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번역 프로젝트 자료

  1. Cranmerian
    회원

    3. 평 신 도
    Fredrica Harris Thompsett

    1988년 람베스 주교회의는 각 결의안(resolution)과 각 보고서(report)에서 때때로 ‘평신도의 사목[직]’(ministry of lay people)을 강조하였다. 즉, 평신도들이 사목활동(ministry), 선교와 복음전도(evangelism)에서 수행하는 역할들을 강조하였다. 주교회의는 평신도들에게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평신도들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실천하는 사목적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교회가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사목적 소명으로써 거리와 시장의 생활에서, 토지와 씨름하는 생활에서, 급식과 거주와 교통수단의 문제, 그리고 직장생활과 실직의 문제들에서 그들의 책임을 찾도록 요구할 때에만, 그들은 효율적이 되기 시작할 것이다[효과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신학은 미국성공회의 1979년 기도서에 포함된 교리교육서에 진술된 사목과 선교의 정의들과 일치한다.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사목직(ministry)을 통해서 교회의 선교를 수행한다.’[한국기도서 신앙의 개요 71항: 교회에 소속된 모든 지체들이 사목적 활동을 통해서 그 사명을 실현해 나갑니다.]

    지난 30여년동안 대다수 교파교회들은 하느님의 백성 전체, 특히 교회구성원의 99퍼센트를 차지하는 평신도들의 활동(work)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교회를 구성원들의 상호의존적인 활동들을 통해서 단련시키는 몸으로 표현한 성서와 바울로 서신들의 교회 이미지들에 호소한다. 오늘날 세계성공회 공동체는 평신도들에게 다양한 소명들(직업들vocations)을 수행하도록 권장하는데 전반적인 신학적 공감과 선언적인(rhetorical) 공감을 나타내고 있다. 성직자보다는 평신도의 증거활동(witness)에 주로 의존하는 미래의 교회에 대한 비젼은 전적으로 놀랄 것은 아니다. 때때로 논쟁적이고, 확실히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주장[선언]을 현실에 결합[실현]시키려고 할 때이다. 즉, 이러한 비젼을 제도화된[조직화된] 교회(institutional church) 내에서 구체화할 때, 그리고 이를 사회 전반에서 효과적으로 수행하려고 할 때에 발생한다.

    평신도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자료들에 대한 한 원천은 교회사에 대한 학자들의 수정된 인식에서 잘 나타난다. 이제 성직자들의 생활만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현대의 학문적 연구들은 민중(common folk)에, 그동안 ‘대중종교’(popular religion)로 표현되었던 것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한다. 비판적인 학문연구는 은연중에 둘로 나누어진 ‘생산자/소비자’ 모델-즉 유식한 성직자들이 무지한 평신도들을 위하여 교리를 자세히 설명한다고 가정한다-을 거부하였다. 신앙[종교]생활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보다 복합적인 패러다임[모형]들을 나타낸다. 하지만 긴 시기에 걸쳐 신앙적인 믿음들[교리들]을 형성시키고 양육하고 변경시키는데 중요하게 작용하였던 요인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중이다. 또한 인종이나 계급 또는 성별의 차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무시되었던 사람들의 체험과 목소리[발언]들에 대한 새로운 자각[인식]들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들면, 여성과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연구하는 우리같은 학자들은 평신도들의 증언의 결정적인 성격을 평가하는 새로운 질문들과 증거들을 제시한다. 1901년 에딘버러에서 개최된 세계선교대회(World Mission Conference)를 시작으로 현대의 교회일치운동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지구촌 선교를 연구하고 확대시키는데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제도화된 교회들이 ‘평신도의 사목’(Ministry of the Laity평신도사역)을 촉진시키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WCC는 계속해서 1982년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위원회] 성명서인 ‘세례, 성찬례, 그리고 사목직[사역]’(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성공회와 천주교, 정교회에서 여성의 성직서품에 대한 논쟁들이 준 한가지 영향은 교회의 공직자들-찬성과 반대에 관계없이-이 평신도 여성과 남성들을 위한 전문직들과 자원봉사직자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특히 성공회신앙과 관련하여 일부 관구교회들에서 시작된 최근의 전례서 개정작업은 교회뿐 아니라 보다 넓게 사회 전반에 대한 평신도들의 참여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응답하며 이를 구현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요인들과 다른 요인들의 결과로, 세계성공회에서는 평신도들에 대하여, 그리고 모든 세례신자들의 전체적인 사목(total ministry)이라는 새롭게 발전된[진화된] 모형들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성공회의 중요한 주제들 속에서 성공회 평신도들의 이야기를 다루려고 한다. 이는 이 책의 다른 몇몇 글들에서 지적한 것처럼 성공회 평신도들에 대한 이해들을 지적하고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하는, 포괄적이라기 보다는 보완적인 시각이다. 고전적인 성공회신앙의 형성기, 즉 16세기에 로마와의 결별때부터, 오늘날 평신도들에 대한 종교개혁의 독특한 유산들이 있는가? 우리가 평신도의 시각에서 교회, 성사들, 선교 그리그 사목[직]에 대한 이해를 재검토할 때, 어떤 원리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 성공회신앙에 관한 이야기에서 이처럼 핵심적인 측면은 새로운 주제가 아니다. 물론 평신도에 관한 몇가지 두드러진 특징들은 교회사의 긴 기간 동안에 가려지거나 과소평가되거나 전략적으로 무시되었을 뿐이었다. 이 글에서 필자는 독자들이 직접 이 주제들을 숙고하도록 장려하여 보다 자세한 탐구에 초대하며, 또한 그리스도교 증언[증거]의 윤리적 특성은 세상에서 평신도의 선교를 최우선적으로 강조할 때에 나타난다는 필자의 소신을 강조하려고 한다.

    1. 평신도 그리고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비젼

    16세기에 시작된 거대한 신앙적인 변화의 시기-집합적으로 종교개혁 (Reformation)이라고 한다-는 각 교회의 생활들-그리고 유럽대륙과 잉글랜드의 상황에서 그리고 프로테스탄트들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식발표문들-에서 신실한 평신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 시기의 개혁과 쇄신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평신도의 성서적 권한을 회수하고 신약성서 시대의 교회들에 대한 이해에 일치하는 신앙생활을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던 새로운 시대들중 하나였다. 종교개혁은 상당한 강도의[거대한 영향력을 가진] 신앙운동으로, 18세기에 존 웨슬리가 주도하였던 복음주의 부흥운동, 19세기 미국에서 일어난 신앙의 각성과 확장[대각성운동-역자], 2차 세계대전이후 유럽에서 평신도들 사이에 일어난 그리스도 제자직에 대한 새로운 관심, 1970년대에 미국의 대다수 교파교회들에 영향을 주었던 소위 ‘은사주의 운동’(Charismatic movement)[성령쇄신운동-역자], 그리고 기장 최근에는 라틴 아메리카의 기초공동체 운동과 비슷하였다. 이들 각각의 운동들 그리고 그밖의 다른 [신앙]부흥운동들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영성적 동등성을 강조하였다.

    유럽대륙과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거리를 좁히고, 둘 사이의 차별[장벽]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하였다. 성직자들은 결혼을 허용받았으며, 때때로 권고받았다. 또한 대다수는 중세말기 성직[자]의 특전을 포기하고 시민으로서의 일상적인 책임을 수행하였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통해서 가치들은 명상[수도]생활을 중요시하는 것에서 실질적인 생활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동하였다. 직업(소명 vocations)에 대한 종교개혁의 일반적인 시각은 모든 신자들이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즉, 직업[소명]상의 차이는 있지만, 영성적인 계급구조[서열, 차이]는 없다. 종교개혁 신학의 이러한 특징은 1985년 영국성공회의 연구발표문인 <All Are Called: Toward a Theology of the Laity>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즉, ‘우리는 우리들의 사악함[죄]으로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과 사랑은 우리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제의하신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이러한 부름을 거부할 자유를 주신다. 그러나 이러한 부름은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종교개혁이 평신도들에 준 영향과 이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되고 있다. 최근의 연구는 대다수 평신도들이 새로운 신앙으로 개심하였는가를 질문하였다. 한 역사학자는 평신도들이 종교개혁을 [적극적으로-역자] 촉구하고 추진하였다’기 보다는 [수동적으로-역자]‘묵종하고 수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중세말기의 생활에서 평신도들이 주도하였던 여러가지 활동들-예를들면 평신도 [협동]단체들이 활발하였지만, 종교개혁으로 해체되었다-이 있었다. 기존의 역사연구서들은 중세말기의 가톨릭신앙(전통적인 신앙 Catholicism)의 깊이 뿌리내린 습관적이며 풍부한 신심활동에 대한 충성심으로부터 잉글랜드 왕국민들을 떼어놓는데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다는 점을 과소평가하였다. 종교개혁의 성공에 대한 최근의 수정된 시각들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가장 균형잡힌 평가는 종교개혁이 모든 면에서는 아니라도 많은 측면에서 ‘성직자들에 대한 평신도 계급의 승리’를 나타낸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공회 교회사가들은 이제 더이상 종교개혁을 ‘평신도의 혁명’ 또는 전반적으로 ‘평신도 승리’의 시대로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또한 평신도의 교회통치와 심지어 국왕의 수장권이 실제로 사용된 범위[정도]에 대한 그들의 평가를 완화시켰다. 확실히 1540년부터 1640년까지 주교들 중에서 무조건적인 통치권과 같은 것이 평신도에게 부여되었거나, 평신도에 의해서 획득되었다고 생각하는 주교는 거의 없었다. 교회치리에서 평신도의 실질적인 권한행사가 바람직한가에 대한 논쟁은 잉글랜드교회에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1927-8년 영국의회의 하원[평민원]에서 개정된 기도서를[제안 기도서라고 한다]를 거부하였을 때에, 그리고 보다 최근에 영국성공회 총회(synodal government) 안에 평신도원의 설립을 심의할 때에 다시 제기되었다.

    그러면 초기 종교개혁이 평신도들에게 남긴 유산에 대하여 보다 정확하게 수정된 평가는 무엇인가? 평신도들에 대한 잉글랜드교회의 기대를 형성하는데 어떠한 자극[동기]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가?

    튜더왕조시대 교회의 중요한 유산은 공동사회(commonwealth)라는 이상적인 사회적 비젼이었다. 즉, 공동사회 안에서 모든 신자[백성]들의 의무는 신앙생활의 모든 측면들을 연결시켰다. 에드워드 시대의 공식설교집(Homilies)의 복종(Obedience) 편은 이러한 비젼을 사회의 모든 계층을 포괄하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모든 계급의 백성들은 그들의 직업, 소명 그리고 직분에서 그들의 의무와 신분(order)을 임명[지정]받는다. 즉, 일부는 높은 신분으로, 일부는 낮은 신분으로, 일부는 국왕과 군주로, 일부는 하급자와 하인으로, 일부는 성직자로, 일부는 평신도로, 장인[고용주]과 도제로, 아버지와 아들로, 남편과 아내로, 부자와 가난한 자로.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 [...] 그렇지 않으면 집도, 도시도, 공동사회[왕국]도 계속 존속될 수 없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에서 직업(소명vocation)에 대한 신학은 루터의 ‘만인사제직’ (priesthood of all believers)을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선(charity)으로 결속된 직업[소명]들을 포괄한다고 주장하였다. 바로 소명을 이처럼 집합적으로 이해함으로써, 각 사람의 소명은 공동사회라는 사회적 상황 안에서 이해[규정]되었다. 이러한 비젼은 당대의 ‘위대한 책들’(Great Books)-모국어[영어] 성서, 성서해설서(특히 에라스무스의 성서해설서Paraphrases), 공식설교집, 교리교육서, 소기도서(primer), 공동기도서 그리고 가타 신심도서들-에서 지속적으로 충실히 반영되었다.

    튜더시대의 개혁가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사회에 대한 비젼을 당시에 획기적으로 발전된 인쇄술의 도움을 받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종교개혁은 대륙에서 그리고 후에 잉글랜드에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인쇄물들을 이용한 최초의 대중운동이었다. 대중적인 신앙소책자의 한 저자는 ‘이렇게 알기쉬운 책들이 이렇게 많이 인쇄된 적이 없었으며, 이렇게 저렴한 적이 없었다. 이는 마치 성령이 인간의 입속으로 자신의 선물들을 집어넣어 주는 것 같다’고 말하였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도덕률[prescripts확산 정착]들과 함께 인쇄문화의 도래는 모국어교육을 지향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촉진시켰다. 열렬한 개혁가이자 순교자연구가인 존 폭스는 인쇄술을 옛 신앙[종교]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격찬하였다.

    ‘주님은 그의 교회를 위하여 그의 기고만장한 적[대항자]을 굴복시키기 위하여 칼과 방패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에] 인쇄물과 저술과 책읽기로 활동하기 시작하셨다 [...] 따라서 교황이 학문과 인쇄물을 폐기시키거나, 아니면 인쇄물이 마침내 교황을 추방하여야 했다.’

    사실상 신생 인쇄산업은 뉴스를 확산시키고, 방법론[체계]을 형성시키며[만들며], 종교개혁의 과정을 따라다녔다.

    인쇄매체는 성서적으로 박식한 신앙의 가능성을 확대 심화시키고, 이로인하여 성서적으로 박식한 대중들에 대한 요구를 심화시켰다. 성서는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최고의[제1의] 권위였다. 1563년 39개 신앙조항에서도 성서는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읽을 수 없고 성서를 통해서 증명될 수 없는 것들은 요구될 수 없다’고 진술하였다. 성서는 중세기 세계의 한 부분이었다. 성서적인 이미지들과 이야기들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으며, 그 일례로 조각상들(statues)을 꼽을 수 있다. 토마스 크랜머는 이를 중세교회에서 ‘평신도의 책’이었다고 비난[폄하]하였다. 새로운 점은 (부분적으로 그리고 전체를) 모국어로 번역한 성서를 보급하였다는 것이다. 1530년대 이후부터 국왕과 교회당국의 명령문들은 영문성서를 모든 전도구교회에 배치하도록 지시하였다. 개혁가들은 계시의 언어는 평민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제는 1540년 큰책 성서(Great Bible) 제2판에 추가한 크랜머의 서문에서도 다시 반복되었다.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들의 책을 쓸 때, 모든 독자들이 그들의 의도와 목적을 이해하고 깨달아 이를 읽고 듣는 자들의 생활을 함양 또는 교정하기를 기대하였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은 성서를 그리스도교 생활의 기본적인 안내서로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중대한] 유산은 종교개혁이 전도구교회와 가정 그리고 학교에서 신앙적 양육(nurture)과 교육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종교]개혁가들이 선호하였던 단어들중 하나는 ‘교화’(edification)으로, 학습을 통해서 신자들의 단체[교회body]를 단련[증진]시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신앙심(piety)과 학식의 재연합을 구상하였다. 로터담의 에라스무스는 그의 성서번역을 소개할 때에 다음곽 같이 낙관적으로 선언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으며, 모든 사람들은 열렬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감히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모든 사람들은 신학자가 될 수 있다.’

    많은(전부는 아니더라도) 튜더 왕국민들은 집합[전체]적으로 말하자면 교육기관들의 ‘혁명’[혁명적 확장]을 체험하였다. 1570년대까지 전체적인 문자해득률은 모든 계층에서 급격하게(균등하지는 않았지만) 증가하였다. 초등(petty)과 중등(grammar)학교들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였으며, 또한 교육기관에 대한 자선기금도 엘리자베스시대에 30퍼센트나 증가하였다. 출판업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인쇄업자들은 인쇄된 설교집, 성서, 교리교육서, 소기도서[개인용 기도서],어린이와 어른을 위한 ABC[영어 읽고 쓰기], 가정과 개인의 신심생활 안내서들에 대한 꾸준한 수요, 그리고 신앙적인 논쟁서들에 대한 지속적인 수요에 의존할 수 있었다. 잉글랜드의 거의 모든 전도구교회들은 기도서를 정기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지방어에 의한 신앙교육의 유효한 지침[지표]을 제시하였을 것으며, 정기적인 설교는 신앙적 함양[신앙교육]의 중심[주요 특징]이었다. 평신도들의 신앙적인 지식을 증진시키려는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각 지역별 연구들-에섹스지방[도 셔]의 터링에 대한 연구처럼-은 문화적인 지평[인식]들이 변하였다는 증거를, 그리고 교육과 신앙에서의 차이점들에 근거한 문화적인 차별화가 증가하였다는 증거들을 제시한다. 한 역사학자는 ‘교육활동에 대한 평신도의 참여는 종교의 평신도화의 증가와 일치한다’고 강조하였다. 종교개혁이 교육에 끼친 전반적인 결과들은 인상적이며, 이는 ‘성직자들과 열성적인 평신도들이 신앙교육에 헌신적으로 노력하였음’을 나타낸다.

    전체 백성들에게 끼친 종교개혁의 특징들은 소명(직업vocation)과 성서와 교육의 확대 뿐만아니라, 공동사회(commonwealth)라는 포괄적인 사회적 비젼이었다. 이 모든 유산들은 성공회신앙의 지속적인 특성을 구체화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종교개혁의 파생물로 적어도 두가지를 꼽고 있다. 첫째는 ‘성사적인 말씀’의 사목을 강조하는 성직자의 전문성을 강화시켜다는 점이고, 둘째는 평신도들이 신앙문제에 대한 독특한 평신도 신앙의식을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사례로 많은(중간과 상류계급에서) 평신도들이 확신을 갖고 신앙문제에 대하여 성직자들과 논쟁하였다. 잉글랜드내전 직전까지 평신도들은 성직자들과 함께 하느님의 말씀에 의존하였으며, 또한 왕국교회의 미래에 대한 치열한 논쟁에 함께 참여하였다.

    2. 평신도와 교회: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교회론

    교회에 관한 신학[교회론]은 종종 평신도운동을 깊이 숙고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혼동[문제]의 한 원인은 1985년 연구서인 <All Are Called>에서 설명되었다. 즉, ‘평신도들의 첫번째 자리는 사회 전반이다(The primary location of the laity is in society at large). 교회의 성직자들과 평신도 교직자들은 대다수 평신도들이 오직 이차적으로만(only secondarily) 제도화된 교회에 자리한다는 사실[제도화된 교회는 이차적인 자리이다는 점]을 이해하고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사실에서 볼때, 교회는 기본적으로 또는 단순히 [제도화된] 기관(institution)이 아니라, 세상속에서 활동하는 집합적인 단체(corporate body)라고 강조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며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교회의 본질과 목적에 관한 신학, 즉 교회론은 평신도의 신학을 이해하는 토대이다. 헨드릭 크레이머(Hendrick Kraemer)에서 버너 도지어(Verna Dozier)와 부루스 리드(Bruce Reed)까지 실천신학자들은 교회 공직자들에게 교회론에 관심을 가질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하였다. 교회는 성서적 이미지들과 하느님의 본보기(전형 divine example)에서 세상중심적이었다. 16세기의 리처드 후커부터 20세기의 윌리엄 템플까지 성공회 신학자들은 세상이 당연히 교회의 작업장이라는 주제를 강조하였다. 후커는 그리스도교회를 신비적이지만 가시적인 몸[단체body]으로 사회에서의 상호친교(친목mutual fellowship)를 특징으로 한다고 말하였다. 템플의 경우, [그리스도]교회는 때때로 ‘활력없는 모습’이기도 하지만,‘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직접 활동하시며 당신의 목적을 수행하는데 사용하는 수단[도구]’이다. [그리스도]교회의 목적은 세상속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점에는 분명하게 일치한다. 크레이머가 단호하게 주장한 것처럼, 교회는 기본적으로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존재한다. 부루스 리드는 보다 분명하게 ‘교회의 목적은 세속적인 세계-(성전밖의 세계)-에 하느님의 나라의 특성들을 갖추게 하기 위하여 신자들을 준비시키는 곳’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진술[설명]들은 교회와 세상, 성과 속, 공과 사 사이의 지속적인 긴장관계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나 성공회 신학자들은 교회와 세상 사이의 인위적인 구분을 반대하였다. 예를들면, 윌리엄 템플은 그의 사목활동을 통해서 다음의 두가지 극단적인 입장들을 반박하는데 주력하였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덧없는 이 세상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입장과, 그리스도인들 현재의 이 세상에 전적으로 몰두하여야 한다는 입장. 그 대신에 그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이 세상에 참여하도록 강조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하느님의 봉사[사업]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았다. 아버지의 이름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거룩하게 하시고 [...]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신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참여하도록 명령하신대로. 우리의 신앙적인 관심사는 그곳이 아닌 바로 여기이며, 또한 구원이 성취되고 나타나는 곳은 그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다.'

    성공회 신학자들이 ‘영[성]적인’(spiritual) 그리고 ‘자연적인’(natural), ‘성스러운’(sacred) 그리고 ‘세속적인’(secular)이란 용어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이유는 이들중 하나를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긴장감을 솔직하게 지적하려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를 이 세상에 근거시키는 것은 성공회 신학의 핵심이다. 마찬가지로 성공회신학은 교회의 선교는 개인적인 의무가 아니라 교회 전체의 의무라는 점을 강조한다. 미국성공회의 신학자인 고 어반 홈즈(Urban Holmes)는 성공회 신자들이 그들의 소명(vocation)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고, 구체화시키는 방식에 대한 올바른 선택들로 집합적 인간(corporate person)이라는 히브리어 개념을 설명하였다. 사회적인 응답은 성공회 신자들에게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이에 대한 결정들은 한 사람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신자들의 공동역할을 강조한다. 홈즈는 특정한[개별적인] 우리 교회의 선교에 충실하면서도 그외의 문제들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갖는 현실적인 긴장감이 이러한 교회신학[교회론]에 포함되었다고 인식하였다. 이는 곧 교회가 잠정적이며, 지상[현 세상]의 도구이며, 그 자체로나 스스로 구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나다 성공회 신학자인 제임스 윌크스(James Wilkes)는 교회의 집합적인 신학이 어떻게 보다 건강하고 희망적인 응답을 권장하는지를 설명하였다. 그는 한 개인이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사회적 상황과 고립되어 행동하도록 권고받을 때에만 죄의식이 발생한다고 주장하며, 용기를 집단적인 사회적 행동으로 표현하였다. 즉, ‘용기는 우리에게 생활 속에서 신뢰를 주는 계약(covenant) 속에서 계속 살게하며, 우리들에게 진실을 말하도록 허락하며, 또한 우리들을 분명하고 상호적인[분명한 공동의] 기대를 갖는 관계로 결합시킨다.’

    평신도의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집합적이며 사회적으로 참여하는 교회론들은 항상 환영받지는 않는다. 이에 대한 저항들중 분명한 한가지-성공회 평신도에 관한 연구의 한 장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는 성직자주의(교권주의 성직자 중심주의 clericalism)이다. 성직자주의는 세속주의에 대한 잘못된 저항으로, 사회에서 벗어나 매우 한정되고 종종 오직 전도구교회의 상황에만 관심갖는 것으로 후퇴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성직자주의는 또한 평신도를 평가절하[과소평가]하고 성직자의 지위를 과대평가하여 서로를 무능하게 만드는 관계를 만든다. <All We Are Called>의 저자들은 성직자와 평신도들 사이에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성직자주의를 솔직하게 평가하였다. 즉, ‘성직자주의는 본질적으로 각 개인의 지위 그리고 그들의 소명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 사이에 나타나는 혼동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사회생활 속에서 형성되고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들은 또한 [성직자주의가] 평신도를 통제하며 교회의 선교를 제한하고 규제하려는 시도들을 지지하였다고 말하였다.

    세계성공회 공동체의 관구교회들은 교회치리[조직]에 평신도의 참여를 보다 확대하도록 주장함으로써 성직자주의와 싸우며 교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보다 확대하려고 노력하였다. 만약에 이것이[이러한 노력이] 특히 ‘평신도 사목자’의 정의를 기본적으로 제도화된 교회내에서 활동하는 자들로 규정한다면, 이는 성직자주의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 성직자주의적인 정신은 또한 치리조직(governing body)-물론 성직자와 평신도가 공동으로 치리조직을 만들었다 하더라도-에서 계속해서 번성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론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의 치리조직에 평신도를 포함시키는 것은 사회 전반에 대한 교회의 선교에 촛점을 맞추는 또다른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이 입장는 초기 성공회신앙의 주제들과 일치한다. 토머스 크랜머는 교구의회(diocesan synods)의 복원때에 평신도의 참여를 포함시킬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토머스 아놀드는 그의 책 <Principles of Church Reform>(1833)에서 첫단계로 일상적인 교회치리에서 평신도들에게 더 큰 역할들을 부여하는 것을 옹호하였다. 영국성공회 성직자회의들(Convocations)이 처음으로 [총회에] 평신도원을 설치하기로 동의하였던 1880년대 이후로, 오늘날 평신도원을 포함하는 총회기구[교구의회나 관구의회-역자]로 느리지만 꾸준하게 발전하였다. 미국성공회는 1784년에 비공식적으로 소집된 최초의 총회[Convention공회]에서 ‘교회법을 제정할 때, 성직자와 평신도가 공동으로 대표하는 기구 이외에 어떤 다른 권위체는 없다’고 선언하였다. 카나다성공회는 치리기구를 만들 때에 평신도의 참여를 의무화하였다. 평신도를 교회치리기구에 포함시키는 것은 오늘날 성공회신앙의 표준이다. 이러한 경향은 1968년 람베스회의에서 세계적인 성공회협의회(Anglican Consultative Council)를 설립할 때에 각 [관구]교회의 성직자 뿐만아니라 평신도 대표를 의무적으로 포함시킴으로써, 이러한 경향은 강력하게 표현되었다.

    교회의 치리기구들(synodal governments)와 람베스회의들을 언급하며 세상속에 있는 교회에 대한 집합적인 신학에 대한 논의를 마감하는 것은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하느님과 신자들과의 관계속으로 부름받는 백성들로 이해하기 시작함으로써, 성공회의 교회론은 사회에 기반을 둔 교회를 한시적이고 포괄적이며 응답하는 교회로 제시한다. 람베스회의, ACC,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들, 또는 종교간의 대화 등의 시각에서 볼때, 성공회신앙은 세상속에 있는 교회의 활동을 권장하는데 필요한 신학적인 보증[근거]들을 제공한다.

    3. 평신도와 성사들: 공동참여의 권능(power)

    교회에 대한 집합적인 신학의 완전성(integrity)은 라오스(Laos)의 활동(work)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사용되는 희랍어인 라오스는 예배를 위하여 모인 하느님의 백성들 전체(평신도와 성직자)를 말한다. 현대의 평신도운동이 20세기에 실행되었던 전례서개정에 의해서 시작되고 육성되고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미국성공회의 1979년 기도서, 영국성공회의 대안예식서(1980), 카나다성공회의 대안예식서(1985) 그리고 다문화와 다인종을 위한[문화와 인종의 다양성을 고려한] 뉴질랜드성공회의 기도서의 개발과 시험 그리고 실행은 확대되고 있는 평신도의 참여에 대한 신학적 전례적 정당성을 반영하였다. 카나다성공회 기도서에서 교리를 분명하게 밝히는 항목은 이러한 전례적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두번째 차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복합적이고 다양한 공동체를 구성하며 그 안에서 많은 다른 역할들과 기능들을 수행한다는 점을 점점 더 크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에 대한 이러한 비젼은 신약성서만큼 오래되었지만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으며, 그리스도교 역사의 긴 기간 동안에 확실히 약화되었다. 사제의 지도적인 역할과 평신도의 상대적인 수동성 사이에 분명한 구분이 있었다. 오늘날 교회는 전례 뿐만아니라 교회의 행정기구, 증언활동 그리고 봉사활동에서 많은 역할들과 기능들을 포함하고 필요로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더구나 lex orandi: lex credendi의 원리에 따라 성공회신앙에서 기도와 믿음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서 볼 때, 이러한 새로운 기도서들과 대안예식서들은 성공회의 미래 세대들을 더욱 다양화되는 세계속에서 활동하는 하느님의 전체 백성들에 대한 신학과 일치하는 전례적 표현들을 계속해서 제공할 것이다.

    전례서 개정의 이러한 원리는 초기 성공회신앙의 전례 중심성과 일치하며, 또한 이에 대한 복귀를 나타낸다. 튜더시대의 기도서들[49, 52, 59년 기도서]은 모든 백성들이 쉽게 사용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즉, 예배는 공동의 기도(일일기도common prayer)에 함께 참여하는 사제와 백성[신자]에 의해서 수행되는 것이었다. 성서적 성사인 세례와 성찬례에서, 크랜머는 먼저 세례의 재생시키는 물을 통한 그리스도에의 참여-‘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새로이 태어난다’-를, 그리고 라오스[하느님의 백성들]의 지속적인 성찬례 참여-‘우리는 영적인 음식으로 지속적으로 양육되며, 이 영적인 음식은 바로 그리스도이다’-를 통한 그리스도에의 참여를 강조하였다. 크랜머는 신앙으로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능력을 확신하였다. 따라서 백성들은 영성체후 기도에서 ‘우리들이 이 거룩한 공동체 안에 계속 있게 하시고, 당신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처럼 모든 선행들을 실천하게 하소서’라고 청원하였다.

    16세기말에 리처드 후커는 그의 대작인 <잉글랜드교회의 치리제도의 원리들에 관하여>에서 이 참여의 원리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을 제공하였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성사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성육신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그리스도는 우리를 우리는 그리스도를 서로 내적으로 붙잡는 것’으로 표현된다-고 믿으며, 또한 성육신의 목적은 하느님의 본성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여기서 후커는 인간을 신처럼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의미하는 일종의 상호관계[상호의존]의 실천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후커는 또한 메타노이아(metanoia 그리스도에로의 회심)-신자들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개심과정으로 신자의 생활을 개조하려는 용기를 준다-라는 신학적인 개념을 통한 참여의 중심적인 역할을 강조하였다. 메타노이아의 결과 신앙[믿음]으로 성사를 받는 자들의 생활에서 공적으로 표현되는 적극적인 자선활동이었다. 후커는 감사성찬례의 핵심적인 의도가 빵과 포도주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튜더시대의 기도서들과 후커의 신학적인 해설을 통해서, 성공회신학의 인간이해는 진정한 상호관계, 즉 하느님과 그의 백성들의 결속된 관계를 강조하였다. 오늘날 미국의 전례학자인 루이스 와일(Louis Weil)은 성공회의 전례를 글자 뜻대로 백성[신자]들의 활동(work of people)이라고 표현하였다. 그에 의하면, 예배와 기도는 참여자들의 행동에 의존하며, ‘우리는 모두 집례자들이다’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현대의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도 에드워드 쉴러벡스(Edward Schillebeeckx)의 저서에 근거하여 ‘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세대가 공동으로 집례한다”’는 고대시대[초기교회]의 가르침을 강조한다.

    19세기 후반의 성공회 신학자들도 성사적인 참여에 대한 인간의 적극적인 노력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운동의 예언자[선구자]인 프레드릭 데니슨 모리스(Frederick Denison Maurice)는 산업혁명으로 초래된 위기들의 핵심을 조사하면서, 후커와 다르지않게 성육신이 인간의 본질에 유익한 중심적인 신학적 주제라고 결론지었다. 인간의 근원적인[내재적인] 의로움(righteousness)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즉, ‘그 분[그리스도]을 떠나서 나는 내 안에 어떤 좋은 것도 살아있지 않다고 느낀다. 그러나 나는 그 분[그리스도]을 떠나 있지 않으며, 여러분 또한 그렇지 않으며, 어떠한 인간도 그 분을 떠나있지 않다고 나는 확신한다.’모리스는 성사들을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과의 통일성(unity하나됨)을 표현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즉, 세례는 모든 백성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나타내는 ‘항구적인 연합’(constant union)의 성사이며, 성찬례는 하느님이 ‘세계에 퍼져있는 그의 가족들과 지속적으로 현존한다’는 강력한 드라마를 반복적으로 나타낸다.

    <Lux Mundi>[룩스 문디, 세상의 빛](1889)이란 모음집에 기고한 젊은 앵글로-가톨릭 신학자들은 성사들의 사회적 중요성을 보다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프란시스 패짓(Francis Paget)은 세상에 성사들이 널리 퍼져있음을 강조하였다. 즉, ‘성사적 요소들과 행동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교는 생명[생활]의 전체에 대한 강력한 포괄적인 영향력을 유지한다.’ J. R. 일링워스(Illingworth)는 그리스도교의 성육신적인 중심성을 지적하였다. ‘성육신의 종교가 얼마나 깊이 인간의 종교가 되었는가를 느끼지 못하고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찰스 고어(Charles Gore) 또한 <Lux Mundi>에서 어떻게 성사들이 교회에서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 ‘사회적인 의식들’(social ceremonies), 즉 그리스도교 사회로 통합하는 수단이 되는지를 설명하였다. 고어는 이를 토대로 <The Reconstruction of Belief>(1926)에서 성사들의 사회적 본질에 대한 가르침을 발전시켰으며, 이 책에서 교회의 권위는 평신도의 활동인 도덕적 사회적 증언의 실천에 의존한다고[달려있다고] 주장하였다.

    20세기에 윌리엄 템플은 포괄적인 용어로 그리고 교회일치 활동에서 성사들의 사회적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였다. 템플의 경우, 세례는 메타노이아와 일치하는 개념인 이기심으로부터의 탈피[거부]를 의미하였다. 그는 당시의 사회에서 성찬례가 주는 사회적 구원의 영향력 뿐만아니라 사회적으로 창조적인 영향력을 주장하였다. 즉, 우리는 빵과 포도주를 우리의 산업화와 상업화된 생활의 상징들로 받으며, 또한 인류에 계속해서 봉사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나타내는 표현들로 빵과 포도주를 봉헌한다. 템플의 경우, 예배는 생활의 모든 것-즉, 인류를 승리할 세상과 연결시키는 모든 기도들과 성사와 중보기도-을 포함하였다.

    이들과 다른 성공회 신학자들은 정말로 성사들-정말로 그리스도교 예배의 전부-이, 튜더왕조의 공동사회에서나 복잡한 문화와 인종들로 구성된 후기 산업사회에서, 사회적인 응답을 장려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바로 이러한 방향이 새로운 전례서들의 중심주제들이다. 예를들면, 뉴질랜드 성공회의 세례서약(baptismal covenant)에서 후보자들은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며 [...그리고] 저의 일상생활과 활동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고통을 수락할 것’을 약속한다. 세례에서 그리고 성찬례에서 전례행동들은 세상속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신자들]의 사목직을 수행하는 자격을 부여하도록 고안되었다.

    4. 평신도와 사목직: 그리스도교 선교의 정신

    현대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평신도에 대한 이해들은 전통적인 언어에서 중대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미국성공회 기도서의 교리교육서는 ‘사목직’(ministry)을 역사적인 세가지 성직에 도전하는 것처럼 정의한다. 즉,

    질문. 교회의 사목자들은 누구입니가?
    대답. 교회의 사목자들은 평신도, 주교, 사제, 그리고 부제입니다.

    북아메리카의 그리스도교회들에서 그리고 교파와 초교파적인 진술문들에서, 이 단어는 이제 ‘평신도 사목직’(평신도사역lay ministry)를 언급하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이러한 표현은 중복되고[불필요하고] 어색하다. ‘평신도’라는 말은 보조적인 신분(second-class 2류계급)이라는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의회의원이자 미국성공회의 오랜 총회대의원이었던 바이런 러싱은 이런 질문을 묻곤하였다. 만약 사람들이 다른 의사의 소견(second-opinion)을 듣고자 한다면, 누가 ‘평신도 의사’(lay doctor)를 찾아가겠는가? 더구나 대다수 평신도들은 좋은 의도라 하더라도 스스로를 ‘사목자’라고 부르기를 꺼린다. 정말로 페트리시아 페이지의 최근 책 제목인 <All God’s People Are Ministers>[하느님의 모든 백성들은 사목자들이다]처럼 평신도의 ‘사목직’으로 언급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건전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상은[평신도들은 이 용어를 회피한다]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평신도들이‘사목자’라는 점을 설득시키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기본적인 목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상생활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21세기의 지구촌에서 사목직의 정확한 순서[서열]는 확실히 후기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평신도의 윤리적인 증거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신학적인 용어의 변경에도 불구하고, 성공회신앙은 평신도들에게 교회의 선교를 담당할 책임이 있음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여전히 이러한 과제가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평신도의 활동이 가끔씩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부흥(revival)과 개혁 그리고 선교의 활동이었다는 사실은 교회의 역사에서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현지인선교를 주장하였던 롤랜드 앨런(Roland Allen 1868-1947)은 교회가 자발적인 확장의 힘인 성령의 폭발[인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신약성서의 모델을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성공회의 역사에서 이러한 집합적인 추진력에 대한 사례는 아주 풍부하다. 18세기의 복음주의 단체들 즉, 1799년에 설립된 국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y Society)와 1892년에 설립된 초교과적인 기독학생운동(Syudent Christian Movement)과 같은 조직들; 19세기 미국성공회의 국내외 증거[선교]활동을 확대하면서 나타난 강력한 평신도 지도력의 전통, 특히 여성의 지도력(극소수만이 공적으로 고위직을 차지하였지만); 그리고 20세기에 들어 1950년대와 60년대 동안에 식민지체제의 종식으로 아프리카의 성공회들에서 토착[현지] 지도력의 급격한 팽창.

    교육적 기관들의 확대는 오랫동안 성공회 평신도들의 목표였다. 주일학교운동 (Sunday School Movement)은 미국에서 신앙교육과 공교육(학교교육public education) 두가지 모두를 구체화시켰다. 미국의 교회들에서 이러한 19세기의 선교전략이 이끌어냈던 에너지와 열기를 과소평가하기는 어렵다. 북미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영국에서도 그리고 세계성공회 공동체에서도, 교육에 대한 기여활동은 학교와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들의 설립을 지원하였다. 평신도들은 보이 스카우트와 걸 스카우트와 같은 조직들을 시작으로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활동을 후원하는데 효과적이었으며, 또한 1903년 잉글랜드에서 설립된 노동자 교육협회 그리고 미국의 정착촌운동에서 성인교육을 옹호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0년대 동안에 미국의 그리스도교[기독교] 교육은 또다시 많은 미국성공회 전도구 교회들에서 중심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세계성공회 공동체 내에서 평신도들은 학구적인 성직자보다는 교육적인[교육받은] 교회라는 비젼을 권장하였다.

    오늘날의 평신도운동은 크게 확대된 성인교육 기관들의 지원을 받고있다. 즉, 평신도 신학교육, 교구의 평신도 훈련과정들과 학교들, 성직후보자들뿐 아니라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전문적인 학위를 수여하는 신학교육과정, 그리고 평신도를 위한 사목적 돌봄[사목과정]과 다른 특별한 선교활동을 위한 훈련과정. 이 프로그램들에서 평신도교육의 공급자들은 종종 평신도들이다. 오늘날 이들 중에서 최고는 Education for Ministry(EFM)[평신도 통신과정]으로, 평신도를 위한 4년제 정시제(비정규part-time) 학습프로그램으로 지금까지 15,000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12개국으로 확장하고 있다. 1985년 영국성공회의 보고서인 <We Are Called>는 교육에 대한 이러한 강조점의 변화를 ‘성인 그리스도인들의 책무는 지식에 근거한(informed) 책무를 의미한다. 이는 충성스런 양이[신자가] 되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설명하였다. 제도화된 교회는 평신도의 사목에 대하여 수년동안 말로만 주장한 후에, 이제야 평신도의 지속적인 교육을 위하여 신중한 프로그램들을 제공하기 시작하고 있다. 미래에 나타날 교회선교의 완전성은 사회전반에 대한 교회선교의 자발적인 확대에 달려있다. 이러한 현재의 도전을 고려할 때, 확대되고 있는 세속주의를 신앙적인 책무의 감소와 결부시킬 필요는 없다. 이는 종교개혁 시대에서도 사실이 아니었으며, 오늘날에도 사실일 필요가 없다. 정말로 최근에는 제도화된 교회들 밖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사목활동들을 다루는 교육기관들과 훈련과정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이 때에 신학자들은 또다시 활동(work)의 의미에 집중하였다. 예를들면, 윌리엄 디얼(William Diehl)은 <The Monday Connection>에서 일터에서의 사목에 대한 이야기와 요령들을 제공한다. 이와 비슷하게 카나다의 그레이엄 터커(Graham Turker)도 <The Faith-Work Connection: A Practical Application of Christian Values in the Marketplace>에서 그리스도교 원리들과 경영력의 통합[결합]을 강조한다. 그리고 로버트 리버(Robert Reber)는 <Living Faith and Daily Life: An Educational Program for Lay People>에서 소집단과 전도구교회의 학습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작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오늘날에는 일상생활에서 평신도들을 양육하려는[성숙, 교육시키려는] 영성적 교육자료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영성’ (spirituality)이란 용어는 상대적으로 최근에 만들어졌지만, 평신도 신비론자들 (신비주의자들lay mystic), 시인들, 그리고 신학적인 예견가들(visionaries)-노리치의 줄리안에서 에버린 언더힐(Evelyn Underhill)까지, 월트 위트만(Walt Whitman)에서 애니 딜라드(Annie Dillard)까지, 그리고 리처드 후커에서 도로시 죌레(Dorothy Sölle)까지-은 수세기동안 이 세상에서 영성적인 여정들에 관하여 신앙인들을 감동시켰다. 이들과 그외 영성적인 ‘고전들’의 다른 저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에게 몰두’하도록 강조하였으며, 또한 하느님의 백성들이 집합적으로 이 세상에 개입하며 사회적으로 응답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전통을 따라서 미국성공회 사제인 브라이언 테일러(Brian Taylor)는 베네딕트 수도회의 영성-기도, 연구 그리고 활동[일]의 균형-을 일상적인 생활의 토대로 전환시켰다. 한편으로 캐롤라인 웨스터호프(Caroline Westerhoff)는 세례의 영성적인 위력에 대한 이해를 평생동안 간직하도록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제공하였다. 이들과 다른 저자들은 이 세상에서의 신실한 생활에 관심을 갖는 윤리적이며 일상적인 그리스도교 영성을 강조한다.

    1998년 람베스회의를 위하여 선별된 주제들중 하나는 ‘다원화된 세계의 신앙적 요구’(call to be faithful in a plural world)이다. 이러한 요구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버너 도지어(Verna Dozier)가 말하는 ‘제도적인 교회에서 서품받은’(institutionally ordained) 자들뿐 아니라 평신도의 사목자들 사이의 관계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천년에서 나타날 도전들을 예상할 때, 하느님의 집안에는 확실히 2등시민이 있을 수 없다. 우리들을 미래로 안내할 정신, 즉 그리스도교 증거의 정신, 본질은 무엇인가? 평신도에 대한 성공회의 전통적인 시각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세계성공회 공동체에서 평신도의 다양하고 서로 다른 미래들을 위하여 신학적인 자양분을 지속적으로 공급[제공]할 것이다. 예를들면, 인간에 관한 신학은 사회적인 토대위에서, 하느님에 속한 책임적인 존재라는 성육신적인 유산으로 활력을 얻을 것이다. 예배와 기도는 교육수준 또는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될 것이며, 교육과정들은 확대되고 우리와 함께 배우는 자들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구체화될 것이다. 또한 영성적으로 초교파적인 정신을 가진 교회의 선교는 다양한 시각들과 신앙들과 문화들을 지닌 사람들과 함께 미지의 영역을 개척할 것이다. 이러한 교회에 참여함으로써, 성공회의 평신도들은 일상속에서 거룩함을 계속해서 발견할 것이며, 진리는 인간적인 사건들의 모형들에서, 즉 과거와 미래의[오래되고 새로운] 집합적인 증언들에서 스스로 드러낸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반적인 사람[신자]들은 모두 계속해서 비범한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을 것이다.

    참고문헌

    All are Called: Toward a Theology of the Laity. CIO Publishing, London, 1985.

    The Calling of the Laity: Verna Dozier’s Anthology. Alban Institute, Washington DC, 1988.

    Diehl, William E., The Monday Connection: On Being an Authentic Christian in a Weekday World. Harper Collins, San Francisco, 1993.

    Page, Patricia N., All God’s People Are Ministers: Equipping Church Members for Ministry. Augsburg Fortress, Minneapolis, 1993.

    Sachs, William L., The Transformation of Anglicanism.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93.

    Thompsett, Fredrica Harris, We Are Theologians: Strengthening the People of the Episcopal Church. Cowley Publications, Cambridge, Massachusetts, 1989.

    Westerhoff, Caroline A., Calling: A Song for the Baptized. Cowley Publications, Cambridge, Massachusetts, 1994.

    2012년 6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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