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번역 프로젝트 자료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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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장 의료선교활동

    한국에서의 의료활동의 과거와 현재.—한국에는 먼 옛날부터 그 나름대로의[전통적인] 의사들이 있었다. 한국은 커다란 이웃나라인 중국으로부터 의학체계를 빌려왔으며, 모든 면에서 중국에 의존하였다.

    옛 방식의 한국인 의사들[한의사들]은 전문적인 사고방식과 실제[의료활동]에서 그들의 옛 선조들과 거의 똑같다. 그들에게 외과의술(surgery)이란 아직도 침 또는 뜨거운 바늘을 사용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방식은 수천년전의 방식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거의 비슷하다. 이 “의사들”은 인체의 해부학에 대하여 대충 알고 있으며, 바라는 효과를 얻기 위하여, 또는 급소에 침을 놓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바늘을 찌르는 정확한 위치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외과적인 질환-그리고 마찬가지로 많은 내과환자들-으로 찾아온 우리 환자들중 대다수는 이러한 침 자국을 갖고 있다. 즉, 이들은 먼저 전통적인 의사들의 치료를 받았지만 크게 효과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치료방식을 알기 위하여 찾아온 것이다. 종종 이러한 방문은 한국인 의사[한의사]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왜냐하면 요즈음에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도려내기”(cutting)[외과적인 수술]의 경우 우리들의 의학이 월등하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들은 언제나 그리고 특별히 이 나라에서 그들 자신의 의학의 우월성을 확고히 믿고 있으며(특히 한국인들의 경우), 둘째로 서양인들이 한국인 체질에 맞는 원리들을 정확하게 파악할 능력을 갖고있다는 점을 전적으로 의심한다. 이 때문에 환자를 진찰할 때에 관절 주위의 모든 부분, 특히 복부 주위에, 다리의 종아리 또는 그외의 부위들에서 침을 맞은 작은 반점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치료법은 거친[무지한] 방식으로 보이며, 때때로 커다란 손상을 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피해는 예상보다 적다. 바늘들은 매우 뜨겁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살균되었으며, 침에 의한 고통과 바늘에 대한 어린이들의 공포심만 없다면 때때로 좋은 효과를 준다. 그러나 종종 치료한 질병은 오히려 악화된다. 물론 이 치료법에 대한 존경심이 현재에 매우 크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믿게 만들기란 항상 어려운 문제이다.

    현지인[전통적 방식의] 의사[한의사]들의 치료도구에서 뜨거운 바늘 다음은 고약이다. 이것은 침보다 더욱 많은 해를 끼치며, 더욱 많은 고통을 야기시킨다. 침은 나쁜 기운들(evil spirits)을 몸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의도한 것으로 보이지만(한국인들은 이것이 그들의 믿음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고약은 확실히 모든 나쁜 기운들을 가둬놓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고약은 상처에서 나오는 모든 방출물을 효과적으로 막아서 공기의 흡입을 완전히 막아버린다. 이 고약은 가루반죽과 점토, 나뭇잎들[약초] 또는 다용도로 쓰이는 두꺼운 한국식 종이로 만들며, 종기나 상처 부위에 단단하게 붙여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환자는 서양의사에게 오지 않았다면 커다란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즉, 유도자극법의 극단적인 형태인 Dums[둠, 덤??]는 많이 믿고 있지만, 커다란 해를 끼친다.

    순수하게 의학적 측면에서 현지인 의사[한의사]는 본초학자[약초학자]이지만, 우리의 약제사들이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처방을 믿고 있다. 예를들면, 어른은 아마도 한 파인트[1/2리터] 정도되는 사발로 천연 피마자유를 마시도록, 그리고 어린이들은 그 절반을 마시도록 처방하며, 다른 약들도 이와 비슷하게 처방한다. 약초에 관한 그들의 지식은 우리가 배울만한 것이다. 그들은 우리 선교사 의사들이 순수하게 내과적인 질병에 대하여 그들에게 보여줄 것이 거의 없다는 믿음을 확고하게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수년동안 우리는 내과적인 질환보다 외과적인 질환의 환자들을 훨씬 많이 진료하였다. 그러나 지난 몇년간 외과적인 질환에 대한 우리의 치료법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질환에 대해서도 우리들에게 찾아오고 있다. 물론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먼저 전통적인 치료법을 시도하였거나, 아니면 동시에 치료받고 있을 것이다!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옛 체계는 아직도 한국인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전의 치료로 합병증을 겪지않은 외과적인 질환 환자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다른 환자들의 경우에서도, 그들이 선교사 의사들을 완전히 신뢰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치료는 사적으로 그의 치료를 보충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경우 그 공로는 나누에 갖거나 한국적인 치료법이 모든 칭찬을 받는다. 반대로 비성공적인[치료하지 못한] 경우, 서양적인 치료법은 모든 비난을 받아야 한다. 현지인 의사들[한의사들]은 또한 가치있는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상당한 금액의 치료비를 준비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때문에 한국인들은 우리가 높은 치료비를 요구하지 않으면 우리의 치료의 진가를 인정하지 않는다. 서양의사들은 경험의 부족으로, 그리고 환자의 재정부족이란 이유로 치료를 거절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치료비를 너무 적게 요구하기 쉽다. 물론 그들은 적은 치료비 때문에 환자가 자신의 치료에 대한 가치를 낮게 평가한다고 의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하고, 그리고 지난 반세기동안 한국인들은 그들의 의사[한의사]들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였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1890년 우리의 첫번째 의사들이 코프 주교와 함께 왔을 때 직면할 수 밖에 없었던 미신, 관습 그리고 새로운 것들에 대한 불신에 대하여 매우 잘 알 수 있다. 그 때에 이 나라는 외부의 영향을 약간만 받고 있었지만, 곧 커다란 결과들을 야기시킬 정치적 사건들이 발생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당시의 이 나라는 여전히 Hermit Kingdom[조선의 영문번역-역자]으로 외부의 영향력들로부터 고립과 회피라는 옛 정책을 끈질기게 유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들은 점차적으로 체감되었다. 오늘날 이 나라에서 활동하는 [선교사] 의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려움들이 당시에 존재하였다. 외국인에 대한 편견과 혐오, 자기 나라를 버리고 이곳에 온 동기에 대한 심각한 불신, 치료법과 의술에 대한 불신, 이 모든 것들이 선교사 의사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다른 나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이러한 어려움들은 모두 우리의 선구적인 의사들과 병원관계자에 의해서 극복되었다. 랜디스 의사는 제물포에서 수년동안 한국어와 한국의 관습을 배우고, 이 지역 사람들의 신뢰를 확보함으로써, 오늘날 주위에 사는 한국인들로부터 병원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얻게 하였다.

    일본인들이 들어와 이 나라의 권력의 장악함에따라, 서양의학은 이 나라에서 크게 확산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대도시마다 좋은 장비를 갖춘 국립병원들을 찾아볼 수 있으며, 모든 커다란 마을에는 일본인 의사들이 있으며, 일본인 약사는 약국을 개설하여 피하주사기 흡입기, 젖병, 특허 의약품과 식품, 의료도구 등과 같은 서양의 약품과 기구들을 판매하고 있다. 정부가 설립한 의과대학과 병원은 매년 자격을 갖춘 한국인 의사들과 간호사들을 상당수 배출하고 있다. 우리 선교회의 병원들도 치료나 훈련에서 이에 뒤지지 않는다. 우리의 병원 이외에 미국, 카나다 그리고 호주의 선교회들도 전국 각지에 시설좋은 병원들을 보유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 서양의학의 위치에 대한 커다란 변화는 단 한가지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즉, 백성들의 편견을 점진적으로 제거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지금도 자신들의 옛 [의술]체계를 굳게 믿고 있지만, 이와동시에 우리의 의학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혜택에 대해서도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다. 그리고 외국인 의사가 가까이 있다면 심각한 병일 경우 조만간 찾아오지만, 때때로 도움을 주기에는 너무 늦게 찾아온다.

    영국성공회 [한국]선교회의 의료활동.—의료활동은 1890년 코프 주교와 함께 와일즈 의사와 랜디스 의사의 도착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매우 귀중한 선구자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와일즈는 1890년부터 1893년까지 서울에서 선교회의 첫 병원인 성 마태오 병원을 손수 설립하고 활동하였으며, 랜디스 의사는 영국해군 병원기금-현재까지 제물포의 성 누가병원을 계속해서 돕고 있다-의 지원으로 제물포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와일즈 의사가 시작하였던 서울의 의료활동은 발도크 의사가 남자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성 마태오 병원에서, 케서린 알란 의사가 여성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성 베드로 병원에서 각각 성베드로 수녀회의 수녀들의 지원을 받으며 계승하였다. 서울에서의 의료활동은 1904년까지 지속적으로 수행되었으며, 그 해에 수도[서울]에서의 변화들로 서울의 활동을 종결하고 제물포의 활동에 집중하기로 결정하였다. 즉, 이때쯤 일부 미국선교회들은 수도에 커다란 병원들을 설립하였으며, 또한 가까운 장래에 정부의 집중적인 병원개설이 예정되었지만, 중요한 조약항인 제물포에는 랜디스 의사가 소규모로 시작하여 크게 성장시킨 우리의 병원 이외에 다른 의료활동이 없었다.

    제물포의 성 누가병원.—1904년 위어 의사와 그 부인이 도착하여 당시까지 2년동안 의사의 부족으로 폐쇄되었던 성 누가병원을 전담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오랫동안 폐쇄되었기 때문에 의료활동과 건물은 크게 손상되었으며, 재건축이 시급하였다. 위어 의사는 언어문제로 매우 고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와 씨름하였다. 옛 건물의 기초가 위험하였기 때문에, 병원건물은 실질적으로 1904년에 재건축되었다. 몇해만에 의료활동은 크게 확장되었기 때문에 여성환자들을 위한 건물[병동]을 추가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이 건물은 1909년에 완성되었다.

    한편 유럽인 상근직원들은 약제사인 풀리 양(Miss Pooley)과 간호사인 라이스 양(Miss Rice)의 도착으로 강화되었다. 이 시기부터 성 누가병원의 활동은 꾸준히 확장되었으며, 특히 지난 5-6년 동안에 입원환자와 외래환자의 수 그리고 수술환자의 수는 크게 증가하였다. 이제 병원은 이웃의 한국인들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는 장소가 되었으며, 주민들은 성 누가병원을 한국인들을 위한 병원으로 생각하고 거리낌없이 찾아온다. 따라서 이제는 필요한 경우 환자들을 입원하도록 설득하고, 수술에 대한 동의를 수락받는데 어려움이 거의 없다. 또한 제물포의 중국인 거주지역에 사는 중국인들도 우리 병원을 많이 찾아온다.

    현재 이 병원은 남성환자들을 위한 두개의 병동, 여성환자들을 위한 하나의 병동, 그리고 개인전용의 병실들 모두 40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이 숫자에는 여성환자들을 위한 병실이 시급하였던1915년에 옛 세탁실을 개조한 임시병동의 수용인원도 포함된 것이다. 우리는 세탁실을 상류층 환자를 위한 매우 사적인 병동으로 사용하였지만, 그들은 이에 크게 만족하였다. 환자들은 모두 침대를 사용하며, 이 침대는 최근까지 나무판자에 다리를 댄 것으로 위생상 매우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은 침대 전체를 쇠로 만든 침대틀로 교체하고 있다. 우리는 환자들에게 침대포를 제공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이를 좋아하지도 않지만 사용하는 방식을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세탁실에 과중한 부담만 된다. 환자들은 침대에 누워 담요를 덮는다. 담요는 표백하지 않은 옥양목[솜]을 채운 두꺼운 누비이불이다. 이는 서양인의 인식으로 비위생적이지만, 한국인들은 무엇보다도 이를 선호하기 때문에 허용하고 있다. 이 이불은 세탁시에 따로이 분리하여 세탁하고 그 후에 다시 조립하여야 하기 때문에 커다란 불편을 주며, 또한 공간을 많이 차지하기 때문에 커다란 보관실이 필요하다. 그러나 성 누가병원은 항상 첫째로 환자의 행복을 위하여, 둘째로 그들의 건강회복을 위하여, 그리고 마지막으로 깨끗하고 위생적인 환경을 위하여 일한다는 원칙들을 유지하고 있다. 예를들면, 한국인들은 모두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언제나 담배를 피우는 것을 허용한다. 유럽인 간호사는 아마도 하루에 여러차례 담배냄새나, 담배로 인한 침대의 불결함, 긴 담배대, 또는 사방에 널려있는 담배덩이들로 방해를 받고 있지만, 한국인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하지도 않으며, 한국인 간호사도 이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또한 매우 따듯한 병동을 좋아하며, 겨울에는 창문을 모두 닫은 채로 비위생적이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병동의 난로를 항상 피우고 있으며, 결국 병원 직원이 나타나서야 창문을 열어 열기를 식힌다.

    일반적으로 환자들은 하루에 두번의 식사를 하며, 때로는 세번으로 이 경우 점심은 가벼운 식사나 아침식사의 나머지를 제공한다. 아침과 저녁에 식사시간이 있지만, 실질적으로 먹는 시간은 매우 유동적이며, 이는 정확한 일정을 유지하려는 외국인 직원들에게는 항상 어려운 문제이다. 여름철에는 누구나 아침식사를 7-8시 사이에, 저녁식사를 약 7시경에 먹지만, 겨울철에는 해뜨는 시각이 늦기 때문에 9시 이후에야 아침식사를 한다. 이 때문에 의사의 진료시간이 아침식사 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점을 이들에게 이해시키는데 항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주요한 음식은 쌀[밥]으로, 모든 환자들은 큰그릇 분량의 밥을 먹는다. 아주 조금만 어린이들도 이 커다란 분량의 밥을 먹어치우는 것을 보면 매우 놀랍다. 우리의 가난한 환자들은 밥 이외에 언제나 침치(또는 절인 배추)와 소량의 반찬(또는 오르 되브르)-예를들면 멸치나 생무우 등-를 먹는다. 한 환자는 한그릇의 밥을 다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환자 자신과 친구들은 그가 몹시 아프다고 생각하였다. 환자들은 밥을 선호하고, 이를 대체할 대용물도 없기 때문에 환자용 식사는 항상 어려운 문제이다. 대신 의존할 수 있는 우유도 없기 때문에, 중환자에게 맞는 음식을 준비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여러가지 방식으로 만든 다양한 쌀죽과 여러종류의 국, 계란 등에 의존한다. 한편 환자가 잘 먹지 못할 경우, 환자의 친척들과 친구들은 그를 항상 애처롭게 염려하여, 식욕을 자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한국식 진수성찬들-허락을 받고 안받고 상관없이-을 가져온다. 또한 그들은 때때로 특정한 음식이 그러한 질병에 좋다는 확고한 믿음에 따라 행동하지만 거의 잘못된 인식이다. 이럴 경우, 그들은 곧바로 의사와 논쟁하기 시작한다. 예를들면, 복막염을 앓고 있는 한 환자는 한 밤중에 야간 경비원이 난로 옆에서 졸고 있는 동안에, 친척들에 의해서 몰래 한국식 돼지고기를 먹었다. 다음날 환자는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야 친척들은 겁을 먹고 지난밤 일을 털어놓았다.

    환자의 유형.—우리의 환자 대다수는 가난한 도시민, 소작농, 어부, 소상인, 그리고 시골농부들이다. 우리 선교회의 병원들은 대도시에 설립된 정부병원들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계층의 환자들을 위하여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대다수 일본병원들에서 요구하는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 성 누가병원은 항상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병원이었으며, 이들은 자유롭게 우리를 찾으며 가능한 만큼 비용을 지불하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제물포의 부유한 상인들과 그들의 부인과 딸들이 치료를 받으로 우리 병원을 찾는다. 우리는 현재 이들을 수용할 여력이 거의 없지만, 이들은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영향력있는 계층이다.

    치료비.—수년동안 환자들은 소정의 금액만을 지불하였다.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기껏해야 푼돈을 내거나 한줄의 계란-짚으로 만든 광주리에 10개의 계란을 담은 것으로 약 20센트 정도-을 헌금하였다. 일반적으로 의사의 진료와 한 병의 약에 대한 비용으로20 또는 30센트 정도의 치료비를 지불하였으며, 퀴닌과 같은 특별한 약의 경우 약간 더 지불한다. 부유한 환자들은 그들의 능력에 따라 지불할 것으로 예상하지만, 외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인의 외모로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를 구별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 치료비를 차등하여 받는데 따르는 어려움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지불한 만큼의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상당한 치료비를 요구받은 부유한 환자는 가난한 자들과 같은 치료비를 요구받았을 경우보다 계속적인 치료를 위하여 다시 방문할 가능성이 많다. 치료비를 차등해서 받는 이 방법은 병원을 시작한 이후로 잘 운영되고 있으며, 장래에 이를 통해서 병원이 과거보다 크게 자립하기를 기대한다.

    병원의 상근직원들.—수년동안 위어 의사와 그의 부인의 헌신적인 활동의 결과로, 늘어난 병원업무는 이를 감당하기 위하여 정말로 두명의 외국인 의사, 외국인 간호사 두명 그리고 약제사 1명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이상은 아직까지 결코 실현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가능할 것같지 않다. 상근직원의 부족으로 두명의 의사가 동시에 활동하기란 불가능하며, 또한 상당한 기간동안 간호사도 한명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의사와 간호사는 그들의 전문적인 활동에 완전히 몰두하기 때문에, 전도활동에 대하여 관심과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 이것이 현재 우리 선교회의 병원과 외국인 선교사들이 처한 상황이다. 그러나 환자들이 우리를 찾아오는 한, 그들은 반드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즉, 우리는 [환자의] 수를 제한할 수 없다. 환자들은 먼곳에서 오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병원에 도착하였을 때 치료를 받지 못하면 그들은 불평할 자격이 있다. 전도활동은 우리의 한국인 전도사와 여성 성서교사가 입원환자와 외래환자들 사이에서 충실하게 수행하지만, 외국인 의사와 간호사는 언어적인 장벽이 있다 하더라도 대다수 환자들에게 한국인 활동가[전도사]보다 더 쉽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병의 치료와 완치로 커다란 도움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희망들중 하나로, 우리는 병원의 상근직원들을 늘림으로써, 가능한대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병원의 전도활동에 더 많이 참여하기를 기대한다. 의료활동의 초창기부터 우리는 일단의 “소년들”(우리가 훈련시킨 14-30세의 젊은 한국인들)과 여성환자들을 위하여 한국인 중년부인-매우 충실하지만 많이 알지는 못하였다-의 조력을 받았다. “소년”들은 일을 잘하였으며, 병동과 외래환자부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빠르게 수집한다. 그들은 의사와 간호사에게 매우 유익한 조력자들이 되었다. 하지만 현재까지 그들은 우리와 함께 일하고 우리를 지켜보는 것으로만 배우고 있다. 이제 그들이 병원 조력자들로서 완전한 훈련을 받을 시기라고 믿는다. 또한 우리는 전쟁[1차대전?]후에 지금까지 여성병동에서 일하였던 한국인 중년부인을 외국인 간호사 밑에서 훈련받고 있는 수습생들인 젊은 여성으로 교체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훈련을 받은 소녀들이 반드시 전문적인 간호사가 되기를 기대하기 보다는, 몇년간 우리와 함께 일한 후에 결혼하여 그리스도인 가정을 꾸리고, 이곳에서 배운 위생과 간호에 대한 지식을 자신의 마을과 가정에서 실현하기를 기대한다.

    병원의 하루일과.—병원의 하루일과는 아침 9시에 기도모임으로 시작한다. 이 기도모임에는 병원의 모든 그리스도인 상근직원, 가사직원들, 걸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 환자들 그리고 전도사와 여성 성서교사가 참여한다. 기도회는 상근직원중 한명이 교대로 주재하며, 성서독서 그리고 하루의 일과와 환자들을 위한 기도로 구성된다. 그 직후에 의사와 간호사는 병동을 회진하며, 전도사와 여성 성서교사는 외래환자부에서 일을 시작한다. 오전은 외래환자들을 진료하며, 아마도 5-60명으로 이중에서 2-30명이 새로운 환자이다. 의사는 새로운 환자를 진료하고 한국인 직원이 수행할 수 있을 정도까지의 치료를 지시한다. 오후는 입원환자, 뒤늦게 도착한 외래환자 그리고 수술환자를 진료한다. 저녁기도 후에는 때때로 환자들을 진료하지만, 재정장부정리, 행정상의 문제들, 외국인 환자들에 대한 왕진으로, 7시에는 저녁식사를, 8시30분까지 휴식을, 그리고 병동에 있는 환자들에 대한 저녁회진을 실시한다. 하루는 의사와 간호사, 특히 간호사에게는 매우 바쁜 일과이다. 그녀는 모든 병동을 담당하고, 한국인 상근직원들을 감독하기 때문에, 그녀의 시간과 에너지들에 대한 모든 요구들을 처리하려면 상당한 인내심을 요구한다. 주일에 우리는 가능한 거의 전문적인 활동을 피하며, 남자병동과 여자병동 모두에서 찬송부르기와 “설교” 예배를 갖는다. 부인들은 복음의 가르침에 남자들보다 더 쉽게 응답한다. 그들은 집에서 힘든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더 쉽게 응답하는 것이다. 이들이 우리와 함께 기숙하면서 그들의 표정이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언제나 매우 흥미롭다. 처음에 그들은 병동에서의 예배와 아침과 저녁기도 동안에 냉소적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딱딱하고 무관심하며, 때로는 무엇인가를 듣고 배우는 것을 거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들중 일부는 마음을 열고 열심히 듣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이 퇴원할 때에, 그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병원에서 전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들을 배웠으며, 이제 그들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가 얼마나 무서워하는지를 고백한다.

    진천의 애인병원.—서울에서 80마일 떨어져 있으며, 가장 가까운 역에서도 몇시간의 여정인 진천에서 선교회는 로스 의사(Dr. A. F. Laws)가 전담하는 아주 훌륭한 조그만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로스 의사는 이미 강화도에서 몇해동안 선구적인 의료활동을 수행하였으며, 이러한 활동은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이 감사하게 기억되고 있다. 1909년 로스 의사는 진천에 애인병원, 즉 인간사랑의 병원을 설립하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한국식 가옥을 개조한 병원건물은 여러가지 면에서 시골 선교지구의 의료활동에 적합하였다. 수용할 수 있는 환자의 수는 변동적이다. 왜냐하면 환자들은 한옥의 방바닥에 눕기 때문에, 바닥의 크기에서만 제한을 받을 뿐이다[침대가 아니라].

    진천은 의료활동에 알맞은 중심지로, 매 5일마다 커다란 시장이 개설되며,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이 날들에 의사와 직원들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치료를 받기 위하여 병원을 찾은 환자들을 진료하느라고 바쁘다. 남자들은 팔 물건들을 시장으로 나르면서,그들 말대로 “병환을 보여주기 위하여” 부인들과 아이들을 함께 데리고 나온다. 이 사람들이 진료를 받기 위하여 기다리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흥미롭다. 동양인은 종종 “인내심이 강한 동양인”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병원의 대기실에서 그들은 다른 어느 인종들 보다도 인내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몇분 이상을 기다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기회를 주면 그들은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거나, 집에 아이가 울고 있다거나, 이전에 알지 못하였던 다른 정당한 핑계들을 여러분에게 말할 것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바쁜 시간에 병원앞에 가마-운반하는 의자-가 도착하고 환자를 등에 업고 들어와 수술실의 바닥에 내려놓는다. 이러한 환자들은 종종 매우 멀리서 오며, 병원에 오기로 결정하기 전에 이미 상당히 심한 병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즉각적인 치료를 필요로 하며, 이 때에 치료를 받기에 너무 늦었다는 진단을 듣는다. 의사의 최종판단이 무엇이든 한동안 소란이 계속되고, 환자의 친척들과 병원직원들 그리고 환자들 모두가 몇분동안 동시에 크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이에 그들은 결정을 하며, 환자를 입원시키든가, 아니면 다시 데려간다.

    진천지방은 아마도 다른 지방들 보다 더 많은 질병과 고통들을 받고 있다. 홍수는 자주 발생하며, 이 때문에 쌀을 재배하는 논은 상당부분 파손된다. 쌀은 백성들에게 생명 그 자체로, 모든 세상적인 재산을 상징한다. 그리고 기근때에는 상당수의 빈곤한 사람들이 조만간 병원을 찾아온다. 심지어 평상시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거의 굶주림에 시달리며, 결국 그들이 겪고 있는 영양결핍과 어려운 조건들 때문에 발생하는 병으로 병원을 찾아온다.

    백천에서의 의료활동.—백천은 서울의 북서부에 있으며, 최근에 설립된 선교 중심지로 일부 열렬한 신자들이 살고있다. 그들은 이곳에 의사와 선교회 병원을 설립하기를 매우 희망하였다. 그래서 1912년에 주교는 의사 한명을 파견하여 의료활동을 조그맣게 시작하였다. 신자들은 적합한 건물을 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건물을 개조하는데 상당한 시간과 기금을 제공하였다. 이 선교지구에서 의료활동을 수행하는 동안에 그들은 활동의 진전과 성공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건물과 장비는 가장 간단하였다. 일부 벽을 허물고 이곳저곳을 수리하고 선반 등을 설치하는 것으로 평범한 작은 가옥을 병원용 건물로 개조하였다. 가장 커다란 방은 수술실, 진찰실, 그리고 대기실로 사용하고, 다른 방들은 입원환자용-10명정도 수용가능-으로 개조하였다. 한옥이기 때문에, 이 건물은 하수구나 다른 위생시설들이 전혀 없었다. 대다수 가난한 한국인 가옥들과 마찬가지로, 목재에 해충들이 항상 살고 있었으며, 이것들은 등유나 끓는 물과 같은 간단한 방식들로 제거할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개척활동에 수반되는 이러한 어려움들과 다른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병원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한국인들 사이에 곧바로 자리잡았다. 첫 4개월동안 2천명이 넘는 새로운 환자들이 병원을 찾았으며, 6개월동안 거의 400번을 왕진하였다. 환자들 대다수는 이교도[비신자들]이었으며, 전도사와 일부 신자들이 그들에게 신앙의 기초적인 사실을 가르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의료활동의 미래는 매우 밝았으며, 시작할 때의 조그만 시설들의 수용능력을 훨씬 넘어서며 성장하였지만, 1913년 재정적인 어려움과 의사의 부족으로 폐쇄되었다.

    2011년 9월 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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