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번역 프로젝트 자료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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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회 입교례의 이해
    (Initiation)
    David R. Holeton

    성공회신앙에서 그리스도교 입교례 모형(pattern)-세례, 견진례 그리고 첫 영성체-의 변화[발전]과정은 신학적인 이해와 신자들의 신심 사이의 지속적인 긴장관계이라는 상황에서 볼 때에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지난 몇십년 전까지 신자들의 신심은 거의 항상 승자로 나타났다[입교례는 거의 항상 신자들의 신심에 좌우되었다].

    1. 16세기의 개혁

    토머스 크랜머와 잉글랜드교회 개혁가들이 물려받은 중세기교회 세례의 관행[실제] (practice)과 전례적 양식들은 세례관행과 세례신학의 긴 퇴화과정 중에서 최악의 상태였다. 초기교회 시대(patristic)에서 유래된 세례양식들은 장기간에 걸친 세례 준비과정(세례준비자 과정catechumenate) 다음에 단기간의 집중적인 최종 준비과정 (사순절), 그리고 부활절 전야(Easter Vigil)(이런저런 이유로 세례를 받을 수 없었던 후보자들은 성령강림절)의 세례예식으로 완결되었다. 당시에 세례후보자들은 어른들과 유아들이었으나, 대다수가 어른 후보자들이었다. 이러한 준비과정과 세례예식에서 생겨난 여러가지 의식들(rites)-구마의식, 도유의식(anointing), 심사의식(scrutinies)[세례후보자의 최종심사의식],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의 수여, 십자성호긋기, 성유의식(chrismation), 세례옷 입히기, 촛불 수여-은 세례후보자들-특히 어른후보자들-에게 신학적으로 풍부하고 복합적인 세례신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이 물려받은 양식들은 과거의 복합적인 예식을 희미하게 보존한 양식들이었다. 장기간, 특히 수년에 걸쳐 [나누어] 거행되었던 예식들은 이제 단 한차례의 행사로 압축되었다. 세례받지 않고 죽은 자들의 운명에 대한 어거스틴의 이해의 확대해석과 그리스도교국(Christendom)의 승리는 세례후보자들에서 어른들을 성공적으로 소멸시켰다. (이제 모든 세례후보자들은 유아들이었다.) 따라서 어른후보자들에게 사용될 때에 의미를 가졌던 예식들은 이제 갓 태어난(일주일 이내) 유아후보자들에게 사용되었다. 이제 교회는 세례예식을 (가능하다면) 유아의 출생 직후에 거행하도록 권장하였기 때문에, 세례예식의 거행빈도를 제한함으로써(임종자의 세례는 예외로) 강조되었던 입교례의 공동체적인 성격은 점차 사라지고 말았다. 마침내 그리스도교 입교례의 본질적인 통일성[단일성](물의 세례, 확증(sealing)/안수, 영성체참여)은 이제 여러 해에 걸쳐 거행하는 세가지 예식-세례, 견진례, 첫 영성체-으로 분리되었다. 종교개혁가들은 개혁을 단행할 때에 이러한 역사적 신학적인 문제점들을 모두는 아니더라도 일부를 인지하였다.

    크랜머가 개정한 첫번째 세례양식(1549)은 마틴 루터와 울리히 쯔빙글리의 첫번째 개정예식들처럼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다. 이 예식의 구성[구조]은 기본적으로 잉글랜드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던 솔즈베리 예식서(Sarum Manual)(Rituale)의 그것이었다. 이는 중세말기의 전형적인 세례예식이었다.

    크랜머는 이 예식을 개정할 때에 일부 기도문들(영어로 번역)과 의례들 (십자성호긋기, 악령의 구마식, 성유식, 세례옷 수여식)을 보존하고, 다른 기도문들과 의례들(소금 구마식, 에파타, 손에 십자성호 긋기, 가슴에 도유하기, 촛불수여)은 삭제하였다. 여기에 크랜머는 루터, 헤르만 본 비드(Herman von Wied)의 <교회개혁 제안서>(Consultation), 스페인 지방교회의 <Missale Mixtum>[완전한 미사경본으로 1500년 인쇄]에서 빌려온 본문들을 추가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개정된 예식은 외형적으로 종교개혁가들이 가장 싫어하였던 ‘애매하고 의미없는 의식들’(dark and dumb ceremonies)만을 삭제한 중세말 예식과 거의 일치하였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랜머가 외형적인 개혁 이상을 시도하였다는 분명한 표징들이 나타난다. [개정된 예식의] 첫번째 지시문을 보면, 크랜머가 적어도 초기교회 세례의 실제[관습]를 어느정도 알고 있었으며, 또한 그는 초기시대 예식의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초기시대의 통찰[의미]들중 일부는 제대로 복원될 수 있다고 나타낸다. 먼저 가능하다면 세례는 지역의 모든 신자들이 모이는 때인 주일이나 성일들[대축일들]에 거행하도록 규정하였으며, 둘째로 이러한 공적인 세례예식의 거행은 참석한 기존의 세례신자들에게 그들의 세례를 상기시키는 회상사건(rememorative event)으로 기여하였다. 또한 크랜머가 성유의식(chrismation)에 사용한 본문은, 세례와 견진례를 고려할 때, 적어도 초기교회의 단일한 [입교]예식을 복원하려는 의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것이다.

    1549년 기도서는 견진례라는 명칭으로 독립된 예식을 포함하였다. 이 예식의 모델은 솔즈베리 예식서(Sarum Manual)에 나오는 시세식[세례의식]후의 두번째 도유의식(second post-baptismal anointing)이 아니라, 이전 세기[15세기]에 발생하였던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좌파[급진파 Unitas Fratrum]의 교리교육적인 예식(catechetical rite)에 뿌리를 두었다[근거하였다]. 이 새로운 예식은 세례후보자들이 먼저 신경과 십계명과 주기도문뿐 아니라, 교리교육서[견진예식에 첨부되었다]에 수록된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세례때에 대부모들이 대신 대답한 질문들을 ‘인준하고 고백하도록’ 요구하였다. 주교만이 집례하도록 제한된 이 예식은 어린이[유아세례자]들이 ‘죄에 빠질 위험이 시작되는 나이에 도달하였을 때’에 시행하도록 규정하였다. 이 예식의 효능(effect)은 ‘죄의 유혹들, 세상의 모든 불의들[악한 권세들], 그리고 악령과 싸우기 위한 용기[능력]과 방어능력을 주는 것’이었다.

    이 [견진]예식의 마지막 지시문은 ‘누구도 견진례를 받기 전까지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첫 지시문의 마지막 절은 유아가 성찬을 배수하지 못하고 사망할까봐(당시에 성찬배수는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인식하였다) 견진례를 연기하지 않으려는 자들의 걱정을 달래려고 시도한다.

    ‘누구든지 견진례를 연기함으로써 어린이들이 어떠한 불이익[손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하야 한다. (유아기에 이 세상을 떠난다 하더라도) 세례받은 어린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확인된 진리라는 점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1549년 세례예식의 신학적인 내용은 기본적으로 중세기 서방교회의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근본적인 신학적 관심은 원죄의 용서(forgiveness of sin)였다. 이 예식의 첫 마디는 이러한 의미를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모든 인간은 죄를 잉태하여 태어나며, 죄로 태어난 인간은 (회심하여[재생되어regenerate] 물과 성령으로 새로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당시 서유럽 다른 교회들의 세례예식들처럼, 세례의 다른 이미지들-예를들면 성령의 수여, 빛의 받음(enlightenment), 종말론적인 왕국에의 참여 등-은 완전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거의 없었다. 따라서 크랜머의 첫번째 개정양식은 신학적으로나 전례학적으로 변화보다는 연속성을 특징으로 하였다. 크랜머는 대다수 신자공동체가 함께 모일 수 있는 특정한 날에 공적인 세례예식을 거행하기를 분명하게 선호하였지만, 출생 직후에 거행하는 사적인 세례(private baptism)[공적인 예배가 아니라 가정집에서 세례예식을 거행하는 행사를 말한다]는 일반적인 관습으로 지속되었다. 가정에서 거행하는 사적인 세례양식을 포함시킨 것은 개혁적인 주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쉽게 변하지 않는 대중적인 [세례]관행에 대한 중대한 양보였다.

    마틴 부처는 그의 책 <Censura> [1549년 기도서에 대한 평가와 제안-역자] 에서 입교례의 분야에 대한 크랜머의 첫번째 개혁을 전반적으로 찬성하며, 특히 전 교인들이 모이는 대축일에 세례예식을 거행하도록 규정한 크랜머의 노력을 칭찬하였다. 크랜머의 새로운 견진례 또한 전반적으로 승인하면서, 이 예식을 [누구에게나] 자동적으로나 기계적으로 거행할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을 행동으로 일치시키고 다른 사람[대부모]이 아닌 자신이 직접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후보자들로 한정하여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부처는 1549년 세례양식의 개정와 수정을 제시하였다. 특히, (1)세례는 아침기도나 저녁기도 보다는 [감사]성찬례에서 설교후에 거행되어야 한다. (2)솔즈베리전례/중세예식의 구성처럼 교회의 문앞에서 거행하는 예식 초반부는 반드시 교회 안에서 거행되어야 한다. (3)세례옷과 성유의 사용을 폐지하여야 한다. (4)세례물을 축복하지 말아야 한다. (5)유아는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유아에게 아무 것도 묻지 말아야 한다. (6)구마의식은 귀신들린 사람들에게만 시행하는 것이 적합하며, 따라서 이 기도는 보호를 위한 기도로 변경되어야 한다.

    크랜머는 두번째 기도서(1552)의 세례예식을 개정할 때 부처의 제안들을 깊이 고려하였다. 이제 전체 예식은 [감사]성찬례가 아닌 아침기도나 저녁기도 중에 세례반(font) 앞에서 거행되며, 십자성호긋기, 구마의식 그리고 대부모들의 주기도문과 신경의 반복낭독을 생략하였다. 세가지 거부[선언]와 세가지 신앙고백은 각각 단 하나의 문장으로 축약하였다. 즉, 중세교회의 예식에서 질문과 답변인 ‘당신을 무엇을 원합니까?’-‘세례입니다’와, ‘당신은 세례를 받고자 합니까?’-‘그렇습니다’라는 문구를 단 하나의 질문과 대답인 ‘당신은 이 믿음 안에서 세례를 받고자 합니까?’- ‘이는 저의 마음입니다'로 축약하였다. 세례반에 대한 축복기도문을 반으로 축소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더 이상 축복기도가 아니었다. 축소된 기도문은 1549년 양식처럼 한달에 한번이 아니라 매 세례때마다 사용하는 것이었다. 아이의 이름을 거명한 후에, 건강한 아이의 경우 세례공식문(baptismal formula성세양식)을 낭독하면서 침례한다(이제 세번이 아닌 단 한번만 실시한다).세례옷 수여[입히기]와 성유식은 삭제하였으며, 대신에 사제는 유아의 이마에 십자성호를 긋도록 규정하였다. 바로 이 지점은 중세의 솔즈베리 세례양식의 두번째 도유식 또는 ‘견진례’의 도유의식을 시행하는 순간이었다. 십자성호긋기를 시행할 때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우리는 이 아이를 그리스도의 자녀들의 공동체로 받아들이며, 이제부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신앙을 부끄러움없이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깃발아래 죄와 세상과 악령에 용감하게 대항하며, 생명 끝까지 그리스도의 충실한 전사이자 종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아이에게 십자성호를 긋는다. 아멘.’

    개정 양식은 출석한 신자들에게 새로이 세례를 받은 자가 ‘재생받아(regenerate) 그리스도의 몸인 회중들에 결합되었음’을 하느님에게 감사[기도]하라는 초대문(biddings)을 추가하였다. 예식은 주기도문, 또 하나의 감사기도, 그리고 대부모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재확인시키는 권고문으로 마감하였다. (대부모들은 대자녀들이 신경과 주기도문, 십계명 뿐만아니라 그 밖의 사항들을 영어로 배우며, 아이들을 신앙적으로 양육하며, 견진례를 받기위하여 주교에게 출석하는 것을 감독한다.)

    1552년 개정기도서의 견진례는 몇가지 중요한 변화를 포함하였다. 솔즈베리전례 양식을 영어로 번역한 기도문-견진후보자에게 성령을 보내달라고 하느님께 요청하는 기도-은 이제 수정되어, 후보자에게 ‘용기를 주고’ ‘성령의 다양한 은총의 선물들(manifold gifts of grace)이 후보자들에게 매일매일 증가되어’ 후보자를 ‘강건하게 만들도록’ 요청한다. 십자성호긋기와 이에따른 기도와 공식문은 삭제되었으며, 이제 주교는 각 어린이[후보자]의 머리에 손을 얹고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오 주여, 이 아이를 당신의 천상의 은총으로 보호하시고, 영원히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당신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당신의 성령 안에서 매일매일 더욱더 성장하게 하소서. 아멘.’

    견진례에 대한 교리교육적인 이해는 영성체의 허용에 관한 지시문을 확대함으로써 강조되었다. 이제 성찬참여자들은 견진후보자들처럼 신경과 주기도문, 십계명 뿐만아니라 교리교육서를 암송할 수 있어야 했다.

    1552년 기도서에 수록된 입교례 예식들은 이후 400년동안 성공회신앙의 기본적인 입교례였다. 양식들 자체는 다음 세기에 조금씩 수정되었지만, 그 구성과 내용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1604년에 개정된 기도서는 퓨리탄들의 압력에 대응하여 사적인 세례의 거행조건을 규제하였으며, 비상시의 세례예식을 ‘합법적인 사목자’(lawful Minister)만이 거행할 수 있도록 제한하였다. 1662년 기도서는 대부모의 수를 제한하고, 세례물의 축성기도를 규정하며, 그리고 성찬참여자들과 견진후보자들에게 교리교육서의 암송을 더이상 요구하지 않고, 다만 ‘견진를 받았거나, 받고자 준비하는 자들’에게 성찬참여를 허용하였다. 또한 이 기도서는 급진개혁파 (재세례파)와의 논쟁들과, 증가하는 식민지들의 선교적 상황을 고려하여 ‘성년[어른]후보자들을 위한 세례예식’(baptism of such as are of riper years)을 제정하였다.

    따라서 유아세례, 십대에 받는 견진례 그리고 첫 영성체는 입교례의 표준적인 모형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세계성공회 공동체의 많은 교회들에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모형-분명히 성사의 생물학적인 모델(세례=탄생, 견진=성장 등등)을 가정한다-은 교회 안팎의 공격을 받으면서 신학적으로나 의례적으로 확고히 정착되었다. 퓨리탄뿐 아니라 급진개혁가들은 이 예식이 ‘교황파 의례들’(popish ceremonial)을 보존하고 있다고 공격하였으며, 특히 대부모제와 십자성호긋기의 보존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17세 동안에는 무엇보다도 유아세례의 문제에 대한 논쟁이 확대되고 매우 신랄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공화정 시대(Commonwealth) 직전부터 시작하여 그 동안에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이 논쟁은 국교회[성공회] 신학자들에게 기존의 [국교회] 성사의 생물학적인 이해 뿐만 아니라 세례와 첫 영성체의 분리에 대한 정당성의 문제를 다시 검토하도록 요구하였다.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후에 다운과 코너교구의 주교가 됨-는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자들을 ‘재세례파’라고 비하하는 것처럼 유아의 영성체를 거부하는 자들의 [비하]명칭을 만들어야 한다고 논평하였다. 왕정의 복원으로 이러한 급진적인 사상은 곧바로 종식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논쟁은 국교회[성공회] 신자들에게 그들의 신앙활동(practice)의 정당성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퓨리탄들과 급진적인 독립교회파들(independents)이 반대하였던 의례(ceremonial)는 이제 국교회[성공회] 정통성의 시금석[표준]으로 확고하게 정착되었으며, 재세례파들의 논박으로 양보하였던 신학적인 이해는 찰스2세의 왕정복원과 함께 곧바로 망각되었다. 즉, 논쟁은 결국 쟁점이 되었던 의례들과 신학적인 입장의 정당성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후 수세기 동안에 가장 타격을 입은 입교례 예식은 바로 견진례였다. 19세기초까지 복음주의 부흥운동(Evangelical Revival)에서 유래된 엄격한 성직자 당파성(신앙적 성향churchmanship) 때문에 견진례는 준수되기 보다는 자주 무시되었다. 잉글랜드의 경우, 이 문제에 교구의 크기도 포함되었지만, 주교들의 비거주(non-residency)도 심각한 문제였다. 해외[잉글랜드 밖]의 경우, 1785년까지 영국제도[섬들] 밖에는 성공회 주교들이 없었기 때문에 주교의 부족이 문제였다. 따라서 누구나 견진을 받으려면, 영국(United Kingdom)까지 길고도 위험스런 여행을 각오하여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누구도[어느 주교도] 견진례를 거행하는 권한을 [사제에게] 위임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는 견진례를 무시하는 것 만큼이나 주교의 권한을 고귀하게 인정하는 것이었다. 19세기초 이후로 견진례는 매우 중요하게[엄격하게] 준수되었으며, 이전 세기들 동안에 알 수 없었을 정도로 성공회신심(Anglican piety)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2. 전통적인 모델의 위기

    입교례의 전통적인 모형은 성공회신앙이 계속해서 그리스도국가라는 상황에서 존속하는 한 잘 적용되었다. 세례는 그리스도교 사회를 양육시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양육시킨다는 이 모형의 기본적인 가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성공회신앙이 주류[다수파]를 구성하는 지방[나라들]에서 여전히 유효하였다. 견진례가 새로이 중요하게 인식된 이후부터, 세례받은 자들과 후에 견진받는 자들의 숫자상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세례와 견진례는 둘다 대중적인 신앙(popular or folk religion)에 깊이 뿌리내렸으며, 부모들이나 대부모들은 세례받은 자녀들이 이후 13년 동안 신앙활동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중에 견진례 교육에 출석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까지 이러한 입교례 모형은 급격한 변화를 겪기 시작하였다. 세례받은 자의 수와 이들중 견진례를 준비하기 위하여 돌아온 수의 차이는 급격하게 증가하였으며, 또한 신앙활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견진신자들의 수도 급격히 감소하였다.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이탈현상은 견진례 직후에 주로 발생하며, 많은 어린이들은 견진례를 신앙교육 뿐만아니라 교회로부터의 졸업으로 인식하였다. 전통적인 모형은 무너지고 있었으며, 중대한 관심사가 되었다.

    3. 입교례의 새로운 모형의 등장

    1968년 람베스 [주교]회의에 제출된 ‘신앙 안에서 교회의 쇄신’(the Renewal of Church in Faith)에 관한 주요한 보고서는 성공회 기도서들에서 포함된 입교례의 전통적인 모형에 관하여 점점 늘어나고 있는 관심을 반영하였다. 교회와 그 구조의 쇄신에 관한 보고서의 한 항목에서 주교들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우리는 성직자의 서품예식과 유사한 평신도의 위임예식의 부재에 주목하며, 결의문(Resolution) 25[아래에 서술]는 이의 필요성을 해결하도록 권고한다. 우리는 다음의 대안들을 가능한 실험들로 추천한다.

    (a) 성찬참여의 허용과 견진례를 분리시킬 것. 즉, 세례받은 어린이가 적절한 나이에 이르면 적절한 교육후에 성찬참여를 허용한다. 견진례는 어린이들이 어른으로서 책임감을 보이고,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임무를 위임받고 확언받기를 원할 때까지 연기한다.

    (b) 유아세례와 견진례는 동시에 실시하며, 가까운 장래(early age)에 적절한 교육후에 성찬참여를 허용한다. 이들이 책임적인 임무를 수행할 때에 이르면, 당연히 주교는 이들에게 봉사를 위촉한다.

    이중에서 첫번째 대안의 실험은 특히 (a)믿는 자의 세례를 지키는 교파, 그리고 (b)교회일치를 위한 정교회와의 대화에서 이러한 분리의 의미를 자세히 검토하도록 요구한다. 두 교파 모두에서 세례와 견진례와 성찬참여의 밀접한 관계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결의문 25. 람베스 주교회의는 각 관구나 지방교회들이 평신도들이 갖는 세상에서의 임무를 위임할 필요성과 관련하여 세례와 견진례의 신학을 탐구하고, 이를 실험할 것을 추천한다.'

    이 보고서, 그리고 특히 결의문 25는 1968년 람베스회의 이후로 세계성공회 공동체에서 입교례 관행을 쇄신하기 시작한 출발점으로 평가할 수 있다.

    많은 관구들의 교리위원회들과 전례위원회들은 세례와 견진례의 신학의 탐구에 대한 주교들의 요청에 빠르게 응답하였다. 상당수 위원회들은 람베스회의의 발표문(statement)을 중요한 계기로 인식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전례서 개정작업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종교개혁 이후로 성공회의 전례본문들을 가장 과감하게 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50여년 동안에 발표된 그리스도교 입교례에 관한 상당한 분량의 학문적인 연구들-이중 상당수는 성공회 학자들의 논문이었다-은 이러한 신학적 전례적인 탐구를 크게 강조하였다. 과거에 성공회 학자들(크랜머 포함)이 알 수 없었던 입교례 양식들의 단일성은 이제 역사적 연구로 분명하게 이해되었다. 세례의 신학적 의미-특히 성찬참여와 관련하여-는, 이전에는 몰랐지만, 매우 중요하였다. 많은 교리위원회들은 세례와 견진례 그리고 영성체를 하나의 통합된 양식으로 복원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렇게 통합된 양식에서 안수 또는 성유식을 받은 모든 세례신자들은 성찬의 친교[영성체]에 참여한다. 이러한 입장을 대표하는 웨일즈성공회의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론내렸다.

    ‘입교례[세례, 견진례, 첫 영성체]를 연속적 단계들로 나누어 다른 시기에 시행하거나, 또는 서로 독립된 예식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커다란 신학적인 혼동을 초래한다. 이것은 바로 서방교회가 물려받은 그리스도교 입교례의 분리된 형식이 신학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이유이다. 이러한 분리는, 사실상 무의미하지는 않더라도, 신학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가짜문제들(pseudo-problems)을 낳는다.

    특히, 우리는 ‘견진례’로부터 분리된 ‘세례’ 또는 ‘세례’와 분리된 ‘견진례’에 대한 설득력있는 신학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 이제부터 우리는 원죄의 용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의 신비적인 참여, 거듭남[재생regeneration] 그리고 성령의 선물을 단일한[단 하나의] 존재론적인 지위변화에 대한 대안적으로 부분적인 설명들이라는 분명한 사고가 필요하며, 이러한 지위변화는 취급하여야 한다. 이러한 지위변화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신자로서 성찬에 참여하는 특권을 부여한다.’

    전례위원회들은 이처럼 그리스도교 입교례의 새로운 패러다임(표본paradigm)을 탐구하면서 단 하나의 통합된 입교례 양식들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 새로운 양식들은 입교례에서 주교의 참여[역할]문제로 심각한 반대를 받았다. 많은 주교들은 관구의 신학위원회가 설명하는 원칙들을 수용하면서도, [새로운 양식에서 전례적으로] 그들의 역할이 거의 없는 입교례 모형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극히 소수의 주교들만이 지역 신앙공동체의 사목활동을 위임받은 사제가 거행하는 모든 세례예식에서 주교의 역할을 개인적으로(personally) 대리한다는 주장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일부 주교들은 입교예식에서 주교가 축성한 성유를 의무적으로 사용한다면 이러한 위임을 수용하려고 준비하였다. 이러한 반대의 뿌리는 주교직의 문제였다. 즉, 오랫동안 주교의 사목적 역할을 견진례와 관련하여 규정하였으며, 그리고 신자들과의 정기적인 접촉을 보장하는 기회를 보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학위원회들의 결론을 존중하면서도, 주교들의 반대를 고려한[포용할 수 있는] 전례적인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다.

    4. 새로운 모형의 출현

    최근에 발표된 많은 세례양식들은 성공회신앙 안에서 입교례의 모형에 대한 공감대[합의]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례예식을 모든 신자들이 모이는 주일이나 축일에만 거행하도록 제한하였던 크랜머의 의지는 마침내 확고히 정착하고 있다. 새로운 지시문들은 이 예식을 주일의 중심예배[대예배]에서 거행하도록 지시하며, 종종 이를 강화하기 위하여 교회법으로 제정한다. 일부 관구들은 보다 구체적으로 일년중 세례예식을 다섯 대축일들(부활밤, 성령강림, 모든 성인들의 날, 주님의 세례, 그리고 주교의 방문일)에만 거행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입교례 거행예배로 감사성찬례를 특히 선호하였던 부처의 주장은 이제 대다수 새로운 입교례 양식들에서 표준으로 실현되고 있다.

    따라서 입교례를 거행하는 예배는 이제 크랜머의 확고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전례적 표준이 되었던 상황[사적인 세례]과는 크게 달라졌다. 마침내 세례는 가족과 친지들의 소규모 모임에서 거행하던 사적인 행동이 아니라, 모이는 교회(gathered Church의무가 아닌 자발적으로 모이는 교회-역자)의 공적인 행동이 되었다. 세례후보자들은 여전히 후견인들(이제 유아와 어린이들의 부모도 가능)을 필요로 하지만, 이제 전체 공동체 또한 ‘이 [세례]언약식을 목격하는 여러분은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온 힘을 다하여 도와주시겠습니까?’[이 고백과 서약에 증인이 된 모든 교우들은 서로 힘을 다하여 지금 세례를 받는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실한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겠습니까?]와 같은 질문에 대답한다. 전례적 상황의 급격한 변화는 탈그리스도교국가 시대(post-Christendom 종교와 국가가 분리되어 더이상 특정종교가 의무가 아닌 시대-역자)의 교회를 반영한다. 이 시대에서는 사회가 아니라 신앙공동체가 그리스도인들을 양육하는 환경을 제공한다. 이는 또한 교회의 사목직을 더이상 성직자만으로 볼 수 없는 교회를 반영한다. 이러한 교회들에서 신앙공동체의 여러 회원[신자]들은 세례의 준비에 참여하고, 세례후보자들이나 그들의 가족들에 대한 지속적인 참여를 확약하는 표현들을 [예식의 하나로] 요구하고 있다.

    새로운 양식들은 입교례 자체의 완전한 통합성[단일성]에 대한 의지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 양식들은 세례후보자들을 연령을 기준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모든 세례후보자들에게 단 한가지의 양식만을 사용하며, 세례받은 자들 모두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점차적으로 세례는 연령에 관계없이 성찬참여를 허용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구원의 신비를 표현하는 다양한 성서적 이미지들은 새로운 전례본문들을 보다 풍부하게 표현한다. 이것들은 1549년 또는 1552년 양식에서 사라졌던 세례의례들(성유의 사용, 세례옷의 수여, 촛불의 증정)의 재발견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 또한 탈그리스도교 국가시대의 교회를 반영한다. 이처럼 한때 ‘애매하고 의미없는 의례들’(dark and dumb ceremonies)이었던 이러한 이미지들은 이제 자발적으로 모인 신앙공동체 뿐만아니라 주로 어른인 세례후보자들에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아래에서 다시 논의하겟지만, 견진례 또한 이제는 비입교례 예식으로, 세례예식에서 선언하였던 [세례]언약을 재확언하는 예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예식은 여전히 주교만이 집례하지만, 과거의 그것과 전혀 다른 성격을 나타낸다.

    5. 공감의 형성

    성공회신앙에서 그리스도교 입교례의 쇄신에 중요한 단계는 1991년8월 토론토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개최된 제4차 세계성공회 전례협의회(IALC-IV)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세계성공회 공동체의 모든 관구들에서 참석한 64명의 전례학자들은 5일동안 활기찬 토론끝에 <Walk in Newness of Life>라는 문서를 발표하였다.

    이 건의문들은 보다 확대된 발표문(statement)의 형식으로 ⅰ)입교례신학의 갱신, ⅱ)세례, 선교 그리고 사목직, ⅲ)세례신앙의 갱신, 그리고 ⅳ)‘그리스도교 입교례의 원리들’ 7가지와 입교례 양식들을 포함하였다. 성공회 전례학자들 사이의 이러한 공감은 성공회 교회들의 입교례 갱신에 중요한 발전을 의미하며, 또한 서로 일치하는 많은 문제들을 제기한다. 원리들은 다음을 확언하였다.

    a) 세례관행의 쇄신은 선교와 복음화에 필수적인 부분이다. 전례적인 본문들은 교회의 생활을 넘어서 세상속에서 하느님의 선교를 지향하여야 한다.
    b) 세례는 어른과 유아를 포함한 모든 연령의 후보자들을 위한 예식으로, 후보자들 또는 스스로 대답할 수 없는 후보자들의 부모나 보호자들의 준비와 교육후에 시행한다.
    c) 세례는 완전한 성사적 입교례이며, 성찬참여로 이어진다[참여를 포함한다]. 견진례와 기타 신앙의 재확언 예식들은 세례신자들 사이에 신앙을 쇄신하는 사목적 역할을 수행하지만, 세례의 완성이나 성찬참여의 전제조건으로 이해되어서는 않된다.
    d) 세례준비과정(catechumenate)은 세례를 준비하고 훈련시키는 한 모델이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수행되었던 전례적인 의식들이 문화적 환경이 다른 지방들에서 서로 달랐다는 점을 인정한다.
    e) 세례양식에서 사용하는 용어들 중에서 특히 신앙고백과 세례식문(세례식 공식문, baptismal formula) 모두는 계속해서 하느님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명칭하여야 한다.
    f) 한번 받은 세례는 반복될 수 없으며, 어떠한 쇄신양식도 재세례라는 오해를 피해야 한다.
    g) 주교는 사목적 예식인 견진례를 사제에게 위임할 수 있다.

    4차 협의회는 또한 이 토론토 문서에 1차 회의(1985년, 보스톤)의 발표문인 어린이와 성찬례(Children and Eucharist)를 첨부하였다. 이 보스톤 발표문은 특히 다음 사항들을 확언하였다. 즉, 모든 세례신자들(유아 포함)은 성찬참여를 허락받는다; 각 관구의 세례양식은 본문에서 새로운 세례신자들의 성찬참여를 분명하게 확언하도록 재검토한다; 각 관구는 어른 또는 유아 세례후보자들을 근본적으로 구별하지 않도록 단 하나의 세례양식만을 사용한다; 세례예식의 거행때에 침례와 많은 양의 물의 사용과 같은 전례적인 상징들을 생생하게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모든 세례신자들의 조건없는 성찬참여[영성체communion]는 성공회를 포함한 교회일치를 위한 모든 대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Walk in Newness of Life>는 이제 각 관구에 달려있다. 1968년 람베스회의 보고서처럼, 이 문서의 건의사항들의 효과는 각 관구들에서 개정하고 있는 새로운 입교례 양식들에서 나타날 것이다. 세례준비과정의 복원, 모든 세례신자들의 성찬참여, 전례적 상징들의 생생한 사용, 그리고 세례와 선교와의 관련성 회복 등이 새로운 양식들에서 나타날 변화들이다. 1995년 더블린에서 개최된 제5차 협의회(IALC-V)는 감사성찬례의 쇄신을 논의하면서, 모든 세례신자들의 성찬참여를 확언하였다. 또한 일부 관구들에서 제기된 질문들의 관점에서, 협의회는 세례를 성찬의 전례에 앞서 거행하는 것을 표준으로 확언하였다.

    세계성공회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입교례의 전형(paradigm)은 아마도 어느 때보다도 종교개혁가들이 기대하였던 모형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초기교회의 통합된 양식(개혁가들의 이해처럼)으로 복원하여 공적이고, 전체 신자들이 모인 예배에서 거행한다는 비젼은 전통적으로 대중적인 신심의 영향력들을 극복하지 못하였다[신자 대중과 교회사목의 편의에 굴복하였다-역자]. 오늘날 그리스도교 입교례가 지향하는 방향은 입교례의 당연하고 논리적인 귀결일 뿐만아니라 개혁가들의 기대에 충실한 것이다. 입교례는 성공회의 신학적 전례적 의제(agenda)에서 주요한 항목으로 계속해서 남아있을 것이다.

    6. 견진례

    견진례의 역사와 발전과정은 그리스도교 입교례 역사의 보다 복합적인 측면들중 하나이다. 이 문제는 특히 성공회 내에서는 그야말로 복잡하다. 앞에서 다룬 입교례와는 다르게 몇가지 고려해야할 문제들이 있다.

    6.1 크랜머와 견진례
    크랜머는 처음부터 중세기 서방교회의 견진례의 외형[범주]을 유지하였다 하더라도, 그가 만든 예식의 강조점은 크게 변경되었다. 크랜머의 의도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에에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견진례의 강조점은 예식의 집행에서 예식 바로 앞에 첨부된 교리교육서로 변경되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하지만 크랜머는 중세신학자들이 견진례의 성사적 본질에 중심적인 요소로 이해하였던 도유의식(anointing)을 [견진례 예식에서] 삭제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양식을 어느 정도로 중세의 견진례 양식의 연속성으로 이해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더구나 ‘견진례’의 전통적인 요소들을 세례예식에 포함시켰다는 점에서도 크랜머의 의도는 더 더욱 분명하지 않다. 1549년 세례예식의 도유식과 1552년 [세례]예식의 십자성호긋기는 중세기 세례예식처럼 머리 위나 정수리에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기 견진례처럼 이마에 시행하였다. 이 때에 크랜머가 사용한 언어-‘성령의 도유(unction)’(1549)와 십자성호긋기의 선포문(1552)-는 중세기의 세례보다는 견진례에 전형적으로 사용되었던 언어였다. 크랜머는 아직 견진례가 세례로부터 분리되지 않았으며 세례식 후에 도유식이 한차례만 있는 스페인지방의 <Missale Mixtum>로부터 일부를 채택하였기 때문에, 입교례의 단일한 통합양식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세례와 견진례 양식들에 대한 크랜머의 의도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없지만, 그가 중세기 ‘견진례’의 핵심적인 요소를 세례 양식에 포함시켰다는 점과 견진례 양식을 보헤미아 종교개혁교회(Bohemians)와 에라스무스 그리고 루터를 뒤따라 새로운 예식(novelty)으로 창안하였다는 점에서, 크랜머는 지금까지의 평가와는 달리 훨씬 더 과감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다. 명확한 대답보다는 모호한 대답을 더욱 중요시하는 현대의 정치적 환경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최종적인 해답을 특히 어렵게 만든다.

    6.2 견진례에 대한 여러가지 이해들
    종교개혁이후 3세기 동안에 성공회신앙 내에서 견진례는 매우 느슨하고 종종 경시되었지만, 19세기에 들어와 이를 엄격하게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엄격한 시행은 곧 견진례를 성사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이해는 성공회에서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해석이었다.

    견진례를 성찬참여의 전제조건으로 규정한 견진례 지시문의 문자적인 해석은 견진례를 입교례성사의 나머지 절반이자, 이를 완성시키는 예식으로 이해하는 신학을 낳았다. 이러한 새로운 견진례신학은 1890년경부터 세계성공회 공동체에서 (절대적은 아니었지만) 커다란 영향을 가졌다. 이처럼 견진례를 성사적으로 이해하는 신학과 함께, 보다 오래된 비성사적이고 교리교육적인 이해 역시 계속해서 존속하였다.

    ‘견진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강요하지 않는 한, 이러한 두가지 신학적 이해는 똑같은 양식을 사용하며 성찬참여 이전에 시행하는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어려움없이[쉽게] 공존할 수 있었다. 1968년 람베스회의에서 견진례신학의 재검토를 요청하며 전례서의 개정작업이 시작되었을 때, 이 질문은 또다시 치열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제4차 협의회의 원리들중 (c)와 (g)는 세계성공회 안에서 견진례 관행에 중요한 의미들을 제공하였으며, 마찬가지로 ‘각 관구들은 견진례가 성찬참여를 허용하는 예식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확언하여야 한다’는 제1차 협의회의 7번째 건의문도 그러하였다. 토론토 회의[4차 협의회] 참석자들은 특히 지난 세기 동안에 견진례를 총사제들(archdeacons)에게 위임하였던 호주성공회의 사례 그리고 오늘날의 일부 아프리카 교구들에서 사제에게 위임하는 사례에 깊은 관심을 표시하였다.

    세계성공회 안에서 견진례의 모형들과 관행들은 각 지방교회마다 서로 다르게 변하고 있지만, 견진례 관행의 쇄신에 대한 논의는 계속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변화가 있기 위해서는 주교들의 강력한 지도력이 요구된다. 특히 견진례 관행의 변화를 주교직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는 주교들 스스로 주교직(episcopé)에 대한 이해를 쇄신하여야 한다.

    새로운 전례본문으로 거행하는 견진례는 이제 비성사적인 세례언약의 재확언 예식으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성찬참여를 허용하는 예식으로서의 견진례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으며, 대신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단계에 이르러 주교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재확언하려는 자들을 위한 선택적인 예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예식의 참여자들은 이제 전통적으로 견진후보자들이었던 십대 소년들보다 훨씬 성숙한 어른들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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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tchell, Leonell L., Baptismal Anointing. AC, SPCK, London, 1966.

    2012년 7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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