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 » 번역 프로젝트 자료

  1. Cranme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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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사목직과 사제직
    (Ministry and Priesthood)
    John Webster

    1. 잉글랜드 종교개혁 시대의 사목직과 사제직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대륙의 개혁운동들처럼 보다 적합하다고 이해하였던 사목신학에 근거하여 전도구교회 사목직(pastoral office)을 쇄신하고 재편하는데 상당한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눈”-즉, 하느님의 말씀의 설교자-은 “몸[교회-역자]의 빛이다”, 말하지면 [전도구]교회 사목자가 신실하게 박식하다면, “그 때에 모든 몸은 빛으로 가득찰 것이다”, 즉 ‘그러면 그리스도교 회중[지역교회]은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안에 풍성하게 살[가득찰]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토머스 비콘(Thomas Becon)의 우화적인(비유allegorical) 해석은 잉글랜드 개혁가들 사이에서 사목직의 신학에 대한 독특한 강조들-특히, 서품받은 사목자(minister)의 첫번째 기능은 성서를 회중들 앞에 놓는 것이다-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비콘과 같은 개혁가들에게, 성서적으로 교육받은 성직자를 공급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성공회신앙은 일반적으로 느슨한[태만한] 사목활동의 시기에 탄생하였다. 초기 튜더시대에 관한 연구들에 의하면, [지역교회에] 거주하는 성직자들은 주로 그때그때 교육받은 자들이었으며, 대학졸업자들은 대체로 그들의 교직인 전도구교회에 거주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목적 성직(pastoral ministry)의 복원이 최고의 관심사가 되었다. 더구나 서로 다른 신앙고백들간의 경쟁 때문에 확고한 성직자 기반을 확보할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초기 튜더왕조시대의 교회는 단순히 느슨한 사목적 상황 이상의 문제를 나타내었다. 또한 교회는 중세 후반기 동안에 발생한 서방교회의 성권화 (clericalization)로 야기된 문제들을 드러내었다. 사제와 평신도의 분리는 여러가지 원인들-사제의 독신생활, 대중적인 언어였던 라틴어의 쇠퇴, 화해의 사목직을 사면권을 가진 사제와 참회자 사이의 활동[관계]로 축소시킨 것-이 있었다. 그러나 14세기말과 15세기초의 롤라드운동(Lollards)과는 달리, 잉글랜드 개혁가들은 사제의 특권의 남용문제를 다루기보다는 서품받은 사목직의 신학을 쇄신하는데 집중하였다. 특히 그들은 당시에 사용중인 중세기 서품예식서(특히 솔즈베리 주교예식서)에서 강조하는 제의적(cultic) 희생적 측면의 강조를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 1550년과 1552년의 서품예식서들 그리고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다른 문서들로부터 매우 일관적인 사목직 신학이 나타났으며, 이후 세기들에서 발생한 논쟁의 주제들을 제공하였다.

    개혁된 잉글랜드교회의 서품예식서들은 다른 종교개혁 교회들의 그것들처럼 성사와 말씀의 사목직(ministerial office)과 회중들과의 불가분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안점은 몇가지 방식을 통해서 강조되었다. 먼저 (1550년 서품예식서의 서문에서) 누구도 ‘먼저 추천받고(call), 면접받고(try), 심사받고(examine), 그리고 사제에게 필수적인 특성들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지지 않으면 왕국교회에서 성직을 획득할 수 없다’는 요구조건에서, 둘째로 수장권에 대한 서약후에 주교가 후보자들을 공개적으로 심문[시험]함으로써,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품례는 ‘교회[신자들] 앞에서 일요일 또는 축일에 거행해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강조되었다. 이러한 방식들로 사목적 기능들의 실질적인 집행과 성직을 매우 밀접하게 결합시켰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1550년의 서품예식서 서문에서 ‘누구도 사적인 권위로 주교, 사제, 또는 부제의 성직들을 수행할 수 없다’고 경고함으로써 왕국교회를 넘어 보다 넓은 그리스도교회의 명령의 중요성도 강조하였다. 또한 분명히 잉글랜드교회의 새로운 서품예식서는 서품을 지역교회 회중들에 의한 권위위임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크랜머를 포함한 일부 개혁가들 그리고 이후에 후커로부터 긴급한 경우에 관한 질문들에도 불구하고) 주교에 의한 서품을 보유함으로써, 성공회신앙은‘올바르고, 절차에 따라, 그리고 합법적으로 축성받고 임명받은’(신앙조항 36항) 사목직이자, ‘주님의 포도원으로 사목자들을 소명하고 파송하기 위하여 회중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안에서 공적인 권위를 가진 자들에 의해서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도록 선택받고 부름받은 자들’(신앙조항 23항)이 수행하는 사목직을, 그리고 ‘올바르고, 의식에 따라, 그리고 법에 따라 축성받고 서품받은’(신앙조항 36항) 사목직을 보유하려고 노력하였다.

    내용면에서 말씀의 사목직-공적인 선언과 사적인 권면에서-은 첫 서품예식서에서 특히 강조되었다. 예를들면, 1550년 사제서품 예식에서 주교는 권고문 (Exhortation)에서 사제의 임무를 요약하면서 후보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러분은 인간의 구원에 관한 이 중요한 임무(work)를 수행하는 것을 어떤 다른 방법들로도 이해할 수 없으며, 성서로부터 나온 교리와 권고로, 그리고 성서에 합당한 생활로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성서를 읽고 배우는데, 그리고 성서의 규칙에 따라 여러분 자신과 특별히 여러분에게 속한 자들의 행실을 갖추는데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에드워드 시대의 서품예식서들은 제의적이며 희생적인 언어들을 삭제함으로써, 종교개혁 이전의 양식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사목직의 신학을 제시하였다. 근본적으로 성공회의 서품예식서들은 성찬의 봉헌을 강조하는 희생제의적인 사제직(sacrificial priesthood)이란 인식을 거부하며, 공적인 선포를 강조하는 목회적이고 교육적인 형태의 사목직, 성사들의 올바른 집행, 그리고 사적인 권고를 강조하였다. 종교개혁 이전의 솔즈베리 주교예식서는 레위족의 사제직과 그리스도교의 사제직 사이의 유사성들(analogies)에 근거하여 희생적인 표현들을 풍부하게 사용하였다. 가장 특이한 것으로 예식서의 양식들은 성물의 전달의식(성직예물 증정porrectio instrumentorum)-사제직의 상징으로 성반과/또는 성배를 전달하는 것-을 포함하였다(일부 중세신학자들은 이러한 행동을 서품례의 본질적인 ‘질료’라고 이해하였다). 이 행동에 수반하는 문구는 ‘하느님께 희생[제의]을 봉헌하는 능력을 받으라’였다. 1550년 잉글랜드 양식은 다소 의아스럽게도 이러한 행동[전달의식-역자]을 포함하였지만, 지시문에서 추가로 ‘주교는 각 후보자들에게 성서를 전달한다’라고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 때에 수반하는 문구를 ‘회중[지역교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거룩한 성사들을 집행하는 권위를 받으라’로 변경하였다. 1552년 개정기도서는 더 나아가 성물의 전달의식을 완전히 삭제하고 성서의 전달과 이 때에 수반하는 1550년 양식의 문구만을 보존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크랜머의 새로운 성찬례 양식들-즉, 기존의 양식에서 희생에 대한 인식들을 제거하고 구조를 과감하게 재구성하였다-과 일치하였다. 크랜머의 성찬례 전례들에서 ‘희생’이란 두가지 기능을 갖는다. 기본적으로 희생은 해골산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자기봉헌을 의미하며, 이차적으로 이로 인하여 받은 은전들(은혜들benefits)에 대한 찬양과 감사인 하느님의 백성들의 자기봉헌을 의미한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로, 크랜머는 이러한 교회의 자기봉헌을 빵과 포도주의 상징들로 연상시키는 것을 의도적으로 배제시키고, 영성체후의 기도로 제한시켰다. 따라서 성찬례는 더이상 사제의 희생제의적인 중재와 수동적인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은전[은혜]을 받아 속죄[구원]받은 자들(the redeemed)이 공동으로 기념[억]하고 참여하는 의식으로 구상되었다.

    결과적으로 회중과 관련하여 사제의 활동에 대한 정의도 크게 바뀌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가치있는 배수와 경건한 존경에 관한 설교문’[공식설교집의 설교문-역자]의 첫 부분에서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그의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위하여 완전하고 충분한 희생을 하셨으며, 여러분의 죄를 완전하게 제거하셨다. 따라서 여러분은 그리스도 이외에 어떠한 다른 구세주, 구속자, 옹호자, 중재자를 인정해서는 안된다 [...] 여러분은 어떠한 인간의 도움, 다른 희생이나 봉헌, 희생제의를 봉헌하는 사제, 미사, 또는 인간이 만들어낸 수단들도 필요하지 않다’고 권면하였다. 이 모든 부정은 수단으로서의 서품받은 사목직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논쟁적인 상황에서 이러한 수단이 사목직의 유래 그리고 사목직이 공적인 증언을 제공하는 사건들과 어떻게 관련있는가를 분명하게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사실상 대사제로서 그리스도의 활동(직work)-그의 활동은 완결되고 완전히 충족되었다-에 대한 신학은 이전에 사목직의 신학의 항목(rubric)에서 서술된 것들을 상당히 흡수한다. 따라서 사제의 역할은 상대화되어, (잘못되어) 희생제의의 중재자로 인식되었던 것으로부터 말씀과 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구원적 은전들을 사목하는[ministering](또는 보다 나은 용어로 집행하는[administering]) 역할로 바뀌였다.

    따라서 성찬례의 상황에서 서품받은 사목직의 중재자 역할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자 활동을 실추시키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엄격한 제한과 조건들로 한정되었다. 이와같은 상황은 화해의 사목직에서도 나타난다. 새로운 성찬례 전례서들은 확실히 사적인 고백과 사면을 한 장소로 제한하였다. 또한 공식설교집과 그밖의 공식발표문들에서도 제한적인 역할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권위있는 위임은 하느님의 자애와 용서를 참회자에게 현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선언하는 위임으로 이해되었으며, 이러한 사목직을 실천하는 상황은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조직된 신앙공동체의 공적인 기도이다.

    2. 성공회 사목직 신학의 형성[출현]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전반에 잉글랜드교회의 신학적이자 제도적인(institutional) 발전과정에서, 사목직의 신학을 보다 명확하게 표현하고 통합 정리할 필요성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전례서들에서 나타난 성찬희생에 대한 크랜머의 작업은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종결시키지 못하였다. 특히 희생적인 언어는 전통적인(Catholic) 신학과 신앙활동(practice)의 자취들을 보존하였던 로드파 성직자들 뿐만아니라, 크랜머의 성찬례 신학을 보다 분명하게 따르는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보존되었다. 잉글랜드교회의 가장 지적으로 가장 예리한 칼빈주의 신학자인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도 성찬례가 ‘유사성이라는 면에서’ 하나의 희생[제의]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성찬례가 기념과 회중[교회]의 기념[례]이자 헌신적인 자기봉헌이라는 면에서 ‘영적인’ 또는 ‘축하의’ 희생이라고 확언함으로써 크랜머와 거의 같은 입장을 말하고 있다. 즉, 여기서 희생은 ‘속죄적인’(구원에 유효한propitiatory) 의미를 포함하지 않으며, 또한 공식발표문들에 나타난 사목직의 신학의 후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와 승천한 그리스도의 계속되는 사제직을 교회가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주장하는[매 성찬례에서 그리스도가 다시 희생제물로 바쳐진다는 이해-역자] 근거로 보려는 경향이 확산되었다. 소책자운동가들의 신학은 이를 확언함으로써, 서품받은 사목직의 제사장적인(priestly) 특성을 설명하는 근거로 확대시켰다.

    사목적 성직(ministerial order)이라는 면에서, 초기 종교개혁의 이상인 성서적, 성사적 그리고 목회적인 기능을 가진 제도적으로 임명된 계서적인 사목직(institutionally ordered and hierarchical ministry)은 두가지 방향에서 비판을 받았다.

    첫째 방향으로 로마 가톨릭 논쟁가들은 새로운 신학에 대하여 성공회의 성직들의 근거를 설명하도록 요구하였다. ‘낵스헤드 이야기’(Nag’s Head Fable 파커 대주교가 [런던] 칩사이드에 있는 낵스헤드 선술집에서 변칙적인 예식으로 축성을 받았다는 유언비어)의 유통은 이 점에 대한 실질적인 우려를 입증하였다. 1613년 성공회 변론가인 프린시스 메이슨(Francis Mason)이 출판한 반박서는 가상의 대화형식으로, 여기서 로마 가톨릭 논쟁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교회에 의해서 하느님의 소명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사도들]로부터 적법하게 계승된 권위를 갖는다. 만약에 당신이 그러한 권위를 가졌다면, 보여댤라, 우리에게 당신의 혈통[유래]을 보여주라, 우리에게 당신의 족보를 보여달라. 당신이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은 어디서 왔는가? 당신이 우리에게 하느님이 특별한 방법으로 당신을 세우셨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그러한 이야기를 빨리 믿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시오 [...] 프로테스탄트 새끼들을 부화시킬때, 정상적인 소명도 특별한 파송도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근거와 토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건축된 모든 것들은 무너진다.’

    성공회의 사목직신학의 일부 요소들은 바로 이 점에서 격심한 고통을 받았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까지 사목직의 정당성에 관한 성공회-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논쟁에서 사도성을 이러한 ‘족보’[계보]와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리고 성공회신앙은 아직도 19-20세기의 많은 저자들-R. C. Moberly등의 저자들 그리고 K. E. 커크(Kirk)가 편집한 <Apostolic Ministry>(1946)의 기고자들 포함-이 성공회의 성직들을 입증할 수 있는 계보의 역사를 추적하는 시도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또 다른 방향에서 잉글랜드의 퓨리탄파들은, 1662년 전례통일법의 제정까지 그리고 이를 넘어서 17세기말까지 지속된 논쟁에서, 여러가지 이유들로 에드워드 시대의 서품예식서들에 나타난 신학을 반대하였다. 이 집단의 우려는 새로이 설립된 교회의 서품예식서들에 나타난 사목직 신학이 완전히 개혁되지 못하였다는 점이었다. 즉, 새로운 사목직 신학은 성서적 표준을 벗어나 주교, 사제 그리고 부제의 세가지 성직을 재확언하였으며, 또한 종교개혁 이전의 모델들인 중재적인 제의적 사제직을 철저하게 개혁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더구나 신약성서에서 ‘특별한 사목직’에 대한 용어로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사제’(제사장priest)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 핵심적인 쟁점이었다. 이에 대하여 성공회[잉글랜드교회]의 변론가들은 ‘사제’라는 용어가 sacerdos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presbyter에서 유래한다는 주장을 자주 제기하였다. 따라서 사제라는 용어는, 후커가 제시하였던 것처럼, 회중[교회]에서 원로직 또는 지도자직을 의미할 뿐만아니라, 암시적으로 ‘복음이 고대의 희생[제의]들에 비유하였던(proportionable) 것, 즉 새로운 희생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신성한 몸과 피의 영성체(Communion)를 지시하는데 사용되었다.

    더구나, 퓨리탄파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서품예식서에 제시된 세가지 형태의 성직을 반대하였다. 즉, 때때로 부제직의 불확실한 지위에 대하여,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주교와 사제 사이의 구별[차별]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구별이 신약성서 모형인 사목자간의 동등성(parity)과는 반대된다고 주장하였다. 서품은 실제로 주교의 고유권한[특권]이었다는 사실(하지만 이러한 관행은 서품예식서 또는 신앙조항에 분명하게 보증되지 않았다)은 오랜 논쟁의 촛점이었다. 이 논쟁은 결국 1662년 전례통일법의 제정으로 종결되었다. 이 법률은 개정된 공동기도서[1662년]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ex animo) 동의를 하도록 규정하였으며, 더구나 ‘주교에 의한 서품으로 사제가 되지 않은 자’는 잉글랜드 왕국교회에서 합법적으로 교직을 보유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이 법률의 결과는 복원된 잉글랜드교회[성공회]의 공적인 사목직에서 상당수 성직자들을 배제시키는 것 이상이었다. 퓨리탄들은 이 사건을 1662년 성 바르톨로뫼 축일의 ‘대퇴출사건’(Great Ejection) 으로 기억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 법률은 잉글랜드 왕국교회의 종교개혁 공식발표문들에서 사목직의 근거들로 제시될 수 있었던 신학들을 무시하게 만들었다. 이후 몇십년동안 퓨리탄들중 적어도 온건파를 유인하기 위하여 보다 포용적인 사목직의 신학을 표현하려고 여러차례 시도-특히 리처드 박스터의 활동[저서]에서-하였다. 이러한 시도들의 실패는 비주교제 교회에서 서품받은 사목자들의 자격과 정당성을 인정하는데 넘어야할 어려운 장애물들을 제거하는데 실패한 시도들중 첫번째가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이 문제는 남인도교회와의 상통관계를 회피하려고 할 때에, 또는 세기지 성직을 보존하지 않는 교파교회들과의 통합제안들을 좌절시킬 때에 또다시 제기되었다.

    3. ‘여러분의 성직을 찬미하라’(Magnify your order)

    17세기말부터 20세기초의 에큐메니칼운동까지 성공회의 사목직 신학을 비국교도들이 수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심각한 쟁점이 아니었다. 18세기 전반기에 성공회는 사도적인 사목직을 소유하였다는 확고한 주장을 진전시켰지만, 사목직의 실천은 크게 쇠퇴하였다. 종교개혁 이전의 시기처럼 교직 소유자들중 상당수는 부재교직자들로 전도구교회의 사목적 의무들을 대리사제들에게 맡겼다. 세가지 서로 다른 요인들이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중반까지 사목직의 신학과 실제를 변화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첫째로 18세기 후반에 발생한 복음주의 운동은 기존의 사목적인 관행[실제]의 적합성에 의문을 제기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그들은 성공회신앙에서 왕정복고 이후 성공회신앙에서 나타난 사목직이해의 결점[문제점]들은 성직에 대한 지나친 강조 그리고 그리스도교 사목직의 기능과 상황에 대한 무시였다는 점을 입증하였다. 사실상 복음주의 부흥운동들은 종종 잉글랜드교회의 공식적인 사목직을 이탈함으로써 적대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법에 따라 그리고 올바르게 서품받은 사목직의 보유가 곧 사목적인[목회적인] 유효성 또는 성령에 대한 응답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의미하였다. 미국에서 갓 형성된 교회를 위하여 사목자들을 긴급하게 서품하기로 한 웨슬리의 결정은 17세기에 제기되었던 주교와 사제의 동등성 문제를 또다시 제기하였을 뿐만아니라, 변화된 상황에서의 사목직을 숙고하기를 꺼리는 교회당국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좌절감을 생생하게 대변하였다. 이 문제는 성공회신앙이 선교활동의 확대로 세계적인 교파교회로 발전하는 동안에도 여러차례 제기되었다.

    둘째로, Ecclesiastical Commission(왕국교회 특별위원회)의 활동은 19세기 전반기에 왕국교회의 행정적 법적 구조를 보다 확고하게 정착시킴으로써 국교회의 사목직을 부흥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예를들면 1838년과 1850년의 교직겸임에 관한 법률(Plurality Act)의 제정은 교직자의 비거주와 교직겸임 문제들을 제거함으로써 사목활동의 부흥에 간접적으로 기여하였다.

    세째로 이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옥스퍼드운동의 초기단계에서 사도적 계승에 대한 확고하고 실제적인 의미의 재발견은 이후 수백년동안 영국성공회에서 사목직의 신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8세기 성공회 호교론자들은 종종 사도적 계승이란 의미를 잉글랜드교회에 대한 내외적인 비판을 반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뉴먼과 다른 성직자들에게, 사도적 계승은 성직자들이 사목적 권위를 갖도록 요구하는 구호로 사용되었으며, 또한 소책자17호에서 말한 것처럼 ‘사목적 위임’을 ‘하느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위임’(trust)이라는 실제적인 의미를 복원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뉴먼의 생각대로 사도적 계승은 [성직]족보를 말하는 것 뿐만아니라, 책임에 대한 요구도 포함하였다. 확실히 <이 시대의 소책자>(Tracts for the Times) 첫호에서 뉴먼은 사도적 성직의 은총에 대하여 매우 열정적으로 말하였다.

    ‘성직자들중 일부는 그들의 신성한 임무를 입증되지 않은 그들 자신만의 주장에 의존한다. 일부는 그들의 인기에, 일부는 그들의 성공에, 일부는 그들의 세속적인 명예에 의존한다. 아마도 이 마지막 집단이 우리 시대를 상당히 지배하여 왔다. 필자는 우리가 우리의 권위가 세위진 진정한 기반 즉, 우리의 사도적 혈통(our apostolic descent)을 무시하여 왔다는 점을 우려한다.’

    그러나 ‘여러분의 성직을 찬미하라’(magnify your office)는 흥분된 명령은 ‘여러분의 신앙고백을 실천하라’(act up to your professions)-즉 그리스도에서 자신을 내어준 하느님에 대한 접근을 제공하는 사제직의 기능을 실현하라-는 명령과 나란히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후의 소책자운동가들은 복음주의 비평가들-리톤 등-처럼 150년전 성공회 호교론자들이 몰두하였던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제기하였다. 즉, ‘영국성공회의 사목직은 어떻게 권위을 갖게 되었는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두가지 요인들로 인하여 긴급한 문제가 되었다. 첫째로, 초기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역사적 연구들은 사도들로부터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사목직의 형태들이 2세기에서야 확립된 제도이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인준받았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이론을 다소 성공적으로 제시하였다. 독일의 그리스도교 역사학자들의 급진적인 연구에 의해서 또는 성공회 학자들-해치(Hatch), 라이트푸트(Lightfoot), 호트(Hort) 등-의 다소 가설적인 연구에 의해서 진전된 이 이론은 성공회 서품예식서의 서문에서 ‘성서와 초기교회의 저자들을 열심히 읽은 사람들 모두에게 사도시대부터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주교, 사제 그리고 부제라는 세가지 사목자의 직분(orders)이 있었다는 점이 자명하다’는 확언에 대하여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19세기말 이후로, 성공회의 사목직신학은 역사적으로 복잡하지 않았던 시기들에 가능하였던 방식으로 스스로의 정당성을 방어할 수 없었다.

    둘째로, 성공회의 성직에 대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반대는 1896년 교황의 교서 <Apostolicae Curae>의 공표로 확대되었다. 이 교서의 결론에서 ‘성공회 양식에 따라 집행된 서품들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분명하게 무효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이 교서의 발표는 이후 수십년동안 상당한 논쟁을 야기시켰으며, 상당수는 정당한 서품에 대한 실질적인 전제조건들에 관한 성급한 설명들이었다. 제2차 바티칸회의는 세계성공회를 ‘성직들의 성사의 결여 때문에 [...] 성찬례 신비의 순수하고 완전한 실재를 보존하지 못한’ 분리된 교회들중 하나에 포함시켰지만, 이 회의는 사목직과 사제직의 신학을 공동으로 탐구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제공하였다. 적어도 하나의 시각에서 보면, 이 회의는 성공회-로마 가톨릭교회의 대화를 새로운 상황에 맞는 주제로 고정시켰으며, 성공회 교회에 새로운 방향들에서 사목직을 숙고하도록 제시하였다.

    4. 현대의 문제들

    사목직에 대한 성공회의 이해의 역사는 최근까지 주로 논쟁적인 관심사들-희생적인 사제직의 정당성, 성공회 성직들의 위임 또는 ‘족보’문제, 주교직의 보존-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보다 최근의 경우 토론의 주제들은 일반적으로 당파적인 입장에 따라 당파의 신학들을 구체화하고 옹호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성공회내부에서 그리고 다른 전통들[교파들]과도 내용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분야들을 확립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현대 성공회의 사목직신학은 자의식적으로[의도적으로] 에큐메니칼 상황에서, 때때로 교파간의 위원회 보고서의 형식으로 구체화되고 있기 때문에,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기본적인 공통주제들중 일부를 공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예를들면, 최근의 연구에서 주로 논의되었던 사목직의 그리스도론적인 배경은 성공회의 문서들도 포함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과 자기봉헌은 사목직이 하느님과 인간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점을 완벽하게 표현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목직은 [...] 바로 이 원천과 모델로부터 분명해진다’ 또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유일하시다. 그 분은 우리의 하나뿐인 대사제(High Priest)이시다. 그리스도교회의 사제직 그리고 교회 사목직의 사제직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서 유래한다.’

    더구나, 사목직을 성직과 일치시키는 이해에 대한 전반적인 불만,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서품례가 아니라 세례를 통해서 사목직을 받는다는 쇄신된 세례중심의 신심과 영성은 서품받은 사목직을 특별한 권능들-제의적 또는 다른 것들-의 소유라는 면에서 정의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전체 백성들의 사목직 안에서 서품받은 사목자가 수행하는 특별한 기능들의 측면에서 정의하는 진술문들에 합의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사목직에 대하여 다양한 용어들이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하느님의 백성들의 ‘[전례]주재자직’(presidency), ‘지도자직’(leadership), 그들의 자원들의 ‘관리자직’(management) 그리고 백성들이 ‘그들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하고’ 전체 교회의 사제직(priestliness)에 ‘촛점을 맞추는’(focusing) 역할. 개정된 성공회의 서품예식서들은 일반적으로 서품받은 사목직의 존재와 실행은 신앙공동체의 집합적인 사목직과 분리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1980년 영국성공회 대안예식서의 서품예식서는 서품기도를 ‘전능하신 하느님은 모든 세상을 통해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들을 왕적인 사제직, 전세계적인 교회로 만드셨기에 우리는 당신께 찬양과 영광을 드립니다’로 시작하였다. 또한 미국성공회의 1979년 기도서는 평신도들을 사제서품 후보자들의 추천인들에 포함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회신앙은 계속해서 서품을 신앙공동체의 위임(위촉delegation)이라는 실용적인 해석들에 계속해서 반대한다. 예를들면, 성공회-개혁주의교회(Reformed) 사이의 대화 보고서인 <God’s Reign and Our Unity>는 ‘사제들’이 ‘그들의 사제적인 직분(office)을 전체교회의 사제직과는 분리됨 없이, 또한 전체 몸[교회]의 사제직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고’ 실행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ARCIC의 <최종보고서>는 서품받은 사목직이 ‘그리스도인의 공통적인 사제직의 연장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들의 또다른 영역에 속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리스도교회의 공통적인 사제직의 재발견이 준 주요한 영향들중 하나는 ‘사도성’에 대한 이해를 본질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실상 사도성은 단순히 서품받은 사목직의 특정한 형태들의 존재를 보호하는 것뿐 아니라, 오히려 사도적인 복음과 선교와 세상에의 봉사에 충실하는 전체 [그리스도]교회의 생활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서품받은 사목직의 사도성은 신자들 전체 몸[교회]의 사도성의 한 기능이다. 더구나 사도성은 비역사화되었다. 즉, 서품받은 사목직의 사도적인 성격은 그리스도와 사도들로부터의 가시적인 계승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적인 기능들을 계속해서 수행하는 것에 근거한다. 원시그리스도교에 대한 현대의 해석들에 의하면, 성공회의 사목적인 성직에 대한 전통적인 옹호론-모벌리(Moberly)의 <Ministerial Priesthood>과 램지의<The Gospel and the Catholic Church>-은 이상주의자의 입장이다. 현대의 성공회 신학자들은 성직들의 역사적인 정당성을 추구하지 않으며, 대신에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특성과 필요성에서 나오는 주장들을 더욱 선호한다.

    따라서 사목직의 신학에 대한 최근 활동들의 영향은 전통적인 경계들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특히 ARCIC의 1973년 발표문인 <Ministry and Ordination>는 성공회 성직 등에 대한 Apostolicae Curae의 판단을 분명하게 무시하였다. 이는 다른 곳–그리스도의 대사제직과 모든 신자들의 사제직과 관련하여 서품받은 사목직의 여러가지 이미지들에 대한 공동의 확언들에서-에서 대화의 시작때에 나타났다. 즉, ‘사목직의 본질에 대한 합의는 사목직의 상호인정을 고려하는 것 이전의 문제이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첫째로, 여성의 사제직 서품 문제이다. 평신도의 사제직에 관한 논쟁들처럼, 여성의 사제직 서품에 관한 논쟁도 다른 곳에서[교회밖에서] 유래한 제도적인 모형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리스도교에 도입된 잠재적인 왜곡들에 교회가 커다란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여성의 사제서품은 전적으로 오늘날의 보다 큰 토론인 하느님에 대한 남성적인 언어와 이미지의 이념적인 성격비유적인 표현의 이념적인 성격과 이에 따른 사회적인 구조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일부 성공회신자들-특히 북미주와 일부 영국인들-의 경우, 성직을 남성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은 복음의 포괄성과 분명하게 모순되었다. 다른 성공회 신자들의 경우, 이 문제는 적법한 사도적인 사목직의 결정적인 특성들 그리고 로마교회의 성공회성직 수용가능성에 관한 논쟁을 제기한다. 사목직에 관한 발표문(1973)에 대한 1979년의 <해설>(Elucidation)은 ‘서품받을 후보자의 자격문제’ 이전에 ‘서품받은 사목직의 기원과 본질’에 대하여 합의하려고 시도하였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반응은 이러한 구별을 찬성하지 않았으며, 또한 성공회의 일부 관구들에서 허용한 여성의 사제서품과 최근의 주교서품은 세계성공회내의 갈등원인이 되었을뿐 아니라, 초교파적인 대화에서도 장애물이 되었다.

    둘째로, 성찬례의 희생적 본질과 이와 연관된 성찬례 집례자의 사제적인 성격 (priestliness)에 대한 정의는 여전히 논쟁의 문제들로 남아있다. 사목직의 신학처럼 성찬례의 신학도 성서와 전례의 관한 활발한 연구의 영향-특히 교회의 성찬례 행동과 그리스도의 희생과의 관계에 대한 역동적인 개념의 발전으로-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이런 점에서 성찬례의 기억례[기념례]은 ‘역사적인 희생의 반복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다면, 성사적인 의미에서’하나의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기념례[기억례]이기 때문에,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말씀[제정사]을 암송하고 회중들에게 거룩한 선물들[성찬]을 분배하는 집례사목자의 행동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자신의 봉헌때에 하셨던 행동과 성사적으로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두 전통들[성공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역자]은 공통적으로 서품받은 사목직을 말할 때에 사제적인 용어를 사용한다.’

    이러한 이해의 결과는 성공회신앙에서 로드와 앤드류스 이후로 사제가 기념적인 희생으로 성찬요소들을 하느님에게 봉헌한다고 주장하였던 전통에 보다 커다란 권위를 부여하였다. 1980년대 중반 영국성공회의 한 보고서인 <the Priesthood of the Ordained Ministry>는 이러한 전통을 크게 강조하였으며, 또한 이러한 전통은, 영국성공회의 16세기 공식발표문들에서 그 존재감이 취약하였더라도, 찰스시대부터 성공회신앙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세째로, 세가지 성직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분명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세가지 성직은 대다수 성공회 교회들의 실제에서 그리고 전례적인 규정에서 거의 원칙으로 확립되었으며, 종종 그리스도교회의 통일성, 보편성(공교회성catholicity) 그리고 사도성을 나타내는 최고의 도구로 간주되어 왔다. 이러한 권위는 20세기의 에큐메니칼신학이 주교, 사제(presbyter) 그리고 부제의 형태를 크게 강조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세가지 성직의 구성요소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즉, 성공회신자들은 일반적으로 사목직의 세가지 성직을 고수하면서도 성직들의 내용은 논쟁의 문제로 남아있다. 주교와 사제와의 관계(예를들면, 견진례의 집례에서), 또는 부제와 사제와의 관계는 새로운 논쟁의 문제이다. 성공회의 실제[관례]는 서방교회의 중세기 모델인 지방중심의 주교직, 흔적만 남은 부제직 그리고 기본적인 지역교회 사목직으로서의 사제직(presbyterate)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형태는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세가지 성직과, 종종 이와 관련된 사제직의 중심성은 일부 성공회신자들에게 전통적으로 표준적인 구조밖에 있는 사목직들(기도를 담당하는 남자와 여자 신자들, 교사들, 또는 전도자들)을 인정하는데 장애가 되었다. 성공회신앙은 이러한 사목직들을 영구적이고 순수하게 사도적인 직분으로 확언할 수 있는 수단을 결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종종 성공회의 성직체계[세가지 성직]는 사목적인 관행[관례, 규정밖의 직분들]을 포용하는데 충분하게 유연하지 않음을 발견한다. 실제적인 문제들과 산학적인 문제들을 극복해 나가는 일은 사제직(presbyerate)의 본질에 대한 재평가 뿐만아니라 성직(office)과 사목직과의 관계를 보다 엄밀하게 조사하는 것을 포함한다.

    참고문헌

    Bradshaw, P. F., The Anglican Ordinal: Its History and Development from the Reformation to the Present Day. SPCK, Lomdon,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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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chlin, E. P., The Story of Anglican Ministry. St Paul’s, Slough,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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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lmes, U. T., The Future Shape of Ministry. New York, 1981.

    Hughes, J. J., Absolutely Null and Utterly Void. London, 1968.

    McDonald, D. R., Toward a Theology of Priesthood. New York, 1982.

    Moberly, R. C., Ministerial Priesthood, new edn. SPCK, London, 1969.

    Ramsey, A. M., The Gospel and the Catholic Church. Longman, London, 1936, 1955; SPCK, London, 1990.

    Sykes, N., Old Priest and New Presbyter. CUP, 1956.

    2012년 8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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