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번역 프로젝트 자료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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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론

    Philip H. E. Thomas

    윌리엄 리드 헌팅턴은 성공회의 역사에서 각주를 통해서 알려졌다. 영향력있는 뉴욕교회의 관할사제였던 그는 1870년 <The Church Idea>(교회의 이상, 교회론)에서 나중에 사카고-람베스 4개조항으로 알려진 그리스도교 통합(unity 통일)을 위한 원칙들(formula)을 최초로 제안하였다. 그의 제안-성서, 신경들, 성찬례와 세례의 두가지 성사, 그리고 사목직의 주교제는 [교파]교회들 사이의 실질적인 통합을 위한 근거[토대]를 제공하여야 한다-은 거의 한세기 동안 교회일치를 위한 성공회의 노력에 토대로 작용하였다.

    그러나,헌팅턴의 업적은 우연한 각주가 제시하는 것 이상으로 성공회 교회론의 중심주제에 훨씬 더 근접하였다. [교파]통합에 대한 그의 관심은 교파적인 표준들을 방어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공회 특히 북아메리카의 성공회의 역할이란 무엇인가라는[역할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하였다. 그는 단순히 과거의 성공회신앙(Anglicanism)에 호소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즉, ‘성공회신앙이라는 말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펄럭이는 중백의들, 시골교회의 첨탑들과 대성당의 웅장한 탑들, 격식과 위엄을 갖춘 대성당의 수석사제와 보조사제들과 성가대들 등등을 연상시킨다’(p. 124). <The Church Idea>는 성육신을 심각하게 고려하며, [성육신을] 변화하는 사회에 있는 교회의 관점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미국에 사는 성공회 신자로서 우리의 완전한 열망이 계속해서 작지만 매우 존경받는 그리스도교 단체로 남아서, 어느 곳에서나 쉽게 부딪히는 불경한 언행들로 충격을 받는 순수하고 섬세한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가 사회의 주도세력이 되지 못하고 단지 억제력만 되려 한다면, 우리는 공교회성(Catholicity)에 대한 우리의 모든 주장들을 간단히 그리고 솔직하게 포기하여야 한다. 그러한 경우, 우리는 우리의 자존심을 붙들고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는 산골로 조용히 들어가야 한다. 그러한 경우 우리는 명목상으로는 교회이지만, 사실상 종파(sect)가 될 것이다.’

    트륄치(Troeltsch)의 유명한 교회-종파 유형론이 나오기 50년전에 제기된 이 고발의 본질은 보다 깊은 관심을 요구한다. 그러나 헌팅턴은 비판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그는 설교조로 계속해서 말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보다 더 귀중한 것을 목표한다면,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교파]교회를 진실로 국민교회(national church)로 만들려 한다면, 다른 말로 표현해서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 위대한 국민들의 두근거리고, 슬퍼하고, 죄를 짓고, 참회하고, 열망하는 마음에 가장 가까이 공감하도록 하려면, 우리는 (가장 좋은 재산을 물려받은 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거만한 정신이 아니라, 오히려 애정어린 성실함과 지성적인 열정으로 분열된 [하느님의] 가족들의 화해자가 되려는 우리의 합당한 주장들을 강조하여야 한다(p. 159).’

    바로 이러한 주장을 추구하기 위하여 헌팅턴은 자신의 4개항을 제시하였으며, 그럼으로써 그는 성공회 교회론을 추구하는 방식에 대한 교훈적인 사례를 제공하였다.

    교회론에 대한 성공회의 사상[견해]을 말하는 일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모든 성공회 신자들에게 수용가능하였던 교회론을 ‘판독하기’ 매우 어렵게 만들었던 유명한 내부적인 차이들을 무시한다 하더하도, [이들중] 어느 한 집단[당파]도 그들의 입장에서 어떤 특정한 성공회의 교의(dogma)-교회론이나 그 밖의 다른 문제들에 관한 것도-를 인정하기를 회피한다. 즉, 성공회신자들은 그리스도교회의 신앙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말을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이 유지될 수 있는가는 이 글에서 탐구해야 하는 질문들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지적해야 하는 한가지는 성공회신앙은 처음부터 교회론에 관한 치열한 논쟁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앞으로 설명할 내용중 일부는, 성공회 교회론이 교회의 구조(정체, 조직constitution)에 대한 공감[공통된 견해]을 제시할 수 없지만, 성공회 교회들이 자신들의 역사에 몰두하고, 그 속에서 그들에게 제기되었던 신학적인 문제들에 몰두하였던 방식에 의해서 성공회신앙의 진실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헌팅턴이 당시의 미국성공회가 직면하였던 상황을 이야기하며, 그리스도교의 통합과 선교에 대한 요청들에 응답[대처]하는 자료들을 성공회의 유산[전통]들로부터 찾아내려고 노력하였을 때, 그는 역사적으로 영국성공회의 특징이자, 그 이후로 세계성공회 교회들에 의해서 수행되었던 것[중요한 방식]을 실행하고 있었다. 아래의 글에서 필자는 교회에 대한 성공회의 이해를 구체화시킨 논쟁들중 일부를 제시라고, 이와동시에 대다수 성공회신자들이 교회론의 부재가 치명적인 결점이 아니라 오히려 독특한 신학적인, 교회일치적인 기회라고 믿는 이유를 입증하려고 한다.

    1. 잉글랜드의 교회가 물려받은 교회론

    잉글랜드교회의 공식적인 발표문들(문서들formularies)-39개 신앙조항, 공동기도서와 서품예식서, 그리고 [1604년] 교회법률집(Canons Ecclesiastical)-은 ‘신앙고백문서’ (confessional)가 아니다. 즉, 용어 그대로 이 발표문들은 말 그대로 성공회의 모든 교리들의 토대가 되는 근본적인 교의들 또는 이념적인 표준을 제공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들이 나타내는 바는 변화과정의 결정적인 시기에 잉글랜드 그리스도교의 방향전환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믿음들이다. 잉글랜드에서 16세기의 개혁들은 헨리8세의 혼인문제나 엘리자베스의 평화추구에 의해서 발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신학적인 확신[사상]들이 교회와 국가가 제시하는 새로운 방향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튜더왕조의 대다수 성직자들을 설득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가 가능하였다. 이러한 확신은 세가지였다. 첫째로, 잉글랜드교회는 켄터베리의 어거스틴 이후로 연속적인 역사를 갖고 있다는 믿음이었다. 둘째로 교회의 생활은 성서의 가르침에 일치되게 갱신[쇄신]되어야 하며, 또한 이는 신앙과 물려받은 신앙과 역사의 연속성을 파괴하지 않고 수행되어야 한다는 확신이었다. 세째로, 폐습(abuses)은 교정되어야 하지만, 가치있는 것들은 보존해야 하며 따라서 성서에 의해서 분명하게 금지되지 않은 의례들(예식들ceremonies)과 사상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영속적인 평가에 맡겨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1548년부터 1662년 사이에 제정된 공식발표문들(formularies)의 다양한 출처와 결과적으로 이 문서들에 반영된 갈등[긴장]들에 대해서는 이 책의 다른 글들에서 충분히 소개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교회가 스스로 종교개혁교회(Reformed)이면서도 여전히 보편적인 그리스도교회(universal Church)의 일원으로 인식하였던 방법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분명하였다]. 이것은 공동기도서의 제목을 ‘잉글랜드 왕국교회의 사용례에 따른 그리스도교회의 예식들과 의식들’이라고 명칭한 사례에서도 입증된다. 기도서의 집필자들은 주로 역사적 그리스도교회로부터 전례자료들을 수집하고 배열하여, 잉글랜드인들이 그들의 언어로 사용하도록 의도하였다. 영어전례는, 교회사 각 시기들에서 차용하였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그리스도교회는 하나이며, 잉글랜드교회는 그 교회의 한 부분이라는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예배자들은 중보기도[성찬례의 신자들의 기도-역자]의 중심부에서 하느님에게 ‘전 그리스도교회(Universal Church)에 진리와 일치와 화목의 정신(spirit)을 지속적으로 불어넣어 주시기를’ 간청하며, ‘당신의 이름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거룩하신 말씀의 진리에 동의하며 일치(unity)와 신실한 사랑 안에서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세례예식에서 사제는 세례후보자들을 ‘그리스도의 양떼들의 모임’ 안으로 받아들이며, 그들이 성사적으로 거듭났으며[재생받았으며]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고 선언하며, 그들이 ‘똑같이 살아있는 신자들’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서품예식에서 주교는 후보자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사제의 직분과 임무를 위하여 성령을 받으라’고 말한다. 잉글랜드교회에 속한 것은 곧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으며, 바로 이것이 성공회의 전례와 신자됨과 사목직에 적법성(정당성legitimacy)을 주는 것이었다.

    이와동시에 16세기의 잉글랜드교회는 또한 종교개혁교회(Reformed)로 표현되었다. 즉, [보편적 교회와의] 연속성을 강조하면서도, 마찬가지로 교회의 생활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갖는 절대권(제정권 설정권constitutive power)을 똑같이 강조하였다. 서품공식문(ordination formula)에서 주교는 새로운 사제에게 성서를 수여하며(성사용품을 수여하던 기존의 예식을 상징적으로 변경시켰다), 교회가 ‘그들이 당신[하느님]의 가장 거룩한 말씀이나 이에 합당한 것을 전하는 것을 듣고 수용할 수 있는 은총을 받도록’ 기도하였다. 전 그리스도교회의 온전한 상태를 위한 중보기도[성찬례의 신자들의 기도-역자]의 한 부분에서 각 교회들은 하느님의 모든 백성들과 ‘특별히 이 곳에 모인 신자들’을 위하여 ‘온순한 마음과 온당한 경의로 당신의 거룩한 말씀을 듣고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였다. 따라서 서방교회(초기교회Catholic) 전통은 성서의 독서를 통해서 심사받고 입증되었다.

    성공회의 가르침에 대한 이와 똑같은 두가지[Reformed과 Catholic-역자] 확신은 39개 신앙조항에서도 입증되었다. 신앙조항1-8항은 잉글랜드교회가 신경과 성서에 의한[로 표현된] 교회론들을 보존한다고 강조하며, 이와동시에 성서의 정경들[정경성서들]의 신학적인 한계를 분명하게 정의함으로써 종교개혁가들의 해석학적인 관심사들을 승인하였다. 이 조항들의 초반 단락들의 중심부에서 성서의 충분하지만 절대적이 아닌 권위에 대한 잉글랜드교회의 전형적인 주장(6항)은 모든 다른 믿음들의 토대를 제공한다. 신경들 조차도 정확하게는 ‘성서의 가장 확실한 보증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에 수용되었다(8항). 그리고 모두 18개의 조항들은 성서를 그들의 권위의 원천으로 암시 또는 언급하였다. 16과 17세기의 잉글랜드교회는 단순히 내적인 쇄신과정을 겪은 잉글랜드교회였다는 확신이 확고하게 정착되었기 때문에, 1604년의 교회법률집은 잉글랜드교회가 ‘진정하고 사도적인 교회’(true and apostolical church)라는 것을 부인하거나, 이 교회의 예배형식이 ‘성서에 어긋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제시하는 자들을 파문한다고 협박하였다. 이러한 호교론은 주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비판자들과, 또 한편으로 종교개혁의 급진파들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그 뒤에 숨어있는 단호한 주장은 마찬가지로 분명하다. 즉, 잉글랜드교회는 종교개혁교회이지만 여전히 보편적(Catholic) 교회이다.

    교회에 대한 어떠한 이해가 이러한 주장을 가능하게 하였는가? 그 대답은 34항에서 원칙적으로 명확하게 설명되었다. 즉, 교회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 역사와 문화의 산물이다.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에서 교회의 생활은 서로 다른 전통과 의식으로 포장[표현]될 것이다. ‘개별적인 국가단위의 교회들’(particular and national Churches)은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고 그들의 지역환경이라는 상황안에서 그들의 자치적인 존재(corporate existence)를 형성할 책임을 갖는다. 보편적인 그리스도교회(universal Church)는 특정한[개별적인] 정체성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잉글랜드에서 이러한 개혁된 보편적신앙(Reformed Catholicism)을 확립하게 만든 윈리가 국가단위의 교회(national Church)라는 개념이라면, 그 방법(procedure 절차)은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교회생활의 요소들중 일부는 ‘그 자체로 사소한 문제’이며 따라서 확신보다는 편의[유용성]의 문제들로 조정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였다. 아디아포라(adiaphora) 또는 ‘사소한 문제들’[비본질적 요소들]이라는 사상은 대륙에서 멜랑히톤에 의해서 제시되었으며 또한 칼빈도 한동안 사용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1549년 공동기도서의 부록에서 독특하게 설명되었으며, 1662년 기도서에서 서문의 일부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르면, 폐습과 불필요한 점들을 폐지되었지만, 잉글랜드교회의 전례에서 ‘주요 부분과 근본적인 요소들은 [...] 여전히 똑같이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변화는 그자체로 목적으로 이해되지 않았으며, 초기교회성(antiquity)과 유익한 질서(good order)에 대한 존중심은 친숙한 것들을 계속 사용될 수 있음을 의미하였다. 완전을 추구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잉글랜드교회의 예배와 의식에 대한 주장은 단순히 이것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또는 건전한 교리에 위배되는 것들, 또는 신실한 자들이 양심상 사용하고 복종할 수 없는 것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기도서에 대한 논증은 마찬가지로 잉글랜드교회의 구조들과 성직들-세가지 사목직, 주교에 의한 서품, 예배에서의 전례복과 의례, 기존의 대성당과 대학교들 그리고 대성당 주임사제(dean)와 사제단(chapter)와 총사제(archdeacon)라는 행정적인 계서조직의 보존, 그리고 아마도 기존의 사목적인 전도구 교회조직의 보존-에 적용될 수 있었다.

    일부 비평가들은 오늘날의 시점에서[되돌아보면] 당시 잉글랜드교회의 태동기부터 독특한 국가적인 자의식을 읽을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교회의 공식발표문들에서 발견되는 사고는 국수[국가]주의적이라고(nationalistic) 말할 수 없다. 잉글랜드의 개혁가들은 확실히 국왕의 후원을 받으며 행동하였지만, 그들 대다수는 단순히 기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16세기에는 독립적인 교회론을 도입하지 않았지만, 교회는 신앙의 논쟁들을 판단하는 책임에서‘거룩한 말씀의 증인이며 보존자’(20항의 설명대로)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19항은 이러한 변화를 이렇게 요약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특징짓는 것은 말씀과 성사에 대한 응답이지, 교회의 외적인 조직이나 의무를 나타내는 형식이 아니다. 역사적 환경에 의해서 잉글랜드교회는 어느 한 시기에 로마교회로부터 또는 다른 시기에는 종교개혁의 급진파로부터 독립하도록 요구받았을 때, 잉글랜드교회는 보편적인 그리스도교회의 역사에 참여한다는 인식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이와 동시에 대륙의 종교개혁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지지를 거부하지 않았다. 잉글랜드교회는 성서 또는 전통의 권위에 대한 헌신[지지]을 밝히고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들에서 다르다는 점을 선택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잉글랜드교회의 신학의 역사를 주로 구성하는 것은 이러한 해석들의 범위에 대한 토론[논쟁]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토론을 가능하게 만든 핵심교리는 [잉글랜드]교회가 믿음과 의무에서 보편적 [교회]이지만, 또한 특정한 소명과 사명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2. 잉글랜드교회[성공회]에서 해석된 교회론들

    대다수 종교개혁 교회들은 전통적인(Catholic) 교리의 표준들이 지속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또한 하나 이상의 교회들이 교회생활의 여러 측면들이 사소한[비본질적인] 문제들로 허용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인정하였다. 잉글랜드 개혁가들이 새로이 시도[개척]한 것은[다른 종교개혁교회들과 다른 점들은] 바로 교회의 전통적인 구조들의 많은 부분들을 그대로 보존하였다는 점, 그리고 특정한 교리적인 문제들을 아디아포라[사소한 것 비본질적인 것]에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성서는 특히 교회론의 문제들에 대하여 교리적으로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철저한 성서적 적용[성서를 철저한 적용하는 것]은 오히려 교리적인 공식입장들(formulae)에 성서자체의 한계를 강요한다. 따라서 성서적 권위에 대한 잉글랜드교회의 이해는 일부 교리들의 토론[논쟁]을 허용하는 것이 당연하며, 따라서 신학적 토론을 허용한 일부 분야들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다양한 해석]을 허용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문제는 성서적 권위의 한계가 어디까지며, 또한 ‘사소한 문제’(비본질적인 문제indifferent)의 범위였다.

    바로 이러한 논쟁 때문에 리처드 후커는 <잉글랜드교회의 치리제도의 원리들에 관하여>(The Laws of Ecclesiastical Polity)(1593-7)를 집필하였다. 교회조직을 정확하게 신약성서의 모델대로 채택하여야 한다는 퓨리탄들의 이상에 반대하여, 후커는 교회는 고정된[변화하지 않는] 기관이 아닌 유기체적인 기관이며, 하느님의 법[원리]도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치리와 행정의 방법들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후커는 성서가 침묵하거나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온건한 판단력을 가진 자들이 정당하다거나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4가지 전제(명제 proposition)로부터 안내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4가지 전제는 다음과 같다. 신심[신앙심]을 효과적으로 증진시키는 것들, 초기교회 (고대시대antiquity)의 승인을 받은 것들, 또는 그리스도 교회의 치리제도로부터 지지를 받은 것들은 허용된 것으로 입증되어야 한다. 그리고 거꾸로 말하면, 성서에서 분명하게 명령하지 않은 제도[조직]이나 법령은, 매우 유용하거나 유익하다 하더라도, 교회에 대한 필수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초기 개혁가들의 성서적 급진주의는 대륙의 개혁가들보다 후커와 그의 동시대 후배인 리처드 필드(Richard Field)에 의해서 대륙의 개혁가들보다 분명히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왜냐하면 초기 개혁가들은 잉글랜드교회를 특정한 형태의 교의 또는 규정(discipline)으로 제한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또한 진리와 순수성(purity)의 종말론적이며 변증법적인 본질을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후커와 필드는 이 시기의 중심적인 질문인 ‘[구원의]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개혁가들과 일치하였다. 그러나 두번째 질문인 ‘진정한 교회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세속적[현실적]으로 대답하였다. 교회애 대한 확신은 퓨리탄의 성서적 이상주의에서도, 로마교회(Catholic)의 보수적 전통주의자들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복음은 자동안전장치와 같은 보증을 주지 않았다. 교회는 항상 은총을 받을 때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진리와 순수성은 가볍게 취급되지 않지만, 이것들의 완전한 성취는 여전히 기다려야 하며 그동안에는 오직 신앙으로만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교리에 대한 어떤 형태의 규정이나 보호수단[보증]도 이러한 인식을 대체[대신]할 수 없다.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후커의 접근방법은 교회론에도 그대로 적용하였다. 교회의 가시성(visibility)에 대한 질문이 바로 대표적인 사례이다. 개혁가들은 로마교회의 주장-교황권을 중심으로 하는 계서적인 구조에 참여한 자를 교회의 신자로 인정한다-을 반박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비가시적인 교회의 신자됨-이는 하느님에게만 알려져 있다-을 강조하였다. 잉글랜드교회 신학자들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 또는 선택받은 자들(the elect)의 비가시적인 집단으로 이해하는 개념을 수용하였지만, 현세적 형태의 교회의 실재를 희생시키지 않았다. 그들의 언어는 때때로 모호하였지만, 그들은 가시적/비가시적 이분법을 교회에서 진리와 거짓이라는 개념[이해]과 일치시키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교회는 항상 혼합된 신자들로 구성되었으며, 교회생활의 타당성은 하느님의 법에 대한 값비싼 복종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다고 후커는 주장하였다. 후커와 필드는 교회의 신적인 기원(divine origins)을 무시하지 않았지만(교회의 신적인 기원은 존 피어슨의 유명한 저서인 <Exposition of the Creed>, 1659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정치적 통일체[국가] 안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실재와 그들의 역할에 집중하였다. 필드는 그의 저서 <Of the Church>(1606-10)에서 로마교회(Catholic) 호교론자인 [로버트] 벨라민(벨라르미노Bellamine)을 반박하며, 잉글랜드 신자들은 가시적인 교회가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한 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이를 입증하려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대답하였다.

    후커와 필드는 교회의 핵심적인 실재에 집중하고 주변적인 문제들을 다루지 않음으로써, 다른 2세대 개혁가들보다 더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며 초교파적인 신학적 입장을 제시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하느님의 자비(graciousness)에 대한 이해[확실한 인식]를 보다 분명하게 파악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교리는 성공회전통의 옹호자들에게 하찮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교리적인 정확성[정확한 교리] 그 자체가 신앙이나 희망, 또는 사랑의 완전성을 결코 보장할 수 없다고 평가하였다. 긍적적으로 평가한다면, 성공회전통의 교리적인 개방성은 하느님의 신비가 어느 한 공식문서(formula, 신앙조항)으로, 또는 어느 한 성서적 원리로 제한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즉, 잉글랜드교회의 고전적인 형성기간[16세기]에는 세례가 어떻게 신앙과 관련되는지, 또는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현존을 전달하는지, 또는 역사적 주교직이 어떻게 사도적인 사목직을 중개하는지를 결코 설명하지 않았다. 성서와 역사는 이러한 질문들을 성공회의 자의식 안에 계속 살아있게 만들었으며, 계속되는 토론[논쟁]의 전통이 이 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하였다. 이상적으로 말한다면, 교회에 대한 성공회의 이해는 교회를 묘사하는 성서의 모델들과 은유들을 온전하게 보존하며, 일상생활의 역사적 체험에서 이 표현들의 중요성을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은총은 쉽게 수락되지 않으며, 교회는 지속적인 신학적 해명에 대한 요구들을 항상 환영하지는 않는다. 성공회전통은 그들의 내적인 긴장관계들의 영향들을 직시하는 것을 회피할 수 있을 때에야 겨우 만족스러웠다[이해되었다]. 일반적으로 잉글랜드교회는 17세기와 18세기 사이에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고 말한다. 교회는 17세기에 퓨리탄사상의 편협성 때문에 이를 반대하였으며, 18세기에는 감리파(Methodism)의 열정주의 때문에 이들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퓨리탄들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편협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열정주의는 생각보다 복합적이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공회의 자의식의 변화이다. 먼저 공화정의 지나친 행동들과 망명가들의 고난들에 대한 반발로 주교제도는 이제 전과는 달리 성공회신자들에게 매우 표준적인 중요성으로 인식되었다. 즉, 잉글랜드교회는 곧 주교직과 동일시되었다. 더구나 서약거부자들(Nonjurors)의 파면[퇴출]은 참여한 사제들과 주교들의 숫자보다 더 중요한 영성적이자 신심적인 유산의 상실이었다. 이로써 국가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신학적인 강조점들을 통합시켰던 예배의 결속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또한 교회는 자기이익의 관리자[수호자]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잉글랜드교회는 이제 국가의 한 부서처럼 의심받았으며, 지적으로는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에, 사목적으로는 산업혁명의 영향들에, 또는 신학적으로는 복음주의 부흥운동(Evangelical Revival)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교리를 규정하려는 시도를 규제하는 잉글랜드교회[성공회]의 자세는 항상 포용성을 추구하려는 매우 원칙적인 노력의 결과였다는 주장은 무책임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교회사의 중요한 순간들에 교회내의 어느 한 집단도 잉글랜드교회 전체에 자신들의 이상을 강요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지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18세기 동안에 잉글랜드교회의 실패는 국가에 의해 지배된 방식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때문에 뉴먼(Newman)은 그의 시대까지 잉글랜드교회에 통일성과 단일체로 유지시킨 것은 오로지 국교제도(establishment) 때문이었다고 믿었다. 그는 이를 제거한다면 교회는 더이상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은 기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사실상의 국가교회주의(Erastianism)는 부분적으로 원인이자 결과로 교회의 기원과 운명에 대한 신학적인 인식을 상실케 하였다. 이러한 교회론-주교직의 권한들과 전례적인 단일[통일]성의 필수성-은 대체로 잉글랜드교회의 관할권을 부인하는 자들을 파문하고 공민권을 박탈하였다. 19세기에서야 나타난 쇄신운동(renewal)은 성공회 사상에서 교회론을 다시 주장함으로써 발생하였다.

    쇄신운동은 여러가지 방향들에서[원자료들로부터] 유래하였다.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성직자들은 효과적인 교회와 사회적 행동에 대한 수단으로 개인적인 개심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지만, 그들은 이를 공식적인 교회생활보다는 종종 교회간(inter-church) 또는 동호인끼리의 자발적인 모임을 통해서 표현하였다. 찰스 시므온(Charles Simeon)과 특히 그의 제자들과 같은 지도자들은 성서적 사목적 설교를 전도구교회의 사목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상대적으로 코울리지(Colerige)나 토머스 아놀드(Thomas Arnold)-그의 저서 <On the Constitution of Church and State>(1830) <Principles of Church Reform>(1833)들에서-가 주장하였던 전면적인 개혁에는 무관심하였다. 성공회내의 자유주의자(liberal) 또는 광교회파(Broad)의 핵심적인 주장은 이전 세대들의 광교회파(Latitudianrians) 또는 인문주의 전통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아놀드, R. D. 햄프던 또는 리처드 훼틀리와 같은 자들의 접근방식은 교회내의 작지만 영향있는 소수파들에게 호소하는 것이었다. 국가교회의 영향력이 점차적으로 약화되어가는 시기에 그들의 접근법은 잉글랜드에서 지적이고 공적인 생활의 중심에 더욱 가까이 가려는 진지한 시도였다. 가장 영속적인 변화들은 소책자운동가들 또는 옥스퍼드운동으로부터 나왔다. 이들은 자유주의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국가로부터 교회의 신앙적 자치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교회의 신적기원론(divine origin)을 과감하게 다시 주장하였다. 소책자운동가들은 그들이 믿었던 원시교회의 관례(practice)들을 복원시키고, 성공회 신앙과 성직의 근본적인 공교회성(Catholicity)을 주장함으로써 교회의 참된 성격을 입증하려고 노력하였다.

    개인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과 교의를 합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자들의 프로그램은 교회론의 문제들을 여전히 주변적인 문제로 취급하였지만, 고교회파 성직자들은 이를 바로 핵심에 위치시켰다. 1838년 W. 팔머(Palmer)는 그의 책 <Treatise on the Church of Christ>에서 소위 교회의 ‘가지이론’(branch theory)을 주장하였으며, 소책자운동가들은 이 이론을 열렬히 채택하였다. 이 이론에 따르면, Catholic 그리스도교에는 3개의 진정한 상속자들-로마 가톨릭, 정교회, 그리고 성공회-이 있으며, 이들은 공통의 역사적 성사적 특성을 공유하였다. 이들은 서로 상통하지 않지만, 이들의 공통된 기원이란 이 교회들만이 공교회적(Catholic)이며 사도적인 교회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특히 이 이론은 사도적 계승이라는 특정한 사상에 집중함으로써, 일부 비판자들에게는 너무 지나쳤으며(잉글랜드교회의 종교개혁 전통을 비정상으로 몰아갔다), 다른 비판자들에게는 너무 약한 것이 되었다(이 때문에 뉴먼과 다른 비판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확신적인 주장을 선호하여 개종하였다).

    19세기 하반기는 확실히 다시한번 교회론에 집중하였지만, 오히려 각각의 태도와 교리적인 입장을 강화시키고 확대시켰다. 이보다 더 중대한 문제는 이제 잉글랜드교회는 이러한 차이들을 해소시킬 수 있는 수단들을 찾는데 실패하였다는 점이었다. 1847년의 고햄사건(Gorham Case)부터 1890년의 링컨판결(Lincoln Judgement)까지 일련의 법적인 시험에 빠졌을 때, 잉글랜드교회는 교회의 믿음을 규정하는데 39개 신앙조항이나 공식발표문들을 사용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이 입증되었다. 이로써 각 주장자들은 자신의 해석이 성공회의 신학적 전개과정에서 하나의 합법적인 계열(line)을 표현한다고 주장하였다. 잉글랜드교회의 서로 다른 집단들은 공감을 성취 또는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을 상실한 채, 그들의 입장을 더욱 당파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성공회의 이해는 서로 반대되는 의견으로 구성된 다양한 모양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모양새는 비판자들의 눈에 성공회신앙의 특징이 되어버렸다.

    3. 세계성공회에 의해서 확대된 교회론

    19세기에 잉글랜드교회가 교회론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였다면, 교회론의 문제들을 논의하는 상황(context)은 극적으로 확대하였다. 상업과 식민지 활동과 함께 선교회 활동은 세계의 각 지역에 성공회 교회들을 설립하였다. 이로 인해 [지역 성공회 교회들의] 지위와 서로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되었으며, 그리고 사실상 말 그대로 ‘성공회신앙’(Anglicanism)을 논의하는 것이 가능하거나 정말로 불가피한 상황을 만들었다. 세계성공회의 성장과 최초의 람베스회의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의 다른 글들에서 다루었지만, 이러한 변화는 성공회 교회론에 두가지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첫째는 국가단위의 교회들(national churches)의 자치[자주성]에 대한 자각을 낳았으며, 둘째로 그들간의 상호의존을 숙고하게 되었다.

    국가단위의 교회들이 자신들의 업무를 스스로 처리하는 자유는 물론 정확하게는 잉글랜드교회가 가장 중요한 형성기에 주장하였던 권리였으며, 우연히 또는 필요에 의해서 새로운 [성공회]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의 독립을 추구하면서 다시 강조하게 되었다. 헌팅턴이 미국성공회의 신자들에게 그들의 소명을 더욱 진지하게 고려할 것을 요구하였을 때, 그는 독립전쟁후 남은 교회들을 재조직하였던 자들의 포부[열망] 뿐만아니라, 200여년전 잉글랜드교회에 독특한 정체성을 만들어준 개혁가들의 확신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북미주의 사례는 사실상 유익한 것으로 입증되었으며, 자신들의 신앙적 권위를 깨닫은 식민지 주교들은 지역교회의 생활과 지도력을 직접 실행하기 위하여 미국성공회의 사례를 따라 교회회의의 협약(헌장synodal compacts)에 따라 그들의 교회를 조직하였다.

    독립을 추구하는 동시에 새로운 교회들은 독립을 추구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잉글랜드교회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다른 [성공회] 교회들과 ‘형제같은 조언과 격려’를 위한 기회들을 추진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확언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1867년 람베스회의[람베스 주교회의]가 최초로 개최되었으며, 이로부터 세계성공회(Anglican Communion)를 ‘국가단위 교회들의 친교단체[모임]’(a fellowship of national Churches)로 만드는 이념과 성공회 교회들의 조직망이 확립되었다[유래하였다]. 그러면 이 조직은 도데체 어떤 종류의 형태인가? 처음부터 람베스회의는 법률 제정권을 포기하였다. 각 모임의 권위는 협의(deliberation)라는 본래적인 의미로 제한되었다. 발표문은 여기에 서명한 주교들의 권위만을 포함하였다. 람베스회의는 권고들을 발표할 수 있지만, 이것들의 가치를 평가하고 실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회원 교회들에 달려있다. 1920년 람베스회의에서 나온 발표문에 의하면, 매 10년마다의 모임은 ‘우리 회원교회들의 경험과 조언들에 집중하지만, 규제 또는 명령의 권한을 주장하지 않는다.’1930년 람베스회의의 한 위원회는 성공회의 통일성에 관한 확신을 강조하였다: 즉, ‘교회기관의 조직에는 두가지 일반적인 형태들이 있다. 하나는 중앙집권화된 치리형태(government)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의 친교단체(협회fellowship) 내에서 지역별 자치를 유지하는 치리형태이다.’ 또한 세계성공회는 첫 몇세기 동안의 그리스도교회와 오늘날의 정교회와 함께 두번째 모델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공회 교회들이 공유하는 것이 어떤 종류의 친교단체인지, 이들을 결속시키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방식으로 이 단체는 성공회적인지에 대해서는 항상 분명하지는 않다. 여러가지 해결방안들이 제시되었다. 만약 중앙집권화된 협의회가 부적절하다면, 독특한 성공회적인 믿음들을 표현한 어떠한 진술문에 기초한 통일성도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적인 역할에 가장 적합한 후보인 39개 신앙조항은 이미 19세기에 잉글랜드에서 발생한 논쟁들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성공회의 자의식에서 점점 사라졌다. 독자적으로 토착적인 특성을 발견하려는 교회들에게 신앙조항은 극단적으로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였으며, 더구나 1968년 람베스회의는 각 교회들이 공식적으로 이 신앙조항과 거리를 둘 것을 권고하였다. 즉, 신앙조항의 역사적 중요성을 존중하지만, 이를 현대의 신앙고백으로 사용하려는 시도는 포기해야 한다. 한동안 이에 대한 대안적인 권위로 공동기도서가 연합의 결속력이자 성공회 가르침의 주요 원천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각 국가단위 교회들이 추진해온 전례서의 번역과 개정과정은 불가피하게 기도서들이 기껏해야 예배의 공통된 구조만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하였다. 세계성공회의 각 교회들의 문화적인 다양성은 공통적인 전례형태라는 사상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다소 다른 차원에서 람베스회의의 소집자인 켄터베리 대주교는 성공회의 통일성에 결집력을 주는 독특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의 권위는 람베스회의처럼 권리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동의로 그에게 부여된 도덕적인 권위이다. 각 교회들은 대주교직을 인적 연결고리로 점점 중요하게 인정하지만, 랜달 데이비슨의 지적처럼, 대주교는 교황이 아니라 중심점이다. 대주교의 역할은 오늘날 존재하는 람베스회의, 세계성공회협의회(ACC), 관구장회의, 교리위원회, 그리고 정의와 평화위원회의 역할처럼 성공회 교회론에서 부수적인 요소이지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공식발표문들이나 행정적인 규범들(행정기구들norms)에서 성공회의 정체성을 위한 촛점을 찾으려는 노력의 실패는 경고나 놀라움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윌러엄 리드 헌팅턴과 그의 주장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즉, 성공회는 ‘교회의 이상’을 확립시켜줄 수 있는 신앙과 성사들과 공유하는 사목직에 근거한다.

    4. 교회론과 성공회신앙의 신뢰성[진실성]

    헌팅턴은 두가지 과제를 수행한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는 당시 북미주 그리스도인들을 통합시킬 수 있는 신학적인 자료[수단]들을 잉글랜드교회의 유산으로부터 찾았으며, 또한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메시지와 실재가 새로운 국가에서 새로이 조직된 [성공회] 교회생활의 형성에 영향을 주도록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작업이 성공회전통 안에서 교회론을 다루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나타난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충분히 설명하였다. 초기 그리스도교회 그리고 오늘날까지의 정교회처럼 성공회는 교회의 표준적이고 체계적인 신학을 만드는 것을 회피하였지만, 그렇다고 교회론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통일성과 공교회성(catholicity) 그리고 신성함(holiness)에 대한 모든 역사적 질문들은 성공회신학의 전개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되었다. 즉, 수많은 교회론적인 모델들이 성공회신앙에서 제기되었지만, 성공회의 자이의식은 이들중 어느 하나에 얽메이지 않았다. 이러한 우유부단[망설임]이 성공회전통에서 진지한 신학적인 숙고를 제거시켰다고 비난한다면, 성공회적인 체계는 한 교파교회의 고정된 규범과 표준으로 사용되는 신앙고백적인 교회(신앙고백문에 근거한 교회confessional church)의 체계가 아니라, 신앙과 역사와 생활에 대한 지속적인 도전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그 교회의 신뢰성을 입증하여야 하는 신앙고백교회(confessing church)의 체계이다. 두가지 간단한 사례는 이러한 목적에 합당한 증거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성공회전통의 교리적인 포용성을 말하는 것은 종종 교리적인 무관심을 은폐하려는 가면[속임수]이라는 점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유지하려는 의도는 성공회신앙을 기껏해야 마이클 램지가 말한 ‘한 무리의 종합’(a school of synthesis)으로 만든다. 세계성공회는 완전한 신학적 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교회의 완전한 복원을 기다린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람베스 4개조항이 신앙과 성직(order)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온전성(충만함fullness)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대한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교회의 현재적인 미완성을 증언한다. 그러나 이는 또한 종말론적인 완전성(wholeness)에 대한 교회의 기대를 추구한다. 만약 그리스도의 복음이 Catholic이자 프로테스탄트 원리들을 갖고 있다면, 성서가 예언자적이자 사제적인 종교[신앙]에 관심한다면, 초기 그리스도교회가 조직적인 요소와 은사주의적인(charismatic) 추진력에 의해서 형성되었다면, 이 때에 그리스도의 제자직에 대한 이러한 서로 다른 이해들을 하나의 친교단체(단체fellowship)로 통합[결합]시키려는 성공회의 시도는 정당하다.

    성공회는 또한 ‘가교교회’(bridge church) 또는 분열된 집안의 조정자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 교회일치운동의 어려운 현실들에 부딪쳤을 때에 착각이었다는 점을 뼈아프게 인정하였다. 또다시 마이클 램지는 진정한 Catholicity는 초교파적인 합의를 추구하기 위하여 신앙고백의 차이들을 조정하거나, 특정한 구조들을 강요하는데서 발견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교회에 대한 성서의 은유들-건물, 몸, 포도나무, 에클레시아-은 모두 하느님 아래에 있는 교회생활의 제한성(givenness)에 대하여, 그리고 지속적으로 완전한 본래적인 교회가 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성장해야 하는 방식에 대하여 말한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과 미래에 대한 비젼 사이의 긴장을 의식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성공회신앙을 위한 지속적인 도전과 기회를 제공한다. 교회의 내적인 차이들-신앙과 교리의 문제들 뿐만아니라, 여성의 사제와 주교서품에서 발생한 성직의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전통을 해설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방식은 성공회가 여전히 보다 넓은 그리스도교회에 제의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보유하였는지를 결정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갖고 있지 않다면], 그때에 성공회는 헌팅턴이 경고한대로 산골로 조용히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공회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성공적으로 제기할 수 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교회를 위하여 평화속에서 성령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방식을 모델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에 대한 성공회의 이해는 보편적 차원에서 교회의 비젼을, 그리고 지역적 차원에서 교회의 실재를 모두 평가하려 하기 때문에, 교회론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기대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다른 측면을 희생시키며 성공회의 딜레마를 해결하였던 교의를 장려[추진]하는 것은 성공회신앙에서 성공회의 소명과 초교파적이자 선교적 기회를 빼앗는 것이 될 것이다.

    헌팅턴이 미국에서 이 책을 집필하고 있을 때, E. B. 퓨지는 독일의 학자로부터 성공회 교회론 연구의 독특성에 대하여 설명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당신은 곧 우리의 글들 중에 추상적인 연구로 시작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유명하고 불후의 저작들은 기본적으로 당대의 긴급한 요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칠링워스, 후커, 버틀러, 불 (그리고 기타 학자들)의 저서들은 자신들의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리고 당시에 우리나라에 있는 그리스도교회의 이익(good)을 위하여 집필되었다.'

    이를 인정한다면, 교회에 대한 성공회의 이해는 교리적인 관점에서 미완성이지만, 그 정신이나 가르침에서 비성서적은 아니다. 성공회의 교회론은 그것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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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6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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