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번역 프로젝트 자료

  1. Cranmerian
    회원

    종교개혁부터 18세기까지

    William P. Haugaard

    차례
    1. 성공회신앙의 첫세기이자 형성기
    1.1헨리8세 초기의 잉글랜드교회
    1.2교회생활의 연속성과 변화: 1529-1611
    1.3잉글랜드교회의 예배와 가르침[교리]
    1.4단일화된[하나로 통합된] 사회에 대한 비젼들:세속과 교회를 통합한 정부

    2. 성공회신앙의 제2세기 - 비젼의 쇠퇴와 명확한 신앙의 보존: 1611-1738
    2.1.교회생활의 연속성과 변화[단절성]: 1611-1737
    2.2.잉글랜드교회의 예배와 교리[가르침]
    2.3. 단일화된 사회에 대한 비젼의 붕괴

    1. 성공회신앙의 첫세기이자 형성기: 1509-1611

    잉글랜드교회는 그 첫세기부터 유럽의 다른 교회들과 구별되었던 발전적 특성을 가진 자치적인 조직체로 발전하였다.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하나의 특별한 방식을 표현하는 용어인‘성공회신앙’(Anglicanism)은 19세기에야 사용되기 시작하였지만, 신앙과 신앙활동(실제practice)의 독특한 전개과정(trajectory)은 300년전[16세기]에 시작하였다. 성공회신앙은 잉글랜드의 백성들이 서방 그리스도교권의 교회를 오늘날의 교파교회들로 분열시켰던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의 운동들에 동참함으로써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1.헨리8세 초기의 잉글랜드교회

    16세기초 잉글랜드에서의 신앙생활는 전형적인 서방 그리스도교회의 그것이었다. 많은 주민들이 출석한 교회들을 목격하였던 외국의 방문객들은 잉글랜드인들의 신심을 높이 칭찬하였으며, 이러한 인상은 새로이 발명된 인쇄술로 출판된 라틴어와 영문 신심도서들이 널리 유통되었다는 사실로도 입증되었다. 서방교회에 급격한 변화를 몰고올 신앙생활의 결함들은 다른 나라[지방]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잉글랜드에서도 만연하였다. 즉, 대다수 평신도들에 대한 신앙교육이 부족하였으며, 성직자들의 교육수준은 전반적으로 낮았으며, 전례와 성사생활에 대한 최소한의 순응과 습관적인 참여에 만족하였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인 주제들을 강조하지 않았으며, 준그리스도교적인(sub-Christian) 미신들-특히 성인제의 (성인숭배cult of saints)에서-이 만연하였으며, [사후에] 연옥의 은혜로운 통과를 확신하기 위하여 죽음이후의 생활조건들을 조작하는데 열중하였으며, 그리고 대다수 수도원과 다른 [탁발]수도회들의 영성생활 수준이 쇠퇴하였다. 많은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이 세속적인 공직들을 겸직할 때 보유하는 정치적인 권력에 대하여, 교회법원들에서 휘두르는 사법적인 권한에 대하여,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의 수입을 제공하였던 교회소유의 토지들-국가재산의 상당부분을 차지-을 관리하는 경제적인 권력에 대하여 분개하였다.

    1.1.1. 두가지 반대운동: 롤라드파와 르네상스 인문주의
    대륙의 종교개혁의 함성이 잉글랜드 해안에 울려퍼지기 이전에, 두가지 운동들이 잉글랜드에서 널리 유행하는 신앙생활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하나는 지역적이고 은밀하며 주로 남녀 평민들로 구성된 운동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국제적이고 공개적이며, 교회와 평신도사회의 최고위층의 후원을 받는 운동이었다. 롤라드운동(Lollardy)은14세기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에서 시작되었으며, 잉글랜드의 소도시들에 흩어져 있는 종파적인 신앙인들이 느슨하게 결합된 모임으로, 금지된 필사본 영문성서들을 독서하며 성직자들의 사제[제사장]적인 권위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집단들은 색소니와 스위스에서 시작된 종교개혁 사상들이 잉글랜드에 쉽게 정착할 수 있는 준비된 온상을 제공하였다. 종교개혁 사상들은 롤라드운동의 그것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지만, 성서독서와 설교를 강조하고 중세신학의 대부분을 거부하는 공통적인 관심사를 공유하였다. 르네상스 인문주의(Renaissance Humanism)은 유럽의 대륙만큼 잉글랜드에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16세기 직전에 존 콜리트(콜릿John Colet)-곧 런던에 있는 성바울로성당의 수석사제가 되었다-는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 젊은 법률가인 토머스 모어와 그의 손님인 네델란드인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와 함께 성서연구에 몰두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새로운 국왕인 헨리8세의 초청으로 잉글랜드를 다시 방문하여 그의 유명한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본문을 준비하였다. 왕실과 대학교들에서는 학자들과 애호가들이 모여 ‘신학문’(new learning)을 토론하였으며, 이는 곧 그리스도교회의 가르침과 생활에 대한 개혁의 도입을 암시하였다. 롤라드운동과 인문주의는 둘다 잉글랜드에서 당대의 신앙적인 현상에 대한 불만족을 촉진시켰다.

    1.1.2. 잉글랜드: 서방 그리스도교국[세계]의 일원
    잉글랜드의 지리적 위치는 유럽의 다른 지방[나라]들과의 대외관계에서 종종 이중성을 촉진시켰으며, 이는 잉글랜드교회의 생활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1509년 헨리8세가 왕권을 계승하였을 때, 잉글랜드는 노르만 정복이후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유럽의 세속정치와 교회정치에 깊숙히 개입하였다. 물론 잉글랜드의 대륙영토는 한때 넓게는 프랑스 영토의 절반을 차지하였지만, 이제는 칼레 주변의 조그만 고립된 지역뿐이었다. 점차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국가주의와 서유럽제국의 통일적인 역할의 약화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서부와 중부로 구성되고 교황청에 의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교 단일세계(Christendom 또는 corpus Christianorum)는 계속 유지되었다. 즉, 세속과 교회의 치리구조들이라는 이중적인 계급구조(hierarchies)에 의해서 정치적이자 신앙적으로 통합되어 통치되는 하나의[단일한] 사회였다. 이 두가지 계급구조들은 서로 결합될 수도 있었다. 즉, 토마스 울지는 이런 점에서 독특한 사례였다. 그는 1520년대에 요크의 대주교이자 특이한 교황특사(special papal legate)였을뿐만 아니라 왕국의 상서경[대법관]이 됨으로써, 교회와 왕국의 최고위직들을 결합시켰다. 다른 나라[지방]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잉글랜드에서도 국왕의 권위와 성직자의 권위는 종종 충돌하였으며, 이처럼 충돌하는 이론들과 이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방식들에서 잉글랜드는 대륙의 다른 나라들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잉글랜드 지방교회의 고위직들에 대한 임명권이 외국의 교황청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갓 태어난 유럽의 입법기관들 중에서 유일하게 잉글랜드의회는 부분적으로 평신도들의 반성직자주의(anti-clericalism)를 자극하여 외국의 교황권에 속한 교회고위층(성직계급hierarchy)에 반대하며 국왕의 권위를 옹호하였다. 주교들과 귀족 그리고 평민들이 통치권을 가진 ‘의회속의 국왕’(King-in-Parliament)-즉, 잉글랜드국가라는 결합체-을 형성하기 위하여 왕권에 연합하였을 때, 잉글랜드왕국의 정체성은 가장 잘 표현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왕국의 이러한 이상과 통일된 서방 그리스도국의 이상 사이의 갈등은 주기적으로 발생하였다. 현상태의 신앙생활에 대한 점증하는 불만이 중세적인 이상을 한 나라의 범위내에서 실현시키도록 자극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갈등들은 진화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1.3. 대륙의 종교개혁 발발[서막]에 대한 잉글랜드의 반응들
    헨리통치 20년대초[1520년초]에 교황 레오10세는 마틴 루터를 파문하였으며, 이에 대한 반발로 루터는 모욕적인 교황의 교서뿐만 아니라 교황의 지도하에 서방 그리스도교회를 통일시키는 교회법 사본을 소각하였다. 발명된지 겨우 75년밖에 되지않은 구텐베르그의 이동식활자 인쇄술은 루터파의 문건들을 유럽 전역으로 확산시켰으며, 일부는 북해를 건너 잉글랜드까지 도달하였다. 1520년대말까지 이러한 종교개혁 출판물들은 루터파사상(Lutheranism)과는 달리 ‘개혁주의’ (개혁파, 개혁Reformed) 신학을 발전시키고 있던 취리히와 바젤에서 나온 저서들로 보충되었다. 교회의 고위층과 대학교의 동아리들, 그리고 개혁적인 신념 또는 지적인 호기심을 가진 지식인들은 호기심과 공포심 속에서 기존의 교회권위에 대한 이러한 대담한 도전들을 독서하였다. 해외에 거주하거나 여행하는 잉글랜드 상인들과 개혁성향의 성직자들은 새로운 가르침들을 기꺼이 수용하였다. 1524년 젊은 학자이자 성직자인 윌리엄 틴들은 모국어인 영어성서를 준비하기 위하여 대륙의 자유를 찾아 급히 떠났다. 긴급행동을 촉구하는 대륙 개혁가들의 목소리는 1520년대의 잉글랜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잠재적인 공감대를 자극하였다. 롤라드들은 이러한 새로운 신앙운동들을 접하였을 때에 강력한 동조세력을 만난 것으로 판단하였다. 인문주의자들의 반응은 두갈래로 나뉘었다. 즉, 한편으로 모어-에라스무스 포함-와 같은 부류들은 성서에서 그리스도교의 통일성에 대한 메세지를 읽고 서방교회의 분열에 반대하였으며, 다른 한편은 성서의 가르침이 서방교회의 통일성을 희생시키더라도 개혁을 요구한다고 확신하였다.

    대륙의 종교개혁의 함성들에 대한 고위성직자들의 공식적인 반응은 모두 부정적이었다. 런던 주교[커트버트 턴스톨]는 잉글랜드에 유포되기 시작한 틴들의 영어번역본 신약성서를 공개적으로 소각시켰으며, 켄터베리 대주교[워햄]는 국내로 유입된 사본들을 모두 구입하려 시도하였다. 당국은 대륙의 새로운 가르침들이 국내의 롤라드운동과 일치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이를 유포하는 자들에게 이단죄를 부과하였다. 루터의 주장을 반박하는 저서인 <Assertio Septem Sacramentorum>(7가지 성사에 대한 변론)을 헨리왕의 이름으로 발표하였으며, 이에 대한 답례로 교황 레오10세는 헨리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1521]. 국왕의 주무대신인 울지의 영향으로 왕정에서 승진하며 국왕의 저서집필을 보좌하였던 토마스 모어는 대륙적인 ‘이단들’을 축출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틴들이 ‘스스로 가르치고 따르는 이설들’에 따라 신약성서를 번역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종교개혁의 신념 때문에 잉글랜드에서 최초로 두 성직자[토머스 빌리와 존 프리드-역자]-하나는 분명히 모어의 주도로-가 처형되던 바로 그때에, 토머스 모어는 헨리가 곧 로마와 단교할 것을 예상하였기 때문에 양심적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1.2. 교회생활의 연속성과 변화: 1529-1611

    헨리치하 후반기부터 엘리자베스치하 초기까지 30년 동안에, 잉글랜드교회에는 신앙과 신앙활동(practice)에 대한 적어도 6가지의 변화들이 연속적으로 규정되었다. 엘리자베스와 제임스 치하에서 지속적인 개혁에 대한 요구들은 이미 확립된 표준에 대한 주요한 변경을 고려하지 않겠다는 공식적인 정책들에 의해서 저지되었다. 성공회신앙의 첫세기[형성기]에서 두 시기-급속한 변화기와 긴장속의 안정기-는 연속적인 시련기였으며, 이를 통해서 분명하게 구별될 수 있는 독특한[차별화된] 형태의 그리스도교회가 출현하였다.

    1.2.1. 잉글랜드교회의 독립: 헨리8세
    신앙개혁과 국가적 이익에 대한 관심이 독립적인 잉글랜드교회를 추구하는 동기들의 근거였다 하더라도, 로마와의 단교를 촉진시킨 것은 잘 알려진대로 왕비인 케서린을 버리고 앤 불린과 혼인하려는 헨리의 욕망이었다. 헨리가 제기한 혼인무효소송의 가능성에 대하여 교황이 표시한 교회법적인 의구심은 케서린의 조카인 황제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교황의 곤란한 상황, 앤에 대한 헨리의 열애, 국왕의 합리화된 양심상의 갈등, 그리고 왕세자를 기대하는 국가적인 관심 등은 모두 국왕에게 독특한 잉글랜드적인 해법을 추진하도록 자극하였다.

    토마스 울지는 국왕에게 교회의 권위와 세속의 권위를 효과적으로 결합시키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헨리는 울지의 부하였던 토마스 크롬웰로부터 의회를 조종하여 국왕의 목적들을 달성하는 방법을 배웠다. 4년에 걸쳐[1530-34] 의회에서 제정된 법률들은 마침내 1534년에 잉글랜드의 국왕이 ‘Anglicana Ecclesia라고 명칭되었던 잉글랜드교회에 대한 지상의 유일한 수장(supreme head)’이라는 선언으로 완결되었다[국왕수장권법]. 이와 동시에 개최된 성직자회의들은 성서에 따라 로마주교는 ‘잉글랜드에서 다른 외국의 주교들과 같은 권위만을 갖는다’고 확언하였다. 잉글랜드의 일부 백성들에게 잉글랜드교회는 ‘외부의 어떠한 간섭도 없이 스스로의 업무를 수행하기에 자격을 갖추고 충분하였던’ 초기시대의 조건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잉글랜드가 그리스도교국 (Christendom)의 통일성을 배신하였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의회의 결정들을 수행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처형당한 토마스 모어와 존경받았던 존 피셔 주교의 증언들에서 나타났다.

    의회는 특히 잉글랜드교회의 독립이 ‘그리스도교국의 보편적 신앙’(Catholic faith)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 거부하거나 변경하려는’ 어떠한 의도를 포함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선언하였다. 그러나 헨리는 토머스 크랜머를 켄터베리 대주교로 지명하였다. 그는 캐임브리지 대학교에서의 연구와 독일방문을 통해서 루터파신앙에 영향을 받은 사제로, 독일에 체류하는 동안에 뉴른베르그의 유명한 개혁가인 안드레아스 오시안더(Andreas Osiander)의 질녀[조카딸]와 결혼하였다. 1540년까지 6세기부터 잉글랜드 사회의 한 구성요소였던 수도원들은 사라졌고, 그 재산들은 국왕의 판단에 따라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수도원들의 해산이 로마와의 단교에 따른 가장 중요한 직접적인 사회적 결과[변화]라면, 1539년에 공표된 모국어 성서인‘Great Bible’[대형판 영역성서]은 가장 중요한 신앙적 변화였다. 이외에 교회생활의 다른 변화들은 사소한 것들이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앙활동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은 헨리의 왕위계승 때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1.2.2. 일관된 프로테스탄트 개혁프로그램: 에드워드6세
    1547년 9살의 에드워드6세가 왕권을 계승하였을 때, 헨리가 지명하였던 섭정추밀원에는 교회개혁 지지자들이 다수파를 차지하였다. 새로운 국왕의 삼촌-곧 서머싯공작이 되었다-은 추밀원을 완전히 장악하여, 대주교 크랜머와 다른 동료 위원들과 협력하여 교회개혁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2년반만에 서머싯은 노섬벌랜드 백작으로 대체되었지만, 교회개혁의 조치들은 1533년 국왕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중단될 때까지 더욱 빠르게 추진되었다.

    처음에 추밀원은 공식설교집(homilies)을 지정하고, 전도구교회의 예배에서 모국어인 영어를 더욱 자주 사용하도록 명령하였다. 의회는 위령미사(requiem Mass)를 위해 설립된 기부금제도(chantry)과 교회의 다른 기부제도를 폐지시킴으로써 두번째로 교회재산을 국왕과 개인들의 사유재산으로 전환시켰다. 이후 2년안에 의회는 완전한 영문전례서인 공동기도서를 승인하였다. 이제 새로운 지방어[모국어] 예배에 익숙해진 3년후에는 대륙의 종교개혁과 분명하게 일치하는 두번째[개정] 기도서로 대체하였다. 성직자회의와 의회는 공식적으로 성직자의 결혼을 허가하였다. 새로운 교리적 입장들은 1553년의 42개 신앙조항(42 Articles of Religion) 그리고 기도서에 포함된 교리교육서에서 분명하게 강조되었다. 이 6년 동안에 잉글랜드교회는 두차례의 연속적인 신앙개혁을 통해서 전통적인 형태로부터 탈피하였다.

    1.2.3. 로마권위[체제]로의 복귀: 메리
    메리 튜더는 그녀의 왕권계승에 대한 폭넓은 지지를, 그리고 인기없던 노섬벌랜드의 당연한 몰락을 ‘하느님과 이 세계’가 알고있듯이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지켜온’ ‘옛 신앙’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으로 해석하였다. 일년반만에 연속적으로 소집된 [두차례의] 의회는 에드워드와 헨리 치하에서 제정되었던 [개혁]법률들을 단계적으로 폐기하였으며, 레지널드 포울 추기경은 로마교구로부터 이탈하였던 국가의 분열죄(schism)를 사면하였다.

    결혼한 성직자들, 기도서, ‘이단적인’ 가르침들, 그리고 심지어 모국어로 번역되었던 성서조차도 공적인 자리에서 사라졌으며, 다만 평신도들에게 이전되었던 교회재산만이 직전의 두 왕정의 개혁물로 잔존하였다. 이단자처벌 법률들의 복원으로 거의 300여명이 화형으로 처형당하였으며, 일부 잉글랜드 백성들은 과거의 롤라드들처럼 그들의 신앙을 비밀리에 실행하였으며, 약 800여명은 외국의 프로테스탄트 피난처로 탈출하였다. 메리치하의 5년간은 잉글랜드교회의 형태를 외형적으로 부왕[헨리]의 통치 초기시대로 복귀시켰다. 그러나 메리의 열렬한 희망과는 반대로 많은 백성들은 로마권위로의 복귀를 곧 화형의 악취, 스페인의 필립공과 메리의 인기없었던 혼인, 그리고 통치말 칼레의 상실과 같은 것으로 인식[취급]하였다. 1558년 메리가 사망함으로써, 그녀의 통치는 동생[에드워드]처럼 잉글랜드 사회와 백성들의 마음속에 ‘옛 신앙’을 정착시키기에 너무나 짧은 기간이었다.

    1.2.4. 견고한 신앙정책 확립: 엘리자베스1세
    메리의 사망 6개월후, 교황 바울로4세는 엘리자베스가 ‘한편으로 유해한 학문,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상실에 대한 우려’ 사이에서 신앙문제들에 대하여 망설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녀의 아버지와 남동생 치하로부터 물려받은 ‘유해한 학문’은 이미 시대의 대세였다. 왜냐하면, 엘리자베스는 계승 첫주부터 교황의 권위를 다시한번 거부하는 확고한 결단을 지속적으로 과시하였기 때문이었다. 여왕의 사망후에 프란시스 베이컨은 ‘그녀는 계승후 일년 이내에 교회와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확립시키고 정착시켰으며, 그녀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로부터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논평하였다. 의회는 국왕을 교회의 ‘최고통치자’(supreme governor)로 인정하고 에드워드시대의 두번째 기도서에 주로 근거한 세번째 기도서를 규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엘리자베스는 교회생활의 구체적인 내용을 규정하는 명령문들[왕령들 injunctions]을 공표하였다. 1559년 기도서, 국왕수장권법 그리고 국왕명령문들은 엘리자베스의 통치기간 내내 신앙정책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엘리자베스 통치 첫10년 동안에 트렌트회의는 마지막 회기[1562-3]를 개최하였으며, 반종교개혁의 영성으로 강화된 로마 가톨릭신앙은 잉글랜드 왕국교회에 위협적인 반대세력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옛 신앙’을 고집하는 일부 잉글랜드 왕국민들 그리고 이들을 사목하려는 사제들은 국제적인 정치관계로 인하여 궁지에 빠졌다. 1570년 교황 비오5세(Pius V)는 엘리자베스를 파문하고 공식적인 폐위를 선언함으로써, 잉글랜드의 교황추종자들을 잠재적인 반역자들로 만들었다. 외국의 군사적 침략이나 엘리자베스의 암살을 통해서 로마체제로의 복귀를 추구하는 극단주의자들은 그들의 동료신앙인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결코 얻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음모들로 인하여, 신앙적인 목적을 위하여 잉글랜드의 로마 가톨릭 신앙공동체를 보존하고 확장시키려는 선교사제들은 반역죄로 야만적인 고문과 처형을 당하였다.

    엘리자베스의 통치 첫해에 이미, 개혁을 지향하는 평신도와 성직자들 중에서 1559년의 신앙정책(Settlement)을 임시적인 조치로 인식하고 망명지에서 체험하였던 대륙의 교회들을 모델로 보다 완전한 개혁을 추구하려는 확고한 활동가들(급진파militants)이 분명하게 존재하였다. 이들은 1563년의 성직자회의를 크게 기대하였으나, 이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에드워드 시대의 42개 신앙조항에 대한 보수적인 개정[39개 신앙조항] 뿐이었다. 개혁에 대한 논쟁들은 처음에 전례복과 성직자의 평상복에 대한 문제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1572년 이후로, ‘퓨리탄’으로 명칭된 자들중 잘 조직화된 소수파들은 신약성서에서 찾았다고 주장하는 신앙활동과 예배에 대한 권징(discipline)과 신실한 질서(올바른 예식godly order)를 실행하기 위하여 국가의 법으로 규정된 주교제(Episcopal ministry)를 노회제(장로제Presbyterian) 구조들로 교체하려고 시도하였다. 성직자회의들에서 실패한 후 퓨리탄들은 의회로 방향을 돌렸다. 그들은 의회에서 상당한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여왕은 반복적으로 그들의 제안을 좌절시켰다. 1603년 여왕의 사망때에 잉글랜드교회는 1559년의 신앙정책, 외부적으로는 로마 가톨릭교도들과의 투쟁,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신앙정책 지지자들과 이를 미완의 개혁으로 인식하는 자들 사이의 긴장상태를 통해서 그 성격을 확립하였다.

    1.2.5. 계속된 투쟁과 협력: 제임스1세 초기
    스코틀랜드의 제임스4세는 추가로 [잉글랜드의] 제임스1세로 잉글랜드의 왕권을 계승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잉글랜드의 퓨리탄 대표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제임스가 스코틀랜드의 개혁주의교회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엘리자베스가 좌절시켰던 ‘당연하고 신실한 개혁’을 기꺼이 추진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제임스는 먼저 친절한 응답으로 주교들과 퓨리탄 성직자들을 햄프턴궁 회의에 초대하였다. 이 회의에서 주교들은 국왕의 확실한 지지를 받으며, 퓨리탄들에서 사소한 사항들만을 양보한 1604년 기도서를 제작하였다. 이후 계속된 성직자회의는 대체로 기존에 확립된 표준들을 재확인하고 퓨리탄의 일부 의례거부(conformity)에 대한 법적인 여지를 축소시킨 교회법률집(Book of Canons)을 제정하였다.

    햄프턴궁 회의는 한가지 중요한 결실로 새로운 성서번역을 결정하였다. 메리시대의 망명자들은 1560년 제네바성서를 준비하였으며, 엘리자베스 치하의 주교들은 1568년 그들 나름의 개정판[Bishop’s Bible]을 출판하였다. 제임스와 주교들은 제네바성서의 교리적으로 편향된 주석문들을 반대하였으며, 퓨리탄들은 공인된 주교들의 성서에 포함된 부정확한 번역들을 비판하였다. 퓨리탄들이 자발적으로 새로운 성서번역을 제기하였을 때, 제임스는 열성적으로 환영하며 이 계획을 리처드 벤크로프트-곧 켄터베리 대주교에 임명됨-에게 맡겼다. 벤크로프트는 이 과제를 수행할 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들을 조직하였으며, 적극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자들과 국교회 지도자들과의 공동작업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1611년 흠정역(Authorized) 또는 ‘제임스왕’(King James) 영문성서가 공표되었으며, 이후 3세기반 동안에 모든 영어권 그리스도인들-로마 가톨릭교회 제외-에게 유일한 성서가 되었다. 아마도 한 위원회가 문학적 대작을 산출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의 유일한 사례일 것이다.

    헨리8세의 왕권계승부터 제임스왕 성서의 출판까지의 한 세기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믿고 실천하는 독특한 방식의 윤곽들을 형성시키는 정형기였다.

    1.3. 잉글랜드교회의 예배와 가르침[교리]

    성공회신앙은 결코 쉽게 정의된 적이 없었더라도, 대다수의 설명들은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통해서 형성된 성공회 교회들의 역사적인 선조들에 크게 의존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단순히 또다른 질문을 제기한다. 즉, 잉글랜드 종교개혁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단 한명의 주도적인 인물, 또는 단 하나의 일관된 신학적인 원리, 또는 단 하나의 완성된 신학체계, 또는 공동체에 대한 하나의 독특한 비젼, 이들중 그 어느 것도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서 발생한 사건들의 진행과정을 압도적으로 주도하지 못하였다. 즉, 잉글랜드 종교개혁은 정치적인 사건으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물론 이 때의 ‘정치적’이란 의미는 세속적인 문제들 뿐만아니라, 신앙적인 활동들과 신념들 그리고 교회구조들을 포함하는 [국가]공동체 생활의 다양한 측면들을 반영하는 넓은 의미의 인간관계들을 언급한다. 대륙의 종교개혁들 역시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적이었다. 그러나 루터파, 개혁주의 그리고 재세례파들의 정치적인 과정들은 보다 분명하게 설명되고 보다 확실하게 집중된 신앙적 근거들에 종속되었으며, 그리고/또는 정당화되었다. 또한 이에 참여한 특정한 교회공동체들의 구성원들은 이러한 신앙적 근거들을 폭넓게 수용하였다. 대륙의 관점에서 본다면, 잉글랜드의 과정(내용이 아니라)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반종교개혁’의 그것과 가장 유사하였다.

    최종적으로 형성된 성공회신앙의 독특한 성격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16세기의 잉글랜드 지도자들은 공동기도서의 핵심적인 저자이자 순교한 성직자인 토마스 크랜머와 그의 대자녀인 평신도이자 국왕인 엘리자베스 튜더였다. 그녀는 긴 통치기간[약45년] 내내 신앙정책(Settlement)을 일관적으로 유지함으로써 신앙적인 태도와 확신을 정착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두사람은 당대인들을 위하여(그리고 후대의 학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앙활동(practice)에 대한 그들의 이해[입장]를 완전하게 설명[제시]하지 않았다. 한편 대륙의 종교개혁 교회공동체들의 경우 각 전통들의 신학적 대가들은 공동체가 처음 형성될 때에 나타났지만, 잉글랜드의 경우 이후 세기들에 가장 널리 독서된 16세기 잉글랜드 신학자는 리처드 후커였으며, 그의 저서들은 1590년대에야 출판되었다. 그는 메리시대에 출생하여 엘리자베스시대의 교회에서 성장하였으며, 그가 직접 복음을 체험하고 신학을 배웠던 교회를 옹호하고 설명하기 위하여 책을 집필하였다. 잉글랜드교회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구체적 표현[설명]은 개혁의 시작때가 아니라 끝부분에서 발표되었다.

    1.3.1. 새로운 신앙이해의 토대들: [영어]성서와 기도서
    1538년 헨리8세가 ‘전도구민들이 가장 편리하게 접근하고 독서할 수 있도록’ 각 전도구교회들에 영문성서를 비치하도록 명령하였을 때,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국왕은 교리적인 변화와 새로운 신심을 위한 토대를 제공하였다. 에드워드 치하의 첫번째 국왕명령문들(Injunctions)은 일부 라틴어 예식들에서 영문성서를 독서하도록 지시하고, 성직자들에게 평신도들의 사적인 성서독서를 저지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평신도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하여 반드시 수용하고 믿고 따라야 하는 하느님의 생생한 말씀인 [성서를] 독서하도록 권고하라’고 지시함으로써 이러한 토대를 강화하였다. 2년 사이에 공표된 두권의 모국어 공동기도서들은 [감사]성찬례의 성서독서와 매일기도[성무일과]의 성서정과를 포함하였다. 구약성서는 일년 동안에 전권을 독서하며, 신약성서는 일년에 거의 3번 독서하도록 규정하였다. 영문성서의 새로운 인쇄본들이 급증하였으며, 제임스왕 성서번역이 추진될 때까지 영문성서는 잉글랜드의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문화적, 교육적, 정치적인 생활에서도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였다.

    새로운 성직서품예식서는 사제들에게 오직 ‘외적인[객관적인] 구원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의해서 입증될 수 있는 것’만을 가르치도록 요구하였다. 엘리자베스 치하에서 외적인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 아닌 것들에 성서의 권위를 적용하는 문제에 대한 이견[논란]은 지속적인 개혁을 지지하는 자들과 신앙정책(Settlement)의 유지를 주장하는 자들 사이에 나타난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퓨리탄인 윌리엄 퍼킨스는 성서가 ‘우리의 모든 행동들을 조직하고 형성시키는 규칙이자 기준이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이는 잉글랜드교회의 진보파들(militants)과 대륙의 개혁주의 (Reformed) 교회의 신념이었다. 하지만 후커는, 성서가 그 안에서 분명하게 금지하지 않은 것들을 허용한다고 판단하였던 루터파들처럼, ‘자연이 인간의 복장에 대하여 인간의 지혜에 맡긴 것처럼, 성서가 상당수의...것들을 교회의 판단에 맡긴 것은 불명예[치욕]가 아니다’고 주장하였다.

    헨리 치하에서는 1544년의 영문연도를 제외하고 모든 라틴어 예식들이 그대로 보존되었다. 그러나 모국어 전례에 대한 토마스 크랜머의 열망은 헨리의 아들 에드워드 치하에서 즉각적으로 실행되었다. 두 종류[빵과 포도주]의 성찬배수[배찬]에 관한 의회의 법률과 함께 공표된 국왕의 명령문들과 왕명들은 라틴어 예배들에 영문으로 된 항목들과 신심기도들(devotions)을 삽입하였다. 여기에는 성찬배수[영성체]를 준비하는 사적인 고백[고해성사]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성찬배수를 격려하는 공적인 죄의 고백[general confession]을 포함시켰다. 1549년 기도서를 인가하는 전례통일법은 라틴어 예식들 전체를 영문 예식들로 교체하였다. 영문예식들은 회중들의 참여를 더욱 확대하였으며, 매일기도를 수도원의 8차례 기도에서 아침과 저녁의 기도로 축소하였으며, 또한 미사의 희생제의적인 성격을 최소화시키고 영성체[성찬배수]를 강조하도록 [감사]성찬례 예식을 개정하였다.

    잉글랜드의 대학교 교직을 맡고있는 대륙의 개혁가들인 마르틴 부처와 피터 마터 버미글리의 비판들, 요하네스 아 라스코가 지도하는 런던의 외국인교회의 활동사례, 그리고 새로운 예배들에 대한 보수적인 해석들은 개혁가들에게 기도서를 보다 철저하게 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1552년 개정기도서의 지시문들은 석재제대 (altar)를 목재 성찬식탁으로 교체하고 성가대 또는 본당의 중앙에 위치시키며, 중백의와 주교의 성무일과 전례복(choir dress즉 주교용 중백의인 rochet)을 제외한 모든 전통적인 전례복들을 제거하였으며, 매일기도들 앞부분에 참회적인 의식을 추가하였으며, 그리고 성찬예식[감사성찬례]를 과감하게 축소시켜 축성경의 탄원(간청precatory)만을 유지시켰다.

    이러한 전례개혁은 메리치하에서 폐기되었지만, 1559년의 기도서와 엘리자베스의 초기 명령문들은 예배의 표준을 에드워드의 마지막 해의 그것들[1552년 기도서]보다 약간 더 전통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퓨리탄들은 기도서들에 남아있는 ‘교황제적인’(popish) 잔재들-즉, 의무적인 전례복들(대례복 포함), 성직자의 평상복[외출복], 성찬례 이외의 경우 휘장[제대포]으로 덮은 성찬식탁을 기존의 석재제대[교회의 동쪽끝]에 배치하기, [성찬용으로] 이스트를 넣지않은 빵의 사용, 세례예식에서 이마에 십자성호긋기, 혼인예식의 반지사용 등-을 몹시 싫어하였다. 이것들에 대한 거부행동(nonconformity)은 일반적이었으며, 교회법원들과 논박용 소책자들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일부 소도시들에서 설립된 퓨리탄 강좌기금은 추가적인 설교활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1559년부터 1611년까지 대학교육을 받아 설교능력을 가진 성직자들의 급격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개혁가들은 공식설교집만을 낭독하는 ‘짓을줄 모르는 개들’(멍청이들dumb dogs)에 대하여 계속해서 한탄하였다. 한편 평신도들은 일년에 한차례만 성찬에 참여하였던 중세의 관습을 여전히 고집하였기 때문에, 개정된 기도서에 따른 성찬례는 분기별 또는 월별로 한번씩만 거행되었다. 아침기도, 연도, 말씀의 예배(Ante-communion성찬의 전례가 없는 예배), 그리고 설교 또는 설교집 낭독으로 이어지는 장시간의 전례는 잉글랜드의 일반적인 주일예배였다. 1611년에 이르러 잉글랜드교회의 세번째[제3] 세대는 기도서의 배경 속에서 그들의 신앙을 배우고 실천하였으며, 기도서는 성서와 함께 신앙적 가르침들과 신심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1.3.2. 교리적 정의들과 입장들
    헨리치하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프로테스탄트 교리들을 교대로 수용을 고려하였다가 거부하였다. 헨리의 통치시대는 1539년의 6개조항법과1543년의 국왕신앙서-중세교회의 교리들을 약간만 수정였다-에 요약된 교리적 표준으로 마감하였다. 에드워드 통치초기에 의회는 이 두가지 보수적인 표준들을 폐기시켰으며, 추밀원은 설교능력이 없는 성직자들이 낭독하도록 만든 공식설교집(Homilies)을 발행하였다. 크랜머는 이 설교집의 한 설교에서 이신칭의론(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을 확고하게 주장하였다. 기도서는 이러한 새로운 강조점들을 반영하였으며, 또한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과 아타나시오신경을 사용함으로써 그리고 간결한 어린이용 교리교육서에서 전통적인 교리들을 확언하였다. 에드워드의 사망 직전에 발표된 42개 신앙조항과 또다른 교리교육서는 공통적인 프로테스탄트 신앙들을 반영하였다. 물론 이 신앙조항은 루터파의 공식발표문들[신앙고백 선언문들]의 문구들중 일부를 반영하였지만, 예정론과 성찬례의 현존에 관한 이해에서는 개혁주의 교회들(Reformed Churches)에 더욱 가까웠다.

    존 주얼은 1562년 <잉글랜드교회 옹호론>(Apology of the Church of England)을 라틴어로 출판하여, 잉글랜드교회를 로마 가톨릭교회와 재세례파들에 반대하며 대륙의 루터파와 개혁주의파와 확고하게 공조하는 교회로 자리매김하였다. 성 바울로교회의 수석사제인 노월(Nowell)은 1553년의 교리교육서보다는 훨씬 더 칼빈의 제네바 교리교육서에 의존한 새로운 교리교육서를 출판하였다. 1563년의 성직자회의에서 진보파들은 이 책에 대하여 교회의 신앙고백적인 지위를 부여하는데 실패하였지만, 주교들은 나중에 학교교장들에게 학생들을 교육할 때에 영어와 라틴어로 된 이 교리교육서를 사용하도록 허가하였다. 또한 이 성직자회의는 1533년의 신앙조항[42개조]을 영구적인 39개 신앙조항으로 개정하였으며, 모든 성직자들에게 교직취임 때마다 서명하도록 요구하였다. 새로운 신앙조항은 당시의 로마 가톨릭신앙의 거부를 강조하였으며, 예정론 항목을 약화시켰으며, 또한 기도서의 변화들에 맞게 성찬현존에 대한 확언을 강화시켰다. 많은 칼빈주의자들은 이중예정론 교리를 점점 더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개정된 신앙조항을 매우 모호하다고 비판하였다. 39개 신앙조항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체론과 츠빙글리파의 최소주의적인(minimalist단순한 상징적) 이해도 거부하였다. 신앙조항의 성찬신학은 불링거의 이해부터 멜랑히톤의 이해까지 포용한다고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에, 1557년의 일치신조(협화신조Book of Concord)에 나타난 엄격한 루터파신앙은 39개신앙조항의 표현들을 불충분한 것으로 판단하였을 것이다. 1571년 의회에서 신앙조항에 대한 성직자들의 서명을 의무화하는 법률을 제정하였을 때, 일부 퓨리탄들은 치리제도와 성직제도에 관한 조항들을 배제하고 ‘오직’교리적인 조항들에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주교들이 제정한 명확한 교회법률들-인준받지 않았으나 구속력을 가졌다-은 39개조항 전체를 고집하였다.

    잉글랜드교회의 신학적인 표준들의 허용범위는 신앙정책의 확립이후 반세기 동안에 잘 정착되었다. 윌리엄 퍼킨스는 개혁주의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잘 조직화된 ‘칼빈주의자’ 신학체계를 발전시켰다. 이와 동시에 똑같은 교회에서 리처드 후커는 [신학적인] 체계들을 회피하면서도, 교회의 판단기준을 전통을 통해서 밝혀지는 성서와 이성의 권위에 근거시키는 신학적인 틀을 제공하였다.

    1.3.3. 구체화된 성공회신앙:비-신앙고백적인 교회가 갖는 초교파적인 의미들
    성공회신앙을 형성시킨 첫세기의 정치적 사회적 과정들은 종교개혁 시대에 독특한 국가단위의 교회(national church)를 확립시켰다. 잉글랜드교회는 대륙의 개혁가들의 근본적인 통찰들을 포용하면서도, 그 신앙적인 통일성을 신앙고백적인 선언이 아니라, (1)외적인[객관적인] 구원에 필수적인 문제들에 대한 성서의 최고성, 그리고 (2)합의된 기도서-즉, 많은 함축적인 신학적 시각들을 내포하면서도 명백한 교리적인 표준들로는 오로지 초기교회의 신경들과 간단한 어린이용 교리교육서만을 포함하는 합의된 기도서-에 근거하였다. 39개 신앙조항은 성직자들에게 교리적인 기준을 제공하였다. 평신도들은 직접적으로 공동기도서와 여기에 포함된 성서적인 부분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는 공식설교집과 신앙조항에 순응하는 설교자들의 설교를 통해서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적 표준들과 접촉하였다.

    ‘말씀’ 보다 ‘성사’를 강조하였던 중세적 특징은 종교개혁을 통해서 근본적으로 변경되었다. 모든 잉글랜드 개혁가들은 ‘말씀’에 설교가 포함된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에, 설교능력이 없는 사목자들을 한탄하였다-진보파는 이를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많은 퓨리탄들의 관심사를 공유하였던 그린달 대주교는 설교를 ‘인류의 구원을 위한 정규적인 수단이자 도구’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리처드 후커는 설교를 ‘하느님의 나라에 다가가는 열쇠들’이라고 적극적으로 칭찬하면서도, 성서의 독서, 교리교육서의 공부, 그리고 공식설교집의 낭독들도 ‘설교’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후커는 설교에 대한 논의를 교회건축물들과 구체적인 전례적 사항들에 대한 논의들 사이에 위치시켰다. 따라서 그는 성사들을 논의할 때에, 다시 근본적인 그리스도론 교리들에 대한 논의로 되돌아갔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안에 계시며, 성사들은 어떻게 우리를 그리스도에의 참여자[영성체]로 만드는데 기여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필수인 것으로 보인다...세례를 통해서 토대를 닦고 새로운 생활의 첫 시작을 얻은 자들은 [성찬례에서] 그들의 생명을 지속시키도록 처방된 영양분과 음식을 받는다.’

    말씀과 성사에 대한 후커의 균형은 그린달의 그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엘리자베스 치하에서 성찬례는 자주 거행되지 않았으며 또한 성사에 대한 교리적인 표준들을 퓨리탄들과 공유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교 생활에서 성사들의 역할에 대한 후커의 이해는 전통적인 가톨릭신앙(traditional Catholicism)에 훨씬 가까웠다.

    대다수 서방교회들이 정통적인 믿음과 신앙활동(practice)에 대한 표준을 축소시키던 시기에, 잉글랜드교회의 공식적인 정책들은 놀랍게도 보다 폭넓은 이해들에 개방되었다. 열렬한 자와 무관심한 자, 전통주의자들과 퓨리탄들, 박식한 자들과 문맹자들 모두가 하나의 틀 안에서 그들의 신앙을 추구하였다. 왕국교회 밖의 로마 가톨릭신자들과 내부의 진보파들은 동의하지 않았겠지만, 대다수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엘리자베스가 황제 페르디난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적한 것처럼, ‘새롭고 낮설은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초기 공교회(Catholic church)가 인정하였고, 그리고 대다수 초기교회 교부들이 동의하는 정신과 표현에 의해서 승인받았던 바로 그 신앙’을 따른다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처드 후커는, ‘그리스도교국’의 분열로 인한 피흘림과 쇠퇴는 ‘모든’ 교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교회를 가장 잘 재확립시킬 수 있는 협의’를 시작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제시하였다. 그는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조용하고 온건한’ 과정이 이러한 교회일치적인 노력에 ‘유익한 방향으로서 기여할 것’으로 확신하였다.

    1.4. 단일화된[하나로 통합된] 사회에 대한 비젼들:세속과 교회를 통합한 정부

    중세기의 비젼이었던 단일화된(unitive) 사회는 서구 그리스도교권의 분열된 국가교회들 사이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지속되었다. 정치이론들은 신학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여러가지 형태들을 가진 구속력을 갖는 권위[통치권]는 정치적인 단위들과 신앙적인 단위들 모두로 구성된 사회들 안에 있는 성직계급과 세속계급을 결합시켰다. 독특한 잉글랜드적인 형태는 국왕수장권과 전통적인 주교제 치리형태를 특징으로 하였다.

    1.4.1. 국왕수장권과 의회
    의회는 잉글랜드의 의회법률로 국왕수장권을 확립하였다. 물론 이론적으로 의원들은 ‘정당하고 합법적이며 당연한 것’을 인정하였을 뿐이었다. 잉글랜드의 입법권은 모호하게 정의되는 ‘의회안의 국왕’(King-in-Parliament)에 있었으며, 주교들은 이미 귀족원에서 성직계급을 대표하였지만, 일부는 성직자들의 모임인 성직자회의 (Convocation)를 의회에 부속된 기관으로 판단하였다. 후커에 의하면, ‘모든 통치권(government)의 핵심’은 ‘성직자회의를 병합한’ 의회, 즉 국왕과 그의 모든 신하들이 직접 또는 대리로 참여하는 기관인 의회에 의존하였다. 헨리시대의 법률들은 국왕에게 의회에 대한 그의 권한과 똑같은 성직자회의의 법률제정권과 거부권을 주었다. 후커는 ‘성직자들만이’ 평신도에 대한 법률들을 제정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였다. 오히려 국왕과 세속 귀족들과 평민들, 그리고 성직계급 모두가 강제력을 갖는 법률에서 [교회의] 치리를 규정하는데’ 필수적인 전체교회의 ‘전반적인 동의’를 제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의회의 법률들은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중대한 구조적인 변화들을 도입하였다. 역사가들은 ‘의회 안의 국왕’이라는 표현에 담긴 균형이 16,7세기의 과정에서 국민의 대표자들에게 얼마나 유리하게 변화하였는지를 아직도 논쟁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실질적인 권력변화의 정도는 아마도 최소한도였지만, 때때로 평민원의 프로테스탄트 진보파들은 발언의 자유(free speech)에 대한 그들의 권리에 신앙에 관한 법률을 발의할 수 있는 권리도 포함되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때때로 추밀원의 위원들 조차도 신앙정책을 변경시킬 수 있는 입법의 제안을 조장하였다. 퓨리탄주의와 의회민주주의의 대의들이 결합되기 시작하였을 때, 여왕은 그러한 퓨리탄 제안들의 논의를 차단하기 위하여 국왕의 특권(prerogative)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였다. 엘리자베스는 의회가 1559년의 신앙정책(Settlement)을 변경시키려는 행동을 금지시키면서도, 신앙문제의 논의에 적합한 자리로 성직자회의를 기대하였다.

    1.4.2. 국왕수장권: 한계들과 행사
    여러 세기에 걸쳐 국왕이 교회업무를 감독하였고 또한 콘스탄티누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황제적 권위에 대한 이론들에도 불구하고, 국왕을 교회의 ‘수장’ (supreme head)으로 선언하였을 때에, 국왕수장권의 한계들이나 이를 행사하는 수단들에 대한 분명한 선례들이 없었다. 헨리와 에드워드의 치하는 이에 대한 실험적인 모델들을 제시하였지만, 엘리자베스의 장기간 통치는 실행가능한 형태를 정착시켰다. 하지만 그녀의 계승자들인 스튜어트가의 국왕들은 이를 능숙하게 사용하지 못하였다.

    헨리8세의 탐욕스러운 허영심은 [수장권의] 한계들에 대한 정의를 허용하지 않는 거창한 이미지들을 조장하였다. 에드워드의 섭정추밀원에 의한 수장권행사 그리고 그러한 이론에 대한 메리의 거부는 이러한 과장된 주장을 약화시켰다. 엘리자베스가 ‘수장’을 ‘최고통치자’로 교체함으로써, 이 명칭[수장-머리]에 대한 바울로의 비유적 표현(머리에 대한Pauline imagery)으로부터 유래하는 암시들을 제거하였다. 그녀가 발표한 명령문들(injunctions)은 ‘예식들을 집례하는 사목직의 권위와 권한’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부인하였으며, 또한 [1559년의] 국왕수장권법은 이단을 규정할 수 있는 국왕의 권리를 부인하고, [이단은] 분명한 성서적 말씀 또는 첫4차례의 공의회들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하며, 보다 미묘한 문제들은 의회와 성직자회의의 평신도와 성직자들에게 맡기도록 규정하였다. 신앙조항의 규정처럼, 여왕이 보유하는 것은 세속과 교회를 포함한 ‘모든 계급들에 대한 최고 통치권’이었다. 대륙의 루터파와 개혁주의파는 세속계급과 성직계급 사이의 구별에서 잘못된 성권주의(sacerdotalism)를 반대하였지만, 잉글랜드의 국왕수장권은 그러한 구별에 근거하였다. 유럽 전역에서 신앙은 경찰권[치안권]에 의해서 강제되었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는 후커의 지적처럼, 국왕은 이러한 강제권을 ‘모든 백성들과 주장들’에 대하여 행사하였지만, 여왕은 이를 ‘범위들과 한계들’을 규정한 법에따라 행사하였다. 한계들은 후커의 진술이 제시한 것보다 모호할 수도 있었지만, 이러한 한계들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인식되었다.

    헨리는 토머스 크롬웰을 처형할 때까지 자신의 새로운 권한[수장권]을 그의 최고대신[크롬웰]에게 위임하였다. 크롬웰은 국왕이 보유한 교회에 대한 관할권을 대행하는 평신도 ‘수장대리’(vicegerent)로서 수도원들을 몰수하고, 국왕명령문들을 공표하고, 영문성서 번역작업을 지휘하였다. 에드위드 치하때 추밀원은 다른 업무와 함께 교회문제들에 대하여 매일매일 결정함으로써 어린 국왕을 대신하여 국왕수장권을 행사하였다. 크랜머는 신앙문제들에 대하여 핵심적인 발언권을 갖고 있었지만, 이에따른 결과는 왕국교회를 정부의 한 부서로 축소시켰을 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1559년에 제정된 법에서 승인한 위임권들(위원회들commissions)을 통하여 최고통치자의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세속문제와 교회문제의 무차별적인 혼합을 회피하였다. 여왕이 이용하였던 주요한 기구는 런던에 위치한 왕국교회 최고위원회(Ecclesiastical Commission)로, 켄터베리 대주교, 런던주교와 고위직 성직자들 그리고 평신도 고위관리들이 항상 참여하였다. 교회의 치리기구들은 국가와 지방 차원에서 발생하였던 많은 위기국면들에서도 지워지지 않았던 독특한 정체성을 보존하였다. 대주교인 위트기프트는 추밀원의 위원으로, 그리고 교회에 관한 위원회들의 위원으로 ‘편리하고 적절하게’ 결합된 고위직책들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왕은 교회의 최고통치자의 권한을 집행할 때, 국가의 기구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다른 기구들을 사용하였다.

    1.4.3. 왕국교회의 사목직과 통치형태의 구조들
    제네바를 모델로 꿈꾸는[지향하는] 퓨리탄들은 ‘대주교 또는 귀족주교’ 대신에 사목자들의 동등성’을, 상서들[교구관리국장]과 총사제들, 교구공직자들, 주교대리들, 교구법원의 판사들과 대리인들, 법원서기들, 교회회장들 등등’ 대신에 각 지역 회중들[교회들]마다 ‘신실한 선생님’[사목자의 존칭]을, 그리고 사목직과 구별되는 ‘부제직’[집사직deaconship]을 주장하였다. 왕국교회의 구조들에 대한 퓨리탄들의 실망은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통해서도 계속 보존된 중세적 형태의 사목직과 치리제도에서 분명하게 입증되었다. 관구들, 교구들, 대성당들과 전도구교회들, 그리고 이러한 기구들의 직원들, 교구법원들과 소송절차들과 같은 조직화된 교회생활[구조]은 1534년 이전과 똑같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교회법-교황권의 거부로 크게 약화되었지만-은 의회에서 특별히 제정한 법률과 [교회에서] 새로이 제정된 교회법률, 또는 국왕수장권의 행사로 삭제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보존되었다.

    중세적인 교직추천권[임명권] 제도는 더욱 확대되었다. 수도원의 해체이후 전도구 교직의 추천권이 국왕에서 평신도에게 이전됨으로써, 평신도들이 보유한 교직추천권은 크게 증가하였다. 국왕, 귀족, 주교들, 여러 기관들 그리고 지역의 젠트리들은 성직자들을 직접적인 사목활동과 관계없이 수입을 받는 교직들에 지명하였다. 국왕은 여전히 대성당 사제단에게 선출할 주교후보자를 미리 지명하였지만, 이제 더이상 국왕의 의지를 좌절시키기 위하여 로마에 항소할 수 없었다. 에드워드 시대에 제정된 법률에 의하면, 국왕은 이제 간단한 개봉 칙허장(letter patent)으로 주교들을 지명하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치하의 법률들은 전통적인 절차를 복원하였다.

    잉글랜드교회는 차부제와 하급성직(minor order)을 폐지하고 주교, 사제 그리고 부제로 구성된 3가지 사목직에 집중하였다. 성직서품 예식서는 ‘성서와 초기교회의 저술가들’을 열심히 독서한다면 사도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이러한 성직의 연속성이 입증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예식서나 신앙조항의 어느 항목도 이러한 연속성이 교회의 보편적 완전성(Catholic integrity)에 어느 정도로 필수적인지를 규정하지 않았다. 장로제를 지지하는 과격파들에 대한 최초의 응답들은 주교제 치리형태가 허용될 수 있다고만 주장하였다. 그러나 [16]세기말에 이르러 점차적으로 증가하는 목소리들은 주교제가 전통의 명령일뿐만 아니라 보다 분명한 성서적인 명령이라고 주장하였다. 후커는 주교에 의한 서품을 ‘하느님의 정규[정상]적인(ordinary) 제정’으로 간주하였지만, 때때로 ‘긴급한 경우’(exigence of necessity)의 사례들 때문에 ‘주교들의 연속적인 계승에 의해서 사도들로부터 권능을 직접 물려받는 것’을 요구하는 성직서품을 ‘예외없이’ 주장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인정하였다.

    1.4.4. 단일화된 사회에서 일관된 그리스도교 신앙과 활동(practice)에 대한 비젼
    비신앙고백적인 가르침과 법으로 규정된 전례적인 신앙활동-이것들이 내포한 미래의 초교파적인 활동에 대한 암시들-은 잉글랜드교회의 정식신자와 국왕의 신하 사이를 쉽게 분리시킬 수 없는 엄격한 국가교회 공동체 안에 수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확고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교리적 권징적 기준을 보다 엄격하게 그리고 전례적인 엄격성을 약화시킬 것을 요구하며, 내부로부터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극소수의 분리주의자들과 이들보다는 많지만 뿔뿔이 흩어진 로마 가톨릭 공동체들만이 국가교회의 일원이기를 거부하면서도 국왕을 확고하게 지지하였다.

    국왕수장권은 세속통치권과 전통적인 보편적교회(Catholic)의 성직구조들을 서로 결합시키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국왕과 의회는 전체 교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신앙적인 결정들에 평신도들이 참여할 수단을 제공하였다. 신앙의 문제에 깊이 개입함으로써, 미래에 나타날 국왕과 의회 사이의 헌법적인 투쟁은 성공회신앙의 형성기인 첫세기에 이미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엘리자베스가 국왕수장권을 능숙하게 사용하고 의회의 반대자들을 다루었던 추진력들은 그대로 제임스의 시대까지 유지되었다. 성서와 기도서에 중심을 둔 일관된 성공회신앙은 국가단위의 교회 안에서 형성되었다. 흠정판 영문성서(King James Bible)는 성서의 권위, 국왕의 후원, 국가적인 문화적 업적의 성취, 광범위한 협력작업의 달성, 그리고 주교들의 지도력을 반영하하며, 단일화된 사회에서 전국민의 열렬한 충성심을 사로잡고 있는 일관된 그리스도교 신앙과 활동에 대한 시들어가는 비젼을 상징한다.

    [아래에서 계속됩니다]

    2012년 5월 24일 #
  2.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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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성공회신앙의 제2세기 - 비젼의 쇠퇴와 명확한 신앙의 보존: 1611-1738

    유럽대륙과 영국섬에서 발생한 17세기의 종교[신앙]전쟁들과 새로이 태동하는 ‘계몽운동’은 점증하는 신앙적 회의론을 촉진시키고, 신앙적인 문제들을 정치생활에서 주변적인 문제로 밀어내었다. 1738년 존 웨슬리의 개심체험으로 특징되는 복음주의 부흥운동(Evangelical Revival)이 나타났을 때, 국교회 안팎에서 발생한 가장 강력한 이 신앙운동은 세속권위의 개입없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1611년에 단일화된 사회에 대한 비젼은 여전히 잉글랜드인들의 정신과 마음에서 신앙에 대한 이해를 지배하였다.

    2.1.교회생활의 연속성과 변화[단절성]: 1611-1737

    진보적인 개혁가들과 왕국교회 지지자들 사이의 투쟁은 제임스1세 치하 중반부터 1689년 관용법(신앙의 자유 허용법,Toleration Act)까지 잉글랜드 신앙사를 지배하였다. 신앙은 국왕과 의회 사이의 헌정적인 투쟁과 내전에 대하여 그 중심점[초점]을 제공하였으며, 이러한 투쟁과 내전은 찰스1세의 처형,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정, 왕정복고, 그리고 윌리엄과 메리를 공동국왕으로 추대하는 명예혁명으로 전개되었다.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키워온 젠트리와 상인계급들은 국가의 사회적인 구조를 변경시키고 있었다. 1702년 앤여왕의 왕위계승을 시작으로 그리고 그녀의 하노버 계승자들의 치하에서 당략정치(정당정치party politics)는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있는 의회를 지배하였다. ‘이성의 시대’의 이신론은 신학자들을 훈련시키고 자극시켰으며, 산업혁명은 국가의 경제와 인구분포를 변경시키기 시작하였으며, 그리고 신앙적 다원주의는 열렬하게 수용되지도 정당하게 실시되지도 않았지만 이제 국가적인 차원에서 합법적인 실체가 되었다.

    2.1.1. 확대되는 양극화: 제임스1세(후반기)와 찰스1세
    제임스1세는 통치초기에 확고하게 형성된 국왕과 주교들의 동맹관계를1625년의 사망때까지 그대로 유지하였다. 국왕의 의지와 평민원의 퓨리탄 성향의 평민원 사이의 충돌들은 간혈적으로 양심의 문제들에서 발생하였으며, 특히 그중에서도 안식일을 엄수하기 위하여 일요일에 ‘합법적인 오락들과 건전한 운동들’의 금지를 제임스가 반대하였을 때에 가장 격렬하게 발생하였다. 또한 국왕은 종종 로마 가톨릭신자들에 대한 처벌을 완화시킴으로써 진보파들의 분노을 야기시켰으며, 이러한 분노는 특히 왕세자인 찰스와 대륙의 로마 가톨릭 공주들과의 혼인협상때에 최고조에 도달하였다. 찰스1세는 통치초기에 기존의 신학적인 논란을 척결하기 위하여 국왕포고문(King’s declaration)을 공표하였으며, 그 이후에 이 선언문은 39개 신앙조항의 서문으로 첨부되었다. 이 선언문은 신앙조항을 ‘문자적이고 문법적인 의미로’ 해석할 것을 명령하며, 개인의 ‘독단적인 해석’만이 신앙조항의 의미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3개월후 평민원의 한 위원회는 예정론에 대한 엄격한 칼빈주의자적인 해석을 ‘우리 국교회의 정통교리’라고 지지하였다. 이 사건과 의회의 독립을 주장하는 다른 징후들에 반발하여 찰스는 입법부[의회]없이 통치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1640년까지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으나, 스코틀랜드에 잉글랜드와 비슷한 기도서를 집행하려는 시도가 전쟁으로 확산되자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세금확대를 요구하기 위하여 의회를 소집하였다. ‘의회 안의 국왕’을 실행가능한 통치주체로 만들었던 결속력들은 너무 지나치게 남용되었으며, 2년안에 내전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찰스의 통치 초기부터 윌리엄 로드는 교회문제에 대한 국왕의 핵심 자문관이었으며, 1633년에 켄터베리 대주교에 임명되었다. 퓨리탄들은 로드와 그의 동료들을 몹시 싫어하였다. 퓨리탄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교황제적인’ (popish) 교리들과 의례들을 확산시키고, 국교회의 법률들을 준수하도록 매우 엄격하게 강요하였다. 목축을 위한 농토의 인클로져[사유화]를 정부가 엄격하게 금지시킨데에 불만을 토로하는 젠트리들, 그리고 국왕법정[대권법원]에서 민사법 소송을 취급하는데 항의하는 보통법(common law) 법률가들은 교회와 국가에서 ‘폭정’에 대항하여 공동으로 투쟁하는 퓨리탄들과 의회파들[의회정치인들]의 중요한 동맹자들이 되었다.

    2.1.2. 성공회신앙의 해체와 복원
    1645년 로드의 처형과 4년후 국왕의 처형으로 새로운 권력체들은 연속적으로 변경시켰던 신앙적 실험들을 완성시켰다. 로드의 처형 때까지 주교제, 공동기도서와 39개 신앙조항은 의회의 법령에 의해서 장로제, 개혁된 <공공예배 지침서>(Directory of Public Worship)와 확고한 칼빈주의자신학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으로 교체되었다. 찰스의 처형 직후부터 헌신적인 올리버 크롬웰 장군은 ‘독립교회파’(Independents)의 정책들을 선호하며 장로제주의의 엄격한 시행을 반대하였다. 크롬웰의 공화국에서 각 회중들[지역교회들]은 그들 나름의 교리와 예배형태를 결정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자유는 교황제나 주교제, 즉 로마 가톨릭신앙이나 성공회신앙까지 확대되지는 않았다.’

    대륙의 논평가들은 아마도 성공회신앙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도서신앙은 찰스2세의 망명왕정에서 공개적으로, 그리고 국내에서 보다 은밀하게 실행되었다. 국내의 경우, 잉글랜드의 전체교직자중 약 25퍼센트가 국가의 정책을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일부는 성공회신앙의 옹호론을 집필하였으며, 일부는 왕당파의 가정에서 가정교사나 전속사제로 활동하였다. 그들과 동조자들은 정부의 감시를 피할 수 있을 때마다 기도서의 예식을 채택하였다.

    1660년 찰스2세를 복원시킨 공회(Convention Parliament)는 공화국의 정치적 신앙적 혼돈에 환멸을 느낀 장로제주의자들이 압도적이었지만, 다음해에 선출된 새로운 ‘기사’(Cavalier)의회의 평민원 의원은 성공회(Anglican) 왕당파들이 확고한 다수를 점유하였다. 확고하게 성공회를 지지하는 성직자회의와 함께 이들은 클래런던 경-찰스의 귀환 주도자-의 지도를 따라 기도서 예배와 주교제, 주교에 의한 성직서품을 국가교회에 확실하게 복원시킬 수 있는 법률들을 제정하였다. 이 법률들은 공개적인 비국교도 예배와 사목직에 대하여 엄중한 처벌을 부과함으로써, 많은 양심적인 퓨리탄들을 국가교회로부터 확실하게 분리시켰다.

    2.1.3. 다원화된 사회에서의 잉글랜드교회[국교회]
    찰스2세는 1685년 임종때에 로마 가톨릭신앙으로 귀의하였으며, 그의 동생인 제임스2세는 더 나아가 로마 가톨릭신앙을 공개적으로 옹호함으로써 모든 잉글랜드 프로테스탄트들을 경계하게 만들었다. 제임스는 그의 사적인 신앙 때문에 왕국교회의 ‘최고통치자’의 의무를 소홀히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였지만, 그의 친로마 가톨릭신앙 정책은 1688년에 로마 가톨릭신자들과 다른 비국교도들에 대하여 ‘모든 종류의 처벌법률들’의 집행을 중지시키는 포고문 (관용령declaration)을 모든 성직자들에게 [각 교회에서] 낭독하도록 명령하였을 때 절정에 도달하였다. 샌크로프트 대주교와 6명의 다른 주교들은 국왕의 명령을 거부함으로써 런던탑에 투옥되었지만, 국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들에 대한 무죄판결은 결국 제임스의 패주와, 그의 딸인 메리와 남편인 윌리엄을 환영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의회는 이들을 공동국왕으로 선언함으로써, 이제 입법부는 ‘의회 안의 국왕’이라는 잉글랜드의 공동주권에서 주도적인[상급] 지위를 차지하였다.

    명예혁명의 아니러니한 결과로, 국왕의 명령을 거역함으써 런던탑에 구금되었던 샌크로프트 대주교와 4명의 다른 주교들을 포함한 약 400명의 성직자들은 국교회의 사목직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이들 ‘서약거부 성직자들’(Nonjurors)은 제임스에 대한 기존의 충성서약을 개인적인 의무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국왕들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하였다. 이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주교들을 임명함으로써 분열은 항구적인 것이 되었으며, 서약거부 성직자들은 소수의 평신도 지지자들과 함께 비정상적인 비국교회 성공회로서 100여년동안 존속하였다.

    제임스의 정책들을 반대하는 국민적 공감 그리고 윌리엄의 확고한 개혁주의 신앙은 로마 가톨릭신앙을 제외하고 삼위일체를 믿는 모든 비국교도들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용하는 관용법(Toleration Act)의 제정을 위한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잉글랜드에서 신앙적인 쟁점들은 이제 더이상 국내정치의 중심적인 관심사가 되지 못하였다. 1702년 왕권을 계승한 메리의 동생 앤(Anne)은 지속적으로 국교회를 지원하였지만, 그녀의 계승자들인 하노버가 사촌들-루터교신자인 조지1세와 2세-은 국교회에 대한 책임을 보다 형식적으로 수행하였다. 프로테스탄트 비국교도들이 공직에 취임할 수 있는 시민적 권리는 여전히 제한되었지만, 이제 잉글랜드의 ‘헌법’은 신앙적인 관용을 포함하였으며, 점차적으로 사실상 로마 가톨릭신자들과 이제 나타나기 시작한 단일신론자들 (Unitarians)까지로 확대되었다. 잉글랜드교회는 독특하게 국가의 법으로 제정된 교회(국가교회established church)로 보존되었지만, 이미 신앙적으로 다원화된 사회에 속해 있었다.

    2.1.4. 잉글랜드 밖의[해외] 성공회신앙의 확산
    성공회신앙은 나머지 영국제도(British Isles)와 해외의 영토들에도 존재하였다. 웨일즈의 4교구는 완전히 켄테베리 관구에 속해있었지만, 웨일즈어로 번역된 성서와 기도서, 그리고 엘리자베스 치하에서 웨일즈어를 구사하는 주교들의 임명으로 문화적인 정체성을 보존하였다-그 이후의 국왕들은 이러한 정책을 지속시키지 못하였다.

    스코틀랜드의 경우, 주교직은 개혁주의 스코틀랜드교회에서 존속되었지만, 찰스1세가 스코틀랜드에 부과한 잉글랜드 동화정책은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와 장로제 치리형태를 확고하게 결합시킴으로써, 스코틀랜드교회에서 주교직은 완전히 폐지되었다. 찰스2세는 스코틀랜드의 치리형태에 주교직을 다시 도입하였지만, 1689년에 그들은 모두 서약거부자가 되어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국가교회에서 이탈하였다. 이들은 잉글랜드의 서약거부자들과 연계함으로써 스코틀랜드 주교제교회(Episcopal Church of Scotland)에서 독특한 성공회신앙을 발전시켰다.

    16세기의 아일랜드의회는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선례들을 굴종적으로 추종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에 대한 반대투쟁은 종교개혁으로 탄생된 ‘아일랜드교회’(Church of Ireland)를 외국의 통치와 동일시하였다. 게일어[토착어] 성서와 기도서는 17세기에서야 출판되었다. 아일랜드교회는 옛 교회조직과 기관들을 그대로 보존하였지만, 소수의 아일랜드인들과 1690년 제임스2세를 지지하는 아일랜드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후 몰수된 토지들을 분배받아 이주한 프로테스탄트 이민자들로만 구성되었다.

    16세기 이후로 잉글랜드의 탐험가들, 무역상인들 그리고 식민지 개척자들은 해외로 이주할 때 그들의 교회도 함께 이식하였다. 18세기초까지 잉글랜드 왕국교회의 지역교회들은 카리브해의 여러 섬들과 북대서양 연안에 있는 뉴파운드랜드부터 조지아까지 곳곳에 설립되었으며, 아시아의 아대륙[인도]에 있는 동인도회사의 영토에서도 설립되었다. 이들 교회들에 대한 명목상의 관할권을 보유한 런던주교는 감독권을 거의 행사하지 못하였다. 이 교회들에 대한 지원과 감독은 주로 선교회들 즉, 한때 메릴랜드에서 주교대행으로 활동하였던 토머스 브레이(Thomas Bray)가 1700년경에 설립한 ‘Society for Promotion of Christian Knowledge’[SPCK]과 ‘Society for Propagation of the Gospel’[SPG]를 통해서 시작되었다. 두 단체에 대한 국왕의 특허장은 광범위한 지역들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의 복음화를 언급하였지만, 초기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아프리카인 노예들에 대한 간헐적인 선교활동과 인도 남부의 네델란드 루터교 선교활동에 대한 지원을 제외하면, 선교회들의 활동들 대부분은 해외에 있는 ‘자국민들 사이에... 신앙생활’을 확립시키는데 주력하였다. 성공회신앙은 여전히 거의 전적으로 영국인들의 신앙이었다.

    2.2.잉글랜드교회의 예배와 교리[가르침]

    성공회신앙의 제2세기에 발생한 혼란들을 겪으면서도, 흠정판 영문성서와 기도서는 여전히 잉글랜드교회에서 예배와 교리의 토대들로 유지되었으며, 39개 신앙조항은 성직자들에게 교리적인 지침을 제공하였다. 찰스1세 치하의 국교회 지도자들은 종교개혁을 ‘완결’시키려는 퓨리탄들의 시도를 계속해서 저지하였으며, 급진파들은 ‘교황제 잔재’(popery)에 대한 새로운 처방전을 제시함으로써 국가교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재편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의 단기적인 성공은 오히려 복원된 국교회 내의 긴장[갈등]을 악화시켰을 뿐이었다. 즉, 국교회에 헌신적인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선서거부파]이 국교회를 이탈하였을 뿐 아니라, 곧이어 많은 퓨리탄들도 잉글랜드교회를 대륙의 종교개혁교회들의 형태와 일치시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비국교회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을 형성하기 위하여 국교회를 이탈하였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와 국교회인 성공회는 잉글랜드에서 유일하지는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표하는 국가교회로 정착하였으며, 잉글랜드교회의 공식발표문들(formularies)의 교리적인 포괄성[관용]은 계속해서 국가교회내의 신학적 다양성을 촉진시켰다.

    2.2.1. 기도서 예배의 다양성
    기도서의 예식들은 예배의 문구들을 고정시키고 그 의례들의 일부를 구체적으로 규정하였지만, 교회 내부구조(예배의 배경setting)와 예식의 실행방식(연기performance)은 상당히 다양할 수 있었다. 17세기초에 의례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일[정교화]은 더욱 일반화되었다. 처음에 로드(Laud)는 영성체를 위한 성찬식탁을 전통적인 석재제대의 자리에 위치시키고 그 주위에 울타리(rail)를 설치할 것을 권장하였으며, 나중에 이의 실행을 명령하였다. 양초들과 향(incense)의 사용, 기존의 십자고상과 성화들의 보존과 재단장, 보다 화려한 성악과 오르간 사용의 확대, 석제제대를 향한 목례, 그리고 화려하게 장식된 대례복의 사용은 당시 국교회 예배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퓨리탄들은 이러한 변화에 몹시 싫어하였다. 성찬례는 이전보다 훨씬 장엄하게[거창한 의례로] 거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 학자이자 사제의 지적처럼 ‘하느님 예배의 중심적인 예식’으로 보다 자주 거행되었다.

    복고왕정때 기도서 개정에서 두가지 서로 다른 전례적인 형태들이 주장되었다. 찰스2세는 장로제파와 주교제파 모두가 수용가능한 기도서를 제정하기 위하여 회의[사보이궁 회의]를 후원하였지만, 사실상 가톨릭성향의 집단들은 1549년의 첫 기도서와 유사한 전례서를 준비하였다. 이 두가지 주장들에서 다소 온건한 개정만을 허용하고 이것들과 다른 비논쟁적인 사소한 수정들만을 수용함으로써, 1662년 기도서는 서문의 표현대로 ‘양극단 사이의 중간’인 엘리자베스시대의 전통을 확고하게 정착시켰다.

    1661년의 임시적인 제안서는 종교개혁 이전의 형태를 보다 완전하게 반영한 것으로, 찰스1세가 스코틀랜드에 부과하려다 실패한 1637년 스코틀랜드 기도서에 근거하였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서약거부자들은 이 기도서의 자료들과 학문적인 전례연구를 통해서 얻은 자료들을 실험적으로 채택하였다. 국교회에서 18세기의 예배는 대다수 현대인들에 의해서 ‘따분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고교회파’(High Church)로 명칭되었던 소수의 성직자들은 매주일 성찬례를 거행하였으며, 또한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매일 공적으로 집례하였지만, 한 세기전 같은 성향의 선배들이 추구하였던 의례적인 정교화(enrichment)는 이제 일반화되어 다른 성직자들과 구별되지 않았다. 잉글랜드의 대다수 전도구교회들에서 성찬례는 분기마다 한번씩 거행되었으며, 전도구교회 신자들은 아침기도, 연도, 말씀의 예배(Ante-communion), 그리고 설교로 구성된 장시간의 주일 아침예배에 계속해서 참석하였다.

    2.2.2. 교리적 논쟁과 허용범위
    성서와 공인된 전례서에 근거한 공식적인 교리에 관한 발표문들은 변경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성직자들과 교육적인 책임을 맡은 자들은 39개 신앙조항의 준수를 서명하였으며, 해석상의 유연성에 대한 퓨리탄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찰스1세는 신앙조항을 ‘문자적이고 문법적인 의미로’ 해석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이러한 주장은 대세가 되었다.

    성직자의 교육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퓨리탄들은 더이상 설교능력이 없는 ‘짖을 줄 모르는 개들’(dumb dogs)에 대하여 항의하지 않았지만, 대신에 ‘오류들을 의도적으로 토해내고 고의적으로 설교를 경시하는 자들’을 비난하였다. 이러한 오류들은 종종 국제적인 개혁주의교회 공동체에서 점차 중요한 항목이 되었던 예정론을 다루었다. 1618년 네델란드의 도르트회의는 칼빈주의자들의 확고한 선택론 교리[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선택]를 변경시키려는 ‘아르미니우스파들’ (Arminians)를 정죄하였으며, 퓨리탄들은 칼빈주의자 정통교리를 이탈하고 ‘교황제’ 냄새를 풍기는 전례를 도입한 잉글랜드 성직자들을 지칭하기 위하여 이단적인 명칭[아르미니우스파]을 사용하였다. ‘찰스시대의 신학자들’(Caroline Divines)이란 17세기 잉글랜드교회의 지도자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들은 칼빈의 신학에 대하여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수용하였지만, 영원한 타락이라는 무조건적인[절대적인] 교리가 ‘모든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이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하며 부당한 폭군이 된다’는 로드의 주장에 동의하였다. 이들은 선배들인 크랜머, 주얼과 후커처럼 성서의 해석에서 초기교회의 교부들에게 절대적은 아니지만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였으며, 대륙의 대다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보다 그들을 훨씬 더 자주 인용하였다.

    15세기에 걸친 가톨릭[공교회]전통과 16세기의 종교개혁에 대한 강조점들은 모두 17세기초 잉글랜드교회의신학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특징들이었지만, 세번째 특징인 이성-역사적으로 르네상스와 관련되었다-이 점점 가시적으로 강조되었다.

    옥스퍼드 인근의 영지인 그레이트 튜(Great Tew)에서는 내전 직전의 몇년동안 일부 지식인들-성직자와 평신도-이 비공식적으로 토론하던 장소였다. 이들중 일부는 복고왕정 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이 모임의 참가자들은 칼빈주의자 교의 (dogmatism)를 거부할 뿐만아니라, 로드의 교회정책들도 어느정도 멀리하였다. 내전 기간과 그 후에 퓨리탄성향의 칼리지에서 교육받은 케임브리지의 일부 학자들은 이성을 옹호하며, 선택의 판결들에 대한 교리[선택론]가 ‘세상에 전달된 것’들중에서 ‘가장 유해로운 소식’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Cambridge Platonists)은 신플라톤철학과 신비주의에 깊이 매료되었으며, 그들이 미신이나 부당한 교조주의라고 판단한 것들을 거부하였으며, ‘이성의 사용과 선[미덕]의 실천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맛본다’고 주장하였다.

    평화의 왕[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살육과 투쟁에 지친 잉글랜드 남녀들에게 점점 많은 관심을 받게된 이들 ‘광교회주의자’(Latitudinarian)의 가르침[교리]은 복고왕정 국교회에서 많은 젊은 성직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충성서약의 문제로 완고한 가톨릭성향의 주교들 거의 모두가 국교회를 이탈하였을 때, 국왕인 윌리엄은 광교회주의자들을 주교로 임명하였다. 따라서 잉글랜드교회는 ‘이성의 시대’의 지적인 분위기에 공감하는 지도자들로 18세기를 시작하였다. 이신론(Deism)은 하느님이 계시가 아닌 창조[피조의 세계]를 통해서만 알려진다고 주장함으로써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에 도전하였다. 조지프 버틀러 주교는 그의 저서인 <Analogy fo Religion, Natural and Revealed>(1736)에서 그리스도교 주장들의 근본적인 합리성을 주장함으로써 오히려 이신론자들의 무기로 이들을 반박하였다. 이 저서는 당시의 유럽세계에서 탁월한 변론서였다.

    2.2.3. 포괄성과 그 한계들
    성공회신앙의 제2세기에 내려진 중요한 결정들 중에는 기도서의 재확언, 그리고 교리적인 범위들을 축소함으로써 ‘신앙고백적인’(신앙고백문 중심의 confessional) 교회가 되는 것을 지속적으로 거부한 것을 포함하였다. 찰스1세 치하에서 발생한 최고조의 긴장관계 때까지 잉글랜드교회는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에 불만을 표시하는 상당수를 포함한 대다수 프로테스탄트들을 포용하였다. 이들 불만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목직의 구조와 전례에 깊이 베어있는 가톨릭 전통들에 대한 강조는 분파적인 분열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요소들은 다른 방향에서 교회통합적인(ecumenical) 포용활동의 가능성들을 보존하였다. 이러한 세기들에 나타난 가톨릭/프로테스탄트의 첨예한 대립관계에서 퓨리탄들은 로마교회를 ‘적그리스도’로 규정하였지만, 후커와 찰스시대 신학자들은 로마교회가 교리와 전례의 모든 것들에서 ‘옳바른’[참] 교회는 아닐지라도 ‘진정한’ 가톨릭 교회 [공교회, 그리스도교]의 일원이라고 주장하였다. 잉글랜드 사회의 복합적인 갈등들로 인하여 포괄성이 한계에 도달았을 때, 잉글랜드교회는 그 구성원들중 중요하고 적극적인 부분[퓨리탄]을 상실하였지만, 미래를 향한 발전방향 (궤적trajectory)은 엘리자베스의 신앙정책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후커가 제공한 신학적인 토대의 방향으로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2.3. 단일화된 사회에 대한 비젼의 붕괴

    16세기의 개혁가들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였던 단일화된 사회는 성공회신앙의 제2세기에서 환상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이 비젼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으며, 이러한 비젼을 채택하였던 [국]교회는 그 대신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독자적인 이해와 신앙활동들에 근거한 토대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공화정시대에 헌신적인 성공회신자들은 왕정복고에 대한 희망과 신앙을 결합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가의 통치구조들을 이탈하여 성공회신앙을 실천하였다. 서약거부자들은 그들의 분파적인 지위에도 불구하고 비국교회적인 성공회신앙의 미래적인 실례를 제공하였다. 헌법적이자 사회적인 변화들이 발생함에 따라, 성공회신자들은 이제 더이상 그들의 문화적이자 국가적인 정체성에 의존하지 않는 신앙적인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2.3.1. 국왕수장권과 의회
    1738년까지 잉글랜드의 주권은 ‘의회 안의 국왕’의 왕권에서 입법부인 의회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모든 실질적인 권력을 의회에 부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제 국왕수장권은 엘리자베스 치하에서 이론적으로 예견되고 실질적으로 실행되었던 것 그대로 보존될 수 없었다. 가장 최근의 최고통치자들인 로마 가톨릭 신자[제임스], 네델란드 칼빈주의자[윌리엄], 두명의 독일 루터교 신자[조지1세와 2세]들의 시대를 통해서, 신중한 성공회신자들은 국교회의 생활에서 국왕수장권을 대신하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역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설치된 중앙의 교회 최고위원회(Ecclesiatical Commission)는 이제 점차적으로 ‘왕국교회 특별법원’(Court of High Commission)으로 알려진 사법기구로 기능하였다. 이 법원은 찰스1세 치하에서 엄격한 사법적 처벌로 악명 높았다. 국왕수장권을 실행하였던 이 기구는 복고왕정에서 복원되지 않았다. 성공회 [국교회]를 완고하게 지지하였던 기사의회는 신앙에 관한 법률들의 집행권 대부분을 정부당국자들에 넘김으로써 국왕수장권의 상당한 권한들을 사실상 효과적으로 제거하였다.

    한편으로 왕정복고 직후에 성직자들은 성직자회의 교부금 대신에 의회의 과세를 따르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함에 따라, 국왕은 이제 의회의 소집때에 성직자회의를 함께 소집할 필요가 없어졌다. 더구나 1717년 성직자회의의 하원을 주도하는 ‘고교회파’ 성직자들과 상원의 광교회주의자 주교들 사이의 악의에 찬 논쟁 직후, 조지1세는 성직자회의의 소집을 중단시켰으며, 이로써 튜더왕조의 통치이론에서 의회에 부속된 성직자회의라는 인식을 효과적으로 제거하였다. 주교들은 계속해서 평민원의 동등한 동반자인 귀족원에 참여하였으며, 의회와 국왕의 대신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토리와 휘그라는 조직화된 당파들[정당들]의 출현으로 주교들의 투표권은 점차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주교들은 의회가 열리는 회기동안에 교구를 장기간 부재하였으며, 당파의 조언은 주교[후보자]들에 대한 국왕의 선택을 결정하였다. 국왕수장권의 축소, 성직자회의의 부재, 그리고 주교들의 당파정치 참여로, 교회의 통치기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민간정부에 더욱 종속되었다.

    2.3.2. 교회의 치리구조와 사목직의 구조
    교회법원들, 교직추천권(patronage), 그리고 관구와 교구의 조직과 같은 중세적인 조직들은 잉글랜드의 교회생활에서 그대로 보존되었다. 앤 여왕은 성직자들의 세금-헨리에 의해서 교황에서 국왕으로 이전된 세금-을 여왕의 ‘보조기금’(Bounty)으로 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기금은 중세시대부터 내려온 교직자들의 수입에 나타나는 심한 불균형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조성되었다. 성직자회의의 부재로 성직자들은 산업혁명에 따른 경제적 사회적 격동기에 교회의 역할들을 논의할 수 있는 유효한 기구를 상실하였다.

    주교제 치리형태는 왕정복고때에 곧바로 다시 확립되었으며, 장로제주의자들의 기대와 국왕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주교에 의한 성직서품에 대한 타협은 없었다. 프로테스탄트 반대파들의 국교회 이탈로 국교회내에서 주교제 치리형태에 대한 반대활동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주교직에 대한 ‘사도적 계승’의 중요성을 확고하게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17세기의 거의 모든 성공회신자들은 후커처럼 상황적인 필요성에 따라 다른 과정을 겪었을 수도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주교직에 대한 그들의 주장들을 제한하였다. 이들중 한 저술가는 비주교제 교회들도 주장할 수도 있는 ‘그리스도교회의 진정한 본질과 핵심’과, 전통적인 가톨릭[공교회] 성직을 요구하는 ‘[국]교회의 온전성 또는 완전성’ 사이를 구별함으로써 주교제를 제한적으로 인식하였다. 많은 광교회주의자들은 주교제를 확고하게 지지하면서도 이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온전성’(완전성integrity)에 대해서는 덜 중요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2.3.3. 다원화되는 사회에서의 일관된 신앙과 신앙활동
    신앙과 교회생활은 흠정판 영문성서의 출현[1611]부터 존 웨슬리의 개심[1738]때까지의 기간 사이에 발생한 급격한 변화들을 함께 겪었다. 모든 국민들을 포용하는 국민적 교회[국가교회, national church]라는 비젼은 깨졌으며, 또한 그리스도교신앙의 공개적인 거부도 다른 유럽인들처럼 잉글랜드 지식층에게 실행가능한 일이 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기간을 통해서 독특하게 인식될 수 있는 성공회신앙이 생존한 것이 잉글랜드교회의 그리스도교적인 완전성(integrity)을, 아니면 고립된 기관[교회]들의 끈질긴 생존을 더욱 잘 입증하는 것인지를 논쟁할 수 도 있지만, 성공회신앙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교 복음의 시대적 적합성[의미]을 열심히 추구하는 자들의 용기와 열정 때문이었다. 16세기에 형성된 성공회신앙은 17,8세기의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통해서도 그 발전방향[궤적]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이 신앙을 추종하는 자들은 다가오는 시대에 훨씬 더 중대한 부분들을 적응시키는 과제에 직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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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5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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