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번역 프로젝트 자료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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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개 신앙조항과 공식설교집
    Peter Toon

    개혁된 잉글랜드교회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교회적이고(Catholic),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그리스도교회의 일원으로서, 성서와 초기교회의 신경들 그리고 당시의 특정한 신학적인 문제들과 논쟁들과 관련하여 이 교회의 교리와 정체(치리구조polity)를 39개 신앙조항(1563/1571)으로 선포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잉글랜드교회는 이미 공표한 공동기도서의 신학적인 원리들을 분명하게 하였다. 따라서 신앙조항과 기도서는 엘리자베스의 신앙정책(1559, Settlement), 그리고 이후에는 찰스2세의 신앙정책에 포함되었다[을 구성하였다].

    신앙조항과 기도서 이외에도 서품예식서(신앙조항 36항에서 승인하였다) 그리고 제1차 (1547)와 2차(1571) 공식설교집(11항과 35항에서 승인하였다)을 여기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 두 설교집-1623년부터 합본으로 발행하였다-은 의로운 사회에서 쇄신된 왕국교회를 기대하고 추구하며 그리스도교를 신앙과 은총에 의한 구원이라는 측면에서 살아있는 설교로 선언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신앙조항과 공식설교집의 기원과 내용을 검토하고, 16세기의 상황에서 그것들의 가르침들을 찾아보고, 그이후로 성공회신앙에서 해석되었던 방식들에 대하여 논평하며, 그리고 세계성공회 교회들에서 그 지위와 권위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한다.

    1. 39개 신앙조항

    1.1 기원들

    39개 신앙조항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친 기원들을 찾기 위해서는 메리 튜더(1553-58)와 어린 에드워드6세(1547-53)의 통치시기를 넘어서 헨리8세의 후반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534년 로마와의 단교후에 당시의 논쟁들에 대한 잉글랜드 왕국교회의 입장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가지 신앙진술문[성명서]을 발표하였다. 이것들은 10개 신앙조항(Ten Articles, 1536), <그리스도인의 규범>(일명 ‘주교신앙서’ Bishop’s Book 1537), 그리고 ‘국왕신앙서’(King’s Book)라고도 알려진 <그리스도인을 위한 필수적인 교리와 내용>(1543)이었다. 이것들은 당시 서부유럽의 급변하는 신학적인 환경속에서 잉글랜드 왕국교회가 전통적인 신앙을 지지하는 세력과 새로운 신앙을 지지하는 세력에 의해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던 방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13개 신앙조항(Thirteen Articles, 1538)은 당시에 전혀 출판되지 않았지만, 루터파 신학자들과 왕국교회 신학자들이 합의한 신학적 내용으로 분명하게 프로테스탄트 입장을 나타낸다.

    당시 루터파 제후들과 협정을 맺는 것이 헨리8세의 대외정책에 필요하였기 때문에, 루터파 신학자들과 잉글랜드 신학자들은 국왕의 승인하에 잉글랜드에서 만났다. 그들이 합의한 것[13개 조항-역자]은 루터파의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Augsburg Confession, 1530)에 기초한 것들로 아마도 이후에 39개 신앙조항으로 완성되는 과정중 첫번째 단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크랜머 대주교는 루터파 인사들과 자주 접촉하였으며, 13개 신앙조항의 합의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두번째 단계인 42개 신앙조항(Forty-Two Articles, 1553)의 초안작성과 인준, 출판에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주교의 원안부터 최종판을 출판하기까지 여러 주교들과 어린 국왕의 자문관들이 이를 검토하였다. 그러나 이 신앙조항은 다른 프로테스탄트 출판물들(공동기도서와 공식설교문집 등)이 공표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마침내 출판되었을 때에는 에드워드의 사망과 로마 가톨릭 신자인 메리의 계승으로 이를 집행할 시간이 없었다. 이 신앙조항이 성직자회의(Convocation)에서 공식적으로 인준을 받았는지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1553년6월13일 국왕의 명령문(Royal Mandate)으로 공표된 것은 확실하다. 이 명령문은 모든 성직자들과 학교장들, 대학교에서 학위를 취득하려는 자들에게 이 신앙조항에 대한 서명을 요구하였다.

    42개 신앙조항은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위격(person) 그리고 인간의 죄성(sinfulness)에 대한 정통교리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리고 특별히 이신칭의[신앙에 의한 의인화], 성서 그리고 복음서에 선포된 두가지 성사를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확실히 프로테스탄트, 즉 개혁된 공교회(Reformed Catholic)의 입장이다. 이 신앙조항은 급진적인 개혁가들(‘재세례파’), 그리고 로마교회와 중세 스콜라신학이 주장하였던 여러가지 입장들을 거부함으로써 이 개혁된 공교회성(Reformed Catholicity)을 보호[보존]하였다.

    1558년 엘리자베스의 왕위계승과 다음해 그녀의 신앙정책으로 잉글랜드교회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로서 개혁된 공교회성을 회복하였다. 39개 신앙조항의 공표는 크랜머의 제자이자 추종자였던 파커 대주교가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당시에 막 출판된 루터파의 뷔템베르그 신앙고백(Confession of Wüttemberg)-1562년 뷔템베르그 공국의 대사들이 이를 트렌트회의에 제출하였다-을 참고하였으며, 그 내용은 스위스와 독일에서 돌아온 망명가들의 칼빈주의자(Calvinist)(개혁주의 ‘Reformed’) 입장을 반영하였다.

    본질적으로 39개 신앙조항은 42개 신앙조항을 개정한 것으로, 1562-3년에 개최된 성직자회의(Convocation)에서 사실상 최종적인 형태로 승인되었다. 그러나 이를 인쇄하여 출판할 때, 1563년2월에 성직자회의의 주교들이 승인한 필사본에서 두가지를 수정하였다. 29항인 ‘불경한 사람들이 주님의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먹지 못하는 것에 관하여’를 [전부] 생략하였으며[1571년에 복원시켰다-역자], 20항에는 교회의 권위에 관한 교리를 강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신앙에 대한 논쟁에 관한 권위’라는 문구를 추가하였다. 왕립인쇄소에서 출판된 라틴어 정본에 나타난 이러한 수정의 당사자들은 여왕과 추밀원이었다. 그러나 8년후 성직자회의는 29항을 복원시키고 권위에 대한 문구는 그대로 보존하였다. 따라서 1571년에 39개 신앙조항의 최종적인 형태는 먼저 성직자회의에서 그 다음에 의회에서 승인받았다. 공식적인 원본은 라틴어와 영어로 출판되었으며, 의회에서 제정된 법률은 이를 영문으로 사용하여야 하며 모든 성직후보자들에게 서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신앙조항의 본래 제목은 <다양한 의견들을 회피하고, 진정한 신앙에 관한 합의를 확립하기 위하여 1562년에 런던에서 개최된 성직자회의에 참석한 두 대교구의 대주교들과 주교들, 그리고 전 성직자들이 동의한 신앙조항>이었다. 1628년 찰스1세는 서문을 추가하며, ‘신앙조항은 하느님의 말씀에 합치되는 잉글랜드 왕국교회의 진정한 교리를 포함하며’그리고 ‘신앙의 수호자이자 왕국교회의 최고통치자(Supreme Governor)’로서 ‘사랑하는 모든 신하들에게 이에 따른 통일된 신앙고백을 갖도록’ 요구하였다.

    1.2 교리

    신앙조항을 작성하고 집행할 때 크랜머와 그의 동료들의 목적은 4가지였다. 즉, 잉글랜드교회는 사도들의 교리를 가르친다는 점에서 사도적인 교회(apostolic Church)임을 확실하게 하며, 둘째로 성직자들은 정통적인 교리를 보존하며 신자들에게 비정통적인(급진주의자들이나 로마교회파) 교리들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며, 세째로 왕국교회내의 완전한 통일성을 유지하며, 마지막으로 복음에 근거하여 포용할 수 있는 범위를 규정하려고 하였다.

    신앙조항을 주제별로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4가지 주요 주제별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ⅰ)신앙의 본질(1-5)
    (ⅱ)신앙의 기준(rule)(6-8)
    (ⅲ)신앙생활 또는 사적인 신앙(9-18)
    (ⅳ)공적인 신앙(19-39).

    마지막 항목은 또다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세분할 수 있다.
    (a)교회(19-22; 연옥론에 관한 항은 포함하지 않을 수 있다)
    (b)사목직(23-24)
    (c)성사들(25-31)
    (d)교회의 권징(32-34)
    (e)교회와 국가(37-39).

    이제 신앙조항의 제목에서 ‘다양한 의견들을 회피하고, 진정한 신앙에 관한 합의를 확립하기 위하여’라고 주장한 이유들을 찾아보자. 신앙조항의 집필자들은 개혁된 공교회성(Reformed Catholicity)을 선언하려는 목적으로 당시의 활동적인 종파주의자들(‘재세례파’)과 전통적인 로마교회 지지자들과 늘어나는 퓨리탄 세력들이 선전하는 논쟁적인 주장들을 무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정론과 지옥에의 하강과 같은 교리들에 대하여 분명한 진술을 표명함으로써 화해를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39개 신앙조항은 한편으로 유화적이면서도(pacificatory), 다른 한편으로 위협적[경고적인](denunciatory)이다.

    이 신앙조항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상황적으로 해석할 때) 확실히 모호한 것이 아니었으나, 많은 2차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 남겨둠으로써 신앙조항에 대한 요구사항을 최소화시켰다. 1660년 존 피어슨 주교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이 책[신앙조항]은 […] 본래 의도하지도 않았지만 신학에 대한 완전한 책이 아니며[…], 그러나 종교개혁 당시와 그 이후로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거부되었던 일부 진리들을 열거한 것이다. 그들은 이를 거부함으로써 이 왕국교회 또는 왕국에서 어떠한 사목직을 수행하기에 부적합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 신앙조항은 16세기중반의 상황 안에서 잉글랜드 왕국교회에서 공교회의 신앙(Catholic faith)과 질서있는 생활의 확보하는데 꼭 필요한 만큼만 진술하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최소한의 범위를 넘어서려 하지 않았다. 복음의 핵심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완전하고 정확하게 진술하였지만, 신학적으로 안전한 정도로 넓고 포괄적이었다.

    신앙조항은 신중하게 최소한을 요구하면서도, 신중하게 절충적이었다[하나의 입장에 얽매이지 않았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집필자들은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 그리고 원죄론의 교리들에 대해서는 초기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을, 복음과 의인론에 대해서는 뷔템베르그 신앙고백과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을, 성사에 대한 이해(25-29항)에 대해서는 제네바와 칼빈주의/개혁주의 교리를 활용하였다. 전반적으로 이 신앙조항은 잉글랜드교회(ecclesia Anglicana)의 개혁된 공교회성을 진술하며, (이에 대한 최초의 해설서의 제목처럼) 잉글랜드교회의 신경,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하여 알고 믿어야 하는 신앙조항이자, 모든 점에서 진정하고, 초기교회적이고 공교회적이며 사도적인 교회와 일치하는 잉글랜드교회의 신경>(토마스 로저스의 저서로 두부분으로 나뉘어 1585년과 1587년에 출판되었다)이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17세부터 20세기까지 이 신앙조항에 대한 해설서들은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1)복음주의와 개혁주의적 해설 (2)광교회적 해설 (3)고교회적 또는 아르미니우스파의 해설 (4)앵글로-가톨릭파의 해설. 물론 일부 해설가들은 두가지 전통을 모두 포함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해석전통들이 존재한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조항은 집필되고 제기하려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며 해석되어야 하며, 그리고 […] 그 그 단어들은 집필되었던 당시의 환경과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 진술문들은 집필자들이 이미 알고있는 관념들과 가정들 그리고 의도들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2. 공식설교문집들(The Homilies)

    2.1 기원들

    신앙조항과 마찬가지로 공식설교집 역시 그 기원은 헨리8세 시대와 크랜머의 개혁열정에서 찾아야 한다. 대주교는 아마도 전도구교회들에서 독서할 목적으로 출판된 루터의 설교집에 자극받아 1539년에 공식설교집의 출판을 기획하였다. 당시 개혁가들은 설교의 직책(office)이 복음의 진리를 백성들[신자들]의 정신과 마음과 의지에 심어주는 하느님이 지정한 방법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에, 이를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는 점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리고 만약 설교하는 자들이 무지하다면, 그들에게 설교(낭독)할 자료를 공급해야만 했다.

    1542-3년의 성직자회의에서 크랜머는 설교집의 필요성을 열심히 설득하여, 일부 성직자들에게 설교문을 집필하도록 요청하였다. 복음은 모든 전도구교회들에서 선포되어야 하며, 또한 무지나 이설에 따른 오류들이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성직자회의가 끝날 무렵, 일부 설교문들을 준비하였지만 국왕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헨리8세가 사망하고 에드워드6세가 왕권을 계승한 1547년에서야 비로소 크랜머는 그의 기획을 결실로 맺어 <공식설교집>(The First book of Homilies of 1547)을 공표하고 출판하였다. 이 책에 포함된 12편중 두 편의 설교는 적어도 최근에 집필한 것이었으며, 대다수는 1542/3년에 집필된 것이었다. 헨리 치하에서 공표된 교리적인 출판물들(신앙조항에서 언급한 책들)과는 달리, 공식설교집은 교리에 대한 진술서로 잉글랜드왕국의 공식적인 권위에 의해서 최초로 구원에 관한 개혁된 교리를 명확하게 진술한 책이다. 특히 이 설교집은 루터파의 이신칭의[믿음에 의한 의로움]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설명하였으며, 권위있는 교리서로 ‘국왕신앙서’(1543)를 대체하였다.

    에드워드6세는 이 설교문집은 에드워드 왕의 서문과 함께에 출판되었으며, 1547년 7월31일의 국왕명령문(royal injunction)은 잉글랜드왕국의 모든 전도구 교회들에 영문성서, 에라스무스의 복음서와 사도행전 해설서(니콜라스 우달이 영문으로 번역) 그리고 이 공식설교집 한 권씩을 비치하며, 또한 성서를 독서하고 공부하고 설교하는 기본도서로서 이 책들을 사용하도록 요구하였다. 따라서 공식설교집은 잉글랜드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의 교훈[메세지]을 전파하려는 보다 커다란 계획의 하나였다.

    이 책은 다음의 주제들을 포함하였다. 성서독서, 인간의 사악함, 믿음에 의한 칭의[이신칭의], 배교, 올바르게 죽는 법, 통치자에 대한 복종, 그리고 공적 사적인 도덕성. 크랜머 대주교는 이중 4편을 집필하였으며, 다른 집필자로는 존 합스필드(John Harpsfield 1578년 사망), 에드먼드 보너(E. Bonner1569년 사망) 주교, 토마스 비콘(Thomas Becon 1567년 사망) 휴 라티머(H. Latimer 1555년 사망). 이들중 의인론(칭의)에 관한 세번재 설교문이 가장 유명하며, 신앙조항 11항은 이를 권위있는 해설로 승인하였다.

    2.2 교리

    이 12편의 설교문들이 단순히 기본적인 성서적 교리와 도덕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존 월 주니어 박사(Dr John N. Wall Jr)는 국왕의 서문에서 밝힌 여러가지 주제들을 고려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설교집의 내용은 매우 구체적으로 ‘책의 순서 그대로’ 차례로 독서하도록 요구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하나의 단행본처럼 처음부터 특정한 목적으로 논점을 전개하도록 구체적으로 배열된 모음집이다. 둘째로, 이 책은 구체적인 필요-‘신앙의 부패들’그리고 ‘신하들을 모든 오류들로부터 구조하려는 의도’–에 응답하고, 구체적인 수단-‘하느님의 말씀을 진실되게 설명하는 것’-을 통해서 구체적인 목표들-‘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국왕께 봉사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성취하는 한 방법으로 나타난다. 서문은 또한 이 책의 목적을 ‘전능하신 하느님을 공경하고 예배드리도록, 그리고 국왕에게 열심히 봉사하도록 백성들을’ 깨우치려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 서문은 또 그 의미를 ‘모든 겸손과 복종으로’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국왕을 섬기며, 그리고 ‘신실하고 정직하게 모듣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서 환기시키는 것은 진정한 republican Christiana, 즉 그리스도교 공화국[국가]에 대한 비젼[기대]이다. 이는 국가적 생활에 대한 휴머니스트들의 비젼으로 신앙적인 의식 또는 신심활동의 범위를 넘어 인간사회의 모든 면들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을 포함하는 것이다.

    확실히 설교집의 본래 의도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이 책의 뿌리들인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와 루터파의 구원론(soterilogical)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설교집은 에드워드6세 치하 동안에 널리 사용된 후, 메리치하 동안에 공식적으로 허가되지 않았으며, 1559년4월 전례통일법에 의해서 사실상 다시 도입되었다. 개정된 기도서의 감사성찬례에 포함된 지시문[설교집의 독서를 강제하는 문구-역자]은 본래 그대로 채택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1559년에 출판된 설교집은 부제로 ‘여왕 폐하의 권고대로 일반 백성들이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하여 정독하고 이해하도록’을 추가하고, 10번째 설교문에서 여왕의 직함을 최고수장에서 최고 통치자로 수정하였다. 1562년판의 서문은 여왕폐하는 성직자들에게 이 책을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명령하고 분명하게 당부하였다고 선언한다.

    1552년의 개정기도서에서 신경 낭독후의 지시문은 ‘신경후에 설교가 없을 경우, 이미 공표된 또는 이후에 당국에서 공표하는 공식설교집중 한 편을 낭독한다’고 규정하였다. 당시에 어린 국왕은 ‘더 많은 설교문들을 집필하기를’ 기대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너무 빨리 사망하였다.

    두번째 공식설교집은 1563년초 39개 신앙조항과 함께 성직자회의에서 승인받았다. 그러나 여왕과 대신들[그녀의 자문관들]은 몇달 동안에 20편의 설교문(38부로 분류)을 검토한 후 약간 수정하였다. 이 책은 1563년 여름에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첫번째 책에서 약속하고 지적하였던 문제들에 대한 두번째 공식설교집-국왕폐하의 허가로 모든 전도구교회들에서 올바르게 독서하도록 허용한다>.

    존 주얼 주교(1552-71)-중요한 Apologia Ecclesiae Anglecanae(1562)의 저자-가 분명히 이 책의 편집자였다. 일부 설교문들은 그가 직접 집필하였으며, 다른 설교문들을 여러 자료들에서 채택하였다. 당시의 캔터베리 대주교와 차기 대주교인 파케와 그린달도 집필하였다. 1571년에는 파커 대주교가 집필한 ‘불복종과 의도적인 반란을 책망하는 설교’를 추가하였다. 이는 1569년에 발생한 북부지방 반란 때문이었다.

    1563년에 출판된 설교집은 농경사회의 기도성주간(승천일전 3일간) 예배들 뿐만아니라 모든 대축일들에 대한 설교문(13-17)을 제공하며, 하느님에의 개종(20), 개인적인 영성(4, 7), 개인과 가족적인 생활에 대한 도덕적인 표준(5, 6, 18, 19)에 대한 교리들을 가르친다. 또한 전도구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는 것 뿐만아니라 올바르게 참여하는 것을 강조하며(8-9), 전도구교회는 진정으로 예배와 기도의 집이어야 하며 복음을 듣고 따라 사는 자들을 위하여 적합하게 장식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1-3). ‘우상의 위험을 경고하는 설교’는 특히 장문으로 전체의 4분의 1을 차지하며, 1571년의 반란을 책망하는 긴 설교문 앞에 위치하였다. 1547년 크랜머는 믿음에 의한 칭의[이신칭의]가 핵심적인 메세지라고 생각하였던 처럼, 1563년 주엘은 그리스도교 예배의 순수성과 올바른 순서[질서]-중세적인 우상숭배가 없는-를 핵심적인 메세지라고 생각하였다. 공식설교문집들은 분명히 프로테스탄트이지만 퓨리탄은 아니다.

    3. 세계성공회에서의 신앙조항

    성공회신앙의 역사에서 신앙조항에 대한 논쟁들은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로 신앙조항의 해석문제는 성공회내의 칼빈주의자들과 아르미나우스파 사이에 발생한 논쟁을 꼽을 수 있다. 19세초 유명한 신학자인 허버트 마쉬 주교(1757-1839 피터버러)는 칼빈주의적인 해석을 추종하는 성직자들을 그의 교구에서 모두 추방하였다. 두번째로, 18세기 내내 이론적인 연구를 통해서 더이상 옹호할 수 없는 교리들에 대한 동의서약을 성직자이자 학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타당한가를 논쟁하였다. 1722년 성직자의 서약에 반대하는 청원서(Feathers Tavern Petition)에 약 200여명의 지지자들이 서명하였으나, 의회에서 토론후에 패배하였다. 세번째 종류의 논쟁은 옥스퍼드 운동과 관련하여 모든 종교개혁의 표준들을 분열되기 이전의 그리스도교회의 전통에 따라 해석하려는 시도때문에 발생하였다. 소책자90호(39개 신앙조항의 특정 문구들에 대한 입장, 1841)에서 뉴먼의 이러한 입장은 결국 소책자의 출판을 중단시키는 커다란 폭풍을 야기시켰다.

    신앙조항에 대한 서명-성직자들, 그리고 19세기까지 옥스퍼드와 캐임브리지 대학교의 회원[전임]들에게만 요구하였다-이 갖는 정확한 의미는 여러가지로 해석되었다. 일부는 매우 정확한 동의의 필수성을 주장하였지만, 일부-특히 17세기의 로드, 어셔와 브라함 대주교들-는 각 항목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공적인 반대를 회피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17세기말 온건한 학자이자 주교인 버네트(솔즈베리, 1643-1715)는 신앙조항을 잉글랜드교회의 포용성(포괄성comprehensiveness)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1865년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잉글랜드교회의 성직자들에 대한 동의서약 형식을 변경하였다. 1975년 잉글랜드교회는 서문을 포함한 새로운 동의선언문(Declaration of Assent)을 도입하여 교회법 C15에 포함시켰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서문
    잉글랜드교회는 한 분이신 참 하느님 성부, 성자와 성령을 예배하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그리스도교회의 일원이다. 또한 성서에 유일하게 계시되어, 보편적[초기교회의] 신경들(Catholic Creeds)로 공표된 신앙을 고백하며, 이 신앙을 각 세대마다 새롭게 선포한다. 잉글랜드교회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역사적인 신앙고백서들인 39개 신앙조항, 공동기도서, 그리고 주교, 사제와 부제의 서품예식서(the Ordering)에 있는 그리스도교 진리를 증언하여 왔다. 이제 당신이 서약할 동의선언문에서 당신은 그리스도의 은총과 진리를 당신의 세대에 알려주고 하느님을 당신의 신자들에게 일깨워줄 때에, 이 신앙유산을 하느님의 격려[영감]이자 안내로서 이 신앙유산을 충실히 따를 것을 확언합니까?

    동의선언문
    나 (이름)는 성서에 계시되고 초기교회의 신경들에 표현되었으며, 그리고 잉글랜드교회의 역사적 공식선언문들(formularies)이 증언한 신앙을 나의 믿음으로 확언하며, 따라서 이를 선언합니다. 그리고 공적인 기도와 성사의 집행때에, 나는 교회법이 인준하거나 허용한 예배형식들만을 사용하겠습니다.

    이 선언문은 이안 램지 주교가 주로 준비하고 관구의회(전국총회General Synod)에서 수정하였지만, 논점들중 하나는 1865년 이후로 성직자들에게 의무사항이었던 구체적으로 적시되지 않은 동의서약을 해제시켰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조항은 잉글랜드교회의 교회법 A5에 언급된 권위있는 문서들중 하나로 남아 있다. 즉,

    잉글랜드교회의 교리는 성서에 근거하며, 그리고 앞의 성서에 합치되는 초기교회의 교부들과 교회공의회의 가르침에 근거한다. 특히 이러한 교리는 39개 신앙조항과 공동기도서 그리고 서품예식서에서 찾을 수 있다.

    신앙조항이 세계성공회의 각 관구들에서 똑같은 지위로 채택되지 않았다는 점은 앞에서 설명한 역사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아일랜드, 웨일즈, 호주, 카나다와 뉴질랜드 관구들 뿐만아니라, 우간다, 르완다-부룬디-자이레, 나이제리아와 서부 아프리카 관구들은 신앙조항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케냐와 탄자니아는 선택사항으로 각 교구들에 맡겼다. 적어도 그외의 관구교회들은 그들의 헌장에서 신앙조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의 경우, 모교회인 잉글랜드교회와 똑같은 신앙을 공유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신앙조항을 묵시적으로 언급할 수 있다.

    1930년 람베스회의는 신앙조항의 지위를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이 회의에서 세계성공회에 관한 위원회의 보고서는 세계성공회의 정체성을 신앙조항에 대한 언급없이 교회론적이며 교리적인 의미로 규정하였다. 즉,

    […] 세계성공회는 [지리적인 위치에 관계없이] 잉글랜드교회가 항상 지켜온 교리들과 이상들에 근거한 신앙을 채택한 교회들을 포함한다.
    이 교리들이란 무었인가? 우리는 전적으로 공교회적인[초기교회] 신앙(Catholic faith)을 유지한다. 즉. 성서에 포함되어 있으며 사도신경과 니케야신경에 진술된 그리스도의 진리를 말한다. 또한 이 진리는 각 지방에서 채택한 공동기도서에 표현된 것처럼 복음의 성사들과 초기교회(Primitive Church)의 의식들에 표현되었으며, 세가지 역사적 성직에 의해서 보존된다.

    1968년 람베스회의의 폐회직전에 다소 성급하게 채택된 결정문도 이러한 입장을 따랐다. 회의의 주교들은 이안 램지주교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제안을 확고하게 찬성하였다. 즉, 각 관구교회들이 (a)신앙조항을 공동기도서와 합본할 것인지를 고려해야 하며, (b)더 이상 성직후보자들에게 신앙조항에 서명하도록 요구하지 말아야 하며, 그리고 (c)신앙조항에 대한 서명은 신앙유산의 전체 범위에서 그리고 신앙조항의 역사적인 상황 안에서 요구하여야 한다는 점을 확실히 하여야 한다.

    이러한 결정들은 람베스회의의 권위(물론 이 회의는 법제정 권한이 없다)와 관계없이 성공회 교회들이 루터교회(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과 기타문서들)나 장로교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등)와 같은 의미에서 ‘신앙고백문 중심의’ (confessional) 교회로 볼 수 있느냐는 질문을 제기한다. 확실히 16세기의 일부 프로테스탄트들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신앙조항이 중요한 교리들을 모두 포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예를들면, 종말론의 생략), (Geneva, 1581)[정통하고 개혁된 교회들의 신앙고백문들 모음집]에 포함되었다. [루터교의 일치신조(협화신조Formula of Concord)에 대응하여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문들을 모은 책이다]

    그러나, 16세기이후 성공회의 전통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신앙조항을 성공회의 신앙가족(Anglican Household of Faith)의 단일한 교리적 근거로 이해하기 보다는, 전통을 이해하고 성서를 접근하는 망원경의 렌즈들중 하나로 이해하여 왔다. 그러므로 <39개 신앙조항에 대한 동의서약서>(Subscription and Assent to the 39 Articles)은 신앙조항을 항상 기도서와 서품예식서와 함께 한권으로 인쇄하도록 권고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또하나의 중요한 렌즈는 초기교회 신경들(Catholic Creeds)이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오늘이나 미래의 성공회 교회들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렌즈’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참고도서

    Applegate, S. H., ‘The Rise and Fall of the Thirty-Nine Articles: An Inquiry into the Identity of the Protestant Episcopal Church in the United States’. The Historical Magazine of the Protestant Episcopal Church of the United States. 1:4 (1981), pp. 409-21.

    Archbishops’ Commission on Christian Doctrine, Subscription and Assent to the 39 Articles: Report of the Archbishops’ Commission on Christian Doctrine. SPCK, London, 1968.

    Gibson, Edgar C. S., The Thirty-Nine Articles of the Church of England, 4th edn. Methuen & Co. 1904.

    Griffith Thomas, W. H., The Principles of Theology: an Introduction to the Thirty-Nine Articles. Longmans, Green & Co., London, 1930.

    Griffiths, John (ed.), The Two Books of Homilies. OUP 1858.

    Hardwick, Charles, A History of the Articles of Religion. Cambridge 1859.

    Kidd, B. J., The Thirty-Nine Articles, 5th edn. Rivingtons, London, 1911.

    MacCulloch, D., Thomas Cranmer: A Life. Yale, New Haven CT and London, 1996.

    O’Donovan, Oliver, On the Thirty-Nine Articles: A Conversation with Tudor Christianity. Paternoster Press, Exeter, 1986.

    Packer, J. I. and Beckwith, R. T., The Thirty-Nine Articles: Their Place and Use Today. Latimer House, Oxford, 1984.

    Turner, H. E. (with J. C. de Satgé, J. I. Packer, H. G. G. Herklots and G. W. H. Lampe), The Articles of the Church of England. Mowbray 1964.

    2012년 4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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