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설교 자료

  1. 대림절기

    대림절기의 주도적인 주제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는 면들이 있다. 전통적인 “마지막 일들,” 즉 세상의 종말, 모든 이들의 부활, 최후의 심판, 그리고 새 땅과 새 하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가? 아니면 성육신 축일을 위한 준비 기간으로 보아야 하는가? 그도 아니면 메시아의 오심에 앞선 구원사의 어떤 시간에 관한 것인가?

    3년 주기의 성서정과는 이러한 혼란을 잘 정리하고 있다. 즉 미래의 일들에 대한 전개 (옛 교회력에서는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마지막 주일들을 통해서 종말론적 주제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를 대림 첫 주일에 하나의 절정으로 가져다 놓는다. 그런 다음, 대림 2주일부터는 성육신 사건에 대한 준비에 관한 다른 주제들을 소개한다. 그리하여, 이후의 다른 해에도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도록 한다.

    대림 1주일 - 가해

    제 1독서: 이사야 2:1-5

    이 본문은 모든 백성들과 민족들이 야훼의 가르침을 받으러 시언으로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나는 일에 대한 전망이다. 야훼께서는 모든 나라들의 분쟁을 중재하실 것이며, 그에 따라 태평성대가 이뤄질 것이다. 이 예언은 미가 4장에 거의 베끼다시피 반복된다. 미가가 이사야에서 따왔는지, 아니면 이사야가 미가에서 옮겨다 놓았는지, 그도 아니면 다른 어떤 공통 자료에서 함께 인용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학자들은 세번째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것 같다. 아무래도 이는 고대 전례 자료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이 전망과 관련하여 두 가지 점들을 눈여겨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전망은 역사의 마지막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종말론적인 전망이다. 이는 역사 안에서 일어날 가능성을 염두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는 전쟁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으면 그 때가 온다고 우리 멋대로 환상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말이 전쟁의 요인들을 없애도록 노력할 필요가 없거나, 전쟁을 종결하도록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종내에 실망으로 끝나게 될 허튼 희망을 갖지 말라는 말이다. 전쟁의 완전한 척결은 오직 하느님의 뜻이 역사의 마감과 함께 승리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이 전망에 대한 두번째 요점은, 모든 백성들이 하느님의 길(법)에 따라 배우고, 하느님의 길을 걸을 때라야,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서로 평화를 이루며 살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전망이다. 그러나, 언급되어 있듯이, 평화는 인간이 만든 프로그램에 기반하지 않고, 하느님의 법에 순종할 때 따라온다” (J. Bright in Peake’s Commentary on the Bible).

    제 2독서: 로마 13:11-14

    이 본문은 대림 1주일의 매우 전통적인 독서이다. 여기에는 신약성서의 종말론적 용어들이 가득차 있다. 밤 / 낮, 어둠 / 빛, 잠자는 일 / 깨어나는 일, 시간, 그리고 때와 같은 말들이다. 이러한 언어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가졌던 “두 시대”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즉 현재의 악한 시대는 가고, 새로운 시대가 동터온다는 것이다. 이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현존을 긴장의 삶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현재라는 낡은 시대를 살아가지만, 곧 도래하는 새로운 시대에 따라 이미 판가름이 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동터오름을 깨닫고 어둠 속에서 얼굴에 빛을 밝히고 살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므로 이미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밤 가운데 있지만, “대낮으로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유의할 점이 있다. 신앙인들은 아무런 도움도 없이 스스로 대낮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해야만 가능하다. 갈라 3:27에서는 같은 문장이 세례와 연결되어 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바울로는 세례받은 그 신분이 주는 힘을 얻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받은 세례의 의미를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권고하는 것이다.

    마지막 문제. 바울로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 가까이 왔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보다도 가깝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죽음에 가까워져 하늘에 들 일이 가까워졌다 하더라도, 바울로는 “구원”을 개인주의적인 경건이라는 뜻으로 말하지 않는다. 바울로가 말하는 “구원”은 구원 사건이 일어나는 위대한 날, 역사의 종말에 일어나는 성취이다. 초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처럼, 바울로 사도 역시 이 종말이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찾아오리라 믿었다. 정말이지 로마 교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된 이후로 훨씬 가까워졌다고 믿었다. 그 날짜에 관해서라면 바울로는 분명 실수한 것이다. 아직 우리가 오늘 여기에 있고, 그 성취는 아직 오직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이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마지막 성취가 길 모퉁이에 바로 와있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야 한다. 새로운 시대의 빛이 그리스도의 현존을 비추고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갖고서.

    복음: 마태 24:37-44 RCL: 마태 24:36-44

    이 구절은 이른바 “공관 묵시록”(마태 24장, 마르 13장, 루가 21장)의 마태오 판이다. 당대의 여느 유대교 묵시록처럼, 이 공관 묵시록도 서기 66-70년 유대인들의 항쟁 직전에 등장했던 역사적 사건들과 연관된 일련의 재앙들을 연결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마지막 성취, 하느님 아들의 귀환, 최후의 심판,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징조이다.

    이러한 묵시론적인 이해는 예수님의 일반적인 가르침의 어조와는 사뭇 다른 인상을 전반적으로 만들어 낸다. 오늘 본문만해도 그런데, 마태오 기자는 예수님의 어록 자료를 공관 묵시록에 끼워 넣은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진정한 어록을 구분해보자면, 마지막 말은 이후의 설명이다. 잘 정리된 묵시론적 시간표와는 동떨어진 것인데, 노아의 홍수와 같이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홍수가 올 때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사람의 아들도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하느님 아들의 오심과 더불어, 구원받은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이 완전히 갈라질 것이다. 두 사람이 밭에 나갈 터인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다른 사람은 버려질 것이다. 두 여인이 맷돌을 갈 터인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다른 사람은 버려질 것이다. 한 사람이 구원받는다면, 다른 한 사람은 거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집 주인이 도둑을 경계하는 것처럼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그저 이렇게 말하는 것이, 공관 묵시록이 전체적으로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올바르게 재현하고 있다고 평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이 역시 바울로의 본문과 똑같은 문제를 안겨준다. 마지막 날은 곧 오지 않았다. 다시 한번, 우리는 묵시론적인 관점을 예수님께서 청중에게 제기한 선택의 영원한 결과에 대한 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청중은 종말이 모퉁이에 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에 따라 분명하게 처신해야 한다. 요아힘 예레미야스는 좀더 진중하고 훌륭한 제안을 제안을 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이 고정되어 바뀌지 않은 것으로 보지 않는다. 하느님은 선택된 자들을 위해서 그 날을 앞당길 수도 있고(마르 13:20), 자비를 값없이 선사하시는 그분은 그 은총의 기간을 늘릴 수도 있다(루가 13:6-9).

    RCL은 44절을 덧붙이는데, 이 절은 아마 마르코에 있는 ‘작은’ 묵시론에 덧붙여졌던 것으로, 원래의 자료에는 없었던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슈미텔(P.W.Schmiedel)의 의견을 따른다. 즉 어느 누구도 그 날에 대해 모르는 것을 예수님 탓으로 돌리지 않는 한, 그걸 예수님의 “핵심 구절”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성부/성자 그리스도론은 부활 이후에 만드어진 것이라고 본다. 여전히 마르코 이전 전통에서 “아들”은 “사람의 아들”이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아마도 이 절은 묵시론적인 세 등장 인물(아버지, 사람의 아들, 천사)과 관련된 것이었으라. 그러고 보면 이 말은 예수님의 원래 말씀으로 볼 수 있으며, 당신이 그 날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느님만이 마지막 날을 아신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며, 관례적인 묵시론적 세 등장 인물들도 그 날을 알지 못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관점이다. 오늘날 이 말씀은종말의 날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고, 그에 따라 매우 괴상한 행동을 받아들이는 근본주의자들에게 좋은 경고가 되겠다. 이미 살펴본 대로, 묵시론적 언어의 요점은 역사 안에서 우리가 선택하는 것들에 대한 최종적 결과를 이해시키려는 것이다.

    설교

    설교자가 구약성서 본문을 선택하여 거기에 나타난 우주적 평화에 대해서 설교하기로 했다면, 그 평화는 인간의 이상과 계획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오히려 이것은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 하느님께서 세우실 세상에 관한 하나의 그림이다. 그러나 이 말은 이 전망이 우리 인간의 정치적인 개선 노력과는 상관없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인간의 행동은 미래의 인력에 열려져 있으며, 우리 인간의 임무는 그 최종적인 실현에 대한 “앞선 징조들”을 제대로 세우는 것이다 (J. 몰트만).

    제 2독서는 여러 가능성을 제안한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인의 현존을 “대림의 상황”에 놓은 존재로 그려볼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인은 현 시대를 살아가지만, 다가올 시대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 설교자는 또한 교인들이 그들의 받은 세례의 의미에 따라 살아가도록 권고할 수 있다. 그 의미들은 대림의 상황 속에서 해석되거나, 초대 교인들에게 임박한 종말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던 문제를 다루면서, 어떻게 그 기대가 오늘의 신앙인들에게 그 실존적 현실이 될 수 있는지를 물을 수 있겠다.

    복음 본문은 설교자에게 두 가지 다른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하겠다. 즉 청중들에게 종말론적인 경고(어느 순간이든지 궁극적 선택을 하는 것처럼 경계하라)를 권고하거나,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기대, 그리고 초대 교회의 기대를 다루면서, 그 기대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현존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펴 볼 수 있겠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는 궁극적 선택의 문제는, 적어도, 우리가 종말이 어느 순간에나 올 수 있다는 생각 속에서 경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요아힘 예레미야스의 제안을 따라, 설교자는 청중들에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통하여 그 종말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오지 않았던 것이며, 대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위대한 날을 준비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시간을 주시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번역: 주낙현 신부, 2007년 11월 26일
    위치: http://liturgy.skhcafe.org

    "Tradition is living faith of the dead, Traditionalism is dead faith of the living."
    2007년 11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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