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번역 프로젝트 자료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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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너주교의 교구장 시기, 1905-10

    아서 베리스포드 터너(Arthur Beresford Turner)는 주교축성을 받기 위하여 영국으로 떠난 후, 1905년 사도 성바울로의 회심 축일[1월25일]에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서 제2대 한국 선교사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는 5월에 한국으로 복귀하였으며, 그 때까지 교구를 임시로 관할하였던 코프 주교로부터 교구를 인수받았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5년간 이라는 그의 짧은 재임기간 동안에 한국선교회 활동은 크게 발전하였다.

    당연히 이러한 급격한 발전은 그 자체의 위험성을 안고있었지만, 주로 이 나라가 겪었던 여러가지 변화들-정치 등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905년 러일전쟁의 종결 이후 한국은 일본에 좌우되었으며, 일본은 즉각적으로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한국의 모든 대외관계를 통제하고 한반도의 내정을 장악하였다. 한국의 황제는 겨우 권좌를 유지하였지만, 1907년에 강제로 아들에게 양위하였으며, 1910년 터너주교의 사망 몇주전에 한국은 일본에 “합병”되었다.

    이러한 사건들, 그리고 이를 전후한 여러가지 사건들은 한국인들 사이에 심각한 불만과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켰다. 그리고 적어도 1907-9년의 2년동안 이 나라는 처참한 게릴라 전쟁과 이에 대한 무자비한 토벌행위의 현장이 되었다. 옛 정치적, 사회적 조직의 전반적인 해체로 한국인들 사이에는 광범위한 그리스도교운동이 발생하였으며, 이러한 변화는 그자체로 여러가지 어려움들을 안고 있었다.

    정치적인 대격변과 함께, 한국은 또한 이때에 신앙적 “부흥”이라는 이상한 활동이 발생하였으며, 이러한 현상은 1907년 극동지방을 방문한 윌리엄 세실 경(Lord William Gascoyne Cecil)이 <타임즈>(the Times)에 기고한 편지들에서도 언급되었다. 이 운동은 주로 한국의 북부지방(평양 인근지방)에서 발생하였으며, 이곳은 미국과 장로교 선교회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지방이었다.

    마지막으로, 특히 이 나라는 이 시기에 개통된 거대한 장거리 철도노선(Trunk Line Railway, 나라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노선)의 확립으로, 그리고 일본과 매일 정기적인 증기선의 운항으로 크게 변혁되었다. 철도노선은 몇년후에 러시아와 유럽 뿐만아니라 중국과도 철도로 연결되었다. 그러므로 터너주교가 교구장직을 시작할 때는 실질적으로 새로운 한국-적어도 형성중이었다-이었다.

    일본인 거류자들에 대한 선교활동, 1905-10.

    이러한 변화된 상황에서 일본인들에 대한 선교활동은 당연히 주교의 관심을 끌었으며, 이를 강력히 실행하였다. 일본인에 대한 선교활동의 본부를 서울에 설치하였으며, 옛 낙동 부지의 일부를 이로 개조하여 영국인 그로스진(Grosjean)과 엘링톤(Elrington), 그리고 일본인 여전도사(mission woman)의 도움을 받으며 카트라이트(Cartwright) 신부가 1907년에 맡았다. 부산에는 전도사(catechist)가 상주하였으며, 1910년에 일본인 사제인 쉬오자키(A. N. Shiozaki) 신부로 교체되었으며, 이때쯤 엘링톤 양도 부산으로 전근하였다.

    터너주교의 사망 직전에 이곳에[부산-역자] 적합한 선교회 부지를 구입하여 이곳에 선교인력의 거주지
    뿐만아니라 임시 “기도소”(church room)를 만들었으며, 향후에 정식교회(permanent church)의 건축을 계획하고 기금을 설립하였다. 이때쯤에 제물포의 성 미가엘교회 옆에 일본인 전도사(catechist)의 숙소를 건축하였으며, 이 직후에 전도사와 일본인 전도부인(??mission woman)을 배치하였다. 한편 성 누가병원에서 조제사(dispenser)로 활동하던 풀리 양(Miss Poolley)은 이 분야에 전념하기 위하여 일본어를 공부하였다. 1909년 카트라이트의 사망으로 왈톤(H. Walton, 요코하마 교구?) 신부가 임시로 담당하였으며, 그후에 [성공회] 일본선교회에서 활동을 하였던 샤프(A. L. Sharpe) 신부가 전담하였다.

    이러한 활동들은 대체로 산발적으로 실행됨으로써 빠른 성장에 장애가 되었지만, 터너주교의 사망 때까지 일본인 신자수는 150 여명으로 증가하였다.

    한편 병원활동은 코프주교의 사임 직전에 도착한 위어 의사의 지도로 제물포의 성 누가병원에 집중되었다. 이곳의 활동은 급격하게 발전하였으며, 1908년에 이르러 본래의 건물 옆에 여성병동을 건축하여야 했다. 1908년 위어 의사의 휴가 때에, 본국으로 돌아가 2년동안 필라델피아 의과대학(Medico-Chirurgical College of Philadelphia)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로스 의사가 임시로 맡았다. 1909년 위어 의사의 복귀로 로스 의사는 진천-최근에 개설된 station으로 서울에서 남쪽으로 80마일 떨어진 곳-으로 전근하였으며, 그곳에서 병원을 건립하고 진료를 시작하였다. 이 병원은 이곳의 선교활동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터너주교의 사망 직전에 여의사인 보로우(Dr. Borrow)가 선교회에 합류하였지만, 새로운 주교의 도착 때까지 실질적인 활동을 시작할 수 없었다.

    선교사의 증원(Additions to Mission Staff), 1905-10.

    1905년말 윌슨(F. Wilson) 신부가 선교회에 합류하였다. 그는 영국을 떠나기 직전에 부제 서품을 받았으며, 1906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그후 7년동안 강화에서 베드콕 신부 그리고 그후에는 힐러리 신부를 보좌하였다. 1911년 트롤로프 주교의 도착이후 그는 새로이 개설된 선교중심지(선터station)인 백천을 담당하였다.

    1908년 동안에 터너주교가 람베스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영국을 방문하는 동안에, 트롤로프 신부-당시 포플라에 위치한 Church of S. Savior’s의 관할사제였다-는 한국을 방문하여 6개월간 체류하였다. 그리고 그해말 쿠퍼 신부(Rev. A. C. Cooper)-웨스트 하틀풀에 있는 성 오스왈드교회의 보좌사제였다-가 도착하여 새로이 개설된 Station인 수원의 브라이들 신부를 보좌하였다.

    1909년10월말에는 웨스톤 신부(Rev. F. Weston)가 합류하여 강화의 보좌사제로, 12월에는 휴리트 신부(Rev. G. E. Hewlett)-당시에 부제였다-가 도착하여 새로이 개설된 station인 진천의 거니 신부를 보좌하였다. 터너주교의 생전에 한국에서의 활동을 승인받았던 핫지스신부(Rev. C. H. N. Hodges)와 달라스신부(Rev. G. S. Dallas)는 주교의 사망후에야 도착하였다. 스탠패스트 신부(Rev. F. R. Standfast)와 그의 부인도 마찬가지였으나, 선교회의 제한된 재정 때문에 새로운 주교의 도착전에 영국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성베드로 수녀회는 1906년5월 알마수녀의 사망, 그리고 1909년 건강악화로 마가레트 수녀의 귀국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1907년 세실 헬레나(Cecil Helena)와 에디스 헬레나(Edith Helena) 수녀, 1908년에 콘스탄스 아이린(Constance Irene) 수녀의 합류로 보강되었다. 1908년에는 본국의 수녀원 원장이 장기간 방문하였다.

    새로운 선교중심지(staion) 수원, 1905.

    1905년 서울에서 남서쪽으로 20여 마일 떨어진 이 지방의 중심도시인 수원-경부선의 한 역-에 새로운 선교station을 개설함으로써 선교회의 책임은 크게 증가하였다. 브라이들 신부가 제물포에서 이곳의 담당자로 전근하였다. 이 때문에 제물포에는 향후 8년동안 위어 의사가 평신도 예배인도자(lay reader)의 책무를 추가로 떠맡았으며, 터너 주교와 다른 성직자들이 번갈아 방문하여 성사를 거행하였다. 수원의 경우, 1908년 쿠퍼신부가 합류하였으며, 활동이 급속도로 늘어나 철도로 남쪽 4-50마일 떨어진 다른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이곳의 활동이 크게 발전함에 따라 진천을 중심으로 분리된 새로운 선교지구(Mission district)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수원에서는 임시교회를 1905년 성탄절에 설립하였으며, 1908년 보다 항구적인 건축물로 대체될 때까지 사용하였다. 1908년 새로운 건축물에는 남학교와 여학교를 개설할 수 있었으며, 여학교는 최근에 강화에서 이곳으로 분원을 옮긴 성베드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맡았다. 이곳에서는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에 여러개의 기도소(chapelry, 지교회)를 개설하였으며, 터너주교의 사망때에 단일한 지구로 700여명의 신자와 거의 500명의 성찬배수자들로 확장되었다.

    강화선교의 발전(Progress in Kanghwa), 1905-10

    한편으로 우리의 오래된 강화 station의 활동은 마찬가지로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힐러리 신부는 1906년까지 로스 의사와 그의 진료소의 도움을 크게 받으면서, 강화섬의 남부 절반을 전담하며, 온수동에 강화읍의 성 배드로와 바울로의 교회에 필적하는 커다란 성 안드레교회를 건축하였다. 강화읍교회는 베드콕 신부가 성베드로 수녀회의 수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1907년 가족의 일로 영국으로 소환될까지 활동하였다. 이때에 터너주교는 힐러리 신부가 강화섬의 두곳 모두를 윌슨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나중에 웨스턴 신부가 합류) 담당하도록 하였다. 곧이어 수녀들은 수원으로 이전하였으며, 힐러리 부인(서울에서 수녀들의 활동을 도왔던 로빈슨 양)이 수녀들의 활동을 맡았다.

    1909년 가을 힐러리 부인의 사망으로 활동은 커다란 위기를 맞았으나, 곧 1910년 동안에 선교회에 합류한 프랑스(Miss France) 양, 본(Miss Bourne) 양과 보로우맨(Miss Borrowman) 양이 떠맡았다. 이 5년 동안에 강화에는 두 중심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거의 12개의 기도소(chapelry, 지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온수동에는 남학교과 여학교를 개설하였다. 이러한 발전의 결과로 1897년 두명의 신자로 시작하였던 강화도는 1910년에 1,100 여명 신자와 이중 약750명의 성찬배수자로 확대되었으며, 또한 선교활동은 이웃의 섬들과 본토의 동쪽에 있는 통진과 북쪽에 있는 백천으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백천에서의 활동은 크게 성공하였기 때문에, 1911년 트롤로프 주교의 도착때에 전담사제가 담당하는 독립된 station으로 분리되어야 했다.

    서울선교의 발전(Progress in Seoul), 1905-1910.

    서울에서의 선교활동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전담사제의 잦은 변동, 그리고 영어권 신자들과 한국인 신자들에 대한 예배를 따로이 거행하여야 하는 부담으로 여전히 제한적으로 수행되었다. 서울과 그 인근지방에 대한 활동은 1906-8년 동안에 거니 신부가 열심히 노력하였으며, 그후에 베드콕 신부가 전담하였다. 한편 여성들에 대한 선교는 수녀들이 맡았으며, 또한 조그만 고아원은 성베드로 선교하우스(S. Peter’s Mission House)라는 이름으로 노라 수녀와 평신도수녀인 바바라가 맡았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이유들로 서울에서의 전반적인 선교활동은 다른 지구들(districts)과 비교할 때에 더디게 성장하였다. 터너주교의 사망 때에서울의 한국인 신자수는 전부 200명을 넘지 못하였으며, 서울의 사제가 전담하는 제물포에는 약 50명이었다.

    진천-새로운 선교중심지(New Mission Station at Chin Chun), 1907.

    거너신부는 서울을 전담하는 동안에 수도의 동남쪽으로 여러차례 선교여행을 다녔다. 마침내 서울에서 남쪽으로 80여 마일 떨어진 진천에 선교센터를 개설하였다. 이곳에 대지를 구입하여 임시교회를 1907-8년의 겨울에 건축하였다. 그러나 1908년말에 거너 신부는 이곳을 전담하는 거주사제가 되었다. 이곳에서의 활동 역시 급속도로 성장하여 인근지역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여러 개의 기도소를 곳곳에 개설하여야 했다. 그리고 1910년 터너주교의 사망 때에 전담사제는 500여명의 세례신자-이중 400여명은 성찬배수자-를 보고하였다.

    터너주교의 사망.

    터너주교는 극동지방의 기후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체질로1910년 여름 심각하게 앓았다. 제물포의 성 누가병원에서 위어 의사 부부와 병원요원들의 간호를 받았지만, 그는 성 시몬과 성 유다의 축일[10.28]에 서거하였다. 한국선교회의 안팎의 모든 사람들은 매우 슬퍼하였으며, 서울 인근 양화진에 위치한 선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로써 선교회의 또하나의 장[시기]을 마감하였다. 교구장의 공석기간 동안에, S.P.G.의 사무총장(총무?Secretary)인 몽고메리 주교(Bishop Motgomery)가 한국을 짧게 방문하였으며, 웨스톤과 휴리트에게 사제서품을 거행하였다. 다음해 5월에 켄터베리 대주교는 트롤로프 신부-당시에 버밍햄의 성 올번스교회 관할사제-를 새로운 주교로 지명하였다.

    2011년 1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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