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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Charles John Corfe: Naval Chaplain-Bishop>의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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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anmerian님이 2011년 10월 10일에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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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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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Charles John Corfe: Naval Chaplain-Bishop>, by H. H. 몽고메리(Montgomery) SPG, 1927의 머리말에 대한 번역입니다. 이 책은 http:/anglicanhistory.org/asia/kr/corfe1927에서 원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머리말 : 마크 트롤로프 주교의 글

    나의 옛 상관이었던 코프 주교에 대한 전기(memoir회고록)의 집필을 요청받았다는 몽고메리 주교의 통고는 본인이 올봄에 병가로 한국을 떠나기 직전에서야 도착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에 본인은 그가 집필중인 전기에 기고해 달라는 그의 초대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만약에 본인과 한국교회에 커다란 영향[은혜, 빚]을 주신 분의 전기에 직접 그분에게 진 빚에 대한 감사의 글을 남기지 못한다면, 본인은 매우 슬퍼하였을 것이다. 이제 본인은 몽고메리 주교의 친절한 허락을 이용하여 마지막 순간에 이 머리말을 기쁘게 쓰고있다.

    본인은 27살의 풋내기로, 첫 보좌사제직에 “매우 기뻐하며” (first fine rapture) 언젠가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상상(idea)에 항상 사로잡혀 있었을 때 코프 주교를 만나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이러한 상상은 재빨리 행동으로 전환되었다. 물론 본인은 그 분이 유명한 해군 군종사제이자, 지난 세기의 격렬하였던 [18]70년대와 80년대 “앵글로-가톨릭” 의 완고한 골수파(stalwart)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찰스 존 코프는 1873년에 퓨지 박사와 기존의 소책자운동가들을 당황시키며 켄터베리 대주교에게 진정서[청원서]를 제출하였던 450명의 사제들-이들은 대중적으로 “바알신[우상]의 예언자들”( prophets of Baal)이라고도 비난받았다-중 하나였다. 이 진정서에서 그들은 앵글로-가톨릭파들이 항상[처음부터] 싸워왔던 거의 모든 주장들을 공식적으로 승인해줄 것을 요구하며, 사제들이 분명하게 고해사제(confessor, 신자의 고해성사를 집례하는 사제)로 훈련받고 이를 수행하도록 허가해야 한다는 놀라운 제안(1873년에!)으로 결말지었다. “이러한 권한들”(powers that be)에 대한 대답은 1874년의P.W.R. Act[공적인 예배 규제법으로 규정된 예식을 위반한 성직자의 처벌과정을 규정한 법]의 제정이었다! 코프 주교가 한국을 향해 잉글랜드를 떠나는 마지막 날을 벨-콕스(Mr. Bell-Cox) 신부-앞의 법률로 인하여 수감되어 있던 마지막 사제-와 함께 보냈다는 사실을 기록하는 것은 흥미롭다.) 그러나 본인이 그 분[코프주교]과 직접 접촉하였던 첫번째 계기는 그 분이 1889년 모든 성인의 날에 [주교로]축성된 직후 <가디언>지에 기고한 특이한 편지였다. 이 편지는 매우 간결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취지였다. 즉, 켄터베리 대주교가 그에게 해군에서의 직책[군종사제직]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갈 것을 요청하였을 때, 그 분은 이 요청을 수용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SPG가 그에게 매년 600파운드의 지원을 약속하였으며, 그는 이 활동을 위하여 5명의 사제를 찾고 있으며 이 금액을 그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다소 엉뚱하였을지 모르지만, 정말로 멋졌다! 어쨋든 본인은 이 분이 바로 나를 위한 선교사 주교이구나 생각했다-본인이 이 분을 직접 만나자 마자 그분의 인격에 [흠뻑 빠져] 결심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그 분이 사람들[선교사 사제들]을 구하는데 몹시 어려웠다 하더라도, 오늘날 “가톨릭 신앙과 신앙활동”( Catholic faith and practice)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대한 중요한 논점들에 대하여 그와 함께 추구할 준비가 되었다는 확신없이 선교사가 되겠다는 사람들을 모두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본인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는 확실히 그랬다. 영국에 있는 영국교회[성공회], 또는 심지어 영어권 식민지들에 있는 영국교회[성공회]의 “영광스런 포용성”(glorious comprehensiveness, 대혼란)을 지지하며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비그리스도교의 나라에 있는 선교사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신앙을 본질적으로 한 목소리로 제시하는데 동의할 수 없다면, 그들은 매우 심각한 장애에 부딪힐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의 요구사항중 첫번째가 되었으며, 그외에도 그와 운명을 함께할 자들은 겨우 최저생활 임금을 받고 활동하는데 만족하고 결혼을 기대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당연히 이러한 요구사항은 성직자를 확보하는 어려움들에 추가되었다-즉, 이러한 어려움들은 전반적으로 한국에 대하여 모른다는 점, 그리고 그가 당연히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는 바로 그[성직자] 집단들에 널리 퍼져 있는 이[한국] 선교회(Mission)의 성격과 목적에 대한 이상한 오해로 인하여 더욱 가중되었다. 그러나 그가 세운 기준, 그리고 그가 만든 요구사항들은 확실히 이 선교회에 매우 명확한 성격[특성]을 각인시켰으며, 이러한 성격은 오늘날까지도 순조롭게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선교회가 수적인 힘을 얻는데 실패하였다면, 강렬한 능력을 확보하였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현재에 선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5-6천명의 현지인 신자들은 재정적으로 커다란 지원을 받으며 잘 알려진 미국 프로테스탄트 선교회들 주위에 모여든 결집력이 없는 막대한 대중들과 비교하면 소수에 불과하게 보이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전자[우리 선교회]에 대한 분명한 전망과 견고한 확신-이는 계산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자산이다-이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미국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은 코프 주교보다 3-4년전에 한국에 도착하였지만, 당시에 지금과 같은 대규모로 성장할 수 있는 활동을 효과적으로 시작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더 많은 미국인들로) “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 for Corea”[한국어성서 상설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코프 주교에게 'fully chartered Protestant Evangelical Church'[완전하게 공인받은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책임자로서 이 위원회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통지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교는 ‘이 명칭은 영국교회에 대한 기술[표현]으로는 그에게 새로운 것이며, 그는 이러한 초청장을 수락함으로써 [영국교회의 지위를] 손상시킬 수 없다’고 응답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들중 한명을 이 위원회가 지명한 번역자회의(Board of Translators)에 비공식적으로 참석하여 활동하도록 허용하였으며, 위원회는 이러한 조정에 기꺼이 동의하였다.) 그리고 만약에 자랑거리를 든다면, 그의 15년간의 교구장직 말기에 완성된 “우리 교회의 체제(조직구조ordering)와 의례들[예식들]로, 한 선교중심지에서 다른 선교중심지로 여행을 하는 우리 신자들(영국인, 한국인 또는 일본인)이 곧바로 집처럼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만약에 이러한 자랑거리가 여전히 가치있는 것이라면, 가톨릭교회(보편적 교회)의 보다 커다란 통일성 내에 하나의 작은 단위로서 교구에 대한 충성심과 교구적인 통일성[교구내의 통일성]을 기본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바로 코프주교의 선견지명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이해하기 쉬웠기[당연하였기] 때문에,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이유 조차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트루로 교구의 대성당에서 초대주교-벤슨 대주교-가 작성한 규정들(statutes)로부터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즉, “여기에 지적된 모든 내용들은 중요한 사항들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내용도 분란을 일으키거나 사소한 문제들로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코프 주교가 한국어의 구어체를 자유로이 구사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한국어 교사와 함께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문어체에 대한 매우 높은 식견을 확보하였다는 사실을 몽고메리 주교가 지적한 것에 본인은 감사한다. 이 때문에 그는 우리의 번역활동에서 상당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어떠한 책도 그의 승인없이 출판되지 않았으며, 이러한 승인을 쉽게 내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한국인 신자들과 그들의 언어로 대화하거나 이들에게 설교할 수 없었다는 점은 그가 이전의 성직자 생활에서 선원들과 매우 친밀하게 지내왔던 생활에 비하면 매우 괴로운 부담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문제가 지난 15년간 용감하게 수행하여온 짐을 1904년에 내려놓기로 결심한 이유로 크게 작용하였다.

    그는 또한 이제 막 탄생하여 성장하고 있는 그의 교구를 적절한 인원의 성직자들로 충원시키지 못하는 지속적인 어려움을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물론 자신이 그러한 상황들 때문에 "parting of the ways"[갈림길, 사퇴]의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도, 그는 항상 다른 사람[선교사]들의 어려움들을 인정하는데 관대하였다. 본인은 선교회의 활동을 10년 넘게 수행한 후인 1902년에 그에게 한국으로의 귀환[복귀]을 무기한으로 중단시켜줄 것을 요청하였을 때, 그의 이러한 관대함을 크게 체험하였다. 그 직후에 본인은 그의 옛 친구인 돌링 신부를 계승하여 포플라 지구에 있는 성 구세주 교회의 관할사제직(the Vicarage of S. Saviour's, Poplar)을 수락하였다. 이 때문에 1911년 본인이 한국교구장직에 지명된 것이 그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었던 일은 본인에게 너무나 기쁜 일이었다. 본인의 생각에, 그는 나의 “바다의 아버지”(sea-daddy)로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하느님, 그의 영혼을 편히 쉬게 하소서!

    + MARK NAPIER TROLLOPE, Bishop in Corea
    (Chaplain to Bp. Corfe & Snr. Priest of the Corean Mission, 1890-1902)
    Nov. 14, 1926
    한국교구 주교 마크 나피어 트롤로프
    (코프주교의 전속사제& 한국선교회의 선임사제, 1890-1902)
    1926년 11월 14일.

    서문

    이 짧은 비망록[전기]가 완성되도록 도와준 분들 덕분에, 우리는 아마도 훌륭한 인물을 거의 망각에서(적어도 젊은 세대에게는) 구조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찰스 코프는 이제 모든 신자들에게 잘 알려진 새로운 시도들을 시작하였다. 여기서는 그가 이제 성공회 세계를 통해서 "Quarterly Intercession Paper,"[분기별(계간) 중보기도 신문]을 창간하였으며, 또한 그가 지금은 켈햄에 있는<거룩한 선교 수도회>(Society of the Sacred Mission) 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에 덧붙여 누구보다도 많은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았던 해군 군종사제였다. 아래의 글에서 필자는 그러한 성과들, 그리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성격을 가진 그의 일생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H. H. 몽고메리

    2011년 10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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