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번역 프로젝트 자료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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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회 인쇄소(Mission Printing-Press)

    선교회의 선교사들은 여전히 언어를 배우느라 바쁘면서도, 동료 해군 전속사제[군목]들이 선물한 인쇄기를 낙동 선교센터(Nak Tong Mission House)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설치하였다. 앞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1891년 인쇄소를 시작하는 초보적인 작업은 코프 주교를 뛰따라 한국에 온 브리티쉬 콜롬비아 출신인 피크 씨가 수행하였으며, 1892년 그의 귀국으로 이 작업을 계승한 핫지(J. W. Hodge) 씨는 인쇄소의 활동을 크게 증진시키며 1900년까지 선교회의 인쇄소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이8-9년 동안에 선교회 출판부는 당시 한국의 인쇄와 출판활동이 거의 전무하였던 시대에 제임스 스캇(James Scott)의 <Corean Manual>과 <Corean Dictionary>과 같은 일반적인 관심사들 뿐만아니라, 주교와 성직자들의 번역작업의 첫번째 결실이었던 간단한 신앙서적들을 출판함으로써 매우 유익한 활동을 하였다.

    이들중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작업은 1893년에 발행된 소위 “소책자”(tract)로 <우리의 거룩한 주의 생애>(Life of our Blessed Lord)에 관한 것으로, 아직 한국어로 번역된 성서가 없던 상황에서 우리가 가르치고 설교하는 기본서를 구성하려는 의도였다. 이 책은 Lumen 또는Lumen ad Revelationem Gentium(한국어로는 조만민광을 말 그대로 라틴어로 번역하였다)이라는 제목으로, 단락마다 한국의 대중적인 글자인 언문과 한자어를 교대로 사용하여 인쇄되었으며, 10개의 장으로 성서의 본문을 따라 수태고지(Annunciation)부터 승천(Ascension)까지 하느님의 아들의 성육신한 생애를 설명하며, 서문으로 아테네에서의 성 바울로의 설교를, 그리고 후기로 성령강림절과 사도행전, 그리고 Holy Catholic Church[성공회]의 기초를 설명하였다.

    이 책은 그 후 몇년간 신약성서의 전권이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의 후원으로 조금씩 완전히 번역될 때까지 그 목적을 잘 수행하였다. 우리 선교회는 이 번역작업에 조그만 기여만을 하였다. <Lumen> 다음으로 보다 커다란 작업의 하나로 교리교육서와 연도를 출판하였으며, 선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작은 크기로 세례준비자들을 위한 기도문들, 이들의 교육에 필요한 체계적인 교리교육서, 세례준비자들의 입문예식(망세예식an office of admission to the catechumenate), 세례와 견진예식서, 연도와 감사성찬례 예식서 그리고 꼭 필요한 기도서의 다른 예식들과 같은 신앙교육서와 신앙생활서들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1915] 완전히 번역된 기도서는 발행되지 않고 있다.

    강화(Kanghwa)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선교회의 선교사들은 내륙에 대한 탐사를 제외하고는 첫 몇년동안 실제적으로 서울과 제물포에만 체류하였다. 가장 가치있었던 탐사여행은 1892-3년에 주교의 지시로 워너 씨가 한국의 수로망(river system)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즉, 내륙으로의 이동을 기존의 도로망 보다 훨씬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1892-3년의 겨울을 마포 강변-서울에서 약4마일 떨어진 곳-의 조그만 초가집에서 보냈다. 곧이어 선교회는 이곳에 상당한 부동산을 매입하며, 수로를 통한 선교활동의 본부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활동은 결과적으로 다른 방향들로 발전함에 따라, 이곳의 부동산은 그러한 기능 보다는 서울에 살고 있는 선교사들의 휴식과 피정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사실상 워너 씨의 수로탐사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강화섬의 “발견”이었다. 곧이어 이곳은 선교중심지가 되었으며, 그 이후로 한국선교회의 활동들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꼭 설명하여야 할 것으로, 서울은 커다란 한강의 강가에, 또는 강으로부터 3-4마일 안쪽에 위치해 있다. 한강은 임진강과 합류한 후에 수도에서 북서쪽으로 30여 마일 떨어진 바다로 흘러간다. 강어귀는 인구가 조밀하고 비옥한 강화섬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섬의 높은 언덕에서는 남쪽으로 20여 마일 떨어진 제물포항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철로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제물포와 서울의 60마일을 우회하는 항로로 불규칙적으로 운항-강화섬의 해안을 따라 한강 입구를 거슬러 올라가는 항로-하는 증기선이 서울과 항구 사이의 24마일 도보거리를 대체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강화도는 와이트섬(Isle of Wight)[브리튼의 남단에 위치한 조그만 섬-역자]의 크기로, 마치 잉글랜드의 수도가 런던이 아니라 윈체스터일 경우처럼 수도와 마주보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선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섬은 처녀지로 내륙에서 겨우 몇 백야드의 좁은 수로를 통해서 분리되어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물론 이 수로는 급한 물살과 겨울철의 유빙으로 매우 위험하였다. 더구나 강화도는 항상 정부의 중요한 중심지였으며, 한국의 역사에서 한차례 이상의 위기 때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말로 13세기의 몇년동안 강화도의 중심에 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옛 도시[강화성]는 이 나라의 수도였다. 이 때에 국왕과 왕정[조정]은 반도를 약탈하는 쿠블라 칸[원나라]의 몽고군대를 피해서 이곳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1892-3년의 중대한 시점에 한국정부는 이곳에 새로운 “해군사관학교”(Naval Academy)를 개설하였으며, 영국인 장교들과 교관들이 지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1894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곧바로 실패하였다.

    당시 워너씨는 1893년 가을에 이 섬과 본토를 분리시키는 좁은 내포(바다지류)의 제방에 위치한 갑곶리(Kapkotchi) 마을의 작은 초가집에 간신히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정부 관리들의 의심, 현지어 문건들의 부족, 그리고 언어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1896년 귀국때까지 그의 주위에 소수의 탐구자들(inquirers)을 확보하였다. 선교회의 모든 선교사들 역시 그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 보다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계획할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화되었다. 그리고 1896년 성탄절-워너씨가 귀국한지 몇개월 후-에 한국선교회의 첫 세례준비자들(망세자들catechumens)이 등록하였으며, 정기적인 한국어 예배가 개설[제정]되었다. 강화에서 세명의 탐구자들은 최종적으로 세례후보자로 허용된 자들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이들중 두 사람은 다음해 11월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선교회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노력 그리고 희망의 인내”의 첫번째 결실이었다.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 대한 선교(Work among Japanese in Corea)

    코프 주교의 교구장직 전반기의 활동을 말할 때에, 선교회 활동의 또다른 분야, 즉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 대한 선교를 포함하여야 한다. 부산에 있는 일본인 거류지는 17세기초부터 시작된 매우 오래된 정착지였다. 그러나 1897년 한국과 일본의 첫 통상조약의 체결로 인하여 일본제국의 국민들 상당수가 한국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이 나라에 대한 일본의 정치적 상업적 중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일본인 거류민들의 수도 계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지금은[1915] 한국이 일본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제 적어도25만명 이상의 일본인들이 반도 곳곳에 정착하였다.

    언어의 문제 이외에도 일본인 이주자들에 대한 선교활동의 장애는 언제나 두가지가 더 있었다(그리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첫째로 그들은 전국에 흩어져 거주하게 때문에, 담당사제가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접촉하기가 어렵다. 둘째로, 그들은 항상 이곳 저곳으로 이동하는 “철새”이거나, 담당사제가 이제 한국에 있는 교회의 정식신자로 생각할 쯤이면 그들의 나라로 귀국하였다. 일찌기 1891년에 코프주교는 부산에서 일본인 신자이자 의사의 활동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실제로 제물포에 일본인 전도사(catechist)를 초빙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그는 얼마 안되어 가족의 문제로 귀국하였다. 선교회가 초기에 일본인들에 대한 선교활동을 시작하게된 계기는 1891년 제물포에서 랜디스 의사가 시작하였던 야간 영어학교 때문이었다. 이 학교는 1892-4년 동안에 이를 위하여 영국에서 온 스마트(W. H. Smart) 씨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이때에 중일전쟁의 악화로 이 학교는 부득이 폐쇄되었으며, 스마트씨는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에 있는 일본인 선교의 lay reader가 되기 위하여 일년간 일본어를 공부하였다.

    1895년에 복귀한 그는 제물포에서 일본인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때때로 다른 지역도 방문하였다). 그는 평신도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후 5-6년 동안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선교활동은 때때로 일본에서 파견된 킹(A. F. King) 신부, 콜몬들리(L. B. Cholmondeley) 신부, 이마이( J. T. Imai) 신부와 다른 성직자들의 방문으로 커다란 도움을 받았다. 또한 선교회의 일부 성직자들은 한국어에 대한 공부 이외에도 일본어를 배워서 성사들을 집행할 수 있었다. 1986년9월 제물포에서 거행된 5명의 일본인 어른신자들에 대한 세례와 견진례 행사는 스마트 씨가 지난 3년동안의 모임을 통해서 얻은 첫번째 결실이었다.

    다른 일본인 거류지에 대해서도 무관심하지 않았다. 당연히 부산의 오래된 일본인 거류지에 대한 관심으로, 마침내 임시 선교가옥을 구입하였으며, 1900년말에는 일본인 전도사(catechist)가 정착하였으며(하지만 오래 체류하지는 않았다), 이보다 몇달 앞서 코프주교는 두명의 일본인 신자에게 견진성사를 베풀고, 처음으로 감사성찬례를 거행하였다.

    1901년 스마트씨는 일본에서의 활동을 위하여 한국을 떠났으며, 일본에서 북부 도쿄(North Tokyo)의 미국인 주교로부터 부제서품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2년간 활동하였다. 한국에서 그가 담당하였던 선교활동은 영국에서 갓 도착한 크리스찬 스틴버크(Rev. Christian Steenbuch) 신부가 맡았으며, 그는 1900년 9월에 코프주교로부터 부제서품을 받고 일본에서 1년간 언어[일본어-역자]를 공부하였다. 1901년말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제물포에 정착하였으며, 1902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그곳과 부산에서 일본인 거류민들에 대한 선교를 담당하였다. 1904년에 그도 역시 일본으로 전근하였다. 1905년에서야 일본인들에 대한 선교는 확고하게 정착되었으며, 서울에 있는 카트라이트(S. H. Cartwright) 신부가 두명의 평신도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전국에 퍼져있는 일본인 선교를 담당함으로써 만족할만한 토대를 갖추었다.

    한국선교회의 첫 몇년 동안에 발생한 주요한 사건들을 개괄적으로 관찰하면서, 이에 따른 앞으로의 발전들을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지금은 연대기 순서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선교인력의 변화(Changes in the Staff)(1896-99)

    1894년 여름 트롤로프 신부는 한국선교회의 업무로 영국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의 복귀는 지연되었지만(1896년1월로), 선교회의 전 활동은 중일전쟁-트롤로프 신부의 출발 직후에 발발-으로 인한 혼란 때문에 상당히 약화되었다. 그는 1896년3월에 SSM(거룩한 선교 수도회, Society of Sacred Mission)에서 훈련을 받은 베드콕(J. S. Badcock)과 힐러리(R. F. Hillary)와 함께 복귀하였다. 이들은 그해 12월에 코프주교로부터 부제서품을 받았다.

    1896년12월에는 터너(A. B. Turne, 후에 주교가 됨) 신부와 SSM의 휴 피어슨(Hugh Pearson) 수도사가 선교회에 합류하였으며, 1897년 봄에는 마찬가지로 SSM 출신인 브라이들(Mr. G. A. Bridle)(1897년에 부제, 1900년에 사제 서품을 받음)과 로스(Dr. A. F. Laws) 의사가 합류하였다.

    이런 기회에 한국선교회 뿐만아니라 본국교회에도 이 수도회[SSM]에 대하여 언급하여야 한다. 이 수도회는 1890년에 켈리(H. H. Kelly) 신부가 직접 코프 주교에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에 그는 이미 나중에 결실을 맺는 이상들에 몰두하였으며, 코프 주교는 그를 한국에 동행하는 대신에 영국에 잔류하여 선교현장에서 활동하려는 많은 젊은이들을 훈련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그가 이러한 과업을 얼마나 잘 수행하였는지, 그리고 하느님이 그러한 활동을 얼마나 번창시켰는가에 대해서는 본국교회가 잘 알고 있다.

    케닝턴에 있는 성요한 교회(S. John the Divine)의 후원으로 바살 로드(Vassall Road)에서 시작한 한국선교사 수도회(형제회Corean Missionnary Brotherhood)-당시의 명칭-는 곧이어 거룩한 선교 수도회(Society of Sacred Mission)로 발전하였으며, 한동안 밀던홀에 있다가 현재의 위치인 뉴왁(Newark-on-Trent) 인근의 켈햄(Kelham)에 정착하였다. 1898년 이 수도회는 한국에 드레이크 수사신부(Rev. Father Drake)를, 그리고 얼마후 퍼킨스(H. H. Firkins) 수도사를 파견하였다. 퍼킨스는 베드콕과 힐러리와 함께 1900년 사순절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불운하였다기 보다는 불가피하게 한국에 파견된 이 수도회의 초기 회원들은 켈햄의 매우 발전된 생활방식을 이곳에서 수행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은 한국선교회의 활동을 계속하면서도 수도회의 규칙준수[수도회에의 복종의무]를 포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인식하였다. 더구나 남아있는 회원들중 두사람-휴 피어슨과 피킨스 수도사-의 건강이 악화되어 퍼킨스는 1901년에, 피어슨은 1904년에 귀국하였으며, 또한 1904년 드레이크 신부의 귀국-그는 남아프리카에서 7년간 활동한 후 1911년에 한국으로 되돌아왔다-으로 수도회와 교구와의 직접적인 연결관계는 단절되었다. 물론 수년 동안 두 단체의 연결로 얻어진 혜택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2010년 11월 8일 #
  2. unstopable
    회원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선교 두 번째 단락 마지막 줄에 나온 lay reader를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봤습니다. (http://en.m.wikipedia.org/wiki/Lay_reader?wasRedirected=true) 그나마 상응하는 말이 신자회장 정도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2011년 1월 29일 #
  3. Cranmerian
    회원

    물론 신자회장도 그 안에 포함될 수 있지만, 위키피디아에서도 설명한 것에는 lay reader가 공적인 전례인 아침기도, 저녁기도, 연도, 감사성찬례(성찬의 전례직전까지 그리고 마감기도), 장례예식, 설교, 성찬의 분배까지 다양한 사목직을 수행한다는 현대적인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럴 경우는 '평신도 사목직'이라는 광범위한 개념이 좋겠지만, 이 책에서는 주로 공적인 전례의 집례[인도]자를 말합니다.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사목을 담당할 일본어 구사능력이 있는 성직자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 평신도였던 스마트 씨를 일본성공회에 파견하여 일본어와 전례를 배우게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분도 나중에 사제서품을 받습니다.

    신자회장에 대한 영문 명칭은 아마도 'churchwarden'이 적합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2011년 1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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