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전례 Q & A

  1. "저교회라 할 수 있는 개신교에서 최근 전통적인 전례들을 받아들이고, 전통적 영성 훈련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미 아래 "고교회와 저교회"에 관련된 이야기에서 ssyu1 님이 제기하신 문제입니다. 독립된 주제글로 발전시켜 토의하는게 좋겠다 싶어서 떼어내어 올려 봅니다.

    ssyu1 님은 이런 문제를 제기하셨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최근 한국의 개신교안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분위기에 관한 것입니다. 주신부님께서도 다른 글을 통해서 말씀하셨듯이 최근의 많은 개신교회들은 예배안에서 성사적 차원과 전통적인 것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이 성사의 전통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다시 회복하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제가 알고 있는 복음주의운동을 하고 있는 한 교회에서도 최근 일년에 두번(부활, 성탄)성찬례를 하는 것에서 매달 한번 성찬례를 하는 것으로 그 횟수를 늘렸으며, 또한 제가 누군가를 통해 전해 들은 교회에서는(그 교회 역시 복음주의적 성향을 가진 장로교임) 매주 성찬례를 한다고 합니다.

    그 몇몇의 교회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이들이 분명 저교회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이 성찬례의 횟수를 늘려가는 이유에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교회 안에서 성사와 전통을 회복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이 성찬례를 매주 혹은 매달 하는 이유중에는 최근의 개신교 신자수의 감소와 더불어 찾아온 교세의 위기를 보다 새로운 예배 방식을 통해서 해결해보려는 돌파구로써 인식하고 있다는 점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정확히 진단한 것은 물론 아닐것입니다. 그러나 충분히 그럴수 있을만한 여러가지 모습들이 현재의 한국의 개신교 안에서는 발견되기도 합니다.(다른 예지만 현재 한국의 개신교에 열풍을 불고온 '영성운동; 이것 역시 복음주의 운동 안에서 활발히 활용되고 있음'은 철저히 그들에 의해서 교세를 늘이기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질문이고, 재밌는 분석입니다. 개신교에서 전례와 영성이 교세 성장과 관계가 있는 걸까요? 그렇다면 전례 때문에 성공회 선교가 안되고 있다고 주장하시는 몇몇 이른바 성공회 "저교회주의자들"의 주장과는 상당히 상반된 견해로 보입니다.

    이런 현상들을 여기서 저기서 주워듣고 관찰하는 처지에서 보면 이런 생각이 우선 듭니다.

    1. 전례나 영성이 성공회나 천주교, 정교회의 전유물은 아니고, 그리스도교의 전통이니, 개신교가 이를 새롭게 그 가치를 발견하는 일은 참 좋은 일이다. 대결을 피하고 함께 이야기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공동의 장을 마련해 주고 있다.

    2. 여기에는 에큐메니칼 운동이나 전례 운동을 통한 영향이 컸을 것이다. 특히나 전례에 관해서

    3. 최근 영성에 대한 관심은, 어떤 점에서는 개신교의 "개인주의적 신앙 태도"와도 잇닿는 바가 있다. 물론 이 말은 영성이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실은 공동체적인 성격이 더욱 강하다.

    3-1. 꼬리 문 질문: 실제로 현대 영성 운동의 대체적인 (대중적인) 방향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더불어서 "교회" 없는, 혹은 "종교" 없는 신앙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교회론이 박약한 개신교의 생리와 연결점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 성공회는 어떤 교회론적 이해를 갖고 이를 바라보는가?

    4. 전례에 대한 개신교의 최근 이해들이나 적용들은 갈수록 위약해지는 목회자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수단이라는 비판이 있다. 이는 전례 운동의 핵심인 성직자주의(clericalism, 혹은 성직자 권위주의)의 극복과는 전혀 반대 방향이다. 게다가 그 내용은 실제 전례 운동과는 동떨어져 있다. 성직 셔츠를 입고, 예복과 영대를 착용하고 교회력을 도입하는 것이 곧장 전례 쇄신은 아니다. 또 그 적용 내용을 보면 전례 운동이 제기하는 방향과는 딴판이거니와, 오히려 중세의 권위주의 도입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4-1. 꼬리 문 생각: 이 현상을 사제직에 대한 신학의 차이를 식별하는 것로 발전시킬 수는 없을까? 천주교의 존재론적 사제직 이해, 개신교의 기능론적 목회직 이해, 성공회는? 성사적(sacramental) 이해라는 말이 가능할까? (몇 년 전에 제 홈페이지 질문 답변란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5. 그나저나 개신교는 전례나 영성 - 그것도 성공회, 천주교, 정교회 전통의 - 에서 배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정작 우리 성공회는 어떤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가?

    6. 개신교의 전례나 영성에 대한 이해가 현재 성공회, 천주교, 정교회 전통에 주는 도전을 무엇일까? 또 그 한계는 어떤 것일까?

    6-1. 몇몇 신부님들과 이야기했던 생각들: 왜 개신교가 저리 발버둥치는 전례 도입이 안되는 것일까? 몸에 밴 것과 아닌 것의 차이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몸에 밴 전통을 심히 업신 여기는 경향이 늘고 있지 않는가?

    위에 ssyu1 님이 제기한 물음에 대해서, 그리고 그 뒤에 적어본 생각들에 대해서 우리 회원들은 어떤 생각을 하시는 지 많은 분들이 함께 토론했으면 좋겠습니다.

    "Tradition is living faith of the dead, Traditionalism is dead faith of the living."
    2008년 4월 22일 #
  2. ssyu1
    회원

    제기한 질문을 더욱 풍성하게 발전시켜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관심있는 자로써 제 생각을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전례'와 '영성'이라는 두 주제가 거론되고 있는데, 이 두 주제에 대한 상관관계를 정리해 놓은 글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이 둘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듯 합니다. 왜냐하면 영성적 삶이란 곧 전례적 삶을 가능케 해주는 원동력이 되기때문입니다.

    가장 단순하게 이야기해서...
    '영성'에 관심을 갖는 이들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단계'를 중요시 여깁니다. 그들에게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한 여러가지 방식들(관상기도의 여러가지 방법들, 성독(렉시오디비나), 명상 등)은 자유로우면서도 일정한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성적인 삶을 위한 노력들이 일상적인 시간이나 장소, 혹은 특정한 시간이나 장소를 통해 표현되어지는 것 역시 '전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영성적인 삶을 위한 노력이 일회적이지 않고 반복되어 표현되어 질때 그것은 '전례'가 가진 가장 큰 지향점과 합일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관계를 밝히는 것은 전례와 영성이 왜 거의 같은 시점에 한국의 개신교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가를 아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성적 삶을 위한 다양한 방식들은 상대적으로 가톨릭 전통에 있는 교회들(천주교, 정교회, 성공회)에 의해서 발전이 되어왔습니다. 반면에 개혁교회전통에 있는 교회들은 지난 날까지 '영성'보다는 '성령은사'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며 성령운동을 통한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이 최근에 들어서 바뀌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개신교안에서의 변화입니다. 몇 년전부터 '영성'이라는 용어는 개신교 안에서 더이상 생소한 용어가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이라는 용어가 주를 이루던 예배의 설교에서 점차적으로 '영성'은 개신교회 설교중에서 가장 세련되고 호감가는 주제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복음주의 성령운동을 하며, 자체적으로 출판사까지 가지고 있는 어떤 유명한 교회에서는 발빠르게 갖가지 영성 치유 프로그램을 가기 시작했으며, 영성의 대가들의 책을(주로 가톨릭 영성가들의 책임) 번역하여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얼마전 '떼제노래를 통한 기도법'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기획한 곳 역시 개신교단에 속한 한 유명한 단체였습니다. 저 역시 그곳에 있었는데, 그 자리에 모인 개신교 성직자들의 관심어린 눈초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전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례'야 말로 개신교 안에서는 가장 낯설고 생소한 용어로 존재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전례 역시 최근의 개신교안에서는 그리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한국의 거의 대부분의 개신교회에서는 성찬례를 일년에 두번(부활절, 성탄절) 하고 있습니다.(예외적으로 '그리스도의교회' 라는 교단은 매주 성찬례를 해 온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교파 구분없이 곳곳의 여러 교회에서 성찬례 횟수를 늘여 나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떠한 교회는 매주 성찬례를 거행하는 파격(?)적인 교회도 있다고 합니다. 성찬례의 경우 만이 아닐 것입니다. 저 역시 개신교회의 여러 성직자로부터 '성공회기도서'를 보내달라고 요청받은 일이 몇번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최근 개신교회 안에서 '전례'에 대한 관심은 단지 협소하고 특별한 경우 라고만 말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자, 그럼 제가 말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영성과 전례에 관한 관심과 적용에 관한 여러 개신교회의 시도는 개인적으로 참으로 반기는 일입니다. 단, 정확한 신학적인 이해와 성찰을 전제로 한다는 차원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므로 더이상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여러 개신교회 들이 '영성'과 '전례'에 관심을 갖게 된 근본적인 이유에 관한 것입니다.(물론 전부 다 그렇지는 않다는 것도 말씀드립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에는 여전히 '한국 개신교적 선교 패러다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과거 몇 십년간 한국 개신교회는 세계에서 유래없이 큰 양적 성장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양적성장의 배경에는 '한국식 복음주의적 성령운동'(이것을 '은사주의'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개신교적 선교 패러다임의 가장 큰 맹점은 '성장주의'에 있습니다. 즉, 개신교회가 계속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을 때에는 자신들 내부의 문제점이나 결점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했겠지요. "바로 이 복음주의적 성령운동이 한국에서 개신교회를 이렇게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성장주의'는 말그대로 양적인 성장에만 머물렀던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최근에 들어서 쓰나미처럼 들이닥친 충격적인 소식,

    "한국 개신교인 최근 몇년새 급격한 감소, 천주교인 증가,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이전한 듯..."
    (저는 이 기사를 인터넷의 한 신문에서 읽은 경험이 있습니다.)

    현재의 한국 개신교회는 그 구조상 성장주의적 선교 패러다임을 바꾸기 힘들다고 봅니다. 그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요. 무엇보다도 원천적으로 신학교의 교육 역시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선교패러다임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장을 위해서라면 그동안 이단이라고 몰아부치며 손가락을 겨누던 천주교, 성공회, 정교회의 방식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때마침 전 세계 곳곳에서 유행하고 있는 신비주의적 명상법, 요가, 불교식 참선법등은 개신교회의 눈을 더욱 빠르게 돌릴 수 있도록 만들어 준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오늘날 개신교가 영성과 전례에 집착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개신교의 선교 패러다임'안으로 가져오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성'과 '전례'는 철저하게 성장주의의 도구로 사용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진지하게 성찰하고 근본적인 개선을 위한 노력으로 '영성'과 '전례'의 문제를 도입하고자 하는 한국의 개신교회도 있음을 인정합니다.

    다른 이들을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만큼 쉬운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없는 잘못까지 덤으로 만들기도 쉽구요.
    다음에는 집안 잘못을 들추어내는 어려운 일을 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야 진실로 성찰적인 비판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여러분들은 제 의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008년 4월 25일 #
  3. testmankr
    회원

    한국 개신교를 특정해서 전례와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지적인것으로 이해합니다. 세계적인 현상은 아니겠지요.

    전례를 연구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주변에 개신교 신자들을 보면 성찬례 또는 성찬의 전례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한 것을 느낍니다. 가톨릭 신자로써 개신교 예배 순서를 보면 말씀 위주인 것을 보고 늘 의아해왔습니다만, 만약 개신교의 전례 회복이나 성사의 도입에 대한 개신교 신자들의 충격은 아마도 가톨릭에 소속된 신자들이 성령세미나 또는 특별계시(사적계시)에 받는 충격과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비교해봅니다. 따라서 말씀에 치중된 교회에 익숙했던 개신교파 신자들이 전례나 영성에서 받는 여러가지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단지 윗 분이 지적한 대로 영성이나 전례에 대한 관심이 단순 전교의 새로운 수단이라면 매우 안타깝습니다만 한국 개신교는 분명 성공하고 말 것입니다.

    성공회 미사를 한번 온라인으로 본적 있습니다. 새문안 교회에 주교님이 방문하셨던 미사였던 것 으로 기억합니다만, 가톨릭 미사와 매우 비슷하면서도 단순 용어 몇 가지의 차이, 성찬의 전례 방식의 상이함으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사성과 상이성의 동시에 주는 충격이었지요.

    교회 일치가 꼭 필요한지...의문입니다만, 우리는 왜 단어 하나, 하나가 주는 일체성을 느끼지 못하는지 아쉽습니다. GOD가 하느님, 하나님으로 나뉘어 싸우는 사람들에게 전례나 영성이 과연 무슨 도움이 될까..하는 회의가 더 깊습니다. 주신부님께서 던진 화두나 ssyu1님이 물어보신 어려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 그냥 지나가던 노인의 잡소리로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8년 5월 8일 #
  4. ssyu1 님, 그리고 testmankr 님 좋은 생각과 의견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1.
    전례와 영성에 관한 책이라면, 우리말로 되어 금방 접할 수 있는 책이라면, 돈 E. 샐리어스, [예배와 영성] (은성)을 강력 추천합니다.
    기회가 닿으면, Westminster Dictionary of Christian Spirituality 에 있는 Susan Wood, "Liturgy and Spirituality"를 번역해 보려고 합니다.

    2.
    개신교를 비판하기 전에 그 엄청난 노력을 우선 높이 평가했으면 합니다. 그 목적이 어디있든 간에, 자신에게서 잊혀졌던 전통, 혹은 다른 종교 전통까지도 어떻게든 배워서 적용시키겠다는 놀라운 변신력 혹은 왕성한 소화력, 그도 아니면 놀라운 적응력에서 우리 성공회는 조금 배워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장도구가 아닌 진정한 신앙의 성숙을 위한 것이라는 모본을 우리가 보이면 되지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여러 개신교가 더 잘 할 것 같습니다. testmankr 님의 관측이 옳다고 봅니다. 개신교는 뭐든지 하니까요.

    3.
    testmankr 님, 천주교 신자로서 어떤 공통성점과 상이점때문에 충격을 받으셨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른 전통에 있는 분들의 보는 시각도 매우 중요하리라 생각하고, 또 서로 다른 점들을 이해하는 계기가 펼쳐지리라 생각합니다.

    2008년 5월 10일 #
  5. 제가 아직 성결교회에 있을 때, 정교회의 한 친구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친구가 한 말 하나가 기억에 남습니다. 전례는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것은 전승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사람한테 직접 배워야 한다고. 이러한 원리는 전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특히 전례에는 더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이론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직접 예배에 참여하고 경험함으로써 그 가치를 알게 되는 것이지 책으로 읽어서만 되는 게 아닐 것입니다. 실지로, 제가 성공회에 와서 예전을 경험하고 그 예전이 몸에 베니 이제서야 예전의 가치와 의미를 조금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저교회적 개신교에서 예전을 도입하려면 단순히 책으로 연구하는 것만은 부족할 것입니다. 전례를 보급할 사람들을 성공회 교회로 '유학'을 보내서 1년 쯤 경험하게 만든다든지, 아니면 성공회 사제를 초청해서 같이 예배드리면 배우든지, 또는 천주교나 성공회, 루터교에 있다가 교단을 바꾼 사제들로부터 배우는 등의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아니면, 외국에서 예전 경험이 풍부한 목사를 선교사로 초청해서 예전을 보급하게 하든지요. 어떠한 방법을 쓰든지 어느 정도 시간을 투자할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소수의 사람이 그 많은 교회에 예전을 보급하는 것은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할 테니까요. 성결교회에서 전례를 많이 가미한 새예식서가 나온지 꽤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그 보급이 부진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부수기는 쉽지만 다시 세우기는 힘듭니다. 많은 개신교 교단이 과거이 예전 전통을 그대로 유지했다면 그것을 다시 세우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그러나, 각 교단마다 있던 예배의 전통이 18세기 이후로 많이 사라졌기에 지금 다시 세우기가 그만큼 힘들어진 것입니다. 성공회도 이를 교훈 삼아 예전의 전통을 유지해 나가도록 힘써야겠지요. 예전을 발전시키는 것과 무시하고 없애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008년 5월 13일 #
  6. testmankr
    회원

    주신부님, 제가 하도 오래전에 보았기에, 다르다는 점보다는 사실 많이 비슷하다라는 충격이 사실 더 컷지요. 이유없는 천주교신자의 우월의식에 젖어있었기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만. 요즘들어 성공회에 대해 많이 알게된 지금은 그다지 다를 것 없는 충격이겠습니다.

    한가지 의문점은 (새문안 교회에서 했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성찬례에서 긴 테이블에 놓인 제병들을 신자들이 스스로 집어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거 하나가 많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평신자는 물론 부제들도 사제에게서 받아서 영해야만 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어이구 이거 학교에 있는 성공회 교회에 한번 가서 보고 와야 겠네요. 듣기에 루써란 교회의 전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가톨릭 전례가 더 많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사실 요즘은 라틴 전례의 신비에 더 끌려서 미사도 라틴 미사로 가볼까 하는 고민도 하지요. 또 사설로 흐르네요. 이래서 나이 들으면 듣고, 읽기나 해야지 말로 하고 쓰는 것은 어렵습니다. 성당에서도 미사 드릴때 왜 이리 복사들 실수가 눈에 띄는지...

    이런 전례에 대한 끌림이 결국 신앙의 신비와 연결되지 않나 싶습니다. 오래전 학생때 굿판에서 보았던 박수 무당의 신들린 모습과 그 열기에 휩쓸리던 사람들, 결코 전례가 신앙에서 무시할 수 없는 점이라는 것의 한 예 아닌가 싶습니다.

    2008년 5월 19일 #
  7. testmankr
    회원

    4. 전례에 대한 개신교의 최근 이해들이나 적용들은 갈수록 위약해지는 목회자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수단이라는 비판이 있다. 이는 전례 운동의 핵심인 성직자주의(clericalism, 혹은 성직자 권위주의)의 극복과는 전혀 반대 방향이다. 게다가 그 내용은 실제 전례 운동과는 동떨어져 있다. 성직 셔츠를 입고, 예복과 영대를 착용하고 교회력을 도입하는 것이 곧장 전례 쇄신은 아니다. 또 그 적용 내용을 보면 전례 운동이 제기하는 방향과는 딴판이거니와, 오히려 중세의 도입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위 발제글에 든 생각입니다. 개신교가 혹은 성공회에서 전례를 강화한다면 그 전례의 강화가 "교회"안에서의 사제 혹은 제사장의 역할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조심스레 말해봅니다. 가톨릭, 특히 로마 보다도 로마답다는 한국 가톨릭 교회안에서의 사제의 권위를 슬쩍 언급해봅니다. 대표적인 전례인 미사에 있어 복음은 사제만이 선포할 수 있습니다. 부제도 미사 집전 사제의 허락과 축복을 받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평신도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합니다. 설교권과 비슷해보이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가톨릭의 강론과 비교할 것이기에 논외로 하구요. 영대나 제의, 향, 촛불, 제대만 들여놓는다면 그걸 어떻게 신자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런 의미나 역사에 대한 공부 없이 도입될 전례 강화는 필연적으로 전례의 신비의 선교 수단으로의 전락, 소위 사목자들의 권한(권력?) 강화, 특별한 지위 구축 강화 등에 손쉽게 사용되기 쉬울 것으로 보여집니다. 가톨릭의 미사 전례와 성사 집전에서의 사제의 지위와 역할이 일상 교회 행정에까지 미치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고려할 때 개신교가 잘 이러한 점을 극복 할 수 있을까 걱정됩니다.

    4-1. 꼬리 문 생각: 이 현상을 사제직에 대한 신학의 차이를 식별하는 것로 발전시킬 수는 없을까? 천주교의 존재론적 사제직 이해, 개신교의 기능론적 목회직 이해, 성공회는? 성사적(sacramental) 이해라는 말이 가능할까? (몇 년 전에 제 홈페이지 질문 답변란에서 다룬 적이 있음).

    성공회의 성사적이란 말을 잘 모르겠습니다. 성사가 아니니까 그냥 예전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성사는 성예전으로 사용하는 것 같고, 성사적 의식은 예전으로 번역하여 쓰는 것 같습니다. 성공회에서는 신부님이 성사를 집전하기전에 "살인"을 하고 와서 집전하면 전례와 성사가 유효한가요?

    6. 개신교의 전례나 영성에 대한 이해가 현재 성공회, 천주교, 정교회 전통에 주는 도전을 무엇일까? 또 그 한계는 어떤 것일까?

    도전만이 아닐 듯 합니다. 아마도 개신교에서 전례나 영성에 대한 "도입"을 하게 되면 개신교 신자들이 개신교에 머물러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라는 짐작을 해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장 큰 특징이 "전례개혁"이었는데, 그후에 많은 가톨릭 사제와 수도자들이 환속하였고, 또 신자들도 (보기에 그다지 다를 것 없게된) 개신교로 전향하기 쉬워진 현상이 있었지요. 개신교가 전례를 강화하게 되면(어떻게 할지 의문입니다만), 앉고, 서고, 무릎꿃고 하는 것도 복잡하고, 교리는 그렇게나 복잡하고, 기도문도 많고 한데, 개신교 신자들이 그런 점에 익숙해지면, 개신교에서 성공회나 가톨릭으로 전향도 쉬워지겠지요. 전례양식 하나 하나가 모두 역사적 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무릇 받아들이자면 다 받아들이던가, 아니면 다 거부해야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까요? 외양은 흉내내기 쉬우나 의미를 만들어 내기 어려운 것을 고려하면 말입니다.

    가톨릭에서도 전례가 바뀌자 이탈한 그룹이 있지요. 비오10세회라고 라틴 양식만 고집하는 시대착오적으로 유명한 그룹인데요, 개신교에서 전례를 강화하기 시작하면 개신교의 분열 속도 역시 강화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앙 통제 기관이 없으니 더 쉬울 것 같습니다.

    가톨릭 신자이다 보니, 개신교의 전례 강화는 곧 개신교가 가톨릭적 전통과 양식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밖에 이해못하는 사고하에 작성된 글의 한계를 잊지 말아 주십시요. 그점에서 개신교가 매주 성찬례를 하게 된다면, 그 신자들은 예배시간에 "말씀"외에 자주 "몸"과 "피"를 열심히 공부하게 될 터인데, 그것은 개신교 내에서의 도전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과연 개신교가 전례를 강화하면 어디까지 강화할 수 있을까요?

    2008년 5월 19일 #
  8. testmankr 님 흥미로운 이야기와 논평 고맙습니다.

    1. 논평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비슷한게 충격일까?" 사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으니까요. ㅎㅎ

    2. 새문안 교회와 한 성찬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설명하신대로라면 저도 특이하게 한다 싶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방식은 다른 개신교에서 자주 사용되는 것 같긴 하지만요.

    3. 다른 나라 천주교나 (한국 천주교도?) 요즘은 성찬 분배를 허락을 받은 평신도들도 할 수 있습니다.

    4. 루터교회의 전례는 해당 루터교회가 유럽의 어떤 지역에서 나왔느냐에 따라 그 전례 형태는 천양지차입니다.

    5. 제 글의 부분(4번)을 인용하여 논평하신 "개신교가 혹은 성공회에서 전례를 강화한다면 그 전례의 강화가 "교회"안에서의 사제 혹은 제사장의 역할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조심스레 말해봅니다"가 무슨 뜻인지 말 모르겠습니다.

    우선 한국의 여타 개신교와 성공회를 같은 선상에 놓고 이야기하기는 어렵겠고요. 성찬례(미사)에서는 사제가 복음을 읽는 것은 전례적 전통 교회의 일반적 관습입니다. 성공회도 예외가 아니구요. 로마 가톨릭만 전례적 전통을 고수해왔고, 성공회나 다른 개신교들은 그렇지 않았으면서 이제 도입하려고 한다라고 들리는데 꼭 그런 건 아니라고 봅니다. 다른 개신교는 모르겠으나 성공회에는 해당 사항이 없는 말이라고 봅니다.

    6. 제가 사용한 "성사적"(sacramental)이라는 말의 뜻은 개별 성사보다 좀더 넓은, 그러니까 성사적 원칙 혹은 성사성(sacramentality)에 관한 것입니다. 이 때는 "성사적"이라는 말을 예전적 혹은 전례적이라는 말과 대치시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성사적 의식"으로서 개별 "성사"에 대한 번역어로 "성례전"이라는 말을 쓰는 곳은 성공회가 아니라, 다른 한국의 개신교파들입니다. 저 역시 이는 썩 좋은 번역어는 아니라고 봅니다.

    7. "성공회에서는 신부님이 성사를 집전하기전에 "살인"을 하고 와서 집전하면 전례와 성사가 유효한가요?" 어떤 뜻으로 이런 극단적인 사례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원칙적으로는 그 성사는 유효하다는게 교회 전통의 가르침입니다. 전례 및 성사의 주체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8. 제 글 6번과 그 이후의 논평에 대해: 개신교에서 전례나 영성을 도입하는 것은 우리(저나 testmankr 님)가 그 주체가 아니니, 그 쪽에다 맡길 일이겠지요.

    흥미로운 논평 고맙습니다.

    2008년 5월 21일 #
  9. testmankr
    회원

    제 잡생각과 잡글에 이러저러한 친절하신 답글 달아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적어놓고 다시 읽어보이 아는 것이 일천한 것이 드러나서 당분간 읽기만 해야겠습니다. 주신부님과 가족분들께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이하는 그냥 쓴 글이므로 답글 안주시는 것이 절 덜 미안하게 하실 것입니다.

    1. 사실 성공회 신자분들은 접하기 어려웠고, 어린 시절부터 개신교에 다니는 친구들은 저를 늘 마리아교니, 우상숭배교니, 이단이니 놀려대곤 했던 기억이 큽니다. 그래서 참 다르구나 했던 선입견을 가지고 살다가 비슷한 것을 보니 놀랐던 것이지요.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고, 존경하지 못하니 얼마나 슬픈일인지 모르겠습니다.

    2. 새문안교회에서 했던 것은 아마도 많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성공회 사진을 유심히 보니, 사제가 성체를 분배해주시더군요.

    3. 한국 천주교도 성체분배는 평신도에게 허락합니다. 다만 분배해줄 수 만 있는 권한이며, 스스로 집어서 영하지는 못하게 교육받습니다. 성체분배권자들도 전부 사제에게서 받아서 영해야 하지요. 사실 개신교의 목사님들이 더 권위적이라는 지적이 많은 작금의 현실속에서 전례 강화가 그러한 권한의 수단이 될 까 하는 우려였습니다.

    5. 흔히 하는 말로, 평신도는 byung신도라고들 합니다. 아무런 권한이나 발언권이 없는 수동적인 자세에 대한 자조적인 표현이지요. 특히나, 권위주의적인 사제를 만나게 되면 심각(?)해 질 수도 있습니다. 성사, 미사에 있어 절대적인 제사장의 권한이 일상 교회활동에도 강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한 부작용(?)이 전례를 강화하는 교파에서는 없기를 바란 것이지요. 성공회는 제가 잘못 언급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7. 지적하신대로 극단적인 예인데요, 이러한 예가 사실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나) 가톨릭 신자들이 사제, 인격이 아닌 제사장으로서의 사제를 대하는 자세를 가르치는 예이기도 해서 한번 언급해본 것입니다. 물론 실제 사례가 있다는 것은 아니구요, 평신도와 사제가 이러저러하게 갈등이 있어도 전례, 성사는 사제의 인격에 달려있지 않고, 주신부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성사와 전례의 주체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며, 또한 이는 성품성사를 통해 서품된 사제의 권능이라고 생각하기 모든 성사와 전례는 유효한데, 만약 그러한 상황에서 개신교 형제들은 어떠하게 받아들일지 궁금했었습니다. 다시 쉽게 설명드리면 사제 또는 목사 꼴 보기 싫으면 뛰쳐나가서 교회 하나 차릴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상태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한것이지요. 성공회 신부님께 여쭈어볼 사항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또 학업에 큰 성취 있으시길 바랍니다. 나중에 분당이나 혹은 버클리 근처에 가게 되면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2008년 5월 21일 #
  10. 흔히, 개신교는 예전의 교회가 아니라는 생각이 만연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개혁의 정신은 아니었습니다. 실지로, 종교개혁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예전 개혁이었습니다. 중세의 신학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인정하면 예전도 그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지요. 따라서, 루터교, 개혁교, 성공회는 모두 예전을 어느 정도 개혁해서 사용했습니다. 지금 개신교에서 예전이 부족한 것은 후에 예전을 경시하는 풍조가 생겼기 때문이지 종교개혁 당시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공회에서 19세기의 예전 복구 운동 덕분에 예전적인 교회가 많이 늘어났듯이 이제는 다른 개신교 교단들이 그 운동을 하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성찬을 매주 하지 않는 전통은 개신교의 전통이라기 보다는 중세의 전통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중세에 사제들은 매일 성찬례를 행했지만 모든 성도들이 영성체를 하는 것은 일년에 두 번 정도였다고 합니다. 종교개혁자들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성공회를 포함한 대부분의 개신교들이 성찬례를 자주 하지 않게 된 것이지요. 성공회에서 매주 성찬을 하는 전통은 웨슬리가 다시 시도하려고 애썼고 옥스포드 운동 후에나 정착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천주교는 언제 그 전통을 회복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개신교에서도 그러한 전통이 다시 회복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2008년 5월 21일 #

이 토론 주제에 대한 RSS 피드

답글 »

글을 올리려면 로그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