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신학 및 역사 이야기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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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까지 연재하였던 잉글랜드 종교개혁 이야기는 다음 책의 제4장을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똑같은 책의 번역이지만 이번 주부터는 이 책의 제1장부터 차례로 연재하기 위하여 제목을 조금 바꾸었습니다.

    지금 번역하는 책은 Susan Doran과 Christopher Durston이 공저한
    PRINCES, PASTORS AND PEOPLE; THE CHURCH AND RELIGION IN ENGLAND, 1500-1700, 2nd. edition(London, 2003)입니다.

    최근까지 잉글랜드종교개혁에 대한 개론서는 여러 권이 있지만 그중에서 이 책이 자세하고 쉽게 주제별로 정리되어 있어 선택하였습니다. 1990년대 이후 종교개혁에 대한 연구서들은 급증하여 각 분야와 시기별로 많은 연구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Amazon.com에서 조회하시면 수많은 책들이 나타납니다. 영국의 사람들은 자지네 역사니까 ‘흥미진진하다’고 말합니다만 멀고먼 한국사람에게는 ‘매우 고달픈’ 이야기입니다. 이제 우리가 종교개혁을 공부한다면 아마도 잉글랜드만 공부하기도 벅찰거라고 생각됩니다.

    한 권의 책으로 모든 것들을 알 수는 없지만, 어느정도 개요를 알 수 있다면 이 책을 쓴 저자들이나 번역하고 함께 읽는 사람들에게는 더 큰 보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책을 읽는데 도움이 되는 책을 꼽는다면, 당연히 일반적인 종교개혁사와 각 지방별[나라별] 종교개혁사를, 영국의 경우는 영국사, 특히 튜더왕조와 스튜어트왕조시대 ( 1500-1700년)를 참고하면 됩니다. 최근에 패트릭 콜린슨이 짧게 쓴 종교개혁사가 번역되었습니다. 간단하게 읽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

    이 책의 전반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목차를 간단히 소개합니다.

    제1장 머리말
    제2장 신학과 전례
    제3장 성스런 공간들
    제4장 잉글랜드교회의 대외관계
    제5장 국교회 주류파들의 믿음과 신앙활동
    제6장 이단신앙과 비주류신앙[반대신앙]
    제7장 성직자들
    제8장 교회와 사회적 통제
    제9장 맺는말

    이 책의 제목처럼 종교개혁의 과정은 '국왕들'의 신앙적, 정치적 태도와, '성직자들'의 적극적인 개혁 또는 반대 또는 무관심, '민중들'의 적극적 지지 또는 반대 또는 타협적 수용등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으로, 종교개혁 구원론(하느님의 절대적인 구원권한 또는 이신칭의)으로 기존의 신앙생활을 전면적으로 재정립하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과정은 직선적으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고 수많은 위기와 타협으로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자들은 이 책의 시기를 1500년에서 1700년으로 길게 설정하여 각 장마다 다른 주제로 시대순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번역상의 문제점은 많이 있습니다. 먼저 번역자의 능력문제로 무작정 덤벼들었기 때문에 주신부님을 많이 괴롭히고 있습니다. 다음은 영국사에 나오는 용어들과 성공회적인 용어를 번역하는데 선례가 없어 또다시 주신부님과 의논하여 만들어 보았읍니다만 차차 교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문제가 있는 부분은 거침없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1 장 머 리 말(introduction)

    1500년부터 1700년까지 2세기동안에 잉글랜드교회(English Church)는 여러차례의 연속적인 극적인 변화들을 겪었다. 국제적인 로마중심의 가톨릭교회의 일원이었던 이 교회는 여러차례의 종교개혁들(a series of Reformations)을 통해서[거치며] 엘리자베스1세치하에서 독특하고 독립된 국가적[국가단위의] 프로테스탄트교회로 출현[탄생, 형성]하였다. 1559년이후 100여년동안 이 새로운 잉글랜드교회는 교회의 신학적 전례적 성격을 확정짓고, 전통을 확립하며, 그 범위를 결정짓는 어려운 과제들에 몰두하였다. 이 책의 각 장에서는 이 길고도 험난한 과정들을 자세히 설명하려고 한다. 먼저 이 장에서는 이 기간동안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들과 계기들을 개괄적으로 이야기하고 주요한 역사서술학적인 쟁점들 (historiographical debates)을 소개한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이란 대격변들은 최초에 헨리8세의 혼인문제에서 시작되었다. 1527년에 이르러 국왕은 사랑에 빠진 앤 볼린이라는 왕실의 여인과 결혼하기위하여 왕비인 케서린(아라곤출신)과의 혼인관계를 무효화하기를 원했다. 헨리에게 공식적인 혼인무효판결(annulment)이 필요했던 것은 앤의 완강한 요구때문만이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 차기 왕위계승에 대한 깊은 우려 때문이었다. 유일한 생존자녀는 메리뿐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사망이후 왕위계승논란을 겪을 수 있으며, 또한 그녀가 외국인과 혼인한다면 왕국의 독립적인 지위조차도 잃을 수 있을 것이었다. 헨리는1524년에 이미 왕비의 임신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였다. 2년뒤 앤과 사랑에 빠졌을 때에, 그는 이미 왕세자의 생산실패를 잘못된 혼인에 대한 징표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케서린은 헨리와의 혼인이전에 형 아서와 혼인하였기 때문에, 국왕은 그녀와의 혼인으로 성서의 레위기에 규정된 인척간의 혼인금지법 (laws of affinity)을 위반하였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527년 헨리와 그의 최고대신인 토마스 울지 추기경은 교황의 공식적인 혼인무효판결을 확보하기위하여 로마와 협상을 시작하였으나, 1529년에야 교황은 케서린과의 결별을 허용할 의사가 없다는 점이 분명하였다.

    울지는 협상의 실패로 인하여 국왕과 앤의 분노와 실망에 따른 최초의 희생자가 되었다. 추기경은 1529년10월 왕권보호법(praemunire) 위반죄-즉 교황의 전권특사(legate a latere)직을 수락함으로써 잉글랜드내에 불법적인 외국의 권위를 도입하였다- 로 기소되었다. 이 직후 개최된 의회에서 일부 의원들은 그의 실각을 이용하여 교회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하였다. 헨리는 이러한 행위에 반발하는 주교들을 지지하기보다는 오히려 의원들의 반성직자 선동을 후원하며 소규모의 교회개혁 법안들의 제정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그리고 향후 18개월동안에도 그는 교회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이나 로마와의 단교에 대한 분명한 계획을 갖고있지 않았다. 울지의 몰락직후 국왕의 조언자들은 혼인무효판결을 확보하는 여러가지 방책들을 건의하였으며, 국왕은 이의 실행을 지시하였다. 1532년에서야 국왕은 국왕수장권 정책에 몰두하였다. 즉 잉글랜드 왕권은 수세기동안 왕국내의 교회에 대한 제한없는 권위를 행사하여 왔으며, 이제야 이를 보다 정규적인 방식으로 실시할 필요가 있다.

    제프리 엘튼(Geoffrey Elton)은 이러한 혁명적인 새로운 전략을 최근에 추밀원 집행관리직(secretary)에 임명된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의 창작물이었다고 주장하였다(Elton, 1954). 그러나 보다 최근의 연구들에 의하면, 수장권을 옹호하는 급진적인 이론들은 크롬웰의 최고대신 등용 이전에 이미 왕실에 널리퍼져 있었다. 더구나 국왕은 수장권을 주장하는 여러계획들에 깊이 간여하였기 때문에 단순히 조언자들의 포로였다고 할 수 없다.그러나 크롬웰이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설계자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핵심인물들중 하나였다. 그는 로마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입법을 기획하고, 의회를 통해서 각 법률들을 제정하고, 이러한 변화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선전활동을 후원하며, 반대자들에 대한 탄압정책을 실행하였다.

    헨리의 단교정책의 주요동기가 새로운 혼인과 교회에 대한 지배력 강화였지만, 앤 볼린계의 일부인사들(크랜머등)과 크롬웰은 잉글랜드교회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이들은 대륙의 인문주의자(humanist)인 에라스무스의 교회개혁입장을 공감하며, 평신도들에게 영문번역 성서의 독서를 허용하고, 설교를 매우 강조하며, 미신적인 요소들을 제거한 보다 간단한 예배형태를 제정하려 하였다. 대체로 이들의 주도로 1530년대는 이러한 성격의 개혁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헨리는 이러한 개혁정책을 장려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지만, 국왕 수장권과 그의 보수적인 신학적 입장과 합치될때에만 이를 허용하였다. 개혁정책이 국내의 정치적 불안이나 대외적인 고립을 야기시켰을 때, 그는 더이상의 실험에서 후퇴하여 1539년 6개 신앙조항법을 제정하였다. 이는 개혁운동가들에게 커다란 타격이었다. 다음해 크롬웰의 실각으로 더 이상의 개혁정책은 헨리의 사망이후로 연기되었다.

    나이어린 에드워드6세의 왕위계승으로 그의 삼촌인 에드워드 시모어(서머싯공작) 주도의 개혁파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2년동안 서머싯 정부는 chantry의 해산, 영문기도서-기존의 미사를 대체하는-의 출판등 여러가지의 프로테스탄트 개혁정책을 단행하였다. 1549년 서머싯을 몰아내고 정부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된 존 더들리(워리크백작, 곧 노섬버랜드공작이 됨)는 보다 급진적인 방향으로 개혁을 실시하였다. 1550년 새로운 성직서품예식을 발표하고 2년뒤 제2차 공동기도서를 공표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정권은 에드워드의 건강악화와 차기계승자인 메리의 확고한 가톨릭신앙 때문에 매우 불안정하였다. 이 때문에 에드워드는 1553년 사망전 수주동안 노섬버랜드와 공모하여 누이들[메리와 엘리자베스]을 왕위계승서열에서 제외시키고 공작의 프로테스탄트 며느리인 제인 그레이부인을 왕위계승자로 지명하였다. 제인의 세습적 계승권 주장은 설득력이 약했지만, 초기에 여러지방에서 여왕으로 선포되었다. 한편 메리는 효과적인 쿠데타를 조직하여 수일만에 권력을 장악하였다. 메리는 왕위에 오른 직후 잉글랜드를 교황의 관할권으로 복귀시키며, 가톨릭예식들을 복원시키고 과거의 이단처벌법들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5년뒤 왕위를 계승할 자녀없이 사망함으로써 그녀의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은 단명하고 말았다. 1558년11월 그녀의 프로테스탄트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몇달안에 공동기도서를 포함한 새로운 신앙정책을 공표하였다.

    그러므로 어느면에서 잉글랜드 종교개혁은 분명하게 ‘국가의 정책’(act of state) 또는 보다 정확한 표현으로‘국가의 정책들’(acts of state)-국왕들이 주도하는 신앙변화 정책들을 왕국민에게 부과하는 행위-이었다. 그러나 또다른 편으로는 대다수 왕국민들의 개심(conversion)을 요구하는 복음중심의 종교개혁 (복음화 개혁운동evangelical Reformation)이었다. 16세기동안에 잉글랜드 왕국민들은 가톨릭신자에서 프로테스탄트신자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과정이 얼마나 신속하게(quickly) 그리고 어느정도 자발적으로 성취되었는가의 문제는 오랫동안 학자들사이의 논쟁대상이었다. 1960년대중반 제프리 디킨스(Geoffrey Dickens)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신속하게 그리고 어려움없이 성취되었으며, 그 이유로 새로운 신앙이 이미 정체되고 부패한 형식주의적인 가톨릭교회를 떠난 상당수 평신도들에게 커다란 호소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이러한 변화를 예비했다-그중에서도 왕국교회의 악화된상태, 뿌리깊게 퍼진 반성직자주의, 토착이단인 롤라드들의 활동-고 주장하였다. 즉 국왕은 교황과의 대결때에 이미 존재하는 반성직자주의를 이용하여 교회를 굴복시킬 수 있었으며, 공식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했을 때 이미 대다수 왕국민들은 국왕을 지지하였다. 헨리의 신앙정책에 대한 반대는 1536년 <은총의 순례> 반란에 가담한 일부 북부지방민들과, 소수의 순교자들로 무시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에드워드 치하에서 프로테스탄트 신앙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진전되었으며, 메리의 반종교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Dickens, 1964).

    디킨스의 해석은 거의 20년동안 정설로 유지되었으나, 1980년대에 들어 잭 스캐리스브릭과 크리스토퍼 헤이는 이러한 해석에 도전, 수정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중세말의 왕국교회가 치명적인 쇠퇴상태에 있었다는 점과, 종교개혁직전 반성직자주의와 이단이 만연하였다는 점을 부인하며, 오히려 왕국교회는 매우 잘 기능하고 있었으며, 상당수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의 사목활동과 정통교리를 만족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Scarisbrick, 1984; Haigh, 1987). 1990년대동안에 이들의 주장들은 다른 ‘수정주의학자들’(revisionists), 그중에서도 특히 이먼 더피의 지지를 받으며 확대되었다(Duffy, 1992). 이 수정주의자 입장(시각)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트신앙은 정부주도로 왕국민들에게 강요되었으며, 이들의 수동적이고 때로는 공개적인 저항을 극복해야했다. 따라서 잉글랜드 종교개혁(또는 헤이의 주장처럼 과정으로서의 종교개혁들)은 중앙정부내에서 그리고 전도구들내에서 느리고도 험난한 권력투쟁이었다.

    또한 수정주의 학자들 덕분에 이제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역사는 더이상 1559년에서 종결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엘리자베스 치하는 왕국민들을 프로테스탄트 신앙으로 개심시키는 본격적인 복음화 정책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게 인식된다. 엘리자베스치하의 주교들과 평신도 대신들은 설교와 교육과 직접적 돌봄(pastoral care)을 실천할 수 있는 프로테스탄트 사목자들을 육성하는데 몰두하였다. 일부 수정주의자들은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평신도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까지도 의심하였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대다수 왕국민들은 가톨릭신앙에 대한 정부의 공격에 몹시 분노하였으며, 설교와 성서독서를 신앙심의 최고표현으로 강조하는 새로운 교회의 엄격한 신학과 전례를 공감하지 않았다. 헤이는 엘리자베스치하 말기까지도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수용한 평신도들은 몇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개혁적 성직자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프로테스탄트국가는 되었을망정 ‘프로테스탄트들의 국가’는 아니었다 (Haigh, 1993). 이와는 달리 더피는 1580년대에 이르러 개혁가들의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고 인정하였다(Duffy, 1992).

    1603년 왕위를 계승한 제임스1세는 커다란 변화정책을 도입하지않고 전임 여왕의 교회정책을 강화하였다. 새로운 스튜어트국왕은 신학에 조예가 깊은 확고한 칼빈주의자로 분별있고 균형적인 신앙정책을 추구하였다. 특히 그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국교거부자들에 대하여 보다 유화적인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사망때까지 안정되고 평온한 교회분위기를 유지하였다. 한편 1625년에 계승한 찰스1세는 부왕의 연속성 유지정책과는 달리 잉글랜드교회의 본질에 중대한 변화를 촉발시켰다. 그는 부왕처럼 왕국교회를 중시하는 신실한 신앙인으로 최고통치자 (supreme governor)의 권한을 확고히 행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부왕과는 달리 신앙의 문제들에 대한 타협을 거부하며, 교회내의 각 성직자 세력들에게 권한과 추천권을 분배할 생각이 없었다. 이보다 더 치명적으로 그는 부왕의 칼빈주의를 공유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대다수 신하들이 강력히 반대하는 ‘로드파’또는 ‘반칼빈주의자’ 들의 신앙개혁 프로그램[정책]에 깊이 개입하였다.

    로드파를 승진시키려는 찰스의 노력은 계승초기부터 시작되었다. 윌리엄 로드 1625년부터 급상승하여 1633년 켄터베리 대주교에 임명되었다. 다른 로드파 성직자들 또한 국왕 측근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곧이어 칼빈주의자 신학의 확산을 금지시키는 명령들을 발표하였다. 1630년대동안에 로드파는 왕국교회의 통제권을 확고히 장악하였다. 30년대 중반까지 이들은 교회의 주교직에서 확고한 다수파가 되었으며, 로드와 닐(요크대주교)은 추밀원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새로운 성직자 지도부에 대한 비판을 철저히 억압하였으며, 왕국교회내의 많은 칼빈주의자들을 반체제적인 퓨리탄으로 규정하였다. 더구나 로드가 교회의 매각재산들을 회수하려는 의도를 밝혔을 때, 평신도들까지도 이들을 경계하였다.

    학자들은 잉글랜드 내전(Civil War)의 원인들에 대하여 오랫동안 논쟁하였지만, 로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도입한 신앙변화정책이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부인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1630년대동안에 정부의 신앙정책과 의도에 대한 의심과 공포심은 꾸준히 확산되었다. 1637년 찰스와 로드는 자신들의 신학과 전례를 전투적인 칼빈주의자들인 스코틀랜드에 강요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스코틀랜드 왕국민들은 이에 분노하여 무력저항을 시작하였다. 주교전쟁(Bishop’s War)의 실패로 찰스는 1640년 잉글랜드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으며, 의원들은 이제 로드파주의(Laudianism)에 대한 반격을 시작하였다. 장기의회 의원들과 국왕과의 타협노력은 상호불신과, 국교회에 대한 양립할 수 없는 인식차이로 결렬되자 이들은 각각 무력에 의존하였다. 이러한 시나리오로 볼때 잉글랜드 내전은 신앙전쟁(a war of religion)이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을 반박하기 어렵다.

    1643년 장기의회-이때 대다수 의원들은 장로제 지지자들이었다-는 국가교회의 새로운 전례서 제정을 웨스트민스터 성직자총회(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 에 일임하였다. 1645년 장기간의 토론끝에 공공예배지침서(Directory for Public Worship)를 발표하여 공식적으로 엘리자베스의 기도서를 대체하였다. 같은 해 로드는 반역죄로 처형되었으며, 다음해 10월 주교제 또한 폐지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장로제 국가교회는 국민들의 지지를 확보하는데 실패하였다. 잉글랜드 전지방에서 전도구 성직자들은 새로운 지침서를 무시하고 기존의 기도서에 따라 예배를 집례하였다. 1649년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는 신형군(New Model Army)이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후, 장기의회을 숙청하고 1649년 찰스왕을 반역죄로 처형하였다. 이때부터 장로제주의는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여러 교파들중 하나가 되었다.

    공위시대동안에 잉글랜드에서는 상당한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삼위일체 신앙을 믿는 프로테스탄트들은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한 신앙의 자유를 모두 허용받았다. 1650년 의회는 Act of the Relief of Peaceable People을 제정하여 전도구교회의 주일예배 출석의무를 해제하였다. 대다수는 이전처럼 전도구교회에 출석하였지만, 상당수 소수파들은 이제 독립교회파(Independents), 침례파 (Baptists)와 퀘이커들로 자신들만의 예배모임을 유지하였다. 반면에 Congregationalist 들은 자신들만의 예배모임과 전도구교회에 모두 참여하였다. 신앙의 자유는 공식적으로 가톨릭신자들과 기존의 주교제 신자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았지만, 실제로 조심만 한다면 이들 또한 방해없이 예배집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처럼 전례없는 신앙의 자유는 왕정복고시대까지 지속되지 못하였다. 1660년 찰스2세의 복원으로 의무적인 국가교회는 복귀하였으며, 반대자들에 대한 처벌 또한 재개되었다. 찰스2세는 1650년대의 다양한 신앙집단들을 포용하는 폭넓은 포괄적인 왕국교회를 추진하려 했지만, 많은 지도층 성직자들과 정치인들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영향력으로 왕당파의회(Cavalier p.)에서 복원된 기존의 왕국교회(주교제교회Anglican Church)는 그 범위로는 매우 좁게, 그 본질적으로는 보수적으로 심지어 로드파에 가까웠다. 1670년에 이르러 소위 클러랜던 법률들은 모든 대안적인 신앙집단들을 효과적으로 불법화하였다. 하지만 상당수의 장로제파, 침례파와 퀘이커들은 국교회를 거부하고 이들만의 비밀집회를 유지하였다. 1670년대와 80년대동안에 수백병의 국교거부 프로테스탄트들은 불법적인 신앙집회의 참여로 투옥되었지만, 처벌만으로 이들을 근절시킬 수가 없었다. 제임스2세의 폐위이후 1689년 이들의 신앙자유를 인정하는 신앙자유법 (Act of Toleration)이 제정되었다. 18세기와 그 이후 동안에 주교제 국교회는 독점적인 국가교회의 지위를 유지하였지만, 더이상 국민적 교회는 아니었다.

    참고문헌과 추천도서
    Dickens, A. G., The English Reformation (1964).
    Duffy, Eamon, The Stripping of the Altars (1992).
    Elton, Geoffrey, ‘King or Minister? The man Behind the Henrician Reformation’, History, 39 (1954).
    Haigh, Christopher, The English Reformation Revised (Cambridge, 1987).
    __________________, English Reformations: Religion, Politics and Society under the Tudors (Oxford, 1993).
    Scarisbrick, J.J., The Reformation and the English People(Oxford, 1984).

    2008년 3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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