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번역 프로젝트 자료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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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초부터 현재까지
    Perry Butler

    1. 서론
    2. 18세기의 잉글랜드와 웨일즈 성공회
    3. 복음주의 부흥운동
    4. 고교회파와 옥스퍼드운동
    5. 광교회주의와 자유주의신학
    6. 성공회신앙의 확장
    7. 람베스회의와 람베스 4개조항
    8. 19세기후반 이후의 성공회신학
    9. 전례적인 발전들
    10. 성공회신앙과 교회일치운동(Ecumenism)
    11. 세계성공회의 최근의 발전

    1. 서론

    18세기초 이후로 성공회신앙은 커다란 변화을 겪었다. 국가교회인 잉글랜드 성공회와 아일랜드 성공회 그리고 비국교회인 스코틀랜드 주교제교회[성공회]는 이제 켄터베리 교구와 상통하는 자치교회들의 세계적인 가족의 ‘모교회’가 되었다. 이러한 확산은 대체로 영국 국익의 확장과 나란히 발생하였으며, 성공회는 주로 영연방 소속국가들과 미국에서 확립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지역,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태평양 지역에서도 성공회는 크게 성장하였으며, 현대의 세계성공회는 점점 더 많은 문화적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다. 수적으로(적어도 열렬한 신자들의 숫자로 보면) 세계성공회의 중심은 이제 아프리카에 있다.

    따라서 세계성공회의 발전[과정]은 의도적인 계획보다는 역사적인 상황에 의해서 발생했다. 그러한 역사적인 상황은 성공회의 독특한 기풍(성격ethos)을 만드는데 기여하였지만,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교파들 사이에서 이 교회[성공회]의 위치를 규정하는데 어려움들을 야기시키고 있다.

    세계성공회는 연합체(federation)가 아니며, 엄격한 의미에서 신앙고백서에 근거한 결합체(집단confessional family)도 아니며, 오히려 조직화된 구조들보다는 공통적인 특징들(상통관계loyalties)에 의해서, 그리고 켄터베리 대주교가 소집하고 1867년 이후 거의 매 십년마다 열리는 람베스회의에 그 교회의 주교들이 참여함으로써 하나로 결합된다. 정말로 켄터베리교구와 상통하는 것이 성공회 정체성의 표준[기준]이 되었다.

    영국성공회내의 여러가지 운동들 그리고 이 운동들이 야기시켰던 내부적인 갈등은 또한 성공회신앙에 대한 정의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18세기의 복음주의 부흥운동(Evangelical Revival)은 종교개혁 전통을 크게 강조하였다. 19세기의 옥스퍼드운동은 주교들의 사도적 계승과 성사적 교리들로 상징되는 교회의 역사적 연속성을 강조함으로써, 즉 프로테스탄트 유산보다는 가톨릭 전통을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성공회신앙을 종교개혁과 멀어지게 만들었다. 18세기의 광교회주의 성직자들 그리고 19세기이후로 성서비평학과 신학적 자유주의의 영향은 권위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와 믿음의 본질에 관하여 근본적인 질문들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외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마도 복음주의파(Evangelical) 가톨릭파(Catholic) 그리고 자유주의파(Liberal)라는 세 당파간 갈등의 발전과정 그리고 이에 따른 결과인 성공회신앙의 ‘포괄성’(comprehensiveness)을 아마도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꼽을 것이다.

    성공회신앙은 또한 주로 옥스퍼드운동으로 인하여 커다란 전례적인 변화를 체험하였다. 공적인 예배는 외양(외형적인 양식style)과 의례(의식ceremonial)에서 크게 변경되었다. 평신도의 눈에는 이것이 아마도 18세기초 이후로 가장 커다란 변화로 보일 것이다. 특히 20세기의 전례적인 변화는 기도서의 개정을 포함하였다. 기도서의 개정은 교리적인 강조점들을 변경시키고, 공유하였던 전례적인 전통[1662년 기도서-역자]에 따른 세계성공회의 결집력을 모르는 사이에 약화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신학적인 결과를 야기시켰다.

    그러나 단 한가지 분야에서 성공회신앙은 예상보다 덜 변화하였다. 1942년 윌리엄 템플은 대주교 취임사에서 교회일치운동(Ecumenical Movement)을 ‘우리 시대의 가장 새로운 현실’이라고 표현하였다. 성공회 교회들은 이 운동의 시작부터 지도력을 제공함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부 인사들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특징들을 포용하고 있는 성공회 교회들을 특별한 초교파적인 (ecumenical)교회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인도 아대륙에서의 발전들[진전]에도 불구하고, 성공회 교회들을 포함하여 연합교회들(united churches)을 조직하려는 시도는 예상보다 거의 성공하지 못하였다. 세계성공회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지난 30년간 세계성공회의 각 교회들은 성공회적인 자의식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보다 강화된 중앙집중화에 대한 기대를 부분적으로 성취하였다.

    2. 18세기의 잉글랜드와 웨일즈 성공회

    한때18세기의 교회는 사목적 나태와 세속성에 대한 대명사였다. 하지만 19세기의 역사가들보다는 덜 당파적인 현대의 역사가들은 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아마도 당시 교회들의 가장 커다란 결점들은 당대의 경향[추세]에 대한 너무 적극적인 동화, 과도한 국가교회주의, 그리고 후반기에 나타난 전례없는 사회적 변화들에 대한 속수무책으로부터 나타났다.

    17세기에 발생한 신앙적인 격변들을 겪은 후, 전반적인 기대심리는 안정이었으며, ‘[신앙적] 열광주의’에 대한 불신이었다. 교회는 [감정의] 절제를 추구하며, 도덕률을 교의보다 높게 평가하였다. 즉, 건전하고 실용적인 신심활동이 신비주의나 감성보다 우선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대체로 18세기 설교의 표준이 되었던 존 틸롯슨 대주교(John Tillotson, 1630-94)의 설교들에서 잘 표현되었다.

    한편 가시적인 교회는 하느님이 부여한 권위를 갖는다는 주장을 부인하는 설교한 뱅고어교구 주교를 대다수 토리파 일반성직자[사제]들이 정죄하려고 시도하였을 때에 심각한 논쟁이 발생하였다(‘뱅고어주교 논쟁’). 이 정치적인 논쟁을 중단시키기 위하여 국왕은 1717년 성직자회의를 정회시켰다. 주교직에는 주로 확고한 휘그파 성직자들이 임명되었다-귀족원에서 주교들은 연속적인 [휘그파] 행정부들에 중요한 지지표를 제공하였기 때문에 불가피한 조치였다. 주교에 대한 지명권은 월폴의 ‘교황’인 에드먼드 깁슨(1669-1718) 런던주교가 행사하였다. 1736년에 월폴과 깁슨 동맹이 붕괴되었으며, 이후 30년동안 주교지명권은 뉴카슬 공작이 행사하였다. 그러나 일반 교직들[전도구 사목직]에 대한 추천권(patronage)은 여전히 토리파 지방지주들(squires)이 보유하였다.

    벤자민 호들리(1676-1761)-연속적으로 뱅거, 헤리퍼드, 솔즈베리, 윈체스터 주교로 승진-는 종종 야심적인 저교회 휘그파의 전형으로 꼽힌다. 그의 악명높은 국가교회주의적 입장들은 뱅고어주교 논쟁(Bangorian Controversy)을 야기시켰다. 그러나 대다수 주교들은 양심적이며 정통교리를 지지하였으며, 빈약한 통신수단과 넓고 낙후된 교구들에서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사목적 활동은 의회의 휴회기간으로 한정되었다.

    일반 성직잗들의 일지와 일기의 출판-특히 제임스 우드포드의 <시골 사목자의 일기>(Diary of a Country Parson)-으로 이제 그들에 대한 재평가가 가능하였다. 그들은 영웅적은 아니었지만 의무에 충실하며 인정많은 사목자들이었다. 대다수 전도구 교회들은 농촌지역으로 가난하였기 때문에, 교직겸임과 부재교직 현상은 거의 불가피하였다. 그러나 [18]세기말에 이르러 인클로저 운동의 결과로 성직자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는 향상되었다. 새로운 사제관들이 건축되었으며, 많은 성직자들은 [교회가 위치한] 지역의 사법관(magistrate)으로 활동하며, 지역사회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이때가 바로 ‘사목자겸 지주’(Squarson)의 시대, 즉 유지(지주esquire)이자 전도구교회 사목자(parson)인 성직자계급의 시대였다. 마찬가지로 평신도의 신심도 일반적으로 특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과소평가해서는 않된다. 18세기 동안에 신앙서적의 판매량은 계속 증가하였다. 사무엘 존슨(1709-84) 박사는 성실하고 신념을 가진 성직자의 좋은 사례이다.

    그러나 기관으로서의 국교회는 여전히 낙후되고 복잡한 조직으로, 오히려 효율적인 운영을 방해하였다. 당시의 교회가 보유한 잠재적인 강점들이 무엇이었든 간에, 잉글랜드 사회에 불어닥친 변화들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인구의 성장과 이동, 도시화, 그리고 신업혁명의 시작에 직면하여 교회는 이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하지만 18세기의 성공회신앙은 지적인 활동에서 강력한 합리주의적인 경향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성취가 없지 않았다. 아마도 가장 커다란 성과는 이신론의 도전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신론의 뿌리들은 17세기에 있었지만, 18세기초에 매우 유행하였다. 이신론은 순수하게 이성적인 신앙을 산출하려는 시도로, 그리스도교를 일단의 도덕적인 계율들로 축소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신론자들이 ‘정곡을 찌르는’ 신랄한 공격으로 정통신앙을 가진(orthodox) 신자들은 불안하였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수용되었지만, 특별한 계시에 대한 모든 가능성들은 부인되었다. 기적, 삼위일체 그리고 성육신은 조롱받았으며, 성서 특히 구약성서의 불일치한 서술들과 외견상의 부도덕성은 강조되었다. 가장 유능하고 커다란 영향을 끼친 저서들중 하나는 매튜 틴덜(Matthew Tindal)의 <창조만큼 오래된 그리스도교>(Christianity as Old as Creation, 1730)였다.

    이러한 도전에 대하여 서약거부자인 윌리엄 로(William Law, 1686-1761)와 미래의 더럼주교인 조지프 버틀러(Joseph Butler, 1692-1752)는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로는 (1729)의 저자로도 널리 알려졌으며, 유능한 논쟁가였다. 그는 틴덜에 대한 응답으로 <The Case of Reason>(1731)을 출판하였으며, 버틀러 역시 1736년에 <Analogy of Religion>을 출판하였다. 그의 책은 자연종교와 계시종교를 세상과 비교하며 고찰하였으며, 행동의 기초로서 개연성(확률probability)을 주장하였다. 이 책은 성공회 신학(신론divinity)에 관한 독창적인 저서들중 하나가 되었다.

    고전적인 정통신앙[교리orthodoxy]에 대한 또 한명의 뛰어난 옹호자는 데니엘 워터랜드(Daniel Waterland, 1683-1740)였다. 그는 많은 책을 집필한 신학자로, 성찬례에 대한 그의 저서들-그 중에서도 (1737)이 유명-은 특히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3. 복음주의 부흥운동

    하노버시대[18세기]의 교회가 남긴 영성적 결함들은 대체로 복음주의 부흥운동(Evangelical Revival)에 의해서 보완되었다. 독일의 경건주의(German Pietism)와 미국의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과 함께 세계적인 현상이었던 이 운동은 잉글랜드에서는 세가지 지류로 발생하였다. 즉, 존 웨슬리를 따르는 아르미니우스파 감리파(arminian Methodists), 조지 화이트필드의 영향을 받은 칼빈주의자 감리파(Calvinist Methodists), 그리고 잉글랜드교회[성공회]내에서 활동하는 자들. 따라서 성공회 복음주의(Anglican Evangelicalism)는 종종 주장되는 것처럼 이 운동의 ‘파생물’이 아니었다. 성공회내의 운동은 독자적인 기원과 교리적인 강조점들과 방법들을 보유하며 나란히 전개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웨슬리나 화이트필드에 의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종종 이들을 비판하였다.

    웨일즈에서 호웰 헤리스(Howell Harris)와 데니엘 로우랜드(Daniel Rowland)가 주도한 각성운동이 먼저 발생하였지만, 잉글랜드에서는 1730년에서 1760년 사이에 개심체험을 겪은 ‘복음’(gospel) 또는 ‘각성받은’(awakened) 성직자들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개심체험은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나라를 복음화하려는 공통적인 목표를 위하여 이들을 결집시켰다. 처음에는 비조직적으로 전국으로 흩어져 있었지만, 결국에는 콘웰과 요크셔 지방에 집중되었다. 선구자들로는 사무엘 워커(Samuel Walker, 1719-60 콘웰지방의 트루로), 토머스 아담(Thomas Adam, 1701-81 링컨셔의 윈터링햄), 윌리엄 그림쇼(William Grimshaw, 1708-63 요크셔의 하워스), 존 버리지(John Berridge, 1716-93 베드퍼드셔의 에버튼) 그리고 존 플레쳐(John Fletcher, 1729-85 슈럽셔의 메딜레이)였다.

    복음주의 부흥운동은 당시의 만연한 이성주의에 반발하여 개심, 성서의 최고성, 그리고 복음의 설교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적인 강조점들을 회복시켰다. 성공회 복음주의자들은 다른 복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신학에서 어거스틴 전통을 부흥시키고 이신칭의 교리를 거듭 주장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감성적 체험을 의인화(구원justification)로 감성적 체험을 강조하였다. 이는 곧,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이 추구하였던 것과는 아주 다르게, 구원신앙(saving faith)의 확실한 증표가 되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지성보다는 체험을 강조하였지만, 성공회 복음주의자들은 그외에도 ‘온건한 칼빈주의’(moderate Calvinism)로 명칭되는 단순하고 실질적인 신학을 추구하였다. 이 신학의 근본은 인간의 완전타락에 관한 교리(doctrine of total depravity)였으며, 이것로부터 개심의 필요성, 구원신앙에 의한 의인화, 속죄[구원]론(atonement)의 중심성 그리고 성령에 의한 성화론이 전개되었다. 대다수 성공회 복음주의자들은 예정론을 중심적인 특징으로 만들거나, 또는 예정된 유기론(영벌, 영원한 버림받음 reprobation)을 가르치는 것을 거부하였다.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들에 해당된다는 이해는 그들의 열렬한 복음주의적인 노력을 촉진시켰다. 또한 그들은 이 교리들의 원천[원자료들]으로 칼빈의 <그리스도교 강요>의 다소 수용하기 어려운 논리보다는 성서와 성공회 공식발표문들 (formularies)에 의존하였다.

    성공회 복음주의자들은 여러가지 신학적인 쟁점들에서 웨슬리와 달랐다. 그들은 특히 그리스도인의 완전성에 대한 그의 교리와 확신론에 대한 그의 이해를 너무 주관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개심을 강조하는 것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교회의 질서는 주요한 장애물이었다. 버리지와 같은 초기 복음주의자들은 순회설교를 실천하였다. 워커, 아담 그리고 다른 ‘전도구 사제들’(regulars)은 이처럼 전도구교회 체계를 약화시키는 행동을 성직의 권위에 대한 부당한 공격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복음주의자들이 국교회 내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기위해서는 교회의 질서를 존종하는 것이 기본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의 이해들은 주교들의 반감을 유발시켰다. 즉, 주교들은 이들에 대한 성직서품을 회피하였으며, 따라서 교직을 얻기도 힘들었다. 그들은 상호부조를 위하여 요크셔의 엘런드회(Elland Society)처럼 성직자들의 모임을 조직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상황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복음주의자들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그리고 대도시에서도 확고히 정착하였으며, 그들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수적으로도 크게 증가하였다. 19세기 직전까지 그들은 약 300에서 500명으로 급성장하는 확고하고도 자신감 넘치는 하나의 교회당파(church party)가 되었다.

    19세기의 첫 30년간은 복음주의자들의 ‘황금시대’였다. 활기찬 신앙은 중상류층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는 1786년에 개심하였으며, 1797년에 영향력있는 저서 <Practical View>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당대의 전통적인 신앙과 그의 헌신적인 그리스도교를 비교하였다. 윌버포스는 노예무역의 폐지와 사회적 도덕(품행,morals)의 개혁에 헌신하였으며, 부유한 복음주의 평신도들의 모임인 ‘클래펌 모임’(Clapham Sect)을 주도하였다. 그는 또한 의회에서 복음주의자 모임-참가 의원들을 ‘성자들’로 별칭하였다-을 주도하였다.

    1802년에 설립된 <The Christian Observer>지는 이 복음주의자들의 공식적인 기관지였으며, 복음주의자들의 주장들은 자발적으로 구성된 단체들(socierties)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이들중 일부는 <Religious Tract Society>[신앙소책자 보급협회]처럼 초교파적인 단체이며, 일부는 <Church Missionary Society>[국교회 선교회]처럼 성공회에 국한되었다.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교직추천권을 충분하게 확보하기 위하여 1836년에 시므온 트러스트(Simeon Trustees)을 설립하여 교직추천권(성직자들을 특정한 전도구교회직에 추천하는 권리로 주교의 승인을 요구한다)을 매입하였다. 이 기금의 명칭은 당대의 가장 유명한 복음주의 성직자인 찰스 시므온(Charles Simeon, 1759-1836)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그는 44년 동안 케임브리지의 성삼위일체 교회(Holy Trinity)의 관할사제로 활동하면서, 여러 세대에 걸쳐 대학생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남겼으며, 뛰어난 설교사목을 실천하였다.

    1830년대 후반 옥스퍼드운동의 확산으로 복음주의자들은 수세에 몰렸다. 그들은 빅토리아 시대[19세기]의 국교회 내에서 뚜렸한 세력을 유지하면서, 교황주의(popery)와 의례주의(ritualism)에 반대하는 범교파적인 복음주의의 일부가 되었다. 새프츠베리 경(Lord Shaftesbury, 1801-85)은 이들의 뛰어난 지도자였으며, 팔머스턴은 수상재직 기간(1855-65)에 교직추천권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4. 고교회파와 옥스퍼드운동

    고교회파는 18세기내내 조용하였다. 휘그파의 우세속에서 고교회파는 교회당파로서의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당파의 신앙적 전통은 개별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에 의해서 존속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고교회파는 사도적 성직(apostolic order)과 가시적인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며, 국교회의 법령들과 전례에 대한 복종을 중시하였다. 세기가 지남에 따라, 많은 고교회파 성직자들은 완고하고 비감성적이 되었으며, 이 때문에 소책자운동가들은 이들을 ‘형식적이고 고착되었다’(high and dry)고 묘사하였다.

    18세기의 중요한 고교회파 성직자들로는 조지 혼(George Horne, 노리치 주교, 1730-92), 혼의 전기를 쓴 윌리엄 존스(William Jones, 1726-1800), 그리고 존스의 전기를 쓴 윌리엄 스티븐스(William Stevens, 1732-1807)를 꼽을 수 있다. 스티븐스는 열렬한 런던 사업가이자 앤 여왕의 보조기금(Bounty)의 관리자였다. 그를 기념하는 모임인 ‘Nobody’s Friends’(무명의 친구들)는 이후에 고교회파를 부흥시키는 중심이 되었다.

    고교회파 성직자들은 미국의 독립혁명의 시기로부터 자극을 받았으며, 후에 프랑스혁명으로도 커다란 자극을 받았다. 그들은 급진주의와 불신앙의 위협에 맞서며, 질서(체제order)과 권위(authority)를 새로이 강조하였다. 새무엘 호슬리 (Samuel Horsley, 1733-1806, 주교)는 고교회파 주장들에 대한 유능한 옹호자였다.
    실질적인 지도력은 점차적으로 ‘헤크니모임’(Hackney Phalanx)으로 이동하였다. 스티븐스의 지지자였던 조수아 왓슨(Joshua Watson)-런던의 부유한 상인-은 그의 형 존 제임스 왓슨 총사제의 전도구교회가 있는 헤크니로 은퇴하였으며, 이웃의 사목자인 헨리 노리스(H. H. Norris)와도 교류하였다. 이들은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하여 교회학교의 설립을 후원하기 위하여 1811년 <National Society for the Education of the Poor in the Principles of the Established Church>를 설립하였으며, 1822년에는 그들의 입장들을 알리기 위하여 <British Critic>지를 구입하였다. 이 집단에는 그들 이외에도 찰스 도베니(Charles Daubeny, 총사제, 1745-1827), 토마스 사잌스(Thomas Sikes, 1757-1834), 윌리엄 벤 밀더트(William Van Mildert, 1765-1836)도 가담하였다. 리버풀경의 행정부(1812-27) 동안에 헤크니모임은 교직추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1811년 교회건축물 확장에 백만 파운드를 지원하는 교회건축법(Church Building Act)을 승인받았다.

    또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와 미국에서도 강력한 고교회파 전통이 확립되었다. 뉴욕주교인 헨리 호바트(Henry Hobart, 1816-30, 1811년부터 부주교로 활동)는 ‘복음적 진리와 사도적 성직’(Evangelical Truth and Apostolic Order)이라는 기치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였으며, 열정면에서 잉글랜드의 그것과는 다소 다른 고교회파를 형성하였다.

    고교회파는 19세기초에 활기를 회복하였지만, 옥스퍼드운동으로 크게 변형되었다. 이 운동은 본래 1828-32년 동안에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가 약화되는 현상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되었다. 1829년 가톨릭교도 해방법(Catholic Emancipation)은 국교회 성직자들을 경계하게 만들었다. 또한 휘그파 정부가 아일랜드의 10개 주교직[교구]을 해체시켰을 때, 존 키블(John Keble)-옥스퍼드의 시문학교수-은 1833년7월14일 대학교 예배의 설교에서 이를 ‘국가의 배교행위’(National Apostasy)라고 규정하였다.

    키블의 제자중에는 유니버시티교회(University Church)의 관할사제인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1801-90)과 리처드 허럴 프로드(Richard Hurrell Froude, 1803-36)이 포함되었다. 이들의 입장은 연속적으로 출판된 소책자들(Tracts)을 통해서 전파되었다. 1835년 소책자운동가들-이렇게 명명되었다-은 히브리어 흠정강좌 교수인 에드워드 보버리 퓨지(Edward Bouverie Pusey, 1800-82)가 합류함에 따라 지적인 위상을 확보하였다.

    이 운동은 1839년에 정점에 도달하였지만, 이 때에 뉴먼은 국교회[성공회]의 입장의 정당성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가 쓴 <소책자 90호>(Tract XC)에 대한 적대적인 반응, 그리고 성공회와 루터교회의 예루살렘교구 공동설립 시도는 그의 의구심을 더욱 심화시켰다. 1843년 그는 그의 교직을 사임하였다. 더 큰 어려움들은 이 운동 내부에 윌리엄 워드(W. G. Ward, 1812-82)와 프레드릭 오클리(F. Ockeley, 1802-80)를 중심으로 한 급진적인 친로마 가톨릭파의 형성이었다. 워드의 저서 <Ideal of a Christian Church>는 1845년 2월 옥스퍼드에서 정죄받았다. 워드와 다른 추종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로 귀의하였으며, 뉴먼도 같은 해에 귀의하였다. 그의 이탈은 곧 좁은 의미에서 옥스퍼드운동의 종결을 의미하였지만, 이들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전도구교회들로 확산되면서 가톨릭 부흥운동(Catholic revival)으로 연결되었다.

    1845년이후 이 운동의 지도력은 헨리 에드워드 멘닝(Henry Edward Manning, 1808-92)이 맡을 것으로 보였지만, 그 또한 고햄판결후 1851년에 로마로 귀의하였다. 세례의 재생(baptismal regeneration)에 대한 고햄판결은 많은 사람들에서 영국성공회의 태생적인 국가교회주의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따라서 퓨지가 1882년 사망할 때까지 가톨릭운동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소책자운동가들은 영국성공회가 교회와 국가에서 자유주의의 개혁적인 성향들로 공격을 받고 있을 때, 국교회의 신앙적인 독립을 다시 주장하였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계승된 주교직을 교회의 본질(esse)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이 그들의 고교회파 선조들과 다른 점은 이를 이용하여 다른 프로테스탄트들을 ‘파문’하였으며, 종교개혁을 분명하게 격하시켰다는 점이다. 특히 프로드의 <유고집>(Remains)은 종교개혁가들에 대한 비방으로 특히 악명 높았다. 소책자운동가들은 종교개혁의 신앙정책(Settlement)을 성공회의 교리와 실제(신앙활동practice)의 표준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원시 그리스도교[초기교회]를 기준으로 종교개혁을 평가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이들과 다른 고교회파 성직자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야기시켰다. 윌리엄 팔머(William Palmer)와 월터 후크(W. F. Hook, 1789-1875)와 같은 고교회파들은 로마 가톨릭신앙에 반대하며, 과거의 전통에 충실하며 국교회에 남아있었다.

    성공회신앙내의 가톨릭 부흥운동의 영향은 거대하였다. 이 운동으로부터 로마 가톨릭교회와 관련된 전례적인 활동과 성사적인 교리들이 복원되었으며, 수도생활이 복원되었으며, 사제직(priestly office)을 크게 강조하며 신심기도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현상으로 갈등이 없지 않았으며, 특히 19세기 후반부는 의례들에 관한 논쟁들로 더욱 치열하였다.

    보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가톨릭 부흥운동은 성공회신앙이 공교회성 (catholicity)과 성사적 영성을 보다 넓게 이해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이는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와 관계를 향상시키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지만, 사목직에 관한 교리는 오히려 비주교제 교파교회들과의 재통합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5. 광교회주의와 자유주의신학

    ‘광교회주의자’(Latitudinarian)라는 용어는 신앙적 문제들에 대한 견해의 범위를 확대하고 신앙적 논쟁의 종식을 선호하는 자들을 지칭하기 위하여 17세기 중반에 사용되었다. 교회의 치리형태, 전례 그리고 논쟁적인 교리들은 ‘사소한 문제들’로 간주되었다. 존 로크의 <그리스도교의 합리성>(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 1695)은 그리스도교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몇가지 간단한 근본적인 진리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견해를 유행시켰다.

    18세기의 광교회주의는 때때로 이신론뿐 아니라 반삼위일체론으로 전향하였다. 새무얼 클락(Samuel Clark)은 공개적으로 아리우스주의(Arianism)와 유사한 입장을 옹호하였으며, 클로거교구의 주교인 클레이턴(Clayton)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입장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교리적으로] 보다 확대된 전례서에 대한 기대는 곧 아타나시우스와 니케아 신경들에 대한 공격으로 연결되었다.

    1750년대에 서명반대운동(Anti-Subscription Movement)은 총사제인 블랙번 (Blackburne)의 지도하에 전개되었다. 1771년 그와 그의 지지자들은 39개 신앙조항과 전례서에 대한 성직자들의 서명의무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Feather’s Tavern Petition)를 의회에 제출하였다. 약250여명이 서명한 이 청원서는 평민원에서 거부당하였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보수적인 반발은 자유주의 신학의 확산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윌리엄 페일리의 저서인 <그리스도교의 증거들>(Evidences of Christianity, 1794)은 인기있는 변증서로, 특히 대학교들에서 교재로 사용되었다.

    19세기초 자유주의 성직자들중 가장 유명한 집단은 옥스퍼드 오리얼 칼리지의 ‘순수이성론자들’(Noetics)이었다. 에드워드 코플스턴(Edward Copleston, 1776-1849, 1827년부터 학장), 리처드 훼틀리(Richard Whately, 1787-1863, 후에 더블린 대주교), 토머스 아널드(Thomas Arnold, 1795-1842, 후에 러그비 학장)이 이 모임의 주요인물들이었다. 이들을 교회와 국가의 통합을 강력히 지지하였으며, 아널드의 <교회개혁의 원칙들>(Principles of Church Reform, 1833)은 모든 그리스도인들(퀘이커와 로마 가톨릭 제외)을 하나의 국가교회로 포용함으로써 국가를 그리스도교화하려는 강력한 청원이었다.

    아널드는 역사학자였지만, ‘순수이성론자들’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정치경제학에 관심하였다. 교회와 사회에 대한 이들의 입장은 1830년대의 휘그파 정부에 영향을 주었다. 케임브리지의 자유주의신학은 보다 역사적이며 문학적인 특성을 보존하였으며,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다. 콘높 떨월(Conop Thirlwall, 1797-1875, 후에 성데이빗의 주교가 됨)은 쉴라이에르마허의 <성 누가복음에 관한 논문>을, 줄리어스 헤어(Julius Hare)는 니이버의 <로마의 역사>를 번역하였다. 1830년대에 자유주의 성직자들은 각 대학교를 프로테스탄트 비국교도들에게 개방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대학교 개방은 1850년대에야 가능하였다.

    ‘광교회’(Broad Church)라는 용어는 1850년경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용어는 같은 해에 아서 스탠리(A. P. Stanley, 후에 웨스트민스터 수도원교회 수석사제)가 에딘버러 리뷰지에 쓴 기고문에서 나타났다. 아널드의 전기를 쓴 스텐리는 잉글랜드교회를 국가단위의(national) 그리스도교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기뻐하였으며, 이 교회의 포괄성을 축소시키려는 모든 시도들을 반대하였던 빅토리아시대의 대표적인 광교회 성직자였다.
    새무얼 코울리지(S. T. Coleridge, 1772-1834)와 프레드릭 모리스(F. D. Maurice, 1805-72)는 종종 자유주의 신학의 범주에서 논의되지만, 이들은 초기 그리스 교부들의 전통과 17세기의 플라톤주의에 의존하였다. 코울리지는 특히 인간이해에 관한 환원주의적인 영향을 받은 로크의 결정론적인 기계론적 철학을 거부하였다는 점에서 19세기의 독창적인 사상가들중 하나이다. 대작을 집필할 능력은 결여하였지만, 그는 이성과 분별력의 관계를 탐구한 <Aids to Reflection>(1835), 성서적인 영감의 문제를 다룬 <Confessions of and Enquiring Spirit>(유작으로 출판됨, 1840), 그리고 <Constitution of the Church and State>(1829) 등의 저서들에서 새로운 방향을 지시하였다.

    프레드릭 모리스는 유니테어리언 목사의 아들로 1831년 잉글랜드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최고 저작인 <The Kingdom of Christ>(1838)는 잉글랜드 그리스도교의 교파적인 정체성들을 여러가지 극성들(표현들polarities)로 이해하며, 이것들은 삼위일체에 근거한 하느님의 질서(Divine Order)를 증언하는 하나의 교회안에 결합된다고 이해하였다. 그는 이것이 바로 잉글랜드교회의 특별한 소명이어야 한다고 이해하였다.

    1860년 <Essays and Reviews>의 출판은 성공회 자유주의신학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책은 신랄한 논쟁을 야기시켰으며, 기고자 7인은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7인’(septem contra Christum)으로 묘사되었다. 벤자민 조위트(Benjamin Jowett)의 글 <성서해석에 관하여>(On the Interpretation of Scripture)는 성서비평학을 완전히 수용하고, 성서의 권위와 영감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들을 거부함으로써 커다란 비판을 유도하였다. 논쟁은 가라앉았다 하더라도, 이 책은 자유주의신학이 잉글랜드에 확고하게 정착하였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성직자들은 비평학적[비판적] 방법론을 성서와 신경들에까지 확대함으로써, 본래의 광교회주의자들이 주장하였던 근본적인 교리와 비본질적인 교리들 사이의 구별을 더이상 수용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따라서 고전적인 성공회신앙의 필수적인 요소를 약화시켰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신학은 이전의 광교회주의와 달리하였다.

    6. 성공회신앙의 확장

    성공회신앙의 확장초기는 잉글랜드의 상업적 이해로 촉진되었다. 잉글랜드교회의 전도구교회들은 (1607년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을 시작으로) 북아메리카와 카리브해[서인도제도]에 설립되었다. 레반트회사[지중해무역 독점회사]와 동인도회사들이 번창함에 따라 기도소들(chaplaincy)은 각 항구들뿐 아니라 훨씬 먼 지역에도 설립되었다. 로드(Laud)의 시대부터 해외의 성공회교회는 이론적으로 런던주교가 관할권을 행사하였다.

    1698년 Society for the Promotion of Christian Knowledge(SPCK)의 설립, 그리고 1701년 Society for Propagation of the Gospel(SPG)의 설립으로 선교활동에 새로운 시대를 개막하였다. 처음에 SPCK는 인도 남부의 네델란드 선교사들을 지원하였지만, 그 후부터 자체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SPG는 주로 북미주에 집중하였다. 이 두 선교회는 런던주교를 대신하여 미국 식민지의 교회들을 관할하는 런던주교의 대리인(commissary) 토머스 브레이(Thomas Bray, 1656-1730)의 열정적인 활동으로 탄생하였다. 이 두 단체들은 자원단체였지만 국왕의 특허장을 받아 조직되었다.

    해외의 주교직 설립은 지연되었다. 의회의 법률은 새로운 교구(bishopric)의 설립을 요구하였다. 또한 새로운 주교들은 국왕의 명령으로 런던에서 축성받아야 했다. 미국의 식민지들을 관할하는 주교를 임명하려는 계획들은 무위로 끝났다. 이는 잉글랜드 내의 정치적인 난관들뿐 아니라, 미국내에서 주교직[주교의 권한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였다.

    미국의 독립은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시켰지만, 또한 기회도 제공하였다. 1783년 커네티컷 성직자들은 새무얼 시베리(1729-96)를 주교로 주교축성을 위하여 런던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국내법은 켄터베리 대주교가 ‘외국인’을 축성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베리는 비국교회인[법의 규제를 받지 않는]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주교들에게 기대하였다. 그는 1784년에 그곳에서 주교축성을 받았으며, 자신의 교회에 독특한 스코틀랜드 성찬예식을 채택하기로 약속하고 미국으로 귀향하였다. 미국성공회는 헌법상[교회조직의 측면에서] 중요한 새로운 방식을 채택하였다. 즉, 주교와 성직자들, 그리고 평신도들로 구성된 교회회의에 의한 치리형태(synodical government by bishops, clergy, and laity)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치리형태는 대영제국 내에 있는 식민지교회들에게 교회조직에 대한 대안적인 모델을 제공하였다.

    1876년 영국의회는 켄터베리대주교에게 국왕의 신하가 아닌 자를 축성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다음해 두명의 다른 미국인들이 람베스에서 주교축성을 받았으며, 같은 해에 찰스 잉글리스는 노바스코샤[카나다]의 주교로 축성되었으며, 1793년에는 제이콥 마운틴이 퀘벡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켈커타는 1814년에, 1824년에는 서인도제도에 두명의 주교를 축성하였으며, 1836년에는 호주의 주교를 축성하였다.

    1841년 제임스 블럼필드(James Blomfield, 1776-1857) 런던주교의 주도로 식민지 주교직 보조기금(Colonial Bishopric Fund)이 설립되었다. 이 기금은 해외 주교직의 확대를 크게 촉진시켰으며, 따라서1867년의 첫번째 람베스회의까지 대영제국의 식민지에 약 50명의 주교들과 미국에 35개의 교구가 존재하였다. 1864년에는 최초의 아프리카 주교로 새무얼 크로우더(Samuel Adjar Crowther, 1806-91)가 나이제리아 주교로 축성되었다.

    성공회신앙은 스코틀랜드와 미국의 성공회들처럼 국가와의 관계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의 교회들과 모교회 사이의 관계는 국교제도 때문에 복잡하였다. 영국내에서와 마찬가지로, 식민지들에서도 비국교도들은 국가교회에 대한 혜택들에 적대적이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해외의 국교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법적인 문제들도 복잡하여 결국 소위 ‘이튼 칼리지 사건’으로 폭발하였다. 이 사건에서 국교회인 잉글랜드교회는 지역의회가 존재하는 식민지들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판결받았다.

    식민지 교회들은 이미 교회회의에 의한 치리형태(synodical government)를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뉴질랜드주교인 조지 셀윈(G. A. Selwyn)은 1844년에 비공식적인 성직자 교회회의(synod)를 소집하였다. 1852년 뉴질랜드에 자치권이 허용되었으며, 5년후에 뉴질랜드교회의 헌장(Constitution)을 제정하였다. 이는 이후 많은 교회들의 헌장제정때에 모델이 되었다. 남아프리카관구는 1876년에 헌장을 채택하였으며, 서인도제도 관구는 1883년에 첫 교회법률집을 공표하였다. 1893년에는 카나다성공회의 전국총회(General Synod)가 구성되었다. 호주교회의 조직은 20세기초에야 시작되었다.

    선교사 파송운동(missionary impulse)은 19세기 성공회신앙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예를들면, CMS의 선교사들은 식민지의 해방된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1804년 시에라리온에 도착하였으며, 중앙아프리카 대학선교회(UMCA)-선교단체들중 가장 앵글로-카톨릭적이었다-는 잠베지강까지의 선교활동을 요청한 데이비드 리빙스톤의 호소에 응답하였다. UMCA의 전략중 흥미있는 측면은 주교를 개척선교사로 임명한 것이었다. 이는 1843년 [앤서니] 그랜트 총사제(archdeacon)의 벰프턴강좌에서 제기된 착상이었다. 1861년 니아사 호수 지역의 선교를 주도하도록 찰스 메켄지(C. F. Meckenzie)를 케이프타운에서 주교로 축성하였다.

    이후 지속적으로 전개된 선교활동은 점차적으로 현지인[토착] 성공회신자들의 노력으로 활성화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세계성공회는 모든 대륙들에서 확고히 뿌리내렸다. 이제 그 구성원들은 더이상 문화적으로 영국적이 아니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51년의 서부 아프리카를 시작으로 독립적인 관구들이 빠르게 설립되었다. 이제 주교들과 성직자들은 거의 자국민이었으며, 지역의 언어로 예배를 드리며 지역의 문화적인 형식들을 반영하였다.

    [아래에서 계속]

    2012년 6월 1일 #
  2. Cranmerian
    회원

    7. 람베스회의와 람베스 4개조항

    세계성공회 공동체(Anglican Communion, 이 용어는 1851년에 처음으로 나타났다)의 성장은 각 관구교회들 사이에 보다 밀접한 관계를 갖도록 자극하였다. 1850년대부터 성장하기 시작한 범-성공회의식은 점점 뚜렸하게 나타났다. 미국성공회 주교들은 SPG의 150년 기념을 함께 축하하였다. 1866년 요크에서 개최된 세계성공회대회(Church Congress)는 식민지와 미국의 주교들을 포함한 최초의 회의였다.

    한편 케이프타운의 대주교인 그레이가 콜렌조 주교를 이단죄로 폐위시키려는 시도, 그리고 그 직후에 이를 본국의 추밀원에 항소한 사건은 식민지 교회들과 국왕과의 관계에 대한 의문들을 제기하였다. 또한 1852년 잉글랜드교회의 성직자회의의 속개는 이 회의의 결정사항들이 독자적인 교회회의를 발전시키고 있는 해외의 교회들에게 어떤 관련성을 갖는가에 대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외에도 <에세이와 리뷰>(pp. 122참조)에 대한 우려도 팽배하였다. 이제 일부에게는 성공회 전체의 모임을 개최할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느꼈다.

    온타리오교구의 루이스 주교의 제안으로 카나다성공회 관구의회는 세계성공회의 회원들이 ‘모든 지역에서 참여하는 세계공의회(General Council)’를 개최하도록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1865년 찰스 롱리(Charles Longley)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관구의회는 국내와 해외의 주교들의 교회회의(Synod)를 소집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로써 최초의 람베스회의가 개최되었다. 롱리는 이 요청에 공감하였지만 조심스러웠다. 일부 잉글랜드 주교들은 이러한 모임의 의도 또는 합법성을 의심하였으며, 초대장을 발부하기 전에 롱리는 제안하는 이 모임에서 교회법률들을 제정하지 못하며 어떠한 결정도 법적인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150명의 주교들에게 초대장을 발부하였으며, 그중 67명이 참석하였으며, 처음부터 반대하였던 요크 대주교는 참가를 거부하였다. 따라서 이 모임은 교회회의가 아니었으며, 그러한 시도들 또한 저지되었다. 회의는 1867년 9월24일부터 27일까지 [4일간] 개최되었으며, 잉글랜드의 교회들과 식민지교회들 그리고 선교단체들 사이의 상호협력(intercommunion)을 논의하고 사목서신을 발표하였다.

    10년후에 제2차 회의가 개최되었다. 그 이후의 회의들은 거의 10년마다 개최되었으며, 점점 더 많은 주교들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조지 벨(G. K. A. Bell)주교의 표현처럼, ‘세계성공회의 다양한 관구들과 교구들을 상호협의로 결속시키는 특별한 기회’가 되었다. 람베스회의는 켄터베리 대주교의 초청에 의해서만 소집되는 협의기구로 유지되고 있다. 이 회의의 협의내용들에 대한 존중심의 정도에 관계없이, 이 회의는 교회법적으로나 헌장적인 지위를 갖고 있지 않지만, 세계성공회 내에서 켄터베리 대주교의 수좌직(primacy)을 강화시켰다.

    1888년 회의에서는 일명 시카고-람베스 4개조항(Chicago-Lambeth Quadrilateral)을 채택하였다(pp. 249-50). 이 신앙조항은 원래 미국성공회 사제인 윌리엄 리드 헌팅턴(William Reed Huntington)이 쓴 <The Church Idea, An Essay toward Unity>(교회의 이상, 통합을 향한 소론)에서 유래하였다. 4가지 필수조항을 의미하는 4개요소(Quadrilateral사변형)란 용어는 1870년 이탈리아의 통일 직전에 오스트리아의 북부 이탈리아 점유를 가능케한 4개의 전략요새[도시]들을 의미하는 롬바르드 사각요새에서 유래하였다. 람베스 조항은 ‘하느님의 축복으로 재결합(Home Reunion)을 실현할 수 있는 기본조항들’로 4가지 요소들을 포함하였다. 즉, 구원에 필수적인 모든 것들을 포함하고 있는 성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충분한 진술문인 신경들, 세례와 성찬례 성사들, 그리고 ‘하느님이 소명한 나라들과 백성들의 여러가지 필요에 따라 그 치리방법들을 지역적으로 현지화시키며, 하느님의 교회의 통합을 추구하는 역사적 주교직’. 이 마지막 항목은 성공회신앙 내에서 주교직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을 포용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그렇게 서술되었기 때문에, 성공회 신학자들은 이의 정확한 의미를 논의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에서 이 4개조항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본래 이 조항들은 서로 다른 해석들을 포용하려는 다소 방어적인 주장이었다. 성공회 신자들은 이 4가지 항목이 다가오는 통합된 교회의 독특한 특징들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8. 19세기후반 이후의 성공회신학

    교회가 새로운 과학적 역사적 발견들에 고통스럽게 적응함에 따라, 19세기 후반부는 신학적으로 재구성의 시기였다. ‘케임브리지 삼총사’인 조지프 라이트푸트(J. B. Lightfoot, 1829-89), 부르크 웨스트코트(B. F. Westcott, 1825-1901), 펜톤 호트(F. J. A. Hort, 1828-92)는 신약성서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가 기존의 비평가들처럼 회의론에 빠질 필요가 없다는 점을 입증함으로써, 교회내에서 성서비평학에 대한 이해를 향상시켰다. 라이트푸트는 더럼주교가 되었으며, 웨스트코트는 1890년 그를 계승하였다. 호트의 헐스강좌인 <길, 진리 그리고 생명>은 성공회의 신학적인 특성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있다.

    1889년 <룩스 문디[세상의 빛]; 성육신 신앙에 대한 연구들>(Lux Mundi: A Series of Studies in thr Religion of the Incarnation)의 출판은 성공회신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 책은 일단의 젊은 옥스퍼드 학자들이 소책자운동가들의 신학과 근대의 비판적 연구들을 통합시키려는 목적으로 편집되었다. <룩스 문디>의 종합에서 중요한 요소들은 하느님의 내재성(immanence)에 대한 강조, 진화[발전] 이론들의 이용, 구약성서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 그리고 일종의 ‘케노시스’(Kenotic자기비움) 그리스도론처럼 주님(Lord)의 지식의 한계성을 수용하였다. 헨리 리던(H. P. Liddon, 1829-90)과 같은 보수적인 소책자운동가들에게 이 책은 독일의 합리주의(rationalism)에 대한 항복을 의미하였다.

    이 집단의 지도자인 찰스 고어(Charles Gore, 1853-1932)는 그의 성육신 신학을 ‘자유주의 가톨릭신앙’(Liberal Catholicism)으로 표현하며, 가톨릭 교리와 신심활동, 비판적 방법론 그리고 사회적 관심의 결합은 성공회의 진정한 소명을 표현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종종 소책자운동가들의 유산을 프레드릭 모리스의 신학과 융합한 것으로 이해된다. ‘자유주의 가톨릭신앙’은 고어를 포함한 세명의 기고자들이 후에 주교가 되었기 때문에, 랜덜 데이비슨(Randall Davidson)의 대주교직 기간(1903-28)에 국교회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고어는 자유주의 가톨릭신앙의 새로운 세대들과 갈등하였다. 그들은 일부 로마 가톨릭 모더니스니트들[근대주의자들]의 경험신학(theology of experience)의 영향을 받아 신경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을 허용하려고 하였다. 1926년 에드워드 셀윈(E. G. Selwyn)이 편집한 책인 <Essays Catholic and Critical>은 이 후기 학파의 선언문이었다.

    성공회의 모더니즘[근대주의]은 1920년대에 활발하였다. ‘광교회’ 전통의 계승자이자 대륙의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트신앙의 영향을 받은 이들의 포럼[토론장]은 헨리 메이저(H. D. A. Mayor)가 주도하는 Modern Churchmen’s Union이었다. 1921년 케임브리지 거튼 칼리지(Girton College)에서 개최된 이들의 협의회에서 일부 연사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 지속된 논쟁으로 1922년 대주교들이 지명한 그리스도교 교리에 관한 조사위원회 (Archbishop’s Commission on Christian Doctrine)를 설립하였다.

    이 위원회의 보고서인 <Doctrine in the Church of England>는 1938년에서야 출판되었다. 이 보고서는 영국성공회의 교리를 정의하기 보다는 개관하였기 때문에, 신학적 다양성의 허용된 한계들을 분명하게 규정짓지 못하였다. 이 위원회가 신경의 진술문들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해석들에 부여한 승인은 모호하였으며, 교회는 이 보고서를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위원회의 의장이었던 윌리엄 템플-당시 요크대주교로 후에 켄터베리 대주교가 됨-은 조사위원으로 다시 활동하기 시작할 때, 구원의 신학(theology of redemption)을 중심으로 할 것이라고 논평하였다. 이로써 <룩스 문디>로 시작된 성육신 신학의 시대는 종결되었다.

    이러한 신학적인 변화는 여러 분야들에서 ‘성서적 정통주의’(biblical orthodoxy)로 회귀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는 에드윈 호스킨스(E. C. Hoskyns, 1884-1937)의 저서에서 예시되었다. 그는 1933년 칼 바르트의 <로마서주석>을 번역하였으며, <Essays Catholic and Critical>의 기고자였다. 또한 가브리엘 허버트(A. G. Hebert)와 리오널 톤턴(Lionel Thornton)과 같은 ‘성서적 신학’(Biblical theology) 옹호자들은 자유주의 가톨릭신앙 출신이었다.

    ‘성서적 신학’은 근본주의의 부활[부흥]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신학은 성서의 통일성과 성서적 계시의 독특성을 강조하였다. 이 신학의 약점은 때때로 비판적인 쟁점들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며,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보다 넓은 활동을 배제시키고 성서적 계시에만을 집중한다는 점이었다.

    1960년대는 ‘급진적인 신학’(radical theology)이 폭발적으로 발생한 시기였다. 성공회학자의 저서로는 1963년에 동시에 출판된 미국의 폴 밴 뷰런(Paul Van Buren)의 <복음의 세속적 의미>(The Secular Meaning of the Gospel)와 [영국의] 존 로빈슨(J. A. T. Robinson)의 <신에게 솔직히>(Honest to God)였다. 주교인 로빈슨의 입장은 특별한 논쟁을 야기시켰다. 두 저자들은 분명한 선교적인 목적으로 ‘현대인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그리스도교를 만들려는 시도로 집필하였다. 로빈슨은 대륙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인 불트만, 틸리히와 본회퍼에 크게 의존하였으며, 항상 정당한 방식은 아니었지만 이들을 종합적으로 결합시켰다.

    아마도 이에 대한 반발로 최근의 신학적인 경향들은 보수주의의 소생, 특히 영국성공회와 그밖의 교회들에서 보수적인 복음주의의 부흥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복음주의는 19세기 후반의 그것보다 더 성사적이고 학문적이며, 종종 사회적인 신학(social theology)에 대한 보다 강력한 헌신을 보여준다. 급진적인 신학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잉글랜드의 데이비드 젱킨스 주교와 미국의 존 스퐁 주교는 특히 나쁜 평판으로 유명하며, 그리고 성육신을 분명하게 거부하거나 또는 돈 큐핏(Don Cupitt)과 ‘Sea of Faith’[믿음의 바다]조직의 경우처럼 객관적인 유신론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이는 성공회 신학자들의 존재는 확고한 교회론적인 신앙을 가진 신자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9. 전례적인 발전들

    18세기는 소수의 서약거부자들을 제외하면 전례적인 창작의 시기가 아니었다. 잉글랜드교회의 일요일 예배는 설교대에서 집례하고 전도구교회 사무장(clerk)이 응답문들을 인도하는 아침기도, 연도 그리고 말씀의 예배(Ante-communion)를 포함한 아침예배였다. 박절식(metrical) 시편은 때때로 마을 밴드의 반주로 노래하였다. [감사]성찬례는 제대의 북쪽 끝에서 인도하였으며, 거행빈도는 18세기 동안에 감소하였다. 일반적으로 도시들에서는 매달 한번씩 거행하였으며, 그외의 지역에서는 분기별로 한번씩 거행하였다. 그러나 복음주의 부흥운동은 보다 자주 성찬에 참여하도록 요구하였으며, 예배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더욱 촉진시켰다.

    낭만주의 운동은 ‘감정’을 강조하고 중세시대를 이상화함으로써 신앙적 감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건축에서는 신고전주의 양식이 물러나고 고딕 복고양식이 부흥하였다. 존 닐(J. M. Neale, 1818-86)이 주도한 케임브리지 켐든학회(Cambridge Camden Society)-후에 교회건축학회(Ecclesiological Society)로 개칭-는 고딕양식의 정신을 촉구하였으며, 또한 교회의 건축물들과 비품들(fittings)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닐은 또한 초기교회와 중세교회의 찬송가들을 많이 번역함으로써, 그들의 성사적 교리를 평범한 신자들에게 전달하였다.

    의식주의(의례주의 Ritualism)는 본래 소책자운동가들의 프로그램에 없었지만, 그들은 매일예배, 매주일의 성찬례거행 그리고 전례력의 준수를 권장하였다. 소책자운동이 앵글로-가톨릭운동(Anglo-Catholicism)으로 변화함에 따라, 의식주의는 1850년대와 60년대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의식주의는 제대의 동쪽끝 설치, 양초, 성찬례 전례복, 그리고 심지어 향(incense)까지 도입함으로써, 성사와 사제직에 대한 소책자운동가들의 이해를 시각적으로 가르치려고 시도하였다. 빈민지역의 일부 성직자들은 이를 문맹자들을 복음화시키는 방식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의식주의는 교회내의 전례적 통일성을 파괴하였으며, 프로테스탄트 성향의 성공회신자들로부터 공개적으로 공격받았다.

    국왕이 지명한 의식문제 조사위원회(Royal Commission on Ritual)는 1867년 결론없이 보고서를 발표하였으며, 1874년의 공공예배 규제법(Public Worship Regulation Act)은 수상인 디즈레일리의 표현처럼 ‘가장된 미사’의 거행을 척결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연이어 5명의 의식주의자 사제들의 구속은 오히려 여론을 반전시켰으며, 1880년대말 의식상의 변칙들로 고발당한 성자와 같은 에드워드 킹 주교에 대한 재판은 대중의 우려를 더욱 촉진시켰다. 또다른 국왕 조사위원회(Royal Commission)는 1906년에 ‘공적인 예배에 관한 법률은 현재의 세대들의 신앙생활에 비추어 너무 좁게 규정되어 있다’고 보고하였다.

    의식주의는 세계성공회의 다른 지방에서도 유사한 분쟁을 야기시켰지만, 전통적인 고교회파 성직자들이 우세한 지역들-스코틀랜드와 미국의 일부지역들-과 가톨릭파의 선교지들-특히 남부 아프리카와 서인도 제도-에서 번성하였다. 1869년 아일랜드의 국교제도를 폐지하였을 때, 아일랜드성공회는 의식[의례]의 창작을 분명하게 금지하는 교회법률들을 제정하였다. 잉글랜드에서 공동기도서의 전례용품 지시문 (ornament rubric)에 대한 해석은 항상 법적인 분규의 원인이었으며, 주교의 명령문(injunction)들은 대체로 무시되었다.

    기도서의 비공식적인 확대해석 그리고1860년대에 시작된 성체의 보존은 20세기초에 더욱 일반화되었다. 한편 일부 성공회 관구교회들은 공식적으로 전례서의 개정을 시작하였으며, 잉글랜드는 1928년 기도서의 개정으로 이러한 변화들을 포함시키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대다수 당파들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내용은 평민원[하원]의 잠복된 프로테스탄트 성향을 자극함으로써 승인받지 못하였다.

    전례운동의 영향력은 앵글로-가톨릭의 불법적인 행동을 억제하는 수단이 아니라, 전례 자체를 위하여 전례를 개혁하도록 요구하였다. 이 운동의 이해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시작되었지만, 두가지 초기 저서들을 통해서 성공회로 전달되었다. 즉, 가브리엘 허버트(A. G. Hebert)의 <Liturgy and Society>(1935)와 허버트가 편집한 평론집 <The Parish Communion>(1937). 후자의 책은 감사성찬례를 주일의 중심예배(main worship)로 만드는 운동에 신학적인 근거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이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의 ‘전도구교회 연합’(Associated Parishes) 운동과 잉글랜드의 ‘전도구교회와 신자들’(Parish and People) 운동을 통해서 활발하게 증진되었다. 그레고리 딕스는 그의 저서인 <전례의 구성>(The Shape of Liturgy, 1945)에서 전례개정을 위한 학문적인 사례를 제공하였다. 특히 곧이어 그는 성찬례 양식의 구조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지난 20년 동안에 다른 교회들처럼 현대의 성공회 교회들은 상당히 많은 개정된 전례 본문들을 생산하였다. 이러한 과정에는 특별히 [교파간의] 공통적인 전례본문들의 현대어 번역에서 많은 실험들과 초교파적인 상호교류를 포함하였다.

    1979년 미국성공회가 새로운 기도서를 채택한 이후, 많은 관구교회들이 기도서를 개정하였다. 잉글랜드의 경우, 국법으로 설립된 국교회는 의회의 승인을 받고서야 전례개혁의 과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1662년의 공동기도서는 여전히 표준 기도서로 남아있으며, 따라서 1980년에 완성된 기도서는 <대안예식서 1980>이라고 명칭되었다. 세계성공회의 다른 관구교회들-예를들면 아일랜드, 카나다와 미국-과는 달리 영국성공회는 공식적인 찬송가집[성가집]을 제정한 적이 없었다.

    10. 성공회신앙과 교회일치운동(Ecumenism)

    많은 성공회 교회들은 그리스도교의 통합에 관심하였으며, 현대에서도 교회일치의 소명은 성공회의 자기인식의 일부이다.

    크랜머와 제임스 1세 역시 나름대로의 초교파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다. 18세기초 윌러엄 웨이크(William Wake, 1651-1737) 대주교는 그리스도교 통합을 위하여 야블론스키(Jablonski)와 투렌티니(Turrentini)와 같은 개혁주의 신학자들 뿐만아니라, 뒤팽(Du Pin)과 지라르댕(Girardin)과 같은 로마 가톨릭 프랑스교회 지도자들과도 서신을 교환[교류]하였다. 초기 그리스도교와 연속성을 갖는 신앙과 성직의 보존, 그리고 신앙의 본질적 요소들과 비본질적 요소들 사이의 구별이라는 성공회의 주장은 교회일치 노력의 결실을 만들 수 있는 가능한 토대들로 이해되었다.

    그리스도교회에 대한 옥스퍼드운동의 이해는 그 추종자들에게 다른 주교제 교회들과의 재결합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1857년 로마 가톨릭 신자인 암브로스 필립스 드 라일(Ambrose Phillipps de Lisle)과 잉글랜드교회 프레드릭 리(F. G. Lee)는 Association for the Promotion of the Unity of Christendom[APUC]를 설립하였으나, 1864년 로마 교황청의 정죄로 중단되었다. 1863년에는 Eastern Churches Association이 설립되었다. 퓨지는 1865년에서 1870년 사이에 통합을 호소하는 세 권의 <Eirenicons>를 출판하였으며, 성공회는 1870년대의 구 가톨릭교회들(Old Catholic Congress)에 호의적인 관심을 가졌다.

    일반적으로 현대의 에큐메니칼운동은 1910년의 에든버러 선교대회(Edinburgh Missionary Conference)에서 시작되었다. 찰스 헨리 브렌트(Charles Henry Brent, 1863-1929)-카나다인으로 필리핀 주교-는 에든버러에서 돌아와 교리적인 쟁점들을 정면으로 다루는 국제적인 회의를 추진하였다. 전쟁으로 연기된 후, 첫번째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World Conference on Faith and Order)는 1927년 로잔에서 개최되었다. 이후 17년동안 이 운동은 대체로 미국성공회의 인적, 재정적 지원으로 지속되었다. 1937년 어든버러에서 개최된 두번째 대회는 윌리엄 템플 대주교를 교회일치운동의 지도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 역할은 템플의 계승자인 제프리 피셔(Geoffrey Fisher)가 맡게되어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를 출범시켰다. 또 하나의 성공회 교회일치운동 지도자인 조지 벨(G. K. A. Bell, 1883-1958) 주교는 중앙집행위원회(Central and Executive Committees)의 첫 의장이 되었다. 모든 성공회 관구교회들은 WCC에 가입하였다.

    가시적인 통합에 대한 성공회의 의지는 1920년 람베스회의에서 공표한 ‘모든 그리스도교인에게 보내는 호소문’(Appeal to all Christian People)에 가장 예언자적으로 표현되었다. 조직간의 통합에 대한 간절한 청원인 이 호소문인 그렇게 통합된 그리스도교회를 위한 토대로서 람베스 4개조항을 다시 확언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중심인물은 아서 헤들램(A. C. Headlam, 1862-1947)-후에 글로스터 주교가 됨-으로 람베스회의 직전에 그의 저서인 <Doctrine of the Church and Christian Reunion>(1920)을 출판하였다.

    이에따라 일부 실질적인 결실들이 나타났다. 성공회-정교회 관계들은 보다 우호적이 되었으며, 스웨덴 [국가]교회[루터교회]와는 제한적인 성찬교류(상호교류 intercommunion)를 확립하였으며,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는 본 협약(Bonn Agreement, 1931)의 결과로 구 가톨릭교회들(Old Catholic Churches)과 완전한 성찬[상호]교류를 확립하였다.

    성공회와 비주교제 교파교회들과의 재통합은 보다 다루기 힘든 문제임이 입증되었다. 26년간의 협상끝에 1946[7]년 남인도교회(Church of South India)가 탄생하였다. 성공회, 감리교회 그리고 개혁주의 교회들 사이의 통합은 비주교제 성직자들의 재서품이 아니라 미래의 주교제 서품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일부 성공회 신자들은 성공회의 근본적인 원칙들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였다. 이 때문에 세계성공회 공동체로부터 완전한 승인을 받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1970년 북인도교회와 파키스탄교회(Churches of North India and Pakistan)는 예식의 합병(incorporation)으로 사목직에 대한 문제들을 회피하며 설립되었다.

    잉글랜드의 경우, 피셔 대주교는 케임브리지 설교(1946)에서 비국교회들(Free Churches)[프로테스탄트 비국교회들]이 치리제도로 주교제를 받아들일 것을 제시하였으며, 감리교회들은 이에 호의적으로 응답하였다. 그러나 감리교-성공회 사이의 통합은 성공회내에서 충분한 지지를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1969년과 1972년에 실패하였다. 연합 개혁주의교회(United Reformed Church)를 포함한 새로운 시도인 ‘Covenating for Unity’(통합을 위한 성약)은 1982년에 같은 이유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비공식적인 대화는 계속되었으며, 지역단위로 실행되는 지역교회 일치활동들(local ecumenical projects, LEP)은 활발하게 진전되었다.

    이러한 국가단위의 기획들이 실패한 이유들중 하나는 제2차 바티칸회의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의 변화된 입장에 따라,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성공회의] 지나친 양보들로 인하여 로마와의 화해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헬리팩스 경과 프랑스 사제인 페르디난트 포르탈(Abbé F. Portal) 사이의 우정은 새로운 시도로 발전하였지만, 1986년 성공회 성직에 대한 교황의 정죄로 중단되었다. 또다시 핼리팩스 경이 주도한 1920년대의 말린대화(Malines Conversations)는 무위로 끝났지만, 랑베르 보뒤앵(Lambert Beauduin)이 제안한 초교파적인 이상인,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통합하는’ 교회는 중요한 인식으로 남았다. 그러나 1966년 마이클 램지 대주교는 교황 바울로 6세를 방문하여 함께 공동선언(Common Declaration)을 발표하였으며, 1970년에 성공회-로마 가톨릭교회 국제위원회(Anglican-Roman Catholic International Commission, ARCIC I)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는 1982년에 <최종보고서>(Final Report)를 출판하였다. 이 문서는 1988년 람베스회의에서 적극적으로 채택되었으나, 1991년에 출판된 바티칸의 공식적인 응답(Vatical Official Response)은 자세한 설명(clarifications)을 요구하였다. 1983년 이후부터 새로운 인물들로 교체된 위원회(ARCIC Ⅱ)가 개최되었으며, 성찬의 의미와 의인론에 관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불행하게도 바티칸 내부의 자세한 설명요구와 성공회신앙 내에서 여성의 사제서품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으며, 일부 분야들에서 열정을 약화시켰다.

    지방별 통합교회를 위한 계획들-예를들면, 잉글랜드, 나이제리아, 스리랑카, 뉴질랜드, 그리고 미국의 교회통합 협의회-은 열의를 다소 상실하였다. 그러나 세계성공회는 6가지의 국제적인 쌍방간 대화(양자대화)에 참여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과의 대화 이외에도 정교회(Orthodox), 동방정교회(Oriental Orthodox), 루터교회, 개혁주의교회 그리고 감리교회와 대화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성공회와 일부 루터교회는 1976년이후부터 잠정적인 성찬친교(eucharistic fellowship)를 채택하였으며, ‘완전한 교류’(full communion)를 위한 제안들을 평가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 영국성공회는 독일의 루터교회, 개혁주의교회와 연합교회(United Church)와 함께 마이센협약(Meissen Agreement, 1988)을 체결하였으며, 스코틀랜드 성공회는 1994/5년에 북해와 발트해 루터교회,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성공회, 그리고 웨일즈성공회 사이의 상호교류에 동의하였다.

    현재의 상황에서 에큐메니칼운동의 미래는 분명하지 않다. 성공회 교회들은 공식적으로 에큐메니칼 대화에 충실하고 있지만, 가시적인 통합의 성과는 40여년전의 기대보다 훨씬 성취하기 어렵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성공회신앙의 교리적인 분열들은 소위 ‘가교교회’(bridge church)로서의 유효성을 약화시켰으며, 이는 성공회가 주장하는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한 특별한 소명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11. 세계성공회의 최근의 발전

    1930년 람베스회의는 세계성공회 공동체(Anglican Communion)를 ‘연방정부가 없는 연방체’로 표현하였다. 많은 새로운 관구교회들이 형성됨에 따라 이 문제는 보다 분명해졌다. 따라서 지난 40년동안 세계성공회 내에서 교류와 협의를 강화하려는 노력들이 진행되었다.

    1958년 람베스회의의 권고에 따라 1960년 미국성공회 주교인 스티븐 베인(Stephen Bayne, 1908-74)을 세계성공회의 첫 의장(Executive Officer)로 임명함으로써, 이러한 방향으로 확실하게 전진하였다. 한편 범성공회 세계대회(Pan-Anglican Congress)는 1954년에 미니에폴리스에서, 1963년에는 토론토에서 개최되었다. 성공회센터(Anglican Center)는 1966년 로마에 설립되었다.

    1968년 람베스회의 이후 세계성공회 협의회(Anglican Consultative Council)이 설립되었으며, 의장(Exefutive Officer) 직은 협의회가 임명하는 사무총장(Secretary-General) 직으로 교체되었으며, 사무총장은 협의회에 대하여 책임을 맡았다. ACC는 법적, 헌장적 지위를 가진 유일한 국제적인 성공회 기구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왜냐하면 협의회는 다양한 관구교회들의 교회회의 기구들이 내린 결정들에 의해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협의회는 지금까지 세계성공회가 부족하였던 정책에 대한 협의와 안내의 연속성을 제공하고 있다. 각 관구교회들은 1-3명의 위원을 지명하며, 협의회의 전체 62명의 위원들은 성직자와 평신도를 포함한다. 남부와 북부 인도 그리고 파키스탄 연합교회는 3명의 위원을 지명한다. 협의회의 상설 사무국은 런던에 설립되었으며, 협의회의 총회는 매 2-3년 간격으로 세계의 각지를 돌며 개최되고 있다. 첫 총회는 1971년 케냐의 리무루에서 개최되었으며, 결의사항들중 하나는 세계성공회 신학위원회(Inter-Anglican Theological Commission)의 설립(1980)이었다.

    결속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1979년11월 이후 정기적으로 관구장회의를 개최하였다. 하지만, 이 회의는 결코 ‘최고위 교회회의’(higher Synod)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발전들은 당연히 켄터베리 대주교의 역할에 영향을 주었다. 대주교는 세계성공회 내에서 이전보다 더욱 중요하게 통일성의 중심이 되었으며, 각 관구로 자주 여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역할은 하나의 국가단위의 교회이자 국가의 법으로 규정된 교회(national and established church)의 관구장이라는 지위와 쉽게 조화되지 않는다.

    현대의 성공회신앙이 직면한 또 다른의 문제는 교리적 토대를 둘러싼 불확실성과 교리적인 차이들에 대한 수용한계들이다. 새로운 기도서들, 39개 신앙조항의 실질적인 ‘강등’ 그리고 신학적 자유주의는 성공회 교리의 고전적인 원천들에 대한 호소를 약화시켰다.

    이제 점점 많은 관구교회들에서 여성의 사제서품을 허용함으로써 또다른 어려움이 제기되었다. 여성의 사제서품은 1971년 홍콩에서 그리고 1977년 카나다에서 거행되었다. 미국성공회의 경우, 교회법에 따른 서품은 1977년에 실시되었다. 다른 관구교회들도 이들의 사례를 채택하였으며, 영국성공회는 1994년에 여성을 사제로 서품하였다. 이제 여성사제들은 미국(1989), 뉴질랜드(1990), 그리고 카나다 (1994)에서 주교로 축성되었다. 이러한 여성서품이 교회일치운동의 입장에서 신중한 행동인가 또는 신학적으로 수용가능한 것인가는 계속해서 논쟁되고 있다. 1978년 람베스회의는 성공회의 통일성의 보존을 확언하면서 다양한 행동들 (신앙활동practice)을 수용하는 것 이상으로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현대의 성공회신앙은 내적인 긴장들과 그리스도교내의 지위 때문에 성공회의 독특한 소명을 탐구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확실히 자치적인 교회들과 관구들의 공동체(communion) 내에 있는 복음주의자, 가톨릭주의자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는 친교(fellowship)는 통합을 추구하는 다른 전통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성공회의 은사[선물, gift]를 나누려면, ‘개혁된 가톨릭신앙’(Reformed Catholicism)과 분산된 권위(dispersed authority)에 대한 성공회의 독특한 이해를 새로이 평가할 필요가 있다(pp. 459-75). 바로 이런 과제에서 세계성공회는 풍부하고 독특한 역사적 체험에 의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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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6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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