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번역 프로젝트 자료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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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교의 근본요소들
    Stephen W. Sykes

    1. 현대의 입장

    성공회신앙(Anglicanism) 내에는 ‘그리스도교의 근본요소들(fundamentrals 본질적 요소들)’ 또는 근본적인 신앙조항들[신조들]’(이 두가지는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에 직접 호소하는 오랜 전통이 있다. 앞으로 논의하겠지만, 이러한 호소가 성공회와 다른 교파들(communions)을 구별한다고 믿는다면 커다란 실수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근본[본질적]요소들과 비근본[비본질적]요소들 사이를 대비시키는 방식이 특히 성공회[잉글랜드교회]에서 쉽게 정착하였으며, 또한 오늘날까지도 여러가지 방식들로 그리고 여러가지 상황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충분한 이유들이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이러한 구별[본질과 비본질의 구별-역자]에 대한 현대적인 사례들로는 성공회-로마 가톨릭교회 국제위원회(ARCIC)-당시 이러한 전통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헨리 맥아두 대주교는 성공회측 공동의장이었다-의 몰타보고서(Malta Report 1967)와 최종보고서(Final Report 1981)에서 찾을 수 있다. 근본[본질적]요소들과 성공회의 포용성(포괄성 comprehensiveness)과의 연결[결합]은 1968년 람베스회의 한 분과의 보고서에서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즉, ‘포용성(포괄성Comprehensiveness)은 근본[본질적]요소들에 대한 동의를 요구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상통관계를 파괴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서 다르게 이해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불일치를 허용한다.’

    최근에 근본[본질적]요소들과 이를 추론하는 가능한 방식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은 1888년 람베스회의에서 채택되어 공식발표된 시카고-람베스 4개조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발표문의 4가지 요소들(성서, 신경들, 두가지 성사 그리고 주교직)은, 최근에 단서[유보]조항들과 확대조항들을 추가하였지만, 오늘날까지 반복적으로 지지를 받았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근본[본질적]요소들에 동의하거나, 동의할 수 있거나, 동의해야 하는 제안-즉, 표면상으로는 자명하게 보이거나 적어도 매우 바람직하게 보이는 제안-에는 상당히 복잡한 것들이 숨어있다. 근본[본질적]요소들의 내용에 대해서는 정확한 규정이 없으며, 또한 칼 라너를 포함한 일부 지도적인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이를 채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제안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설립된 그리스도교회의 통일성에 위배되며, 그 내용을 결정하는 확고한[절대적인] 권위없이는 실제로 실현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자주 프로테스탄트 이론이라고 무시되었다. 우리가 그 역사를 추적하려는 이 전통은 풍부하지도 않으며, 전도구교회 중심도 아니다. 또한 모든 성공회 신자들이 이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예를들면, 소책자운동가인 윌리엄 팔머(William Palmer옥스퍼드의 우스터 칼리지)는 1383년 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논문>(Treatise on the Church of Christ)에 추가한 ‘근본요소들의 교리에 관하여’라는 날카롭고 명확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이 용어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적용될 때에 너무나 많은 의미들을 나타낼 수 있다. 그리고 이 용어는 실제로 그렇게 많은 의미들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사용될 것이기 때문에, 논쟁에서 사용될 때 발생하는 혼동을 피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용어는 하나의 결정된 인식을 전달하지 못하는 모호한 용어로, 논쟁의 문제들에서 실용적으로 사용되기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문제이다.

    2. 종교개혁 전통

    개혁된 잉글랜드교회가 ‘근본[본질적]요소들’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즉, 이 이론은 로마교회가 초기 교부들, 사도들과 그리스도의 표준들에서 일탈하였다는 비난[고발]으로부터, 그리고 ‘우리는 부정하게 무시되고 완전히 부패한 저 종교[로마교회]에 본래의 첫 토대(foundation)로 되돌아올 것을 요구한다’(주얼 주교의 Apology of the Church of England, 1564)는 비슷한 주장으로부터 유래하였다. 근본[본질적]요소들로의 복귀(recall)는 다양한 은유들로 표현될 수 있는 주제이다. 이들중 하나인 ‘토대’(foundation)는 여러 가능성들중 하나일 뿐이다-그러나 이 단어는 감동을 주는 여러 성서본문들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중요한 단어이다.(‘기초[foundation]가 송두리채 무너지는 이 마당에, 의롭다는 게 무슨 소용이냐?’, 시편11.3; ‘내가 귀중한 돌 하나를 골라 머릿돌[foundation]로서 시온에 두었다’, 이사야 28.16으로 베전2.6에서 인용; 반석[foundation]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모래위에 집을 짓는 사람의 비유, 마태 7.24-7과 루가 6.47-9;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foundation]가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foundation]는 놓을 수가 없습니다’, 고전3.11;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요긴한 모퉁이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foundation]가 됩니다’, 에페2.20).

    종교개혁의 시작과 함께 우리는 본질적 요소들로의 복귀를 악화시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되돌아가는 논쟁에 휘말렸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실질적인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된 몇가지 간단한 진리들에 동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적 조건과 구원의 조건에 대한 종교개혁가들의 입장들의 복잡성을 포함한 그이외의 것들은 신학적인 토론으로 남겨둘 수 있을 것이다. 루터는 이러한 불가지론을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그에 의하면, 그가 가르치려는 것이[그의 주장은] 세상에 공개적으로 선포되었고, 또한 성령에 의해서 내적으로 [신자들의] 마음에 교육된 성서의 평범한 내용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방대하고 비체계적인 저서들 곳곳에는 토대(foundation)를 요약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복음의 핵심조항, 머리, 심장, 등등-이 표현되어 있다. 루터에게 온전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체인이나 반지나 종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전체가 생존하려면, 어느 한 부분도 잃지 말아야 한다.

    에리스무스의 제안은 트랜트회의에서 무시되었지만, 잉글랜드에서는 널리 유포되었다. 근본[본질적]요소들에 대한 사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었지만, 길고도 독립적인 역사를 가진 또 하나의 사상도 널리 유포되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는 특정한 문제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아디아포라(adiaphora, 사소한 문제들)는 종교개혁전통 전체에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예를들면, 루터는 헨리8세의 <7가지 성사에 대한 주장>(1521)에 대답하면서, 성서를 넘어서는 것은[성서 이외의 것은] 무엇이든지 사소한 문제(matter of indifference)이며 ‘필수적인 교리’로 변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adiaphoron(단수형, 복수형은 adiaphora)이란 용어는 윌리엄 틴들이 자주 사용하였으며, 특정한 교리들-특히 연옥론 또는 화체론-은 필수적인 것인지 사소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시험대상이 되었다. 존 프리드(John Frith, 1503-33)는 화형처형을 기다리는 동안, 그를 심문하였던 주교들의 입장-즉, 화체론은 ‘천벌의 고통속에서도 반드시 믿어야 하는 신앙의 확실한 조항이다’-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동의하지 않을 자유를 갖는다고 조심스럽게 설명하였다(‘Articles Wherefore John Frith Died’, 1533). 3년후 헨리8세는 10개조항을 공표한 후 주교들에게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며 [...] 무시해서는 안되는 사소한 문제들을 다루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물론 잉글랜드 내에서 정치권력은 이와같은 가르침들을 집행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중앙집중적이었다. 그리고 이견을 제거할 수 있는 정치적인 압력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않된다. 정치적으로 독립된 지방의 종교개혁운동들은 같은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직접 해결하는데 익숙하였다는 사실은 근본[본질적]요소들에 대한 전체 프로테스탄트들의 의견일치를 방해하였다[에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16, 17 그리고 18세기 동안에 근본[본질적]요소들에 대한 동의를 토대로 그리스도교국(Christendom)의 분리된[분열된] 교회들 사이에 교회론적인 일치(ecclesiastical agreement)를 추구하였던 신실하고 헌신적인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교회들을 분리시켜 놓은 정치적인 힘들은 훌륭한 의도들보다 강력하였다. 분리된 정치적인 실체들(entities)은 서로 다른 사용방식(usage, 관습)에 익숙하였으며, 외부로부터 오는 변화에 대한 저항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초기에 이 문제들은 그렇게 해결되지 않았다. 루터파의 경우, 필립 멜랑히톤(1497-1560)은 로마교회와의 공통된 분야들을 규정하려고 노력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경우, 플랑드르 출신의 평신도 신학자로 에라스무스 전통을 확고히 따르는 조지 카샌더(Georg Cassander 1513-66)는 만년에 쾰른에 거주하며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 사이에 평화를 복원하기 위한 근거를 찾는데 몰두하였다. 이들의 지칠줄 모르는 (그리고 성과없는) 노력에서, 화해를 위하여 유일하게 안전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인식적인[경험적인] 내용(cognitive contents)을, 즉 근본적인 신앙조항들을 분명하게 강조하였다. 따라서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1530)-대체로 멜랑히톤의 업적이다-은 가장 온건하고 평화적인 형태로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조항별로 추출한 것이다. 그리고 Cassander는 진정한 그리스도교회에 적합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으로 성 빈센트의 공식문-이 빈센트 규범(Vincentian canon)은 ‘어느 곳에서나, 언제나 그리고 모두가 믿어온 것’을 말한다-과 일치되게 첫 6세기까지의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신경에 호소하였다.

    3. 17세기의 성공회신앙

    지금까지 잉글랜드 밖에서 근본조항들을 다룬 사례를 강조한 것은 잉글랜드교회가 이러한 전통을 수용하였던 올바른 상황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교부들에 대한 크랜머의 지식과 그의 상대적으로 전례적인 보수성으로 볼때, 화해의 토대에 대한 Cassander의 주장은 분명히 호교론적인 가치를 갖고 있었다. 스위스 개혁가인 불링거(Bullinger, 1504-75)의 저서인 [설교집]<Decades>는, 개혁주의[Reformed] 신앙은 곧 원시 그리스도교회의 신경들과 공의회들을 고백하는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였기 때문에, 잉글랜드에서 높이 존경받았다.

    그러나 이후 잉글랜드의 신학자들이 로마 가톨릭, 루터파와 칼빈주의자 선배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씌여진[발표된] 신학적인 호교론 뿐만아니라 근본조항들의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 가능성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용방식은 이론뿐 아니라 근본요소로 유지되어야 하는 것[근본요소들]을 결정할 수 있다. [종교]개혁이 발생한 수단은 이 문제를 매우 밀접하게 제한한다. 즉, 이 수단들은 공동기도서, 여려차례 수정되며 발표된 39개 신앙조항, 공식설교문집 그리고 1603년의 교회법률집을 포함한다. 이 모든 것들은 의회안의 국왕(King-in-Parliament)의 권위와 성직자회의의 동의를 받았다. 39개 신앙조항은 성서를 구원에 필수적인 것들의 기준[표준]으로 언급하였지만, 신앙정책의 이러한 도구들에서 근본[본질적]요소들에 대한 최종적이고 권위있는 발표문(formulation)이 없었다. 이 문서[39개 신앙조항]는 분명하게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성격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엘리자베스1세 말기부터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본질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호교론적인 문학이 매우 발전하였다. 앞에서 이미 주얼의 <변증서>(Apology)를 언급하였다. 그 얼마후 리처드 후커는 스스로 만든 용어인 ‘그리스도교의 본질’(essence)-필자가 알기로 이 문구는 잉글랜드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다-을 하나의 주, 하나의 신앙 그리고 하나의 세례를 고백하는 가시적인 교회에 하느님이 부여한 통일성으로 설명하였다. 하나의 신앙은 터툴리안과 이레니우스와 같은 초기교부들이 고백한 그리스도교 믿음의 일부 조항들로 제정되었다. 후커는 당시 포용적인(포괄적인comprehensive) 잉글랜드교회의 일원이었던 온건한 퓨리탄들과 이미 여러 논쟁들을 겪었기 때문에, 그는 즉시 성서에 완전한 형태의 교회정체[치리구조]가 규정되었는지-즉, 구원에 필수적인 것으로 보존해야 하는 것들중 하나인가-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성서에 규정되어 있다는 주장에 반대하며, 후커의 입장은 분명하였다. 즉, 그리스도교 신앙조항들과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사들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부수적인 것들은 교회에게 결정하도록 재량권을 준 것들이며, 이에 대한 결정들은 하느님이 준 자연이성의 토대에 상반되지 않으면서도 지방별로 그리고 시대별로 다를 수 있다.

    17세기 들어와, 첫 5세기 동안의 분열되지 않았던 그리스도교회에 대한 호소는 많은 유명한 신학자들을 사로잡았다. 그중에서도 네델란드 신학자이자 법학자인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와, 제노아출신의 칼빈주의자로 1610년 잉글랜드에 정착하여 잉글랜드교회의 호교론에 기여한 아이삭 카조봉(Isaac Casaubon 1559-1656)을 꼽을 수 있다. 1612년 카조봉(Casaubon)을 런던에서 만난 독일의 루터파인 게오르그 칼릭투스(Georg Calixtus 1586-1656)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논리에 감명받아, 여기에 빈센트의 규범이 제공하였던 표준과 에라스무스에서 얻은 실질적인 그리스도교 생활에 대한 강조를 결합시켰다.

    그러나 ‘근본적인 조항들’(fundamental articles) 전통은 또한 니콜라스 후니우스(Nicholas Hunnius)에 의해서 엄격한 루터교의 정통신학(strict Lutheran orthodoxy)을 해설하는데 기여하였다[도움이 되었다]. 여러종류의 근본적 요소들에 대한 가장 예리한 분석들중 하나에서, 후니우스는 본질적인 토대(substantial foundation)-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유기적인(organic) 토대-성서-와, 교리적인 토대-그리스도교 교리의 내용-로 구별하였다. 교리적인 토대는 또다시 누구나 고백하여야 하는 제1조항들(primary articles), 누구도 부인해서는 않되는 제2조항들, 그리고 무시하거나 논쟁할 수 있는 비본질적인 것들(non-fundamentals)로 세분하였다. 이러한 구분의 목적은 루터파와 개혁주의파(Reformed)가 본질적인 토대와 유기적인 토대에 대하여 일치하더라도, 교리의 제1조항들과 제2조항들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근본[본질적]요소들이란 개념에 대한 호소가 그 자체로 교회일치를 희망하는 과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스코틀란드 출신의 유명한 교회일치운동가인 존 듀리(John Durie, 1596-1680)의 경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근본[본질적]요소들에 대한 합의를 바탕으로 유럽의 프로테스탄들의 통합을 시도하였으나, 교파적인 비타협적 태도와 정치적인 경쟁관계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잉글랜드에서 근본적인 [신앙]조항들중 근본[본질적]요소들이 주로 채택된 상황은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과의 논쟁이었다. 랜슬럿 앤드류스(Lancelot Andrewes) 주교는 제임스1세가 가톨릭신자라고 주장하는 예수회윈인 벨라민(로베르또 벨라르미노Bellamine)를 공격하였다. 그는 칼릭스투스가 이미 진전시켰던 이론을 채택하여 첫 4차례의 공의회의 신경들과 교회법들에 대한 고백[선언]은 잉글랜드교회를 위한 충분한 자격요건(title)이라고 주장하였다. 잉글랜드교회 [성공회] 신앙(Anglicanism)의 경계들에 대한 그의 정의는 다음의 유명한 문장으로 표현되었다.

    ‘하느님이 직접 쓰신 것으로 요약되는 한가지 법(canon), 두가지 증언들[성서들], 세가지 신경들, 네 차례의 공의회들, 첫 5세기, 그리고 이 시기의 교부들-즉, 콘스탄티누스 이전 세기들과 이후 2세기-이 우리의 신앙의 경계를 결정한다.’

    앤드류스는 직접 벨라민에 대한 응답문을 보여주었던 카조봉과, 그보다는 다소 덜 친근하였던 그로티우스(Grotius)와 교류하였다.

    20년후 윌리엄 로드(1573-1645)는 예수회 신학자인 존 피셔(1569-1645)와 유명한 논쟁을 하고 있었으며, 그 직후에 (1639)란 책으로 출판하였다. 그리스도교회가 규정한 모든 논점들은 근본[본질적]요소라는 피셔의 주장을 반박하며, 로드는 ‘근본[본질적]요소’라는 용어를 신경의 조항들에만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신경으로부터 정말로 많은 것들을 추론할 수 있으며, 단순한 백성들은 이를 알 수 없지만, 보다 학식있는 자들에게는 믿어야 하는 필수적인 내용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것도 교회가 본질적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근본[본질적]요소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자체로 본질적이기 때문에 근본[본질적]요소이다. 로드는 성서를 강조한 앤드류스의 주장을 채택하고 이전의 프로테스탄트 논쟁가들의 업적을 반영하며,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이며 오류가 없다는 믿음이 신경과 함께 앞에서 서술한 제1의 신앙원리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잉글랜드교회가 발표한 [39개] 신앙조항들은 성서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며, 첫 5세기의 교부들이 공유하였던 믿음에 의해서 평가받는데 만족한다.

    ‘성서와 신경들을 믿는 것, 그리고 초기 교회의 의미에 따라 이것들을 믿는 것, 초기교회들이 크게 찬양하였던 4개의 위대한 공의회들을 인정하는 것,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근본[본질적]요소로 물려받은 교리의 모든 논점들을 믿는 것은 죽든 살든 구원을 줄 수 밖에 없는 신앙이다.’

    이와 똑같은 의미로 저서를 썼던 다른 학자들로는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그리고 후에 주교가 된 제레미 테일러(1613-67)와 헨리 헤몬드(Henry Hammond 1605-60))를 들 수 있다.

    그러나 교부들의 증언이 이들 호교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일치하는가? 일부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레이트 튜 써클(Great Tew 그룹)로 알려진 일부 학자들은 교부들에의 의존이 혼동만을 야기시킨다고 믿었다. 이러한 주장은 유명한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교부학자인 쟝 달레(John[Jean] Daillé)의 저서 <On the Use of the Fathers>(프랑스판, 1632)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윌리엄 칠링워스-로드의 대자(代子)이며 한 때 로마 가톨릭으로 전향하였으나 다시 복귀하였다-의 주장은 교부들에 대한 언급에서 확실한 후퇴를 나타낸다. 1638년의 논쟁적인 저서 <Religion of Protestant a Safe Way to Salvation>에서, 그는 성서와 근본[본질적]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즉, 한 사람이 성서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신앙조항 6항에서 인용) 확신하게 되면, 그가 성서의 참된 의미를 찾아 믿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에 의하면, 일간이 자율적으로 믿는 모든 것들에는 중요한 도덕적인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받드시 믿어야 하는 모든 진리들의 최종목록은 없다.누구나 믿어야 하는 참 진리들의 최종목록들은 없다. 이와 동시에 칠링워스는 신앙의 근본요소들의 단순성을 주장하였다.

    이때에 중요한 논점의 설명은 또 다른 호교론자인 에드워드 스틸링플리트(1635-99)의 저서로, 로드와 피셔 사이의 논쟁에 대한 예수회 주장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는 (1664)에서 인간의 개별적인 능력들 안에서 구원에 필수적인 것들과, 그리스도교 사회에 의해서 반드시 인정받아야 하는 것들-또는 교회단체[교파]의 보증[맹약]들과 조건들-로 구별하였다. 그에 의하면, 근본요소에 대한 토론은 이 둘 사이에서 불확실하게 흔들리지만, 이 들을 혼동하여서는 안된다. 이후에 칠링플리트의 옹호자인 윌리엄 셔로크(William Sherlock)는 이 두가지 중에서 후자에 집중하면서, ‘근본[본질적]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근본적인 교리는 엄격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의 본질(핵심essence)과 같은 교리이다. 이것이 없으면 전체 건물과 상부구조가 무너진다. 이러한 믿음은 예술이나 과학의 제1원리처럼 그리스도교의 본질(very being)에 필수적이다.’

    4. 재정의: 18세기와 19세기

    앞에서 제시한대로, 만약에 우리가 이론만이 아니라 사용방식을 주의깊게 관찰한다면, 17세기의 왕정복고[1660년의 찰스 2세의 복귀]는 약1,760명의 성직자들을 퇴출시킴으로써 잉글랜드교회의 ‘포용성’[포괄성]의 경계를 분명하게 규정하였다. 더구나 성공회의 서품예식서(Ordinal)가 주교에 의한 사제서품을 요구하였다는 사실은 근본요소들에 대한 [잉글랜드]교회의 입장과도 반드시 연결되어야 했다(pp. 162-3 참조). 그러면 어떻게?
    이 논의에 기여한 학자이자 초교파적으로 활동하였던 윌리엄 워이크(William Wake) 대주교는 이 문제에 대하여 모호하였다. 그는 카샌더(Cassander)와 그로티우스(Grotius)의 저서들을 읽고, 근본적인 신앙조항들을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시키는 방법이, 예상되는 어려움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일치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신앙 내에서의 일치(상통communion)를 회복하는데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이를 기초로 소르본대학의 우호적인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과 광범위하게 서신으로 교류하였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교회(프랑스 가톨릭교회Gallican Church)가 교황수장권을 벗어버릴 준비가 되어있다는 비현실적인 가정에 근거하였다. 웨이크는 교황이 ‘그리스도께서 몇몇 주교들과 함께 공유하도록 물려준’ 주교직의 독점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웨이크는 프로테스탄트계의 불일치를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 [주교]인 보쉬에(Bossuet)의 주장을 반박하며, 프로테스탄트들이 이미 신앙의 근본적인 것에 일치되어 있다는 입장을 이미 열정적으로 옹호하였다(1689년의 설교문). 그는 후커와 위트기프트와 앤드류스의 전통을 확고히 유지하며, 교회의 치리구조(government)가 그리스도교회의 본질(being)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비록 주교제(episcopacy)가 신적인 기원(divine origin)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논리가 곧 비주교제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는 주장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그는 그의 개혁주의와 루터교 친구들에게 주교제 [치리]제도를 권장하였으며, 장로제교회의 성직을 가진자들을 다시 서품하였다. 그러나 이와동시에 그는 39개 신앙조항의 36항에 대하여 ‘우리의 서품예식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일 뿐, 우리 교회가 유지하는 세가지 성직들의 필수불가결성을 확언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였다(1720년의 편지). 통합의 조건으로 극히 일부의 근본요소들을 규정하는 방식을 지지하였던 스위스 신학자들과 광범위한 서신교환에도 불구하고, 계획들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웨이크는 그 이후로 다른 학자들이 겪었던 것처럼, 극히 일부의 공통된 신앙조항들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의 확신[교파]을 공유하지 않는 많은 학자들은 극히 일부의 공통된 신앙조항들에 동의하기는 커녕 오히려 차이점들을 더욱 크게 강조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 주제에 대한 또다른 중요성은 캐임즈리지 신학자인 다니엘 워터랜드(Daniel Waterland 1683-1740)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그의 침착하고 분석적인 성격은 18세기의 여러 논쟁점들을 분명하게 밝혔으며, 그의 저서들은 19세기까지 지속적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그는 <Discourse of Fundamentals>(1735)에서 무엇이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기본구조’(fabric)에 속하는 것으로 주장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씨름하였다. 이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그의 해결책은 체계적인 방식이었다(systematician). 그는 그리스도교가 계약[공동체](covenant)이라는 전제하에, 그리스도교에 본질적인 것은 계약[공동체]에 고유한 모든 것, 즉 [계약의] 두 당사자, 협약(agreement), 중개자(person of the mediator), 그리고 계약에 부속된 조건과 수단과 규약(제재규정)이라고 주장하였다. 계약[공동체]를 중심점으로 하는 사상에 대하여 그리고 이 주장의 여러가지 특징들에 대하여, 그는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이자 그로티우스의 제자인 사무엘 푸펜도르프(Samuel Pufendorf)를 언급하였다.

    워터랜드는 칠링플리트를 따라 근본적인 진리들의 목록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근본요소들에 대한 사례를 나열하는 것이 적합하다. 여기에는 믿음 뿐만아니라 예배, 행동의 문제들, 그리고 이것들을 확립하는 규칙들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어려움이 발생한다면, 그 때에 평화와 관용을 선택하는 것이 더욱 현명하다. 불확실한 경우, 이를 입증하는 책임은 근본요소라고 주장한 자들에게 있다.

    워터랜드는 근본요소들을 결정하는 다른 규칙들이 제안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안들을 간단하면서도 철저하게 반박함으로써 자신의 논점을 주장하였다. 특히 그가 무시한 것들중 중요한 것들로는 그리스도교회 특히 초기교회의 정의, 성서 전체 또는 심지어 성서에 분명하게 표현된 문제들, 사도신경(여기서 그는 칼릭투스와 칠링워스와 스틸링플리트와 다른 입장임을 인정하였다), 단순히 예수를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것(존 로크를 언급하면서),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보편적인 합의들(agreement)이었다. 계약[공동체]을 교회일치의 조건들을 결정하는 가장 포괄적인 방법으로 인식하는 그의 중심적인 핵신학적 제안은 각 개인의 구원의 조건에 관한 문제를 미해결로 남겨둔다고 그는 믿었다.

    18세기 후반기에는 새로운 종류의 사상들이 유럽의 프로테스탄트신앙들에서 나타나, 그리스도교의 시대별 역사적 형태[형식]들에서 나타나는 변화들을 설명하였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사상]의 경우,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적 표현들중 어느 하나[한 시대의 표현]가 모든 시대를 위한[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표준이거나 그렇게 될 수 없다, 특히 일련의 진술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공리였다[자명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발전들이 나타난 이유들은 복합적이지만, 부분적으로 내적인 다양성과 불일치를 나타내는 성서시대와 교부시대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나타났으며, 그리고 부분적으로 낭만주의운동이 유럽 그리스도교내에 확고하게 심어놓은 새로운 비인식적인[비경험적인 감성적인] 종교이론의 영향 때문이었다. 결과는, 가능하다면, 이러한 변화하는 형태들 뒤에 숨어있는 영속적인 핵심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쉴라이에르마허가 ‘그리스도교의 핵심(essence)’에 대한 획기적인[전혀 새로운] 정의에서(Speeches on Religion, 1799), 그리스도교를 직관적인[직관적으로 인식된] ‘일관성의 원리’(principle of coherence)를 갖고 있는 것으로 말하였을 때, 그는 이와 동시에 이것이[일관성의 원리] ‘특정한 분량의 신앙적 문제들’-‘근본항목들’ 전통을 언급하는 암호화된 표현방식이다-로 구성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였다.

    이러한 유럽의 발전[과정]들은 잉글랜드교회가 내부문제에 매우 집중하여 고립되었던 시기와 일치하였다. 해외[성공회]의 독립적인 주교직의 확립은 스코틀랜드를 통해서 발생하였으며, 지금까지 근본적인 요소로 널리 인식되어온 교회와 통치권과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이러한 사실상의 수정은 환영받았을지는 몰라도, 이러한 독립적인 주교직은 결과적으로 성공회의 독특성(distinctiveness)을 설명하려는 교회의 노력을 한층 강화시켰다. 19세기초에 이르러, 소책자운동의 정신적 지주들은 하나의 [교파]교회로서 성공회의 입장에 대한 옹호론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의 공통적인 입장과는 달라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변화된 상황은 아일랜드 리머릭 주교인 존 젭(John Jebb 1775-1833)의 저서의 제목-<Peculiar Character of the Church of England: as distinguished both from other branches of the Reformation, and from the modern Church of Rome>[다른 종교개혁 교회들 그리고 현대의 로마 가톨릭교회와는 구별되는 잉글랜드교회의 특징]-에서 아주 잘 예증되었다. 벤자민 해리슨(존 헨리 뉴먼의 친구)이 1834년 파리의 저녁식사 파티에서 만난 프랑스 수도원장(Frence abbé) Jager에게 성공회 호교론의 한 사례로 주었던 바로 이 책이었다. Jager는 잉글랜드교회의 자격(claim)에 대하여 먼저 헤리슨과 그후에 뉴먼과의 공개적인 논쟁에 참여하였다.

    결국 논쟁은 근본적인 신앙조항들의 문제에 집중되었다. 뉴먼이 그해말 논쟁에 참여하였을 때, 그는 우리가 앞서 살펴본 성공회의 역사를, 특히 로드와 스틸링플리트와 칠링워스 등의 저서들을 집중적으로 독서하고 있었다. 뉴먼은 첫번째 논쟁에서 근본요소들의 사상에 분명하게 호소하였으며, 계속해서 논쟁 내내 이를 정당화하였다. 그의 생각에는 그가 스틸링플리트 주교의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고 당시의 헤리슨에게 분명하였던 것은 뉴먼이 옹호하였던 이론은 기본요소들에 대한 그의 독자적인 이론이었으며, 이것은 그 이후에 발전론(a theory of development)으로 발전하였으며, 결국에는 그가 로마 가톨릭교회로 전향하는데 기여하였다.

    이미 < 이 시대의 소책자들>(Tracts for the Times)의 일부를 읽었던 Jager는 성공회가 그의 입장에서 전형적인 프로테스탄트교회 호교론인 근본요소들과 비근본요소들 사이의 구별을 옹호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매우 놀랐다. 뉴먼은, 종교에 대한 그의 이론이 언어뒤에 숨어있는 신비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진리의 중심에 있는 변하지 않는 핵심-이는 그리스도교회가 확실하게 가르쳤던 것이다-이 존재한다고 열심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특징적인 것은, 그가 이 논의에서 핵심-그는 이를 사도적 전통이라고 불렀다-과 이에 대한 예비적인 표현들-그는 이를 예언자적 전통이라고 하였다-과의 사이에 매우 커다란 정도의 유연성과 불확실성을 도입하였다는 점이다. 이 이론은 정말로 그 자신의 이론이었으며, 그가 이를 <Lectures….>에서 완전하게 서술하였을 때, 그는 자신이 옹호하는 것이 프로테스탄트 신앙(Protestantism)이 아니라는 점을 열심히 강조하였다.

    그의 소책자운동 동료들은 이 점에 대하여 보다 더 명확하였다. 특히 W. H. 프루드(Froude)는 한 동료에게 근본요소라는 단어를 혐오한다고 말하였다. 보다 심각하게는,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윌리엄 팔머는 칠링워스와 로드와 워터랜드의 저서들에서 이 단어를 본질적으로 일관되게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증하였다. 팔머는 위터랜드가 이 단어를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였다고 논평하면서, 충분하게 합의된 규칙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 인간이 신의 계시를 판단하는데 취할 수 있는 사고의 독단성을 비판하였다. 이 점은 100년후에 칼 바르트가 되풀이하였던 비판이었다. 팔머는, 키블(Keble)을 인용하면서, 논의를 진행할 수 있는 유일하게 안전한 방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신앙의 보호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뉴먼의 발전이론의 분명한 이점은 역사적 상대주의의 충격을 흡수하는 능력이었다. 그는 역사적 과정속에서의 일관성은 변화를 요구한다고 주장하였다. 성공회 내의 뉴먼 비판자들은 대체로 기존의 정적인 이론들(static theory)로 복귀하였다. 즉, 교회는 과거의 교회들이 항상 존재하였던 것으로만 존재할 수 있으며, 과거의 교회가 항상 고백하여 왔던 것을 그대로 고백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앞에서 소개한 많은 신학자들의 저서들이 다시 출판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앤드류스, 로드, 테일러, 헨리 해먼드, 허버트 손다이크(Herbert Thorndike), 그리고 존 코진 주교의 책들이 유명하였으며, 성공회신앙 안에서 일종의 표준적인 지위를 획득하였다. 근본적인 신앙조항들에 대한 이들의 변론[옹호론]은 유럽의 상황에서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 신학적인 논쟁방식으로 보존되었다. 앞에서 살펴본대로, 이러한 논의의 초기에는 대다수 프로테스탄트 신학들(루터교와 개혁주의 포함)과 소수의 에라스무스전통의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공유하였던 전통이었으나,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논의는 이제 독특하게 성공회적인 것으로 보였다. ‘성공회신앙’(Anglicanism)이란 용어 그리고 성공회의 독특성에 대한 표준적인 정의들 일부는 이러한 전개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성서비평학이 성서의 무오류성에 도전하였을 때, 근본요소들에 대한 성서적 토대는 불확실하게 되었다[의심스런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찰스 고어(Charles Gore)와 룩스 문디(Lux Mundi-세상의 빛) 학파가 [성서]비평학을 수용하면서도 계속해서 신경의 모든 항목들의 진리성을 옹호하였다는 것은 중요한 발전[변화]였다. 근본요소들 전통에 대한 현대의 해설들은 이성의 사용(특히 후커와 칠링워스의 주장이었다)이 근본요소들 [이론을 주장하는] 방법의 일부이며, 그리고 룩스 문디(Lux Mundi) 신학자들이 이에 대한 성공회전통의 당연한 계승자들이라고 열심히 주장한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서 신경들이 확언하였던 교리들-특히 동정녀 탄생과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에 대하여 치열한 논쟁이 발생하였으며, 이 때문에 이 [이론]에 대한 옹호론의 타당성 문제를 날카롭게 제기되었다.

    5. 현대의 문제들과 해결들

    이 글의 초반에서 그리스도교의 근본요소들과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신앙조항들이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언급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역사에서, 믿음의 조항들[신앙조항들]로 추출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이는 분명히 종교(religion)에 대한 인식[론 경험cognitive]적인 측면들을 강조하는 접근방법의 결과이다. ‘근본적인 신앙조항들’ 전통에 대한 주요한 반대는 이 전통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체험적인, 의례적인(ritual) 또는 문화적인 측면을 무시 또는 경시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의 실제(actual)[실질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편향된 해석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근본요소들 자체에 대한 호소에 나타나는 더 큰 어려움들을 반드시 해결하여야 한다.

    첫째로, 팔머가 지적하였듯이, 근본요소들의 내용[근본요소들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공통된 합의가 없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이것들을 결정하는 합의된 규칙도 없다. 워터랜드의 제안은 독창적이지만, 마찬가지로 이와 경쟁하는 다른 주장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또한 명백하게 독단적이다.

    독단성에 대한 비판은 권위의 문제를 제기하며, 이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호교론자들이 ‘근본적인 조항들’ 전통에 끊임없이 주장하였던 문제이다. 분열되기 이전의 [초기] 그리스도교회 전통, 신경들 또는 빈센트규범에 호소하였던 성공회의 응답들은 전통으로 가장된 사적인 판단의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자세히 조사해 보면, 이것들은 너무 많거나 너무 적게 제시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또한 이것들 모두는 마찬가지로 초기교회의 모든 것들이 동일하였다는 소위 ‘최초 그리스도교에 대한 신화’(Myth of Christian Beginnings)라고 비판받기 쉽다.

    근본요소들 이론의 역사를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은 또한 교회일치운동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 전통의 반복된 실패를 강조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더 나아가 솔직히 이것[이 이론]은 성공회 내부의 일치[통합]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또한 복음서의 기적들이나 성서의 가부장주의(가부장 정치 patriarchalism)와 같은 문제들에 성서비평학 또는 해석학의 적용방식에 대한 차이들을 해소시키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회일치사상(ecumenism)은 ‘근본요소론’ 또는 이와 유사한 용어의 개념을 다시 사용하려고 한다. ARCIC(1982)의 최종보고서(Final Report)에 대한 공식적인 로마 가톨릭교회의 응답(Roman Catholic Response)은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교회 사이에는 공교회 교리(Catholic doctrine)의 본질적인 문제들에 한 중요한 차이점들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진술하였다. 교회일치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는 소위 ‘근본적인 공감’과 ‘근본적인 차이’에 대한 개념들과 내용들에 집중[몰두]하였다. 영국과 아일랜드 성공회교회들 그리고 북유럽과 발트해의 루터교회들 일부를 포함하는 교회일치 노력의 성공은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합의’(신앙의 근본요소에 대한 합의a fundamental agreement in faith)에 기초하였다.

    ‘근본요소들’(fundamentals) 또는 ‘본질적인 요소들’(essentials)과 같은 용어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사용될 때, 관련된 교파교회들 또는 당사자들은 상대적으로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에 대한 판단(judgement)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구별은 그들에게 서로간의 차이들이 교회를 분리시킬 정도로(church-dividing) 심각한 문제인지를 설명할 수 있게 한다. 정확하게 똑같은 질문을 여성의 사제직과 주교직 서품을 반대하였거나 아직도 반대하는 자들에게 제기하여야 한다. 남성으로만 제한된 성직서품의 전통을 변경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근본요소들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의미한다. 즉, 이러한 규칙들을 변경한 교회에 (심각한 제한조건을 두더라도) 남아있는 것은 곧 이 문제가 교회를 분리시킬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그러한] 판단을 내렸을 때, 교회의 이런 저런 기관이 무슨 권위로 이러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경우,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다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교회일치 대화의 과정은 ‘주교들과 교황청(Holy See)에 의해서 추진되고 격려되어야 한다. 교회의 교리를 책임지는 권위[기관 교도권teaching authority]는 최종적인 판단을 표현할 책임이 있다.’ 성공회신학은 교회구조들중 의사결정 기관들이 이 문제들에 대하여 판단을 내릴 때마다, 그러한 활동에 대한 합법성과 정당성을 은연중에 주장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숙고하여야 한다. ‘근본요소들’은 그 자체로 자명하다고 밝히지 않는다. 이러한 결정들을 내리려는 [교파]교회는 교회론에 대한 자기이해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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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6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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