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설교 자료

  1. 연중 28주일 - 다해

    제 1독서: 2열왕 5:14-17 RCL: 2열왕 5:1-3, 7-15c

    로마 가톨릭 성서정과는 14절부터 시작하는 바람에, 시리아인 나아만에 대한 가장 중요한 내용을 빠뜨리고 있다. RCL 본문은 이 문제를 바로 잡았다. 나아만은 어떤 멋진 치유 행위를 기대했기 때문에, 엘리사가 요르단 강에 가서 씻으라고 하자 기분이 몹시 상했다. 자기 나라에 가면 이보다 멋진 강이 즐비한데, 이 개골창 같은 데서 씻으라니! 나아만은 사람들의 설득에 못이겨 해보기로 한다. 요르단 강은 이른 바 “특수성의 걸림돌”(the scandal of particularity)을 의미한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은 하늘 아래 없다는 것이다. 생명으로 통하는 그 문은 좁고, 그 길은 험하다. 사람의 아들의 몸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는 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고대에는 나병을 가장 나쁜 병으로 이해했고,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라 여겼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인간이 처한 곤경에 대한 비유가 되었다. 즉 메시아에 의해서만, 종말 때의 기적을 통해서만 인간은 구원받으리라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신약성서에서 예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말씀에 인용되어 (루가 4:16-30), 또다른 의미를 가지는데, 나아만은 시리아 사람으로서 이스라엘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치유는 메시아의 구원 사건이 갖는 보편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서 거절당한 구원 사건이 이제 이방인들에게 열리리라는 것이다.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환자가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단 한 사람도 고쳐주시지 않고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만을 깨끗하게 고쳐주셨다” (루가 4:27).

    이 보편성의 주제는 오늘 복음 본문에도 드러난다. 나병을 고침받은 아홉 명은 감사를 드리러 다시 돌아오지 않고, 열번째 사람 혼자만 돌아왔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제 2독서: 2디모 2:8-13 RCL: 2디모 2:8-15

    현대의 비판적 비평에서 사목 서신들을 “제 2 바울로 서신”으로 보는 것은 맞는 말이긴 하지만(지난 주일 주해를 보라), 오늘 본문의 첫 문단은 디도테오에 보내는 바울로의 진짜 작별 편지에서 따온 것일 수도 있겠다. 이 본문은 영지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이후 제 2 바울로 서신 저자들이 교회의 질서와 직제 관한 것을 덧붙였으리라. 어떤 경우든, 이 본문은 바울로가 순교 직전 로마에 수감되었던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사도 자신의 상황 - 족쇄를 차고 감옥에 갖혀 있는 - 과 하느님의 말씀은 결코 구속당하지 않는다는 그의 확신은 통렬하고 감동적인 대조를 이룬다. (나는 이 이야기를 독일 교회의 투쟁이 있던 동안 설교문을 통해 몇번 들었다. 당시 니묄러 목사와 다른 이들은 게쉬타포에 의해 수감되어 있었다.)

    바울로는 또한 자신이 고통이 구원의 역사를 앞으로 움직여 나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하느님께서 뽑으신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과 영원한 영광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참고 있습니다” (10절). 이런 언급은 바울로의 글에서 자주 등장한다 (고린토후서 골로사이서 1:24절에 있는 바울로의 고난의 목록을 보라). 여기에 근거해서 성인들(성도들)의 “공덕”에 대한 성서적 이해를 발전시켜 볼 수도 있겠다. 즉 하느님께 순종하여 바치는 고통은 기도와 같아서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더욱 촉진하리라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은 초기 그리스도교 성가로 이뤄져 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부활한다는 바울로의 개념(로마 6장)과, 지금 예수를 고백하는가 거절하는가 하는 것은 파루시아(재림)의 때에 사람의 아들이 그 제자들을 인정해주는가 거절하는가 하는 것으로 연결된다는 주님의 말씀(마태 10:33, 그 병행구들)에 근거한다. 마지막 두 줄에 얽혀 있는 내용은 매우 인상적이다. 우리는 신의를 저버릴 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신의를 지키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 세 구절에 나온 병행어법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 성가를 여기에 인용한 것은 그 도임부가 앞의 구절들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다음에는, 많은 인용들이 그러하듯이, 그 원래의 상황에 더이상 맞지 않은 채로 어이진다. 여기서 보고 있는 성가 인용도 마찬가지이다.

    RCL은 14-15절을 추가하여, 사목자들이 그의 백성들에게 전달해야 할 경고들을 제공하고, 사목자 자신도 올바르게 행동할 것을 권고한다 (15절).

    복음: 루가 17:11-19

    우리는 이미 오늘 본문이 어떻게 제 1독서와 연결될 수 있는지, 그리고 나병의 치유가 어떻게 메시아적 구원의 한 유형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제안했다. 또다른 측면에서 이 복음 말씀과 구약성서 본문이 메시아적 구원의 보편성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연결되는 점들에 주목할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 복음 본문에서 또다른 면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것은 감사에 관한 주제이다. 나병 환자 열 명 모두가 치유를 받았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특별히 얻은 것은 없다. 다만 예수께서 그를 두고,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하신 것이 전부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잃은 것도 없다. 감사하지 않았다고 다시 그들을 나병 환자로 되돌려 벌을 주는 기적은 볼 수 없다.

    여기서 좀더 깊이 묵상할 내용이 있다. 하느님의 선물은 회개 없이도 주어진다. 감사를 돌리는 행위의 이면에 그 이후의 더한 축복을 바라는 듯한 어떤 감춰진 동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감사하지 않는 배은망덕은 어찌보면 모든 인간에게 가장 일반적인 잘못 가운데 하나이겠다. 그래서 세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던가? “불어라, 불어라 찬바람이여, 배은망덕한 자보다 몰인정한 사람이 없나니.”

    설교

    설교자는 나아만의 이야기에서 “특수성의 걸림돌”이나 “메시아적 구원의 보편성”이라는 주제 가운데 어느 것이든 발전시켜 볼 수 있겠다. 이 두 주제는 복음 말씀과 연결시킬 수 있다. 두번째 주제는 오늘 시편에도 연결시킬 수 있다.

    특수성의 걸림돌이라는 주제를 선택했다면, “뭐 마음으로 하느님을 예배하면 되는데, 굳이 교회에 나가야 합니까?”라고 묻는 이들에게 대답할 기회를 만들 수 있겠다. 하느님께서는 “이” 길을 구원의 길로 선택하셨다. 즉 지금 여기서, 오늘 주일 아침에,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직 말씀과 성사를 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메시아적 구원의 보편성을 주제로 택했다면, 구원이 오직 이른바 WASPS (White Anglo-Saxon Protestants: 앵글로색슨백인 개신교인들)들만 독점하고 있다는 생각에 도전할 수 있겠다. 하기야 요즘은 천주교 WASPS도 판을 친다.

    제 2독서로 설교를 하려는 경우라면 아주 풍부한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로가 자신의 고통을 하느님의 뜻이 진전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확신했던 것은 오늘날 세계의 여러 곳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투옥된 그리스도인들과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런 다음, 성인들(성도들)에 세우는 공덕에 대한 교리를 진정한 성서적 이해에 기반하여 준비할 수 있겠다. 아니면 제 2독서에 인용된 성가를 택하여, 그리스도인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신의와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한가지 어려운 점이라면, 이 주제는 어늘 다른 성서 본문들과 연결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억지로 그럴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만일에 복음 본문에 있는 인간의 배은망덕이라는 주제를 발전시키고 싶다면, 알버트 슈바이처의 “감사”에 대한 설교 모음인 [삶의 외경] (Reverence of Life, New York: Harper and Row, 1996)을 읽어보라고 추천한다.

    "Tradition is living faith of the dead, Traditionalism is dead faith of the living."
    2007년 10월 9일 #
  2. 배타성,편협성이라 하지 않고 '특수성'이라고 한 부분이 눈에 띄네요.
    어떤 주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성가선곡이 달라질 것이니 좀 고민이 되네요.

    일단 한국의 현재 상황(아프가니스탄 문제)에서는 특수성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는 구원의 보편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더 부드러우면서도 편협하다고 손가락질 받고 있는 기독교회를 잘 변증해낼 수 있다고 봅니다.

    '감사'와 '배은망덕'에 대해서도 자칫 '헌금강요'를 위해 한국개신교회에서 선호되어온 복음구절이라는 측면에서 좀 배제하고 싶네요. 뭐 정공법으로 이러한 남용된 헌금강요에 대해서 비판하며, 감사의 의미에 대해서 주의를 환기시켜 주는 것도 좋겠지요.

    여러가지로 본문에 대한 묵상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자료가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2007년 10월 11일 #
  3. "특수성"이라는 말은 흔히 오해하는 배타성과 편협성과는 범주가 다른 말입니다. 오히려 구체적 방법과 상황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쉬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갸우뚱하는 게 있었는데 더 생각을 익혀보니, "특수성이라는 걸림돌"과 "보편적 구원"이라는 것이 상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때 특수성은 "성육신의 원리"로 보아서 살피는 것도 방법이겠습니다. 이것은 또한 성사의 원리이기도 하겠지요. 그런 점에서 주해자가 적절하게 예를 든 것처럼, 교회에 나가지 않고, 혹은 교회의 전례는 필요없이 개인적으로, 개인적인 영성 생활로 어떤 방법이 있다는 생각들에 대한 경고라 하겠습니다. "지금 여기에" 라는 참여성과 현장성으로 풀어볼 수 있을까요?

    복음서의 말씀에서 말하는 "감사와 찬양"은, 우선 이른바 한국의 많은 개신교의 용법에서 요구하는 어떤 특정한 행위를 통한 "감사"는 다른 것이겠지요. 이것 복음을 수단화하고 이데올로기화하는 것이지요. 이건 곧장 복음에 반하는 일입니다. 어쨌든 이미 오염된 개념을 복원시키는 게 참으로 어렵습니다. 여기에 선한 그리스도인들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복음 이야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사건 자체보다는 그 정황에 관심을 두고 이를 이해한 적이 있습니다. 연전에 어떤 잡지에 실은 글에서 저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성공회의 정신과 이어봤습니다.

    "결국 확신에 찬 자신의 길에서 조금 물러서 보면 좀 더 넓고 깊은 전망이 드러나면서, 삶이 가진 불확실함과 모호함을 받아들이는 최소한의 여유가 생겨났다. 이것을 경계 선 상을 걷는 길이라고 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이 표상은 경계선 상을 걸으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배웠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와 사마리아의 경계를 지나시다가 열 명의 나병 환자를 만나 고쳐주었는데, 다들 돌아갔으나 한명만 되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이야기다. 그 사람은 딱히 돌아갈 자기편이 없는 천대받던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길 자체가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길, 아니 경계 선 상에 계시며, 양 편의 중심부에서 배척당한 주변인들과 소수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이 삶을 따르는 것이 “비아 메디아”라고 본다." ("모호한 길의 모험" http://viamedia.or.kr/2006/02/27/81/ )

    2007년 10월 11일 #
  4. 1독서 : 열왕하 5:1-3, 7-15
    2독서 : 2디모 2:8-15
    복 음 : 루가 17:11-19

    주제 : 구원의 보편성과 특수성

    입당성가 : 186장 영광의 주시여
    영광의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백성들이 드리는 영광의 찬송으로 입당성가로 적당하다. 주님 앞에 모인 자들을 주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어, 모인 사람들의 자손들까지 주님을 섬기며,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도록 기도하고 있다. 가사가 공동체적이고 수직적이며, 여러세대가 함께 성사에 참여하게 되는 주일 감사성찬례에 잘 어울리는 곡이다. 곡의 진행도 입당성가로 적당하다.

    층계성가 : 516장 나는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는 사람들을 모두 받아주시고, 방황하는 죄인을 볼봐주시는 분이시다. 특별히 죄인들과 병자 어느 누구라도 어루만지시어 고쳐주시는 분이시다.
    나아만 장군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 사건은 바울로 성인의 말씀대로 '그분과 함께 살 것'이라는 희망을 주셨다.
    1,2독서를 읽은 후, 주제를 잘 드러내어 주는 성가이다. 특히, 4절 성신께서 친히 성경의 말씀을 가르쳐 주신다는 가사는 복음을 듣기 위한 층계성가로 적합하다.

    봉헌성가 : 376장 풀밭에 내리는 단비처럼
    구원의 보편성을 가장 잘 깨닫게 해주는 것이 있다면 햇빛과 비를 악인과 선인에게 내려주신다는 비유일 것이다. 구원을 입은 만인이 하느님의 이름을 찬미하게 될 것이라는 선언은 오늘의 주제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498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메시야 구원의 특수성에 대해서 더 설교한다면 498장이 적합하다. 병든 몸을 치유하고, 자유와 기쁨을 베푸시며 평화의 나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메시야 예수님을 잘 표현한 성가이다.

    파송성가 : 488장 하느님의 크신 사랑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우리가 온전케 된다. 흠 많고 걱정 근심 많은 우리들에게 사랑을 베푸시니 그 크신 사랑에 감격하여 경배하는 삶을 살게 된다.

    2007년 10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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