 그의 사목적 신학에 대하여 더욱 몰두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얻어진 성서적 이해를 통해서 크랜머는 영혼을 치유하는 하느님의 예배를 위한 말씀을 강조하였다.

    때때로 크랜머의 모호함이 그의 개혁의지를 가리웠다 하더라도, 모든 전향서들을 뒤집는 피날레에서 보여준 불굴의 용기는 그의 업적에 대한 감사와 경의를 요구한다. 그는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의 케임브리지 학자이자 복음적인 (종교개혁적인 evangelical) 신학자로서 교리적 변화를 성취하기 위하여 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노력하였다. 특정한 시대의 인물이면서도, 잉글랜드교회의 진정한 개혁을 위한 그의 노력에 대하여 그의 대학교는 옛 셀윈 신학교(Selwyn Divinity School)의 정문 바로 위에 그의 동상을 설치하는 것으로 그의 업적을 인정하였다. ‘16세기의 잉글랜드 양식으로 붉은 벽돌과 석재’(1875년 대학평의회에서 승인한 <설치령>에서)로 만들어진 이 건물은 1511년 존 피셔가 헨리8세로부터 특허장을 받아 설립하였던 성요한 칼리지(College of St John the Evagelist) 바로 앞에 위치하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참고문헌

    자료들
    Cox, John E., ed. Miscellaneous Writings and Letters of Thomas Cranmer. Parker Society edn, Ⅱ.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846.

    ---------, ed. Writings and Disputations of Thomas Cranmer Relative to the Sacrament of the Lord’s Supper. Parker Society edn, I.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844.

    Ketley, Josheph (ed.), Liturgies of Edward Ⅵ.Parker Society ed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844.

    연구서들

    Brooks, Peter Newman. Cranmer in Context. Cambridge: Lutterworth Press, 1989.

    Brooks, Peter Newman. Thomas Cranmer’s Doctrine of the Eucharist. London: Macmillan, 1992.

    Collinson, Patrick ‘Thomas Cranmer’, in The English Religious Tradition and the Genius of Anglicanism. Geoffrey Rowell, ed. Oxford: Ikon, 1992.

    MacCulloch, Diarmaid. Thomas Cranmer: A Life. New Haven, CT,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96.

    Null, Ashley. Thomas Cranmer’s Doctrine of Repentanc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Selwyn, David G. The Library of Thomas Cranmer. Oxford: Oxford Bibliographical Society, 1996.

    Selwyn, David G, and Paul Ayris (eds.). Thomas Cranmer: Churchman and Scholar. Woodbridge: Boydell & Brewer, 1993.

    2010년 5월 25일 #
  2. Cranmerian
    회원

    이 글의 번역을 먼저 via media님과 Anderson님께서 읽고 교정해주셨습니다.
    두분의 자세한 지적과 제안에 감사드리며, 솔직히 제게는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용어의 번역에서 저는 16세기 중심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예를들면 Catholicism은 당시의 인식처럼 서방교회의 전통적인 신학 또는 전통주의 신학(신앙)으로,
    Order of communion은 영성체 예식서, Holy Communion은 거룩한 영성체 예식으로
    번역하면서,()안에 현대적인 번역을 추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의 강조점을 그대로
    드러내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물론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때 다소 혼돈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용어로 번역할 경우에도 당시의 강조점을 파악할 수 없는 단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Prayer of Humble Access는 Via Media님의 제안대로 '영성체를 위한 겸손의 기도'라고
    번역하였지만, 저는 다른 번역에서 '가치있는 영성체를 위한 기도'라고도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Anderson님은 우리교회의 공도문에서 '겸공근주문'으로 사용하였다고 했습니다.
    저의 무지로 정확하게 몇년도 공도문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세히 검토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2010년 5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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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dersen

    회원

    좋은 글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야말로 공부 많이 했습니다.

    요약 정리 같은 글이라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영성체를 위한 겸손의 기도"라는 번역이 가장 맞갖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겸공근주문'이 Prayer of Humble Access의 번역어라는 것은 제 추측이기 때문입니다.

    그 추측의 출처가 1960년 공도문이었는지 1965년 공도문이었는지는 아직 제대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구두인(Charles C. Goodwin) 신부님이 작성한 "시험미사를 위한 비평"에서는 확실히

    기도문(겸공근주문)이 실려 있습니다.

    PS: 제 아이디는 Anderson이 아니라 Andersen입니다. 하하.

    2010년 5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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